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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백운대(白雲臺)나 인수봉(仁壽峰) 같은
높은 봉우리만이 옅은 화장을 하듯
가볍게 눈을 쓰고
왼 산은 차가운 수묵으로 젖어 있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신록이나 단풍,
골짜기를 피어오르는 안개로는,
눈이라도 왼 산을 뒤덮는 적설(積雪)로는 드러나지 않는,
심지어는 장밋빛 햇살이 와 닿기만 해도 변질하는,
그 고고(孤高)한 높이를 회복하려면
백운대와 인수봉만이 가볍게 눈을 쓰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북한산의 모습을 제재로 하여 고고한 삶의 자세를 지향하는 시적 화자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가벼운 눈이 내린 겨울이어야만 산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화자의 말에서, 세상일에 초연하고자 하는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이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고고함이란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 겨우 확인할까 말까한 것일 수 있다. 즉 고고함이라는 정신세계는 세속화를 거부하는 것인 동시에 삶의 긴장감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쉽게 변질될 수 있을 만큼 아슬아슬한 것으로 긴장감을 늦추어서는 얻을 수 없는 세계의 것이다. 이것은 시인이 추구하는 고고한 정신세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산이 그 고고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다음 겨울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노래하고 있다. 가볍게 눈을 쓰고 차가운 수묵으로 젖어 있는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눈이라도 왼 산을 뒤덮는 적설로는 그 고고함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옅은 화장'은 산봉우리에 눈이 살짝 쌓인 북한산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산의 미묘한 변화에 주목한 표현이다. '차가운 수묵'은 겨울 산의 모습을 그림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대상의 속성이 드러날 수 있는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신록', '단풍', '안개'와 같은 소재들은 겨울이 아닐 때의 산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들과의 대비를 통해 겨울 산의 의미를 부각하고 있다. '왼 산을 뒤덮는 적설'은 가볍게 눈에 덮여 있는 상태와는 반대로서,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 홀로 존재하는 산봉우리의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장밋빛 햇살'은 가볍게 눈 덮인 산봉우리의 속성을 변질시킨다. 산봉우리의 고고함은 긴장을 조금만 늦추어도 쉽게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고목 김남주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해를 향해 사방팔방으로 팔을 뻗고 있는 저 나무를 보라.
주름살투성이 얼굴과
상처 자국으로 벌집이 된 몸의 이곳저곳을 보라.
나도 저러고 싶다 한 오백 년
쉽게 살고 싶지는 않다 저 나무처럼
길손의 그늘이라도 되어 주고 싶다.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나무는 서 있는 존재로서 대지에 뿌리내려야 하고 비바람을 견뎌내야 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온갖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 존재로서 나무는 인간에게 귀감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화자는 '나도 저러고 싶다 한 오백년 쉽게 살고 싶지는 않다 저 나무처럼 길손의 그늘이라도 되어 주고 싶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의 화자는 '고목'에서 참다운 삶의 자세를 암시받고 있으며, 이 시에서는 이와 같은 화자의 깨달음이 드러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재국 최두석
유난히 뚝심 세었던 동갑내기 고종사촌 고재국은 중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상경해 쟉크 염색 기술을 배웠다. 지독한 염료 냄새에 콧구멍은 진즉 마비되고 늘 골머리까지 띵하더니 상경한 지 삼 년 만에 한 모금 피를 토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내려와서 굼벵이로 술을 담거 먹었다. 초겨울 마람 엮어 지붕 갈 때 썩은새 속에 굼실거리는 살진 굼벵이로, 매미의 유충이 굼벵이라던가. 농사일 뒷전에서 거들며 지내기 일 년 만에 매미 소리처럼 가슴이 시원해진 그는 다시 상경하였고 굼벵이 술을 계속 먹으며 십여 년 고생해서 모은 돈으로 쟉크 염색 공장을 차렸다. 비록 동업이지만 바야흐로 찌든 얼굴 펴지고 내 선생 월급을 묻고는 미소 짓는 게 참 다행이다 싶었는데 아 그는 요즘 미칠 지경이란다. 아니 미쳐서 돌아다닌다. 예비군 훈련 간 사이 공장 들어먹고 잠적한 동업자 찾으러.
