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의 어린 시절
[봉하마을]
[가난과 학교]
[소년의 우상]
[백지동맹]
[부산일보와 정수장학회]
[부산상고]
[고시공부]
[만기전역]
[권양숙]
[노건평]
[사법고시 합격]
[고졸판사]
<라봉봉>
[봉하마을]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노무현 ,
노무현은 1946년 9월 1일(양력)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빈농 가정에서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의
2녀 3남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노무현 일가 , 노무현재단
노무현의 아버지 노판석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지만
일제강점기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타이어 매매업을 하며 돈을 모으다
어머니가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서 전재산을 날려먹었고
이전부터 아버지는 내성적이고 온순한 성격에
가장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는데
반대로 어머니는 동네에서 소문날정도로
야무지고 말잘하는 똑순이로 통했기에
이후부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구박받으며
무기력하게 지냈고
집안 주도권이 어머니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노무현은 어머니가 40살이 넘은 나이에 낳기도 하고
난산(순조롭지 못한 출산) 으로 태어났고
노무현이 태어난 날 집에 먹을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노무현의 누나가 옆집에 가서
<노무현 누나>우리 엄마가 아이를 낳았는데
먹을 것이 없다
말해서 이웃사람이 쌀을 조금 주었습니다
노무현 아버지는 일본인 마름을 하던 동네 유지와
이웃사람들 사이에 땅 분쟁이 일어날때 약자인 이웃을 도와주다
곤란을 겪기도 했고
노무현 어머니는 워낙 가난에 한이 맺혀있어
아들이 출세해서 집안을 일으켜 주기를 바랬습니다
가난했던 환경적 요소로
노무현은 무엇을 해도 지기를 싫어했고
반항적이고 자의식 강한 소년으로 자라납니다
[가난과 학교]
학교에서도 가난한집 아이와 부잣집 아이가 대놓고 차별됬는데
학교 정문은 괜찮은 옷차림과 학용품을 가진 읍내아이들이 들어다녔고
노무현같은 가난한 아이들은 10리길을 걸어
학교 뒷문으로 다녔습니다
대창초등학교시절 노무현 (노무귀엽ㅋㅋ)
노무현은 가난했기에
초등학교 시절에도 크레파스가 없어서
미술시간에 꿀밤을 맞고 꾸중을 듣거나
회비를 내지 못해 여러번 교실에서 쫓겨났고
이유없이 친구의 새가방을 망가뜨리는 등
가난한 환경속에서 노무현의 반항아 기질이 싹트게 됩니다
그러나 노무현은 연설을 잘하는 어린이었기에
초등학교때 좋은 담임선생님을 만나서
1958년 4월 25일 대창초등학교 6학년때
전교 회장으로 뽑혔고
이때부터 어린 노무현은 자신감을 가지고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대창초 6학년 담임교사 신종생>
전교회장선거에 나가보라 권유했더니
처음엔
'안나간다'
고 했다그래
'자기 성취에 좋은 동기가 된다'
고 설득했다
운동장에서 회장 출마 소견 발표가 있었는데
'내가 이래 고추가 작아도 맵습니다'
고 좌중을 웃기면서 연설했다 (ㅋㅋㅋㅋㅋ)
웅변을 아주 잘했다
[소년의 우상]
어린 노무현에게는
존경하는 우상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마을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던
큰형 노영현이었고
노영현은 부산대 법대에 다닌 엘리트였는데
부모가 가난한 살림에서도
논밭을 팔아 학비를 댈 정도로 집안의 희망이었고
외모도 훌륭하고 성품도 온화해서
노무현의 정신적 지주이자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친형이었습니다
노영현은 집에 친구들을 데려와 시국토론을 하곤 했는데
노무현은 어려운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막연히 대단한 느낌을 받았고
노무현의 잔트가르(최강의 남자 , 영웅)였던 노무현의 큰형 , 육룡이 나르샤 명장면
초등학교 졸업후
노무현이 중학교 입학을 하려했는데
너무 가난해서 중학교 입학 등록금 낼 형편이 안됬기에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가
복숭아 농사를 지어 입학금을 낼테니 우선 입학을 시켜달라 간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어린 노무현은 이때 굴욕과 모멸감에
교감선생 앞에서 원서를 찢어버렸는데
