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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2장
1.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1-3)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진리로 여긴다면,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습니다. 말씀에 순종할 마음도 없으면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진리로 인정은 하되, 진리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곧 진리라고 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기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고집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는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의 말씀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듭니까?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셨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마음에 드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들으면서, 내 마음에 들고 기분 좋은 말이면, 서슴없이 아멘하면서, 자신의 속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자리에 오셔서 설교하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말을 들을 수 있고, 여러분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말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멘’이라는 반응이 서슴없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그런 말씀을 전하셨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진리의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진리에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할 수 없이 진리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 하나하나에 마음이 끌리고, 그 말씀에서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게 되는 사람들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성령에 의해 마음이 새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었다는 것은, 세상이 소망 두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게 된 마음을 뜻합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은 예수님께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안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새롭게 된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소망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죄에서 건져주실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죄에서 건짐 받는 것이야 말로,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보다, 더 큰 은혜임을 아는 것이, 새롭게 된 마음인 것입니다.
3절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주의 인자는 아무나 맛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새롭게 됨으로써, 자신의 죄를 알게 된 그 마음이, 주의 인자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에 속해있던 우리의 실상이고, 그런 우리가 주의 인자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자가 되었음을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세상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세상에 우리가 보지 못한 신기한 일들이 많다고 하지만, 그 어떤 신기한 일도 죄에 속함으로, 멸망의 자식이었던 우리가, 예수님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놀라운 일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의 인자하심에 대해 시큰둥합니다. 성도는 주의 인자하심에 대한, 자신의 이런 반응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않아야 합니다. 주의 인자가 크신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주의 인자에 대해 시큰둥한 것에 대해, 애통함과 안타까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를 바라보는 성도의 옳은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1-2절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악독이나, 기만, 외식, 시기, 비방 등은, 옛 사람의 특성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새롭게 된 마음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들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새로운 마음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만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도가 세세토록 영원한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로 위로하고 감사하는 자로서,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무엇이 나오는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성도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세세토록 있는 말씀을 뜻합니다.
따라서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말은, 말씀은 말씀을 사모하는 자로 하여금, 악독을 버리게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의 말을 버리게 하는 것이, 곧 세세토록 있는 주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세토록 있는 말씀은 성도로 하여금,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갓난아기들처럼 사모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갓난아기들이 젖을 사모하는 것은, 배고픔으로 인한 본능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말씀을 사모하는 것도, 말씀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지, 계획되고 계산된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를 맛본 사람이라면, 갓난아기처럼 말씀을 사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는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성도가, 자연적으로 추구하게 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에 맞는 대로, 자기 기분 따라 살아가는데, 주의 인자를 맛본 성도는, 자기 기분이 아니라 말씀에 이끌려,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이끌리고, 말씀을 사모하는 자로 살아가기에, 말씀에 의한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서는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 등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버리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그러한 것을 버리고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들이 나타날 때, 그것을 통해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자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볼 것을 말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하였으니, 구원을 받기 위해, 신앙이 날마다 자라가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택하심과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함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미 구원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10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러므로 장차 구원을 얻기 위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긍휼을 얻었고, 구원 안에 있는 것이 성도라면, 성도의 삶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오직 주의 인자를 바라보고, 영생을 향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성도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면, 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까? 분명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9절의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떤 형편에서든, 주님만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2.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 베드로전서 2:4-8 (426)
여러분은 여러분께 쓸모없는 것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아마 모두 버릴 것입니다. 쓸모없는 것이 내게 있다는 것은, 무척 거추장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쓸모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합니까?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것인가, 필요 없는 것인가로 판단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을 합니까? 예수님이 여러분께 과연 없으면 안되는 귀한 분으로 존재합니까, 아니면 쓸모없는 분으로 존재합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받으셨던 대우는,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되어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4절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은 돌입니다. 건축자들의 용도에 전혀 맞지 않은 돌이어서, 버려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입니다. 결국 세상은 보배를 보배로 알아보는,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보배로운 산 돌을, 쓸모없는 돌로 취급하고 버려버린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는 보배로운 돌인데, 왜 세상이 볼 때는 쓸모없는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용도가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대속물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대속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죄인들에게, 예수님은 보배로운 산 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대속물은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죄 용서가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영웅적인 메시야였습니다. 자신들을 세상에 우뚝 세워줄, 메시야를 손꼽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은, 그들의 용도에는 전혀 쓸모가 없었습니다. 영웅도, 힘있는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죄 용서를 위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 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전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합니다. 영육의 구원을 말하면서, 죄용서와 함께 육신의 복을 위해서도 오신 예수님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결국 천국을 위한 용도로서의 예수님과, 세상에서 복을 받고 괜찮게 살기 위한 용도로서의 예수님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오직 죄 용서를 위해, 십자가 지고 죽으신 예수님은, 환영할 수 없는 예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보배로운 산 돌이십니다.
