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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유일한(柳一韓, 1895년~1971년)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유한양행의 창업주이자 독립운동가.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197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무궁화장,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로는 자신의 가족이 아닌 사람을 유한양행의 후임 사장으로 지명하였고, 국가 및 사회 공헌에도 힘써 왔다. 이 때문에 존경하는 대한민국 기업인을 묻는 여론 조사에서 항상 상위권 인물로 꼽힌다. 순위 앞뒤의 인물들이 국내 최고 대기업들의 오너라는 걸 생각하면 기업규모 대비 순위는 독보적이다. 물론 유한양행도 작은 회사는 아니지만, 상대는 연간 수십 조 단위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는 기업들이다.
1895년 조선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재봉틀 장사로 자수성가한 상인 유기연(柳基淵)과 김확실(金確實) 사이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유일형이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자 당시 평양에서 재봉틀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던 아버지 유기연은, 미국 감리회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5년 당시 9살에 불과한 장남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당시 유일한의 아버지는 미국의 수도가 어디인지 몰라, 그냥 그 나라 땅의 중앙이겠거니 하면서 유일한을 미국 대륙의 정중앙으로 보내게 된다.
큰 돈이 들 수도 있는 유학을 보낸 이유는, 자신의 자식들이 식견을 넓혀서 민족을 위해 일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유기연은 자식들을 러시아, 일본, 중국에 유학보내서 공부하게 하였다. 배에서 아버지가 환전해 준 미국 돈(달러)을 잃어버린 유일한은 인솔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의 배려로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독신자 자매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다. 태프트 자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한 뒤, 밭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성실하고 검소한 삶을 통해 기독교의 노동윤리를 실천했으며, 어린 유일한에게 영어를 가르쳐서 미국 사회에 적응하도록 배려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일한은 인종차별로 서러움을 겪기도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강한 성격으로 극복했다.
1909년 그는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한다.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 때는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살았다.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는 재미교포들의 항일집회에 참여하여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항일경력 때문에 고향에 사업차 잠시 입국했을 때 일본 경찰에게 연행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이름을 바꾼 계기도 비범한데, 중학교 시절 미국에서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보급소 직원이 이름 일형이 어려워 제멋대로 '일한'이라고 불렀다.그는 당황했지만 한국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한(韓)'자를 떠올리고 이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이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승낙을 구했고, 아버지는 승낙을 넘어서 동생들의 돌림자까지 '한'자로 바꿨다.
미시간 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에 입학한 유일한은 뛰어난 운동실력을 발휘, 동양인임에도 장학금을 받으며 미식축구 선수로 좋은 활약을 보였다. 유일한이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에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적었더니 아버지는 "공부하라고 미국으로 보내 놓았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운동이나 하라고 보낸 줄 아느냐?"면서 꾸짖었지만, 유일한은 '미국의 대학교에서는 운동을 못하면 공부를 못합니다.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하기 위해서 운동부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라고 답장을 보내어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 의회에 참여하였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이 때 유일한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다만 이승만이나 서재필 등이 미국에 의존하는 듯한 태도를 많이 보이자 실망했다는 일화가 있다.
2.3. 청년 사업가
자신의 힘으로 1919년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발전기 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제너럴 일렉트릭에 취직한다.
1922년 사표를 낸 후 미국 내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숙주나물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유일한은 시내 대로변의 유명한 가게의 쇼윈도에 트럭을 들이받아 일부러 교통사고를 냈다. 트럭에 실린 숙주나물이 담긴 병들이 도로변에 죄다 쏟아져 깨졌는데, 이 사건이 숙주나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하여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아 사업이 번창하게 된다.
이후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았던 돈으로 숙주나물 병조림의 단점을 개선한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하였다.
이후 1925년에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와 결혼해 1녀 1남을 얻었다. 한편 독립운동을 하며 자산을 모두 쓴 서재필에게 유일한이 찾아와 함께 New Il-han & Co. 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조선에 있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장 애비슨의 귀국 권유로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 자리에 유일한을, 유일한의 부인 호미리에게는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과장 자리를 제의해 귀국하기로 한다.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하여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을 아꼈다.