화가난 교감선생은
<교감>이런 놈 공부시켜봐야
깡패밖에 안된다
며 더욱 거절했고
다음날 큰형 노영현이 학교에 찾아와
교감의 비교육적 언사에 대해
항의에 겨우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백지동맹]
중학시절 소년 노무현은
아파서 결석도 많이했고
친구들과 학교 땡떙이 친날도 많있지만
나름 공부는 잘했고
진영중학교시절 노무현 , 사람사는세상
당시는 이승만 자유당 독재 정부 말기였고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앞두고
학교에서 대통령 찬양 글짓기 행사를 열었는데
(이승만 자유당정부때는 이승만이 신성시되는
사회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화임)
이승만 자유당시절 남산에 있던 25m 이승만 동상
노무현은 급우들을 선동하며
백지를 내며 백지동맹을 선동했고
행사가 부당하다는 항의표시로
'택도 없다'
는 의미로
'우리 이승만 택통령'
이라는 제목만 적어냈고
두달뒤 4.19 혁명이 일어나
학생과 시민들의 분노속에
이승만 정부는 완전히 산산조각나게 됩니다
4.19 혁명으로 시민들에게 철거되는 이승만동상
하여튼 ,
그러나 노무현은 당시 괘씸죄에 걸려서
교무실에서 하루종일 벌을 섰고
그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서 사망했다는 뉴스가
신문에 나자
선생님이 신문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역시 이승만 대통령은 운을 타고난 사람이고
하늘이 내신 분이야
이에 더 반감이 생긴 노무현은
반성문도 쓰지 않고 집으로 도망쳤는데
큰형님에게 꾸지람 듣고
다시 학교로가서 사건을 유야무야되었습니다
[부산일보와 정수장학회]
중학교 3학년 ,
노무현은 시험을 잘봐서
부산일보 주최의 부일장학금에 선발되었고
그러나 ,
돈이 없어서 노무현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고
공무원 시험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큰형님은
<큰형님>부산상고에 가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으며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도 할 수 있다
고 해서
가난한 수재소년 노무현은
1963년 부산상고에 입학하게 됩니다
부산상고 시절 노무현
운이 매우좋게도
부산상고 동창회 회장은
이전 노무현에게 장학금을 준
부산일보 김지태 사장이었고
덕분에 부산상고에 진학한 노무현은 또다시
부산상고 동창회 장학금을 받게 되었고
이로인해 노무현은 평생동안
부산일보 김지태 사장을 존경하게 됩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군사독재정부가 들어서며
언론의 자유에 제약이 가해졌고
5.16 쿠데타 거사 자금을 주지 않았다는 보복으로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등이 거의다 빼았겨 버리고
부일장학재단도 5.16 장학재단으로 넘어가며
이는 이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을 딴
'정수장학재단(정수장학회)'
이 됩니다
정수장학회
정수장학회는
박정희-박근혜 부녀와 연관있는
유명한 재단이고
현재까지도 MBC(문화방송) 지분 30%와
부산일보 지분 100% 를 보유하고 있는 재단으로서
한국 사회각계의 유명인들과 연관이 있는 조직입니다
노무현은 이후 대통령이 되고나서도
정수장학회에 뺐긴 재산을 환원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방법을 찾아봤지만 권한과 절차가 없었고
더구나 정수장학회의 실질적 주인은
박정희의 딸 박근혜였는데
당시 박근혜는 야당대표 핵심인물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야당대표 탄압으로도 비춰질 수도 있어 쉽지가 않았고
군사정권이 남의 재산을 강탈해
사회의 기득권을 장악해온 대표적 사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세상이 바뀌긴 했는데 좀 이상하게 바뀌었다.
군사정권은 남의 재산을 강탈할 권한을 마구 휘둘렀는데 ,
민주정부는 그 장물을 되돌려 줄 권한이 없었다.
과거사 정리가 제대로 안 된 채 권력만 민주화되어 힘이 빠진 것이다.
부당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한테 더 좋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억울하지만 이것이 우리 역사의 한계일 것이다.
정수장학회 문제만 그런 게 아니다.
지난날 잘못된 역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
장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소유자가 정권까지 잡겠다고 했다.
