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이 들면
김혜경
고양이 한 마리가 담 밑에서 졸고 있을 노곤노곤한 햇살이 춘설을 스르르 잠재
우며 번져 온다 영산홍 군자란이 겨우내 지루했던지 온몸을 뒤틀 듯 붉은 꽃망울
을 터트린다 화사한 봄볕이 들면 굳게 잠긴 마음의 빗장을 풀어 하고 싶어지는
일들이 있다.
오늘은 이불 홑청을 훌훌 털어 내다 널고 싶다 겨우내 갇혀 있던 가슴 속 눅눅
한 습기도 내다 말리고 싶다 하얀 홑청이 봄볕에 반짝이며 흔들리는 모습은 나를
하얀 궁전 속의 작은 요정이 된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풀 먹여 빳빳하게 말라가
는 홑청 속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뛰어다니던 유년의 봄날로 돌아가게 한다.
이렇게 빛 좋은 날은 가두어진 틀을 깨고 생동의 몸짓을 보여주고 싶어진다 언
젠가 책에서 보았던 김득신의 풍속화 ‘파적도’가 생각난다 나른한 봄날 고양이가
병아리를 채가고 어미 닭은 필사적으로 고양이를 향해 달려든다 주인은 장죽으로
내려치려다 마루에서 굴러 떨어지고 망건이 멀찍이 날아간다 아내는 남편을 붙잡
으려고 허둥대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온통 아수라장이 된 봄날의 풍경이 얼마나
생동감 있는지 병아리의 짹짹대는 소리, 우당탕 구르는 소리,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중에도 매화나무엔 조용히
꽃망울이 여무는 풍경이 나를 사로잡는다.
봄은 매화가지에만 찾아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찾아든다 동안거 해제를 봄
빛이 알리니 이제 마음을 열어 생기 있게 움직이라한다.
포근한 바람이 가슴을 헤집고 들면 산중턱쯤 볕 고운 자리에 화문석을 폈으면
한다 분홍치마 연두저고리에 쪽빛 비녀를 얹고 매화타령이나 창부타령의 구성지
게 넘어가는 가락에 굿거리장단을 얼르고 싶다.
오동나무 속을 비워 황피 백피 얹고 축승을 둘러쳐 덩기덕 울리는 장구소리는
삶의 무게에 잔뜩 움츠렸던 속을 훑어 내고 더딘 봄을 재촉하리라 땅속에서 하늘
함박꽃 향기· 기초반 3
까지 덩덩 울리는 장구의 속빈 공명이 새 생명을 깨워 주리라.
봄이면 바람이 들고 싶다 들었던 바람도 잠재울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바람
난 봄 처녀가 되어보고 싶다. 춘흥을 못 이겨 들판으로 나가 나물바구니, 지게 작
대기를 팽개치고 물가에서 노닥이는 볼 붉은 낭자가 되어봄은 어떨까.콩당콩당
가슴 뛰는 춘정은 또 어떠려는지. 이렇게 볕 좋은 날은 가슴 한 쪽 뚝 떼어 나눠
주고 싶다 ‘70이 되어도 여자는 여자’라는 말이 맞는지 남사스런 상념에 공연히
낯이 뜨거워진다.
담장 가에 한껏 망울이 부푼 목련이 피려한다 개나리도 목련도 잎이 나기 전에
성급히 꽃망울부터 터트린다 긴 겨울 간절히 간절히 봄을 꿈꾸어 왔기에 꽃부터
피우나보다 목이 늘어지고 눈이 쾡 하도록 기다리던 봄볕에 고운 꽃으로 마음 주
고 싶었나보다.
비단실처럼 봄빛이 풀어져 내리는 날이면 내 안의 봄은 무늬 고운 명주를 짠다.
2006/24집
첫댓글 긴 겨울 간절히 간절히 봄을 꿈꾸어 왔기에 꽃부터
피우나보다 목이 늘어지고 눈이 쾡 하도록 기다리던 봄볕에 고운 꽃으로 마음 주
고 싶었나보다.
비단실처럼 봄빛이 풀어져 내리는 날이면 내 안의 봄은 무늬 고운 명주를 짠다.
이런 글을 쓰고 싶은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방인입니다.
억지로 쥐어짜지 않아도 그저 입에 술술 읽혀도 온갖 마음의 감정이 묻어나는 이런 글을
나도.. 쓰고 싶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