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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스 9:1-7
1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2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3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4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5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6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7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이다
스 9:1-7 / [이방인들과의 혼인 문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몇 사람이 내게 와서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내부적인 문제를 지적해 주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까지도 모두 우상을 섬기는 이 지방의 원주민들과 구별된 생활을 하지 않고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가나안 원주민, 헷 족속, 브리스 족속, 여부스 족속, 암몬 족속, 모압 족속, 애굽 족속, 아모리 족속 등 그 어떤 이방 족속과도 자유로이 통혼하고 있습니다. 2) 이방인들의 딸을 아내와 며느리로 데려와서 거룩한 백성의 혈통이 벌써 이방인들과 섞이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백성의 지도자들이 이런 일에 더 먼저 나쁜 본을 보였습니다.' 3) 나는 이런 소리를 듣고 놀라서 겉옷과 속옷을 다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주저앉아 있었다. 4) 내가 이렇게 저녁 제사를 드릴 때까지 앉아 있자,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여 율법을 어긴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다시 형벌을 내릴까봐 두려워하는 이들이 모두 내 곁으로 모여들었다. 5)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나는 근심하며 일어나 찢어진 속옷과 겉옷을 입은 채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내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두 손을 펴고 6) 기도를 드렸다. `내 하나님, 우리 민족이 지은 죄가 우리의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우리의 온갖 허물이 하늘에까지 닿아 저는 낯이 뜨겁고 부끄러워 감히 주께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7) 우리는 조상 때부터 오늘날까지 더럽고 흉악한 죄악만 저질렀습니다. 우리 나라의 왕들과 제사장들을 비롯하여 온 민족이 다른 나라의 지배자들에게 짓밟혔던 일도 모두 우리의 죄악과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를 처형하고 포로로 잡아가고 우리의 재산을 약탈하고 우리 민족을 수모와 치욕으로 가득 채워 놓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오늘날까지 그렇게 당하고 당하였습니다.
에스라는 백성의 방백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가나안 원주민들과 통혼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치 자기가 죄를 저지른 것처럼 애통하였습니다.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1-2) 예루살렘 귀환을 마친 후 에스라는 지방의 지도자인 방백들로부터 충격적인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백성들은 물론 지도자들까지도 가나안 땅의 백성들과 가증한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방백들은 누군가를 음해하려고 밀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백성들이 가나안 주민들과 통혼하지 말라는 율법의 말씀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출 34:11-16; 신 7:1-4). 당시 이러한 죄악은 반드시 신정국가의 수립을 위하여 청산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하여 언약을 배반한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학습한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3-4) 방백들의 보고를 들은 에스라는 즉각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서 주저앉았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애통의 표현이며, 겉옷과 속옷까지 찢은 것은 슬픔이 그만큼 컸음을 말해줍니다. 머리털과 수염을 뜯은 것도 역시 애통의 표시였습니다. 이방인과 통혼을 한 행위는 바로 진노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받아들였습니다. 한편, 에스라와 함께 두려워 떨며 기가 막혀 주저앉은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며, 에스라와 슬픔을 함께 나누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심하매(5-7) 에스라는 옷을 찢고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지도자로서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한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가 부끄러워한 것은 하나님 백성이 자기들의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우상 숭배에 따른 바벨론 포로의 혹독한 징계를 겪은 이후에 또다시 같은 죄를 반복했다는 사실을 돌이켜 볼 때 에스라의 심적 고통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적용: 당신은 죄를 범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애통해하며 기도하는 에스라의 심정을 가지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그와 같은 경험을 서로 나누어 봅시다.
어느 나라의 왕이 삶은 씨앗을 준비한 뒤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아름다운 꽃의 씨앗이네. 한 달 동안 각자 최선을 다해 꽃을 피워서 화분에 담아 오게." 신하들은 모두 정성 들여 씨앗을 심고 가꾸었지만 당연히 싹이 나지 않았습니다. 기한이 되어 신하들은 꽃이 핀 화분을 가져왔습니다. 씨앗이 자라지 않자 다른 꽃을 옮겨 심어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아무것도 자라지 않은 빈 화분을 들고 온 신하가 있었습니다. "어째서 자네만 빈 화분을 가져왔느냐?" "저 역시도 그 씨앗을 심고 정성을 다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꽃은커녕 싹도 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제가 최선을 다한 그 결과였기에 그대로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적 성취를 위해 과정의 옳고 그름보다 오로지 좋은 결과만을 위해 행동하는 것보다 꾸밈없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행동하며 충실해야 합니다.
< 설 교 >
영적상태를 진단하라
스 9:1-10 / 피영민목사
최근에 한 젊은 여배우가 위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연기도 잘하는 배우인데 그만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저는 그 배우가 미리 건강검진을 해서 초기에 진단했다면 얼마든지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치료의 기회를 놓쳐 사망함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위암이 많기 때문에 우리나라 의사들이 위암치료는 워낙 임상경험이 많아 세계적입니다. 그러므로 초기에만 발견하면 치료할 수 있는 것인데 그만 치료기회를 놓쳐 그렇게 되었으니 아까운 사람 하나를 잃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의 몸도 주기적으로 건강상태를 진단해보는 것은 병을 예방하거나 조기 발견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신종플루가 유행하는데 손만 깨끗이 씻어도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육신도 미리미리 진단해서 점검하고 예방하면 큰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 생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처럼 영적인 질병도 미리 진단해서 치료해야 큰 재앙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유다백성들은 스룹바벨의 인도로 1차 귀환을 마치고 에스라의 인도로 2차 귀환을 마쳤습니다. 그들은 성전도 짓고 번제도 드리는 등 외형적으로는 신앙의 큰 변화와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1차 귀환하고 성전 짓고, 2차 귀환할 때까지 약 6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영적인 지도자 공백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공백상태에서 그들은 이방인과 혼인관계를 맺고 우상숭배를 도입했습니다. 에스라가 주전 458년에 예루살렘에 도착해 4개월 동안 유다백성들의 영적인 문제를 진단해 보고 “이것이 큰 문제로다. 이방인과 결혼해서 우상숭배를 들여왔으니 유다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재앙이 또다시 임하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회개하고 기도하고 이 문제를 치료하고자 한 것이 에스라 9장의 내용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현실적인 상황을 분석하고 진단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냥 현실을 방관하고 무시하고 살기를 좋아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이발소와 병원에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바리깡으로 머리를 미는 것과, 주사바늘로 찌르고 피를 뽑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발소와 병원에 가지 않고 살겠습니까? 우리 현실에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무시하고 회피하고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확히 진단해서 긴 머리는 깎고 아픈 곳은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 전반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기록되었고, 누가복음 6장 41절에도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남의 눈에 티 있는 것은 잘 보면서 자기 눈에 대들보 들어있는 것을 보지 못해서는 안된다 것입니다.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고 분석해서 문제가 있으면 스스로 고쳐나가야 된다는 것이 에스라 9장의 메시지로 학사 에스라가 어떻게 유다백성의 영적인 문제를 진단하고 치료했는가 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우리의 의무
에스라 9장에는 먼저 우리 성도의 의무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현재의 영적인 상황을 스스로 진단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진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 말씀과 일치하면 건강한 것이고 하나님 말씀과 어긋나면 병든 것입니다.
