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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수집 및 편집 : 권오신>
웹을 돌아다니다가 그림 경매에 관한 뉴스 기사(노컷 뉴스, 2018. 11. 21)를 보게 되었다. 박수근 화가의 유작 ‘시장의 사람들(1961년 작, 위 사진)’이 39억원에 경매시장에 나왔으나 유찰(流札)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그의 ‘빨래터(아래 사진)’라는 그림이 45억 2000만원(2007년 낙찰 가격)으로 그의 작품 최고가를 유지하게 되었다는......
또 다른 지난 기사(경향신문 2007.3.7)에는 위의 기사에서 낙찰되었다는 그림 '빨래터'가 25억원에 낙찰되어 그의 작품 중 최고가를 경신했다고 되어 있었다. 이 두 기사를 비교해볼 때 그의 그림 가격은 꾸준하게 오르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박수근 화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그저 ‘황소’의 이중섭(1916-1956)처럼 독특한 터치가 인상적이라는 막연한 지식 밖에......
위의 기사들을 보는 도중, 얼마 전 KBS Fm에서 박수근에 관한 일화를 방송하는 것을 들은 것이 생각나서 '다시듣기'로 녹취했다.
내용에 영향이 없는 범위에서 약간의 수정을 하고 ( ) 안에는 참고사항을 보충하였다.
박수근의 작품을 대강 살펴본 바, 그는 남자보다는 여자를, 번잡한 곳 보다는 아늑한 시골을, 화려함 보다는 수수함을 즐겨 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가리켜 ‘정감있는 화가’라고 하는 말이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을 읽다’ / 화가 박수근
'박수근'이라는 이름은 한국 화가의 대표격인 이름이다.
모래를 문질러서 그린 것 같은, 창호지 너머로 보이는 것 같은, 흐린 안개 저편에 있는 모습 같은 그의 한국적이고 서정적인 그림은 그를 한국의 밀레(J. F. Millet, 프랑스)라 부를 정도다.
그렇지만 그의 그림은 밀레와는 또 다른 그만의 너무나 고요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가 그린 빨래하는 여인들이나 머리에 짐을 지고가는 여인들이나 어린 동생을 업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우리를 어느덧, 모두가 가난하지만 따뜻하고 남루(襤褸)하지만 선량했던 시절로 귀향하게 만든다.
그의 그림이 그렇게 따뜻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주는 기법은 그의 한결같은 인생관과 예술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평소에 말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가장 즐겨 그린다.'
박수근은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2월 21일에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양구는 '양구순민(楊口順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예로부터 사람들이 순하기로 이름난 인심이 좋은 곳이었다.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까지 딸만 셋을 두었는데 당시로서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내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주위에서는 첩을 들이라고 성화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네 번째 아이가 태어났는데 아들이었다. 그 아들이 바로 박수근이다. 그 뒤로도 두 명의 아들이 더 태어났다.
박수근은 귀한 첫 번째 아들이자 순한 성격의 소년으로 자라면서 서당을 거쳐 양구국립보통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당시 큰 인기였던 광산 산업에 손을 대었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서도 소년 박수근은 미술에 관심과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늘 산으로 들로 스케치하러 다녔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들은 자주 교실 뒤편에 붙여지곤 했다. 일본인 교장은 집에까지 찾아와서 칭찬하고 미술도구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때 스케치했던 그림들도 대부분 그의 그림의 평생의 주제가 될 소박한 시골사람들의 모습, 농사일하는 여인들이거나 나물을 뜯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박수근은 우연히 밀레의 그림 '만종(晩鐘)'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소년 박수근은 결심한다. '나도 이 다음에 밀레처럼 훌륭한 화가가 되겠다.'
그런데 아버지의 계속된 사업 실패로 집안은 더욱 가난해졌고 그 탓에 박수근은 중학교 진학조차 불가능했다. 가뜩이나 외진 시골마을에서 밀레 같은 화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하고 힘들었던 때,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게 되엇으니 소년 박수근의 실망은 너무나 컸다.
