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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의 탄생’ 저자 최현숙이 자신의 블로그에 남긴 장정일의 서평에 대한 글을 읽었다. 이번 북토크에는 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김용술도 함께한다는 연락을 받은 후 직접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들에 대한 블로거 엔틸트의 글을 읽으며 함께 고민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이르렀다.
장정일: 책에서 강조된 빈곤 노인들에 대한 지은이의 해석은 뭇 진보 좌파들의 그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노인 일반을 통틀어, 누군가(재벌·정치 지도자)에게 ‘세뇌된 사람’이라는 관점으로만 바라본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할배의 탄생』의 표층을 이루고 있을 뿐, 같은 책의 심층은 전혀 다르게 말한다. 모든 텍스트는 저자도 모르는 균열을 품고 있다. 오로지 두 번 읽은 독자만이 유리하다. 텍스트의 균열을 읽어낸 독자가 그 책의 진정한 저자다. (장정일 독서일기, ‘콘크리트 지지층’은 이렇게 탄생했다’, 시사인)
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27709
최현숙: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노인들의 정치적 보수화에 대한 해석을 ‘장인적 세계관’이란 표현으로 ‘할배의 탄생’에 대한 비판해주셨는데요. ‘장인적 세계관’이라는 용어로 노인들을 표현한 것에 상당히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정치적 보수화에 대한 저의 해석을 비판할 정확한 근거인지는 다소 의문이 드네요.
http://blog.naver.com/bebreaking/220881565526
블로거 엔틸트: 최현숙이나 장정일이나 비슷한 오류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노인의 층위를 단순화시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접근을 시도할 때 피할 수 없는 지점이다 그러한 오류를 일정정도 감수하면서 접근할 수밖에 없는게 분석의 숙명이긴 하다. 노인층을 콘크리트처럼 확고하고 단단한 신념을 가진 ‘것처럼 보이고’ 그것이 ‘표출된다’는 점은 양날이 검과 같은 측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장정일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힘들다. 오히려 더욱 더 “이 성취는 당신들의 손으로 이룬 것이다”고 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처 : 참견인 : .. | http://blog.naver.com/ntild/220874785734 블로그
<할배의 탄생> 북토크
은정
최현숙은 현재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로 극빈한 노인들의 실질적 삶에 밀착된 일을 하고 있다는 서두를 꺼냈다. 그는 그들에게 빗자루 들면 청소 아줌마, 앞치마 두르면 식당 아줌마로 변신 가능한 ‘만만하게 보이는 사람’을 자청했다. 이런 입장은 문학적 외피를 강하게 입힌 구술 생애사를 구현했던 책의 느낌을 상기시켜줬고, 깊숙이 끌어내기를 시도하는 심리상담사의 속내를 연상케 했다. 나는 ‘할배의 탄생’ 후기에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
『섯째, 내게도 시비를 걸었다. 여성주의, 진보, 구별 짓기, 계몽 습속, 가난한 사람들이 늘 핀잔하는 가난을 옹호하는 태도 등을 의심했다.〔····〕1)지금까지 답은 위치 알기다. 세상 속 나의 ‘지금 여기’를 가늠하고, 주인공들의 ‘지금 여기’를 함께 가늠하는게, 구술사 과정에서 뜬구름 잡기한 사유의 쓸모다. 아마 이 셋째에서 많은 2)오류를 저질렸을 테고, 게다가 오만했지 싶다. 부족하거나 틀리더라도, 나는 진심으로 두 남자를 옹호하고 싶고, 3)두 사람이 세상의 주인임을 함께 확인하고 싶다. (8-9쪽, 들어가며, 할배의 탄생) 』
1) 위치 알기
촛불로 대표되는 변화에 맞불을 놓은 극보수편향의 노인들에 대해 “진보가 그들과 소통하지 못하면 길이 없다. 그 노력 자체가 자산이 될 것이다”라는 주장으로 강연은 이어졌다. 87년부터 시작된 사회운동에서 2000년 진보정당 정치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면서 궤멸을 시작, 노인 돌봄으로 위치 이동한 그의 행보는 타인에게도 역시 경로를 묻는다. 차이에 대해서 인정하고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먼저 듣지 못한다면 나중에 그들과 소통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가 이들에 대한 무조건 감싸주기식 대응을 할 것이라는 태도를 눈치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이는 화자의 사실에 대한 객관적 거리두기에 청자의 왜곡된 기준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과정이 될 수도 있고, 창작 소설과 구분해야 하는 구술 생애사라는 장르 선택의 정의와 의미에 균열을 줄 수 있는 약점이 될 수 있다. “자신이 무지하게 싫어하는 젊은 청년들과의 구술작업도 시작했다”고 하는 덧붙임은 이런 기울어짐을 바로 세우기 위해 스스로 만든 반작용의 결과만 되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그의 주장대로 서로 이해하는 노력은 당연하다. 상대방과 맞출 수 있는 소통 능력은 상대적인 것이지 연장자를 먼저 이해한다는 논리는 다시 논의를 원점으로 돌려야 하는 수고를 뜻한다.
