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aṅkhāra(saṅkhata, 行, saṁskṛta, 상스끄리따 - 산스끄리뜨)
saṁ(saṅ) + s[正, 同, 共, 集, 合] + karoti[作, 하다, 刺戟하다]
行(saṅkhāra)을 Sk.(산스끄리뜨) 방식으로 표현하면 '산스끄리뜨(saṁskṛta)'이다.
(<梵>이) 조화롭게 만든(것, 성스러운 언어), 復舊(회복, 수리), 되돌아 감(합일, 일치)
즉, '合致(一如)'에 의한 終結이라는 견해에 대해
싸움, 결합(섞음), 더함(加), 가공(요리, cook), 인위적(의도적)으로 만듦에 의한
反復(윤회)라는 언어적 펀(fun)이다.
(완벽하게) 設定하다. 배치하다. (미리) 準備하다. 安頓(안돈)하다.
<인공적으로 만든 (언어)> 혹은 <바르게 만든 (正語)>: 산스크리트(梵語)
<함께 만들다> : 요리하다. 加功하다.(자연산이 아닌 가공 식품).
<함께 (...을) 하다> : 충돌하다. 싸우다(戰爭).
꾸미다. 造作하다.
<이전과 동일하게 하다> : 복원/復舊/수선하다.
<이전과 유사하게 행하다> : 再作/습관적인 행위를 반복하다.
끌어 모으다. 合成하다. 쓰레기, 잡동사니. 섞인 - 의심.
形成하다. (결)합하다. (힘을) 더 하다(加). 累積.
<같게 되다> : 닮다, 되다/어떻게 되게 하다/(반복적으로) 修行하다.
[ dve dhātuyo — saṅkhatā ca dhātu asaṅkhatā ca dhātu.
두 가지 요소이니 형성된 요소[有爲界 = 有爲法]와 형성되지 않은 요소[無爲界 = 無爲法]입니다.]
[ katamañca, bhikkhave, asaṅkhataṃ?
yo, bhikkhave, rāgakkhayo dosakkhayo mohakkhayo — idaṃ vuccati, bhikkhave, asaṅkhataṃ.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무위인가?
비구들이여, 탐욕의 멸진, 성냄의 멸진, 어리석음의 멸진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무위라 한다.]
[ Yato kho, bhikkhave, bhikkhuno avijjā pahīnā hoti vijjā uppannā,
so avijjāvirāgā vijjuppādā neva puññābhi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na apuññābhi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na āneñjābhi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비구들이여, 그러나 비구가 무명을 제거하여 명지가 생기면
그에게서 무명은 빛바래고 명지가 생기기 때문에
그는 공덕이 되는 의도적 행위도 짓지 않고
공덕이 되지 않는 의도적 행위도 짓지 않고
흔들림 없는 의도적 행위도 짓지 않는다.]
[ “tayo saṅkhārā — puññābhisaṅkhāro, apuññābhisaṅkhāro, āneñjābhisaṅkhāro.
(35) 세 가지 의도적 행위(sañkhāra, 行) - 공덕이 되는 행위[功德行],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非功德行], 흔들림 없는 행위387)
387) 『청정도론』에 의하면 “'공덕이 되는 행위'는 보시, 지계 등으로 생긴 여덟 가지 욕계의 유익한 의도(cetanā)와 수행으로 생긴 다섯 가지 색계의 유익한 의도 등 13가지 의도이다.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는 살생 등으로 생긴 12가지 해로운 의도이고, '흔들림 없는 행위'는 수행으로 생긴 네 가지 무색계의 유익한 의도이다. 이처럼 세 가지 상카라들은 29가지 의도들이다.”(Vis.XVII.60) 그러므로 여기서 상카라(行]는 구체적으로는 의도적 행위(cetanā)를 말한다.]
[ Anabhisaṅkharonto anabhisañcetayanto na kiñci loke upādiyati;
anupādiyaṃ na paritassati, aparitassaṃ paccattaññeva parinibbāya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의도적 행위를 짓지 않고 의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세상에 대해서 어떤 것도 취착하지 않는다.
취착하지 않으면 갈증 내지 않는다. 갈증 내지 않으면 스스로 완전한 열반에 든다.
그는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 “katamā ca, bhikkhave, samādhibhāvanā bhāvitā bahulīkatā āsavānaṃ khayāya saṃvattati?
idha, bhikkhave, bhikkhu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udayabbayānupassī viharati —
‘iti rūpaṃ, iti rūpassa samudayo, iti rūpassa atthaṅgamo ;
iti vedanā, iti vedanāya samudayo, iti vedanāya atthaṅgamo;
iti saññā, iti saññāya samudayo, iti saññāya atthaṅgamo;
iti saṅkhārā, iti saṅkhārānaṃ samudayo, iti saṅkhārānaṃ atthaṅgamo;
iti viññāṇaṃ, iti viññāṇassa samudayo, iti viññāṇassa atthaṅgamo’ti.
ayaṃ, bhikkhave, samādhibhāvanā bhāvitā bahulīkatā āsavānaṃ khayāya saṃvattat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삼매 수행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번뇌를 소멸하게 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며[隨觀] 머문다.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인식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심리현상들이다. 이것이 심리현상들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심리현상들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알음알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이다.'라고
[관찰하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런 삼매 수행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번뇌를 소멸하게 된다.]
[ “kiñca, bhikkhave, saṅkhāre vadetha?
saṅkhatamabhisaṅkharontīti kho, bhikkhave, tasmā ‘saṅkhārā’ti vuccati.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심리현상들이라 부르는가?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고 해서 심리현상들이라 한다.232)
232)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고 해서 심리현상들이라 한다.'는 saṅkhataṃ abhisaṅkharontīti tasmā saṅkhārā ti vuccanti를 옮긴 것이다. 설명은 아래 주해를 참조할 것.
kiñca saṅkhatamabhisaṅkharonti?
rūpaṃ rūpattāya saṅkhatamabhisaṅkharonti,
vedanaṃ vedanattāya saṅkhatamabhisaṅkharonti,
saññaṃ saññattāya saṅkhatamabhisaṅkharonti,
saṅkhāre saṅkhārattāya saṅkhatamabhisaṅkharonti,
viññāṇaṃ viññāṇattāya saṅkhatamabhisaṅkharonti.
saṅkhatamabhisaṅkharontīti kho, bhikkhave, tasmā ‘saṅkhārā’ti vuccati.
그러면 어떻게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하는가?
물질이 물질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233)
느낌이 느낌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인식이 인식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심리현상들이 심리현상들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알음알이가 알음알이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비구들이여, 그래서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고 해서 심리현상들이라 한다.”