신명기 7장 3절로 4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백하게 교훈했습니다. 너무나 분명해서 오해할 수 없습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이방여인을 며느리로 맞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인들이 오면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가지고 와서 아들을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며느리가 유혹하면 다 넘어가서 결국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므로 절대 이방인을 며느리로 데려오지 말라고 모세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를 향하여 진노하여 갑자기 너희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보니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 유다백성들 조차도 신명기 7장의 말씀을 어기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에스라 9장 2절에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방백들과 두목들은 도리어 으뜸이 되어서 이방사람의 딸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맞았다는 말입니다. 먼저 피해야 될 사람들이 혼합결혼과 우상숭배의 으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라가 볼 때에 유다의 많은 죄도 있었지만 이것이 가장 중병이고 먼저 치료해야 될 중증이었다는 것입니다. 학사 에스라는 이 현실을 보고 마음에 쇼크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3절에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너무 기가 막히면 속옷과 겉옷을 찢었습니다. 수염도 뜯고 머리도 뽑았습니다. 기가 막혀 앉아있었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 말씀으로 현실을 진단했을 뿐만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마음의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에스라 시대나 21세기나 동일합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그대로 바로 놓고 진단해 문제가 있으면 반응을 보여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단해야 될 대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 우리 스스로의 영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진단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 전반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남을 분석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려도 가만히 앉아서 앞에 앉은 집사님은 영혼이 어떨까를 분석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객관적으로 놓고 분석해보라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현재 그대로 살아도 괜찮은가? 나는 별 문제가 없는가? 내가 지금 신앙의 진보, 성화의 진보,인격의 진보를 보이며 살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교제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가? 내가 지금 돈 벌려고 열심히 뛰고 있는데 주일까지 빼먹고 뛰어도 괜찮은 것인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나는 무엇을 희생하고 봉사하고 있는가? 내 가정의 신앙적인 분위기를 바르게 이끌어 가고 있는가? 내가 내 자식들에게 바르게 신앙교육을 시키고 있는가? 내 삶에는 하나님이 야단치실 윤리적인 문제는 없는가?” 이처럼 우리는 객관적으로 스스로 하나님 앞에 앉아서 자기 영혼을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단하고 문제가 있으면 고쳐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진단하고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도 수시로 문제를 진단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7절에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불신자들을 심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집을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인 우리들은 스스로 진단해 봐야 됩니다. “영적으로 병든 것은 없는가? 영적으로 소홀히 되는 분야는 없는가? 내가 외면하고 있는 일은 없는가? 교회가 집단적으로 회개하고 교정해야 될 문제는 없는가?” 이것을 늘 스스로 살피고 진단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국가도 영적인 문제를 진단하고 교정해야 합니다.
학개 선지자가 학개 1장 5절에 이스라엘 국가를 향해서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찌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지금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돌아오게 한 것은 성전을 지으라고 한 것인데 16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성전을 짓고 있지 않으니 너희의 소위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살펴보라고, 국가적인 죄악을 반성하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1592년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율곡 선생님이 왕에게 우리도 일본 침략이 예상되니 십만 군대를 양성해야 된다는 소위 “십만양병설”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왕과 신하들이 모두 그 말을 무시하고 군대를 양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일본이 쳐들어와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고 우리 조선은 초토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도 위기가 있는가를 바르게 진단해서 위기가 있으면 그것을 미리미리 대처해 나가야 됩니다. 그래야 안전을 유지할 수 있고 피해를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도 그렇게 안전한 현실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의 김정일은 지금도 핵을 가지고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위험한 현실 앞에서 우리 성도들은 기도하고 우리 신앙운동을 다시 일으켜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직접 가서 핵을 막거나 해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우리의 기도운동, 말씀운동, 회개운동, 성결운동,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교운동을 왕성하게 일으키면 하나님이 위에서 보시고 “내가 선교하라고 명령을 했는데 가만 보니 선교하는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 대한민국을 보호하자.”라고 마음먹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김정일이 핵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 국제정세의 영향으로 비핵화가 이뤄지고 남북한이 평화롭게 통일이 되고 교회는 부흥되고 경제는 번영되고 우리는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선교강국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보고 핵을 앞에 놓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어느 나라든지 기독교 신앙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나면 그 나라 정치, 경제, 문화, 모든 것이 다 축복받고 왕성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정통치국가를 만들자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정통치국가라고 해서 모두 기독교신앙이 왕성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정통치가 아니라 할지라도, 갖가지 종교가 다 자유를 누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백성들 가운데 기독교 신앙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나면 하나님의 축복도 왕성하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신앙이 왕성하게 일어나면 하나님의 축복도 왕성하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서 각자 내 영혼,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국가적으로 기독교 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다 우리가 스스로 놓고 진단을 해보고 할 때에 문제가 있으면 미리 고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경고
에스라 9장에는 심각한 경고(warning)도 있습니다. 영적인 문제를 방치해두면 결국 심각한 결과를 맞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사무엘상 2장에 가장 적합한 예가 나와 있습니다. 당시에 제사장은 엘리라는 사람이었는데 그에게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불량자라 그랬습니다. 백성들이 와서 화목제로 제사를 드리고 자기들이 먹을 수 있는 고기를 삶아 먹으면 이 두 아들이 갈고리를 삼지창으로 만들어 가지고 걸려 나오는대로 자가가 먹었습니다. 그리고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을 건드렸습니다. 이처럼 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은 타락, 탐욕, 포악, 음행, 이 네 단어에 다 해당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엘리는 아들들을 불러놓고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고 점잖게 타이릅니다. 그런데 아들들이 이런 못된 짓을 하면 아버지가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따끔하게 혼내줘야 됩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 집안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두 아들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한 날에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엘리 제사장은 몸이 비둔해 의자에 앉아 그 소식을 듣고 있다가 쓰러져 고개가 부러져 죽었습니다. 며느리는 아들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이렇게 집안이 망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엘리야 네가 네 아들의 죄악을 금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너희 집안에저주를 내리겠다. 너희 집안은 노인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집안 식구들은 앞으로 대대로 40대가 되면 다 죽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집안에 노인들이 계신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왜냐하면 집안에 노인들이 계시다는 것은 그 집안에 DNA가 오래 사는 DNA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인들이 장수하고 계시다는 것은 우리 후손들이 모두 좋아하고 감사하고 축복해야 할 일인 줄로 믿습니다. 집안이 엘리제사장 집안처럼 40대에 다 죽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왜 이런 재앙을 초래했느냐? 자기 아들들의 죄악을 보고도 진단하고 고치려고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6절 후반에도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기록되었습니다. 누룩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콩 덩어리에 들어가면 나중에는 다 퍼져 콩이 메주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에 작은 죄악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방치하고 그대로 내버려두면 이것이 자꾸 확산되고 결국은 오염돼 우리영혼 전체를 망치게 되는 결과가 온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7장 4절에서도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죄악인 이방인과 혼인하고 우상숭배를 들여오는 죄악을 방치하게 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는 강한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죄를 수시로 진단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이런 무서운 경고를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죄는 작은 것이라도 그대로 방치하면 가정을 부패케 하고 영혼을 부패케 하고 교회를 타락시키고 국가를 멸망시키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명령
영적인 문제를 진단하고 파악했으면 치료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에스라는 치료하기 위해서 세 가지를 했습니다.
첫째,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Recognize). 에스라 9장 6절로 10절을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우리 죄악이 많아, 우리 허물이 커서, 우리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우리와 우리 왕들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깐 은혜를 베푸사” 이처럼 “우리”라는 단어를 21개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자신은 이방여인과 결혼하고 우상숭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민족이 짓고 있는 죄는 자신의 죄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면으로는 아담이후로 모두다 죄를 짓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우리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 죄성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도 인정하지 않는 반항심이 더 큰 문제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예수 믿어 죄사함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정직하게 영적인 문제를 인정하고 고백해야 치료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요한1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이 무슨 병이든지 인정하기 시작하면 치료가 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알코올 중독을 가진 분들에게 치료를 받으라고 말하면 자신은 언제든지 결심하면 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더니 결국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습니다. 사람이 병이든 영적인 문제든 일단 인정하고 고백하면 그 다음부터 치료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인정하지 않고 억지를 쓰면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죄를 회개했습니다(Repent). 에스라 9장 14절에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일을 행하는 족속들과 연혼하오리이까 그리하오면 주께서 어찌 진노하사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제 유다백성들은 이방인과 연혼하고 우상숭배하는 일은 다시는 행하지 않겠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는 삶 전체가 잘못된 방향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 상행선에서 거꾸로 하행을 하고 있는 차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위험합니까? 그래서 KBS 9시 뉴스에서 상행선에서 역주행하는 사람을 찍어 지금 미친 사람 하나가 고속도로에서 역주행하고 있다고 생방송으로 중계를 합니다. 그러자 한 어머니가 뉴스를 보고 아들한테 전화를 한 것입니다. “아들아 너 지금 고속도로에 있는 것 아는데 지금 어떤 미친 사람이 고속도로에서 역주행하고 있단다.” 그러자 아들이 “어머니 제가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이 다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은 그 아들이 범인인 것입니다. 고속도로에서 그렇게 역주행하다가 부딪히면 대부분 사망을 하는 대형사고가 납니다. 그러므로 말로 “내가 지금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는 것보다 즉시 돌이켜 바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개란 잘못 가고 있는 방향에서 돌이켜 제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회개치 아니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계속 가면 하나님의 동행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세상적으로 성공했다 할지라도 그 인생은 실패인 것입니다. 참된 성공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도 가고 노예생활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은 완전히 성공한 인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딜 가든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돌이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하고 우리 인생은 결국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됩니다.
