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1코린 3,1-9; 루카 4,38-44 /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2026.9.2.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을 통해 천명하신 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살고 있던 카파르나움에 가서 열병을 앓고 있던 그의 장모를 비롯하여 갖가지 질병을 앓고 있던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마귀 들려 사람 노릇을 못 하던 사람들도 마귀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도움을 청하니까 예수님께서는 집을 하나 얻어서 치유와 구마의 기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게 되셨고, 그래서 그 고을은 ‘예수의 마을’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이름을 단 간판이 남아 있습니다.
뒤늦게 예수님을 알게 된 바오로도 사도가 되어 우상을 숭배하느라고 재물에 대한 탐욕에 물들어 있던 코린토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가문도 보잘것없고 재산은 물론 사회적 지위도 낮았던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셨다고 긍지와 자부심도 키워주면서 그들을 사회적 소외감에서부터 해방시켜주었습니다.(1코린 1장 참조)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코린토에서 바오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오로는 복음선포의 목표에 충실했던 셈입니다. 그런데 그 반응이 엉뚱하게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선포를 목격하고 체험한 카파르나움의 군중은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붙들고자 했고, 사도 바오로의 복음선포를 목격하고 체험한 코린토 공동체의 교우들은 사도 바오로의 후임으로 파견된 아폴로를 만나고나서 두 편으로 갈라졌습니다. 어떤 교우들은 바오로의 지지자로 남았지만, 또 다른 교우들은 새로 온 아폴로를 편들면서 공동체가 분열되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목표에 충실했던 복음선포자와는 달리 복음을 선포받은 이들의 반응은 마치 심한 근시안에 걸린 사람처럼 자기 이해와 관심에 매몰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냉정하게 그 군중에게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다른 고을에도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루카 4,41ㄴ)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의 바다 건너 에페소에서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입니다.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1코린 3,3ㄱ.5ㄷ) 이렇게 선을 그었습니다. 복음선포 상황에서는 마치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이기라도 한 것처럼 최선을 다해 섬기지만, 복음선포의 상황이 끝나면 냉정하게 그들의 태도를 평가하고 충고하는 것입니다. 카파르나움의 군중에게는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전해야 하니 당신을 붙잡지 말고 이제는 스스로 복음을 살아가라고 내치신 예수님이나, 코린토의 교우들에게는 복음선포자를 쳐다보지 말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라고 충고하는 사도 바오로입니다. 이것이 복음선포자의 소신일 것입니다.
교회는 연중시기 평일에 지난 주까지 마태오 복음서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이번 주부터는 루카 복음서로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나 루카 복음서나 다 같이 예수님의 공생활을 전하고 있지만 마태오 복음서가 교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루카 복음서는 선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저도 같은 초점으로 오늘 강론을 복음선포자의 소신으로 결론을 삼았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씨앗을 뿌리는 일과도 비슷합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으면 물을 주어 자라게 하는 사람이 있고 열매를 거두는 사람은 따로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이고 씨앗을 자라게 하여 열매를 또 다른 씨앗으로 삼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이러한 안목을 여러분이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카파르나움과 코린토의 사람들이 복음을 선포받으면서 보여주는 태도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관심 위주로 처신하는 것뿐입니다. 복음을 선포받아 기뻐하고 감사하는 태도와는 동떨어진 태도입니다. 복음을 선포한 사람에게 눈길이 갈 뿐 하느님에게까지 안목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눈높이는 낮고 하느님의 경륜은 높습니다.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더니 그 손가락만 쳐다보는 격입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세상은 비복음적이고 권세가들은 신앙을 없애버리려고 신자들을 박해하려 들었지만, 이벽 세례자 요한과 그의 강학회 동료 선비들은 세례를 받아 교회를 세웠고 교리를 가르쳐 놀라운 선교 성과를 이루어 냈습니다.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 교리에서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기쁜 소식을 들었고 이를 전했습니다. 신유박해 이후 본격적으로 박해가 닥치자, 전국 심산유곡으로 흩어져서 교우촌을 세웠고 여기서 기도생활을 하며 교리에서 가르치는 대로 공동 생활을 일구었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백 년입니다. 그러다가 밀고자에 의해 발각되어 포졸에 의해 관아로 끌려가면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는데도 기꺼이 치명하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하지만 고문에 못 이겨 억지 배교를 당한 신자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을 ‘입술 배교자’라 합니다. 배교 후 경상도 포항에서 참회의 기도생활을 이어 가며 후손들에게 교리를 전해주던 최해두는 ‘자책’이라는 참회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치명자보다 더 많았던, 아니 많을 수 밖에 없었던 이 ‘입술 배교자들’이 교우촌의 전통을 이어주어서 한국 천주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이들이 교회의 명맥을 이은 주역이었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미사의 복음과 독서의 말씀을 우리 신앙 선조들의 삶에 비추어 묵상해 보았습니다. 이 순교자 성월에 놀랍고도 오묘한 섭리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시고 자라게 하신 하느님의 손길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