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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 숲의 부근에는 작은 마을만 몇 개 있었고, 이름은 하나같이 똑같아서 나이가 지극하신 분들도 가끔 혼동을 하곤 하였다. 두 형제가 방문하려는 마을은 상록 숲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었다. 이곳의 대장간 겸 상점을 경영 하는 스미스 가정을 제외하면 평범한 가구는 양 손에 꼽힐 정도였다. 화이어리가 자주 놀러 가는 마을은 이곳이었고, 사실 다른 곳은 가본적도 없었다.
블레이즈는 스미스씨에게 약간의 돈을 지불하고 팻말을 건넸다.
“내가 나무에 밖을 고리를 사고, 장을 보는 동안, 놀다 와도 좋아.” 블레이즈가 말했다. “그걸 바란 것이었지?”
화이어리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생각했다. ‘역시 형이라니까. 누나랑 왔다면 이런 횡재는 꿈도 못 꾸지.’
화이어리는 먹을 거리를 사는 형 옆에서 포켓볼 두개를 골라 진열대에 올려놓았다. 블레이즈가 야채에서 눈을 떼고 물었다.
“그걸 사서 뭐 하려고?”
화이어리는 형이 그렇게 물으리라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해둔 말을 꺼내었다. “내 포니타를 넣어둘 볼이랑 다른 종류의 포켓몬을 잡아서 길들 일거야.”
“그게 말처럼 쉬울까?” 블레이즈가 다시 야채 쪽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포니타도 길들였는데, 다른 포켓몬이라고 못하겠어?”
“아니, 내 말은 어떻게 잡는 줄 아느냐고.”
허를 찔린 화이어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머리 속을 여기저기 헤집어 보아도 포켓몬을 잡는 법에 대해서 들은 기억이 없었다.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대답했다. “몰라.”
“대단한 배짱이야, 동생.”
“상관없어. 할 수 있어.” 화이어리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몬스터 볼 두개 값을 계산하며 스미스 씨 에게 물었다.
“아저씨, 포켓몬 잡는 법을 아세요?” 그러나 그 역시 태어나서 줄곧 상록마을에서 살았으며 한번도 트레이너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모른다고 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상록시티에 체육관이 있다고 하니, 그곳에 가 보렴. 뭔가 배울 수 있을 게다.” 스미스씨는 친절하게 상록시티로 가는 길을 메모지에 적어주었다.
‘상록시티……’ 화이어리가 포켓볼을 포니타의 안낭에 넣으며 메모지를 여러 번 읽어보았다.
“놀다 올게!” 화이어리가 길거리로 달려가며 손을 흔들었다.
블레이즈도 소리쳤다. “너무 늦게까지 놀지마. 그리고 네가 거꾸로 볼에 들어가는 일이 없길 빌어줄게!”
“그런 일 절대 없어!” 화이어리가 소리질렀다.
화이어리는 우선 리프의 집엘 가볼 생각이었다. 리프는 상록마을에 둘 밖에 안 되는 또래 친구들 중 하나였다. 나이가 다 제각각 이라서, 머리로 하는 놀이보다는 별 생각 필요 없이 몸으로 때우는 놀이를 주로 하였다. 오늘은 운이 좋게도 리프를 도중에 만날 수 있었다.
“안녕 리프!” 화이어리가 쾌활하게 인사했다. 그러나 리프는 짤막하게 “안녕.” 이라고 만 말하였다. 하지만 리프가 늘 그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화이어리는 별로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리프, 다른 얘들도 불러서 놀자. 오늘처럼만 일이 술술 풀렸으면 좋겠어. 형이 장 보는 내내 옆에 있지 않아도 된다고 했거든. 형은 뭘 고를 때 오래 걸리니까 두어 시간은 놀 수 있을 거야.”
“나 지금 상록시티에 가는데.” 리프가 말했다.
“가는 길 알아?” 화이어리가 물었다. “나 약도 있거든, 혹시 필요해?”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당연히 알지.” 리프가 자꾸 들러붙은 화이어리를 떨치려고 딱딱하게 말했다. “넌 막내지만 난 맏아들이라고. 비교할 걸 해라.”
“그런가.” 화이어리가 끄덕이며 다음 질문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 리프는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화이어리는 리프를 바짝 쫓아가며 한 마디라도 더 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음― 왜 가는 거야?”
“아기 옷 지어 놓은 거 가지러.” 리프가 대답했다.
“어? 정말? 그러면 이제 태어나는 거래?” 화이어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그럼 언제? 내일? 다음 주? 한달 후?”
“몰라.” 리프가 앞만 바라보며 대답했다.