셋째, 하나님 말씀에 새롭게 헌신했습니다(Rededicate). 에스라 10장 3절에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에스라가 기가 막혀서 옷을 찢고 머리털을 뜯고 기도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떠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학사여, 이제부터 우리는 결혼한 이방 여인을 내어 쫓겠습니다. 이방여인이 낳은 자식도 내어 쫓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쫓아 살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이스라엘에 소망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오래 살던 여인을 어찌 내어 쫓겠습니까? 그리고 그 여인이 낳은 자식도 제 자식인데 어찌 내어 쫓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내어 쫓는 것이 살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검진을 받고 몸에 암세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 암세포도 내 몸의 일부라며 가만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잘라내겠습니까? 의사가 칼을 대고 잘라내도 그것이 사는 길이라 생각하고 수술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암세포가 있는데 그냥 기도만 한다고 버티지 마시고 병원 가서 수술을 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너는 수술 안해도 내가 치료하겠다고 일대일도 말씀하지 않은 이상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해 암세포를 잘라내야 됩니다. 그래야 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에 새롭게 헌신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자세였던 것입니다.
결 론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성경에서 부패한 그리스도인의 대표입니다. 그런데 롯 같은 사람도 베드로후서 2장 8절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듣고 그 의로운 심령이 상했다고 그랬습니다. 롯조차도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진단하고 심령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단하지 아니하고 죄악을 방치한다면 우리는 롯만도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 같은 위대한 신앙인도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인정하고 반성하는 반성문을 썼습니다. 그것이 시편 51편입니다. 3절에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죄가 있다고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왜 죄를 찾아내고 분석하고 치료하려 하지 않느냐를 야단치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가정을 바라보고 진단하고 고칠 것이 있으면 고쳐 나가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심령의 새로움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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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힘있게 세우는 교회
스 9:1-15 / 오정호목사
얼마전 미국의 L.A(로스엔젤레스)에 있는 한 보석상(寶石商)에서 L.A Times라는 신문에 "우리 가게에서는 결혼반지를 빌려 드립니다."라는 광고를 냈습니다. 결혼반지는 "백년해로(白年偕老)"에 대한 영원한 약속의 증표로 빌릴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 뒤에는 '어차피 깨질 결혼 비싼 보석반지 해줄 필요없이 빌려주자'는 악한 세상의 흐름이 숨겨져 있습니다.
미국이 청교도 정신을 가지고 살 때는 가정이 견고했지만, 산업의 발전에 따라 돈 맛을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정이 힘을 잃어 버리고 흔들리는 가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1960년대는 100가정 중에 25가정이 깨어졌던 것이, 1970년에는 40가정이, 1975년에는 45가정이, 급기야는 1980년에는 절반인 50가정이 깨어졌습니다.
* 에스라 당시 이스라엘의 위기의 실상을 살펴보겠습니다.
1. 가정의 위기입니다.
지금부터 약 2,500년전인 B.C 457년경 에스라 시대에도 가정의 위기는 있었습니다. 본문 1절에 "이 일후에"는 '하나님의 성전을 돌아보고 모든제도를 갖춘 후에'라는 뜻입니다.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나아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떠나지 않고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가증한 일을 행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가져야할 정도(正道)가 있고, 가치관이 있는데 그것을 벗어나고 상실하여 이방민족과 섞이는 가정의 혼란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방나라의 딸들을 데려와서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족속과 서로 섞이게 했습니다. (2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딸을 이방민족에게 주는 것을 금하실 뿐만 아니라, 이방의 딸들을 데려와 집에 들이는 것은 더욱 엄하게 금하셨습니다. 영적인 혼잡이 혈연적인 관계를 통해 일어나고, 혈연적인 관계가 혼잡해 지면 영적인 관계가 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미리 금지시키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데까지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스라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고 기가막혀 앉아 있습니다(3절). 하나님께서 이전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하기 전에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경고를 보내셨습니다(11,12절)
이스라엘이 가서 살 가나안은 "더러운 땅"이었습니다. 그 땅 자체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지만,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죄를 먹고 마시기 때문에 사람들로 인하여 그 땅조차 죄로 가득 채워져 더러운 땅이 되었습니다. 그런즉 가정의 거룩함이 무너지면 행복은 쁹을길이 없으니 가정의 거룩을 지키고 거룩한 백성답게 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느헤미야 13:26,27절에 보면, "옛적에 솔로몬이 이방여인을 데려오는 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저는 열국 중에 비길 왕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이 저로 왕을 삼아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셨으니 이방여인이 저로 범죄케 하였나니 너희가 이방여인을 취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용납하겠느냐"라고 솔로몬의 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정략적으로 이방여인들과 결혼했는데, 그 여인들로 인해 마음이 나뉘어 산란하게 되어 영혼이 무너져 나중에는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지혜가 탁월해도 그 지혜가 가정을 지키는데 사용되지 못하면 그 지혜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맙니다.
최고의 지혜를 자랑하던 솔로몬이 이런 유혹을 당했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의 가정도 가정의 거룩함을 힘써 지키지 않으면, 이런 유혹을 당해 가정이 깨지는 위기를 당할 수 있습니다.
2. 지도력의 위기입니다.
1절에 죄 지은 사람들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2절에는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습니다. 지도자의 가정생활이 분명하고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지도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에스라10:18,23,24절에 보면 죄를 지은 제사장들, 레위인들, 노래하는 자들, 성전 문지기 등 지도자들의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지도력의 핵심은 신앙과 도덕적인 탁월함입니다.
*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4절).
위기를 만난 가정은 인간의 지혜나 감정으로는 결코 극복될 수 없습니다. 가정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설계도로, 말씀의 원리로 다시 돌아갈 때만 가능합니다.
가정은 영적인 전쟁터이기 때문에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경으로 피해야 하고 말씀을 앞세워 싸워야 합니다. 죄가 들어오면 영혼과 가정이 무너지지만, 말씀이 들어오면 영혼과 가정이 새롭게 회복되고 바로 서는 역사가 있습니다.
1999년 새해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정을 다스릴 수 있도록 가정의 문을 열어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행복은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는 가정안에 있습니다.
2. 개혁그룹을 만들어야 합니다(10:1∼4).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할 것을 깨닫고 기도할 때 같이 협력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2,3절에는 스가냐라는 사람이 에스라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발언을 합니다.
'새로남교회'라는 의미는 우리가 개인적이 아닌 공동체적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 말은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신앙생활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로 모여서 신앙생활하는 것은 같은 가치관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진정한 가정의 행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적인 운동에는 반드시 구심점이 있는데, 에스라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거룩한 결심을 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공동체에 대해 민감합니다. 9:6∼15의 에스라의 기도 가운데 '우리'라는 말이 27번이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 가정만 행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정도 세워야 합니다. 조상의 죄와 민족의 죄를 가슴에 품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영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동조하는 세력이 있는 반면에 반대그룹도 반드시 있습니다.(10:15)
이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앞장서서 반대하고 그 뒤를 므슬람과 레위 사람 삽브데가 반대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반대를 미리 예측하고 극복하지 못하면 개혁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3.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야 힙니다.
우리 가정이 든든하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괴거를 답습하던 고리를 끊어버리고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도 에스라를 중심으로 기도운동이 일어나고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가정과 민족도 이 IMF의 어려운 시기에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부상할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 24:14,15절에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비장 한 각오로 외쳤던 한 가장의 외침이요 민족의 지도자의 외침이 있습니다. 이 결단이 우리의 결단이 되고, 이 외침이 우리의 외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새로남의 모든 가정들이 말씀 위에 든든히 세워져 가정의 거룩함을 지키게 하소서!
우리 가정이 은총을 체험하는 행복의 일번지가 되게 하소서!
