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겨울의 끝을 알리는 입춘도 지나고 4월이 되었는데도 숲에는 눈이 몇 차례나 더 왔습니다. 그러나 따뜻한 햇살 덕분에 눈은 금세 녹아 눈길에 막혀 고립될 일은 없을 듯합니다. 그동안 방 안에만 갇혀 움츠려 있던 마음의 갑갑증도 털 겸 텃밭도 갈 겸 마당에 나가 괭이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 달리 땅은 아직 덜 녹아서 괭이가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힘을 내 땅을 파보니 겨울 내내 한기를 받아들여 얼어 들어간 깊이가 15센티미터 정도는 되었습니다. 괭이질을 하다 말고 그 15센티미터의 의미를 잠시 생각해 봅니다. 땅은 겨울철에 그 깊이만큼 찬 기운을 빨아들여 그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한기가 덜 스미게 하고, 그 아래쪽으로는 작은 벌레들이 따뜻하게 겨울을 나고 온갖 풀뿌리들이 얼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품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몸도 자연의 일부인지라 혹한의 겨울을 나는 지혜가 갖춰져 있습니다. 그걸 인체의 자기 조절 능력이라고 하는 거겠지요? 이런 자연 속에 어울려 살다보면 기온의 변화에 따라서 몸도 적응을 하고 웬만한 추위는 견딜 만해지지요. 모처럼 도시에 나가면 “산에서 얼마나 추웠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온 땅을 덮어버린 아스팔트와 시멘트 건물이 오히려 겨울의 한기를 반사시켜서 참을 수 없을 만큼 춥고, 반대로 여름엔 찔 듯이 덥지요.
해발 1,100고지 숲에 봄은 아주 천천히 다가오지만, 그래도 풀과 꽃들은 서서히 녹기 시작하는 땅 위로 겨우내 그립던 연초록 새싹들을 내놓으며 저의 눈을 즐겁게 해줍니다. 땅이 녹고 살이 드러나기 시작할 무렵 단색의 숲을 가장 먼저 채색하는 것은 개동박나무(생강나무)의 수줍게 터진 노란 꽃망울들입니다. 꽃망울 틈새로 뿜어 나오는 은은한 향기는 산바람을 타고 내려와 텃밭에서 나물을 캐고 있는 내 등 뒤에 살며시 머뭅니다. 설레고 들뜬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서둘러 호미질을 해보는데,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있는지 겨울을 잘 지낸 작은 생명들이 여기저기서 반가운 인사를 해옵니다.
길고 가녀린 이파리로 돌 틈에 끼여 굳건히 생명을 지켜온 야생 달래, 납작 엎드려 땅의 기운을 뿌리에 담아내는 듯한 냉이, 고들빼기와 사촌지간으로 홀로 있기 싫었던지 여러 포기가 함께 얽히고설켜 있는 속새(씀바귀), 살짝 데치면 향기가 좋아지는 좁쌀나물, 어디서든 생명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숲속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다가 이곳에 뿌리를 박고 앉은 하얀 민들레, 강인한 생명력으로 밟혀야만 씨앗을 퍼뜨리는 질경이, 바싹 마른 풀섶에 몸을 숨긴 채 ‘모두 나왔나?’ 귀를 쫑긋 세우고 내다보는 듯한 원추리와 산마늘, 연한 가시가 돋아 있어 손대면 찔러대는 이른 봄철의 엉겅퀴…….
엉겅퀴는 뿌리가 달고 맛이 좋아 땅속의 벌레들이 좋아하는데, 나도 얼른 몇 뿌리 캐어보니 벌써 벌레들이 다 먹고 난 뒤였습니다. 엉겅퀴와 비슷한 고려엉겅퀴라는 이름을 가진 곤드레도 마치 땅속의 비밀을 품고 있는 듯 신비로운 보랏빛의 어린 이파리들을 땅 위로 내놓고 있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새콤한 맛을 지닌 수영(산시금치)과 소루쟁이, 한 무더기로 무리지어 올라온 쑥부쟁이와 망초,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이파리가 돌아가는 활량나물, 꽃대가 함께 올라오는 모습이 마치 중이 머리 깎은 모양 같다고 강원도 사람들이 중댕가리 또는 줄댕가리라고 부르는 쥐오줌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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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동박나무 꽃차 ⓒ용서해 |
봄의 생명들과 이제 인사는 그만하고 이렇게 귀한 생명들을 가지고 어떻게 소통을 해야 소중한 요리로 누군가의 치유에 도움이 되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식물들이 품고 있는 향과 맛을 그대로 존중하기로, 그래서 되도록이면 향과 맛을 없애는 인위적인 재료를 섞지 않기로 했습니다.