이렇게 청년 사업가로서 바쁜 중에도 1922년에 미시건 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였고, 1929년에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였다.
2.4. 유한양행을 설립하다
1926년에 귀국하여 경성부 종로2정목(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라초이 회사 경영 때 필요한 녹두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부모와 동생들을 만난 일 때문이었다.
부모는 큰 아들 유일한이 보내준 100달러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 대다수의 조선 사람들은 빈곤과 기아로 인한 질병에 허덕이며 민중작가 최서해의 소설인 《탈출기》에서 묘사된 것처럼 굶주림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유일한의 아버지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미국으로 아들을 유학보냈으나 식품회사 경영을 하던 아들에게 실망해 "내가 겨우 숙주나물 장사나 하라고 너를 미국 보낸 줄 아냐? 큰 공부를 했으면 큰 일을 해라"라는 식으로 꾸짖었다고 한다.
몸소 민족의 현실을 체험한 그는 고민 끝에 1927년 조국에서의 삶을 위해 돌아왔다. 유일한은 당시 한국인들의 건강 유지에 필요한 결핵약, 이전에는 미국에서 약품을 수입하여 팔던 유한양행이 1933년 처음 개발하여 판매한 제품인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판매했으며 중국인이었던 부인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 부족이 극에 달하자,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저렴한 가격에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그의 경영 철학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1928년 7월 9일에 유한양행 최초의 신문광고를 냈다. 당시 대부분의 제약회사들은 서로 비방하거나 효과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만병통치약' 등으로 얼버무렸다. 약장수가 신문에 진출한 격. 그러나 유일한은 제품의 이름과 용도를 밝히는 것은 물론, 의학 박사와 약제사의 이름을 실어 제품을 증명했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경영할 때 항상 윤리 경영을 실천하고 법인세를 꼬박꼬박 납부하였으며, 훗날 유한양행은 박정희 정부 시절에 모범납세법인으로 선정되었다. 이렇게 꾸준한 납세를 고집했던 이유는 라초이 사 경영을 하던 시절, 자신과 거래하던 녹두 회사 사장이 탈세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모습에 실망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한다. 1939년 유한양행은 대한민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하였다.
2.5. 독립운동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1942년 재미한인으로 이루어진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했으며, 1945년 OSS의 냅코작전에 참가한다. 냅코작전에 참여한 공작원들은 OSS의 지휘 아래 강도높은 군사, 첩보훈련을 받게 되는데 이 당시 유일한의 나이 50살이었다. 학생 시절 때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었으니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던듯 하다.
당시 OSS 훈련책임자가 유일한을 평가한 자료가 남아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그는 매우 투철한 애국자이며, 회사 간부들을 보다 투철한 한인 애국자들로 채웠다. 그래서 유사시 이들을 지하조직의 핵심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그의 사업 조직망을 기꺼이 이용하는 데 동의했다." 즉, 자신의 회사 전체를 독립운동에 쏟아부으려 했다.
국내침투 직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실제 작전이 실행되지는 않았으며, 유일한은 살아 생전 이 작전에 참여한 사실을 함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 때문에 냅코작전의 전모와 유일한 등 공작원 명단은 유일한 사후 20년이 지나서야 밝혀졌다.
2.6. 해방 이후의 삶
해방 후 1946년 7월, 미국에서 돌아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철저히 법인세를 냈던 유한양행은 1968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모범납세 법인으로 선정되어 동탑 산업 훈장을 받았다. 이 때의 에피소드가 실로 전설적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부정부패 단속을 위한 시범케이스로 어느 기업을 때려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정권생각만 그럴 뿐 현실은 그것을 이용한 기업인들과 정치인끼리 정치자금을 대가로 서로 봐주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일한은 성격상 당연히 정치자금을 주는 것을 거절했다. 이런 행동은 결국 좋은 먹잇감이 될 수 밖엔 없었고 유한양행은 세무조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국세청으로부터 강도높은 세무조사를 여러 차례 받았다. 처음엔 예고하고, 다음엔 불시에 조사하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유한양행을 조사했으나, 당시 세무조사원이 "아무리 털어도 먼지가 안 나는 경우가 있구나"라고 말할 정도로, 탈세 내역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 술 더 떠 굳이 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세금까지 자진해서 내는 이 회사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한마디로 세무사가 필요없는 기업.