“왜 몰라?”
“모르니까.”
“그런 대답이 어디 있어?” 화이어리가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 리프가 말했다.
“에이―”
“그만 좀 쫓아와, 너랑 잡담 하다가는 오늘 중으로 다녀오지도 못할 꺼야.” 리프가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말을 퍼부었다. “만나기만 하면 종알종알. 오늘은 바쁘니까 나 좀 내버려두라고.”
“알았어. 미안해. 그러니까 화 내지마.” 화이어리가 얼른 말했다. “…그런데, 동생이 생기면 어떨 거 같아. 리프? 난 형하고 누나가 있어서……”
리프는 이제 양 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뛰어가 버렸다.
“쳇, 속 좁기는.” 화이어리가 따라가기를 멈추며 중얼거렸다.
화이어리는 다음 집으로 갔다. 자신보다는 네 살이나 어리지만 죽이 꽤 잘 맞는 친구였다. 화이어리는 대체적으로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과 잘 노는 편이었다.
“겐지야! 놀자!”
그러나 겐지의 엄마한테 핀잔을 듣고 쫓겨나고 말았다. “겐지 없다.”
화이어리는 그렇게 몇 집을 돌았지만 놀아도 되냐는 허락을 받아내지 못하였다. 단지 상냥하게 말한 사람과 퉁명스럽게 말한 사람으로 나뉘어졌다는 점만 다를 뿐이었다.
“공부를 한다고? 덴 형이? 말도 안돼.” 화이어리가 터벅터벅 걸어가며 부루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누구랑 놀지 포니타?” 화이어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나 포니타는 두 눈을 깜박일 뿐이었다.
“웨티네라도 가볼까?”
화이어리는 내키지 않지만 그곳까지 가보기로 정했다. 웨티는 화이어리랑 또래였지만 훨씬 어른스러운 소녀였다. 실라라는 여동생 하나와 아주 엄격한 부모, 이렇게 네 가족이었다. 웨티의 부모님은 다른 곳으로 자주 출장을 다니며 돈을 버셨고, 이 상록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셨다. 아니 어쩌면 상록시티까지 통틀어도 제일가는 부자일 거라고 화이어리는 생각했다. 으리으리한 저택과 마당, 그리고 하녀까지 두고있는 웨티네를 화이어리는 가끔 부러워하였다. 웨티와 실라는 둘 다 숱 많은 머리카락과 화사한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웨티는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다. 마음까지 상냥하기 그지 없었기 때문이다. 이쯤 설명하면 웨티라는 아이는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하고, 완벽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웨티는 귀머거리였다. 어렸을 때 열병을 심하게 앓고서는 귀가 멀어버렸었다. 덩달아 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모의 과보호를 받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동생인 실라는 자신마저도 귀머거리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이런 생활을 싫어했다.
화이어리는 수화를 배우더라도 자신이 웨티랑은 절대로 놀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웨티 자신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실라랑은 놀 수 있을지도 몰라.”
화이어리는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웨티의 집을 빙 돌았다. 그리고 담의 건너편이 실라의 방인 곳에서 멈추어 섰다. 물론 담을 넘기 위해서는 포니타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그래서 전 번에는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웨티의 부모님에게 심하게 꾸중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마침 몬스터 볼도 사두었어.” 화이어리가 안낭에서 포켓볼 하나를 꺼내고, 포티나의 안장을 밟고 섰다. 담의 꼭대기에 손이 닫자, 펄쩍 뛰어 무릎으로 딛었다. 실라의 방과 실라가 눈에 들어왔다. 실라는 자신의 방이 아니라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화이어리는 반가운 마음에 “안녕! 실라!”라고 인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화이어리보다도 더 놀란 실라가 수화로 다급하게 “내려가. 내려가!”를 반복했다. 화이어리는 하려던 말을 황급히 삼켜버렸다. 그리고 주저 않고 담에서 포니타에게로 도로 뛰어내렸다. 잠시 후 담벼락 안 쪽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식시간은 끝났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실라 아가씨. 이제 역사 시간 입니다. 책을 펴세요.”
‘과외 중이었구나.’ 화이어리가 생각했다. 실라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오로지 완벽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많은 것을 배울 수는 있겠지만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수업을 주로 하였다.
화이어리는 혹시 몰라 담벼락 위로 눈만 내밀었다. ‘역시 실라야.’ 화이어리는 하마터면 이 말을 내뱉을 뻔했다.
실라는 방으로 들어가면서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그대로 열어둔 것이었다. 화이어리는 실라가 과외 받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선생님은 자신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몰랐다. 화이어리가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양 손을 크게 휘저었다. 실라도 배실배실 웃었다.