성도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죄 용서만 생각한다면, 예수로 말미암아 죄 용서 받고, 의인으로 여김 받는 성도는, 영광스런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죄인 됨을 인식한다는 것은, 죄인이라는 것 때문에 무기력에 빠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알고, 큰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를 입혀 주신 주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면서 나그네 길을 가는 것이 성도인 것입니다.
곧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본다고 해도, 나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의 평가 기준으로 자신을 보게 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5절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는 말씀은, 너희가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평가할 때는, 초라하고 볼품이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고 해도, 하나님께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이 부러워할 만한 것을 소유하였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성도의 가치는, 그것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닌 만큼, 세상의 것이 풍족하다고 해서 교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러한 기준으로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화려한 예배당 건물보다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자라고 해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지체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로 모이는, 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전혀 반대로 흘러갑니다. 가난한 성도 열 사람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은, 교회에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부자 한 사람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면, 교회에 지장이 있다고 여기는 사고방식이야 말로,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것을, 쓸모없다고 버리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포기하지 않고 찾으시는 분임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성도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고 버려버렸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믿음이 귀하게 여김 받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함께 미움을 받을 뿐입니다.
그런데 나그네라고 하면서, 세상에서 높임 받고자 원하는 욕망이 살아있다는 것은, 입술로만 나그네라고 말할 뿐, 나그네로 사는 것은 포기한 것입니다.
성도는 신령한 집입니다. 성전입니다. 그래서 성전인 성도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어야 합니다.
성전에서 하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성전이라면, 필히 있어야 하는 것은, 신령한 제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래서 성도 가운데 제사장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성도 모두가 9절에서 말한 대로,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두가 동일한 영광 아래 있고, 똑같은 지체로서 동일한 위치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목사든 장로든 평신도라고 일컫는 성도든, 모두가 동일한 주님의 영광을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하는 것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신령한 제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제사를 드리지 않은 제사장은, 제사장의 역할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는 무엇입니까? 신령한 제사는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을 뜻합니다. 특별한 행동이나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아래 자신이 죽은 자임을 깨닫고, 주님 가신 길만이 내가 가야 할 길임을 발견하고, 주님 은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제사를 드리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생명을 공급하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안에 있는 성도는, 성경을 보든 기도를 하든, 모든 것은 예수안에서 되어지는 일이며,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생명현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에게 예수님은 보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6-7절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쓸모없는 돌이지만, 주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성도에게 주님은 보배로운 분입니다.
3. 너희를 불러내신 뜻(9-10)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게 된다면, 그것부터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모두, 자기만족과 행복을 위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향할 뿐, 인간의 만족과 행복과는 연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고 산다면, 그것은 자기만족과 행복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현대 인간에게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기이한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자기만족, 그리고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행복과 연관이 없다고 할 때, 분명 많은 사람들은, 반발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만족을 꾀하고, 자기 행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한순간에 신앙의 이유와 목표를, 잃어버리는 말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신,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그 뜻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9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곧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를 백성으로 불러내시고,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은, 우리를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시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나,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미 자신에게 모든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자가, 하나님께로 그 관심을 돌린다는 것은,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 인생의 참된 가치와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을 자기만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고, 참된 생명을 얻은 것에서, 찾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인간됨이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기적의 사람인 것입니다.