게다가 제조한 약품들도 관련 당국에 갖고 가서 이상이 있는지 검사를 해 보니, 약들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오히려 제조 과정에서 재료의 손실이 생기는것을 대비해 원 재료를 손실분만큼 더 넣어 정량을 딱 맞춰 제조하고 있었다. 이에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상을 줘야 마땅하다고 해서 받았다고 한다. 계몽사 위인전(어린이 그림 전기) 유일한 편에는 박정희 정부 당시 조사원이 엄격하고 공정한 세무조사를 했다고 하여 해외 여행 포상을 받았다는 얘기가 쓰여 있으며,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씽크빅)에서도 비슷한 언급(다만 여기서는 1계급 특진)이 된 걸 보면 사실로 추정된다. 유일한의 남동생인 유특한이 따로 차린 유유제약도 형처럼 모범 경영을 실천했다고 한다.
참고로 세무조사는 일제 말기와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도 벌어진 것이 처음이었다. 휴전 후 이승만이 같이 정치를 하자고 한 제안을 유일한이 거절했으니, 이미지 정치에 목숨을 거는 이승만이 당연히 고운 눈으로 볼 리가 없다. 유일한 박사의 후원자가 박용만이었고, 유일한 자신이 외교론을 좋지 않게 봤으니 이승만이 음해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하지만 이승만도 세무조사 결과를 보고 엄청나게 당황했다. 그러나 유일한의 은행 예금을 강제로 압수해서 써먹는 식으로 끝내 압수하고야 말았다고 한다. 목적은 다르지만 같은 세무조사인데 결과는 이렇게 되어버렸다.
1969년 노환으로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 경영인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하였다. 당시 조권순 전무에게 경영권을 승계했는데, 이 전문경영인 제도가 실시된 건 대한민국에서 유한양행이 사실상 최초라고 한다. 1971년 3월 11일,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노환으로 타계하였고 유한공고에 안장되었다. 죽기 전에도 유한재단을 통해 유한공고와 유한대학교를 설립했으며, 연세대병원(현 세브란스병원)에도 주식 12,000주를 기부했다. 기부조건으로 주식을 의학과 연구 교육을 위한 활동에만 쓰라고 못박았다. 이는 세브란스 병원이 현재의 대형병원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세우기 전에 에비슨 박사로부터 "세브란스에서 일해 보겠냐"는 제의를 받았던 인연이 있었다.
이 경영권 인계에도 일화가 있는데, 1969년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던 아들 유일선 이 한국으로 와 유한양행 부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유일한 회장은 처음부터 아들이 회사에 취임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는데, 임원진들이 유일한 회장에게 록펠러, 포드 등 해외기업의 2세 경영권 인계사례를 그에게 여러차례 보여준 끝에 결국 유일선 의 부사장 취임을 승낙했다고 한다.
그러나 변호사 출신의 유일선을 처음부터 좋지 않게 본 유일한 회장은 결국 의견 차이가 벌어졌다. 유일한 회장의 회고에 의하면, 유일선은 부사장 취임 후 오직 기업의 성장에만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기업인으로써 전혀 틀린 자세는 아니지만, 평생 국민건강, 나라를 위해 살아온 유일한 회장의 입장에서 아들 유일선의 이러한 의견은 그의 신념과 충돌이 빈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회사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해고했다고 한다.
이후 당시 유한양행에서 근무했던 연만희와 대화에서 유일한 회장은 연만희에게 "내가 살아 있을 때 다 정리하고 나가야 (유한양행이) 영원히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는 거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을 비롯한 일가 친척들을 모조리 유한양행에서 해고하고 주식도 처분해서 유한양행 경영에 전혀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이 유한양행의 전문경영인 제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이 전문경영인 임명도 관례에 따라 모두 내부승진으로 행하고 있다. 그래서 역대 유한양행의 CEO들은 모두 경력이 유한양행 평사원부터 시작하였다. 2017년 기준 현 CEO인 이정희 대표도 1978년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인물이다.
