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건 협상에 달려드는 한국의 한 권한대행...실익없는 졸속 협상 우려 고조 / 4/16(수) / 한겨레 신문
◇ 트럼프, 관세 우선협상국으로 지명 미 재무부 "앞서 움직일수록 이점 있다" 압박용으로 국익 훼손 우려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상호 관세 협상에서 한국을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목하고 협상 타결을 촉구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등도 이에 발맞춰 조기 타결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관세전쟁을 벌이다가 이제 궁지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에게 탈출구를 열어주는 한편 한국의 국익을 해치는 빨라진 협상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 협상에 응하라고 재촉하는 미국…스스로 발 디딘 한 대행
관세 협상을 이끄는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은 14일(현지 시간)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지난주에는 베트남, 수요일에는 일본, 다음 주에는 한국과 협상이 있다"며 "빨리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일본이 "협상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데 대해 "동맹국은 먼저 움직일수록 이점이 있다"며 "거래를 처음 성사시킨 사람이 가장 좋은 조건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베센트 장관이 한국, 일본, 인도, 영국, 호주를 협상 타결의 "최우선 목표"로 정했다고 보도했다.
한국 정부도 빠른 협상을 연일 강조하고 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다음 주 방미한다. 한 권한대행은 전날 경제안보전략 태스크포스 회의에서 "모든 분야에서 한미는 협상 체계를 갖추고 빠른 시일 내에 구체적인 내용을 도출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가스공사는 15일 액화천연가스(LNG) 개발과 관련해 미국 알래스카 주 정부 측과 화상회의를 했다. 또 최남호 산업부 2차관은 한 강연에서 이 사업에 대해 "양국 간 실무협상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조만간 (실무자가) 알래스카로 출장을 갈 계획"이라며 "자동차가 (관세 문제로) 큰 혜택을 볼 수 있다면 (이 사업 참여는) 양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부름에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응하는 모양새다.
■ 미국이 내건 알래스카 LNG 사업, 뛰어오르기엔 위험이 크다
미국 정부에 발맞춘 한국 정부의 협상 속도전은 미국이 세계를 상대로 벌이는 관세전쟁에서 성급한 결론으로 자칫 국익과 기업의 이익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를 높이고 있다. 대구대 김양희 교수(경제학)는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의 관세정책이 확정됐느냐"라며 "골문이 계속 움직이는데 어디를 노릴지 미리 결정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이 급변하는 가운데 협상을 서두르는 것은 실책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김 교수는 우선 "미국이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고 말했다.
단기간에 국정을 대행하는 체제가 장기적 국익과 관련돼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문제를 결정하는 것도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가 협상카드로 언급한 알래스카 LNG 개발사업에 대해 미국 전문가들은 길이 약 1300km의 파이프라인과 수출터미널 등을 설치하는 데 5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 사업을 시작하더라도 다음 또 다음 정부 때에야 LNG 공급이 이뤄질 수 있어 수익성은 그때 이후 에너지 시장 상황을 따를 수밖에 없다. 사업비가 440억 달러로 추산되는 이 사업은 처음 석유가 발견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50년간 논의만 이뤄진 상태다. 1차 트럼프 행정부 시절도 추진했지만 나설 사업 주체가 없었다.
알래스카 사업 참여 논란과 관련해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두 정상 간 회담에서 액화천연가스 얘기가 나왔기 때문에 어차피 검토는 할 수밖에 없다"며 "섣불리 무언가를 약속하거나 국익에 반하는 무언가를 의사결정할 단계가 아니다"고 말했다. 한 대행과는 온도차가 있는 발언이다.
■ 한국 주력 수출품은 품목 일률 관세 대상…협상 실익 적어
협상의 실익이 어느 정도 될지도 의문이다. 국책연구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제2차 트럼프 행정부 상호관세 조치의 주요 내용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여러 교역상대방에게 일률 부과했거나 부과할 예정인 일률관세나 품목별 관세 대상을 제외한 상호관세 대상은 한국의 지난해 수출액 기준 1315억 달러 중 42%인 556억 달러에 그친다. 한편 반도체 자동차 철강 전자제품 등 한국 수출 주력 제품은 상호 관세 대상이 아니라 일률 품목별 관세 대상이거나 앞으로 대상이 될 예정이다.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개별 국가 간 협상으로 세율을 낮출 수 없는 분야의 것이라는 뜻이다. 상호관세도 한국에 부과한 세율 25% 중 10%는 협상과 무관하게 적용되는 기본관세라는 점도 협상의 실익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요인이다.
미국 정부가 잇달아 관세정책을 바꾸는 등 오락가락하는 점도 협상 속도전에 대한 우려를 키운다. 트럼프 행정부 측이 거듭 한일을 싸잡아 거론하는 것도 한 나라에서도 협상을 타결해 정치적 궁지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들에도 따르도록 압박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일 등 동맹국을 경쟁시키려는 모습에선 미국 정부의 초조함도 엿보인다.
■ 40년 전 일본 패착 답습하나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무역 관련 협상의 중요성은 일본이 1985년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맺은 플라자 합의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일본은 그 후, 급격한 엔고로 인해 「잃어버린 20년」에 빠졌다. 아르헨티나를 방문 중인 베센트 장관은 이번 인터뷰에서 상대방에게 최고의 제안을 가져오라고 말한다. 당신이 무엇을 가져왔는지 보고 거기서부터 시작한다고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대방에게 무엇을 줄 것인지 제대로 제시하지 않고 무조건 높은 입찰가를 쓰도록 압박하는 식이다. 협상 타결을 서두르는 한국 정부도 미국이 벌인 협상 구도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