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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디스커버리채널 '콜럼버스 수수께끼' 방송..콜럼버스는 원래 귀족이었다?!(펌)
치우천 추천 0 조회 361 04.12.16 16:54 댓글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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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4.12.16 17:18

    첫댓글 으음.. 잘나가다 마지막에 솔로몬왕부터 뭔가 이상해지는군요.

  • 작성자 04.12.16 18:27

    콜럼버스가 유대교 원리주의자처럼 솔로몬 왕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을 복원하고 싶다는 말을 했는지 저도 의문...당시 이슬람 세력이 장악한 예루살렘에서 그런 일을 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카톨릭 국가 스페인에서 그런 말을 하면..화형 당하기 십상이죠.

  • 04.12.16 19:53

    머리와 사지를 자르는게 매장 풍습이라니... 조상님들이 지하에서 통곡하시긋네...

  • 04.12.16 21:38

    항해사적으로 콜럼버스는 그다지 유능하다거나 대단한 인물은 아닙니다. ㅡㅡ;;; 본래 인도를 찾아내러 서회한다는 개념으로 순풍만을 받으며 그다지 외부적인 요소에 방해받지 않으면서 엉뚱한 서인도제도(?)라는 몇개의 섬을 발견했을뿐이지.. 그것도 카락급1척과 카라벨급2척이란 아주아주 소함대라서 나라에서도

  • 04.12.16 21:41

    포루투갈의 희망봉발견에 자극을 받아 그냥 손해볼것 없으니 한번 보내볼까.. 라는 식으로 지원해준건데...콜럼버스는 죽을떄까지 그곳이 인도라 믿었다는군요..ㅡㅡ;; 그래도 후 신대륙이라는 개념하에 아메리카나유럽이나 역사가 바뀌기는 했지만 그것은 우연이지 콜럼버스가 유능해서 그런것은 아닙니다.

  • 04.12.16 21:42

    그다지 가치없는 인물을 두고 왜 저러는지.. 욕심도 뭐같이 많아서 부왕에다 무역수입의 2할에다 ㅋㅋㅋ 나같았으면 아무리 그래도 지원안해줬음... 포루투갈왕도 팅긴것이 이해가감..

  • 04.12.16 22:35

    대서양을 건넛다는 자체만으로도 항해사에 길이남을 업적입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동력으로 가는 배도 아니었고 대서양의 바다는 지중해와는 달라서 파도도 높고 유속도 차원이 다릅니다. 따라서 배자체가 달라야했고 항해술도 뛰어나야 했습니다. 단 1도의 계산 미쓰가 나중에는 몇백 km의 오차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 04.12.16 22:45

    또 위에서 말했듯이 동력이 없는 당시의 배는 바람이 주 동력이었습니다. 이 바람이 잘부는 길을 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편서풍이네 북서풍이네 먼풍이네 하느 계절풍을 잘이용해야 원거리 항해가 가능 한것이지요. 그리고 콜럼버스가 신대륙으로 가는 대서양 횡단코스를 단 하나만 남긴 것이 아니라

  • 04.12.16 22:38

    가운데를 갈라도보고 아프리카로 가서 북서풍타고 올라도 가보고 북쪽으로 죽어라가서 남서풍 타고 내려도 와보고 또 어떻게 해서도 가고 4개정도 만들어 놉니다. ㅡ.,ㅡ; 참..좋은말로 탐험정신 뛰어난 인류사에 남을 개척자이고 나쁜말로 할일 더럽게 없는 놈입니다. 어쨋든 이런시대에 바람 한번 잘못타면

  • 04.12.16 22:47

    망망대해에서 배 서야합니다 ㅡㅡ; 걍 서야 합니다. 죽을때까지~.. 유령선이라 불리는 배들중에는 이런식으로 고립되어서 선원 다죽고 떠돌아다니는 배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당시 선원들은 허리케인 + 토네이도 + 엘리뇨 + 운석충돌후 해일 보다 '무풍지대'를 더 두려워 했습니다. 바람 한점 없는 곳에

  • 04.12.16 22:47

    서는 걍 손놓고 죽음을 기다려야 했으니까요. 결론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항해술은 엄청난 고급기술로써 개나소나 가지고 있는 기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배타고 무작정 망망대해로 나갓다가는 걍 되져야지 방법이 없습니다. 당시에 이런식으로 신항로 개척을 하게되면 그 항해일지와 항해지도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 04.12.16 22:45

    정도였습니다.

