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촌답사기
새해 첫째 화요일은 소한이었다. 연중 평균기온이 가장 낮게 내려가는 절기가 소한인데 올해는 내일부터 근래 드문 강추위가 엄습한단다. 북극 냉기류가 한반도 상공을 덮친다니 대비를 해야겠다. 코로나로 대중교통 이용을 자제하니 산행이나 산책에 제약이 따른다. 집에서부터 걸어 갈 수 있는 만만한 데가 용추계곡이다. 이른 점심을 해결해고 현관을 나서 아파트 뜰로 내려섰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외동반림로 보도를 따라 퇴촌삼거리로 향했다. 창원의 겨울 가로수로 인상적인 메타스퀘어는 새털 같은 잎이 거의 떨어지고 나목이 되었다. 반송공원 동편 산기슭에는 ‘丹陽禹氏世居之洞’이라는 빗돌이 있었다. 창원이 신도시로 출범하기 전 그곳 일대는 우 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다 떠난 듯했다. 지금도 반송공원 숲속에는 우 씨들의 덩그런 무덤을 더러 보았다.
반송공원 북사면 창원천이 흐르는 퇴촌삼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니 예전 사림동사무소는 정보화교육센터로 바뀌었다. 경내에 퇴촌마을 유허비가 세워져 있었다. 50십여 년 전 창원이 기계공단 계획도시로 출범할 당시 자연부락에 살던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당국에서는 자연마을이 위치했던 자리마다 유허비는 건립해 실향민의 마음을 달래었다. 퇴촌유허비도 그 가운데 하나다.
퇴촌(退村)은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마을이름이었다. 구전에는 어느 시대인지 몰라도 재상을 역임한 이가 그곳에 들어와 살았다고 붙여진 지명이었다. 가까운 곳에 창원의집이 있는데, 그 한옥이 순흥 안 씨네가 살았던 것으로 미루어 그쪽 윗대 조상인가도 싶다는 생각이 든다. 퇴촌은 순흥 안 씨들이 많이 살다 떠났고 지금도 소목고개는 그 집안 무덤이 여러 기 있었다.
창원대학 앞으로 가니 대학가는 썰렁했다. 방학이라도 코로나가 아니라면 젊은이들이 더러 보일 법한데 상가는 조용했다. 집을 나설 때 도청 뒤를 돌아 용추계곡으로 들어가 보려했는데 마음을 바꾸어 대학 구내로 들어섰다. 방학이나 주말은 캠퍼스를 산책함도 좋다. 공기가 깨끗하고 숲이 우거져 공원과 마찬가지였다. 최근 리 모델링을 끝낸 대학본부를 돌아 중앙도서관을 지났다.
상경대학과 사회과학대학 사이로 올랐다. 학군단 사무실 곁 상촌마을 옛터 비가 있었다. 아까 지나온 퇴촌 윗마을이었다. 창원 시내 여러 군데 세워진 유허비 가운데 상촌마을 옛터 비는 이색적이다. 빗돌 뒷면은 이주 당시 살았던 세대주 이름을 새겨둠이 관례였다. 그런데 상촌마을 옛터 비에는 부녀자들의 택호를 새겨두었다. 택호는 대개 시집온 부녀들의 친정마을 이름을 따왔다.
창원대학 뒷산은 정병산인데 한 때 지방지에 지명 논쟁이 붙은 적 있다. 국립대 사학과 P교수는 자신이 재직하는 뒷산이 정병산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며칠 뒤 사립대학 국문과 K교수는 전단산이라고 반박했다. 창원대학 뒷산은 도청까지 에워싼 병풍 같다만 오래 전에는 이름이 덜 알려진 산이었다. K교수 얘기도 일리가 있다. 그는 상촌마을 출신으로 김해 김 씨 전단공파지 싶다.
학군단 곁 시설을 잘 갖춘 골프연습장엔 많은 사람이 샷을 날려댔다. 국립대 캠퍼스에 골퍼를 즐기는 여가 시설이 부럽기도 하고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대학 관계자들이 정병산 허리로 경전선 KTX 터널은 허락하면서 24호 대체 국도 터널을 반대하다 길을 터준 보상으로 마련된 후생 복리시설인 것으로 안다. 장래를 내다보며 교수 연구와 학생 면학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학군단에서 숲속으로 드니 임자가 각기 다른 텃밭이 나타났다. 고춧대는 시들었고 김장채소를 뽑아간 밭에는 배춧잎이 널브러져 있었다. 국유지라 아랫마을 사는 사람들이 무단 점용해 채소를 가꾸는 듯했다. 텃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사격장으로 내려가 잔디 운동장을 예닐곱 바퀴 걷다가 사림동 주택가를 지나 봉곡상가를 거쳤다. 창원천을 건너 반지사거리에서 반송시장까지 갔다. 21.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