그가 강연에서 재차 주장한 사회문화적으로 극빈한 이들에 대한 절대적 옹호와 “가난한 사람들이 늘 핀잔하는 가난을 옹호하는 태도 등을 의심했다.”고 밝힌 후기의 간극은 약자에 대한 편파적인 나누기를 극복하고 있는 과정이라고 이해하고 싶었지만 이어진 이야기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그가 만난 노인들은 한결같이 “6.25를 겪고도 이렇게 살아왔는데”라는 말을 한다고 했다. 그들의 고단했던 과거를 이해할 줄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하는 쓴소리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한 TV 토크쇼에서 이렇게 말했다. “6.25를 겪는 와중에도 미래의 세대들은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역사상 가장 최고의 스펙을 가지고도 역사상 최초로 기성세대보다 나아질 수 없는 미래를 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세대가 생겼다. 지금의 N포세대이다.” 자신의 친형인 박사모 성남시 회장과의 불화를 일으킨 이재명은 소통 불능의 진보인가? 최현숙의 극보수편향 노인과의 소통은 옳지만, 그의 주장은 이런 진보에게 악한 폭력이 될 수 있다. 이제 본인의 위치이동이 어떤 결과를 나을 수 있는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2) 오류와 오만 사이
최현숙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둘렸던 아버지를 표현하면서 “내가 맞았다가 아니라 아버지와 싸웠다. 내 아버지도 그의 아버지에게 맞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자신의 상처와 오류를 직시할 용기와 성찰의 지혜를 얻은 듯하다고 한겨레 기사는 밝혔다. 하지만 아버지의 폭력성을 경험하면서 그 안에 내재한 폭력성은 본인에게도 문제였다고 고백했다. 그가 커밍아웃하고 집을 나왔을 때도 “자식 때문에 억지로 살 필요 없다”고 말해줬던 큰아들은 그가 이혼소장에 청구사유를 남편의 폭력이라고 쓴 걸 보고 자신에게도 폭력을 행사한 엄마가 폭력을 이유로 이혼하겠다는 것에 위선을 느끼고 돌아섰다고 한다. 그 문제로 지금 큰아들과 만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아버지에서 진보진영으로 이제는 할배로의 좌표이동은 안정화인가, 오류인가? 퇴행한 애도를 하는 박사모에 대한 이해는 발전인가, 오만인가?
그는 “성숙, 인식의 확장 고통의 해소 등이 화자 스스로 그 아픔과 한계를 정리하여 먼저 자신과 화해하고, 갈등과 원망의 대상인 타인과도 화해하게 하려는 시도”이며, 나아가 “자신의 삶을 객관화하며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역사와 정치 속의 사회적 존재로 가늠하게 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아울러 읽는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그 삶들에 공감하고 자신과 사회의 미래를 전망”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는 현재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의 논리적인 지점을 찾아내려는 시도이다. 상식에 근거하여 로고스(logos)적인 정립에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고전주의적인 방식이다. 바로 정상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끝이 이데아라고 말한다. 라깡 정신분석학자 백상현의 강의『애도의 사회학, 4회』를 읽어보자.
