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상실 위기와 하느님의 개입
예레 20,7-9; 로마 12,1-2; 마태 16,21-27 / 연중 제22주일; 2026.8.30.
나는 누구인가, 혹은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주 하는 질문은 아니지만, 가끔은 우리네 삶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질문입니다. 만일 이 질문에 선뜻 답이 나오지 않으면 삶이 혼란스러워지는 위기가 닥칩니다. 하지만 그 답을 할 수 있으면 삶이 안정되고 생기가 돌 수 있습니다. 이를 정체성 의식이라 하는데, 이를 정확하게 밝혀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연중 제22주일인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으로 우리에게 들려오는 말씀은 정체성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복음에 있었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던 그분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가 되살아나실 것”이라는 놀라운 운명을 밝히신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스승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운명도 놀랍도록 안타깝지만, 죽었다가 되살아나리라는 부활의 운명을 예고하신 일은 더욱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놀라웠던 소식은, 제자들 역시 스승의 운명을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십자가를 짊어지기만 하면 억울한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제자들 역시 되살아나게 해주겠다는 엄청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베드로에게 상기시키신 하느님의 일이요 제자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아는 일이 이토록 중요했습니다.
일찍이 이사야가 고난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에서 예언했던 바대로, 메시아는 무죄한 고난을 통해서 세상의 죄를 없애는 파스카 과업을 수행하리라는 첫 번째 비밀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두 번째 비밀을 밝히고 계신 겁니다. 이 두 가지 천상의 비밀, 즉 파스카 과업과 부활로써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인류 앞에 밝히겠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 비밀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비밀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운명이 아니라 그분을 메시아로 믿어 고백하고 그 메시아적 삶을 뒤따르는 메시아적 백성 모두에게 가능하도록 열려진 섭리가 밝혀졌다는 것이 그 세 번째 비밀입니다. 이 놀라운 운명에로 초대받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도 그토록 중요했던 것이지요. 적어도 예수님께는 정체성 인식이 그토록 중요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작정하고 이 비밀스런 운명을 털어놓으시는 데에는 이만한 사정이 숨어 있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에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신지에 대해서 그 누구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던 사정도 있습니다. 그분의 정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참 많았습니다. 그분으로서는 여러 번 여러 차례 당신의 정체를 밝혀 오셨습니다. 문제는 복음을 들으러 온 군중이나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밝히시는 말씀과 기적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실 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시는 모습을 통해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밝히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무언가 도움을 받으러 당신을 찾아오는 이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성심성의껏 맞이하시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것이 또한 하느님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권능을 발휘하셔서 아픈 사람을 낫게 하시고 장애도 고쳐 주셨으며 마귀도 쫓아내어 주셨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분은 영락없는 예언자이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통해서만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도 점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셨습니다. 처음에는 비유적으로 드러내시다가 나중에는 직접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즉,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시며, “성령을 내려오시게 할 생명의 물”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 청하여 그 권능을 이끌어 들일 수 있는 능력 있는 예언자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처럼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자처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 필립보가 엉뚱하게도 하느님을 뵙게 해 달라고 조르니까,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보았으면 곧 하느님을 뵌 것”이라고까지 밝히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분의 정체에 관한 말씀으로서는 가장 결정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당신 제자들을 위해, 또는 당신 제자들이 저지른 죄로 말미암아 억울한 죽임을 당하시고 그렇지만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며 게다가 당신을 따른 제자들에게도 같은 운명을, 그러니까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겠지만 부활의 영광도 누리는 똑같은 운명을 예비해 놓고 초대하겠다는 말씀은 제자들이 듣기에 자신들의 운명이나 정체성과 관련해서도 역시 결정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선택은 오로지 제자들의 자유에 맡기셨습니다. 이 말씀이 그 뜻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단, 선택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는 경고도 빼놓지 않으셨는데, 이 말씀이 그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예레미야도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으면서 겉껍데기로만 알고 있었던 자기 정체성이 깨지는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예언자로 받은 부르심을 후회하면서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예레 20,7ㄱ) 그가 예언자로서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고 이렇게까지 막말을 하느님께 늘어놓는 이유는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받은 대접 때문입니다. 다음 말씀을 들어보시지요.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네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예레 20,7ㄴ) 예레미야의 얄팍한 신앙이 눈에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바오로 역시 사도요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고 20년을 살고 나서 비로소 알게 된 자신의 실존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로마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ㄴㄷ) 그 어느 유다인보다도 율법에 열성적인 그입니다. 따라서 율법이 명하는 제사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알았을 그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 인생을 180도로 바꾸었습니다.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나섰고, 비주류 출신이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은 사도로 자처했으며, 그 명예가 어찌나 소중했든지 사도로 일한 보수를 절대로 받지 않고 무보수로 헌신했습니다. 그러한 선교사의 삶과 사도로서의 활동이 바오로가 바친 예배요 제사였다는 고백을 이제 로마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털어놓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정체성을 찾아가는 인생 길에서 예레미야가 초보자의 어수룩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면, 바오로는 원숙한 프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초보입니까, 프로입니까? 우리가 초보자인지, 아니면 프로인지 또 아니면 그 중간에 있는지는 다음 내용을 들어 보시면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정체성이란 실제 이루어진 삶에 진정성 있는 마음이 녹아 들어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정체성을 담은 이야기에는 울림이 있습니다.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듣고 또 들어도 물리지 않는 것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기준이자 목표로 삼고 자기 정체성을 그분 안에서 찾고자 정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체성의 구도자입니다.
정체성이란 화두로 오늘 말씀을 비추어 본 바로는 정체성이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자신에게 의미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삶의 방향에 대해 결단을 내린 정도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는 아직 어리벙벙해 하고 있지만 바오로는 이미 잘 정리된 이해와 판단을 가지고 있고 또 권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게서 보듯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인생 좌표를 찾는 일이며, 의미있는 일은 지금의 처지를 원점으로 삼아서 그 좌표로 이동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결단을 내려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신앙의 프리즘을 한 번 통과시켜서 보면, 정체성이 뚜렷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은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원하십니다. 단, 그에 대해 책임에 대해 돌보아 주시기도 하지만 인생이 끝나면 엄정한 심판을 하기도 하실 겁니다. 그러자면 지금껏 집착해 온 자기 겉껍데기를 버려야 참된 자기 정체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정체성이 흔들리는 우리네 위기에 예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십자가를 통한 부활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