무릎꿇고 두손들고
스 9:3-6 / 박종순목사
본 문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이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 이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인하여 다 내게로 모여 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대로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에스라 9:3-6)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민족이 「에스라」의 주도로 신앙을 개혁하고 부흥운동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에스라 7장∼10장까지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가운데 본문은 백성들의 허물과 죄, 그리고 죄를 회개하며 드린 에스라의 중보기도로 구성되어있습니다.
1.유다 민족의 죄
1)떠날것을 떠나지 않은 죄
1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과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라고 했습니다. 지도자와 백성 가릴 것 없이 그 땅 백성과 섞여 죄를 짓고 그들의 악을 본떠 행했습니다.
민수기 16:26을 보면 "악인의 장막에서 떠나고 그들의 물건을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 그들의 모든 죄 중에서 너희도 멸망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고, 신명기 4:4을 보면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두 구절의 교훈은 하나님은 떠나지 말고, 악은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은 그 반대였습니다. 악과 섞여 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기를 힘썼습니다.
그 당시 가나안 땅에 살고있던 부족과 섞이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다신교, 범신론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유일신 하나님을 섬겼고, 그들은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출애굽기 20:1-6을 보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절하지 말라,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상은 만들어도 안되고 절해도 안되고 섬겨도 안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섬겼던 우상은 바알, 바알브릿, 바알브올, 바알세불, 아세라, 아스다롯, 몰렉, 그모스, 다곤 등 수십 가지 였습니다. 일본에는 800만개의 귀신이 있다고 합니다만 그 당시 중동지방 에서도 수십 개의 우상들이 있었고 그것들을 섬겼습니다. 특히 몰렉 우상숭배 방법은 자식을 불에 태워 바쳤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행위를 부러워하고 따라갔던 것입니다.
한국갤럽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 48%가 사주, 관상을 믿는다고 합니다.
문제는 교회를 들락거리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아리, 삼각산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 다닌다는 것입니다. 찾아가는 사람이야 자신이 교인임을 숨기고 찾아가겠지만 귀신이 알고 점쟁이가 알고 자기가 아는 것입니다. 귀신이 먼저 알고 있는데 어떻게 숨길 수 있겠습니까?
모 교회 여 집사가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갔습니다. 남편 사업은 부도가 나고, 바람까지 피운다는 소리도 들리고, 고3 딸은 공부는 안하고 속만 썩힙니다. 거기다 자기는 몸까지 아파 소화도 안되고 불면증이 겹쳤습니다. 친구 소개로 어느날 보문동에 있다는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갔습니다. 복채는 선불이었습니다.
점쟁이가 그녀를 보더니 대뜸 "팔자가 더럽게 꼬였구나"라면서 "예수 믿는 이 교회는 안가고 뭣하러 여기는 찾아와 나를 헷갈리게 하느냐"라며 호통을 치는 것입니다. 기절초풍한 여집사 뛰쳐나와 회개했다고 합니다.
사주, 팔자, 궁합, 신수점, 성명철학, 택일, 관상, 풍수지리, 수상, 점성술, 예언 등 그런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믿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불신 죄입니다.
저희 교회 집사님 딸이 중매로 모 교회 권사님 아들과 결혼을 전제로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서로 뜻이맞고 인생관이 맞아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남자 어머니가 사주를 보아야 한다며 생년월일시를 알려달라고 해 알려줬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그쪽에서 사주가 맞질 않아 결혼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해왔습니다. 당황한 쪽은 여자 쪽입니다. 이미 교제하는걸 가족들이 알고 친구들이 알고 있는 터에 파혼을 하자는 것입니다.
여자 쪽에서 저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만 두는게 좋겠다. 교회 권사라는 여자가 사주팔자 관상을 믿고 파혼을 종용한다면 그리고 그 말을 따라 파혼을 요구하는 그런 남자라면 결혼해도 별 소망이 없을 것 같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떠날 것은 떠나야 합니다.
더 이상 섞여선 안될 사람과 섞이면 안됩니다.
2)잘못된 결혼
2절을 보면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결혼문화가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1절 끝을 보면 그런 일들은 "가증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가증한 일을 「토예바」라고 합니다. 그 뜻은 `구역질나는 일`이란 뜻입니다.
출애굽기 34:16절을 보면 "그들의 딸들로 아내를 삼지 말라 그 신들은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고 했고, 신명기 7:3을 보면 "그들과 혼인하지 말라 네 딸들을 그 아들들에게 주지말라 그 딸들을 네 며느리로 삼지말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노아시대 홍수심판이 있었던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6:2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습니다. 불신결혼, 외적조건, 외적미모만을 보고 결혼했던 그 죄가 결국 홍수심판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결혼에는 여러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건강조건, 경제조건, 가정조건, 환경조건, 교육조건등 필요하고 맞춰야 할 조건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조건들이 제아무리 좋다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조건뿐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전 서랍을 정리하다가 1966년 제 결혼사진을 발견했습니다. 촌스럽기 짝이 없는 흑백사진이었습니다. 제 머리는 깍아 올려 인민군 모습이었고, 양복은 평소 입고 다니던 검정 양복이었고, 구두는 남대문 길거리 노점상에서 사서 신었고, 신부는 한복차림에 머리에 리본매달 듯 작은 베일하나를 올렸습니다. 결혼반지나 시계교환도 없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조건은 서로 사랑한다는 것, 가난해도 목회자의 내조자가 되겠다는 것, 함께 머나먼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금년 6월이면 결혼 36주년이 됩니다.
결혼은 과거를 사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혼은 조건으로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사랑과 신뢰와 희망으로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본문 2절 끝을 보면 잘못된 결혼, 뒤섞인 혼합결혼을「죄」라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17∼18장을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 왕 아합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바알우상을 섬기는 이세벨과 결혼 하면서 아내의 사주를 받아 우상숭배 죄를 범했고, 그 죄를 책망하는 엘리야 선지자를 죽이려 했습니다. 결국은 잘못된 결혼 때문에 아합 왕가가 파멸하고 맙니다.
결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사람과 해야합니다. 예수믿고 거듭난 사람과 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빨리 함께 사는 남편이나 아내를 구원해야 합니다. 잘못된 결혼이라면 빨리 좋은 결혼이 되도록 상대를 감화시키고, 변화시키고, 예수 믿게 해야합니다.
3)잘못된 최고주의
2절 끝을 보면 "죄에 으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죄짓는데 으뜸, 나쁜 짓 하는데 으뜸이 되어선 안됩니다. 좋은 일하고, 예수 잘 믿고, 교회봉사 잘하고, 칭찬 받는데 으뜸이 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그 당시 시날평원에 사람들이 모여 하늘에 닿는 탑을 쌓자는데 의기투합했습니다. 11:4을 보면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닿게 하고 이름을 내자는 것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을 짓고 이름을 떨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명심, 명예심을 채우고 일등주의, 최고주의가 되자는 것입니다.
일등이 되고, 최고가 되고, 이름을 날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신앙도 저버리고, 교회도 저 버리고, 하나님도 버린다면 그 탑은 바벨탑처럼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창세기 11:8을 보면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흩으시면 바벨탑도 무역센터도 무너집니다.
창세기 19:29을 보면 "하나님이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고 했습니다. 본 구절의 뜻은 엎으시는 것도 건지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최고의 호화도시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만 하나님이 엎으실 때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고 말었습니다.
지난 금요일 (2002. 5. 31 저녁 8시30분) 역사적인 월드컵 경기가 상암구장에서 벌어졌습니다. 개막전에서 프랑스와 세네갈의 경기가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세계최강의 1위 팀입니다. 거기다 지단을 중심으로 예술축구를 한다해서 최고의 축구팀으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세네갈은 이번 처음 출전하는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팀입니다. 그런데 세네갈이 이겼습니다. 전 세계가 놀란 사건이었습니다. 늘 최고가 아닙니다. 언제나 일등이 아닌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제일이고, 나는 이등이라야 합니다.