호스피스 요리사라는 이름으로 숲에 들어와 치유 음식을 연구하면서 가장 먼저 버린 것 중 하나는 각각의 식용 식물이 지닌 약성만을 따져서 몸의 어디에 좋고 어떤 병에 치유 효과가 있다는 식의 관념이었습니다. 얼마만큼 먹느냐에 따라 그것이 약이 될 수도 있지만 지나치게 먹으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나아가서는 식물의 약성과 독성을 아는 것보다도 자연의 순리를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이 살고 죽는 것도 결국 자연의 이치를 벗어날 수 없고, 자연의 순리를 따를 때 몸과 마음의 치유 또한 훨씬 쉬워지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자연에서 배운 것들을 치유를 원하는 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제가 치유 음식과 더불어 나누고 싶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야생의 재료로 만든 요리를 맛보면서 “이것은 우리 몸 어디에 좋아요?”라고 묻곤 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어디에 좋다고 해서 그것만 먹는다면 몸의 다른 곳에는 독이 될 겁니다.” 이제 계절이 변할 때마다 새롭게 돋아나는 식물들이 제각기 품고 있는 맛과 향기를 맡으며 내 몸을 거기에 맡겨보면 어떨까요? 식물이 지닌 약성에 집착하기보다는 그것이 지닌 자연스런 본성에 몸을 내맡기는 거죠.
숲속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식물들 중에서 이른 봄소식을 자신만의 독특한 향기를 통해 알리는 개동박나무의 노란 꽃 향기가 사라질 즈음 피어나는 어린잎에서는 은은한 생강의 향기가 나는데, 그 때문에 개동박나무는 우리에게 생강나무라고 더 많이 알려져 있지요.
저는 밭일을 하다가 꽃과 어린잎을 따서 즉석에서 들차를 만들어 여유롭게 마시기도 하는데요. 산에 들어오기 전 이 생강나무 잎과 레몬을 넣어 효소를 만든 다음 여름에 그것을 가지고 셔벗을 만들어 먹어본 적이 있습니다. 은은한 생강 향과 레몬의 새콤한 맛이 어찌나 시원하고 좋던지! 그러나 산에는 전기가 없어서 셔벗을 만들 수 없으니 기억 속에서만 그 맛을 볼 따름이죠. 그 대신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는 이른 봄, 개동박나무 꽃과 이른 진달래꽃 차의 향기로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밥이 뜸들 때 개동박나무 꽃을 고루 넣은 꽃밥을 지어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넉넉하게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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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동박나무잎 셔벳 ⓒ용서해 |
수영을 이용한 샐러드와 당귀피클초밥
저는 텃밭을 ‘즉석 야채 코너’라고 부르는데, 산자락의 텃밭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야생풀이 소쿠리에 가득해집니다. 그 중에서도 수영(산시금치)을 보는 순간 입안에서 자꾸만 침이 돌아 집안에 보관해 둔 다른 재료들을 섞어 샐러드 한 접시를 만들어보았습니다. 항아리를 뒤져보니 잣 몇 알이 남아 있고, 지인이 방문하면서 가져온 방울토마토도 조금 있습니다.
먼저, 텃밭에서 키우는 오크잎(서양 상추의 하나)과 수영을 접시에 담고 방울토마토도 반으로 갈라 담습니다. 들기름, 오미자 간장(3년 전에 야생 오미자를 넣어 간장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집 간장과 함께 오미자 효소를 넣어도 됩니다), 오미자 효소를 입맛대로 넣어 나름의 황금 비율로 소스를 만들어서 그 위에 뿌립니다.
