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다 들른 어느 마을의 작약밭
지나가다 붉은 작약꽃이 보여 와아~ 하면 차가 멈추고 우린 작약밭으로 달려간다. 그리하여 몇 곳의 작약밭에 들렀다.
유명한 관광지의 작약보다 꽃도 더 풍성하고 또 한적해서 더 좋았다.
무심재 여행의 묘미~~~!!
중국이 원산지인 작약은 관상용 또는 약초로 재배된다.
의성은 작약으로 유명한데 근래에 값싼 중국산에 밀려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작약의 뿌리는 진통제, 해열제, 이뇨제로 쓰인다.
모란과 작약의 차이점은 모란은 나무이고 작약은 풀이다.
모란은 줄기가 땅위에서 자라서 겨울에도 죽지 않고 남아 있지만
작약은 겨울에 줄기가 말라 죽고 뿌리만 살아 봄에 뿌리에서 새싻이 나온다.
꽃이 피는 순서도 모란이 지고나서 작약이 핀다.
앞에는 마늘밭
의성은 아주 옛날 화산이 분출한 화산지대로 농사가 잘 되어 마늘, 작약, 홍화씨가 특산물이라고 ...
특산물인 자두나무밭과 작약 묘목밭
어느 이름 모를 농가의 작약밭
산운마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에 있는 전통마을이다.
조선 명종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학동(鶴洞) 이광준이 이 곳에 입향하면서 영천이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산운마을은 뒷편의 금성산 수정계곡 아래에 구름이 감도는 것이 보여 산운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금성산은 (531m)은 백두산 보다 더 오래 전 중생대 백악기 (약 7천만년전)에 분출한 화산지대 였는데
화산 폭발로 화산분화구가 꺼져 내려앉은 칼데라로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 작용으로
화산의 밑둥치만 타원형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고...
백두산, 한라산에는 호수가 있는데 이 곳에는 더 오래전에 화산이 분출되어 물이 말라 없어졌다는 이야기 같다.
경상북도 문화재 374호로 지정된 '운곡당'
영월부사였던 이희발이 세운 고택으로 뒤에 금성산이 보인다.
대문을 열면 바로 안채가 보여 안보이게 하려고 작은 '가벽'을 세워 놓았다.
산운마을은 의성의 대표적 고택촌으로 일명 '대감마을'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이 살던 양반촌의 모습으로 지금도 10여채의 전통고택이 남아 있다.
사당 앞에 해당화
운곡당 뒷뜰의 누운 향나무
담 뒤로 금성산과 비봉산이 정면으로 잘 보이는 명당자리
'소우당'
소우 이가발이 19세기 초에 지었다는 이 고풍스런 소우당 고택은 한 번 안채를 고쳐 지은 것 말고는
지을 때의 모습 그대로 라고 한다.
소우당 안채
정원과 별당은 당시의 풍류와 운치를 보여준다.
작은 연못은 어느 지점에서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경주 안압지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 졌다.
남자들의 양기를 돕기 위하여 이와 같은 돌을 세워 놓았다고...
산운마을에도 넓은 작약밭이 있다. 뒤로 마을의 상징인 금성산과 비봉산이 감싸주고 있고...
옆에도 아주 큰 작약밭이 있는데 작약뿌리에 갈 영양분을 꽃에 빼앗기고 있다고 꽃이 피자마자
꽃 모가지를 쳐내서 꽃없는 작약밭이 되어 있었다.
산운마을의 작약밭
넓은 면적에 탐스런 작약꽃이 한 가득~~~
마지막으로 조문국 사적지에 들렀다.
조문국은 삼한시대 때 경북 의성 금성지역에 있던 성읍국가로 경주 사로국, 상주 사벌국, 울릉도 이사국 처럼
의성땅에 도읍을 두고 번성했던 부족국가였다가 서기 185년에 신라에 정복 당한 나라이다.
금성산 고분군은 조문국의 대표적 유적지이다.
가운데 큰 회색돔 안에 무덤들에서 나온 소장품과 뼈가 들어있다.
작약밭도 조성하여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멀리서 보면 꽃밭이 빈약해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작약꽃이 활짝 피어 있다.
조문국의 왕릉인 경덕왕릉(신라의 경덕왕이 아님)
경덕왕은 조문국성이 적에게 포위 당해 곡식이 모자랐지만 봉우리(노적봉)에 짚을 덮어
곡식을 쌓아 놓은 것 처럼 적을 속여 성을 지켰다는 전설을 남긴 왕이라고 전해 진다.
조문국 왕릉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