그런 상황까지 용납하고 받아들이자니 너무나 힘들었다
오늘날에도 친일재산 , 군사독재자와 연관있는 재산
(박정희일가나 전두환 , 노태우 일가의 비자금 등)
, 과거재산 , 과거사정리가 제대로 안된 채
민주화를 맞은 대한민국이며
괜히 나쁜놈들이 더 잘산다는 풍조가 유행한게 아닌
대한민국인 만큼
이것이 언론이나 교과서에서 쉽게 말해주지 않는
우리사회의 진짜 불공정하고 어두운 현실입니다
(물론 보수계 말고 민주계 역시 친일 의혹이 많고
역사문제나 위안부 할머니를 이용한 장사 등
부당수익이 어마어마한 것으로 알고 있음)
실제로 제 친척들 이야기도 있고 전혀 영화나 허구의 소설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는 정치인 비자금 , 영화 돈의 맛
[부산상고]
하여튼 ,
부산사나이 그 자체였던 노무현에게
부산은 영원한 고향이었고
부산상고생 노무현은 부산상고는 평생 따라오는 결정적 이름이었고
사법고시에 합격했을때에도 ,
국회의원 , 대통령이 되었을때에도
최종학력 부산상고는
언제나 함께였고
부산상고는 노무현에게
평생을 컴플렉스에 시달리게한 주홍글씨가 됬을 수도 있고
대한민국 상류사회에서 노무현은
목포상고 출신 김대중과 더불어 유일한 고졸이었기 때문에0
최종학력 부산상고는
고졸성공신화의 언더독 효과(약자를 응원하는 심리)로 작용해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2002년 부산상고 후배들을 격려하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대한민국 건국초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으로
모두가 가난해 사실상 부자가 거의 없던 시대였는데
시대가 발전하며 점차
한국학생들은
부모수준에 따라 계층도 나뉘게 되어
부잣집-중산층-가난한집 학생들은
명문고(부자)-평범한학교(평민)-실업계(서민)
으로 나뉘는 구도가 더 뚜렸해졌고
물론 5~60년대에도 경기고-서울대를 뜻하는
KS 마크 등
명문중고등학교 출신이 중요시 되었지만
나라가 워낙 가난하고 계층분화가 뚜렷하진 않았던 시기며
실업계 학교를 천시하는 오늘날 사회상과 달리
건국초나 군사정권 당시는 물론 그때도
땜장이 학교라던가 실업계학교 비하어는 있었지만
정부에서 실업계 장려정책도 펼쳤기에
지금과 달리 공부 잘해도 실업계를 가는 가난한 수재들이 여럿 존재했고
김대중 , 노무현도 실제론 여러 사회 , 환경적 요인에
상고를 다녔을 뿐이지
실제론 학교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고
괜히
대구공고 전두환-노태우 ,
목포상고 김대중 ,
부산상고 노무현
등 대통령도 오지게 배출한게 아닌만큼
초기 실업계 출신들은 오늘날과 달리
실제로 공부잘하는 학생들이
여럿 진학하기도 했기에
부산상고생들 역시 많이 정재계에도 포진하게 됩니다
그러나 노무현은 항상 가정형편에
무리하게 학교를 다닌만큼
부산상고 시절에도 방황을 많이 하였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담배를 하고
결석도 자주했는데
어린시절부터의 우상이자 아버지같은 존재였던
엘리트 부산대 법대생 큰형 노영현은
사법고시에 번번이 낙방하다 중도포기하고 오랫동안 실업자 생활을 했고
환갑이 훨씬 지난 부모님은 산기슭에서 고구마 농사를 지으며
영세민 취로사업장에서 일한 대가로 주는 밀가루와
몇푼 안되는 돈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때
소년 노무현은 여름방학때 집에 가니
가족들이 메밀죽으로 저녁을 때우고 있었고
당시 경상남도 진영읍은 3년연속으로 수해가 나서
농사가 다 망했던 상황이었습니다
퇴임후 봉하마을에서 농사짓는 노무현-권양숙 부부
노무현의 두 형님은 취직을 하지 못한 실업자 신세였고
청소년 노무현은 취직을 하지 못한 형님들을 원망하면서
자신이 부모님을 모셔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공부를 시작합니다
노무현은 부산상고시절 3년내내 너무 힘들었고
한푼이라도 싼 곳을 찾아 하숙 , 자취 , 빈공장 숙직실을 전전했고
너무 서럽고 힘들어 눈물을 흘린 날도 많았습니다