“지금은 수업 중입니다. 실라 아가씨. 집중하세요.” 선생님이 책상을 탁탁 내리치며 주의를 주었다.
가야겠다고 생각한 화이어리는 다시 한번 팔을 흔들고, 담에서 내려왔다. “가서 형이나 기다리자.”
스미스씨의 상점으로 향하던 화이어리는 문득 상록시티 약도가 떠올랐다. 보아하니 형은 아직 장을 반도 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포니타! 우리 상록시티에 잠깐 같다 올까? 약도로 보아서는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은데.” 그리고 약도를 꺼내 들고 상록마을을 벗어나 무작정 숲으로 들어갔다. 그것도 아주 배짱 좋게.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화이어리는 포니타를 타고 한참을 갔다. 처음에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주 쉬웠다. 그러나 중간쯤 들어가자, 화이어리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약도 만으로 찾아가는 게 어린이에게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리프는 잘 가던데……” 화이어리는 다음 갈림길에서 망설였다. 약도에는 분명 갈림길과 택해야 할 방향이 자세히 나와있었다. 그런데 화이어리는 지금까지 약도에 나온 갈림길대로 잘 왔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쭉 가면 된다고 나와 있는데 갈라지는 길이 하나 더 나온 것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화이어리는 우물쭈물 거리다가 매다가 결국 왼쪽 길을 택했다. 길은 점점 험해졌으나 화이어리는 ‘조금만 더 가면 상록시티가 나오겠지.’라는 생각으로 계속 갔다. 그렇게 또 한참을 가다가 우거진 초목으로 길이 완전히 막히자 그제서야 돌아섰다.
“잘못…… 왔나 보다. 돌아가자.”
포니타를 돌려서 오던 길을 보는 순간 화이어리는 온 몸이 오싹 해지는 게 느껴졌다. 여태까지 길이라고 생각하며 걸어왔던 곳이 그저 무성한 풀숲이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여태까지 직선으로 왔었으니까 앞만 바라보고 걸으면 그 갈림길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거야.” 화이어리는 자기자신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자신이 또 틀렸다는 걸 발견했다. 숲이 너무 빽빽해서 똑바로 나아갈 수 없었던 거이다. 결국 이리저리 헤매던 화이어리는 잠시 멈추어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 어디로 가야하지? 포니타?” 화이어리는 여태껏 자신이 부인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길을 잃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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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화이어리는 허기를 느꼈다. 점심도 굶고 낮부터 종일토록 포니타를 몰고 다녔지만 숲에서 아직도 빠져나가지 못한 것이다. 사실 빠져나가기는커녕 숲의 중심부로 더 다가가고 있었다. 가지가 많은 나무들의 밑에는 어둠이 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런 점에서는 포니타의 갈기가 불이라는 점은 상당한 위안이 되었다. 지금 즘이면 형이랑 집으로 돌아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있을 것을 생각하자 화이어리는 서글퍼졌다. 계속해서 오늘 저녁식사를 생각하며 걷던 화이어리는 겨우 도시락을 기억해 내었다.
“맞아, 엄마가 점심으로 먹으라고 도시락을 싸주었지!”
화이어리는 포니타에게서 내려 안낭을 뒤져보았다. 안낭에는 빨간 도시락 통, 랩으로 싼 빵과 산양치즈가 들어있었다. 보리차도 있었다. 도시락의 뚜껑을 열자 밥, 절인 오이, 햄, 생선 조림, 김치 그리고 꿀을 바른 찐 호박이 누군가에게 먹히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이어리가 나무에 기대고 앉아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마저 잠시 잊고) 도시락을 먹는 동안 포니타는 근처의 풀을 뜯었다.
절인 오이는 야들야들한 게 씹는 맛이 일품이었고, 새콤하기도 해서 햄과 잘 어울렸다. 밥은 (비록 식었지만) 정말이지 꿀맛이었다.
도시락의 양은 화이어리가 평소 보다 많았으나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화이어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생선 가시를 뒤적였다. 보리차는 딱 한 모금만 마시고, 빵과 치즈는 혹시 몰라 내일 아침으로 남겨두었다.
배가 든든해지자 화이어리는 보다 쉽게 생각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는 꿀 바른 찐 호박을 조금씩 뜯어먹으며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머리 속에서만 생각 하는 것보다 포니타에게 말을 거는 편이 나았다. 포니타가 자신의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하면 덜 무서웠기 때문이다.