233) “'물질이 물질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rūpaṃ rūpattāya saṅkhataṃ abhisaṅkharonti).'고 했다. 마치 죽이 됨(yāgutta)을 위해서 죽(yāgu)을 쑤고 과자가 됨(pūvatta)을 위해서 과자(pūva)를 만들 듯이 조건[緣, paccaya]들에 의해서 함께 뭉쳐져서 만들어진 상태(samāgantvā katabhāva)라고 해서 형성된 것(saṅkhata)이라는 이름을 얻었다(laddha nāma). 그리고 이렇게 해서 형성된 물질이라는 그러한 물질됨(rūpatta)을 위해서 계속 형성한다, 모은다, 적집한다, 생산한다(abhisaṅkharoti āyūhati sampiṇḍeti, nipphādeti)는 것이 '물질이 물질이게끔 형성된 것을 계속해서 형성한다.'는 뜻이다. 느낌 등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이 적용된다. 간략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자기 자신(즉 行)과 함께 생겨난 물질과 느낌 등의 법들(오온)을 계속해서 형성한다, 생기게 한다(nibbatteti)는 뜻이다.
여기서도 세존께서는 의도하는 특징(cetayita-lakkhaṇa) [왜냐하면 심리현상들의 무더기(행온)에 속하는 법들 가운데서(saṅkhāra-kkhandha-dhammānaṃ) 의도가 으뜸가는 상태(cetanā-padhānatta)이기 때문이다. - SAȚ.ii.211]을 가진 심리현상의 개별적 특징을 분석하신 뒤에 설하셨다.”(SA.ii.292)
즉, 심리현상들 가운데는 의도가 으뜸이고 이 의도는 다른 정신 · 물질들(법들)을 계속 형성하는 개별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행온에 속하는 법들(거듭 강조하지만 행온의 행은 항상 복수로 나타나고 있다) 가운데서 의도(cetanā)가 으뜸가는 상태라고 하는 복주서의 설명이다. 혹자들은 오온의 행온을 의도적 행위나 업형성 혹은 업형성력 등으로 이해하고 옮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행온의 한 부분인 cetanā(의도)만을 부각시킨 역어이다.
행온에는 이 의도를 포함한 50가지 심리현상들(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모든 심리현상, 혹은 심소법들)을 다 포함한다는 것이 주석서와 복주서들을 비롯한 아비담마의 한결같은 설명이다. 그래서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행온을 심리현상들의 무더기라고 옮겨서 정착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취착의 양상 경」(S22:56) §9의 주해도 참조할 것. 그리고 중국에서 행(行)으로 통일해서 옮기고 있는 상카라(saṅkhāra)의 네 가지 의미에 대해서는 본서 「나꿀라삐따 경」(S22:1) §13의 주해와 제1권 「분석 경」(S12:2) §14의 주해를 참조할 것.]
[ …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so yadeva tattha hoti rūpagataṃ vedanāgataṃ saññāgataṃ saṅkhāragataṃ viññāṇagataṃ,
te dhamme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ati.
so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suddhāvāsānaṃ devānaṃ sahabyataṃ upapajjati.
ayaṃ, bhikkhave, upapatti asādhāraṇā puthujjanehi.
그는 거기서 물질이건 느낌이건 인식이건 심리현상들이건 알음알이건
그러한 법들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정거천(淨居天)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이 [정거천에] 태어나는 것은 범부들과는 함께할 수 없는 것이다.]
[ katamañca, bhikkhave, purāṇakammaṃ?
cakkhu, bhikkhave, purāṇakammaṃ abhisaṅkhataṃ abhisañcetayitaṃ vedaniyaṃ daṭṭhabbaṃ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오래된 업인가?
비구들이여, 눈은 오래된 업[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의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240)
240) “'눈은 오래된 업(cakkhu purāṇakammaṃ)'이라고 하셨는데 눈이 오래된 것이 아니라 바로 업(kamma)이 오래된 것이다. 업에 의해서 생겼기 때문에(kammato nibbattattā) 조건이라는 이름으로(paccaya-nāmena) 이와 같이 설하신 것이다.”(SA.ii.402)
나머지 구문에 대한 주석은 본서 제2권 「그대들 것이 아님 경」 (S12:37) §3의 주해와 같다. 그곳의 주해들을 참조할 것.
“본경은 예비단계의 위빳사나(pubbabhāga-vipassanā)를 설하셨다.”(SA..ii.402)
... pe ... jivhā purāṇakammā abhisaṅkhatā abhisañcetayitā vedaniyā daṭṭhabbā ... pe ...
mano purāṇakammo abhisaṅkhato abhisañcetayito vedaniyo daṭṭhabbo.
idaṃ vuccati, bhikkhave, purāṇakammaṃ.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노는 오래된 업[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의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katamañca, bhikkhave, navakammaṃ?
yaṃ kho, bhikkhave, etarahi kammaṃ karoti kāyena vācāya manasā,
idaṃ vuccati, bhikkhave, navakammaṃ.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새로운 업인가?
비구들이여, 지금 몸과 말과 마노로 짓는 업을 새로운 업이라 한다.]
[ “katame ca, bhikkhave, saṅkhārā?
tayome, bhikkhave, saṅkhārā —
kāyasaṅkhāro, vacīsaṅkhāro, cittasaṅkhāro.
ime vuccanti, bhikkhave, saṅkhārā.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의도적 행위들[行]53) 인가?
비구들이여, 세 가지 의도적 행위가 있나니
몸의 의도적 행위, 말의 의도적 행위, 마음의 의도적 행위이다.54)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의도적 행위들이라 한다."
53) “업형성(abhisaṅkharaṇa)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 '의도적 행위[行, saṅkhara]'이다.(SA.ii.17)
한편 『청정도론』 XVII.46에서는 “삼계의 유익하거나 해로운 의도를 '업형성의 의도적 행위'라 부른다(tebhūmika-kusala-akusala-cetanā pana abhisaṅkharaṇaka-isaṅkharo ti vuccati).”라고 업형성의 의도적 행위를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abhisaṅkharaṇa를 업형성으로 옮겼다.
여기서 '의도적 행위'로 옮긴 원어는 상카라(saṅkhara)이고 중국에서는 행(行)으로 옮겼다. 초기불교에서 아주 많이 나타나며 가장 중요한 술어 가운데 하나인 이 상카라는 크게 네 가지 문맥에서 나타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준에 따라서 상카라를 옮기고 있다.
첫째, 제행무상 등의 문맥에 나타나는 모든 형성된 것들(sabbe saṅkharā, 諸行, 복수로 나타남)이 있다. 이것은 유위법(有爲法)으로 한역되는 상카따담마(saṅkhata-dhamma)와 같은 의미이다. 무위법인 열반을 제외한 모든 법들은 이 형성된 것들의 영역에 속한다. 이 경우에는 대부분 '형성된 것들'로 옮기고 있다.
둘째, 오온 가운데 네 번째인 행온(saṅkhāra-kkhanda)의 상카라는 '심리현상들'로 이해해야 한다. 이 경우도 항상 복수로 나타난다. 오온 가운데서 색온은 아비담마의 색법이고, 수 · 상 · 행온은 아비담마의 심소법이며, 식온은 아비담마의 심법이다. 그러므로 오온에서의 상카라들은 아비담마의 52가지 심소법들 가운데서 수온과 상온을 제외한 나머지 심소법들을 뜻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 경우의 상카라를 모두 '심리현상들'로 옮기고 있다.
