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정원림의 연못도 가뭄에 바닥을 드러냈다.
그런데 연못 주변에 글자들이 새겨져있습니다. 마음을 깨끗이 닦는다는 ‘세심(洗心)’이라는 글자가 특히 눈에 들어왔지요.
임대정원림의 연못에 새겨진 글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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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은 곳은 백운동원림입니다. 이곳은 제 기인이사 시리즈가운데 故 서성환 태평양화학 창업주가 건설한 영암 월출산 주변 차밭 사이에 숨어있는 곳입니다. 성환 회장의 발자취를 취재하려 몇번을 갔을 때 표지판을 봤지만 정작 그곳에 들어간 것은 최근의 일이었는데 놀라고 말았습니다. 이곳은 양산보 선생 3대가 건설한 담양 소쇄원, 고산 윤선도 선생이 만든 보길도의 부용동원림과 함께 호남의 3대 원림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백운동원림을 보고 나서 보길도로 건너가 부용동원림마저 취재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들 정도였습니다.
백운동원림 대문에서 들여다본 정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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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원림은 400여 년 전 이담로(李聃老·1627~1701)선생이 들어와 만들었다고 합니다. 계곡 옆 바위에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을 새기고 조영(造營)한 원림으로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배합된 경치가 매우 빼어난 곳입니다. 예로부터 백운동은 ‘월출산에서 흘러 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이곳에는 약사암과 백운암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백운동원림의 존재가 이담로 선생의 6대손 이시헌에 의해 밝혀졌다는 거지요.
백운동원림 담벼락에는 백매오가 심어져있다. 이끼가 세월의 흐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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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헌은 백운동에 전해온 각종 기록과 시문을 모아 ‘백운세수첩(白雲世守帖)’이라는 책자를 남겼는데 여기 보면 이 원림이 조성된 시대와 이유와 주인공을 알 수 있습니다. “백운산장은 내 6대조이신 처사공께서 지으시고 내 고조이신 수졸암(守拙庵) 이언길 공께서 받아 전하여 지켜온 것이다.” 백운동원림은 조성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황폐해졌고 경치도 많이 망가졌습니다. 길 잃은 사람들이 ‘귀신이 나올 것 같다’고 느낄 정도였는데 ‘백운세수첩’이 2001년 발견되면서 백운동원림은 다시 주목받게 됩니다.
다시 ‘백운세수첩’에 나오는 글을 볼까요? “(…)
이제 대나무 상자를 뒤져 얼마간의 시와 글을 얻고 합쳐서 한 권으로 만들어 오래 전하기를 도모하고 ‘백운도(白雲圖)’를 그려 책머리에 얹는다. 맨앞에는 처사공이 지은 ‘백운기(白雲記)’와 ‘명설(名說)’의 초고를 싣고 이를 이어 양세에 종유했던 여러 어진 이의 작품을 실었다. 그런 뒤에야 한 구역 경물의 빼어남과 양대에 걸쳐 만들고 지켜온 아름다움이 한권의 책 가운데 갖추어져 자세히 실리게 되었다. 후손으로서 백운동을 지켜 이 집을 전하는 자라면 귀한 옥처럼 받들어 오로지 감히 실추시킬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짧은 시와 조각 글 사이에 가락이 맑게 울리고 자획이 예스러워 옛 어진 이의 전형과 풍치를 오히려 방불하게 얻을 수 있다. 손으로 어루만져 아껴 실피노라니 나도 모르게 숙연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므로 개연히 감탄하였다. 훗날 이를 보고 느끼며 법으로 취하는 자가 또한 누가 된다 해도 안 될 것은 없지만 다만 내 후손들이 서로 힘써 이를 지켜 잃지 않아 길이 백운동의 귀한 물건이 되게 하길 바라노라. 경술년(1850) 10월 상현에 불초 동주(峒主) 이시헌은 삼가 적는다.”