수영, 소루쟁이, 싱아 같은 풀들은 품고 있는 신맛이 아주 강해서 레몬이라든지 초를 넣지 않아도 자연 그대로의 새콤한 맛을 볼 수 있답니다. 자연의 풀에서 맛볼 수 있는 부드러운 신맛에 길들여지면 인위적으로 만든 식초가 얼마나 목을 자극하는지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이제 마지막으로 감초가루와 파마산 치즈, 잣 몇 알을 뿌리면 아주 훌륭한 숲속 비타민C 샐러드가 완성됩니다.
야생에서 자란 풀들과의 만남은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먹을거리들과의 만남과는 견줄 수 없는, 아주 귀한 생명들과의 만남입니다. 날이 점점 풀리면 이제 개미취, 미역취, 곰취, 수리취, 나물취, 누리대, 단풍취와도 만날 수 있습니다. 가끔 지인들이 찾아오면 저는 마치 백화점의 야채 코너에서 장을 보듯 저만의 즉석 야채 코너로 바구니를 들고 나갑니다. 꼭 지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도 저는 매일 그곳을 한 바퀴 돌면서 바구니에 나물과 어린 순들을 뜯어오지요. 그것들을 삶아서 말린 뒤 장아찌도 담그고 피클도 담그는데요. 그것들은 다음번 겨울을 나면서 먹을 소중한 먹을거리가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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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귀 장아찌 ⓒ용서해 |
봄이 되면 제가 유난히 기다리는 약초 하나가 당귀입니다. 당귀(當歸)라는 이름의 뜻은 ‘마땅히 돌아와야 한다’는 것인데요. 옛날 전쟁에 나가는 남편을 위해 아낙네들이 남편의 가슴에 당귀 한 뿌리씩 품게 해서 보냈다고 해요. 당귀를 먹으면 피의 생성이 빨라진답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리게 되면 상비약으로 먹고 꼭 살아서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았겠지요? 치주염이나 잇몸염에도 좋다고 하는데, 잇몸이 좋지 않은 저는 당귀 순이 올라오면 수시로 이파리를 따다가 쌈으로도 먹고 장아찌로 담아서 1년 내내 먹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날 치과에 갔더니 예전보다 잇몸이 좋아졌다고 하더군요. 그 후에도 저는 당귀 잎을 여러 가지로 응용해서 먹곤 해요. 수영이 나오는 봄철에는 이 수영과 함께, 당귀로 만든 피클을 이용해서 초밥을 만들기도 합니다.
당귀 피클은 보통 물, 간장, 설탕, 식초를 넣어서 담그는데 그렇게 하면 너무 짜서 몇 잎 안 먹어도 금방 갈증이 납니다. 그리고 물이 들어가면서 발효가 일어나 냉장고 없이는 오래 보관하기도 어렵게 되고요. 이때 술을 끓여서 좀 부어주면 보관기간도 늘어나고 짠맛도 잡을 수 있습니다. 저는 다른 요리에도 술을 많이 이용하는 편인데, 피클을 담글 때는 화이트 와인을 주로 사용합니다.
화이트 와인을 팔팔 끓여서 알코올 성분을 날린 뒤 식혔다가 용기에 담아서 집 간장, 당귀효소, 양조식초(직접 만든 것)를 넣고 입맛에 맞게 간을 맞춘 다음, 당귀를 넣고 당귀가 국물 위로 떠오르지 않도록 돌로 꾹 눌러주고 뚜껑을 닫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안에 국물만 따라내 한 번 더 끓여서 식힌 다음 다시 재료에 붓습니다. 완성된 피클은 냉장고에 넣지 않아도 1년 이상 보관이 가능해요. 피클 국물은 볶음 요리에 소스로 사용하기도 하고, 다른 피클을 담글 때 다시 사용해도 좋습니다. 저는 2년 된 국물로 계속 당귀 피클을 만드는데 오히려 그 향이 깊어져서 맛이 더 깊게 우러납니다.
