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IMBER VS CLIMBER |
김동칠
자유등반가 김동칠! 불혹의 나이에 다시 찾은 수직의 벽에서 또 다른 행복의 의미를 배웠다. 뜨거운 청춘으로 가득 차 있는 클라이머로서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젊디젊은 날 자유라는 이름을 달고 이 땅에 상륙한 무상의 오름짓에 빠졌던 시절이나, 행복한 삶의 의미를 수직의 벽에서 그려내고 있는 지금에도, 그는 자신의 세계 속에서 우주를 찾으려는 구도자의 갈구처럼 오름짓을 사랑한다.
조규복
스포츠 클라이머 조규복! 지금 그는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 꿈을 좇아 사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위대한 진리를 탐구하거나 삶의 본질적 의미를 깨달아 가는 구도자가 부럽지 않다. 그것은 홀드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오버행을 오르는 면벽수도(面壁修道)의 깨달음도 그 무엇에 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
5.14급에 도전하는 사나이 이야기 - 하나
젊은 날의 선택
프리 클라이밍(Free Climbing), 흔히 자유등반이라 부르는 등반사조가 전 세계 등반계를 뒤흔들던 1980년대! 자신의 등반욕구를 위대한 퍼포먼스로 완성시키려는 새로운 시도는 국내 등반계에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바위틈에 솟은 작은 돌기를 잡고 몸을 끌어올린다. 때로는 손과 발의 위치가 뒤섞이는 기묘한 동작으로 오버행 턱을 넘어선다. 사람들은 수직 벽을 오르는 클라이머의 모습이 흡사 자신의 혼과 열정을 담아내는 춤꾼의 동작과도 같다고 했다. 사람들은 전위적 등반의 매력에 빠져 새로운 등반인생에 젊은 날을 바친 클라이머들을 ‘자유등반가’라고 불렀다.
바위 춤꾼 김동칠(44세·뫼우리산악회). 그는 자유등반의 매력에 푹 빠져서 북한산 인수봉과 도봉산 선인봉을 넘나들었다. 그는 늘 새로운 세계를 갈구하는 알피니즘의 시대적 흐름이라는 명제에 순응할 줄 아는 클라이머였다. 이러한 신사고적 등반사조를 갈망하던 김씨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 자유등반가 러스쿨룬이 방한, 북한산 호랑이 크랙에서 전위적 등반행위가 소개되었던 것. 이때가 1985년, 클라이머 김동칠의 가슴에 ‘바로 저거다!’ 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때는 인수봉에 초크를 바르는 행위 자체가 인정이 안 되던 시대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암담한 시기였죠. 우리들은 인공등반으로 이루어지던 루트들을 하나씩 자유등반 방식으로 시도해 보았습니다.”
대부분 기존 루트의 첫 피치를 프리화시키던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반응은 의외로 뜨거웠다. 이러한 시대적 반항아(?)들의 염원은 곧 인수봉 남면 아래 벽에 ‘해우길(5.11b)’이라는 역사적 유산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크럭스를 오를 때 끙끙거린다 해서 변소길이라 부르던 이 길은 국내 클라이머들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자유등반 루트로 기록되며 새로운 등반과제로 떠올랐다.
이런 사연을 지닌 이 루트와 김동칠씨가 인연을 맺은 것은 당연한 일. 누구보다도 적극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인 그는 해우길에 자신의 열정과 삶의 방식을 표현하는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해우길 첫 번째 볼트는 제가 설치했는데 생각해 보면 가슴 벅찬 일이었죠. 당시 해우길이란 한 사람의 길이 아닌 자유등반가 전원의 염원을 담아 탄생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도봉산 선인봉에도 바위 춤꾼 김동칠과 인연의 끈을 맺은 남측오버행이란 루트가 있다. 하켄을 박고 사다리를 이용해 인공등반을 하던 이곳이 국내 등반사에 새로운 이정표적인 루트로 태어난 것은 1987년이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수직 크랙의 가능성이 바위꾼 김동칠의 눈에 보인 것이다.
녹슨 하켄을 걷어내고 크랙을 청소한 후 등반 가능성을 타진한 지 수개월. “바위틈에 집어넣은 손가락을 뒤틀 때마다 전달되는 통증은 대단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얼굴이 일그러지게 마련이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열정의 등반가 앞에 오버행의 하늘 벽은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5.12급 세계를 향한 가능성의 문을 연 등반으로 평가받은 이 루트의 난이도는 5.11c급이었다. 김씨의 등반은 자유등반계를 한껏 고무시켰고, 곧 국내 최초의 5.12급 등반이 인수봉 빌라길에서 시민산악회 심재홍씨에 의해 탄생했다. 그리고 정점으로 향해 치닫던 자유등반이라는 전위 예술적 행위는 곧 도봉산 짱구바위에서 강적크랙(5.12c)이라는 위대한 퍼포먼스로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끝없는 도전
결혼과 함께 생업이라는 올무가 자유 등반가 김동칠씨의 발목을 잡은 것은 1990년. 생활이 안정되면 다시 바위를 찾을 것이라 다짐한 채 암벽화를 벗었다. 그리고 7년, 생활이 안정되니 예전의 산 친구들이 보고 싶어졌다.