셋째, 본경에서처럼 12연기의 두 번째 각지인 상카라는 여기서처럼 '의도적 행위'로 옮긴다. 이 경우도 항상 복수로 나타난다. 위 『청정도론』 인용에서 보듯이 이 경우의 상카라는 의도적 행위(cetanā)를 뜻하기 때문이다.
넷째,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인 신행(身行, kāya-saṅkhāra) 구행(口行, vacī-saṅkhāra) 의행(意行, mano-saṅkhāra)으로 나타난다.
상카라(saṅkhāra)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은 본서 제3권 「나꿀라삐따경」(S22:1) §13의 주해들과 「삼켜버림 경」(S22:79) §7의 주해를 참조할 것.
54) “몸'의 의도적 행위(kāya-saṅkhāra)'란 몸으로부터 전개되는 의도적 행위(kāyato pavatta-saṅkhāra)이다. 이것은 몸의 문에서 활동함(copana)에 의해서 전개되는(pavatta) 욕계의 유익한 것 8가지와 해로운 것 12가지로 모두 20가지 몸의 의도적 행위(kāya-sañcetana)들과 동의어이다. '말의 의도적 행위(vacī-saṅkhāra)'란 말로부터 전개되는 의도적 행위이다. 말의 문에서 말의 구분에 의해서 전개되는 20가지 말의 의도적 행위(vacī-sañcetana)들과 동의어이다.
'마음의 의도적 행위(citta-saṅkhāra)'란 마음으로부터 전개되는 의도적 행위이다. 몸의 문과 말의 문에서 활동하지 않고 이를테면 홀로 앉아서 생각하는 자에게(raho nisīditvā cintentassa) 전개되는 세간적인 유익하고 해로운 것(lokiya-kusala-akusala)인 29가지(12+8+5+4) 마노[意]의 의도적 행위(mano-sañcetana)들과 동의어이다.”(SA.ii.17)]
[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sabyābajjhaṃ kāya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sabyābajjhaṃ vacī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sabyābajjhaṃ mano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so sabyābajjhaṃ kāyasaṅkhāraṃ abhisaṅkharitvā, sabyābajjhaṃ vacīsaṅkhāraṃ abhisaṅkharitvā,
sabyābajjhaṃ manosaṅkhāraṃ abhisaṅkharitvā sabyābajjhaṃ lokaṃ upapajjati.
tamenaṃ sabyābajjhaṃ lokaṃ upapannaṃ samānaṃ sabyābajjhā phassā phusanti.
so sabyābajjhehi phassehi phuṭṭho samāno sabyābajjhaṃ vedanaṃ vedayati ekantadukkhaṃ,
seyyathāpi sattā nerayikā.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악의에 찬 몸의 의도적 행위[身行, kāya-saṅkhāra]를 짓는다.
악의에 찬 말의 의도적 행위[口行]를 한다. 악의에 찬 마음의 의도적 행위[心行]를 한다.
그는 악의에 찬 몸의 의도적 행위와 말의 의도적 행위와 마음의 의도적 행위를 한 뒤
악의가 가득한 세상에 태어난다.
악의가 가득한 세상에 태어나서는 악의에 찬 감각접촉을 만난다.
악의에 찬 감각접촉을 만날 때 악의에 찬 절대적인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
예를 들면 지옥에 태어난 중생들이다.]
[ “sasaṅkhārā, bhikkhave, uppajjanti pāpakā akusalā dhammā, no asaṅkhārā.
tesaṃyeva saṅkhārānaṃ pahānā evaṃ te pāpakā akusalā dhammā na hontī”ti.
비구들이여, 의도적 행위[行]가 있기 때문에 나쁜 불선법들이 일어난다.
의도적 행위 없이는 나쁜 불선법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바로 그 의도적 행위를 버림으로써 나쁜 불선법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 atha kho pana, bhikkhu, mayā anupubbasaṅkhārānaṃ nirodho akkhāto.
비구여, 나는 더 나아가서 형성된 것들[行]이 차례로 소멸함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paṭhamaṃ jhānaṃ samāpannassa vācā niruddhā hoti.
dutiyaṃ jhānaṃ samāpannassa vitakkavicārā niruddhā honti.
tatiyaṃ jhānaṃ samāpannassa pīti niruddhā hoti.
catutthaṃ jhānaṃ samāpannassa assāsapassāsā niruddhā honti.
ākāsānañcāyatanaṃ samāpannassa rūpasaññā niruddhā hoti.
viññāṇañcāyatanaṃ samāpannassa ākāsānañcāyatanasaññā niruddhā hoti.
ākiñcaññāyatanaṃ samāpannassa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ā niruddhā hoti.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samāpannassa ākiñcaññāyatanasaññā niruddhā hoti.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nnassa saññā ca vedanā ca niruddhā honti.
khīṇāsavassa bhikkhuno rāgo niruddho hoti, doso niruddho hoti, moho niruddho hoti.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소멸한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소멸한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소멸한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날숨이 소멸한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물질의 인식이 소멸한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공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식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무소유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상수멸(想受滅, 인식과 느낌의 그침)을 증득한 자에게는 인식과 느낌이 소멸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貪]이 소멸하고, 성냄[瞋]이 소멸하고, 어리석음[癡]이 소멸한다.]
[ “idhānanda, bhikkhuno evaṃ hoti —
‘etaṃ santaṃ etaṃ paṇītaṃ
yadidaṃ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n’ti.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이 가라앉음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이요 갈애가 다함이요 탐욕이 빛바램이요 소멸이요 열반이다.'라고,
evaṃ kho, ānanda, siyā bhikkhuno tathārūpo samādhipaṭilābho yathā
imasmiñca saviññāṇake kāye ahaṅkāramamaṅkāramānānusayā nāssu,
bahiddhā ca sabbanimittesu ahaṅkāramamaṅkāramānānusayā nāssu;
yañca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upasampajja viharato ahaṅkāramamaṅkāramānānusayā na honti
tañca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upasampajja vihareyyā”ti.
아난다여, 이와 같이 비구가 알음알이를 가진 이 몸에 대해서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의 잠재성향이 없고
밖의 모든 개념들에 대해서도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의 잠재성향이 없는
그런 삼매를 얻을 수 있으며,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의 잠재성향이 없는 그런
마음의 해탈과 통찰지를 통한 해탈에 들어 머물 수 있다.]
[ so na ceva ceteti, na ca abhisaṅkharoti.
tassa acetayato anabhisaṅkharoto tā ceva saññā nirujjhanti, aññā ca oḷārikā saññā na uppajjanti.
so nirodhaṃ phusati.
evaṃ kho, poṭṭhapāda, anupubbābhisaññānirodha-sampajāna-samāpatti hoti.
