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의 초행길
김창송
이 날까지 내가 무역과 함께 한 세월은 무려 60년이 가까워온다. 만 10년을 다니던 S무역회사가 경영난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왔다. 그때도 취직은 어려웠다. 부득이 막상 내 회사의 간판을 처음 걸어 놓고 일을 시작한 것은 47년 전인 1968년 3월 초하루였다. 그래서 나에게는 3․1절이 남다르다.
새로 장만한 3평짜리 사무실에 앉아 일을 시작하려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헌 책상 3개에 낡은 타자기 1대와 검은 전화기 1대, 남향으로 앉은 방이라고는 하지만 난방이 안 된 사무실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우선 찾아가 볼만한 고객 명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S무역회사에 재직 중 알게 된 어르신들을 찾아가 그간의 감사와 창업의 경위를 말씀드리고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당시는 무역사(貿易士) 자격증이 있어야 했다. 나는 KOTRA가 주간한 유일한 수출학교 제1기생으로 이곳을 수료해야 그 자격증을 딸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입학시험이 치열했고 무역 영어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그런데 당시 한국의 무역 제1번지였던 반도호텔을 비롯한 소공동 주변에 있는 무역회사들을 찾아다니고 나니 더는 갈 데가 없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누렇고 두꺼운 전화번호부에 실려 있는 남대문, 광화문, 을지로에 있는 무역상들을 일일이 찾아 나서기로 했다.
개업 초기에는 싱가포르에서 생고무, 라텍스를 비롯한 천연산물을, 일본으로부터는 각종 화공약품 원료를 주로 국내 기업에 알선했다. 한마디로 오퍼상이었다. 그때만 해도 무역업중개 오퍼상이 절대적 존재였다. 국내 고객으로는 테니스볼이나 신발, 앨범, 그리고 타이어, 페인트 제조와 다양한 제품의 원료로 쓰였다. 당시에 우리나라의 모든 교역은 수출보다 수입 위주였다. 따라서 규모가 작은 군소 수입상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는데 그런 사무실을 찾아다닌 것이었다. 때로는 잡상인 오인되어 수위로부터 쫓겨나기도 했다.
자장면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우며 이른 아침부터 남대문에서 을지로6가까지 걸어 다니며 무역회사 간판이 붙은 곳이면 체면 불구하고 찾아 들어갔다. 하루에 20개 회사를 찾아가기로 작정하고 ‘1日 20社’라는 나만의 약조를 되씹으며 동분서주했다. 한 달에 몇 번씩 야간 침대차를 타고 부산 중앙동의 화공약품 현물상이나 김해나 동래의 신설공장들을 찾아가면 숙박료도 아끼고 시간도 벌어 일석이조였다.
그때만 해도 국제전화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긴급한 일이 있어 때로는 시도해 보기도 했으나 오사카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개미 소리만큼 약하고 이쪽은 지나가는 버스 클랙슨 소리까지 끼어들어 할 수 없이 수화기를 들고 테이블 밑에 들어가 “모시모시, 모시모시” 하며 소리를 질렀다. 유일한 통신수단이라고는 일주일 정도 걸리는 편지가 고작이었는데 그나마 급한 연락이 있을 때는 광화문에 있는 전신국까지 걸어가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내 차례가 오면 전보 한 통을 치고 그것마저 요금을 아끼려고 30자 한도 안에서만 쳐야 했다. 그리고 허겁지겁 막차를 타고 집에 들어가면 통금 사이렌이 기다렸다는 듯 뒤따라 울렸다. 그야말로 중노동의 하루였다.
개업하고 오사카에 있는 K사장이 한국에 처음으로 나왔을 때였다. 그는 유일한 나의 공급파트너로서 대만 다이난에서 태어나 13살 때 부모 따라 일본으로 갔다가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그와 함께 부산을 지나 사상(沙上)에 있는 신설 페인트 공장을 찾아 가는 중에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졌다. 우산도 없어 옷이 흠뻑 젖어 공장입구에 들어섰는데 공장 마당은 잡초가 무성한 논바닥 그대로였다. 우리 구두는 흙투성이였고 얼굴에는 빗물이 줄줄 흐르는 몰골로 그 회사 무역부장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마침 저 안쪽에서 걸어 나오던 회사의 사장과 마주쳤고 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일본에서 찾아온 K사장을 소개했다. 경상도 사투리의 사장은 물에 빠진 듯한 우리의 초라한 모습에 놀란 나머지 아래위를 훑어보고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궂은 날씨에 먼 곳까지 찾아 주어 고맙다”며 즉석에서 사장실에 들어가 상당한 페인트 원료를 구매해 주었다. 그날의 인연이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지금의 성원교역(成員)이 있기까지 나에게는 창업기의 묻혀진 크고 작은 일화들이 보물처럼 쌓여있다. 어느 창업자들이나 눈물겨운 숨은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다. 나는 무역이 나의 직업이다 보니 바깥나들이가 많았다.
