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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싸움
[창세기 34:25-35:5]
동계 올림픽에서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금메달을 안겨줬던 종목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쇼트트랙입니다.
일반적으로 400m를 달리는 육상과 달리
111.12m를 달리는 경주입니다.
우리나라는 중장거리 종목에는 아주 강합니다.
하지만 500m 경주의 경우엔
유럽에 밀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자리싸움에서 지기 때문입니다.
스포츠에서 자리싸움은 매우 중요합니다.
농구나 축구 같은 구기 종목에서도
공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자리싸움을 계속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면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자리에 있는지에 따라
영적인 승리와 패배로
나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마땅히 자리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큰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리 싸움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며
우리가 지켜야할 자리는 어떤 곳일까요?
본문을 중심으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의 딸인
디나가 겪은 사건에서 비롯됩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 만난 뒤로
세겜이란 땅까지 갔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터를 잡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자녀 중에 디나라는
딸이 한 명 있었습니다.
요즘은 아들보다 딸이
더 귀하게 대접받는 시대 아닙니까?
그래서 아들 둘인 저희 가정을 보고
딸 하나만 더 낳으면 된다는
덕담을 해 주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리고 동네 놀이터에 아빠랑 손잡고
나온 딸을 보면 눈길이 한 번 더 갑니다.
오늘 집에 가서 저희 아내와
상의해봐야겠습니다.
이처럼 잘 키운 딸 하나가
열 아들 안 부럽다는 말처럼
딸이 귀한 요즘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살던 시대에는
딸보다는 아들이 중요했습니다.
아들이 있어야 양을 치고,
농사도 지을 수 있고,
가족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여자는 노동력을 얻기엔 부족했죠.
그러다보니 디나는
세상을 접할 기회가 적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하며 자랐습니다.
디나는 라헬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레아의 몸에서 난 딸이었습니다.
디나가 태어나고 곧바로
요셉이 태어났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사랑하는 부인
라헬의 첫아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녀에겐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사랑에 대한 결핍이 있었던 거죠.
그렇게 디나가 어느 정도 장성했을 때
세겜 땅에 있는 여자들을 보러 나갔습니다.
디나는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밧단아람에서 태어난 외부인이었습니다.
당연히 세겜 성에서 그녀가 지나가면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을 겁니다.
그녀의 외모와 옷차림은
세겜의 패션스타일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순간에 인기스타가 된 그녀에게
한 남자가 다가옵니다.
바로 그 성의 추장인 세겜이었습니다.
그는 첫눈에 디나에게 반했습니다.
그리고 예쁜 사랑을 했으면 좋았을 것을,
끌고 가서 강간을 저질렀습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세겜은 돈도 많고 명예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흔히 말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죠.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인생의 귀한 재능과 돈, 시간을
육체를 위해 쓰고 말았던 겁니다.
요즘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돈을 버는 족족 술 먹고
여자 만나는데 다 허비하죠.
허랑방탕한 삶을 사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엔 영생이 없어요.
구원이 없죠.
성경은 끊임없이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죽음 이후에 천국과 지옥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을 허비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때를 위해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탕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주신 유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납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며
돈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허랑방탕한 삶을 이어갔더니
돈이 떨어지고 맙니다.
영원히 함께할 것 같았던 친구들도
그가 거지가 되자 모두 떠납니다.
결국 돼지를 키우는 농장에 들어가서
겨우 살아가는 노동자고 전락합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감사함으로
세어보지 못한 채 낭비하고 있진 않나요?
육신의 정욕을 위해 살고 있진 않습니까?
다시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이 일로 인해 야곱의 아들들은
크게 분노합니다.
세겜이 그의 아버지와 함께
찾아와 혼인을 요구하자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제안합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증표를 말합니다.
남자들의 성기 끝부분 표피를 제거하는 것이죠.
할례 3일 후,
다들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 중 시므온과 레위는
힘들어 하는 세겜 남자들을 모두 죽입니다.
참고로 이 둘은 디나와 같이
레아가 낳은 아들들입니다.
그러니 애정이 각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남은 아들들은
세겜 성에 가서 가축과 재산,
여자와 자녀들을 사로잡아 옵니다.