묘소는 유한공고 교내에 있다. 여기에는 유일한의 딸인 유재라의 묘소도 있다. 유재라는 유한공고 내에 있는 묘지 주변의 땅을 상속하긴 했는데, 이는 땅을 '유한동산', 즉 공원으로 만들어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유재라 본인도 1991년 미국에서 죽기 전에 모든 재산을 유한재단 측에 기부했다. 역시 부전여전, 호부호녀.
3. 형제 관계
본인이 은퇴하기 전 자신의 혈연, 친척들을 전원 회사에서 해고했다. 가족들 때문에 회사에 파벌이나 알력 다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이유였으며, 본인 선에서 정리해야 유한양행을 전문경영인이 이끌어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이는 지금의 대한항공 사태를 볼 때 참으로 빛나는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유일선과 유특한이 유일한 박사를 상대로 한 소송을 걸었는데, 소송의 내용이 '퇴직금 반환 소송'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본인들이 받은 퇴직금이 너무 많다고 판단해 회사에 전액을 반환하려고 소송을 건 거다. 이 때문에 이 소송을 맡은 판사가 "세상에 이런 집안이 있나?"라고 경악했다고 한다. 이후에 타 재벌들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보면 판사가 신기해할 만도 하다.
실제로 유유그룹의 창업주이자 남동생인 유특한에게 "너도 나처럼 전문 경영인을 들이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권유하자 꽤나 망설인 유특한이 "형님, 죄송합니다. 저는 그릇이 작아서...''라고 했다. 유일한은 "하긴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지. 적어도 친일파만 안 된다면 말이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여기서 뜬금없이 친일파 얘기가 왜 나오냐면, 후술하겠지만 동생 중 한 명인 유명한이 일제강점기 때 친일 행위를 했던 것 때문이다. 저런 말을 꺼낸 것으로 보아, 유일한에게 평생 한이 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계몽사에서 발행한 위인전에는 1954년에 유특한이 "유한양행을 아예 '유한그룹'으로 기업 집단화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해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유일한은 "쓸데없이 확장하는 것도 좋은 게 아니다"라며 유특한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다만 유한양행에서 분리된 후에도 유일한과 유특한은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 유유그룹이 만든 비타엠과 비나폴로도 유일한의 조언을 듣고 지은 약품명이다.
형이 너무 뛰어나서 그렇지, 동생인 유특한도 성공했고 존경받을 만한 기업가이다. 유특한은 독립운동이나 미국 유학 등등 여러 가지 사정들로 형이 잠시 기업을 떠나 있을 때 그 자리를 대신해서 유한양행을 맡아 경영했으며, 본래는 1941년에 설립한 유한무역의 대표였다. 유일한이 친족, 혈연을 전부 퇴사시킬 때 유한양행에서 유한무역의 분리를 선언하고, 1957년에 유한무역을 제약 업체인 유유제약으로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유한양행과 달리 유특한의 후손들이 유유제약을 운영하고 있지만, 성실하게 기업을 꾸리고 있다. 기업이 안정화될 때 즈음인 1975년에 기업 공개를 하고 상장했으며, 유특한 본인도 역시 경영에서 은퇴하고 죽기 전에 유유문화재단을 설립해 형처럼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후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형님을 따라서 유한양행만큼은 아니지만 모범 경영을 원칙으로 유유그룹을 발전시켰으며, 그 때문인지 유유제약은 창업 후 단 한 번도 노사분규가 없었다고 한다. 그도 전두환과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정치 자금을 안 냈다. 동명이나 국제처럼 적게 낸 것도 아니고, 형과 마찬가지로 아예 한 푼도 안 냈다. 이러니 전두환이 열받아 동명그룹, 국제그룹처럼 무너뜨려 버리겠다고 불시에 세무조사를 했지만, 유한양행처럼 너무 깨끗해서 당황하고 말았다. 결국 당국이 제 풀에 지쳐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유일한 박사에게도 가족사의 어두운 면이 하나 있는데 바로 위에 언급된 또 다른 동생 유명한. 유일한이 미국 유학 중 독립운동에 참여할 당시 이 사람은 친일파가 되어 애국심이 투철했던 자기 형제들과는 완전히 딴판인 행보를 보인다. 그래서 형님인 유일한 박사와 동생인 유특한 회장이 유명한과 절연해 버렸는데, 이 때 한 말이 "나는 동생 유명한은 둔 적 있어도 일본 놈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 博, 유명한의 창씨개명)라는 놈은 모른다!"였다. 결국 그는 한국전쟁 때 사망했다. 유특한도 창씨개명을 했지만 그는 일본 유학이라는 특수한 경우였다. 안 하면 유학이고 뭐고 없는 상황이니... 후일 많이 후회했을 것이다.