그는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업]을 형성하지 않는다.
그가 의도하지 않고 계속해서 [업]을 형성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인식은 소멸하고 다른 거친 인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소멸을 체험한다.
뽓타빠다여, 이와 같이 알아차리는 인식이 차례대로 소멸하는 증득[等至]이 있다.]
[ sabbe sattā āhāraṭṭhitikā.
sabbe sattā saṅkhāraṭṭhitikā.
(1) 모든 중생들은 음식(āhāra)으로 생존합니다.332)
(2) 모든 중생들은 상카라[行, saṅkhāra]로 생존합니다.333)
332) 모든 중생들은 음식이 없으면 생존하지 못한다. 이것은 당연한 명제이다. 경에서는 네 가지 음식을 설한다. 그것은 ① 먹는 음식[段食, kabaḷika-āhāra] ② 촉식(獨食, phassa-āhāra) ③ 의사식(意思食, mano-sañcetanā-āhāra) ④ 식식(識食, viññāṇa-āhāra)이다. 매찰나에 이 넷이 없으면 중생들은 생존을 영위하지 못한다.
그러나 무상유정(無想有情, asaññā-satta)은 말 그대로 모든 인식이 끊어졌기 때문에 네 가지 음식 가운데 어떤 음식으로도 생존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만일 본 문맥에서처럼 ‘모든 중생들은 음식으로 생존한다.'고 하면 이것은 모순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석서에서는 비방편적인 음식(nippariyāya-āhāra)과 방편적인 음식(pariyāya-āhāra)이라는 술어를 채용하여 네 가지 음식은 비방편적인 음식이고 조건(paccaya, 緣)은 방편적인 음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조건에 따라서 일어나고 멸하기 때문에 조건이 없다면 중생들은 한 순간도 생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도 방편적으로는 음식이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명하기를 “방편을 빌리지 않고(nippariyāyena) [말하면] 욕계에는 네 가지 음식(āhāra)이 있고 무상유정을 제외한 색계와 무색계는 [덩어리로 된 음식을 제외한] 세 가지 음식이 있다. [방편을 빌려서 표현하면] 무상유정들과 나머지의 경우에는 조건을 그 음식으로 가진다(paccayāhāra).” (DA.ii.976)라고 하여 무상유정은 조건을 음식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333) 모든 중생은 음식으로 생존한다는 앞의 명제로 중생의 생존은 다 설명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모든 중생은 상카라[行]로 생존한다고 설명하신다. 그러면 이 문맥에서 말하는 상카라[行]는 무엇인가? 주석서의 설명을 보자.
“앞에서 설한 [음식이라는] 조건은 자신의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상카라라고 한다. 그래서 앞에서는 음식이라는 조건을 설하셨다. 여기서 설하는 상카라의 조건은 전자보다 더 특별한 것이다.”(Ibid)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음식을 조건으로 하여 생긴 모든 것을 상카라[行]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모든 중생은 음식으로 생존한다.(Ps.i.122)라고 전승되어 온 구절에서는 상카라들의 세상을 알아야 한다.”(Vis.VII.37)라고 나타난다. 그리고 이 상카라를 명색(정신 · 물질)이나 온 · 처 · 계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여기서 상카라는 명색과 온 · 처 · 계 등으로 분류되는 모든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a)이라고 보면 된다.]
[ “tisso dukkhatā — dukkhadukkhatā, saṅkhāradukkhatā, vipariṇāmadukkhatā.
(27)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dukkhatā) - 고통스런 괴로움의 성질[苦苦性],
형성된 괴로움의 성질[行苦性],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의 성질[壞苦性]375)
375) “고고성(dukkha-dukkhatā)이란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로운 상태이다. 이것은 괴로운 느낌[苦受]의 이름이다.
행고성(saṅkhāra-dukkhatā)이란 상카라[行]로 존재하기 때문에 괴로운 상태이다. 이것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의 이름이다. 이것은 다른 괴로운 고유성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형성되었기 때문에, 읽어나고 늙고 부서짐에 의해서 짓눌렸기 때문에 행고성이라고 일다.
괴고성(vipariṇāma-dukkhatā)이란 변화에 존재하는 괴로운 상태이다. 이것은 즐거운 느낌[樂受]의 이름이다. 즐거움이 변할 때 괴로움이 일어기 때문이니, 바로 즐거움은 괴고성이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을 제외한 삼계에 속한 모든 법들은(tebhūmakā dhammā) '모든 형성된 것들은 괴로움이다.[諸行皆苦]'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행고성(형성되었기 때문에 괴로운 상태)이라고 알아야 한다.” (DA.iii.992)]
[ imesaṃ kho, bhikkhave, pañcannaṃ indriyānaṃ samattā paripūrattā arahaṃ hoti,
tato mudutarehi antarāparinibbāyī hoti, tato mudutarehi upahaccaparinibbāyī hoti,
tato mudutarehi 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tato mudutarehi s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tato mudutarehi uddhaṃsoto hoti akaniṭṭhagāmī,
tato mudutarehi sakadāgāmī hoti,
tato mudutarehi sotāpanno hoti, tato mudutarehi dhammānusārī hoti,
tato mudutarehi saddhānusārī hotī”ti.
비구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지 기능을 완전하게 하고 완성하기 때문에 아라한이 된다.
이보다 더 약하면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수명의] 반이 지나서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노력 없이 쉽게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노력하여 어렵게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더 높은 세계로 재생하여 색구경천에 이르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일래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예류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법을 따르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믿음을 따르는 자가 된다.]
[ no ce diṭṭheva dhamme paṭikacca aññaṃ ārādheti, no ce maraṇakāle aññaṃ ārādheti,
no ce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antarāparinibbāyī hoti,
no ce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upahaccaparinibbāyī hoti,
no ce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no ce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s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atha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uddhaṃsoto hoti akaniṭṭhagāmī.
만일 지금 · 여기에서 구경의 지혜를 성취하지 못하고,
죽을 때에도 구경의 지혜를 성취하지 못하고,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지 못하고,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수명의] 반이 지나서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지 못하고,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노력 없이 쉽게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지 못하고,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노력하여 어렵게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지 못하면,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더 높은 세계로 재생하여 색구경천에 이르는 자가 된다. 191)
191) 이러한 다섯 유형의 불환자에 대한 주석서적인 설명은 이미 『인시설론』(Pug.16~17)에 나타나고 있으며, 『인시설론 주석서』 (PugA.198~201)에서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보디 스님은 이 다섯 유형의 불환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① 더 높은 세계에 화현하여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antarā-parinibbāyī)를 중유(中有, antara-bhava)의 단계에서 반열반에 드는 것으로, ② 수명의 반이 지나서, 때로는 죽음이 임박해서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upahacca-parinibbāyī)를 내생에 닿자마자(upahacca) 즉 다음 생에 태어나자마자 반열반에 드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북방의 몇몇 부파들의 견해를 들고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불환자가 태어날 곳 경」(A7:52/iv.70~74)과 「족쇄 경」(A4:131/i1.134)도 이 견해를 뒷받침할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족쇄 경」의 “태어남을 얻게 하는 족쇄들은 제거하였지만 [재생으로서의] 존재를 얻게 하는 [조건의] 족쇄들은 제거하지 못했다(uppattipaṭilābhik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honti. bhavapaṭilābhikāni appahīnāni honti).”는 구절을 들 수 있다.(보디 스님, 1902~1903쪽 65번 주해 참조) 더 자세한 논의는 Harvey, The Selfless Mind, pp.98~108을 참조할 것.]