“1997년이던가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인수봉을 찾았습니다. 근데 저를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던 친구가 있더군요. 지금 트랑고스포츠 사장인 유학재씨였죠.” 기자가 김동칠씨를 만난 것은 1999년 가을, 원주 간현암이었다.
오버행 벽에 있는 5.12급 루트를 등반하는 클라이머들을 쳐다보는 그의 모습에는 진지함이 가득 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대부분의 클라이머들이 빙벽을 찾아서 분주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는 간현암을 찾았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언 손을 비벼대며 간현암 루트들과 씨름했다.
2000년 봄, 한 겨울 내내 들여온 정성 때문이었을까?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이던 고난이도 루트들이 하나씩 문을 열기 시작했다. 물결(5.12a), YS(5.12b), 그린(5.12c), 그리고 신토불이(5.13a), 젊은 날 그토록 열망하던 고난이도 세계의 문턱을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 넘게 된 것이다. 5.11급 클라이머로 등반의 꿈을 접어야 했던 김동칠씨. 5.13급 세계라는 위대한 전리품을 얻은 채 화려한 재기에 성공하리라고는 자신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1987년과 88년 일본에서 열린 재팬 컵에 참가할 때 오가와야마(Ogawayama)와 조가사끼(Jogasaki)에서 5.12급 세계를 열려고 무던히 애썼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감개가 무량한 일입니다.” 내친 김에 무엇 한다고 했던가? 2001년 5월, 선운산에서 5.13급 루트 샌드월(5.13a)을 등반해낸 김씨는 고난이도 등반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2002년 진달래 탈춤(5.13b) 등반에 성공한 김씨는 2003년 베스트 오브 베스트(5.13c)와 탄생 업버젼(5.13d)을 등반해내며 불혹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 절정의 등반기록들을 만들어냈다.
올 4월에도 또 다른 5.13급 루트 안녕(5.13c)을 등반해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자신이 말한 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결코 부끄럽지 않는 등반기록 인 것이다.
부인 강정임(44세)씨와의 사이에 중학교 3학년 지은이와 초등학교 6학년 혜은이를 두고 있는 김씨의 직업은 유리설치공이다. 고층빌딩에서 하는 일이라 쉽지 않은 직업이지만 자신과 가족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니 고마운 일이라 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니 어려웠던 시절보다 더 편안하게 클라이밍에 몰두할 수 있단다. 힘쓰는 작업이 많으니 클라이밍에 도움이 된다며 웃음을 짓는다. 1987년 전국암벽등반대회에서 2위에 오른 경력을 가지고 있는 김씨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당연히 5.14급 등반이죠.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 보렵니다.” 자유등반가 김동칠! 불혹의 나이에 다시 찾은 수직의 벽에서 삶이 주는 또 다른 행복의 의미를 배웠다는 그는 뜨거운 청춘으로 가득 차 있는 클라이머로서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젊은 날 자유라는 이름을 달고 이 땅에 상륙한 무상의 오름 짓에 빠졌던 시절이나, 행복한 삶의 의미를 수직의 벽에서 그려내고 있는 지금에도, 그는 자신의 세계 속에서 우주를 찾으려는 구도자의 갈구처럼 오름짓을 향한 열정의 목마름을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오늘은 약자지만 내일은 반드시 강자가 된다는 명제 아래 이카루스의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영원한 클라이머가 될 것이다.
5.14급에 도전하는 사나이 이야기 - 둘
전환점
전환점을 영어로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라 부른다. 그래서인지 이 단어의 의미는 과거의 삶으로부터 단절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전환점이란 분명 과거 또는 일상의 것으로부터 탈피해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출발할 수 있다는 시간적 개념의 단어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전환점이란 단어와 오름 본능에 충실하려는 클라이머들 사이에는 필연적 상관관계가 있다. 극한의 세계를 탐닉하고 끝없는 도전의 명제 아래 자신을 복종시켜 가는 그들의 삶 속에는 범상치 않는 선택들이 있기 때문이다. 행복을 추구한다는 삶의 궁극적 목표 아래서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음직한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포츠 클라이머 조규복((40세·매드락클라이밍팀)씨. 그는 지금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 꿈을 좇아 사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위대한 진리를 탐구하거나 삶의 본질적 의미를 깨닫고자 하는 구도자가 부럽지 않다. 홀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오버행을 오르는 면벽수도가 주는 깨달음은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이러한 수도자와도 같은 등반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89년이었다. “북한산 백운대를 갔을 때였습니다. 건너편 인수봉 바위를 오르는 이들이 정말로 멋져 보이더군요. 그날 내 가슴속에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운명적 포인트가 된 것이죠.”