비오는 만추, 노란 낙엽이 백운동 원림을 뒤덮었다. 서정이란 이런 풍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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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백운세수첩’에는 ‘백운도’가 빠져있습니다. 그렇다면 원형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바로 이런 질문에 강진을 유명하게 만든 다산 정약용선생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백운동원림에서 초의선사 등과 하루를 머물며 그린 ‘백운첩’이 나타난 것이지요. 다산은 기록의 천재답게 백운동원림에 머문 시기와 감회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산 관련 책자를 쓴 박석무 선생은 다산이 백운동에 간 것이 1812년 9월 12일의 일이라며 그가 같은 고을이지만 거리가 먼 그곳까지 간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백운동은 원주(原州) 이담로처사가 은거하던 곳으로 후손 이덕휘(李德輝·1749~1828)의 초청으로 다산은 초의선사와 윤동(尹峒) 등과 함께 찾아 즐기곤 했다. 초의선사가 ‘백운도’와 ‘다산도’를 그렸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시를 지어붙였다.” 이때 이덕휘의 아들이 훗날 ‘백운세수첩’을 쓴 이시헌(李時憲)이었는데 나이가 겨우 열살이었습니다. 이시헌은 이때 수발과 심부름을 하며 다산을 만났고 훗날 다산으로 따라가 다산의 제자가 되기도 했으니 기이한 인연이라 하겠습니다. 다산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 이시헌에게 글과 그림이 있는 20쪽 짜리 ‘백운첩(白雲帖)’을 선물로 준 것으로 보이며 이게 개인소장가에게 넘어갔다가 세상에 공개된 게 2001년입니다. 백운동원림에 대한 다산의 발문과 12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운동원림 정원 한복판에 12경을 안내하는 표지판이다.
뒤로 보이는 게 얼마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흉물스런 안채로 아예 원림을 망가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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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경 임신년(1812) 가을, 내가 다산에서 백운동으로 놀러 갔다가 하룻밤을 자고 돌아왔다. 남은 미련이 오래지나도 가시지 않기에 승려 의순을 시켜서 ‘백운도’를 그리게 하고 이를 이어 12승사의 시를 지어서 주었다. ‘다산도’를 붙여서 우열을 보인다. 9월 22일.” 여기서 등장하는 다산도는 바로 ‘다산초당’의 그림일 것입니다. 다산은 다산초당을 손수 일구다시피했을 정도로 주변 풍광에 자부심이 강했는데 백운동원림을 본 뒤 우열을 가리자고 했던 것은 백운동의 경치에 깊이 빠졌다는 반증이 될 것입니다. 서시(序詩)격인 ‘백운동 이씨의 유거에 부쳐 제하다(寄題白雲洞李氏幽居)’는 다음과 같습니다. 백운처사 숨어 사는 유정의 괘 얻으니, 임금께 헌책(獻策)함은 옳지 않다네. 십무(十畝)의 솔과 대로 땅의 이익 거두고, 반산(半山)의 누각에서 물소리를 베개 삼지. 풍류는 예원진(倪元鎭)만 못하지 않고, 명승은 고중영(顧仲瑛)에게 소문날 정도였네 상자 속에 남긴 글 그대로 있어, 세월이 흘러도 금쪽같은 맹세를 바꾸지않네. 여기서 나오는 ‘유정(幽貞)의 괘(卦)’란 ‘주역’에 나오는 말로 유정은 벼슬길에 나서지않고 숨어사는 처사 혹은 은사를 말합니다. 두번째 줄의 헌책(獻策)은 벼슬에 나아가 임금께 글을 올려 자기 포부를 펼친다는 뜻인데 이담로는 그런 욕망을 버렸다는 거지요. 10무(畝)넓이란 1보가 사방 6자요, 100보가 1무이니 1000보라는 넓이를 짐작할 수 있겠으며 반산은 고시인 ‘누각연우반산중(楼閣烟雨半山中)’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예원진(倪元鎭)은 원말과 명초의 문인화가 예찬(倪瓚· 1301~1374)인데 그는 성품이 고결하여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가산을 정리하고 강소성(江蘇省)의 삼묘호(三泖湖) 호반에 소한관(蕭閒館)을 짓고 은거하여 풍류의 삶을 살았습니다. 고중영(顧仲瑛)은 원대 고덕휘(顧德輝·1310~1369)로, 집안에 옛날의 법서(法書)와 명화(名畵)와 정이(鼎彛) 같은 골동품을 모아 서경 서편에 별장을 짓고 ‘옥산가처(玉山佳處)’라고 했는데 손님을 초대해 사방의 학사들이 모두 그 집에 모여들었다고 하지요.
