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송경자
차고 매끄러운 겨울 바람이 가슴 한 켠을 휘감아오는 섣달 그믐 무렵의 오후
자꾸만 아려오는 상한 마음을 달래보려 즐겨듣던 음악도 들어보고, 국화향 가득한
차 한잔을 마주해보지만 상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는다.
벌써 수년에 걸쳐 명절 무렵이 되면 난 이렇게 가슴앓이를 하곤 한다.
아직은 너무 고와 남편의 차례상을 차리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작은 들
꽃 같은 두 동생들 때문이다.
지난 어느 성탄절 오후 다섯째 동생으로부터 청천벽력일 수밖에 없는 한통의 전
화를 받았다 그날 아침 제 남편이 출근을 하려다 갑자기 쓰러져 그만 가버렸단다.
꽃보다 고운 아내와 세상에 둘도 없는 딸 하나 아들하나를 남겨둔 채..
그가 우리가족이 되어 처음 만나던 날, 짙은 감색의 공군 제복을 입고 자기는
군에서 비행기를 조종하는 조종사라며 직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얼굴
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배시시 웃던 그 순수하고 고운 모습이 아직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데..
그 후 무심천의 벚꽃이 몇 번인가 피었다 지고 난 뒤...
막내 동생의 남편이 병원의 오진으로 하여 종양이었음에도 항암치료 한번 받아
보지 못하고, 개나리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 어느 날 우리 곁을 또 그렇게 떠나버
렸다 곱디고운 아내와 어린 남매를 두고...
삼성병원 영안실.. 10살 박이 어린 상주는 제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상복을 입
고 엄마 옆에 앉아 제 아빠의 빈소를 지키다 말고 “이모!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한다 이모가 사준 부라보콘을 먹다말고 갑자기 엄마 품에 달려가 막 울어댄다.
“이제 아빠가 없으니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돈을 버냐고. 누나랑
엄마랑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하느냐고.. 갑자기 꼬마 어른이 되어버린 아들을 조
카애를 바라보며 우리들의 가슴은 무너져 내리고 숯검정처럼 타들어간다 억장이
무너져서인지, 눈물이 말라버렸는지, 울지도 못하던 동생이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
며 고함 고함을 지르며 밤새 울어 댄다 이후로 다시는 울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
도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여름 어머니 생신날 현관문을 들어서는 동생들을 차마 볼 수 없어 난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만다.
제 남편들이 없으니 버스를 타고 왔겠구나 싶어서다 모두 다 타는 버스인데 왜
그렇게 가슴이 시리던지....
함께 사우나를 갔던 날 티 없이 고운 그들의 몸매를 보며 나는 또 숨죽인 울음
을 운다 (보듬어 안아줄 정인이 없다는 사실에..)
그렇게 살아가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친정어머니는
“얘들아! 느이(너희)들이 빨리 늙어버렸으면 좋겠다” 시며 피울음을 토해내신다.
이제 그들이 가버린 빈자리엔 상처라고 하는 한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영안실에서 꼬마어른의 모습으로 우리의 애간장을 녹였던 조카애는 밤이면 알
아서 문단속을 하고 제 이모가 오면 이모는 밤을 많이 먹으니 오지 말라 하여 쓴
웃음을 자아내게도 하고, 내가 어른이 되면 아빠처럼 은행가가 되어 엄마와 누나
를 지켜줄 것이라며 든든하고 영특한 아들로 자라가고...
언니! 나 그 사람이 사무치게 그립다면서 숨죽인 울음을 울던 동생도
지난 추석엔 이번 차례상은 김 서방과 민 서방은 서로 죽이 잘 맞는 동서지간
이었으니 한곳에 모여 지내야겠다며 여유를 부린다.
“그래! 그 웬수 덩어리들 갈 때도 모르고 서둘러 가버려서 생각하기도 싫지만
평소에 좋아하던 것 많이 차려줘라.” 하며 나는 동생들을 위로한다.
잘 익은 상처에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난다고 하던가.. 우리들의 이 상처도 잘
썩고 곯아 먼 훗날 그 인고의 세월만큼이나 귀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향기로운
나무로 자라 있을 것을 그려본다.
창밖을 보니 어느 샌가 함박눈이 쏟아져 내려 순백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다 마
치 내 상한 마음을 치유라도 해 주려는 듯이....
2006/23 겨울 특강
첫댓글 잘 익은 상처에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난다고 하던가.. 우리들의 이 상처도 잘
썩고 곯아 먼 훗날 그 인고의 세월만큼이나 귀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향기로운
나무로 자라 있을 것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