2. 에스라의 중보기도
에스라 자신은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만 백성의 죄를 하나님께 고하고 자신이 회개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3절을 보면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라고 했고, 4절을 보면 "하루종일 기가막혀 앉아 있었다"고 했고, 5절을 보면 "속옷과 겉옷을 찢은 대로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회개의 표시입니다. 기가 막혔다는 것은 괴롭고, 허탈하고, 할말을 잊은채 꼼짝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자기를 꺽고 항복하는 것이고, 손을 든다는 것은 겸손히 기도할 때 취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두손들고, 무릎꿇고 기도한 에스라의 중보기도를 통해 우리가 배울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도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다리가 저리고, 관절이 쑤시고, 허벅지가 아프지만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자신을 꺽고 낮추고 아파해야 합니다.
우리도 두손을 들어야 합니다. 손을 드는 경우는 항복할 때, 서원하고 서약할 때, 환영할 때, 축복할 때, 그리고 기도할 때 였습니다.
에스라 10:1을 보면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백성도 함께 통곡하면 그 앞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월드컵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 하나처럼 소리지르고 손을 흔들어 댑니다. 축구공의 무게는 410g∼450g 정도, 둘레는 700㎜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 수십억 인구가 공 하나 때문에 소리지르고, 울고, 기뻐뛰고, 손을 흔듭니다. 저는 월드컵 경기를 지켜보며「축구공」대신 그 자리에「예수」가 자리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소리내어 기도합시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살고, 교회가 살고, 민족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그렇습니다. 두손들고, 무릎꿇고, 주님을 향해 기도합시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
스 9:5-7 / 박봉수목사
저는 얼마 전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15살짜리 남녀가 친구 앞에서 보란 듯이 성관계를 갖고 또 이것을 비디오로 찍어서 인터넷 싸이트에 올렸다는 것입니다. 남 앞에서 자기의 알몸이 드러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남이 보는 앞에서 성관계를 갖고, 이것도 모자라 인터넷을 통해서 대중 앞에 공개했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의 정말 큰 문제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아니고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이라는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이란 자신의 약점이나 결점이 남들 앞에 드러나거나 밝혀졌을 때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이 부끄러움은 자신의 태도나 행동이 다른 사람 또는 공동체라는 거울을 통해서 드러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에 비난을 받게 되거나 문제로 지적 되면서서 생겨나는 일종의 도덕적 관념입니다.
이런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은 남들이 뭐라 하든지 남들에게 어떤 영향이 미치든지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행동을 돌아볼 수 있는 거울을 잃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도덕적 관념이 무너진 것입니다. 자기 행동을 돌아볼 거울이 없고 도덕적 관념이 무너졌으니 자기가 지금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이란 그 사회의 도덕적 방어막과 같습니다. 부끄러움을 예민하게 느낄수록 그 사회의 도덕적 수준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강도가 약하면 약할수록 그 사회의 도덕적 수준은 낮은 것입니다. 그러다 아예 부끄러움이고 뭐고 느끼지 못하게 되면 그 사회의 도덕은 무너지게 되고 그 사회는 더 이상 사람다운 사람이 사는 곳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부끄러움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본성 저 깊은 곳에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 우리의 약점이 드러날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가 드러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견디기 어려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 가운데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나오는 것은 창세기 3장입니다. 원래 창 2:25을 보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라는 말씀처럼 아담과 하와는 원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창 3:7을 보면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알고”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창 3:8을 보면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나자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던 것입니다.
눅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가 조업을 마치고 그물을 씻고 있는데 주님께서 그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 배에서 따라온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밤새 한 마디 고기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순했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달려와 무릎 아래 엎드려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 자신의 정체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이 정말 깊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정말 깊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 후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첫째, 감추는 경우입니다.
삼하 13장을 보면 다윗의 아들 암논과 그 배다른 여동생 다말 이야기가 나옵니다. 암논이 다말을 사랑했습니다. 아픈 척하고 다윗에게 다말에게 음식을 장만해서 자기 집에 오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낫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대로 다말이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암논의 집을 찾았습니다. 침실로 불러들인 다음에 강제로 겁탈을 했습니다.
아마도 겁탈 후에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고 또한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 부끄러움을 덮기 위해 다말을 자기 집에서 내 쫓았습니다. 나중에 사건 전모가 밝혀지게 됐고 다말의 오라비 압살롬에게 참혹하게 살해 당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 나서 이를 감추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거짓으로 덮습니다. 남들을 속이고 또 자기 자신을 속입니다. 교활한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더 큰 부끄러움을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남의 탓을 하는 경우입니다.
창 3장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나무 밑에 숨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그 때 아담이 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부끄러움을 피해 보려고 핑계를 대고 있는 것입니다. 책임을 남에게 그것도 사랑하는 아내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책임을 중하게 물으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참 많습니다. 자기 잘못이 드러나면 핑계를 댑니다. 남의 탓을 합니다. 책임을 전가하려 합니다. 정말 비겁한 일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 앞에 더 큰 부끄러움을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전모를 정확하게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핑계를 댄다고 통할 리 없고, 오히려 핑계 댐을 통해 더 큰 책망을 받을 뿐입니다.
셋째, 화풀이를 하는 경우입니다.
창 4장을 보면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나름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는데 가인의 제사는 열납치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가인이 오히려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다 저 아벨 때문이라 생각하고 분을 풀려고 아벨을 죽이게 됩니다. 자기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자기 동생을 죽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느꼈을 때 그 원인을 밖에서 찾고 그곳에 화풀이를 합니다. 정말 사악한 일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 앞에 더 큰 부끄러움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부끄러움의 원인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하면 찾아지지 않을 뿐 아니라 더 큰 부끄러움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실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그 부끄러움을 감추려 한다든지, 핑계를 대려 한다든지, 화풀이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점점 우리는 부끄러움을 모르게 됩니다. 부끄러움의 감각이 무뎌집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죄를 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됩니다.
고사성어 가운데 후안무치(厚顔無恥)란 말이 있습니다. 옛날 중국 송나라 때 진사인 왕광원이라는 사람이 출세를 위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 비굴하게 청탁을 했답니다. 당시 사람들이 이 왕광원이라는 사람은 얼굴 가죽은 열장을 겹친 무쇠 갑옷과 같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얼굴이 두껍고 부끄러움을 모른다 해서 후안무치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후안무치하면 안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후안무치하면 안됩니다. 부끄러움의 감각이 무뎌지면 안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안됩니다.
부끄러움 아는 사람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첫째, 부끄러움을 더 철저히 느끼라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보면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 죄악”이라는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그 죄악의 내용이 앞의 1-2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심지어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이 이방인들과 통혼을 하여 거룩한 족속과 이방족속을 섞이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죄악에 지도자들이 앞 장을 섰다는 것입니다.
물론 에스라는 이 죄에서 비켜 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자기를 포함해서 모든 이스라엘의 죄악이라는 뜻에서 우리 죄악이라고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죄에 대한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가 바리새인처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는 이런 죄악에 휩쓸리지 않았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들과 비교해서 자기의 의를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그 죄가 곧 자기의 죄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바로 이끌지 못한 죄, 죄악된 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고통 이것을 우리의 죄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에서도 부끄러움을 찾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자랑을 내세워도 될 것에서도 부끄러움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에스라가 바리새인과 다른 점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부끄러움을 가슴 깊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부끄러움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시인 윤동주]를 좋아합니다. 특히 이 분의 서시는 청소년 시절 제게 큰 도전을 주었습니다. 특히 서시의 앞 두 행은 제 머리 속에 너무 깊이 각인이 되어있습니다.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하나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고 싶어 한 그 영적 결백주의가 정말 놀랍습니다. 행여 부끄러운 일이 있지 않나 해서 잎 새에 이는 바람결에도 철저하게 자기를 돌아보려는 그 영적 예민함이 감탄스럽습니다. 작은 부끄러움에도 괴로워할 줄 아는 그 영적 순수함이 부럽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기를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행여라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작은 부끄러움도 철저히 괴로워하고 아파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철저하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저녁 제사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대로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 부끄러움을 고하고 철저하게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끄러움을 느꼈으면 거기서 머무르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부끄러움을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느낀 다음 그것을 그대로 가슴에 묻어두면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장애물이 됩니다. 영적 암덩어리가 되어 두고두고 우리 영적 삶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던 다윗도 하나님 앞에 큰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부끄러움을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함으로 해결했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충직한 부하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를 범했습니다. 이 죄를 감추려고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와 아내와 동침케 하려 했습니다. 우리아가 말을 듣지 않자 그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다윗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몰염치하게도 밧새바와 결혼까지 했습니다. 삼하 11:27을 보면 이 모든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기 위해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신 그대로 다윗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다윗이 그 자리에서 나단 선지자에게 죄를 시인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그도 죄를 숨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핑계를 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화를 내며 나단을 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말로 다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 22:6을 보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 32:3을 보면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위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부끄러움을 정말 심각하게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철저하게 회개를 시작합니다. 다윗의 회개 모습이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시 6:6에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그리고 시 51:3절에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이 철저한 회개가 다윗을 그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게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움 때문에 괴로워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진정 회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그냥 둘 수 없어서
스 9:8-9 / 좋은 군사
우리는 지난주 대림절 첫주일에 “나를 기다리는 자가 있어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시므온처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가 있어서 그에게 찾아오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 그냥 둘 수 없어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에스라서를 폈습니다. 에스라서는 본래 느헤미야서와 한권으로 된 책이었습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레위족속으로 율법에 능통했던 제사장 집안의 학사 에스라에 의해서 기록된 역사서 중에 하나입니다. 주전 6세기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두 세대를 넘기며 살아야 했던 유대인들 추정하기는 200만 명 정도가 이방제국에 정착해 버리고, 그중에 약 5만 명 정도가 포로 되었던 땅 바벨론에서 일어나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들은 불타버린 성전을 재건하고, 신앙을 회복하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게 되는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이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입니다.