성도는 성도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먼저 성도라는 신분은, 우리가 원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의 힘으로 얻은 것도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교회를 하나 정하고, 출석하는 사람을 일컫지 않습니다.
성도는 맹목적으로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불러냄을 받았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내셨음을 알고, ‘왜 나를 불러 내셨는가?’에 대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자신만을 향하던 관심이, 하나님을 향하기 시작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란 바로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1:2절에서 성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성도는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택하신 자입니다.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살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게 하기 위해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나 한 사람 천국 보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성도를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성도라는 존재를 추켜세우거나, 높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가 어떤 존재로 부름을 받았는가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성도에 대한 이같은 여러 표현들은, 성도가 하나님께 얼마나 큰 은혜를 입은 존재인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은혜는 은혜로 여기지도, 그리고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내 욕심이 채워지는 것을, 은혜로 여기는 것이 우리의 습성입니다.
출 19:5-6절을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에 대해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과는 구별된 거룩한 나라로 부름 받은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거룩한 나라로 구별하시고 부르신 것도,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세워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택하신 족속이라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성도를 세상의 모든 족속 중에서, 특별히 구별하시어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기 때문에, 성도를 결코 방치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이 아닌가, 나를 그냥 방치하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 택하심을 입은 자라면,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이 중지 되지 않는 이상, 택하신 족속을 그냥 방치하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입으신 영광에, 성도가 참여될 것임을 뜻합니다. 영광에 참여될 자로 부름 받았기에, 어떤 시련가운데 있다고 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에게 주어진 영광은, 예수 안에서 약속된 영광이지, 세상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예수 안에서 약속되어진 영광을 소망하며 살아감으로써, 세상이 추구하는 영광은 헛됨 것임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10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나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것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백성이 아니었던 자신을 생각해야 하고, 긍휼과 상관없던 자신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얼마나 크고 귀한 은혜인가를 잊지 않게 될 것입니다. 부름 받기 전에 처해있던 어둠과 비참함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생각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함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는 어려움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존재인가를 알게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단지 어려움에 있는 성도를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라, 어둠에 있던 자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분의 아름다운 것을, 세상에 선포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함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나타내고 증거 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할 일은, 자신이 처한 모든 환경과 형편에서, 성도에게 입혀진 은혜와 긍휼과 사랑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가 어려움으로 인해 낙심하고 절망한다고 해도, 그냥 두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힘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내 이익과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이 어떠한가를, 증거 할 자로 굳게 세우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신뢰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4. 사랑하는 자들은(11-12)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성도를, 특별한 존재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성도를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말하면서, 세상에 속한 자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성도임을 증거합니다.
또한 10절에서도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고 말하면서, 애초에 백성 아닌 자가 백성이 되고, 긍휼을 얻지 못한 자가 긍휼을 얻게 되었음을 말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부여받은 것이 성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성도라고 일컫는 우리 자신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은총에 대해 별 느낌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감사하다고 하면서도, 은총을 입게 된 감사가, 우리의 속에 살아있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말할 수 없는 은총을 받았으면서도, 왜 기쁨이 없을까요? 그것은 관심을 땅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의 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고, 땅의 것을 소유함으로 삶의 기쁨과 보람을 누리기를 원하는 욕망 때문에,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은총을 받았으면서도, 기쁨을 잃고 사는 것입니다.