“포니타, 우리 길을 잃었어. 형 되게 화났겠다. 늦게까지 놀지 말라고 했었는데… 포니타 넌 무섭지 않아? 숲에서 영영 못 나가면 어떻게 하지?”
화이어리의 포니타는 아직 어려서 먼 거리는 여행해 본 적이 없었고, 우편 배달을 도운 적도 없었기 때문에 화이어리 만큼이나 길을 볼 줄 몰랐다. 그러나 숲은 별로 무서워 하지 않았다. 상록숲이 위험하다는 것 역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무 어둡다. 그지 포니타? 숲에서 자야 할지도 몰라.” 화이어리는 이렇게 말하며 포니타의 안장과 고삐를 벗겨주었다. 포니타는 안장을 얹어놓았던 허리를 이빨로 긁었다. 그리고 땅에 벌렁 드러눕더니 신나게 구르기 시작했다.
“가려웠었지? 밥 먹기 전에 벗겨줄걸.”
이제 화이어리의 옆에 엎드린 포니타는 주인의 팔 위에 머리를 올려놓았다. 밤이 깊어 가자 짐승들의 울부짖는 소리들이 들려와, 화이어리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포니타의 두 귀는 울음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쫑긋거렸다.
“포니타, 너도 잠이 안 와? 저 그르렁 거리는 소리는 대체 누가 만들어 내는 거람. 늑대도 아니고 곰도 아니고.”
화이어리가 포니타의 불로 되어있는 갈기를 계속 쓰다듬으며 말했다. 포니타라는 포켓몬의 속성은 불 이라고 아빠한테 배웠었다. 하지만 왜 자신에게는 이 불이 따뜻하게 느껴지고, 다른 사람들이 포니타의 갈기를 쓰다듬으면 화상을 입는지는 몰랐다.
“포니타. 네 갈기는 왜 불이야?” 화이어리는 문득 이 질문을 아빠에게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다. “그러면 불을 피울 수 있는 거야? 활활?” 포니타는 제 머리를 화이어리의 팔 밑에 둔 채 두 귀만 쫑긋거렸다. “아빠가 그러는데, 불 포켓몬들은 불을 뿜을 수 있대. 할 수 있으면 해봐. 불을 피울 수 있으면 사람들이 우리를 쉽게 찾을 거 아냐? 우린 지금 길을 잃었다고…… 불, 말이야 불, 네 갈기가 불이잖아. 화력을 세게 하던가, 아니면 뭐 그 비슷하게 해봐. 게다가…… 춥단 말이야."
화이어리는 애원하다시피 하였다. 조금씩 더 추워지고 있다는 화이어리의 말은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다. 한 낮에는 반팔을 입어도 될 만큼 따뜻하지만, 새벽은 아직 쌀쌀하기 때문이다.
“너랑 말이라도 통하면 좋겠다.” 화이어리가 시무룩하게 말을 이었다. 화이어리는 계속해서 아무 말이나 중얼거리다가 하늘에다가 빌기 시작했다.
“그냥 집에만 가게 해주세요. 그러면 형하고 누나들하고도 싸우지 않을게요. 그리고 엄마말도 잘 듣고, 아빠 말로 잘 들을게요. 반찬이 맛이 없다고 불평하지도 않고, 잠 잘 때는 형한테 이불도 양보할게요. 밖이 춥다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지도 않을게요. 리프한테도 잘해줄게요. 이도 매일매일 닦고……”
포니타가 갑자기 일어났다.
“왜 그래?” 화이어리가 포니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리고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포니타의 갈기가 맹렬한 소리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글거리는 불길이 주위를 갑절이나 환하게 만들었다.
불이 훅 퍼지자 온 몸에 열이 퍼졌다.
“너, 내 말을 알아들은 거야?” 화이어리가 일어나며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곧 포니타가 갈기의 불을 몇 배나 더 크게 타오르게 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땅이 쿵쿵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몸집을 가진 무언가가.
