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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센인권변호인단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권철 씨의 국내 첫 사진전 '텟짱 한센병에 감사한 시인'을 기념해 지난 3일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에서 ‘한센인권운동과 시각문화’ 콜로키움을 열었다.
이번 콜로키움에선 근대 한센인 격리 수용의 역사, 2000년대부터 진행된 한센 회복자와 관련한 국내외 주요 소송 내용을 되짚으면서 시민운동으로 이어지지 않은 한계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콜로키움엔 서울대 정근식 교수, 주윤정 박사(아시아연구소 동북아센터), 한센인권변호단 박영립·조영선 변호사, 권철 작가, 한센 회복자 등이 참여했다. 콜로키엄에서 오간 주요 내용을 정리하여 전한다.
* 기존에 사용된 한센인이란 한센병에 걸린 자를 뜻한다. 그러나 한센병에 걸렸던 이들 대부분은 완치되었으며 전염의 위험 또한 없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한센인과 별도로 한센 회복자라는 표현을 사용해, 이들이 완치됐음을 명백히 드러내고자 한다. |
# 일제강점기, 한센인 격리 수용의 시작
전남 소록도엔 국립소록도병원이 있다. 그 전신은 1916년 일제 치하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소록도 자혜의원이다. 이후 이곳은 확장을 거듭하며 수용 인원이 점차 늘어났다. 처음엔 치료를 위한 자발적 입소도 있었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엔 경찰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센인들을 잡아다니는 등 강제 수용이 이뤄졌다. 1940년에는 최대 6136명이 수용되었다고 한다.
강제 수용된 이들은 강제 노동에 내몰렸다. 중증 환자부터 어린아이까지 소록도 확장공사를 위한 벽돌제조, 자재 운반, 도로 개설 등에 동원됐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는 전쟁 군수 물자 동원을 위한 노동도 이뤄졌으며 할당된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고문을 당했다. 이외에도 이들에 대한 단종·낙태 시술이 이뤄졌고, 이들의 시신은 학술연구 명목으로 해부되기도 했다.
후에 일본에선 정부의 강제 격리 정책에 대한 위법성을 물으며, 일본에 있던 한센 회복자들이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 피해가 인정되어 2001년 일본 정부는 '한센병요양소입소자 등에 대한 보상금의 지급 등에 관한 법률'(아래 한센보상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근거해 일제강점기 당시 소록도에 있었던 조선 한센인들도 2003년 일본 정부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재판부(민사 제3부)는 한센보상법이 정한 '국립요양소 등'에 소록도 갱생원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같은 날 대만 낙생원에 수용됐던 한센인 환자들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서 재판부(민사 제38부)는 '국립요양소 등'에 외지 요양소도 포함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즉, 같은 법에 근거하여 한국은 기각하고 대만은 피해를 인정받은 것이다.
이에 대해 시민사회단체가 들고 일어나자 일본은 2006년 국외에 있는 한센병 요양소에 입소해 있던 한센인들에 대한 보상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관련 법률을 제정한다. 이 법률에 따라 일제강점기 한국과 대만에서 한센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강제 격리당한 이들도 보상대상자에 포함됐다. 이 법을 통해 피해자들은 입소 기간에 따른 차등 없이 1인당 800만 엔의 보상금을 받았다.
# 해방 후 한센인들에게 가한 ‘인권침해’, 정부는 외면
한센인에 대한 정부의 차별과 격리는 해방 후에도 계속됐다. 해방 직후 10여 건의 집단 학살이 자행됐고, 1958년 소록도 갱생원 연보엔 1949년부터 1958년까지 1191명이 단종수술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단종 수술은 1980년대까지 행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한센인들은 해방 후의 강제 격리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했으나, 2007년 제정된 '한센인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아래 한센피해자법)은 사실상 실효성이 없었다.