오늘 본문 9절에서 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 9:9 /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그들은 노예가 되어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던 그들의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간 원인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인간의 탐심과 쾌락이 주가 되어 세상에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으로 향하는 방향이 틀어져서 세상으로 향하고, 결국 이기적 자아로 향하는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한 마디로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권능은 버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너를 쓸데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와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너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에게 기다리는 것은 형벌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이 육적인 세상에 포로된 삶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굶주린 쥐 한 마리가 쌀이 그득한 항아리를 발견했습니다. 이젠 더 이상 굶주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쥐는 매일 그 독 안에 들고나며 먹고 싶으면 먹었습니다. 항아리 속의 쌀은 매일 조금씩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쌀독의 입구와 쌀 사이의 거리도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마침내 쥐가 쌀에서 쌀독 밖으로 뛰어오를 수 있는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쥐는 쌀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쌀독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쌀을 잔뜩 먹은 쥐는 쌀독에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뛰어 올랐지만 더 이상 입구까지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쥐는 쌀독의 나머지 쌀을 다 먹은 후 쌀독에서 굶어 죽었습니다.
곧 큰 쌀독으로 비유되는 이 탐욕에 눈이 먼 세상에 빠져버린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가 들어간 그곳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논어의 ‘선진편’에 나오는 말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말입니다.(Too much is as bad as too little.)
이 세상은 그 정도를 지나쳐버린 응급중환자실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그냥 버려둘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쌀독에 빠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망가진 인생을 수리하셨습니다. 두려움으로부터 보호하는 울타리를 만들어주셨습니다.
다시금 9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스 9:9 /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주께서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려고, 버림받으시는 길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한 제자가 광야에서 생활하는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숨은 죄를 회개했지만, 하나님이 그 회개를 받아 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인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스승은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제자여, 자네는 옷이 찢어졌을 때 그것을 버리는가?” 제자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을 다시 수선해서 입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자네가 옷에도 그렇게 신경을 쓰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겠는가?”
여러분! 실수로 찢어진 오만 원짜리 지폐를 그냥 버리십니까? 찢어진 부분을 잘 붙여 다시 사용할 것입니다. 그것은 돈의 가치 때문입니다. 가치가 없는 것은 미련 없이 버리지만, 가치 있는 것은 버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고쳐서 다시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있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버려질 수밖에 없는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다시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다시금 가치를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 성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요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욘 4: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욘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우리 인생을 그 종살이에 버려둘 수가 없어서, 온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 종이 되시려고 메시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뭐라고 하였습니까?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번째 주신 기회
스 9:9-10 / 이지원목사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오늘은 8월 15일 광복절이 되겠습니다.
공교롭게도 광복절이,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는 뜻으로, ‘두 번째 주신기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세계에서도, 앞에서 열손가락에 꼽는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지난해 통계를 잡아보니, 수출은 9번째를 많이 한 나라이고, 수입은 12번째로 많이 수입한 나라였다고 합니다. 수출을 많이 한 나라 1등이 중국, 2등이 독일... 우리나라는 9등이고, 10등이 영국이라고 합니다.
경제는 어렵지만, 어찌되었던 전체세계적으로 보면, 우리는 지금 풍요의 나라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집집마다 자동차를 한 대씩 있습니다. 명품도 한가지 없는 집이 없습니다. 핸드백, 구두, 악세사리...
어떤 아주머니가, 페라가모 구두를 삿다고 합니다. 페라가모는, 살바토레 페라가모라고 하는 이탈리아인이 설립한 패션 브랜드인데, 말발굽형 상표의 명풍패션이 되겠습니다. 이 아주머니가, 동창회에 가서, 명품구두, 자랑을 하려고..일부러 다리를 꼬고 앉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않봐주어서, 다리를 들었나 놓았다 하고 있으니까.. 마침...시골에서 올라온 동창이 그 구두를 보고 말했다고 합니다. “야~너 구두가 좋구나.. 근데 요즈음은, 농협에서도 구두를 만드니...”
이런 이야기는, 풍요로움 속에서 유머가 되겠습니다만...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는 분명, 질곡의 역사였음을 부정할수 없다 하겠습니다.
그 때에는, 구차하고, 가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에는, 없어서 여기저기에서 구걸하기도 하였습니다.
자 그런, 우리나라의 옛날...기억들..부끄러운 것입니까?
아닙니다.
잊어버려서는 않되는 역사입니다. 꼭 기억하고,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않되도록 해야 하는 역사가 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에스라서에 말씀이 되었습니다.
에스라서는 학사 에스라에 의하여 기록되어졌습니다.
학사 에스라의 시대는 풍요로운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제1공화국 때와 같은 시대가, 학사 에스라의 시대가 되겠습니다.
금방 독립하여서, 임시정부가 귀국하고, 제헌의회를 소집되고, 하지만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려웠던 시대가, 바로 학사에스라의 시대였습니다.
먼저 첫 번째 소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더욱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나라를 사랑하는 때는 언제입니까?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8.15 광복절이 되자 우리나라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제헌의회를 만들고, 우리나라를 세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에스라도 귀국하여서 나라를 다시 세웠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다시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다시 회복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분명한 역사인식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흘러온 모든 것을 분명히 알다 보니, 지금 무엇을 하여야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분명한 역사 인식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9절 말씀은 바로 그 이스라엘의 역사인식을 요약한 말씀이 되겠습니다.
솔로몬 왕이 일천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매어달리고, 아버지 다윗왕이 당부한, 성전건축을 제일먼저 하겠다고 애쓰는 솔로몬왕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기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모든 금을 모아드려, 하나님의 성전을 짓을수 있도록 해 주시고, 성전을 지어바치자....그 다음 두배나 더 크게 자기의 왕궁을 지을수 있도록 축복을 주셨습니다.
또 계속 복을 주셔서, 예루살렘을 지키는 군인들은 금으로 만든 방패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방패까지 금이니, 백성들은 얼마나 더 잘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백성들이 역사인식이 흐릿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많은 복이 어떻게 왔는지, 생각이 흐릿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인데, 마지막 시드기야 왕에 이르러서는, 성전 뜰에서 우상을 앞에 두고 살풀이를 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좋아하시고, 그 성전을 거룩하다고 여기시겠습니까?
어느날 바벨론이 처들어와서 성전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아가 버렸습니다.
바벨론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그제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노예가 되었는지?
왜 성전이 무너지게 되었는지?
왜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지...그제서야 역사인식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깨닫고, 회개하며 살려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돌아갈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에스라가 돌아와서 제일먼저 무엇을 하였겠습니까?
당연히 성전을 재건축하고, 바른 예배드리는 것을 제일 먼저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른 역사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우리나라가 항상 풍요하고, 항상 세계수출이 9등하는 나라였습니까?
아닙니다.