그림을 그려서 밀레 같은 위대한 화가가 되겠가고 하는 소원은 너무나 아득해졌다. 그래도 그는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격려를 받기도 하면서 여전히 산과 들과 마을로 스케치를 하러 다녔다.
그러나 가난은 더 깊어져 가족들까지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그는 살 곳이 없어서 일정한 거처도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끈질기게 혼자 그려낸 그림이 마침내 그 진가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18살에 박수근은 처음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다. 입선 작품은 ‘봄이 오다’라는 수채화였는데 어머니는 더없이 기뻐하며 화가로서 대성하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화가가 되면 가난해진다고 화가의 길을 절대 반대했다.
그래도 전람회 입선에 크게 고무된 박수근을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미술 공부를 하게 하였다. 일본에서 고학으로 미술 공부를 하면서 전람회에서 거듭 특선을 차지하던 화가 이인성(1912-1950)이 큰 화제일 때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어머니의 투병과 죽음으로 포기해야 했다. 경성으로 춘천으로 떠돌면서 전람회에 출품한 작품들도 늘 낙선 아니면 입선까지만이었다. 특선 수상까지 가지 못했다. 춘천 도청에서 일하던 일본인 요시 덕분에 뜻밖에 첫 개인전을 열고 취직도 했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독학만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것이었을까. 그는 결국 다시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있던 강원도 철원으로 돌아온다.
그때 이웃집에는 김복순이라는 이름의 열일곱살 처녀가 살고 있었다. 그 집은 부자였고 복순이는 공부를 잘 해서 당시 유치원을 다녔고 춘천여고도 졸업한 재원이었다.
그런 그녀가 집에 와 있던 어느 늦가을날이었다. 그녀는 집에서 장난을 치면서 마루에서 마당으로 내려서다가 담너머를 지나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박수근 아내 일기'에서 그녀는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깔깔거리면서 마루에서 땅으로 뛰어내리는 순간이었다. 아랫집 담너머로 힐끗 눈길을 잡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키가 크고 눈이 둥글게 큰 한 청년이었다. 그는 시종 담나머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너무나 무안했고 얼굴이 금방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박수근은 그 전날 저녁 춘천에서 막 아버지집으로 막 내려온 터였다. 그런데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그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고는 붓과 팔레트 밖에는 없습니다. 당신이 만약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사실 김복순 그녀는 한 의사 집안과의 결혼 이야기가 끝난 상태였다. 그러니 박수근이 그녀를 마음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의 아버지는 노발대발 난리가 났다. 가난한 집에서 부잣집 딸을 넘본다면서 그 집안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킬 정도였다.
박수근으로부터 열열한 구애편지를 받은 김복순은 사실 겁도 났다. 그녀는 강원도의 명문 여고를 졸업했는데 박수근은 초동학교 졸업이 전부인, 더욱이 직업도 없는 화가 지망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의사 집안과 혼인 약조를 맺어 놓은 집안에서는 펄펄 뛸만도 한 일이었다.
그런데 김복순은 평소에 늘 기도하기를 '시집을 가게 되면 하루 세 끼 죽을 먹어도 좋으니 기독교를 믿는 집으로 가게 해주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이웃집 박수근 집안은 가난했지만 기독교 신앙이 강한 집안이었다. 그런데 그 기도가 통한 듯 이웃집에 못 보던 아들이 나타나서 구애의 편지를 보내온 게 아닌가. 더욱이 극구 반대했던 그녀의 아버지도 이웃집 청년이 상사병이 들어 죽기 직전이라는 말에 결국 마음을 꺾고 만다.
그렇게 해서 박수근과 김복순 두 사람은 1940년 2월 12일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금강산 내금강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신부는 ‘신혼여행 그 사흘 동안 그이는 하모니카로 반주를 하고 나는 그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던 일이 꿈결같이만 느껴진다’고 책에 썼다.