성경에서는 이걸 '노략'이란 단어로 기록했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서 그렇지 이들의 행동은
용인될 수 없는 나쁜 짓이었습니다.
이건 불신자보다 더한 악한 모습이죠.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야곱의 모습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에게 화를 냅니다.
창세기 34: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 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자녀들의 악행을 나무라는 이유가 뭔가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고 혼을 냅니까?
아닙니다.
야곱의 말엔 '나'가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본인이 죽을 수도 있게 된 것 때문이라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 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에서를 만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 받자
세겜 땅에 머물렀습니다.
처음엔 세겜에서도 제단을 쌓았다.
그러나 시간이 차츰 흐르면서
가나안 인들과 동화되어 갔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건강한 신앙을 물려줘야 했는데
그게 없었습니다.
야곱의 모습에서 오늘날 나를 발견했습니다.
과연 나는 아이들에게
영적인 본(本)이 되고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우리 아이들도
문제 앞에서 감정대로, 분노에 따라
행동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멀어져서
마땅히 여쭤야 할 타이밍을
놓치고 있진 않습니까?
잠깐의 승리에 도취해 다음 스텝 속에
하나님을 빠뜨리고 있진 않나요?
그러면 문제는 커집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함락하고
두 번째 성읍인 아이성을 칠 때의 일입니다.
난공불락의 요새인 여리고 성이
7일만에 무너지는 걸 경험했던 이스라엘은
‘아이성 쯤이야’란 착각에 빠집니다.
아이성도 작은 성은 아니었지만
여리고를 무너뜨렸다는 자만심이
그들의 눈을 어둡게 만들었죠.
결국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도망칩니다.
이들의 실패엔 원인이 있었다.
여호수아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제비를 뽑아 패배의 원인을 가려 내셨죠.
그가 바로 아간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어기고 여리고 성에서
물건을 몰래 빼돌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장막 아래에 파묻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와 그의 가족들은 심판을 받고 죽습니다.
승리에 도취하여
하나님을 찾는 걸 잊었던 여호수아는
뼈저린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이성과 2차 전투에 임합니다.
그랬더니 아이성을 쉽게 정복하게 되었죠.
실패했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누구나 문제를 만납니다.
중요한 건 이겁니다.
문제 속에서 '나'를 찾는 자는 오답을 얻지만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해답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에게 있어서 해답은
무엇이었을까요?
35장 1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창세기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벧엘,
지난 20년간 잊고 있던 땅 아닙니까?
야곱이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칠 때
돌 베개를 안고 자던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났고
야곱은 무사히 돌아오면
제단을 쌓겠다고 기도했다.
비록 야곱은 벧엘의 언약을 잊었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함부로 서원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모두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후 야곱은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창세기 35: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벧엘로 다시 돌아가기만 했는데
하나님이 다시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복을 허락하시죠.
예수 믿는 우리에게도 벧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자리,
또한 만나는 자리다.
그게 어딘가요?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우리도 예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기만 하면 복을 주실까요?
아니죠.
야곱은 벧엘로 가면서 했던 행동이 있습니다.
그가 자기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한마디로 거룩함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지난 20년간 라반의 집에서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신들을 접했겠습니까?
요즘도 부적이 액운을 막아준다는 말을 믿고
집이나 차, 심지어 속옷에도 넣고 다닙니다.
야곱이 살던 당시에도
‘드라빔’이라는 우상을 집에 모셔두었습니다.
그만큼 이방 신상은 대중화되어 있었습니다.
야곱은 이 부분을 꼬집었죠.
"너희가 하나님의 약속 백성이라면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우상을 버려야 한다.
그것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
이건 생각보다 경제적 손실이 큽니다.
나라면 아까우니까
당근마켓에 팔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걸
완전히 묻어버리고 떠납니다.
이게 진정한 믿음입니다.
우상이 나에게 힘과 부의 원천이
절대 아니란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상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이 우상입니까?
우상이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돈’이 가장 큰 우상일 수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돈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예수님도 이게 어려운 것을 아셨죠.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물(돈)과 하나님은
겸하여 섬길 수 없는니라”
우리는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원수 마귀의 계략을 잘 알아야 합니.