  • 04.12.16 23:10

    허리케인 + 토네이도 + 엘리뇨 + 운석충돌후 해일... 이거 압박이네요. 흐흐흐...대항해시대 2에서 카락 끌고 마젤란 해협 지나다가 바람 멎어서 게임 오버된 기억이..

  • 04.12.17 10:56

    콜럼버스의 발견은 운이 더 많이 좌우했습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으로 나아갈때는 항해왕자 엔리케에 의해서 많은 항해기술이 축척되어있었던데다가 당시 사람들은 서쪽의 바다를 암흑바다라고 부르면서 끝없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믿었지만 역시 엔리케왕자의 후원으로 개척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이베리아 반도로

  • 04.12.17 11:00

    불어오고 나가는 계절풍을 잘 인식했었기 때문에 콜럼버스는 단순히 이 계절풍을 믿고 서쪽으로 가기만 하면 인도로 돌아갈수 있을거란 아주 단순한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씀하신 콜럼버스의 모험심과 탐구심같은 용기는 높이 칭찬해 줄만하나 항해사적으론 그다지 뛰어난 업적은 아니란 겁니다. 동시대 이루어

  • 04.12.17 11:01

    인도항로의 개척만을 보더라도 콜럼버스가 항해한 거리의 약세배가까이 되는데다가 순풍과 역풍 그리고 무풍을 번갈아 받으며 항해했어야 했고 수많은 이교도 함대의 노략질과 방해속에서 단순히 있을거라 믿고 떠난 것이 아닌 목표로했던 목적지를 발견한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겁니다.

  • 04.12.17 11:05

    중간에 보급항구 하나 없이..ㅡㅡ; 게다가 마젤란을 예로 든다면 콜럼버스의 항해는 세발에 피도 안되는 업적입니다. 마젤란은 대서양을 건넛고 마젤란 해협을 통과했으며 칠레지방을 거슬러 갈라파고스 군도까지 올라갔다가 태평양을 횡단했으며 인도를 경유해서 유럽으로 돌아왔습니다. 항해란 정해진 목적지에 도달하는

  • 04.12.17 11:07

    것이지.. 가다가 우연히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건.. 그다지 항해사적으로 큰업적은 아닙니다. 차라리 희망봉의 발견이 더대단하다고 볼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시도때도 없는 태풍지대에 여러가지 해류가 교차되는 복잡한 물길을 가진 지역을 해안선을 따라 끝까지 도달한게 더 낫다고 봅니다.

  • 04.12.17 11:09

    참고로 사회과부도 펴보시면 알겠지만 대서양은 바람과 물길이 계절별로 정해져 있는것으로 유명한 바다입니다. 이 해류와 바람이 유럽대륙에 아주큰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군요. 유럽대륙에 빙기가 온것도 현제5대호 지방의 빙하유입으로 인해서 유라시아 대륙에 한기를 가져왔고 초기농업의 발생 고로 잉여농사물에 의한

  • 04.12.17 11:11

    문명의 발생으로 이어졌다고 할만큼.. 대서양은 정해진 아주큰 흐름을 가지는 바다라고 합니다.

  • 04.12.17 11:15

    아 그리고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바른 항해를 할수 있었던것은 해류의 도움도 있었지만 가장큰이유는 사분의 때문입니다. 이기구는 위도를 측정할수 있는기구인데 북극성을 관측하면서 항해하면 거의 동일한 위도상으로 항해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썬 아주 간단한 기구인데 초딩도 제작할수있을만큼

  • 04.12.17 11:16

    간단한 구조였지만 그당시는 어마어마한 물건이었습니다. 이역시 콜럼버스활동이전에 보편적으로 항해에 사용되었습니다. ^^ 원리는..ㅡㅡ;;;; 뭐 수학이야기 나오면 스트레쓰 받으실 분들이 많은 관계로 패스~

  • 04.12.17 12:17

    1492년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과 마야,잉카,아즈텍인들의 비극의 원년....... 그리고 거의 장님처럼 빌빌대다 서인도 제도 발견한거로 떠들고 있는 사악한 백인들..