본문 11절도 보면 성도를 가리켜서,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부름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성도들을 사랑한다는 말이 되지만,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라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성도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관계에 의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의 사랑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베드로의 말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들아’라는 의미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거류민과 나그네와 같은’이라는 말을 합니다. 곧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들의 처지가, 거류민과 나그네와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데, 환경적으로 나아진 것은 전혀 없고, 오히려 초대교회 성도들의 입장에서도, 더 나빠졌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런 처지에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다’라는 기쁨과 감사를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땅에서 주어지는 환경이나 형편을 가지고, 확인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자신의 환경을 좋게 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땅에서 잘되고 편안하게 살고, 걱정 근심 없이 사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 때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데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을 때, 결국 믿음에도 흥미를 잃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나 자비에 대한 것에서도, 마음이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사탄의 시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욥기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처럼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며, 욥의 신앙을 칭찬합니다. 그러자 사탄은 욥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는가 라며, 하나님의 말에 대해 반발을 합니다.
결국 사탄의 사고방식은, 인간은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치도록 허용하심으로써, 욥의 신앙이 손에 주어진 재물 때문이 아니었음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난 받게 되는 욥의 처지가, 세상이 볼 때는 하나님께 벌 받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떠났기 때문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욥에게 회개하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재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변하지 않은 욥을 통해서, 영광을 받고자 하신 것입니다. 곧 하나님은 욥을 믿으신 것이 아니라, 욥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을 믿으신 것이고, 욥의 믿음을 세상에 증거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린 이런 내용에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고통과 시련에서 살게 하신 그 뜻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거류민과 나그네와 같이, 땅에서 보잘 것 없고 내 놓을 것 없는, 초라한 삶을 살게 놔두시는지, 그 높으신 뜻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2절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고 말하는데, 과연 성도가 이방인 중에서 가져야 할, 선한 행실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어떤 형편과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천국을 소망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어떤 형편에서도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살아감으로써, 믿음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고, 눈에 보이는 세상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천국이 있음을 증거하게 하심으로써, 천국을 보지 못하는 세상을 정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가면서도, 소망하는 천국 때문에, 낙심도 원망도 하지 않고 변함없이, 날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시련으로 밀어 넣으시고, 시련에서도 천국을 소망할 수 있도록, 믿음으로 간섭하시고 붙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쉬지 않고 일하신다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가 곧 하나님의 증거물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께 모든 희망을 두고, 약속의 나라인 천국을 소망하는 자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육체의 정욕이, 성도로서의 삶을 방해합니다. 항상 땅의 것으로 걱정하고 불평하게 하고, 남보다 더나은 삶을 추구하게 하면서,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에 대해 감사함을 잃게 합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부르신 백성의 모습으로, 고쳐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세상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존재로, 세우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러한 의지에 붙들려 있다는 것이야 말로, 구원의 확실함이며,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은총인 것입니다. 성도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세상에 남겨 두심으로써,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심으로써, 세상이 알지 못한 다른 세계가 있음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날 주어진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 것은 어떤 형편과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고, 긍휼을 얻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임을 잊지 않는다면,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성도로 살 것입니다.
5. 세상과 성도(13-17)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에서, 성도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이, 성도의 입장을 생각하고, 성도의 편리를 봐주고, 성도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의 제도가 성도에게는 불리하고, 불이익을 주는 것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 과연 성도는,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가가, 항상 고민거리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런 문제를 생각하게 해주는 내용입니다.
13-14절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사도가 이러한 얘기를 하는 당시 형편은, 믿는 자가 지금 우리처럼 편안한 환경에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을 이유로 로마 황제로부터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세상의 제도는, 믿는 자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왕과 총독 또한 성도 편이 아니라, 오히려 성도를 박해하는 원수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사도는 그런 형편에 있는 성도들에게, 세상의 모든 제도에 순종하고, 왕이나 총독들에게도 그리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은 형편에 처해 있다면, 사도의 말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세상의 제도가 분명 부당하고, 왕과 총독들 또한 믿는 자를 박해하는데, 그런 그들에게 순종하라는 사도의 말이, 뭔가 불합리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로마서 13:1-2절을 보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세상의 권세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할까요? 세상의 권세와 제도에 복종하되, 선한 제도에만 복종하고, 악한 제도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것이 옳을까요?