그들이 결혼한 후에 정신적 안정 못지 않게 연이어 좋은 소식들이 그들을 찾아들었다. 우선 춘천이나 경성이 아닌 평양이었지만 그곳 도청 서기로 취직이 되었다.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한 탓에 아는 화가가 없었던 그에게 평양의 한 동호회에서는 그룹활동을 같이 하자는 제의도 들어왔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특선은 아니었지만 입선하는 성적을 다시 거둔다. 무엇보다도 1945년 나라가 비로소 일제치하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일제를 벗어나고도 이삼년 간은 고통과 절망의 시간이었다. 6.25 전쟁으로 하마터면 아내와 아이들, 남과 북으로 영원히 헤어질 뻔했다. 그렇지만 그 시간들이 지난 뒤에 우여곡절 끝에 그는 가족과 함께 서울 창신동에 정착, 미군 PX에 취직도한다.
그가 속한 부서는 미군들로부터 주문받은 초상화를 스카프 같은 데다 그려주는 초상화부였다. 바로 그때 초상화부 화가들을 관리하던 스물한 살 여성이 훗날의 소설가 박완서였다.
그녀가 그 시절의 박수근을 모델로 쓴 소설이 그녀의 유작인 ‘나목(裸木)’이었다. 그 시절에 대해 소설가 박완서는 ‘박수근 아내의 일기’ 책 서두에 이렇게 썼다.
‘초상화부에는 다섯 명 정도, 궁기(窮氣)가 흐르는 중년 남자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전쟁 전에 극장 간판을 그리던 사람이라고 했다. 박수근 화백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염색한 미군 작업복은 매우 낡고 몸집에 비해 좁았고 말이 없는 편이었다.
남보다 몸집은 크지만 무진(無盡) 착해 보여서 소와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 바닥은 결코 착하고 점잖은 사람을 알아볼 고장이 아니었다. 나부터도 그랬다.‘라고.
전쟁이 준 상처로 모두가 거칠고 날카로웠던 시대 탓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어 놓은 일이 생긴다. 그 일을 그녀는 소설 ‘나목'에서 이렇게 그렸다.
‘어느 날 그가 화집을 한 권 옆구리에 끼고 출근했다.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가 화집을 펼쳐들고 나에게로 왔다. 어떤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자기 작품이라고 했다. 촌부가 절구질하는 그림이었다. 간판 그리는 이들 속에 진짜 화가가 섞여 있었다는 것은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나의 수모(受侮)를 말없이 감내(堪耐)하던 그의 선량함이 비로소 의연(毅然)함으로 비쳐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박완서 소설가는 화가들에 대한 태도는 물론이고 전쟁이 준 날선 마음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처럼 박수근은 그림 안에서나 그림 밖에서나 한결 같이 선량하고 따뜻했다. 더없이 궁핍하고 가난했지만 그는 부성이 넘치는 아버지였고 자상한 남편이었다.
<작품 감상> ☞ http://cafe.daum.net/62ansa/1yv9/362
박수근의 아들은 어린시절을 이렇게 화목하게 기억한다.
‘아버지는 노래를 못하신다. 노래할 일이 생기면 표정이 굳어지신다. 어머니는 그런 표정을 재미있어 하셨다. 아버지는 성화에 못 이겨 하모니카로 노래를 대신하는데 뻐꾸기 왈츠부터 신나게 서너 곡 불어젖힌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막 소녀가 된다.’
가난한 산동네의 꼭데기에서도 박수근의 가정은 그렇게 화목하고 행복했다.