  • 04.12.17 18:21

    중요한것은 이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이 대항해시대의 시발점이라는 것과 이후의 많은 탐험가들, 언급하신 마젤란과 같은 이들을 직접적으로 자극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 04.12.17 18:23

    그리고 그 뛰어난 항해사의 업적들도 이런 콜럼버스등의 탐구정신과 모험정신이 없으면 애초에 나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콜럼버스보다 뛰어난 항해가들은 분명있었지만 아무도 대서양을 건너지 못합니다. 사분의 사분의 하지만 만들기는 쉬워도 아무나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 04.12.17 18:25

    그리고 마젤란등은 콜럼버스시대보다 더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술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서양사에서 아주아주 중요한 위치에있고 항해사를 포함한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중 하나입니다.

  • 04.12.17 23:06

    흠.. 제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사분의는 집에서 각도기 마분지 정도만 있어도 충분히 제작가능하고 저는 이미 초등학교때 울산의 위도를 측정해본 경험이 있고 실제로 오차범위는 소수점 한자리였습니다. ㅡㅡ; 아무나.. 쓸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험정신을 말씀하셨는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건1492년이고 콜럼버스

  • 04.12.17 23:09

    가 지구가 둥글다고 믿게된 게기는 그 훨씬 이전인 1434년 애니시라는 선장이 카나리아 군도 보르도곳까지 탐사에 성공함으로써 그곳역시 평범한 바다라는 것을 증명했고 이는 중세까지의 바다에대한 암흑바다라 일컬어지는것을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이후를 대항해 시대의 시발점이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 04.12.17 23:14

    즉.. 크리스트발코론은 절대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수 없습니다. 그당시 이루어진 수많은 모험과 탐사중에 그나마 괜찮은 성과를 거둔 경우에 해당하지.. 콜럼버스의 항해술이 뛰어난것은 사실이나.. 콜럼버스는 자신이 목표로 했던 것을 이룬것은 아닙니다. 신대륙 발견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지.. 완전한 발견은 아니죠

  • 04.12.17 23:16

    아. 마지막으로.. 하나 정확한 근거를 밝히자면.. 콜럼버스는 대서양의 순풍만 받으면서 36일간 4000km를 항해했고. 바스코다가마는 더운바다와 추운바다 아프리카의 폭풍지대를 지나 이교도의 방해를 받으며 38000km를 항해했으며 그는 목표로 했던 인도까지의 항로를 개척했습니다.

  • 04.12.17 23:19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은 정확히 1492년 10월12일이고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출발일은 1497년 7월8일 리스본출항이었습니다. 콜럼버스의 탐사대는 1척의 케릭급 2척의 카라벨급으로 구성되었고 약 100여명가량의 선원이었고 가마는 4척의 배와 160명가량의 선원이었습니다. ㅡㅡ;; 즉..이정도로도 비교상대가 안되지요..

  • 04.12.18 15:39

    규모로 보자면 정화의 경우만 봐도 콜럼버스는 비교도 안됩니다. 그리고 대항해시대의 시발점이라고 한것은 무엇보다도 신대륙이 갇는 의미가 남다른 것이었습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지중해무역을 대서양무역으로 바꾸어논 주역입니다.

  • 04.12.18 15:41

    원거리 항해가 주종을 이루게 만든 직접적인 이유이고 이후의 개척자들을 자극한 직접적인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신대륙발견이 소 뒷걸음 치다 쥐잡은 격인것은 사실이지요. 애초의 목적인 황금의 나라 인도를 발견한것은 아니니까요

  • 04.12.18 19:00

    전에 한 책에서 본 내용인데 그 저자는 충격적인 내용을 전하더군요. 다름아니라 정화의 선단이 아메리카를 먼저 발견했으며 후에 명황제에 의해 파기하라고 지시된 내용의 일부가 베니스까지 건너가 우연히 콜럼버스의 손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 04.12.18 19:04

    정화등의 탐험 후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시기뒤의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 내용을 알 수 없는 지도 등등을 근거로 해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운후 저자왈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은 우연한 발견이라기 보다는 계산된 모험이었다."

  • 04.12.18 19:14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당시 중국 항해의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정화의 항해라는 식으로 완전히 코끼리 뭐 잡는 짓을 하고 있지만 정화라는 사람은 그 수많은 항해사들중 하나였을 뿐 당시 중국의 항해는 대략 1000톤 이상급의 선단만 최소 4차례(동해안으로의 탐사도 포함)이상 출발한 대항해의 연속이더

  • 04.12.18 19:17

    군요.) - 저자는 중국인도 아니고 유럽의 한 대학교수였습니다. 물론 변화에 민감한(변하면 자기네들 쪽박찰까봐.)울 사학계들의 책에서 이런 내용이 나오긴 어렵겠죠.