그러면 선한 제도, 악한 제도는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결국 기독교에 유익이 되는 것은, 선한 제도, 반대로 기독교에 불리하다고 여기는 것은, 악한 제도라고 규정하지 않겠습니까?
이 땅에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반 하나님적인 권세도 있습니다. 이런 권세에는 목숨을 빼앗길지라도, 불복해야 합니다. 그런 권세가 요구하는 명령은 적 그리스도적이요, 사탄의 사주를 받은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목숨을 빼앗기면서도,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기 위하여 로마 제국의 명령에 불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교회도 헌금에 대해 세금을 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분명 기독교를 박해하기 위한 부당한 법이라고 하면서, 반발할 것입니다. 물론 헌금도 수입이니까 세금을 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타종교의 헌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거나, 교회는 세금을 두 배로 내야 한다는 제도를 정한다면, 그래도 순종할 마음이 나겠습니까? 하지만 사도의 말이 그런 경우에도 순종하라는 의도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무리 성경 말씀이라도, 부당한 제도에 대해서는 순종할 수 없다는 마음이 앞서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세금 문제로 질문을 한 내용이 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두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이사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 동전은, 가이사의 것으로 인정해주라는 것입니다. 동전이 가이사에게 돌아갈 것이 있고, 하나님께로 가야할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가이사가 만든 동전은 가이사의 것으로 여겨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가 달라고 하면 줘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두고 이해한다면, 앞서 말한 대로 국가가 교회에게 세금을 내라고 한다면, 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왜 다른 종교에게는 세금을 내라고 하지 않느냐고, 반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설사 두배로 내라 할지라도, 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우리는 자유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 매이지 않았고, 돈에 매이지 않았음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돈에 매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만을 증거 해야 할, 하나님의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돈에 매어 있고, 세상과 똑같이 돈에 대해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의 제도에 대해 순종하지 못하게 됩니다. 돈을 뺏기지 않고 지키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노력들이 결국 수입을 적게 신고하여, 세금을 줄이려고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모습들이야 말로,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사도가 세상의 모든 제도에 순종하고, 왕과 총독에게도 그리하라는 것은, 성도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임을 증거하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당할 수밖에 없는 제도에 순종함으로써, 성도는 세상 것을 위해 살아가지 않음을 증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을 보면, 사도는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해 순종하라고 합니다. 세상 제도에 순종하는 것이, 주를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해서 세상 제도에 대한 순종이, 주를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까?
14-15절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세상의 왕과 총독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권세를 주고 세워서, 악행 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상주게 하시면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곧 왕과 총독도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세워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회의 질서도, 인간의 힘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운 왕과 총독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세상은 자신들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고 무지한 말은, 하나님이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세상을 지키고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성도는 비록 자신에게 불리한 것이라고 해도, 왕과 총독도 하나님이 세워서 세상을 다스리고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를 위한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제도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봐야 합니다. 아무리 성도에게 불리한 제도라고 해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세운 권세자들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제도가 아무리 성도에게 불리하다고 해도, 그 제도가 성도를 하나님에게로부터 끊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모든 제도에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불리한 제도에는,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세상의 의식으로 살아간다면, 본문의 말씀에 대해서는 귀를 막아 버릴 것입니다. ‘성도가 무엇인가?’보다는, 자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것이 곧 성도임을 생각한다면, 주를 위해 육신의 어떤 손해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도가 가야하는 길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이 길을 가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속한 성도에게는, 억울한 일도 불리한 것도 없습니다. 다만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께 속한 사람다움을 증거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으로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 곧 성도인 것입니다.