일본이 와서 나라를 빼앗아가, 일제시대때 나라 자체가 없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는 듣기만 했습니다만, 일본 사람들이 다 수탈해 가고..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일본순사들이 눈을 번뜩이면서, 대한독립만세...그러면, 잡아가서 죽이고 고문하고
그러던 때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풍요로운 지금 보다가 그때가 더 많았던것 같습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을 비롯하여,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어려운 때에,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나라를 사랑하였습니까?
나라를 사랑하는 때는 언제 입니까?
자유로워서, 어떤 말을 하더라도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고..
풍요로워서, 정부로부터 돈을 받으면서, 시민운동을 하고..
물론 나라를 사랑하는 모습은 다양하고, 더욱 발전되어야 하겠습니다만...
나라를 사랑하는 때는, 조건이 갖추어지고, 나라에서 나에게 무엇을 해주는 때가 아니라.
오히려 나라가 어렵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때,
더욱 나라를 사랑해야 되는 때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더욱 확장하여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언제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교회가 크게 부흥되어, 무엇하나 아쉬운 것이 없는 때가 아니라..
어려운 바로 그 때가, 더욱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해야 하는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지금과는 상상도 할수 없는 박해의 상황에서, 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때, 로마제국이 복음 앞에 무릎꿇고, 이제부터 로마는 기독교국가라고 선언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를 사랑하는 때는, 어려운 바로 그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2.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어떤 남편이, 파리채를 들고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집안일은 도와주지 않고, 파리채를 잡고 왔다갔다 하니까. 부인이 뾰로통해서 말합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파리를 잡고 있잖아" 남편이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그래, 파리를 많이 잡았어요?"
"그럼 잡았지. 수컷파리 셋하고 암컷파리 둘을 잡았지"
호기심이 발동한 아내가 말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셋은 막걸리 통에 붙어 있었고, 둘은 전화기에 붙어 있었거든."...
요즈음 풍요로움만 쫓다보니, 잘못된 생각에 큰 낭패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온통 대부업체 광고가 넘처납니다.
전화만 하면, 뭍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대출을 해 드립니다.
그런데 대출해준다고 공짜가 없지요.
대출전문 은행도, 30프로가 넘는 고금리라고 합니다.
그러니 대부업체들을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잘못하면, 큰 낭패를 당한다고 합니다.
허영과 죄의 유혹은 오늘날도, 호시탐탐, 사람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에스라 시대에도 똑같았습니다.
어떻게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까? 노예로 갖은고생을 하면서 회개할때,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이스라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돌아와서, 아직도 고생이 끝나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방금전에 일을 잊어버리고, 이방인들과 어울려서, 죄에 빠져, 흥청망청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참 사람이 얼마나 간사한지 모릅니다.
죽게 되었을때에는, 이번 한번한 구해주시면,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그렇게 회개하며 눈물로 매어 달렸는데...
풀려나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니까, 아직도 폐허가 되어있는 예루살렘성을 보면서도, 율법을 지키지 않고, 이방인들의 풍습을 쫓아, 흥청망청 살아가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한일합방할 때, 일본에 우리나라를 팔아넘긴 다섯명이 있지 않습니까?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이 사람들을 가리켜 을사오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가난해서 먹을것이 없어서, 우리나라를 팔아 넘긴 것이 아닙니다.
다 대신이요, 또 일본에서 돈을 빌려주어서, 그 당시 은행보다가도, 더 많이 현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를 팔아 넘기고,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더 많은 땅을 하사받고.. 살아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장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초대교회에...그 심한 박해를 견디고 여렵게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드린다고 모여있는 교인들을 보니까... 문벌이 좋지 않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못 배우고, 무식합니다. 능력있어서 유능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박해 때에도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렸고, 자기 생활한는 것도 힘든데, 고린도교회를 지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가?
세상을 부끄럽게 하려고,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세상이 알도록 하기위하여 이렇게 하셨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앞에서 말만 앞세우고, 능력있다고 앞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쩌면, 제일 낮은곳에 생활을 걱정하며 살아가지만, 그래도 착한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그 사람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소망이 있고, 그런 사람들의 생활이 쌓이고 쌓여, 우리나라의 역사는 이어지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주일예배는 누구로부터 시작되느냐? 신효식 집사님으로부터 시작이 되는것 같습니다.
요즈음은 김윤곤안수집사님도 일찍 나오셔서 본당을 청소하고 계십니다만.. 토요일 9시 30분이 되면, 비가오나 눈이오나, 어김없습니다. “사모님...나왔서..” 걸레들고, 본당 의자 하나하나를 딱습니다.
식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손잡이를 딱습니다. 식당에 의자 하나하나를 딱습니다. 본당에는 본래 먼지가 없는줄 아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본당에 먼지가 많습니다. 매주 닦기 때문에 깨끗합니다. 제가 기름걸레로 바닦을 밀어보면, 밀 때마다, 모래가 한줌씩 나옵니다.
또 요즈음 식당에 곰팡이가 피고 그렇습니다만. 매주 닦기 때문에,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토요일에 깨끗이 청소가 되면, 그 다음에 주일아침 새벽기도를 하고, 그러면서. 주일 하루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도와주십니다, 제가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고, 대표로 거명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은 자리의 손길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십니다.
앞에서 말을 하고, 심지어는 북한가서도 말을 하고..선거할때도 말을 하고, 말로 나라를 세울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벌써 세계 1등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말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낮은 자리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매일 매일, 죄와 싸우고. 소망을 가지고, 아무도 않보아도 신호등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3. 나라를 사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편 46편 10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지난 주간 김이봉목사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이 목사님..미국에서 은퇴한 친구목사가 왔는데, 강화도 갖다 올 수 있어요? 네..알겠습니다 목사님.. 30년 전에 미국으로 가셨던 목사님이 이제 은퇴하고 고국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이 참 많이 발전했습니다. 이렇게 발전했다니 놀라울 다름입니다.” 이 목사님은 보는것 마다 놀랍다고 고개를 끄덕끄덕 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손녀도 같이 동행을 하였습니다. 올해 대학교 1학년이라고 합니다. 미국생활만 해서 그런지, 강화도의 풍물을 보고 얼마나 신기해 하는지 모릅니다.
돌아오는 길에, 애기봉 전망대를 보여드려야 되겠다 싶어서, 애기봉전망대로 올라갔습니다. 입구에, 해병대 군인 서서 일일이 방문자 검사를 합니다. 그제서야 분위기가 숙연해 집니다.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도착해서 내려다 보니, 눈 아래 북한땅이 내려다 봅니다.
그재서야 손녀딸이 질문을 합니다. 저 군인들이 왜 여기에 있나요? 청년들은 모두 이곳으로 오나요... 평화롭고 풍요로운 생활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조금이 나마 체험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단면만 보는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면서,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은 8월 15일 광복절입니다. 오늘 우리 대한민국의 현재는, 제일 힘든때, 제일 어려운 자리에서도, 열심히 살아오셨던,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눈물과 희생의 삶위에 서 있습니다.
그 희생이 헛되지 않토록, 그 분들이 꿈꾸었던 일을 이루어 나가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서 걸어갔던, 초대교회 성도들과, 신사참배에 맞서 죽으면서도, 교회를 치켜내었던, 우리나라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위에 서 있습니다.
그 분들의 뜻을 이어서, 오늘 우리는, 세계에 내어놓아도 부끄럽지 않는, 멋있는 교회 예수님께서 계셔서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살아서 생동하는 교회가 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자 이렇게 나라를 사랑하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다시 무릎을 꿇을 수 있을까?
에스라 9:1-6 / 이한배목사
ㅇ 질 문 - 가장 최근에 무릎을 꿇은 때는 언제였습니까 ?
I. 서 론
옛날 교인들과 요즘 교인들 간에 차이가 나는 것 중에 하나가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기도할 때는 당연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옛날에는 교회가 마룻바닥이었고, 기도원은 다 마룻바닥이었기 때문에 기도할 때는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목사님이 무릎을 꿇지 않고 그냥 책상다리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매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젊은 교인들과 목회자들은 무릎을 꿇지를 못합니다.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합니다.
① 무릎을 꿇는 것이 무릎 관절에 가장 안 좋다고 해서 무릎을 안 꿇어봤기 때문에 무릎을 못 꿇는 분들도 계십니다.