다산이 꼽은 백운동 12경
 
제1경은 옥판상기(玉版爽氣)로 집 주변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에 올라보면 백운동원림 너머로 월출산 옥판봉이 보입니다. 그 산이 내뿜는 상쾌한 기운이 원림 주변을 가득채우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백운동원림의 제1경 동백숲에는 벌써 동백꽃이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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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경은 유차성음(油茶成陰), 백운동원림으로 가는 좁은 길에 드리워진 동백나무 그늘입니다. 동백나무는 산다경(山茶徑)이라고도 불리지요.
제3경은 백매암향(百梅暗香), 즉 원림 담장에 심은 백매오(百梅塢)의 매화향기를 말합니다.
제4경은 풍리홍폭(楓裏紅瀑), 단풍나무의 붉은 빛이 어린 옥구슬 폭포인데 아쉽게도 요즘은 가뭄이 들어 시냇물이 거의 말라버렸을 정도입니다.
백운동원림 주변은 자연계곡이 이루는 폭포지만 계속된 가뭄으로 수량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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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경은 곡수유상(曲水流觴), 마당을 돌아 나가는 물굽이에 띄운 술잔으로 경주 포석정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백운동원림의 명물 가운데 하나인 유상곡수 한복판은 작은 연못이다.
아마 옛 선비들은 신라왕들이 포석정에서 그랬듯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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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경은 창벽염주(蒼壁染朱), 창하벽에 쓴 글씨를 말하며
백운동원림 입구를 지키는 창하벽 뒤로 대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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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경은 유강홍린(蕤岡紅麟), 정유강(貞蕤岡)의 용비늘 같은 소나무인데 눈에 힘주고 둘러봐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제8경은 화계모란(花階牡丹), 꽃 계단에 심은 모란을 말합니다.
백운동원림의 작은 계단에도 모란꽃을 심어 풍경을 가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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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경은 십홀선방(十笏禪房), 사랑채인 취미선방(翠微禪房)의 세칸 초가이며
백운동원림의 사랑방격인 취미선방. 선비의 세계를 담기 위해서는 고대광실이 아니라 이 자그마한 공간으로도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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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경은 홍라보장(紅羅步障), 붉은 비단 장막을 펼쳐놓은 듯한 단풍나무이며
제11경은 선대봉출(仙臺峰出), 옥판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선대(停仙臺)를 말합니다.
백운동원림의 제10경 풍단이다. 뒤로 보이는 푸른 벽 위에 단풍나무가 심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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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제12경은 운당천운(篔簹穿雲), 원림 주변에 자라고있는 왕대나무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리 넓지않은 원림 주변에서 무려 열두곳이나 되는 경치를 찾았다는 점인데 이것은 그만큼 원림 건설자들의 자존심이 높았다는 뜻일 겁니다.
백운동 원림 근방에 월남사 터가 있고 인근에 이담로 선생의 10세손 이한영(李漢永·1868-1956)의 생가가 있습니다.
그는 야생 차나무를 이용해 녹차를 만든 분인데 이한영가에서 파는 백운옥판차와 금릉원산차는 명차로 이름이 나있습니다.
호남의 3대 원림으로 불리다 쇠락한 그곳에서 다산의 ‘기록’을 바탕으로 다시 원형을 찾는 작업에 들어선 과정을 되새겨 봅니다.
강진군에서 백운동원림 복원작업을 완벽하게 끝내 모두가 옛 사람들의 안목을 함께 누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해봅니다.
Photo by 이서현, [문갑식 기자],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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