<대꽃>(1984)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고재국'이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냉혹한 현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상처와 비애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화자는 고종사촌 '고재국'의 삶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고재국'은 중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쟉크 염색 기술 노동자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다가 피를 토하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는 굼벵이 술을 담가 먹으면서 기력을 회복한 후 다시 상경하여 십여 년을 고생한 후 쟉크 염색 공장을 차린다. 하지만 '고재국'이 예비군 훈련 간 사이 동업자는 공장을 들어먹고 잠적하고, 그는 미칠 지경이 된다. 화자는 이러한 '고재국'의 삶을 통해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과 불신과 불의가 판치는 현대 사회의 속성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고층 빌딩 유리창닦이의 편지 김혜순
저녁엔 해가 뜨고
아침엔 해가 집니다.
해가 지는 아침에
유리 산을 오르며
나는 바라봅니다.
깊고 깊은 산 아래 계곡에
햇살이 퍼지는 광경을.
해가 뜨는 저녁엔
유리 산을 내려오며
나는 또 바라봅니다.
깊고 깊은 저 아래 계곡에
해가 지고 석양에 물든
소녀가 붉은 얼굴을
쳐드는 것을.
이윽고 두 개의 밤이 오면
나는 한 마리 풍뎅이가 됩니다.
그리곤 당신들의 유리 창문에 달라붙었다가
그 창문을 열고
들어가려 합니다.
창문을 열면 창문, 다시 열면
창문, 창문, 창문 ……
창문
밤새도록 창문을 여닫지만
창문만 있고 방 한 칸 없는 사람들이
산 아래 계곡엔 가득 잠들어 있습니다.
밤새도록 닦아도 닦이지 않는 창문.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창문,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두꺼워지는
큰골의 잠, 나는 늘 창문을 닦으며 삽니다.
저녁엔 해가 뜨고
아침엔 해가 지는 곳,
그 높은 곳에서 나는 당신들의 창문을 닦으며 삽니다.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1994)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고층 빌딩 유리창닦이'라는 화자를 내세워 세상과 단절되어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풍자하고, 소통에 대한 갈망을 노래하고 있다.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창문', '두드릴수록 두꺼워지는 큰골의 잠'은 단절된 인간관계의 견고함을 상징한다. 그렇게 견고하게 단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끊임없이 창문을 닦는데, 이 행위는 곧 소통에 대한 간절함과 단절에 대한 극복 의지인 것이다.
고풍의상 조지훈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珠簾)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杜鵑)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힌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胡蝶)인 양 사풋이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 지이다.
<문장3호>(1939)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조지훈은 시인을 일러 "미의 사제(司祭)요, 미의 건축사이다."라고 정의함으로써 그 자신을 전통적 시관(詩觀)을 지킨 시인임을 밝힌 바 있다. 이 시는 그러한 그의 시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옛 여인의 옷과 춤사위의 아름다움을 예스런 어투와 가락으로 조화 있게 표현하고 있다. <승무>와 함께 이 시는 고전적 소재와 전통 무용에 대한 시적 탐구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승무>가 춤을 소재로 하면서도 번뇌의 종교적 승화를 표현하고 있다면, <고풍 의상>은 한복의 우아함과 이를 통해 표현되는 춤사위의 그윽함을 보여 줌으로써 한 폭의 미인도(美人圖)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고풍스런 의상과 춤의 아름다움을 시적으로 살리기 위해 시인은 부드럽고 우아한 가락과 '호장저고리', '치마', '운혜', '당혜', '호접', '아미'와 같은 옛 정취가 넘치는 시어들을 사용하는 한편, '밝도소이다', '보리니', '흔들어 지이다'와 같은 의고적(擬古的) 종결 어미를 구사하여 한층 더 옛스런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이 시는 고전 시대의 풍물에서 민족 고유의 우아하고 섬세한 미를 찾아내 세련된 서정으로 형상화시킴으로써 전통을 중시하는 시 세계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다. 특히, 창작 시기가 일제 치하인 점을 생각하면, 우리 것을 점차 상실해 가던 당시에 우리 것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작품 내면에 투영시킴으로써 민족 정서를 환기시켰다는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좀더 심오한 전통 문화의 정신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단지 외적 묘사에만 머물고 만 것이라는 비판이 뒤따르기도 한다.