우리에게 있는 우상을 모두 버리십시오.
몸과 마음의 성결을 위해 힘쓰십시오.
이제 벧엘에 도착하여 할 일은 뭘까요?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일입니다.
창세기 35:6,7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야곱은 가나안 땅에 와서
제단을 쌓은 적이 있었습니다.
세겜에 왔을 때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번 예배는 달랐습니다.
그는 타지 생활 20년을 지켜주셨던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이끄실 것을 믿었죠.
그래서 그는 벧엘을
엘 벧엘(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도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곳은 예배가 있는 자리입니다.
예배는 우리 영혼을 새롭게 합니다.
변화시킵니다.
목마른 자들에게
생수와 같은 은혜의 물줄기가
흐르는 자리가 예배의 자리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 영혼에 재충전과 회복의 시간이 된다.
마귀는 이걸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자리를 지키지 못하게 만들죠.
예배 시간만 되면 마음이 바빠집니다.
갑자기 회사에 일이 터집니다.
친구가 연락을 합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밖에 나가버립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를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들려는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을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주님은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이번주 말씀을 준비하는데
기도하는데 기도가 안 되었습니다.
응답도 없고 마음은 메말라 갔습니다.
나중에 말씀을 묵상하는데
내가 자리싸움에 졌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를
정직하게 지키지 못했습니다.
매번 집중해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건 어렵지만
삶에서 예배하는 것과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일을 제대로 지켰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날 1층 사무실에 있었는데,
2층으로 올라가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딱 기도를 시작하는데
눈물이 펑하고 터졌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아들아, 내가 널 기다렸어.”란 감동을 주셨죠.
하나님께 너무 죄송했습니다.
그동안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주님을 밀어냈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다시 벧엘로 올라오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룩을 회복하고
예배의 자리를 지켜내길 응원하시죠.
아버지 품에 돌아오면 잔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둘째 아들이 집에 나갔다가
허랑방탕하여 돌아옵니다.
거지꼴로 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랑으로 맞아주시죠.
오늘 야곱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습니까?
누구도 의지할 수 없고,
어디로 갈수도 없는 상황 말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죄를 버리고 떠나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창세기 35: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던
대적들로부터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이제 야곱은 두다리 쫙 뻗고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자신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반드시 은혜를 베푸십니다.
오래전 미국에 있는 직장에서
퇴출 당하고 자포자기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집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한 동안 밖에서 방황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긴 방황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죽고 싶소.
모든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소.”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여보, 당신은 아직
한 가지 시도를 해보지 않았어요.
당신이 처한 상황과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기도해 본 적이 없잖아요.”
아내의 말을 들은 그는 큰 송곳이
가슴을 푹하고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맞아! 나는 이 일에 대해
기도해 본 적이 없었지.”
그 후 그는 아내와 함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기도하는 동안 자신을 해고한 상사에 대한
미움이 점차 사그라졌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집을 담보로
건축업을 시작했고
5년만에 자신의 기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때 기도했던 제목이
“하나님 가족들이 함께 머물 수 있는
호텔을 만들게 해주세요.”였습니다.
이를 위해 가격이 비싸지 않으면서도
분위기가 고급스러운 느낌의 호텔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동시에 건강한 가족 분위기를 고려하여
술을 판매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간절한 그의 기도와 성실한 그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가 만든 호텔이 바로 ‘홀리데이 인’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창업자인
케몬스 윌슨이죠.
아무리 모든 상황이
나를 죽일 듯이 달려든다 해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기도와 예배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예배를 통해
새로워지고 지혜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와 교제하시고 새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예배자로 서야 합니다.
좋아하는 찬양 중에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나는 예배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입니다
내가 서 있는 곳 어디서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내 영혼 거룩한 은혜를 향하여
내 마음 완전한 하나님 향하여
이곳에서 바로 이 시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무엇이 우릴 두렵게 하나요?
어떤 문제가 우리 가정을 흔들고 있습니까?
이제 다시 예배를 회복해야 할 때 입니다.
나의 문제를 주님께 내려 놓고
바로 이 시간
하나님만 예배하는 복된 성도들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