“뭐지?” 화이어리가 포니타에게 고삐를 매어주며 물었다. 순간 여러 목소리들 가운에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달아나!” 숲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안장을 얹을 사이도 없이 나무들 사이에서 니드킹이 나타났다. 이유야 어떻든 기분이 무척 나빠보였다. 화이어리와 포니타를 한번 굽어보더니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렸다. 나중에 이 사건을 돌이켜보면 화이어리는 그때 자신이 언제 포니타를 올라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퍼뜩 정신이 들어보니 포니타와 함께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그만큼 긴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니드킹은 그 큰 몸집을 끌고 잘도 쫓아왔다. 포니타가 제아무리 방향을 꺾고 비틀어도 소용이 없었다. 포켓몬들은 크다고 해서 몸놀림이 둔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포니타는 필사적으로 달렸으나 니드킹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 코앞까지 쫓아온 니드킹은 포니타를 냅다 후려쳤다. 포니타가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화이어리도 니드킹의 발 등에 걷어채었을 때 나무에 부딪혔고, 그 충격으로 숨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호흡은 다행히 금방 돌아왔지만 허리를 필 수 없을 정도로 옆구리가 아파왔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포니타의 부상 역시 가볍지 않았다. 날카로운 발톱에 배를 네 군데나 긁혔기 때문이다. 화이어리는 니드킹이 자신과 포니타를 뭉개버리려고 발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았다. ‘죽었다!’라고 생각한 화이어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무섭다고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몸이 뭉개질 법한 고통은 오지 않았다. ‘벌써 죽은 것일까?’ 화이어리가 눈을 살며시 떠 보았고, 좀 전의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리자몽이 니드킹을 가로막고 있었다. (화이어리는 이 포켓몬이 리자몽이라는 것조차 몰랐다.) 넓은 날개는 한번씩 퍼덕일 때마다 나뭇가지에 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누군가 타고 있었다.
“리자몽! 화염방사!”
그 위에 탄 사람이 말했다. 그러자 (포니타의 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불길이 니드킹에게 떨어졌다. 그 열 때문에 화이어리는 잠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니드킹은 불길에 완전히 휩싸였다.
“포켓몬 트레이너구나.” 화이어리가 눈물진 얼굴을 문지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살았다.”
하지만 한 차례의 바람이 불을 걷어가자 니드킹은 그 속에서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화상을 입은 듯 했으나 아직 펄펄했다. 트레이너는 리자몽에게서 내렸고, 땅에 발이 닫자마자 자신의 포켓몬을 교체하였다. 이번에 볼 밖으로 나온 포켓몬은 (화이어리에게는 역시 처음 보는 포켓몬인) 핫삼이었다.
니드킹과 핫삼이 서로 공격을 주고받는 사이 또 다른 소년 한명이 화이어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것도 하늘에서 곧 바로! 화이어리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소년을 들어주고 있는 버터플을 바라보았다. 아니, 소년이 아니라 소녀였다. 오늘을 착각을 너무 많이 하네…… 화이어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을 할 법도 하였다. 화이어리의 눈에는 그 소녀가 남자아이들이나 하는 짧은 머리를 가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괜찮니?” 그 소녀가 챙이 넓은 밀집모자를 가까이 들이대며 물어왔다. 모자 밖으로 보이는 머리는 노란 색이었고, 징 박힌 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때는 그 소녀가 긴 생머리를 모자 안에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 이 글을 읽는 몇몇 독자들은 지금쯤 눈치챘을 것이다. 이 소녀의 이름은 옐로였고, 어렸을 때는 자주 사내아이로 오인 받곤 하였다는 사실을. 하지만 상당히 자란 지금은 (물론) 아니었다.
“괜찮아?” 옐로가 다시 물어왔다.
“네. 괜찮아요.” 화이어리가 대답했다.
“그럼 네 포니타는 어디 있어? 그 애도 다쳤을 텐데.” 옐로가 니드킹을 상대하고 있는 핫삼과 트레이너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옐로의 이 한마디는 그 어떤 말보다 효과적으로 화이어리를 제 정신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급한 마음에 벌떡 일어선 화이어리는 허리에 끊어질듯한 통증을 느끼고 도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울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생각과는 달리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눈물이 쏟아졌다.
옐로는 “누워 있어봐. 포니타는 내가 찾아볼게.”라고 말하고 키가 큰 풀 숲을 어지러이 둘러보았다. 옐로는 금새 나무 밑에 쓰러져 있는 포니타를 찾아냈다. 포니타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괴로워하고 있었다.
옐로는 침착하게 포니타의 가장 깊어보이는 상처부터 손으로 흩었다. 그러자 콸콸 흐르던 피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옐로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에는 뽀얀 새살이 돋아 있었다.
포니타 역시 놀랐는지 끙끙 앓던 소리를 멈추었다. 아픔이 순식간에 싹 사라졌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찢어진 상처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옐로는 포니타를 데리고 화이어리가 누워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얜 괜찮아.” 옐로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하였다.
화이어리는 몸을 이리저리 돌려 통증이 덜한 자세를 잡고 있다가, 제 포니타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그럴 리가. 포니타가 니드킹의 발톱에 배를 찢기는 것을 직접 보았는데…… 멀쩡할 리가 없는데?”