고향 백 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씨(氏)를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삼천리 문학>(1938)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가 환기시키는 정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그 고향이 불러일으키는 따스한 정이다. <여우난 곬족>에서는 고향을 무대로 그 곳에서 벌어지는 토속적이고 원형적인 삶의 모습을 서사적 구조를 통해 고향 정서를 보여 준 데 반해, 이 시는 인물들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와 시적 상황을 압축적으로 서술하는 기법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이 시는 연 구분 없이 전 17행의 단연시 구조로 되어 있다. 시적 자아는 낯선 타향에서의 힘든 삶에서 병을 얻어 의원을 찾는다. 우연히 의원으로부터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을 받고 , 시적 자아는 자신의 부친과 의원이 막역한 친구임을 확인한다. 낯선 타향에서 외로운 신세에 놓여 있던 시적 자아는 그 순간 잊고 있던 고향을 떠올린다. 순간 고향은 자신의 출생지이며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이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삶의 유대로 묶인 상징적인 공간으로 확대된다.
사람이 앓아누우면 보고 싶고 그리운 것도 많고 가보고 싶은 곳도 많은 법, 의원은 '나'가 타관을 떠도는 외로운 처지임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네 병은 딴 병이 아니라 고향이 그리워 생긴 병'이라는 듯이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고향이 어데냐'고 묻지 않는가.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고 묻는 대신에 '고향이 어데냐'고 묻는 데에 이 시의 전개의 묘미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시의 마지막 단락에서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와 같은 직접적인 감정 토로는 특별한 시적 수사 없이도 절실한 감동의 울림을 주고 있다. 그것은 셋째 단락에서 화자를 진맥하는 의원의 행위와 그와 함께 나눈 대화를 통해 그러한 정서가 충분히 환기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작가론 <백 석>]
1. 약력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 본명은 백기행, 1020년 오산 고보 졸업, 동경 아오야마학원에서 영문학 공부, 1934년 귀국 후 조선일보사에 입사, 1935년 <조선일보>에서 시 「정주성」을 발표하여 등단, 함흥 영생여고보 교원 역임, 1942년 만주 안동에서 세관 업무에 종사, 1945년 해방 후 북한에서 문학 활동,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음.
2. 백석의 시세계
백석의 시에 나타나 있는 가장 중요한 정신인 시적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시적 주체로서의 인간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데 있다. 그의 시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과 사물들 또는 풍속과 자연의 명칭이 나오지만 이들은 결코 따로 독립되어 있는 개별적 존재가 아닌, 합일을 기다리며 모여 있거나 이미 합일된 경지에 있는 관계에 있다. 그런데 이 사물이나 풍속이 주로 농촌 공동체에 한정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이 시인이 식민지 시대에서 문학이 할 일을 농촌 공동체, 곧 민족적 원형을 시적으로 탐구하여 모국어로 보존하고 재생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백석은 무너진 시대 안에서의 주체적 정서와 자아를 모국어로써 견고히 유지하려 했던 시인이었고, 이러한 그의 정신은 당대의 젊은 시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백석의 시는 식민지 현실 아래서 무너지고 상실된 자아의 주체적 정서를 모국어의 결로 살려서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시적 화법은 '시골 사람이 쓰는 말 그대로'의 토착 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모국어의 지역성과 향토 성을 강하게 풍기며 식민 통치의 강압에 대해서 민족의 주체적 공간 의식을 토속어를 통해 암시하고 지켜나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의 시의 주된 공간은 현실 속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수탈되어 가고 있는 농촌이며, 해체의 위기 속에 빠진 농촌 공동체의 합일을 지향하고 있다.
'고향'의 주제를 펼쳐 가는 백석의 시 중에는 시적 자아가 개인적인 특징을 뚜렷하게 내보이지 않는 작품이 있다. 이러한 시에서 시적 자아는 공동체의 품속에 깊이 잠겨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어져 있는 현실의 자아가 자신의 고향이라는 공동체를 그리워하고 있다. 이럴 경우 고향이라는 공동체는 삶의 풍요로움을 더해 주는 세계로 형상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의 시와는 달리 공동체의 풍요로움을 더 이상 드러내지 않는 작품들도 있다. 이러한 시에 나오는 인물들의 삶은 공동체의 풍요로움이 모두 제거된 상황 속에서 아주 빈약하게 드러나 있다. 이 인물들은 공동체적 품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가난해진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들 시에는 공동체의 풍요로움이 완전히 소멸되어 있는 셈이다. 백석의 시 「고향」은 전자의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백석의 시는 한국인의 원초적인 고향 개념을 환기하고 있다. 그의 시가 보여 주는 현란한 토착어와 현대적 가족 제도, 풍물의 세계는 단순한 풍물이 아니라 인간이 반드시 개입된 풍물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일제 강점기의 온갖 현란한 운명과는 관계없이 대다수 우리 민족의 삶의 방식을 감동적으로 보여 준다. 또 백석의 시 세계는 주인공은 공동체의 품속에 깊이 잠겨 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 세계에 잠겨 있는 만큼 그러한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어져 있는 현실의 자신과 모순되어 있는 상태를 심화시킨다. 바로 이 모순이야말로 백석의 시를 의미 있게 만드는 창조적 힘이다.