『라깡의 정신분석가는 논리적 흐름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 내용들 때문에 이런 것 같다고 한다면 그저 끝없이 말을 시키면서 긴장이 느슨해지도록 멍해지도록 유도할 뿐이다. 거기서 말실수를 하도록 기다려주는 것이다. 논리적인 언어의 평면에 구멍을 찾아내는 것이다. 동일한 말실수가 반복되거나 동일한 단어에 접근하기를 주저할 때 그것은 주체를 찾아가는 구멍, 무의식을 찾아가는 통로가 되어준다. 그 구멍을 따라 들어간 무의식이 보여준 것이 신비롭지 않다. 의식이나 전의식으로 표현하지 못하던 기억으로 들어가 ‘그저 그것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것이구나’ 혹은 ‘자신이 스스로 치명적인 사건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다. 실제사건은 텅비어있다는 환상을 가로지르는 일이 남은 것이다. 더 이상 그 사건으로부터 위협당하거나 압도당하지 않도록 모순되는 지점에 주목하는 것 뿐이다. 그것을 봉합하지 않고 그저 열어놓는다. 불안을 안정화시킨다고 해도 다시 어떠한 아버지의 존재도 봉합자체는 불안정을 야기할 뿐이다. 그저 폭군적인 아버지를 살해하고 혹은 그 아버지가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 갈아타기를 지속함으로써 성장해가는 과정만이 남았을 뿐이다.
정신분석에서 아버지의 상징적 기능은 아버지의 죽음 뒤에 가능한 일이다. 이 아버지는 폭정의 아버지이다. 주체는 부친 살해의 욕구를 가지게 되는 것으로 가정되는데, 이는 금지된 욕망에 유혹이며 폭군적 실재- 아버지의 살해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공동체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 차원에서 종국에는 파국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아를 찾아 나서는 여정과 동일한 궤적을 그린다. 나를 알기 위해,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주인을 찾아 나서는 인간 주체의 덧없는 여정이 그와 같다. 역사적 차원, 공동체의 차원에서도 아버지의 죽음은 반복되며, 이에 대한 애도의 작업 역시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대한 사망선고이자 애도작업이다.
한반도에서의 남북한의 출현은 조선의 갑작스런 사망, 일제강점기에 의한 갑자기 모던으로 내던져진 역사의 한민족이라는 상상적 공동체의 죽음의 체험이며 트라우마다. 이는 극단적 좌우의 분할을 초래했고, 이를 애도하는 2가지 서로 다른 버전을 낳았다. 왕권을 복원하고자 하는 봉건적 언어를 지금도 사용하는 박사모의 퇴행적인 방식과 우리의 새로운 법질서와 민주주의로의 애도를 하는 촛불시위이다.
왕이 모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마치 어버이처럼 사랑한다는 개념은 왕은 백성을 사랑할 수도 있고 아닐 수 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퇴행적인 애도이다. 지배세력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교체되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민주주의 새로운 언어이고 이 새로운 질서를 막을 수는 없다.』
문학의 수사학과 연관해서 환유(metonymy)가 있다. 환유의 구조는 인접성에 의해 이어져가는 기표들 간의 수평적 연쇄를 가르키는데 라깡은 이를 다시 ‘욕망의 구조’라 부른다.
아버지(1) 진보(2) 할배(3)
환유는1 ⇒2⇒3의 문장이 끝나고 다시 3 ⇒2⇒1로 회고(retrroaction)되면서 문장의 의미를 양각시키는 것이다. 문장이 끝난 후에야 다시 거꾸로 이해된다. 이는 서로 국지적인 이야기들을 서로 상호작용시켜 양쪽 다 명료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병렬에 의해 생산된 의미는 양쪽의 메커니즘을 찾아내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진보와 사회운동으로 이동한 후 자기인식 과정의 지식을 얻으며 할배로 문장을 마쳤다. 최현숙이 보인 오류와 오만사이는 환유적 누비점(point de capiton)을 가진다. 이는 가령 소파에서 겉(가죽 커버)과 속(솜 쿠션)이 이어지는 단추, 꿰매어 지는 지점을 말한다. 회고를 통해 그의 문장이 마침내 어떤 의미로 양각될지 응원하며 기다려보고 싶다.