“상처를 고쳤거든. 이제 괜찮아.” 옐로가 다시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대답했다. “어유 졸려라. 그린형은 아직 인가?”
화이어리도 이 말을 듣고 트레이너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싸움은 어느새 결말이 났는지, 화이어리는 그 트레이너가 니드킹에게 볼을 던지는 장면만 볼 수 있었다. 펑 소리와 함께 니드킹이 사라졌다. 화이어리는 사라진 니드킹을 찾으려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곧 니드킹은 볼 속에 얌전히 자리잡은 것을 발견했다.
“저게 잡는다는 의미구나.” 화이어리가 중얼거렸다.
그린은 핫삼도 마저 집어넣고, 화이어리와 옐로가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그는 니드킹이 든 볼을 옐로에게 건네주었다. “이 녀석의 기억을 봐줘. 왜 이렇게 사납게 구는지.”
화이어리는 어리둥절했다. ‘기억을 봐달라고? 그런 게 가능한가?’
니드킹을 받아 든 옐로는 눈을 감았다. 도대체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는 화이어리는 소녀를 면밀히 관찰했지만 별다른 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옐로는 잠시 후에 말했다. “예상대로예요.”
‘무어가 예상대로라는 것이지?’ 화이어리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린이 반문했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벗어나도록 하자.” 그는 리자몽을 다시 꺼내고 화이어리에게 다가왔다. 화이어리는 그린의 날카로운 표정을 바라보며 ‘저, 형 무지 화났을 거야. 날 혼내려나 보다.’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린은 그저 “우린 날아갈 거야.”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네 상태에 따라 달라져. 리자몽을 탈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하거든.”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아요.” 옐로가 대신 대답했다. “운도 끝내주게 좋고요. 아까 봤죠? 발등에 얻어맞는 거. 발톱에 찢겼다면 벌써 죽었을 텐데. 아주 헌신적인 포니타예요.” 옐로는 말을 마치며 포니타의 턱을 간질여주었다. “넌 아주 용감하구나.”
그린은 입가에 뜻 모를 미소를 띠며 화이어리에게 말했다. “옆구리에 멍이 시퍼렇게 들긴 했지만 삐지도 않았어. 넌, 네 포니타에게 수만 번의 절을 해도 모자랄 거다. 정말로 감사해야 되.”
화이어리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포니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고맙다는 말은 입가에서 맴돌기만 하고 나오질 않았다.
“너 혹시 빈 볼 있니?” 문득 옐로가 물어왔다. “네 포니타를 리자몽에게 태울 순 없잖아.”
“네, 있어요.” 화이어리가 대답하며 포니타의 안낭을 가리켰다. “그런데 어떻게 작동시키는지를 몰라요.”
“사용법도 모르면서 가지고만 있었던 거야?” 옐로가 포켓볼을 꺼내며 질문하자, 화이어리의 귀가 빨개졌다. “아니요. 오늘 샀어요.” 화이어리가 대답했다. 처음으로 포켓볼을 샀으니,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화이어리는 자신의 말이 어째 변명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럼 가르쳐줄게. 이게 개폐 스위치야.” 옐로는 상냥한 목소리로(사내아이 하나를 찾으려고 새벽까지 고생했으나, 귀찮아 하는 구석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옐로는 정말 자상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씩 설명했다. 옐로는 이러 것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포켓볼의 중앙에 위치하는 버튼을 눌러 포켓볼을 열었다. “이걸 누르고 포켓몬에게 대면―” 옐로는 실제로 그렇게 해보였다. 포니타는 니드킹이 볼 속으로 사라질 때와 마찬가지로 볼 속으로 들어갔다.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작아지기 때문에 포켓몬이라고 부르는 거지. 과학자들이 이 사실을 밝혀 낸 것은 얼마 전이고. 많은 사람들이 좁은 곳에 두면 가엾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포켓몬들에게 있어서는 집처럼 편안한 장소로 느껴지기 때문에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게다가 포켓볼의 안에서는 밖의 상황을 낱낱이 볼 수 있도록 되어있어. 간략한 설명은 여기까지 할게.” 옐로는 이렇게 말하며 포니타가 들어있는 볼을 화이어리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나 화이어리가 포켓볼을 받아 들고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자 옐로는 다시 물었다. “너, 허리춤에 포켓볼을 고정시킬 벨트가 없구나.”
화이어리는 말없이 끄덕였다. “그냥 누나가 맡아주세요. 마을에 도착하면 그때 돌려주시고요.”
“알았어.” 옐로가 흔쾌히 포켓볼을 받아 들었다.