3. 백석 시의 특징과 표현 방식
㉠ 토착어의 적절한 활용과 토속 풍경을 배경으로 한 원초적 삶의 조명
㉡ 체험을 바탕으로 한 감각적 · 구상적 표현
㉢ 전통적 율격과 접목하여 산문시의 가능성을 보여줌
㉣ 삶의 리얼리티를 통한 민족 공동체적 연대감 형성
㉤ 자신의 어릴 적 생활 반경과 연관된 고향 근처의 지명을 소재로 삼아 시를 쓰는 방식
㉥ 일가친척 및 이웃들과의 공동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시를 쓰는 방식
㉦ 어릴 때 보고 들은 샤머니즘적 요소들에 대한 기억을 살려 시를 쓰는 방식
고향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 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정지용시집>(1934)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전체가 6연으로 짜여져 있는 이 시는 1연과 6연이 2연에서 5연까지를 품고 있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내용은 고향을 떠나 있던 사람이 세월이 흐른 뒤에 어릴 때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이미 그 자신의 추억 속에 잠겨있는 그 '고향'은 현실 속에서 찾아볼 수 없어서 서정적인 비애감에 사로잡혀 있다. 어쩌면 고향 자체는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만 고향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시적 화자의 영혼과 정서가 그것을 예전 그대로 수용하지 못할 뿐인지도. 성장과정에서 더 큰 세계에 대한 경험과 역사의 뼈아픈 상처 등이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해 가졌던 포근함과 정겨움을 앗아 갔을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자연은 불변적 · 영속적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사람의 마음은 유동적이며 단절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판단이 가능한 것이다.
흔히 인생무상의 정서를 제시할 때 쓰는 수법이 무한한 자연과 유한한 인간사를 대조시키는 것인데, 이 시에서도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여 고향 상실의 허무감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시대상황과 연관 지어 볼 때, 일제 강점 하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느꼈던 '고향 상실 의식'과 관련지어 볼 수도 있다. 일제가 짓밟아 버린 조국에서는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지고 시적 화자는 그저 나그네로만 여겨지는 뿌리 깊은 비관적 현실인식과 상실의식이 짙게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향길 신경림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벽에는 여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담 너머로 늙은 수유 나뭇잎 날리거든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 모금 떠 마시고
가윗소리 요란한 엿장수 되어
고추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감석 깔린 장길은 피하려네.
내 좋아하던 고무신 집 딸아이가
수틀 끼고 앉았던 가겟방도 피하려네.
두엄더미 수북한 쇠전 마당을
금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 되어
초저녁 하얀 달 보며 거닐려네.
장국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만
삶은 때로 애닯기만 하리.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 되어 떠나려네.
<한국문학>(1981)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무엇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담고 있지만 그 바람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첫 번째 행부터 단정적인 거부와 부정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제목 '고향길'이 지닌 기쁨과 설렘은 자취도 없다. 오히려 버리고 싶고 잊고 싶은 것이 고향길이다. 시인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시끌벅적하게 정한을 나누는 장길도 거부하고 희미한 옛사랑의 추억조차 떨친 채, 허황한 초저녁 낮달에나 마음을 기댈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벗어나고 싶고 기어이 고향을 등지며 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가난하지만 소중한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고향을 매우 그리워하고 있다. 하지만 산업화의 현실 속에서 이제 고향은 삶의 터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쫓기듯 도망치듯' 떠나야만 하는 공간으로 변해 버렸다. 눈물을 머금고 이방인처럼 고향을 등져야만 하는 화자의 고향 상실감과 그로 인한 비애가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이처럼 '고향길'은 고향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고향을 버리는 길인 것이다. 이러한 섬세한 서정에 깔려 있는 상황은 앞서 살펴본 대로 피폐한 농촌의 정경이다. 하지만 그 비극적 서술에도 불구하고 일인칭 독백 투로 짜여져 있는 이 시의 바람은 시의 내용과는 정반대쪽에 놓여 있다. 그렇게 '서성이고' '피하고' '떠나고' 싶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애틋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구, 결코 결별할 수 없는 고향을 향해 등이나마 돌리고자 하는 그의 욕구는 유독 그만의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시를 통해 시인은 오히려 동시대를 살아가는 농촌 사람들의 삶을 도저한 애정으로 온몸으로 껴안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경림 시의 장점인 절제된 애정의 표현은 이후의 작품에서는 전통적인 가락과 결합함으로서 더욱 깊은 감동을 자아내기에 이른다.