6. 사환들아(18-20)
지난 시간에는 세상의 모든 제도에 순종하고, 왕과 총독에 대해서도 그리해야 하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의 제도가 우리의 생각에 옳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불리하고 손해를 주는 제도라고 해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불합리한 제도라 할지라도, 세상 제도에 순종함으로써, 성도가 추구하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님을 증거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18절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여기서 말하는 사환은 종을 뜻합니다. 종으로서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만약 자신을 괴롭히는 악한 주인을 만나게 되면, 비록 겉으로는 순종한다고 해도, 그 속마음은 복수심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순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종의 입장에 있는 성도에게,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에게만 순종할 것이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 곧 자신을 괴롭히는 주인에게도 그리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사도의 이러한 말 역시, 종의 입장에 있는 성도라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괴롭히는 주인에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 모든 것이 나그네로 부르신 성도로 하여금, 나그네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나그네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끊임없이 세상으로부터 나그네의 삶을 방해 받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이 있습니다. 이 청년은 영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부자 청년에게 근심이 되어, 결국 예수님에게로부터 발길을 돌리고 맙니다.
자, 영생을 얻고자 하는 부자 청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붙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가 소유하고 있던 재물이었습니다.
곧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고자 했지만,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라도, 얻고 싶은 영생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다가, 영생을 하나 더 보태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있어서 영생은 무엇입니까? 부자 청년처럼 자신이 소유한 많은 것 중 하나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영생에 대한 이러한 가치관이, 나그네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의지와 결단으로는, 버리지 못하는 것을 빼앗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부름을 받았지만, 내 욕심으로 인해 나그네로 살아가지 못하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직접 나그네의 길로 밀어 넣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지, 우리가 원하는 삶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의 개입이나 간섭을, 자신들이 원하는 인생을 만들어 주기 위한 것으로 오해합니다. 이것이 애초부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부름 받은 것이 성도라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인간의 상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하나님은, 백이면 백 거짓된 하나님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신에 대한 인간의 상식이라고 해봐야, 결국 인간의 욕망을 바탕으로 구축된 것일 뿐인데, 성경 어디에 인간의 욕망을 성취해 주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얘기합니까?
거의 모든 교회가 교회 부흥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과연 이것이 성경에 의해서 주장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인간의 상식에 의해서 주장되는 것입니까? 성경에 의해 주장되는 것이라면, 교회 부흥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내용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그러한 내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현대인들에게 성경은,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보여주는 도구로 삼을 뿐, 실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상식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님 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신다면, 결국 하나님이 부르신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로 존재하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나그네로 부르신 자기 백성을, 나그네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 자기 백성을, 박해 가운데 밀어 넣으시고, 방랑하는 자가 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한 일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세상에 미련두지 않게 하시고,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세상의 것을 소유하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니고, 또 소유한 것이 전혀 없다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에게는 세상을 나그네로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면, 오히려 그것이 선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나그네로 살도록 도와주시는 일이 내게 있는 것을 빼앗고, 나로 하여금 방랑하게 하시고, 종으로 살게 하시는 결과로 남는다고 해도, 선한 하나님의 일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돈을 벌고 잘사는 것을, 세상은 복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선한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결코 좋은 것도 선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그네의 삶에 도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감사하면서, 더욱 주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종으로 살게 되고, 소유한 것이 없이 힘든 삶을 살게 된다고 해도, 이것이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서, 나그네로 살도록 도우신 결과임을 깨닫고,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종의 처지에 있으면서도,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종으로 살게 되는 것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그네의 삶으로 인도하신 선한 일의 결과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성도에게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19-20절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나그네로 부르신 자기 백성을 나그네로 살게 하시기 위해,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고, 슬픔을 참으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이것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사는 것이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여러분의 형편이 어렵고 힘들다고 해도, 낙심하거나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비록 육신은 고달프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나그네로 하여금 나그네의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21절 말씀대로, 하나님은 성도를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오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이며, 이러한 선하심을 알기에, 성도는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7. 영혼의 목자에게 돌아온 자(21-25)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자기만의 세계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세계가 주어지지 않고, 원하지 않은 전혀 다른 세계로 끌려갈 때,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우리의 세계를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세계로 우리를 끌어가십니다.