“그럼 일어나봐. 부축해줄게.” 그린이 화이어리를 일으켜 세웠다.
“리자몽의 어깨에 두 다리를 걸치고 앉아. 목에다 손을 얹어서, 전체적으로 앞으로 기울어지게. 뒤에서 내가 잡아줄 테니 겁 먹을 필요는 없어. 몇 분만 비행하면 되.” 그린은 딱 필요한 말만 하면서 화이어리가 리자몽의 위에 자리잡도록 도와주었다. “리자몽이 날을 때는 말을 탄 것처럼 심하게 흔들릴 거야. 바람에 날려갈 것 같으면 자세를 낮추도록 해.”
잠시 후 그들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화이어리는 비행이라는 멋진 체험을 해 볼 수 있었다. 화이어리처럼 늘 말을 타며 노는 시골 아이에게는 균형을 유지하는 게 마냥 쉽기만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옆구리에 멍이 든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리자몽도 안정된 고도를 유지하면서 날았다. 그린은 화이어리의 다치지 않은 왼쪽 허리를 단단히 둘러, 실수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버터플은 옐로의 등을 붙잡고 하늘로 들어올렸다. 앞에서는 버터플의 날개뿐이 보이지 않아, 옐로가 나비 날개를 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상쾌한 밤 공기가 닫자 화이어리가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화이어리예요. 사실 숲에서는 진짜로 죽을 뻔했는데,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형하고, 누나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우린 네 이름을 이미 알고있어.” 옐로가 가까이 다가왔다. 퍼덕이는 버터플의 날개가 코앞에서 흔들렸다. “난, 옐로 그리고 이 쪽은 그린이야. 그린 형은 상록시티의 체육관 관장이기도 해.”
“우와! 진짜요?” 화이어리가 탄성을 질렀다. 그를 만나려다 숲에서 길을 잃었으니, 이러한 우연에 놀랄 만도 하였다. “사실 제가 상록시티로 가려가 길을 잃었었거든요.” 화이어리가 기뻐하며 말했다. “뭐 하나 물어봐도―”
“그런데…… 너 어쩌자고 숲엘 들어갔지?” 그린이 화이어리의 말을 중간에 끊고 들어왔다. 화이어리는 움찔 놀랐는데, 그 이유는 그린의 말투가 갑자기 사나워졌기 때문이다. 그냥 묻는 말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화가 난 목소리였다. “메모지에 그려진 지도 하나 달랑 들고? 상록 숲에는 다른 도시로 이어지는 길도 거미줄처럼 퍼져있어. 그런데 무슨 배짱으로 들어간 거지? 뭘 믿고 그렇게 용감하게 행동한 거냐?”
“그―그냥요.” 잔뜩 움츠러든 화이어리가 숲으로 들어갔던 장면을 생각하며 말했다. “그냥.”
“그냥? 그냥이라고? 내가 보기엔 아무 생각 없이 같은데!” 그린은 이제 마치 화이어리를 내던져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언성을 높였다. “너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네게 투자했는지 알고 있어? 물론 그 시간이 헛되었다는 건 아니지만, 네 어머니는 눈이 새빨개지시도록 우셨단 말이다!”
“엄마가요?”
“그래! 우리가 널 못 찾기라도 했으면, 혹시 네가 죽기라도 했다면―”
“어유, 그만해요 그린형.” 옐로가 그린을 말렸다. “이제 찾았으니까 됐잖아요. 그리고 형이 혼내시지 않아도 집에 가서 엄청 잔소리 들을 텐데요 뭘. 그리고 저도 상록 숲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거든요. 그때는 레드형이 구해줬어요. 하지만 형처럼 구박은 안 했는데.”
옐로의 말에 그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화이어리는 좀 전까지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기를 바랐으나, 지금은 집으로 돌아간 후에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지 온 몸이 떨려왔다. 엄마가…… 눈이 새빨개지도록…… 울……
그린은 하려던 말을 다시 기억해 내었다.
“잔소리만 듣고 끝나면 다행이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그 때는 정말로 죽을 수도 있어. 그러니 누군가가 구해준다고는 생각하지도 말아.” 그린이 쏘아붙였다. “앞으로 이와 비슷한 일이 생기면, 제발 오늘의 일을 떠올리도록 해라.”
“알겠어요.” 화이어리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느덧 숲이 끝이 났다. 상록 마을에는 집집마다 불이 켜져 있었고, 사람들은 목이 빠져라 리자몽을 올려보고 있었다. 리자몽이 길 한가운데에 착륙하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 커졌다. 마을 사람들이 몽땅 집 밖으로 나와 있었다.