나는 유럽이나 미국 등 해외출장을 갔다가 귀국길에는 늘 일본에 들렀다. 관공서가 많은 도쿄보다 상인들이 많은 오사카에서 며칠 머물면서 여기저기 거래처를 찾든지 때로는 서점에 들러 책을 사곤 했다. 그때 주간지(우리나라에는 없었다)나 일간지에서 시장 정보를 종합적으로 찾아 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일본 친구 사장과 늘 하듯 저녁을 호루몬야기(불고기)를 먹다가 귀한 정보를 얻었다. 대만의 어느 병원장이 화공약품 원료의 상당량을 은밀히 집 마당에 감춰 놓고 시세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곳으로 가 보라고 했다. 나는 서울로 가려던 것을 접고 다음날 이른 아침 타이베이로 날아갔다. 그 병원은 대만 중심도시 까오싱에 있었기에 이른 새벽 열차를 잡았다. 그 지역의 유명한 의사였는데 자기 집 넓은 마당에 많은 화공약품 원료를 검은 비닐로 남몰래 덮어놓고 시세가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하자면 매점매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국제시세는 일차 오일쇼크가 지나 하락하기 시작할 때였다. 처음 보는 대만 의사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
“우리 회사는 화공원료 전문 무역상이다. 원료 구하러 세계 시장을 찾아다니고 있는 중이다. 지금 유럽을 돌고 오는 길인데 세계 수요가 급감하면서 가격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더 떨어지기 전에 처분하는 것이 현명하다. 가격이 맞으면 전량을 내가 사겠다.” 이렇게 상담이 이어졌다.
이리하여 세계 시장에서는 구하기 힘든 많은 원료들을 거의 반값에 매입하였다. 그 후 선박회사까지 직접 찾아가서 낮은 선임으로 용선 계약까지 하여 전량 수입하였다. 그러나 막상 수입된 물품들은 오랫동안 정원에 야적해 놓았던 탓에 드럼통들이 녹이 슬면서 내용물이 변질되어 있었다. 클레임 분쟁을 1년 넘게 하였으나 결국 손실로 매듭을 지었다. 아픈 추억뿐이었다.
또 다른 사례다.
지금은 9․11사태로 파괴된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에 사무실을 두고 있던 Y회사와 몇 해 순조롭게 거래했다. 그런데 2년이 넘도록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밀린 중계수수료를 보내오지 않아서 몇 번이고 독촉했으나 소식조차 끊겼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은밀히 찾아가기로 했다. 뉴욕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50층 사무실 작은 방에는 여직원 한 사람뿐이었다. 우리는 그런 높은 사무실을 상상도 할 수 없던 때였다. 지금으로 보면 원룸이었다. 그러면서도 국제적인 대규모 회사인 양 은백색의 화려한 고급 편지지를 쓰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제법 큰 회사로만 믿고 있었다. 뜻밖의 나를 본 그는 당황해 하고 있었다. 청산유수의 유창한 화술과 온몸에서는 향수가 진동하는 것이 어쩐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번잡스러운 제스처와 말만 듣고 있다간 감당할 길이 없었다. 늘어놓는 구구한 변명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화만으로는 해결할 길이 없어 보였다. 나는 갑자기 일어서서 책상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나쁜 놈”이라며 한국말로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의외의 나의 태도에 놀란 듯 그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자금 사정이 좋지 못하니 1주일만 기다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닌가. 잠시 생각 끝에 20%를 즉석에서 양보하고 그 자리에서 합의하여 바로 아래층 은행으로 함께 내려가 우리 서울 회사 주소로 송금하고 카피를 손에 넣고서야 돌아 나왔다.
비즈니스란 인간과 인간이 주고받는 신뢰 관계이다. 세상에는 선남선녀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외국인은 물론 특히 미국 기업가들은 모두 신사로만 여기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애초부터 빈손으로 출발했기에 성실과 신용만은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오늘이 있기까지는 그 우직한 신념이 밑거름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특히 지난 IMF 때는 무형의 신용을 재산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무역의 초행길은 마치 광야에 길을 내는 것만 같이 힘든 일이었다.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