초밥의 생명은 밥이 고슬고슬하게 살아있느냐에 있다고 하죠?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혀의 즐거움보다 몸이 소화하기 좋게 먹는 것이 아닐까요? 고슬고슬하게 밥을 지으려 애쓰기보다는 자신의 소화력에 맞게 밥을 짓는 것이 좋고, 뜨거울 때 미리 만들어놓은 천연 초 소스로 간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천연 초 소스는 바로 수영을 이용해 만드는데요. 이렇게 만든 초는 시중에서 파는 식초보다 새콤한 맛이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러워서 넘길 때 목이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먼저 수영 한 줌을 팔팔 끓는 물에 넣고 신맛이 우러나게 끓입니다. 수영 우린 물에 소금과 간장, 겨자, 효소로 입맛에 맞는 초밥용 초 소스를 만들면 됩니다. 이제 밥이 뜨거울 때 이를 식혀가면서 초 소스와 버무린 후 한 입 크기로 알맞게 뭉친 다음, 당귀 피클을 뭉친 밥 위에 올립니다. 그리고 접시에 토마토와 오이를 담고 그 위에 다 된 초밥을 올리면 끝입니다. 혹시라도 밥맛이 싱거우면 남은 초 소스에 찍어 먹으며 간 조절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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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영을 이용한 당귀 피클 초밥 ⓒ용서해 |
저는 마침 진달래꽃이 한창 피었기에 초밥 위에 몇 잎 올려봤습니다. 숲에서는 5월 초순께면 진달래꽃을 따기가 아주 좋은 시기입니다. 꽃의 향기는 벌이 모여드는 때가 가장 좋은데 바로 이때가 벌이 모여드는 때이지요. 벌에 쏘일 염려도 없습니다. 벌들도 꿀을 먹기에 바쁘고 저도 꽃을 따기에 바빠서 서로 상관을 하지 않거든요. 집에 돌아와서는 진달래꽃으로 식초도 만들고, 온돌방에 꽃잎을 말려 돌아오는 겨울날 봄이 그리워지면 진달래 꽃차도 끓여 마시려고 준비합니다. 특히 진달래꽃은 기관지에 좋다고 하니 기관지가 약한 저는 아껴서 마셔봐야겠습니다.
봄날이라지만 날씨가 아직 쌀쌀할 때는 한기 때문에 초밥이 체하지 않을까 걱정될 수도 있겠지만, 초 소스에 들어간 수영이 위장의 기능을 강화시켜 주므로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이렇게 수영과 당귀 등을 이용해 만든 초밥 점심을 들고 숲에 들어가 진달래꽃 차와 함께 걱정 없이 먹어봅니다.
숲에는 어느새 찔레나무, 두릅, 개두릅, 산오갈피, 뽕나무도 이어서 저마다 새순을 피워내고, 산더덕, 오미자, 산머루, 다래는 덩굴을 만들기 위해 순을 뻗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는 제 손이 모자랄 정도로 바빠진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 속의 ‘즉석 야채 코너’는 저만 이용하는 게 아닙니다. 고라니, 노루, 산돼지 등 야생 동물도 수시로 와서 풀들을 뜯어먹고 가지요. 동물들은 먹고 난 배설물을 그곳에 남겨두기까지 합니다. 배설물은 씨앗을 퍼뜨리기도 하고 썩어서 풀과 나무의 거름이 되기도 하고요. 이것이 바로 자연이 순환하는 방식이지요. 그렇게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이 봄의 풍요로운 먹을거리들이 생겨나고, 그것들은 저 같은 인간에게도 1년을 지낼 수 있는 양식을 공짜로 제공해 줍니다.
용서해 교향악단에서 24년간 활동한 플루티스트. 호스피스 센터에서 말기 암 환자들을 위한 음악 봉사를 했고, 이들이 먹는 문제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호스피스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어 요리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환자와 가족들을 초대해 함께 음식을 먹고 이야기 나누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용서와 화해, 평화 속에 보낼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이야기를 담은 저서로 <삶의 마지막 축제>(샨티, 201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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