[ so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s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자극을 통해서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so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자극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 “kathañca, bhikkhave, puggalo diṭṭheva dhamme s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idha, bhikkhave, bhikkhu asubhānupassī kāye viharati, āhāre paṭikūlasaññī,
sabbaloke anabhiratisaññī, sabbasaṅkhāresu aniccānupassī.
maraṇasaññā kho panassa ajjhattaṃ sūpaṭṭhitā hot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금여기에서 정력적인 노력으로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 대해서 부정함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음식에 혐오하는 인식을 가지고,
온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모든 형성된 것들에 대해서 무상하다고 관찰하고,
안으로 죽음의 인식이 잘 확립되어 있다.
so imāni pañca sekhabalāni upanissāya viharati —
saddhābalaṃ, hiribalaṃ, ottappabalaṃ, vīriyabalaṃ, paññābalaṃ .
그는 믿음의 힘, 양심의 힘, 수치심의 힘, 정진의 힘, 통찰지의 힘인
다섯 가지 유학의 힘을 의지하여 머문다.
tassimāni pañcindriyāni adhimattāni pātubhavanti —
saddhindriyaṃ, vīriyindriyaṃ, satindriyaṃ, samādhindriyaṃ, paññindriyaṃ.
so imesaṃ pañcannaṃ indriyānaṃ adhimattattā diṭṭheva dhamme s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evaṃ kho, bhikkhave, puggalo diṭṭheva dhamme s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그에게는 믿음의 기능과 정진의 기능과 마음챙김의 기능과 삼매의 기능과 통찰지의 기능인
다섯 가지 기능[五根]이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그의 다섯 가지 기능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지금여기에서 정력적인 노력으로 완전한 열반을 증득한다.
“kathañca, bhikkhave, puggalo kāyassa bhedā s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idha, bhikkhave, bhikkhu asubhānupassī kāye viharati, āhāre paṭikūlasaññī,
sabbaloke anabhiratisaññī, sabbasaṅkhāresu aniccānupassī.
maraṇasaññā kho panassa ajjhattaṃ sūpaṭṭhitā hoti.
so imāni pañca sekhabalāni upanissāya viharati —
saddhābalaṃ, hiribalaṃ, ottappabalaṃ, vīriyabalaṃ, paññābalaṃ.
tassimāni pañcindriyāni mudūni pātubhavanti —
saddhindriyaṃ, vīriyindriyaṃ, satindriyaṃ, samādhindriyaṃ, paññindriyaṃ.
so imesaṃ pañcannaṃ indriyānaṃ muduttā kāyassa bhedā s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evaṃ kho, bhikkhave, puggalo kāyassa bhedā s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사람이 몸이 무너지고 난 뒤
정력적인 노력으로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 대해서 부정함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
믿음의 힘, 양심의 힘, 수치심의 힘, 정진의 힘, 통찰지의 힘인
다섯 가지 유학의 힘을 의지하여 머문다.
그에게는 믿음의 기능과 정진의 기능과 마음챙김의 기능과 삼매의 기능과 통찰지의 기능인
다섯 가지 기능[五根]이 약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그의 다섯 가지 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몸이 무너지고 난 뒤
정력적인 노력으로 완전한 열반을 증득한다.
“kathañca, bhikkhave, puggalo diṭṭheva dhamme 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idha, bhikkhave, bhikkhu
vivicceva kāmehi ... pe ... paṭhamaṃ jhānaṃ ... pe ... dutiyaṃ jhānaṃ ... pe ...
tatiyaṃ jhānaṃ ... pe ...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so imāni pañca sekhabalāni upanissāya viharati — saddhābalaṃ ... pe ... paññābalaṃ.
tassimāni pañcindriyāni adhimattāni pātubhavanti — saddhindriyaṃ ... pe ... paññindriyaṃ.
so imesaṃ pañcannaṃ indriyānaṃ adhimattattā diṭṭheva dhamme 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evaṃ kho, bhikkhave, puggalo diṭṭheva dhamme 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금여기에서 정력적인 노력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고,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 제3선(三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그에게는 믿음의 기능과 정진의 기능과 마음챙김의 기능과 삼매의 기능과 통찰지의 기능인
다섯 가지 기능[五根]이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그의 다섯 가지 기능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지금여기에서 정력적인 노력 없이 완전한 열반을 증득한다.”
“kathañca, bhikkhave, puggalo kāyassa bhedā 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idha, bhikkhave, bhikkhu vivicceva kāmehi ... pe ... paṭhamaṃ jhānaṃ ... pe ...
dutiyaṃ jhānaṃ ... pe ... tatiyaṃ jhānaṃ ... pe ...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so imāni pañca sekhabalāni upanissāya viharati —
saddhābalaṃ, hiribalaṃ, ottappabalaṃ, vīriyabalaṃ, paññābalaṃ.
tassimāni pañcindriyāni ... pe ... paññindriyaṃ.
so imesaṃ pañcannaṃ indriyānaṃ muduttā kāyassa bhedā 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evaṃ kho, bhikkhave, puggalo kāyassa bhedā 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사람이 몸이 무너지고 난 뒤
정력적인 노력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고,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 제3선(三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그에게는 믿음의 기능과 정진의 기능과 마음챙김의 기능과 삼매의 기능과 통찰지의 기능인
다섯 가지 기능[五根]이 약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그의 다섯 가지 기능이 약하기 때문에 몸이 무너지고 난 뒤
정력적인 노력 없이 완전한 열반을 증득한다.
ime kho, bhikkhave, cattāro puggalā santo saṃvijjamānā lokasmin”ti.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 “idha, gahapati, bhikkhu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장자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뭅니다.
so iti paṭisañcikkhati — ‘idampi kho paṭhamaṃ jhānaṃ abhisaṅkhataṃ abhisañcetayitaṃ’.
‘yaṃ kho pana kiñci abhisaṅkhataṃ abhisañcetayitaṃ, tadaniccaṃ nirodhadhamman’ti pajānāti.
so tattha ṭhito āsavānaṃ khayaṃ pāpuṇāti;
그는 이와 같이 숙고합니다.
'이러한 초선은 형성되었고 의도되었다.'라고, 그리고 그는
'형성되고 의도된 것은 그 무엇이건, 무상하고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꿰뚫어 압니다.