3) 세상의 주인
최근 가벼운 뇌졸중으로 언어장애를 겪고 있었던 김용술은 질문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으나 말함에서는 문제를 가지지 않았다. “중학교만 나왔어도 큰소리치고 살 수 있었는데 내가 창피하다. 눈물이 난다. 내 이야기는 책이 될 만한 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가 수없이 되뇌었을 마지막 소감이 내 마음에 남았다.
소문자의 삶의 김용술이다. 최현숙은 그를 위해 남겨진 단 한 사람이 되어주었다. 결국, 그를 대문자 주인공으로 그 자리에 세웠다. 주인공은 아직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읽지 못한다. 책을 읽는 이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다. 그는 앞으로 이런 딜레마를 풀어나가고 싶다며 강연을 끝냈다.
신년 특선 영화 ‘드래곤 길들이기’가 EBS 전파를 탔다. 바이킹과 드래곤의 싸움이 끊이지 않는 버크섬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바이킹 마을은 드래곤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특히 용 때려잡기를 숙명으로 삼아온 바이킹족의 수장, 주인공의 아버지는 어떻게 하면 드래곤을 전멸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다. 어른들은 적들의 약점을 파악하고 제압하는 전략이 가능하자 이 방법을 절대적으로 여겨 지켜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바이킹 계의 N포 세대, 바이킹 족장의 아들 히컵. 이런 어른들로부터 ‘무능’이라는 낙인을 극복할 만한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부적응을 면치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히컵은 우연히 그 존재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공포의 드래곤 나이트 퓨어리를 잡게 되며 용을 다룰 줄 아는 최초의 바이킹이 된다.
히컵은 용의 습성을 알게 되고 바이킹이 드래곤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만 어른 바이킹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사실 그 수많은 드래곤들이 마을의 가축을 훔쳐갔던 이유는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왕 드래곤에게 바치기 위해서였다. 히컵은 그가 길들인 나이트 퓨어리를 타고 문제의 근원, 악의 축 보스 드래곤을 죽이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다음세대는 내 안의 드래곤과 함께 날아올라 진정한 세상의 주인이 되길 바란다. 그건 내가 나에게 가지는 소망이기도 하다.
인용은
1.사람이름,-ex) 장정일:
2." "
3. 『 』입니다.
첫댓글 부물님의 글과 인용글에 대한 구분이 필요할 듯요...^^
읽어주시고 조언주셔서 감사해요.
링크달기, 인용구분해서 수정했습니다^^!
추리소설이 아닌 글은 수다방으로...옮깁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ㅠㅡ
추천도서에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도 있길래
올려도 되는 줄 았았어요. ㅠㅠ
다음부터는 수다방에서 쓸게요^^
@부물 그것도 옮겼어요...^^ // 이곳 카페의 모든 책은 일단 추리소설 우선,이라는 원칙이 적용됩니다...
@애꾸눈잭 네~작가님^^
근데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추리소설에 포함되는 건가요??
제가 아직 장르구분을 잘 모르겠어요 ㅠㅠ
여튼 추리소설 우선권 찬성이여~~
@부물 그거...영화 아니에요?
@애꾸눈잭 맞아요~ 이번에 영화 나왔어요
양사나이님께서 원작을 추천도서로 올려주셨는데요.
영화추천이면 수다방으로 고고씽~
옹? 작가님~ 추천도서에 이렇게 적혀있네요?? 요거 '추리소설만'으로 수정하면 좋을듯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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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ㅠㅠ 양사나이님 글 삭제...수다방으로 옮기시는게 맞지 않을까...생각했었는데 쓰신 분이 서운하실듯요ㅠㅡ 에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