4. 성씨
참고로 실제 성은 '류'씨(버들 류)라고 한다. 그래서 원래는 류씨로 하는게 맞지만 우리나라 행정상 공문서에 류씨를 유씨로 기록하던 관례로 학교다닐 때부터 성인된 이후까지 유씨로 계속 등록되어 와서 본인도 그냥 유씨로 살았다고 한다.
5. '유산'
중고등학교 일부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로, 유일한 회장이 손녀 유일링의 등록금만 제외하고 자기 재산을 기부해서 나온 액수는 토탈 407억 원이다. 뭐가 이리 적은 줄 아는데, 1971년 시점에서 407억 원이다. 2018년 7월 9일 시점에서도 407억 원이면 돈 걱정이 없는 수준이다. 물가 상승률을 따진다면 6천억이 넘어가는 거금이다. 6천억이면 평생 무직자로 지내도 다 쓰지 못할 정도로 많은 돈인데, 이거를 사회에 헌납한 셈이다. 참고로 당시 시내버스 요금이 10원, 라면은 20원, 짜장면 60원, 커피 60원, 담배는 60~100원, 쌀 40kg가 2,880원(한 가마에 8,000원)이었다. 라면은 좀더 자세하게 알아보면, 분식집에서 30원, 슈퍼에서 개당 18~20원이었다. 이런 생필품 물가로만 따져 본다면 100배 정도의 가치 즉 4조가 넘는 금액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잘 알려지지 않는 사실이지만, 더 감동적인 건 유일링의 아버지인 유일선은 이 재산마저 거부하려고 했다. 유일선이 "아버님은 예전에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라고 하신 적이 있는데 만약 제가 손녀의 학자금 명목이라는 이유로 1만 달러를 받으면 세상이 저를 욕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이렇게 받은 손녀의 등록금도 그나마 반만 쓰고 남은 돈 전부를 사회에 환원했다. 그야말로 호부호자.
또한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내에 있는 묘지 주변의 땅을 상속하긴 했는데, 이는 땅을 '유한동산', 즉 공원으로 만들어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유재라 본인도 1991년 미국에서 죽기 전에 모든 재산을 유한재단 측에 기부했다. 역시 부전여전, 호부호녀.
그의 생애와 행보를 보면 의외의 일이긴 하나 작곡가 안익태와 친분이 있었다고 하며, 윤치호의 아들과는 대학 동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유일한이 안익태와 윤치호에게서 일정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는 추측이 가능해 연구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유일한의 생애를 본다면, 이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제한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실제로 이들이 친일파로 돌아서자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6.1. 공익, 신용, 정직
유한양행을 경영 중이던 일제강점기 때 당시 영업 담당을 맡고 있던 전항섭이라는 사람이 만주 시장 조사 후 만주에서 헤로인, 모르핀, 아편이나 암페타민 계열의 마약류의 거래가 많은 것을 보고 유일한 박사에게 유한양행도 마약류를 판매할 것을 제안하자 그는 국민들에게 해가 될 것이라며 단번에 거절했고, 전항섭은 그 즉시 해고당할 뻔 했다가 자기 발언에 대해 사죄한 뒤 간신히 영업 담당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유한양행이 주식회사로 전환되자 전무로 승진되었다. 이 일화 내용이 진짜가 맞다면, 전항섭은 하워드 고와 헤럴드 고의 외조부이자 전인범의 조부인 사람이다. 헌데, 유일한 평전(조성기 저)에서는 다른 인물이 그러한 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것으로 나와 있다.