암벽등반을 배우려는 열정을 노량진 클라이밍 스포츠센터에서 불사르기 시작한 그는 그곳에서 고 박현규(당시 노량진 클라이밍 스포츠센터 대표)씨의 지도를 받으며 스포츠 클라이밍의 매력에 빠져 사는 새로운 인생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의 등반능력은 가슴속 열정만큼이나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곧 등반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국가대표로 뽑힌 그는 1995년 스위스에서 열렸던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가 하면, 유럽 등반지들을 순례하며 선진 등반문화를 체험하는 시간들을 보내며 삶의 전환점에 선 자신의 세계를 탐닉해 나가기 시작했다.
조씨의 등반이력은 전북 고창군 선운산에 호의 기다림(5.12d), 샌드월(5.13a), 진달래탈춤(5.13b), 겨울람보(5.13d) 등 고난이도 루트들이 완성되면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틈이 나는 대로 선운산을 찾았던 그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쉽지는 않았지만 고난이도 루트들을 하나씩 끝내게 되었을 때 얻은 희열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1999년 봄 가장 어려웠던 겨울람보(5.13d)를 등반했을 때는 세상을 다 얻은 느낌이었죠.”
원대한 꿈
1999년 여름, 원대한 꿈을 향한 조씨의 선택은 자신을 넓은 세계 속으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유럽 등반여행을 통해 5.14급 세계에 도전하기로 했다. 하지만 40여 일을 투자한 프랑스 등반투어에서 그가 얻은 것은 좀더 성숙한 세계를 체험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혹독한 시련뿐이었다. 복스(Volx)에 있는 마지노 라인(Maginot Line 8b+)과 샤또베((Chateauvert)에 있는 아 유 레디(Are you ready? 8b+) 등 5.14급 등반에 도전했던 그는 정보와 훈련 부족으로 등반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날의 실패는 그에게 좌절이라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지 않았다. 그날의 실패는 오히려 삶의 활력소가 되었고, 자신이 선택한 클라이밍을 더 진지하게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다. 물론 스포츠 클라이머이기를 선택한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조씨의 등반 이력은 자연암벽 만큼이나 등반경기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93년 봄 대한산악연맹이 주최하는 전국암벽대회에서 5위에 오른 그는, 그해 부산에서 열린 우정암벽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 때가 서른 살. 늦게 배운 도둑질 밤새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스포츠 클라이밍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이후 각종 등반경기대회에 출전해 줄곧 상위권을 유지했던 그는 1996년 대산련에서 개최한 회장배 전국암벽대회에서 우승하며 강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1999년에는 전주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한국 최초의 볼더링 등반대회인 스파이더볼더링게임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작년에 처음 열린 전국체전에서는 서울시 대표로 출전해 남자일반부에서 난이도 2위 속도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국제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던 그는 일본 도야마에서 열린 2002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3위에 입상, 동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언제까지 선수생활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일본의 시노자끼 선수가 45세 때 아시아 챔피언에 올랐으니 아직도 기회는 여러 번 있다”며 대답을 대신한다. “등반경기대회는 늘 저를 설레게 합니다. 긴장된 분위기도 좋고, 클라이밍을 사랑하는 선수들과 만날 수 있고, 정형화된 분위기 속에서 표출되는 자유라고나 할까요?”
10년 넘게 선수생활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등반경기 대회가 있다면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그의 대답에는 선험자의 철학이 배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인지 그는 등반경기 예찬론자다. 남들은 다 ‘판떼기’라 욕할 때 그는 그곳에서 인생 철학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그 철학의 가르침 속에 담겨져 있는 원대한 꿈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 클라이밍을 아는 저는 행복합니다. 누구나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는 순간 자신의 산행을 가슴 속에 꿈꾸죠. 저 또한 벽 앞에서 자신만의 산행을 꿈꾸며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 대상이 자연암벽이건 인공암벽이건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죠.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거기서 얻어지는 결과라 생각합니다. 오름짓!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지 않습니까!”
2003년 봄 그는 초등만큼이나 어렵다는 겨울람보(5.13d) 재등에 성공했다. 자신을 시험대에 올리고 원대한 꿈을 선택한 자신을 연단하는 일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다. 그는 지금까지 포항시 죽장암의 포철의 혼(5.13a), 대구시 유학산의 X-파일(5.13b), 성남시 범굴암에 범굴(5.13c), 김해 무척산 성벽바위에 철웅성(5.13b) 등 많은 5.13급 루트들을 초등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94년 대한전선에 근무할 때 만나 1997년 봄에 결혼한 김경자(35세)씨와의 사이에 의현(7세)과 수현(3세) 남매를 두고 있는 그는 부천에 있는 뉴파워클라이밍센터의 주인이며, 서울시 성동구 응봉동에 있는 암벽등반공원의 운영요원이기도하다. 그는 지금 클라이머로서 살아온 자신의 삶에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청소년 클라이머들을 육성하고 이들에게 자신이 선택한 아름다운 삶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5.14급 세계! 그리고 위대한 챔피언!’을 향한 그의 원대한 꿈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도 그는 암벽에 매달린다. 그리고 거기서 거친 호흡소리와 손끝에 느껴지는 고통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김종곤 스포츠클라이밍 전문기자 ] |
첫댓글 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