한센인권변호단의 조영선 변호사는 “일본이나 대만은 강제격리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인권침해를 인정하고 사죄와 더불어 일괄 보상, 명예회복에 관한 조치, 지속적인 의료 및 생활지원 등을 하고 있다”라면서 “한국 한센피해자법은 한센피해사건진상규명위원회에서 규명된 사건의 피해자에 대해서만 의료와 생활지원 등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기초생활수급자로 의료지원, 생활지원을 받고 있다면 피해를 인정받더라도 받을 수 없다. 이중지급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즉, 피해자 대부분이 고령으로 이미 기초생활수급자거나 의료급여 수급자인 상황에서, 한센피해자법에 따른 매월 15만 원의 생활지원금도 이중지급 금지를 이유로 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자국민에 대해 명예회복과 더불어 입소 기간에 따라 1인당 800만 엔에서 1400만 엔까지 손해배상을 한 것과 대조된다.
따라서 조 변호사는 “'일괄배상'하라며 법 개정을 요구했으나 예산을 이유로 한국 정부는 외면하고 있다”라면서 “어쩔 수 없이 대표적인 인권침해인 단종·낙태에 대해서라도 피해보상 및 명예회복을 위한 별도 소송을 진행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이에 단종 296명, 낙태 335명 등 총 631명이 국가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민사 제2부)은 한센 회복자에게 가해진 대한민국 정부의 단종·낙태에 대해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한 바 있다. 이후 이뤄진 항소심에서 광주고등법원도 동일한 취지의 판결을 하였으며,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당시 1심 판결에서 재판부는 정관절제 수술을 받은 원고 9명에 각 3천만 원, 임신중절 수술을 받은 원고 10명에겐 각 4천만 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오는 2월 12일에도 서울중앙지법에서 한센 회복자 원고들이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변호단 측은 이번 판결도 승소 시, 승소자 수는 200여 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조 변호사는 “피해자 대부분이 고령이어서 소송이 진행되는 중에도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전하면서 “한국정부가 국가의 인권침해를 외면하는 것은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없는 현재의 일본 정부와 다를 바가 없다”라고 꼬집었다.
# 한센인권운동, 시민사회와 적극적 관계 맺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
하지만 이러한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시민사회단체와 연계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 했다. 조영선 변호사는 “협조하고 연대할 수 있는 시민사회단체를 만드는 것이 필요했으나 한센 회복자의 그룹이 폐쇄적이었다”라면서 “소록도를 벗어나서 개인 활동을 하기엔 어려운 과정이 있었고 이러한 강고한 외벽으로 시민사회단체가 이를 알지도 못하거니와 (운동적 주체를) 알고도 발굴해내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라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주윤정 박사는 대만 낙생원에서 한센 회복자들과 연계해 일어난 시민사회 운동을 소개했다. 주 박사는 생태환경 보전 운동을 위해 대만 청년들이 낙생원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운동이 시작됐으며, 이러한 운동은 자연히 인권운동 프레임으로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주 박사는 “대만 낙생원은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꾸준히 소식을 전하면서 유튜브(YOUTUBE)에도 청년들이 낙생원에 대한 공사를 멈출 것을 항의하는 집회, 시위 영상을 올려 자신들의 활동을 알리고 있다”라면서 이러한 모습은 한국에서 소록도가 정치적·종교적 시혜의 대상으로 관계 맺으며 시혜적 대상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앞으로 시민사회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과제”라면서 한센인권운동이 나아갈 방향에 관해 물음을 제기했다.
한편 지난 1월 26일부터 오는 6일까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권철 씨의 국내 첫 사진전 '텟짱, 한센병에 감사한 시인'이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에서 열린다. 권 씨는 1997년 일본의 한센인 요양소에서 텟짱(본명 사쿠라이 테츠오)을 만나, 2011년 텟짱이 숨을 거둘 때까지 함께 보낸 시간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한센병 시인인 텟짱은 권 씨의 오랜 벗이면서, 동시에 그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의 길로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1999년 한센 회복자를 소재로 한 사진으로 데뷔한 권 씨는 지난해 <가부키초>와 <텟짱, 한센병에 감사한 시인>이라는 두 권의 사진집을 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