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 태조왕건의 일대기를 다룬 대하드라마가 방영되면서 역사 속에 묻혔던 태봉국[泰封國:후고구려] 궁예弓裔에 대한 시각이 새롭게 부각되는 계기를 맞이하였다.
더 이상 종전의 기록과 관념 속에 의한 "애꾸눈 폭군"의 모습이 아닌 개혁을 꿈꾸었던 진정한 "군주"의 모습으로 묘사되어졌다.
하지만 궁예에 대한 그 수 많은 오해와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한꺼번에 일소되지는 못했다.
대하드라마에서도 왕건이 주인공이기에 궁예를 결국 폭군으로 다루었다.
다만, 궁예가 폭군이 된 과정을 정신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원인으로 하고 있다.
또 그 원인의 깊은 뿌리는 궁예가 신라왕실로부터 버림받은 신라왕자이기에 그렇다는 단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진실일까...?
역사란 항시 승자의 입장에 의해서 쓰여지는 것이다.
승자가 의도하는 바에 따라 승자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패자의 모든 것을 소멸해 버린다.
즉 패자에게 어떤 변명을 할 기회도 주지않을 뿐더러 일말의 명분도 승자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흔적의 꼬리는 어떻게든 남게 되어 있다.
궁예도 태조왕건太祖王建에게 찬탈당한 후 패자가 된 후 역사 속에서 철저히 왜곡되어지고 폄하되었으며 결국은 후세들에게까지 폭군으로 기록된 일종의 피해자라 할 수 있다.
사실 궁예가 정신병 때문에 폭군이 되었다라는 그 모든 오해와 의문의 실마리는 어쩌면 궁예의 혈통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궁예는 삼국사기의 정사에 따르면 신라 제47대 헌안왕[혹은 제48대 경문왕]의 서자로 5월 5일 단오절에 태어났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벌써 이가 나 있고 이상한 기운이 감돌아 일관들이 분주히 천문을 살펴 관찰한 후 장차 나라를 해칠 존재로 규정하여 왕에게 보고하니 왕은 궁예를 죽일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궁예의 유모가 이를 불쌍히 여겨 궁예를 살리기 위해 다락밑으로 던지다가 그 손가락이 궁예의 눈을 건드려 궁예가 애꾸눈이 되었다고 한다.
훗날 궁예는 세달사의 승려가 되는 등, 수 많은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고 태봉국을 건국하고 황제가 된 후 부석사에 신라 헌안왕의 초상화에 칼을 던져 난도질을 하였다고 한다.
이는 신라에 대한 반감과 경멸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 문제로 인해 궁예가 패륜아이자 정신병자로 취급당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행해졌다고 보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초상화에 칼을 던져 난도질을 했다는 것은 그 복수심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솔직히 궁예가 신라왕의 혈통을 타고난 신라왕자라는 뚜렷한 증거는 없다.
그저 하나의 설일 뿐이다.
훗날 승자가 역사를 다시 쓸때에 승자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그것을 관철화하기 위해 조작한 감도 없지 않아 있다.
즉 궁예를 신라왕자로 설정하여 생부生父의 초상마저 난도질한 그야말로
'극악한 패륜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는 아닐까...
게다가 궁예가 할거하여 새 왕조건국의 정통성과 명분을 고구려高句麗에 촛점을 두었다는 것은 어떤 비밀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 추측된다.
궁예가 아예 나라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다는 그 자체야말로 그가 정말 신라왕실의 혈통일까라는 궁금점을 가지게 한다.
더욱이 당시 궁예가 흐트러진 민심을 모으기 위해 송도지방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부활을 내걸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까지만 해도 고구려의 뒤를 이은 대진국[발해]가 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예가 진정 고구려의 후예가 아니고서는 그렇게까지 고구려의 계승을 주장하고 자처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궁예弓裔의 이름자체가 상당히 고구려적이다.
궁예의 뜻을 풀이하자면 문자 그대로 활의 후예, 즉 활 잘쏘는 주몽의 후예가 되는 것이다.
주몽은 고구려 초대 열제烈帝이기도 하거니와 부여를 위시한 동이에서 명궁수를 일컫는 칭호이기도 하다.
또한 동이란 이동방인야夷東方人也[이는 동쪽에 사는 사람이다.] 유군자불사지국有君子不死之國[군자가 죽지 않는 군자가 있는 나라이다] 라는 중국 설문의 풀이처럼 우리민족의 옛이름이었다.
우리민족은 군자국이라는 칭호와 함께 활쏘기에도 뛰어나기도 하였다.
그래서 동이의 이夷는 大와 弓의 합성어가 된다.[동이를 그냥 단순히 큰 활을 잘쏘는 동쪽의 민족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고 동쪽의 활 잘쏘는 큰 나라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한다.]
그 동이를 종가宗家로 계승하여 국통의 맥을 이었던 나라가 바로 고구려였으며 고구려인들은 자라면서부터 동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활쏘기를 습득하였다.
시조가 활을 잘 쏘았던 주몽이기도 하기에 그러한 조상의 위업을 받들어 활쏘기를 매우 중요시 하였다.
그런 점에서 주몽의 후예라는 이름을 가진 궁예는 신라왕실의 혈통이 아닌
고구려인이라는 설은 매우 강한 신빙성을 가진다.
더욱이 그것을 보여주는 유력한 기록까지 있다.
바로 태백일사 고려국본기편이다.