그는 여기에 확고하여 번뇌가 다함을 얻습니다.(아라한)]
[ “kathañca, bhikkhave, bhikkhu passaddhakāyasaṅkhāro hoti?
idha, bhikkhave,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 adukkhamasukhaṃ
upekkhāsatipārisuddhi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passaddhakāyasaṅkhāro hot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몸의 의도적 행위[身行]가 고요한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의 의도적 행위가 고요하다.]
[ “ariyo panāyye, aṭṭhaṅgiko maggo saṅkhato udāhu asaṅkhato”ti?
“ariyo kho, āvuso visākha, aṭṭhaṅgiko maggo saṅkhato”ti.
스님, 그러면 성스러운 팔정도는 형성된 것 입니까, 아니면 형성된 것이 아닙니까?
도반 위사카여, 성스러운 팔정도는 형성된 것입니다.]
[ “katamo panāyye, kāyasaṅkhāro, katamo vacīsaṅkhāro, katamo cittasaṅkhāro”ti?
“assāsapassāsā kho, āvuso visākha, kāyasaṅkhāro,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ti.
스님, 무엇이 몸의 작용이고, 무엇이 말의 작용이고, 무엇이 마음의 작용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들숨과 날숨이 몸의 작용이고,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이 말의 작용이고,
인식[想]과 느낌[受]이 마음의 작용입니다.]
行은 無常, 苦, 非我
[ saṅkhāre parato ñatvā, dukkhato no ca attato.]
[ “uppādā vā, bhikkhave, tathāgatānaṃ anuppādā vā tathāgatānaṃ,
ṭhitāva sā dhātu dhammaṭṭhitatā dhammaniyāmatā.
sabbe saṅkhārā aniccā. <* saṅkhārā dukkhā,> taṃ tathāgato abhisambujjhati abhisameti.
abhisambujjhitvā abhisametvā ācikkhati deseti paññāpeti paṭṭhapeti vivarati vibhajati uttānīkaroti —
‘sabbe saṅkhārā aniccā’ti.
비구들이여,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는 것은
여래들께서 출현하신 후거나 출현하시기 이전에도
존재하는 요소(界)이며, 법으로 확립된 것이고, 법으로 결정된 것이다.
여래는 이것을 투철하게 깨달았고 관통하였다.
투철하게 깨닫고 관통한 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고
알게 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한다.]
[ avijjāpaccayā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
avijjāya tveva asesavirāganirodhā saṅkhāranirodho, saṅkhāranirodhā viññāṇanirodho ]
[ chandasamā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aṃ iddhipādaṃ bhāveti...
vīriyasamā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aṃ iddhipādaṃ bhāveti...
cittasamā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aṃ iddhipādaṃ bhāveti...
vīmaṃsāsamādhipadhānasaṅkhārasamannāgataṃ iddhipādaṃ bhāveti....]
[ so evaṃ pajānāti —
‘imassa kho me dukkhanidānassa saṅkhāraṃ padahato saṅkhārappadhānā virāgo hoti,
imassa pana me dukkhanidānassa ajjhupekkhato upekkhaṃ bhāvayato virāgo hotī’ti.
so yassa hi khvāssa dukkhanidānassa saṅkhāraṃ padahato saṅkhārappadhānā virāgo hoti,
saṅkhāraṃ tattha padahati. yassa panassa dukkhanidānassa
ajjhupekkhato upekkhaṃ bhāvayato virāgo hoti, upekkhaṃ tattha bhāveti.
tassa tassa dukkhanidānassa saṅkhāraṃ padahato saṅkhārappadhānā virāgo hoti —
evampissa taṃ dukkhaṃ nijjiṇṇaṃ hoti.
tassa tassa dukkhanidānassa ajjhupekkhato upekkhaṃ bhāvayato virāgo hoti —
evampissa taṃ dukkhaṃ nijjiṇṇaṃ hoti.
그는 다음과 같이 잘 안다. '내가 노력을 기울일 때605)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나에게 이 괴로움의 원인606)이 빛바랬다. 607)
안으로 평온할 때 평온을 닦았기 때문에 나에게 이 괴로움의 원인이 빛바랬다.'라고,
그는 그 괴로움의 원인이 노력을 기울일 때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빛바래므로
거기서 노력을 기울인다.
그는 그 괴로움의 원인이 안으로 평온할 때 평온을 닦았기 때문에 빛바래므로
거기서 평온을 닦는다.
그가 그 괴로움의 원인이 노력을 기울일 때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빛바래므로
거기서 노력을 기울여 이렇게 그의 괴로움이 다하게 된다.
그가 그 괴로움의 원인이 안으로 평온할 때 평온을 닦았기 때문에 빛바래므로
거기서 평온을 닦아 이렇게 그의 괴로움이 다하게 된다.”
605) '노력을 기울일 때'는 saṅkhāraṃ padahato를 옮긴 것인데 주석서에서 “노력을 쏟는(sampayoga-vīriyaṃ karontassa)”(MA.iv.11)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어 이렇게 옮겼다. 일반적으로 saṅkhāra는 주로 복수로 쓰여서 ① 일체 유위법(sabbe saṅkhārā, 諸行, 형성된 것들)이나 ② 오온 가운데 네 번째인 행온(saṅkhāra-kkkhanda, 심리현상들의 무더기)이나 ③ 12연기의 두 번째 각지(avijjapaccayā saṅkhārā,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들이 있다)로 나타난다. 그리고 단수로 쓰여 ④ 세 가지 의도적 행위, 즉 몸과 말과 마음의 의도적 행위[身行, 口行, 意行], 혹은 ⑤ 몸과 말과 마음의 작용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여기에 대해서는 『초기불교 이해』 127 ~ 129 쪽을 참조할 것.) 그러나 이렇게 노력(sampayoga-vīriya)이라는 뜻으로는 오직 본경에서만 사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606) “'이 괴로움의 원인은(imassa dukkha-nidānassa)'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이(imassa)'라는 것은 바로 현재의(paccuppannānaṃ) 오온의 뿌리가 되는 것(mūla-bhūtassa)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괴로움의 원인(dukkha-nidāna)'이란 갈애(taṇhā)를 말하며, 이 갈애는 오온의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는 말이다.” (MA.iv.11)
607) “'빛바랬다(virāgo hoti).'는 것은 도(magga)에 의해 빛바랜 것이다. 즉 노력을 기울임(saṅkhāra-pathāna)으로써 나에게 있던 이 괴로움의 원인이 빛바랬다는 뜻이다. 이렇게 잘 안다는 것은 도닦음이 쉽고(sukhā-paṭipadā) 초월지가 빠른 것(khippa-abhiññā)을 말한 것이다.(MA.iv.12)]
[ “idha pana, brāhmaṇa, ekacco na heva kho nimittena ādisati,
napi manussānaṃ vā amanussānaṃ vā devatānaṃ vā saddaṃ sutvā ādisati,
napi vitakkayato vicārayato vitakkavipphārasaddaṃ sutvā ādisati,
api ca kho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ṃ samāpannassa cetasā ceto paricca pajānāti —
‘yathā imassa bhoto manosaṅkhārā paṇihitā
imassa cittassa anantarā amuṃ nāma vitakkaṃ vitakkessatī’ti.
so bahuṃ cepi ādisati tatheva taṃ hoti, no aññathā. idaṃ vuccati, brāhmaṇa, ādesanāpāṭihāriyaṃ.
