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의 비극과 민간인 학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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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정에서 좌우 전염병이 빚은 민간인 학살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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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인권운동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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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기획 ‘민간인학살 현장을 가다’ 시리즈 첫 번째 현장으로 완도군을 다뤘다. 한국전쟁 전후 완도지역에서는 대략 5백명에서 1천여명에 이르는 민간인들이 나주경찰부대와 완도경찰에 의해 집단적으로 죽임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학살자 숫자만도 소안 230여명, 노화 55명, 보길 6명, 완도읍 70여명, 신지 70여명 등 500여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약산 등 10여개의 섬에 대한 조사가 진행된다면 그 숫자는 크게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민간인학살 현장을 가다’ 완도편은 총 3회로 기획됐으며 목차는 다음과 같다.
1회-학살사건 조사에 들어가며, 2회-소안·노화·보길·청산, 완도읍·신지, 3회-약산, 맺음말 <편집자>
▲ 7일 서울에서 열린 민간인학살 유족증언대회에 참가한 김보희씨(완도군 신지면 월항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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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지역에 가면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해마다 7월말이 되면 하루를 사이에 두고 수백 가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제사가 치러진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가구 당 제사인원이 많게는 9명에서 평균 3, 4명 꼴이나 된다는 사실에 기자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약산면의 경우 하룻밤 제사가 무려 1천여명에 달한다는 풍문은 사실 관계를 떠나 경악과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다.
이쯤해서 기자는 묘한 상상력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혹여 완도 전역에 몹쓸 전염병이라도 나돌았던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자연적 재해라도 발생했던 것은 아닐까?
긴말 할 것 없이 결론부터 말하자. 맞다. 1950년 한국전쟁 전후 완도 전역에는 전염병이 돌았다. 좌와 우라는 이데올로기 전염병이 그것이다. 그 병은 하도 고약해서 감염의 유무에 관계없이 상대의 피로 섬 전역을 붉게 물들였다. 가정은 총살형에 처해졌으며 사회공동체는 심해 속으로 수장 당했다. 그때 살아남은 자의 가슴속에 화인처럼 새겨진 50여년의 상흔은 아직까지도 섬 주위를 떠돌며 원망과 증오의 ‘원혼가’를 통곡처럼 토해내고 있다.
-나주경찰부대와 완도경찰이 학살 주도
한국전쟁 전후 이 지역에서 학살당한 민간인의 숫자는 대략 5백명에서 1천여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지만 구체적인 피학살자 명단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김보희(68·완도군 신지면 월양리 석화포)씨가 지난 93년부터 4차례에 걸쳐 중앙과 지방정부에 민간인학살 진상조사를 청원하면서 1백여명의 희생자 명단을 확보했을 뿐이다. 광주인권운동센터가 지난해부터 김씨의 도움을 받아 현지 유족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를 통해 지금까지 파악한 희생자 수는 대략 500여명 정도. 그러나 앞으로 10여개의 섬에 대한 조사가 진행될수록 희생자 수는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이와 관련 완도지역에서 보여지는 민간인 학살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유형으로 약산을 중심으로 목격자들의 진술이 보고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은 하룻밤 사이 무려 1천여명에 달하는 사람의 제사가 모셔진다는 풍문의 진원지로 조사 결과에 따라서는 전체 학살자 수가 크게 증가할 것으로 보여져 큰 파문이 예상된다.
두 번째 유형은 나주경찰과 완도경찰에 의한 조직적 학살이다.
1950년 7월말 인민군의 파상공세에 떠밀려 퇴각하던 나주경찰부대와 완도경찰의 협공으로 민간인의 상당수가 희생됐다는 것. 이들은 섬 전역에서 좌익분자 소탕을 이유로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나주경찰부대는 인민군 복장으로 들어와 환영행사에 나온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 이 같은 사실은 생존자와 유가족들이 직접 증명하고 있으며 당시 완도경찰서의 자료에서도 일부 인정하고 있다.
세 번째 유형은 경찰부대의 섬 진입과 동시에 이뤄졌던 지역주민 간의 학살을 들 수 있다.
나주경찰부대는 1950년 8월부터 한 달여 동안 노화도와 보길도에 머물면서 지역 유지와 우익 인사의 밀고를 토대로 무수히 많은 민간인을 학살한다. 노화읍 새넙도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지역 유지였던 김모씨의 ‘손가락질’ 하나로 9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즉결처분된 것이다. 이들은 아카시아 나무가 숲을 이룬 곳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유가족들은 같은 동네사람들 사이에 쌓인 사적인 감정이 학살의 도화선이 됐다고 밝혔다. 이는 피의 악순환을 초래했으며 결국 대량학살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소안도서 민간인 230여명 학살당해
완도지역의 민간인 학살형태는 육지의 그것과는 달리 수장이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섬이라는 특수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장의 경우는 시신을 찾기 힘들 뿐더러 이후 사망신고의 어려움 때문에 기록적 차원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유족들이 한국전쟁 이후 사망신고를 접수했으나 결국 사망신고를 못했다는 증언은 육지와 섬 지역의 차이를 반영한다.
유족들은 소안도에서 대략 230여명의 민간인들이 희생됐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경찰부대는 일가족들을 뿔뿔이 분리시킨 뒤 인근 섬들로 끌고 가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유족들이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사실은 3개읍과 9개면에 이르는 비교적 광범한 지역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이 왜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는가를 밝혀주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완도지역이 본 섬을 비롯, 10여개의 큰 섬과 군소 도서들로 이뤄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역민들이 원활한 교류를 하는데 장애물이 되고 피해자 파악에도 어려움을 제공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두 번째로는 당시 사람들이 전동선 보다는 뗏목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완도 본 섬과 신지·약산·고금, 노화·소안·보길, 금일·금당, 청산, 생일도 등을 소단위로 묶을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 지리적인 문제일 뿐 조류에 따라 이들 섬에 이르는 통로가 달랐다는 사실은 학살 사건의 사장으로 나타났다. 이밖에도 역사적 경험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섬 주민들의 특이한 기질과 정치적인 요인도 민간인 학살사건을 공론화 시키는데 있어 난관을 조성하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아울러 한국전쟁이 끝난 후 많은 피해 유족들이 고향을 등지고 도시 등 타지역으로 이주한 뒤 연락이 두절됨으로써 수많은 희생자들이 아직까지 햇볕을 보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고 있다. -6월 중순이후 합동 위령제 계획
현재 완도지역 민간인학살 유족들은 각 섬의 대표를 선임하고 희생자 명단을 입수하는 등 본격적인 조사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완도군의회와 집행부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조사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의회와 집행부도 ‘진상조사특위’ 구성에 우회적이나마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 차기 의회와 집행부에 부푼 기대감을 갖게 하고 있다. 유족들은 또 오는 6월 중순이후 완도군에서 민간인학살 희생자 합동 위령제를 가질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자료제공 : 광주인권운동센터 사진 : 사진집단 파란(시민의 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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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들은 전해들은 얘기지만 정말 무지 막지했다는 소문을 들은바 있습니다 ...저희 집안 어르신도(지금은 작고) 이런일을 당했던 분 중 한분이 계시는데 살아나셨답니다 (물속에 수장) 그 이후 이빨이 한개도 없이 다 빠지셨답니다 ... 자기를 잡아가서 묶고 빠트린 사람이 누군지 아시는 분은 다 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