  • 04.12.19 12:42

    대항해 시대의 시발점으로써의 시작은 신대륙 발견은 아니라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몇가지 이유가있는데 대항해시대의 태동을 보자면 에스파냐보다는 포르투갈에서 더 욱더 먼저 대양에 눈을 돌렸다는 점입니다. 조앙2세의 둘째아들 엔리케왕자가 십자군 원정으로 아프리카 세우타 항을 점령했을때 유럽에선 보지못했던

  • 04.12.19 12:44

    진귀한 물품들이 엔리케왕자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그는 귀국후 카라벨선과 사분의 계발을 장려했으며 당시 서쪽해안선으로 탐험대를 보내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암흑바다가 정복되었고 바다로 인도까지 갈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고 이때부터 수많은 모함가들의 모험의식을 자극했다고 합니다.

  • 04.12.19 12:47

    에스퍄나는 포르투갈보다 상대적으로 같은 반도국가이지만 상대적으로 내수 경제력이 우수했으며 지중해를 끼고 있어서 그다지 큰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었지만 옆국가인 포르투갈의 자극을 받아서 대양으로 나가게된것입니다. 또한 포르투갈이 희몽봉을 발견했고 아프리카를 돌아 넘어갈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자 포르투칼에

  • 04.12.19 12:48

    뒤질수 없다는 식으로 콜럼버스를 후원하기에이릅니다. 이떄 제시한 콜럼버스가 제시한 조건은 서회항로로 인도를 발견할경우 자신을 인도의 부왕으로 삼아줄것과 수입의 약2할을 제시했었습니다.이러한 순 도둑놈같은 조건을 받아줄만큼 그만큼 스페인은 뒤쳐진상황에서 절박했었단걸 알수 있습니다.

  • 04.12.19 12:50

    또한 신대륙 발견이 그다지 항해사 적으론 영양가가 없다는것은 바로 이 두국가의 대외정책에서도 면밀히 살펴볼수 있습니다. 에스파냐는 기대했던 서회항로에서 계속된 탐사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원했던 향료와 융단을 얻을수 없게 되자 약탈 정복정책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물론 피멘토(고추) 타바코(담배) 옥수수등

  • 04.12.19 12:52

    교역품이 없었던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후추와 비단을 대신할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정말로 돈이되는 금을 찾아나서게 된것이죠. 이것은 어떠한 한 위대한 발견이 될수 있었던것을 단순 약탈과 돈줄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레하게 된겁니다. 즉 아프리카나 아메리카나 별반 다를게 없다는것과 같습니다.

  • 04.12.19 12:55

    반면에 포르투갈은 본래부터 항로를 통해서 아프리카를 건너 인도나 동방과의 교역을 원했으며 실제로 탐사도 아프리카대륙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결국에 그들은 그들이원했던 인도에 도착했으며 진정한 장거리 대외 무역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와는 달리 대외무역에 힘썻고 세계무역의

  • 04.12.19 12:57

    판도를 바꾸게되며 상업혁명을 통한 유럽이 근세로 나아가는 시발점을 마련했다볼수 있습니다. 실크로드를 통한 오스만제국의 중계무역독점의 시대도 지나갔으며 이것은 유라시아 대륙의 힘의 이동을 뜻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약탈식민 일변도의 에스파냐는 결국 내수 산업의 부재로 인해서 영국과 다른 국가

  • 04.12.19 12:59

    와의 경쟁에서 뒤떨어지게 됩니다. 결국 1588년 영국과의 해전에서 무적함대가 패함으로써 그 모든 주도권을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지요.. 현제 콜럼버스가 유명해진것은 현제 미국의 영향이 크다고 볼수 있습니다. 얼마되지도 않는 그들의 역사를 무려 수백년 앞당길수 있는 구실이 되고 있고 자신들이 살고있는

  • 04.12.19 13:00

    대륙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기 위함이지... 실지로 근대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인도항로의 발견입니다. 힘쎈건 어절수 없다고 소발이쥐잡듯이 발견한 엉터리 발견을 인류의 위대한 발견인냥 떠받드는건 결국 미국놈들 힘자랑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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