졸업을 앞둔 초겨울에도 갈곳에 없어
학교교실에서 두 밤을 혼자 지내기도 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공부했지만
1966년 2월 19일에는
농협 입사시험에서 낙방했고
2월 23일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됩니다
노무현이 고등학교 다니던 1960년대는
대한민국국민들이 대부분 어렵고 못살던 시기라
고등학교 졸업하면 대부분 대학을 가지않고
취업에 뛰어드는게 대부분이었고
막 고등학교 졸업한 청년 노무현도 그 대부분중 한명이었습니다
원래는 상고를 졸업하면 흔히 은행에 취직됬지만
노무현은 가난과 방황탓에 농협 낙방 , 은행입사가 좌절되고
삼해공업이라는 어망회사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고
삼해공업에서 그물짜는 여공들 , 부산역사문화대전
첫월급은 실습기간이라 하숙비도 안되는 2700원을 받았고
업무외에도 공장청소며 사소한 심부름을 다해야했기에
자존심 상하고 미래가 보이지도 않아
그해 4월에 다니던 삼해공업을 한달반만에 퇴사했고
노무현은 회사를 그만두고 받은 급여 6000원으로
헌 고시책 몇권과 술마시고 영화보든데 돈을 다써버리고
고향 진영으로 낙향합니다
[고시공부]
고향의 부모님은 아들이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여
곧 은행에 취직할 것이라 믿고
미리 동네에 자랑을 다해놨는데
무일푼의 거지꼴 모습으로 귀향한 아들을 본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듯 했고
노무현은 실직해서 집에서 놀고있는 작은형 노건평과
경남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들판 뱀산 자락에
'마옥당'
이라는 토담집을 짓고 고시공부를 시작하였고
공부하는 노무현 , 변호사시절
한국문화에
김유신 열전에서도 막 김유신이 소년시절 굴에서 수련하고
백제 왕인박사가 책굴에서 공부했다거나
이율곡이 금강산에서 공부했다거나
하는 그런 풍류 문화때문에
옛날사람들은 이렇게 고시나 시험공부를 이런 토굴속에서 공부하기도 했고
사관학교 나오신 제 친척도 그시절 토굴 파놓고 공부했다 하시고
민주당 대권주자인 정치인 이재명도 절에서 사법고시 공부했다거나
하는 것을 보면
지금과 달리 옛날 사람들이 시험공부할때 그런 문화가 존재했고
그시절엔 대부분 집도 좁고 단칸방에 여러명이 뒤섞여있기에
소음이나 기타 등등문제로 이렇게 토굴 파놓고 공부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옛날 사람들 사이엔 여럿 존재합니다
(물론 그냥 집에서 평범하게 공부해서
입시 성공한 사람들도 많기에
그런거랑 성적이 그렇게 관계있을지는 모르겠고
집안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학교공부 안할애들은 또 안함)
노무현은 일단 대한민국에서
괜히 대통령 해먹은거 아닌것도 있고
평생 승부사 기질이 있던것답게
고등학교 시절 하위권인 성적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인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예전엔 공부좀 잘해서 수재소리 듣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사법시험봐서 판검사되라'
라는 덕담을 건내던 시대였고
가난한 고학생이 골방에 틀어박혀 법전과 씨름한끝에
시험에 합격한후 사회정의를 구현하며 분투하려는 모습은
흙수저 성공신화라거나
한국의 개천에서 용난 성공신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이야기기도 했고
서울 신림동 고시촌의 한 고시생 , 경향신문
막 20살된 청년 노무현은
존경하던 법대생인 큰형을 어깨너머로 보며 영향을 받은 것도 있었을테고
찢어질듯한 가난과 세상에 대한 울분으로
한번 완전히 뒤집어 엎어보자라는 심정으로
시험중 대한민국에서 가장 어렵고
합격시 가장 특혜와 이권이 많은 시험인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