화이어리는 바닥에 내려서 사람들을 자세히 볼 세도 없이 누군가에게 확 끌어당겨져 안겼다. “엄마……” 화이어리의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끌어 앉고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말이 필요 없었다. 마치 막내아들이 자신의 품에 무사히 안겨져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확인하고 싶어하듯이……
“어―엄마. 허리아파.”
하지만 어머니는 한참 만에야 화이어리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눈물로 얼룩진 눈으로 아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한번 확인하더니 다시 끌어안았다. 어머니는 목 메인 소리로 말했다. “숲에서 무서웠지……”
화이어리는 자신이 지금 어떤 기분에 놓여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무사히 돌아왔으니 당연히 기뻐해야 할 테고, 모두에게 걱정을 끼쳤으니 한편으로는 불편했고, 또 한편으로는 가슴 한 구석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여러 감정들이 한꺼번에 솟구쳐서 엄마와 함께 울어야 할지, 아니면 위로해드려야 할지, 아니면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용서를 구해야 할지 생각이 복잡해졌다.
“어이구, 숲에서 행방불명 된 줄 알았더니만 다행이네.” 누군가가 말했다.
화이어리가 돌아온 사실을 같이 기뻐해 주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비웃는 사람도 몇 있었고, 스미스씨는 상록시티로 가는 게 어렵다는 말을 빼먹어 미안하다고 사과하여 화이어리가 어디로 눈길을 주어야 할지 어지럽게 만들었다.
화이어리의 어머니는 연거푸 그린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그린은 그 감사의 말을 옐로에게로 정중히 돌렸다.
이제 화이어리는 어른들의 틈에서 빠져 나와 형과 누나 그리고 마을 아이들의 질문을 받고 있었다.
“숲에서 보낸 밤이 어땠어?”
“난 그렇게 숲에 깊이 들어간 적이 없는데……”
블레이즈는 화이어리를 무슨 영웅처럼 대하는 꼬마들을 나무랐다. “그게 굉장한 거냐?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하지만 화이어리의 기분은 이미 하늘을 날고 있었다. 셋째 누나 플레임은 고작 고자질한 정도로 머리를 때려서 정말로 미안하다고 했으며, 큰누나는 맛있는 간식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요리에 관한 네 부탁이라면 모두 들어줄게.” 큰누나의 얼굴에도 눈물자국이 어려있었다.
그리고 리프는 낮에 자신이 화이어리를 무시한 것 때문에 숲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이렇게 말해주었다. “낮에는 정말로 미안했어. 앞으로 상록시티에 갈 일이 있으면 데려다 줄게. 그러니까 그렇게 숲으로 들어가지는 마.”
실라도 자신의 언니인 웨티와 수화를 나누더니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엄마와 아빠는 오빠가 생각 없는 꼬마라고 했지만, 언니랑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불쌍한 아이가 되어서 죽느니, 분별력 없다는 말을 듣더라도 살아있는 편이 났지? 그리고 오빠가 없어지면 언니는 더 심심해 할거고.”
자칭 행방불명 소동이 해결된 시각은 한 밤중이지만 아무도 자러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린은 마을 사람들의 질문공세에서 빠져 나오는지 꽤나 애를 먹고 태초마을로 돌아갔다. 옐로도 상록시티로 돌아갔고, 화이어리도 엄마와 큰누나의 손을 맞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말라는 말만 들었을 뿐 심한 잔소리도 없었다.
늦은 저녁이지만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는 팻말을 새로 다는 것도 미루신 채 화이어리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셨다. 화이어리는 엄마와 누나와 형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풀이 하였다.
“네가 사라졌을 때,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블레이즈 형이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말했다. “이렇게 멀쩡히 돌아올 걸 알았다면 어머니가 날 그렇게 야단치시지 않았을 텐데.”
“미안해. 앞으론 정말로 조심할게.” 화이어리가 이불 속에서 머리만 내밀고 사과했다.
블레이즈도 부르르 떨면서 이불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사실 그 관장님이 날 엄청 혼내셨어.” 동생이 말했다. “이제 똑같지?”
“그래.” 형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런데, 내가 숲에서 길을 잃은 사이 마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어?”
“무슨 일이 있기는, 발칵 뒤집어졌지.”
“아니, 그런 거 말고, 좀더 자세하게, 그 관장님은 상록시티에 계셨다는 모양인데 어떻게 알고, 날 찾으러 왔었고, 뭐 이런 거 말이야.”
“내일 아침에 말해줄게.” 블레이즈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지금 말해줘.”
“내일 해준다니까.”
“형 제발.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