고향 앞에서 오장환
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거리다
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양귀비 끓여다 놓고
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 지운다.
간간이 잔나비 우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 상고 : 장수
<인문평론>(1940)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향토 망경시(鄕土望景詩)>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가 <고향 앞에서>로 개제(改題)한 작품이다.
고향이 있어도 그 품에 안길 수 없는 사람은 고향을 잃은 자나 다름없다. 이 상실감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비극적인 것이다. 고향에 대해 가지는 그리움의 정서는 모든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정서로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고향은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안식처요, 인간 존재의 근원이며 포근한 어머니의 품이다. 따라서 고향을 눈앞에 두고서도 갈 수 없는 화자의 처지는 깊은 회한과 자책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화자는 고향 근처의 주막에서 자신이 떠난 동안의 슬픈 고향 소식을 전해 들으며 집집마다 누룩을 띄워 술을 빚는, 전나무 우거진 고향 마을은 이미 이 지상에서 사라지고 없음을 실감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조상의 무덤밖에 없다. 고향은 고향이로되 그리던 고향은 아닌 것이다. 완전한 고향을 찾지 못하고 고향을 바라보며 떠돌이 장꾼들에게 고향의 정취만이라도 확인하려는 화자의 모습이 눈물겹기만 하다. 독특한 감각적 표현을 바탕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잘 형상화한 시다.
고향을 버리고 살아왔기에 고향이 있어도 갈 수 없는 화자의 쓸쓸한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고향을 버린 자가 느끼는 정신적 상실감이 당시의 시대적 현실과 결부되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오장환의 시에는 '귀향 회귀(歸鄕回歸)의 모티프를 가진 작품이 많은데 이 작품도 그 가운데 하나다. 1940년대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만주와 중국 등지로 떠돌던 우리 민족의 시대적 아픔과 그로 인한 그리움의 정서를 독특한 감각적 표현과 현재법을 사용하여 형상화한 작품이다.
<김태형, 정희성 엮음 [현대시의 이해와 감상]문원각
◆ 시인 오장환(1916~ ?) : 충청북도 보은 출생, 휘문고 보를 거쳐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 부를 중퇴함. 1936년 서정주, 김동리, 여상현, 함형수 등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오장환의 시는 대체로 3가지 경향으로 대별되는데, 첫째는 '성벽','헌사'에서 보여주는 비애와 퇴폐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모더니즘 지향이며, 둘째는 '나 사는 곳'이 드러내고 있는 향토적 삶을 배경으로 한 순수 서정시의 세계이며, 셋째는 '병든 서울'에 나타난 계급의식의 세계가 그것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의 폭압적 상황에서도 절필하지 않으면서 친일적인 작품 활동을 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며 1946년에 월북하였다.
공터 최승호
아마 무너뜨릴 수 없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빈 듯 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다.