그것을 21절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분명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살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러한 부르심에, 마음으로 동의하십니까? 아니면 반발하고 거부하고 싶으십니까?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가는 삶은, 우리의 계획에는 없는 삶입니다. 우리의 계획은 세상에서 성공하여, 남부럽지 않게 많은 것을 누리며, 행복이라고 이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가는 삶에는, 우리의 꿈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결국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삶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나의 꿈도 계획도 모두 포기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마음에 듭니까? 예수님이 세상에서 어떤 길을 가셨습니까?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알겠지만, 그래도 본문 구절로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22-24절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 곧 예수님이 세상에 남기신 자취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남기신 이 자취에, 우리의 마음에 맞는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욕을 당했으면 두배, 세배로 되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우리들이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해를 입히면, 그를 위협해서라도 막고자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우리들의 속성과는 전혀 반대로, 욕을 당으시고, 위협하지 않으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시고, 친히 온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신 자취입니다. 그리고 그 자취를 따라가는 자로 부름을 받은 자가 성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세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채찍에 맞으심으로, 내가 구원 받는 것은 좋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 나와는 상관이 없기를 바랍니다. 곧 예수님에게서 단 것은 받고, 쓴 것을 받지 않겠다는 심보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고난의 덕을 보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취를 따라가게 함으로써, 주님의 고난을 계속해서 세상에 증거 할 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이 죄를 담당하심으로, 우리는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았으며,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았다는 것은, 죄는 행하지 않고 의만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죄를 기뻐하고 죄를 소망하는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의를 기뻐하고 소망하는 자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우리를 이러한 자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대해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이, 더 이상 죄에 속한 자가 아니고, 의에 속한 자가 된 것이며, 이 모두가 말할 수 없는 은혜며 기쁨임을 아는 성도라면, 예수님이 가신 자취를 마다할리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부르셔서 살게 하시는 세계를 꺼려하고, 자신의 욕망이 살아 춤추는 자신의 세계를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를 의에 대해 산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채찍을 맞으시고,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도는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신 분이 이끌어 가시는, 세계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욕을 먹으면서도 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주님처럼 약자의 길을 가는 것이, 우리에게 놓여 진 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의 목자이시고 감독이 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알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25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성도가 자신의 죄의 깊이를 알게 되면, 목자의 음성이 들립니다. 왜냐하면 목자는 의인을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아니할 때 사람들은,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결국 자신의 힘과 자신의 뜻과 자신의 소원을 앞세워서, 자기 마음에 드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신앙생활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끌어 가는 신앙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신의 공로가, 전혀 개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공로와 의를 전혀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 불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으로 맺어지는 신앙생활을 거부하고, 인간의 종교적 욕망으로 맺어지는, 종교생활을 따라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은혜를 알지 못한 자로 성경을 보면, 성경의 내용들은 거부하고 싶은 것 투성이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만 해도, 거부하고 싶은 내용일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성경을 우리가 고치도록 허용하신다면, 십자가와 연관된 모든 내용들을, 다 뜯어 고쳐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을 것입니다. 예수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수시로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불만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대와 원함에 응답해 주지 않으시는 것이겠지만, 이미 악한 존재로서 나를 위한 욕망으로, 똘똘 뭉쳐 살아가는 내가 기대하고 원하는 것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상적인 것들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목자의 음성을 알고,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음성을 들을 자는, 자기의 죄 됨을 보는 자입니다.
그럴 때 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피 흘리신 주님의 은혜로, 의에 속한 자로 살게 되었음을 감사하게 되는 것이고, 주님의 은혜가 내 안에서 강처럼 흘러넘칠 때, 주님이 가신 자취를 따라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런 자로 만들기 위해 일하십니다. 자기 세계를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세계를 기뻐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