이 일화 말고 하나 더 중요한 일화가 있다. 국민들의 비타민 섭취를 걱정한 그는 당시 비타민 영양제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1961년 동아제약이 박카스를 출시하면서 공전의 히트를 치자 다른 제약업체도 따라서 드링크제를 만들기 시작했고, 결국 유한양행은 제약업계 1위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이 때문에 주주총회에서 유일한 회장에게 "우리 회사도 드링크제를 만들어서 팔아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그에게 의견을 제시했지만, 유일한 회장은 "설탕물 같은 드링크제를 약이라고 속여 팔란 말인가?"라는 말로 주주들의 의견을 기각했다고 한다.
당시 박카스에는 카페인, 타우린, 비타민 성분이 첨가되어 금방 피로가 싹 가시게 하는 기분이 들어 인기를 끌었는데, 유일한 회장은 "이 박카스를 포함한 모든 드링크제는 인체의 전반적인 에너지를 향상시키는 게 아닌, 순간적으로 활력이 솟는 느낌만 주는 제품 같다"라고 생각해서 드링크제 개발을 안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출시된 제품이 지금도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비타민 영양제 삐콤씨다. 그 이후로도 알약, 주사제 형태로만 약품을 개발해 왔다가 1989년에 '맥생', 1992년에 소화제 '생위천', 2013년에 '내일엔'이란 이름으로 드링크 분야에 진출했다(현재는 '내일엔'만 판매 중이다).
여러 위인전을 보면, 유일한은 약품 제조에 필요한 원료들의 품질을 살펴보면서 어떤 것을 이용할 지를 정했고, 비타민제에 필요한 원료가 모두 떨어지자 해당 생산라인을 원료 수급이 완료되기 전까지 가동 중단했다고 한다. 원래 생산 라인이라는 게 구조상 생산 도중에 정지를 시키면 무조건 회사에 손해가 나기 마련이고, 그 원료가 떨어져도 해당 약에 미미하게 영향을 주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도 바로 중단해 버린 것이다. 그만큼 사용자의 보건과 안전을 생각했고, 그렇기에 세무조사 때 검사 당국에 유한양행의 약들을 샘플로 검사해 보아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유한양행 설립 후, 자기 회사의 약이 필요할 때마다 자신이 설립한 회사의 약임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자기 돈을 내고 약을 사먹었으며, 약을 사려고 가격을 물어보는 중에 '사장님이라 그냥 가져가셔도 된다'라고 말하는 종업원을 혼낸 일화가 있다.
양화대교의 건설과 얽힌 이야기가 있다. 양화대교를 건설하고 다리와 직결하는 도로를 만들기 위해 토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가격 문제로 정부와 지주들 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이 때 유한양행도 도로 건설에 필요한 토지를 일부 소유하고 있었는데, 해당 실무를 보던 직원이 주민들 편에 서서 가격을 높게 올린 것을 안 유일한이 "국민들이 이용해야 할 건설 사업에 훼방을 놔서 되겠냐"며 직원에게 일침을 가했고, 결국 해당 직원은 유일한의 명으로 정부가 제시한 가격에 토지를 매각했다. 이로 인해 다른 지주들도 비슷한 가격에 토지를 매각했다고 한다. 실미도 사건 약 2주 전에 발생한 광주대단지사건과 비교해 보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일화다.