바라문이여, 그러나 여기 어떤 자는 드러나는 몸짓과 인간이나 비인간이나 신의 소리를 듣거나
혹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과 일으킨 생각의 여파로 인해 무의식으로 내는 소리를 듣고
[남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 없이 삼매에 들어
자기의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꿰뚫어 안다.
'이 존자는 심행(心行)이 잘 안정되었기 때문에 지금 이 마음 바로 다음에는
이러한 생각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그가 많은 사람에게 말을 하더라도 말한 대로 된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바라문이여, 이를 일러 [남의 마음을 알아] 드러내는 기적이라 한다.]
[ tasmiṃ pahīne tasmiṃ byantīkate athāparaṃ dhammavitakkāvasissati .
이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나면 이제 법에 대한 생각이 남게 될 것이다.
so hoti samādhi na ceva santo na ca paṇīto nappaṭippassaddhaladdho
na ekodibhāvādhigato sasaṅkhāraniggayhavāritagato hoti.
이러한 삼매는 평화롭지도 않고 수승하지도 않고 [오염원들을] 가라앉혀서 얻은 것도 아니고
단일한 상태를 증득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자극과 노력으로 [오염원들을] 억누르거나 차단하여 얻은 마음의 상태이다.
so, bhikkhave, samayo yaṃ taṃ cittaṃ ajjhattaṃyeva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비구들이여, 이런 마음을 안으로 확립하고 안정하고 하나에 고정하여 삼매에 들 때
so hoti samādhi santo paṇīto paṭippassaddhiladdho ekodibhāvādhigato
na sasaṅkhāraniggayhavāritagato.
yassa yassa ca abhiññā sacchikaraṇīyassa dhammassa cittaṃ abhininnāmeti
abhiññā sacchikiriyāya tatra tatreva sakkhibhabbataṃ pāpuṇāti sati satiāyatane.
그 삼매는 평화롭고 수승하고 [오염원들을] 가라앉혀서 얻은 것이고 단일한 상태를 증득한 것이다.
이것은 자극과 노력으로 [오염원들을] 억누르거나 차단하여 얻은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최상의 지혜로 실현시킬 수 있는 법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최상의 지혜로 그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가 마음을 기울이면
그런 원인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그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얻는다.]
[ panuṇṇapaccekasacco , bhikkhave, bhikkhu
‘samavayasaṭṭhesano passaddhakāyasaṅkhāro patilīno’ti vuccati.
비구들이여, 비구가 독단적인 진리를 버리고, 추구를 완전히 포기하고,
몸의 의도적 행위[身行]가 고요하면 그를 일러 '초연하다'고 한다.]
[ “tatra, bhikkhave, yvāyaṃ puggalo lābhī ajjhattaṃ cetosamathassa
na lābhī adhipaññādhammavipassanāya,
tena, bhikkhave, puggalena yvāyaṃ puggalo lābhī adhipaññādhammavipassanāya so upasaṅkamitvā
evamassa vacanīyo —
‘kathaṃ nu kho, āvuso, saṅkhārā daṭṭhabbā? kathaṃ saṅkhārā sammasitabbā?
kathaṃ saṅkhārā vipassitabbā’ ti?
tassa so yathādiṭṭhaṃ yathāviditaṃ byākaroti —
‘evaṃ kho, āvuso, saṅkhārā daṭṭhabbā, evaṃ saṅkhārā sammasitabbā,
evaṃ saṅkhārā vipassitabbā’ti.
so aparena samayena lābhī ceva hoti ajjhattaṃ cetosamathassa
lābhī ca adhipaññādhammavipassanāya.
비구들이여, 이 가운데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는 얻었지만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는 얻지 못한 사람은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를 얻은 사람을 찾아 그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어야 한다.
'도반이여, 형성된 것[行, saṅkhāra]들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형성된 것들을 어떻게 명상해야 합니까?
형성된 것들을 어떻게 깊이 관찰해야 합니까?'라고
그러면 그분은 그가 본대로 그가 체득한대로
'도반이여, 참으로 형성된 것들을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형성된 것들을 이렇게 명상해야 합니다. 형성된 것들을 이렇게 깊이 관찰해야 합니다.'라고
그에게 설명해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나중에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도 얻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도 얻을 것이다.]
[ “yāni kānici, bhikkhave, kulāni bhogesu mahattaṃ pattāni na ciraṭṭhitikāni bhavanti,
sabbāni tāni catūhi ṭhānehi, etesaṃ vā aññatarena. katamehi catūhi?
naṭṭhaṃ na gavesanti, jiṇṇaṃ na paṭisaṅkharonti, aparimitapānabhojanā honti,
dussīlaṃ itthiṃ vā purisaṃ vā ādhipacce ṭhapenti.
yāni kānici, bhikkhave, kulāni bhogesu mahattaṃ pattāni na ciraṭṭhitikāni bhavanti,
sabbāni tāni imehi catūhi ṭhānehi, etesaṃ vā aññatarena.
비구들이여, 재물을 많이 모은 가문은 어떤 가문이건 네 가지 이유 모두 때문에
혹은 이들 가운데 어떤 하나 때문에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무엇이 넷인가?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고, 낡은 것을 수선하지 않고,
절제 없이 먹고 마시고, 계행이 나쁜 여자나 남자를 요직에 앉힌다.
비구들이여, 재물을 많이 모은 가문은 어떤 가문이건 이러한 네 가지 이유 모두 때문에
혹은 이들 가운데 어떤 하나 때문에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 atha kho, brāhmaṇa dhammika, sakko devānamindo
tathārūpaṃ iddhābhisaṅkhāraṃ abhisaṅkhāsi ,
yathā bhusā vātavuṭṭhi āgantvā suppatiṭṭhaṃ nigrodharājaṃ pavattesi ummūlamakāsi.
담미까 바라문이여, 그때 신들의 왕 삭까는
강한 바람을 동반한 비를 내리게 하여 쑵빠띳타 니그로다 나무를 쓰러뜨리고 뿌리를 뽑아버리는
그러한 신통력을 나투었다.]
[ atha kho bhagavā tathārūpaṃ iddhābhisaṅkhāraṃ abhisaṅkhāsi
yathā addasa ambaṭṭho māṇavo bhagavato kosohitaṃ vatthaguyhaṃ.
atha kho bhagavā jivhaṃ ninnāmetvā ubhopi kaṇṇasotāni anumasi paṭimasi,
ubhopi nāsikasotāni anumasi paṭimasi, kevalampi nalāṭamaṇḍalaṃ jivhāya chādesi.