② 또한 이제 우리의 문화도 입식문화화 되었기 때문에 늘 의자에 앉아있기 때문에 무릎을 꿇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무릎을 꿇고 기도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①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예배를 드릴 때 백성들 앞에서 놋 단 위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대하 6:13-14)
②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단 6:10)
다리오 왕 때 다니엘을 시기하는 자들이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자는 사자 굴에 던져 넣는 한시법을 왕에게 만들게 했을 때, 다니엘은 그것을 알고도 하루에 3번씩 집에 창문을 열어놓고 무릎을 꿇기 기도했습니다.
③ 예수님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눅 22:41)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④ 스데반 집사도 돌에 맞아 죽을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행 7:59-60)
무릎 꿇고 기도하시면서 돌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⑤ 베드로도 욥바의 죽은 여제자 다비다를 다시 살리는 기도를 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행 9:40)
⑥ 바울도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과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헤어질 때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행 20:36)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의 순간입니다.
⑦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다가 며칠 간 두로에 머물다가 떠날 때 모든 교인들이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행 21:5)
무릎을 꿇고 기도한 자들은 다양하나 기도한 때는 다 매우 중요한 때였습니다.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였습니다.
오늘날은 무릎을 꿇는 일이 매우 드문 일이 되었지만, 성경을 보면 중요한 인물들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것을 보게 됩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느냐,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느냐, 아니면 책상다리를 하고 기도하느냐하는 기도하는 자세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무릎을 꿇는 데는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무릎을 꿇는 신앙생활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기가 막힌 일을 만날 때 무릎을 꿇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약 4개월이 지났을 때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이유 중의 하나가 이방사람들과 연혼(連婚)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이방 사람들과 연혼했기 때문입니다.(스 9:13)
그로 인하여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돌아 온지 4개월 밖에 안 되었는데, 다시 가나안 족속의 사람들과 연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백성의 방백과 두목들이 앞장을 섰습니다.
아마도 돌아온 자들 중에 여자들인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백성의 방백과 두목들이 가나안 여인들과의 결혼을 주선한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에스라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① 이것은 결혼의 문제입니다.
다른 문제라면 어떻게 해결할 희망이 보이지만, 이것은 결혼의 문제 아닙니까 ?
얻은 아내를 내보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
며느리를 내보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데 벌써 자녀를 낳은 여인들도 있었습니다.(스 10:44)
그러니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합니까 ?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대통령 선거 당시 장인이 빨치산 활동한 것 때문에 공격을 받을 때 한 말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 아내란 버리란 말입니까 ?”
이미 결혼해서 사는데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
대통령은 못해도 아내는 버릴 수 없는 일입니다.
결혼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지금 이런 문제를 만났습니다.
② 이것은 백성의 지도자들이 앞장서 한 일이 아닙니까 ?
바벨론에서 돌아 온지 4개월 밖에 안 되어서 백성의 지도자들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한데, 그 지도자들을 책망하면 관계가 나빠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
그러므로 에스라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만났습니다.
그 때에 에스라가 한 것은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았습니다.”(v. 3)
절망하는 것입니다.
어찌 할 수 없는 일을 만난 자들이 취하는 자세입니다.
이런 기가 막힌 일을 당했을 때 에스라는 어떻게 했을까요 ?
이방인과 연혼하지 말라는 말씀을 아는 자들이,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큰 매를 맞고 바벨론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자들이 이방 사람들과 연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두려워 떨면서 에스라에게 몰려왔습니다.
에스라는 “저녁 제사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대로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v. 5)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사장이 성도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
이렇게 “에스라가 하나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스 10:1)
기가 막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자, 백성들도 회개를 하고, 많은 무리가 모였습니다.
내편이 모인 것입니다.
(1) 기가 막힌 일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내 편이 모여옵니다.
그러자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명령을 내려서 이방 여인들을 다 내어보내게 하라”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면 자기들이 힘써 돕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
에스라가 해야 하는 말인데, 할 수 없었는데, 그 말을 스가냐가 대신 해준 것입니다.
(2) 기가 막힌 일, 어찌 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이렇게 나를 돕는 자들이 일어납니다.
기가 막힌 일, 어지 할 수 없는 일을 만났습니까 ?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돕는 자들을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그러자 에스라가 힘을 얻어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스 10:5)
그래서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을 예루살렘 성전 뜰로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얻은 이방 여인들을 내어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모인 무리가 큰 소리로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하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물론 반대한 몇 몇 사람도 있습니다.(스 10:15)
그러나 대부분의 사라들이 순종을 했습니다.
(3)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기가 막힌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이렇게 무릎을 꿇고 드리는 기도에는 기가 막힌 일도 해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이것이 해결 될 문제입니까 ?
그런데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자 아주 순조롭게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
남은 6일 동안 아버지 앞에 나아와 꿇어 엎드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편의 사람들이 모여옵니다.
여러분을 도울 자들이 일어납니다.
해결 할 수 없는 문제가 해결 될 줄 믿습니다.
2.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 이렇게 기가 막힌 일이 해결되는데, 과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을까요 ?
과연 인간이 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을까요 ?
유대인들은 아침저녁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 예배를 드릴 때 집례자가 “예배를 드립시다”라고 회중을 예배로 초대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르쿠(Barkhu)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바르쿠라는 말은 베라크( - berekh)라는 말에서 온 말입니다.
이 베라크는 “무릎을 꿇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시다”하면 다 무릎을 꿇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①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② 인간이 인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처럼 살았는데, 다시 하나님의 종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살려던 데서 이제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자세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번 좋은 자리에 앉으면 다시 낮은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한번 쌀밥을 먹으면 다시 보리밥을 먹는 데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돌아가게 하십니다.
“어떻게”는 모든 부정적인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것입니다.
화를 내시기도 하시고, 소리를 지르시기도 하시고, 때리시기도 하시고, 부러뜨리시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명심해야 합니다.
Joseph Telushkin이 Brandeis-Bardin Institute(지금의 American Jewish University)에서 가르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설립자 Dr. Shlomo Bardin은 불같은 성격의 교육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주말 예배시간에 한 학생이 자기는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을 수 없다고 무릎 꿇는 것을 공개적으로 거부를 했습니다.
그러자 바뎅 박사는 “우리는 예배드릴 때 무릎을 꿇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아니니 무릎을 꿇어라. 너보다 더 높은 어떤 것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영원하신 분은 너보다 더 높으실 것이다”라고 하면서 바뎅 박사는 화를 버럭 내면서 “그러니 무릎 꿇어 이 자식아. 무릎 꿇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학생이 무릎을 꿇지 않자, 교수는 학생에게 쌍소리를 하며 화를 내면서 무릎을 꿇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면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은 신의 경지에 올라있습니다.
① 능력이 신의 경지에 올라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거의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전염병, 전쟁, 가뭄이 들어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지 않습니까 ?
돈은 의지해도 하나님은 의지하지 않습니다.
② 인간의 가치가 신의 경지에 올라있습니다.
인간을 최고로 여기고, 인간의 생명을 최고로 여기고 있습니다.
칠팔십년 살다가 가는 인간을 신의 경지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릎을 꿇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간이 하나님 앞에 다시 무릎을 꿇을 수 있을까요 ?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사람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바벨탑의 무너짐과 같이 하나님이 크신 팔로 인간을 치기 전에는 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기가 쉬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신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1986년 여름에 두 배가 소련 해안에 떨어져 있는 흑해에서 충돌했다.
두 배는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았고 수백 명의 승객이 죽었다.
그런데 조사팀이 밝혀낸 사고의 원인이 그 사고의 소식을 더욱 우울하게 했다. 그것은 레이더의 장애와 같은 기술적인 문제나 짙은 안개와 같은 자연적인 문제가 아니였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 때문이였다. 각배의 선장은 다른 배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배 다 길을 비켜줄 수 있었다. 그러나 뉴스 기사에 의하면 어떤 선장도 다른 배에게 길을 비켜주기를 원치 않았다. 두 선장 다 너무 교만해서 먼저 길을 비켜줄 수 없었다. 그러나 제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
죄악으로 교만해진 인간은 죽기 전에는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그리고 망한 후에야 교만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를 합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지나갔습니다.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고집을 부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지 않으면 결국 망하게 됨을 명심하시고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가 임하기 전에 조용히 무릎을 꿇어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