공터에 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에 싸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늙고 시듦에
공터는 말이 없다
있는 흙을 베풀어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밝은 날
공터를 지나가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가 발자국을 남긴다 해도
그렇게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들,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아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고슴도치의 마을>(1994)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에는 나직한 가운데 사방으로 뻗어나가 독보하는 힘이 들어 있다. 옛날에 나는 이것에서 질시나 좌절보다는 존경을 느꼈었다. 평생 이런 시를 써볼 수 있을까, 하고. 무심한 듯 섬세한 시인의 눈이 모래알의 움직임을 살피고, 보이지도 않는 바람들을 본다. 꽃이 피고 도마뱀은 기고 새들은 왔다가 간다. 빈 듯 하다 생명으로 일렁대는 공터는 우리가 머무른 세계의 다른 이름일 터이다. 하지만 생명은 일었다가는 지고, 사물들은 입을 다문다. 공터는 역시 빈 곳이다. 그런데 빈 것은 없는 것인데도 이곳을 다스리는 존재가 있다고, 그것이 '고요'라고 시인은 말한다. 고요는 무상의 제왕이다. 시인의 눈은 이렇게 안 보이는 것도 보고, 더 안 보이는 것도 본다. '법'이라 하든 '도'라 하든 형언하면 사라져 버리는, 고요라고밖에 달리 말하기 어려운 공한 것이 만상의 배후에 서 있다. 고요로 열고 고요로 닫는 스무 줄짜리 우주. <시인, 이 영광>
◆ 더 읽을거리
이 시의 대상은 '공터'이다. 아무도 없는 여름 한낮 그 공터의 한쪽 귀퉁이에 앉아 시인은 적요와 적멸이 아니라, 동그란 세모와도 같은 역설적인 텅 빈 충만을 지켜보고 있다. 고요의 지배 아래 공터에는 '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풀씨들을 던져 꽃을 피우는 바람으로 가득 차 있다. 또 거기에는 밝은 날 지나가는 도마뱀과 스쳐가는 새발자국과 빗방울과 그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들이 있다. 그러나 공터는 이 존재하는 것의 고통스런 생로병사에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그저 흙을 베풀고 '무심히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이 공터에는 어떤 흔적조차 오래가지 않는다. 그 흔적은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알들'로 지워져 버리기 때문이다. 고요 아닌 그 어떤 것도 공터를 지배하지 못하고 고요만이 왕인 것이다.
이 시에 내재된 기본적인 상상력은 유추이다. 하나의 대상을 구축함으로써 넌지시 다른, 정작 말하고자 하는 또 다른 대상을 환기시키는 상상력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시 곧 공터를, 고요가 지배하는 공터를 통해 시인이 건네고자 하는 진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공터라는 대상의 즉물적인 세계가 아니라 인간적인 세계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구체적인 단서는 '늙고 시듦'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생로병사의 인생의 사고(四苦)를 의미한다. 더욱이 이 시 전체 흐름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항대립을 넘어서 있다는 점에서 현저히 불교적인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텅 빈 충만'이라는 역설적인 세계인식이 도처에서 드러나며, 따라서 이 시에서 유추해낼 수 있는 인간적 세계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인 것이다. 이 세상살이를 한 차원 높은 '빗방울'을 내리는 하늘의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지독히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 세상에서 삶의 진정한 주인이란 오히려 적요와 적멸뿐이라는 것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인식이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거늘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 삶의 흔적인 생의 자취란 잠깐 남기는 도마뱀, 스쳐가는 새의 발자국이자 조만간 작은 모래알로 지워져 버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유추적 상상력보다 더욱 선명한 이미지로 드러나는 것은 관찰로서의 상상력이다. 그 관찰은 보이지 않는 '고요'를 보게 할 뿐만 아니라 '붐비는 바람, 잠드는 바람'도 보게 한다. 무엇보다도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알들"이란 관찰은 얼마나 정교하고 놀라운가. 그 미세한 움직임조차 또렷이 형상화함으로써 시인은 이 세계의 놀라운 추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고재종 시인)
과목 박성룡
과목에 과물(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뿌리는 박질(薄質) 붉은 황토에
가지들은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
모든 것이 멸렬(滅裂)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
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
과목에 과물(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 흔히 시를 잃고 저무는 한 해, 그 가을에도
는 이 과목의 기적 앞에서 시력(視力)을 회복한다.
<신풍토>(1959)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과목>의 5연으로 된 시이지만, 1연이 4연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발단이자 동인(動因)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1, 4연이며 이것이 바로 시의 핵심이다. 하나의 발견 그 시적인 경탄과 경이로움이야말로 이 시가 갖고 있는 정서적 충격이라 하겠다. 가을에 과일들이 탐스럽게 열린 것을 '사태'와 '경악'으로 표현하고 있다. 과장적 표현처럼 보이는 이 시의 묘수(妙手)는 바로 이 충격 요법이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기쁨이 이 시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 시에서도 박성룡의 독특한 시작법이 나오는데, '사태'와 '경악'이라는 단어는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매우 당돌한 표현이나 희열로 빛나고 있으며, 외경의 생각까지 느끼게 한다. 마지막 5연의 '나는 이 과목의 기적 앞에 시력을 회복한다.'에서 보듯이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