그에 관한 유명한 일화 중에는 외출을 하려다가도 비가 오면 얼른 돌아가서 마당의 빨래를 걷어주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내의 일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마음의 발로(發露)였다. 전적인 가부장적인 시대의 참 드물고도 세심한 아내 사랑의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화가로서의 치열함 또한 단 한 시도 잊지 않았고 결국 시간을 너무 많이 뺏는 PX 일을 그만 두었다. 살림은 점점 더 궁핍해졌지만 그만큼 더 절박한 마음으로 그림에 몰두했다. 그렇게 그린 그림은 국전에서 계속 입선작으로 뽑혔다. 더욱이 새로 생긴 반도 화랑을 통해서 외국인들의 그림 구매도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사십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작품에는 그만의 기법이 뚜렷하게 등장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로 하여금 그의 그림을 단번에 알아보게 하는 그 기법,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더없이 서정적인 뚜렷한 주제와 회색, 갈색이나 황갈색의 벽면에 명암이나 원근감을 없앤, 모래를 뿌려서 그린 것 같은 독특한 그만의 기법이었다.
마흔 두 살, 그는 이제 드디어 특유의 기법과 소재를 지닌 가장 한국적인 정감의 화가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반도 화랑을 통해 그림 판매며 해외 전시 제의도 이어졌다. 그러니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화가로의 도약도 머지않은 듯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그는 한결같이 국전에 출품하였다. 이번에는 100호 크기의 대작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번에는 아예 입선 소식이 없었다. 박수근은 너무도 심한 충격을 받고 비탄에 빠진다. 그러다 보니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고 건강도 심하게 나빠지기 시작한다.
사실 그로부터 2년도 안 돼서 박수근은 더는 국전에 응모할 필요가 없어졌다. 응모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이제 국전의 심사위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국전 쪽에서 출품 작품을 의뢰하는 추천작가 되기도 했다.
주한 미공군사령부에서 특별초대전, 홍콩인터내셔널호텔 인터하우스에서의 초대전도 그를 기다리게 했다. 물론 그건 2년 정도 뒤의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제 화가로서 크게 인정받기도 했으니 낙선 정도는 가볍게 넘겨도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독학 화가로서의 외로움과 극심한 가난에 그때 이미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을만큼 지쳐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갈수록 그림 작업에 더 치열하게 매달렸고 건강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 결국 간과 신장의 이상은 물론이고 한쪽 눈의 실명까지 겪다가 1965년 5월 6일,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천당이 가까이 있는 줄 알았는데 멀어.’였다고 한다. 죽음의 순간에도 고단하고 지친 것이었을까.
그의 너무 빠른 죽음은 한국 화단의 너무나 큰 손실이고 상실(喪失)이었다. 그가 작품 활동을 좀 더 했다면 우리도 한국적인 소재와 정서가 담긴 작품을 전세계에 알리고 인정받을 수 있었을텐데, 그는 너무 일직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런 그에 대해서 미술사학자인 유홍준(1949, 서울)은 애도의 글 마지막에 이렇게 쓰기도 했다.
‘다시 생각해 보건데 박수근은 그림을 통해 위대한 사상가 못지않은 인간정신의 고귀성을 표현했다. 빼어난 지성이나 예리한 감성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면밀히 관찰하여 부동의 형태로 고정시킴으로써 성공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아들에게 가르쳤다던 ‘더, 더 작아지게 하소서’란 겸손의 미덕이 새삼 아름답게 다가온다.’
얼마 전에도 그의 작은 소품 한 점이 미술 경매시장에서 고가에 팔렸다는 뉴스가 있었다. 이렇게 그림값을 얘기하는 것이 늘 선량하면서도 소박하고 겸손했던 그의 생애와 그의 지인에 누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그의 너무 빠른 죽음, 평생의 너무 혹독했던 가난이 안타까워서일까, 나중에라도 엄청나게 높아진 그림값이 위로가 되기도 한다.
이 겨울에 그의 그림을 연상시키게 하는 겨울나무들, 그런 헐벗은 나무들 모습을 보면 오히려 가장 정겹고 눈물겹고 친근한 한국인들의 자화상과 일상을 그려준 그에게 큰 고마움이 느껴진다.
첫댓글 앱을 다니며 찾은 귀한 자료가 선한 우리 민족성을 일깨워주네.자네가 보물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