고려국 본기에 의하면 궁예는 보덕국왕 안승의 먼 후예라고 했다.
[泰封國王弓裔 其先平壤人 本報德王安勝之 遠裔]
안승이라는 사람은 고구려 최후의 열제인 28대 보장제의 아들로서 고구려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669년 2월, 고구려인 4천호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다.
안승의 귀순을 환영한 신라는 안승을 보덕국왕에 봉했으며 문무왕의 질녀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후 보덕국왕 안승은 소판이라는 봉작과 함께 김씨성을 하사받고 경주에 거주하게 되었다.
안승이 김씨성을 하사받은 것은 신라 귀족에 편입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아무튼 궁예는 그러한 안승의 후예이고 고구려황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훗날 그가 신라왕자로 둔갑할 수 있었던 것은 선조가 하사받은 김씨성 때문일 것이다.
한가지 더 덧붙인다면, 고려국본기의 기록에서 궁예의 봉기이유가
극명히 드러나고 있다.
고려국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궁예는 '신라는 당나라에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했다. 이는 치욕스런 일로서 내 반드시 고구려를 위하여 원수를 갚겠다'라고 하여 후고구려 건국의 타당성을 설파하였다.
한편, 궁예가 태어나자마자 신라왕에 의해 죽임을 당할뻔 한 이유는 신라가 고구려 계열의 부활을 두려워 했다는 증거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탄생의 순간부터 범상치 않은 궁예가 쓰러진 고구려를 고구려황족의 혈통으로 다시 재건할 것이라는 예측을 가지고서 궁예를 죽이려 했을 것이다.
신라로서는 후환거리가 될 인물이었기에 궁예는 마땅히 죽일 인물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유모의 도움으로 궁예는 살아남게 되었으며 장성한 후 유모에게 신라왕자가 아닌 자랑스런 고구려의 후예임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이는 매우 합당하고 자연스러운 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연유에 따라 궁예는 신라조정을 상대로 봉기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불구대천의 원수 신라를 멸도滅都라 하며 위협하는 태봉국을 건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태봉국 건국 후 궁예는 고구려의 옛 광영을 되찾기 위해 군사를 정비하고 민심을 살피는 등 강한 개혁의지를 드러냈다.
또한 왕건을 일찍이 등용하여 국토를 확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개혁단행과정에서 호족들과 심한 갈등을 빚었으며 그것은 그를 폭군으로 몰아버린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궁예에 의해 견제받는 호족들은 왕건이 덕망이 높고 무예가 출중하다는 이유로 왕건을 앞세워 반정을 일으킨 후 왕건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왕건의 모반이 성공했기 때문에 반정이지, 만약 실패하였더라면
왕건은 참형과 함께 역적의 이름을 얻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왕건을 그토록 신임했던 궁예는 왕건에게 배반당해 쫓겨난 후 명성산 일대로 도망하여 항전끝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왕건이라는 승자의 역사에는 반정 발발후, 궁예는 미복차림으로 도망을 갔으며 평강지역에 이르러 배가 몹시 고파 보리이삭을 훔쳐먹다가 이를 발각한 백성들에게 맞아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또한 왕건이 반정을 하게 된 이유는 백성들을 위해 의로움때문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진정 궁예를 철저한 악인과 폭군으로 묘사하여 왕건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왕건이 세운 새나라의 작업이었다.
게다가 또하나의 고구려황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왕건이 궁예가 자신의 일가친척이라는 것을 후세에서 알게 되면 왕건 자신이 불의한 자로 인식될수 있기 때문에 궁예의 혈통마저 바꾸었을 것이다.
옛 선조의 복수를 위해 투항한 신라인들을 모조리 몰살하여 악명을 얻고 말년에는 황후와 두 아들을 죽인 비운의 고뇌를 가진 궁예.....
그의 복잡한 심정을 이해해주는 것이야말로 조작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이 아닐까...
우선적으로 그의 혈통을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궁예는 분명 고구려의 혈통으로서 고구려의 뒤를 이어 태봉국을 건국했다.
그것은 그가 팔관회를 개최했다는 것에서 그가 고구려혈통임을 알 수 있다.
팔관회란 단순히 불교의 행사가 아니라 고구려를 지탱했던 신교정신의 맥을 이어 하늘의 옥황상제께도 제사지내며 그 은혜를 찬양한 제천의식이었다.
즉 팔관회의 궁극적 목적은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신인합일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한 정신은 민족의 태동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고구려가 동이의 큰 형으로서 그 맥을 잘 이어받았다 할 것이다.
고구려에게 있어 제천의식과 천손이라는 관념은 매우 절대적이었고 상징 그 자체였다.
궁예는 바로 이러한 토대를 가진 고구려혈통으로서 무태武泰를 연호를 하고 고구려를 계승하였던 것이다.
즉 궁예의 태봉국건국은 여러모로 그 정통성이 매우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륵불을 이용하여 드높은 이상세계를 건설하겠다는 그의 꿈은 개혁을 반대하는 호족세력에 의해 폄훼되며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가장 혼란한 시대에 태어나 가장 비운한 삶을 살다간 궁예...
그는 잃어버린 망국의 후예로서 외로운 길을 달리며 고구려의 화려한 부활을 꾀하고자 무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은 고구려의 후예였다.
이제 그는 폭군이 아닌 고구려와 발해의 국통을 이어받은 당당한 태봉국 초대황제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