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당시 회사를 상징하는 로고가 필요했던 이들은 포틀랜드 주립 대학에 다니던 옆집의 미대 학생에게 디자인을 의뢰, 오늘날의 나이키 상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당시 35달러를 주고 건네 받은 이 상표가 오늘날 코카콜라에 이어 브랜도 지명도 2위를 확보한 디자인의 전설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스포츠의 정열을 표현한 붉은 색채로 승리의 여신 니케의 날개를 표현한 이 상표는 어느 전문적인 디자이너도 흉내내지 못할 이미지의 신선함과 간결한 라인으로 상품의 가치를 폭발적으로 상승시켰다.
실제로 1980년대 초반 우리 나라의 청소년들은 흰 색 운동화에 붉은 색 상표가 새겨져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존의 운동화 보다 5배 이상 비싼 나이키를 신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나이키라는 스포츠 브랜드는 필 나이트(Phil Knight)라는 젊은 학생이 몰고 다니던 고물 자동차의 트렁크에서 시작됐다.
트렁크에 옷을 싣고 소매상에 공급하던 일을 부업으로 하던 필 나이트는 이런 고된 과정에서 대중 문화의 여러 모습들에 대한 생각들을 구체화하기 시작했고, 신발과 운동 용품에 대한 사업에 대한 관점을 정립시키게 된다.
육상화에 골몰했던 코치와 낙제 위기의 대학생 나이키는 두 명의 열정적인 인물들의 사상에 만들어지게 됐다고 볼 수 있다.
오레건에서 육상 선수들을 위해 보다 가볍고 내구성이 좋은 신발을 만들기 위한 빌 바우어만(Bill Bowerman)의 탐구와 중간에 결코 포기하지 않는 엄숙한 운동 정신에 대한 필 나이트의 애착이 바로 그것이다.
빌 바우어만은 필 나이트가 선수로 뛰던 1959년 시절의 오레건 주립 대학의 육상 코치였다. 보다 나은 육상화에 대한 바우어만의 갈망은 나이트가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데 있어 명확한 영감을 주었다.
이 둘의 열정에서 현재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스포츠 용품 기업으로 성장한 나이키의 씨앗은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스탠포드에서 MBA 코스를 밟고 있던 60년대 초반 나이트는 프랭크 샬렌버거 교수의 강의를 수강하게 된다. 교수가 내린 한 학기 연구 과제는 마케팅 계획을 동반한 작은 사업에 대한 계획서였다.
바우어만의 고기능성 운동화에 대한 집착과 높은 품질과 낮은 가격을 동시에 갖추는 상품에 대한 나이트의 견해가 종합되어 당시 낮은 인건비와 우수한 생산 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일본에서 신발을 제조하여 미국에서 판매하는 사업에 대한 초안이 잡히게 된다.
나이트는 시장 개척의 정확한 포인트를 발견했지만 샬렌버거 교수는 “흥미로운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사업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단연코 없다”고 일축했다. 그리고 더 이상 나이트에게 연구 과제는 주어지지 않았다.
도박처럼 만들어진 나이키의 전신 블루 리본 스포츠 1963년 필 나이트는 세계 여행 도중 일본에 들르게 된다. 전문 경영인으로써의 인생이 늦춰진 젊은이에겐 필연적으로 방랑 벽이 그 욕구를 대신하기 위해 채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즉흥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나이트는 일본 체류 중 한 운동화 제작 업체를 찾아 갈 계획을 세웠다. 그 곳은 당시 일본의 유명 신발 제조 사인 오니츠카의 하청 업체였던 타이거 사라는 곳이었다.
본인 스스로를 미국을 대표하는 도매 업자라고 소개한 나이트는 타이거의 제품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타이거 신발을 미국의 육상인들에게 판매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했다.
블루 리본 스포츠(나이키의 모태가 된 기업. 이 이름은 타이거 사의 관계자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임기응변으로 만들어 낸 이름이었다)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이트의 제안을 들은 타이거 사는 즉시 그의 첫 번째 주문을 받아 들여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4년의 일이었다.
나이트는 8,000달러 어치의 타이거 신발을 미국 내에서 판매했고, 곧 바로 추가 주문을 타이거 사에 내려야 했다.
육상 코치 바우어만과 나이트는 함께 일했지만 전문 세일즈 맨인 제프 존슨을 영입함으로써 영업 업무는 손을 놓게 된다.
1971년 100만 달러의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성공의 물결을 타기 시작할 무렵 나이트는 나이키라는 새로운 브랜드 명과 그 유명한 스우시 로고를 고안해 내게 된다.
운동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 제시로 막대한 성공 거두다 70년대 후반에 들어 블루 리본 스포츠는 공식적으로 나이키라는 이름으로 사명을 바꾸게 되고, 판매고는 1,000만 달러에서 2억 7000만 달러로 신장하게 되었다.
나이키의 이런 성공의 배경은 건강 관련 산업에 일대 변혁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이키의 성공 스토리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여가 활동으로나 운동을 하던 시기에서 일반인들도 스포츠와 운동 경기의 본질적인 즐거움을 직접 느끼고자 했던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80년대와 90년대를 통해 선진국에서 불기 시작했던 사회 체육의 전문화에 대한 욕구를 나이키가 채워 줬으며, 나이키는 효과적인 광고 전략과 제품 디자인을 통해 끝없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갔다.
직접 운동을 즐겼던 한 젊은 사업가의 재치 있는 아이디어와 그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던 지도자의 열정에서 나이키의 신화는 시작되었으며, 세계 최고의 스포츠 브랜드는 이렇게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마이클 존슨이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신었던 골든 스파이크(Golden Spikes). 신발 한 짝의 무게가 100g이 채 되지 않는 가볍고 착용감이 뛰어난 이 신발은 특수 제작되었다.
나이키(Nike)의 여자 러닝화 에어 스위프트 트라이어 엑스(Air Swift Tria X).
스포츠의 정열을 표현한 붉은 색채로 승리의 여신 니케의 날개를 표현한 이 상표는 어느 전문적인 디자이너도 흉내내지 못할 이미지의 신선함과 간결한 라인으로 상품의 가치를 폭발적으로 상승시켰다.
스포츠의 정열을 함축한 나이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 폴리스 정상.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의 내부 아테나 여신(女神)의 손 바닥 위에 올려졌던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이름은 오늘날 나이키로 다시 탄생한다.
1960년대 초 육상 코치 빌 보어먼(Bill Bowerman)과 달리기 선수 필 나이트(Phil Knight)는 포틀랜드 주의 오레곤 대학에서 만난다.
두 명의 젊은이는 당시 독일이 장악하고 있던 운동화 시장을 겨냥, 일본을 견학한 후 1964년 나이키의 전신인 블루 리본 스포츠(Blue Ribbon Sports) 회사를 만들었다.
1971년 아침 식사를 하던 빌 보어만이 식탁에 올려진 와플(waffle)을 보고 와플과 같은 구조에 고무를 채워 넣어 쿠션이 좋은 운동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1972년 나이키라고 이름이 붙여진 운동화를 출시, 인기를 끌자 1978년에는 회사 이름을 나이키로 바꾸었다.
1977년 미 우주항공국 나사(NASA)의 엔지니어였던 프랭크 루비(Frank Ruby)의 충격 완화를 위해 운동화에 공기를 주입하자는 아이디어를 채택, 그 유명한 나이키 에어(Nike Air)가 탄생한다.
나이키는 발전을 거듭하여 1979년에는 이미 미국 시장의 50% 이상을 장악했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20억 달러, 1996년에는 50억 달러의 순 이익을 올리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