6.2. 기업 경영
유한양행 초창기에 신경 썼던 부분이 약품의 케이스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기차역도 없는 도시와의 왕래가 어려운 지역에서 의약품을 받기를 원하는 곳이 많았고, 이 때문에 열차에서 던지더라도 깨지지 않는 병과 케이스를 고안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라초이 식품 회사를 운영했을 때도 숙주나물을 저장할 수 있는 통조림을 고안한 것과 비슷한 케이스. 여러모로 미국에서의 회사 운영 경험이 아이디어가 된 셈이다.
일부 위인전에서 기술한 바로는, 시골의 병원에서 급히 수술을 해야 하는데 혈청이 부족하자 유한양행에 문의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골이 워낙 깡촌이라서 철도역은 있지만 비정차 철도역이라 짐을 내려놓는 게 불가능했는데, 유일한 박사가 혈청을 깨지지 않도록 단단히 포장해서 기관사에게 "XXX역에 환자가 있는데 혈청이 꼭 필요하다. XXX역을 지날때 던져달라."라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실려있다.
근로기준법을 다른 기업인보다 철저히 준수했다고 한다. 회사 직원들에게 주었던 월급의 액수가 상당히 높다. 유일한 박사의 이 의지는 그가 죽고 난 뒤에도 유한양행에 계속 이어져 오고 있으며, 심지어는 대한민국의 제약 기업 중 6,330만원으로 평균 연봉 1위를 기록했다.
6.3. 세금
세금 납부에 대해, "소방관들에게 불을 꺼 달라는 권리는 이들을 운영해야 할 금액을 지불하는 의무에서 시작된다"며, "탈세하지 말 것"이 평전(조성기 저)에 기록되어 있다. 유한양행에서 국세청에 세금 신고를 하는 직원이 날짜를 착각했다가 뒤늦게 신고를 하여 벌금을 피할 수가 없었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헌데 매번 기한을 지키던 유한양행이 늦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국세청 직원이 기다려 줘서 세금 납부를 잘 마쳤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유일한은, 매번 제 날짜에 법인세를 신고해 왔다는 것을 기특하게 여겨, 해당 직원에게 보너스보다 더 큰 위로금과 상여금을 직접 전달했다.
2015년 1월 10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땅콩 회항 등의 갑질 사태를 다루는 말미에, 유일한의 유언장과 털어도 먼지 안 나던 세무조사 일화를 소개했다. 나중에 제작진이 유일한의 가족을 만나려고 유한양행에 연락해 보았지만, "회사와 관계를 맺지 않아서 연락처를 모른다"는 말은 이날 방송의 백미였다.
하필 이날 방송에 나온 작자들이란 게 백화점 진상 모녀라든지, 조현아라든지, 김승연과 그 아들이라든지 해서 유일한과 더 비교된 상황. 덕분에 그것이 알고싶다가 방송된 토요일 자정부터 일요일 하루 내내 포털 검색어에 유한양행과 유일한이 실검 순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즉, 최소 1990년부터 이 방송까지 유일한 관련 방송 관계자들은 따로 가족들 찾기 위한 전화를 했다는 점이다.
7. 여담
실미도 사건에서 중앙청으로 버스를 몰고 돌진하던 684부대원들이 자폭한 장소가 현 신관 옆에 있던 유한양행 본사 앞이다. 그 사건이 일어나던 해에 유일한이 사망한 것에다가 20년 뒤에야 알려진 OSS가 추진한 국내 침투계획에 요원으로 참석한 것이 살아 생전에 알려졌다면, 이를 연관시킨 해석들이 나왔을 가능성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회사 이름인 유한양행의 양행이 올바른 행동이란 뜻이다'라는 설이 있는데, 바른 행동은 양행(량행, 良行)이고, 유한양행의 양행은 양행(洋行)으로 '외국과의 무역 거래를 중심으로하는 기업'이라는 뜻의 한자어로, 같은 단어가 아니다.
이름 때문에 Dr. Only One 드립이 많이 나오는데,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를 들을 만한 위인이다.
다른 한편으로 영어 이름 "일한 뉴(Ilhan New)"를 보면 새로운 대한을 바랐다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다.
유한양행 또는 그 관련사(유한킴벌리 등)에서 부도덕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나오는 말이 '유일한 박사 저승에서 통곡하신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