그러자 세존께서는 암밧타 바라문 학도가 음경이 감추어진 것이
마치 말의 그것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도록 그런 형태의 신통변화를 나투셨다.
그 다음에 세존께서는 혀를 빼서 두 귓구멍을 이리저리 건드리셨고
두 콧구멍을 이리저리 건드리셨고 온 이마를 혀로써 덮으셨다.]
[ “atha kho, bhikkhave, rathakāro yaṃ taṃ cakkaṃ chahi divasehi niṭṭhitaṃ taṃ pavattesi.
taṃ pavattitaṃ samānaṃ yāvatikā abhisaṅkhārassa gati tāvatikaṃ gantvā ciṅgulāyitvā
bhūmiyaṃ papati.
yaṃ pana taṃ cakkaṃ chahi māsehi niṭṭhitaṃ chārattūnehi taṃ pavattesi.
taṃ pavattitaṃ samānaṃ yāvatikā abhisaṅkhārassa gati tāvatikaṃ gantvā
akkhāhataṃ maññe aṭṭhāsi.
비구들이여, 그때 마차공은 먼저 6일 만에 만든 바퀴를 굴렸다.
그것은 힘이 미친 곳까지 가서 선회하고는 땅바닥에 넘어졌다.
[이번에는] 6일을 제외한 6개월을 걸려 만든 바퀴를 굴렸다.
그것은 굴러 힘이 미친 곳까지 가서 차축에 끼워 넣어진 것처럼 멈추었다.]
* abhisaṅkhāra:m. [cf. abhisaṅkharoti] 行作,為作(造作); 準備,備蓄.
saṅkharoti:[saṃ + kar + o] restores; prepares; puts together.
[ ‘alaṃ, bho, mamāpidaṃ pahūtaṃ sāpateyyaṃ dhammikena balinā abhisaṅkhataṃ;
tañca vo hotu, ito ca bhiyyo harathā’ti.
'존자들이여, 이러한 것은 나의 수많은 재물들로도 충분하오.
그것은 법답게 모은 세금들이오. 그러니 그대들 것은 그대들이 가지시고 이것을 더 가져가시오.']
[ te pañhaṃ abhisaṅkharonti —
‘imaṃ mayaṃ pañhaṃ samaṇaṃ gotamaṃ upasaṅkamitvā pucchissāma.
evaṃ ce no puṭṭho evaṃ byākarissati, evamassa mayaṃ vādaṃ āropessāma.
evaṃ cepi no puṭṭho evaṃ byākarissati, evampissa mayaṃ vādaṃ āropessāmā’ti.
그들은 질문을 미리 준비합니다.
‘우리는 사문 고따마에게 가서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질문을 받으면 그는 이와 같이 설명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이 논파할 것이다.
다시 이와 같이 우리의 질문을 받으면 그는 이와 같이 설명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또 이와 같이 논파할 것이다.]
[ “tatheva saddho sutavā, abhisaṅkhacca bhojanaṃ.
vanibbake tappayati, annapānena paṇḍito.
“āmodamāno pakireti, detha dethāti bhāsati.
믿음 · 배움 갖춘 현자, 음식을 준비해서
먹을 것 마실 것으로 걸식자를 만족케 하니
기뻐하는 보시자는 공양물을 나누면서
‘보시하서, 보시하세’ 말하면서 찬양하네.]
[ “kati panāvuso,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ṭhitiyā”ti?
“tayo kho, āvuso,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ṭhitiyā —
sabbanimittānañca amanasikāro, animittāya ca dhātuyā manasikāro, pubbe ca abhisaṅkhāro.
ime kho, āvuso, tayo paccayā animittāya cetovimuttiyā ṭhitiyā”ti.
도반이시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조건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모든 표상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과 표상이 없는 요소를 마음에 잡도리함과
이 증득에 들기 전의 결심입니다.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 bhūtapubbaṃ, bhante, aññataro puriso divā sūpeyyaṃ labhitvā evamāha —
‘handa ca imaṃ nikkhipatha, sāyaṃ sabbeva samaggā bhuñjissāmā’ti.
yā kāci, bhante, saṅkhatiyo sabbā tā rattiṃ, appā divā.
te mayaṃ, bhante, bhagavati pemañca gāravañca hiriñca ottappañca sampassamānā
evaṃ taṃ rattiṃvikālabhojanaṃ pajahimhā.
세존이시여, 전에699) 어떤 사람이 오후에 국을 얻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이것을 남겨두었다가 저녁에 모든 것을 함께 모아서 먹어야겠다.
세존이시여, 모든 특별한 요리는 저녁에 하고 낮에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700)
그러나 저희들은 세존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존경과,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보면서
이와 같이 적당한때가 아닌 저녁에 음식을 먹는 것을 버렸습니다.
699) “'전에(bhūtapubbaṃ)'라고 시작하는 이 대목은 사람들이 저녁에 음식 먹는 것(ratti-bhojana)을 더 좋아함(paṇīta-bhāva)을 보여주는 것이다.” (MA.iii.163)
700) “'모든 특별한 요리는 저녁에 하고 낮에는 거의 하지 않는다(yā kāci saṅkhatiyo sabbā tā rattiṃ, appā divā).'라고 했다. 여기서 특별한 요리(saṅkhatiyo)란 특별히 준비하는 음식들(abhisaṅkhārika-khādanīyāni)을 말한다. 이러한 음식들은 모두 저녁에 하고, 낮에는 아주 조금만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낮에는 우유죽이나 흰죽(yāgu-kañjiya) 등을 먹고 생활하지만 저녁에는 원하는 만큼 맛있는 음식을 먹기 때문이다.”(MA.ili.164)]
[ sītaṃ, uṇhaṃ, jighacchā, pipāsā, uccāro, passāvo, kāyasaṃvaro, vacīsaṃvaro, ājīvasaṃvaro,
ponobhaviko bhavasaṅkhāro — ime kho, bhikkhave, dasa dhammā sarīraṭṭhā”ti.
차가움, 더움, 배고픔, 목마름, 대변, 소변, 몸의 단속, 말의 단속, 생계의 단속,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존재를 형성하는 업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열 가지는 몸과 본디부터 함께 한다.]
[ āyusaṅkhāra] [ bhavasaṅkhāra] [ jīvitasaṅkhāra]
첫댓글
예전에 saṅkhāra(行)의 의미에 대해 올려 둔 내용의 수정-보완입니다.
핵심 교리의 완결판 이네요.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금여기에서 정력적인 노력으로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 대해서 부정함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음식에 혐오하는 인식을 가지고,
온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모든 형성된 것들에 대해서 무상하다고 관찰하고,
안으로 죽음의 인식이 잘 확립되어 있다'
핵심목표가 잘 표현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