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를 눈감아 주는 곳에 희망이 없다는 말은 이 시대에 맞지 않는 것으로 들린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비리를 눈감아 주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곳이 있다. 놀랍게도 그곳이 바로 교회다. 어느 곳보다 비리가 발붙여서는 안 되는 교회에서, 도덕과 법의 기준이 높은 곳에서 비리를 눈감아 주려고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한때 대한항공사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항공사의 부사장이 그 회사의 여직원이나 사무장에게 행패를 부렸다는 것은 큰 비리나 범법적인 일이라고 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관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갑질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전에는 그냥 지나치던 윗사람이나 가진 자들의 행패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항공사의 부사장은 자신의 그러한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아마도 그러한 언행이 거의 습관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회사의 직원들도 그러한 행패를 그러려니 하고 참고 살아왔다. 사무장이 부사장의 명령에 따라서 항의 한 마디 하지 않고 자기가 지켜야 하는 비행기에서 내린 것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언론에서 그 사실을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대한항공사 안에서 일어났던 비인간적인 언행이 비리로 변했다. 조현아 씨가 국토부에 조사 받으러 갈 때 여러 명의 항공사의 직원들이 동행하고, 심지어 화장실 청소를 지시했다든지, 조사 받는 현장에 직원들이 동석했다는 사실에서도 부사장을 하늘처럼 떠받들지 않으면 안 되는 회사의 분위기가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언론에서 그 사실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러한 관행이 비리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자 조현아 씨 측에서는 그러한 비리를 은폐하려고 했다. 만약 아무도 지적하지 않고 눈감아 주었더라면 검찰에서도 별로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을에 대한 갑의 횡포가 비판의 대상이 됨으로써 앞으로 그런 횡포가 줄어들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비리를 드러내고 비판하는 곳에 희망이 있다. 민주국가의 장점은 심지어 대통령까지도 문제가 있다면 국민이 그 문제를 비판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현재 박근혜 대통령의 소통 부족이나 국정수행에 대해서, 청와대 비서관실의 문제에 대해서까지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개선책을 제시하고 있다. 정치권에 대해서 아무도 그 잘못을 말할 수 없다면, 모두 그 비리를 눈감아 준다면 그러한 잘못과 비리가 시정될 가망성이 없다. 우리는 여당이 특히 국정감사장 같은 데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행정부의 들러리 노릇을 하는 것을 보면서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하는 때가 많다. 독재정권이 부패하거나 비인간화하는 것은 무조건 지도자를 추종하게 만들면서 비판하는 목소리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그곳에는 희망이 없다. 요즘 종북 논란의 대상이 된 황선이나 신은미의 경우에도 그들의 행적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들은 기소되지도 출국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국정원이나 검찰 당국의 미온적인 태도를 보면 종편에서 계속 그들의 언행을 비판하지 않았더라면 한동안 지켜보고만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종편을 사법당국에 고소한 것을 보더라도 그들의 문제를 들추어내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그들의 종북적 언행을 제재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비리를 드러내는 것을 꺼리면서 눈감아 주려고 한다. 오래 전부터 한국의 대형교회의 비리가 널리 알려져 왔다.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비리가 자행되는 것은 실상 해당 교회의 장로들과 교인들이 그 비리를 눈감아 주고 묵인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비리에 연루된 어느 목사는 설교단에서 공공연하게 “사람들이 나를 소재로 해서 엉터리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내 설교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있는 한 나는 설교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목사가 법정에서 실형을 받았는데도 그 사람이 연관된 비행이 허무맹랑한 소설이란 말인가? 교인들이 그 목사의 비리를 눈감아 주면서 아멘을 외치는 한 그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찾아볼 수 없고 그런 교회에는 희망이 없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무슨 소용인가? 죄에 물들었던 소돔과 고모라는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망하고 말았다. 어느 존경 받는 목사의 교회에 심각한 재정적 비리가 생겨서 그 소문이 퍼져 나갔다. 그러자 어느 기자가 그 문제를 취재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 비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한 장로가 그 기자에게 그 사건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런데 기자가 그 사건을 기사화하자 그 교회의 다른 장로들이 기자를 만나서 회유했다. 그 기자가 장로들에게 그러한 비리가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면 장로들이 나서서 시정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장로들은 그러한 이야기가 밖으로 나가면 목사와 교회에 치명적인 일이 되기 때문에 덮어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 기자가 굽히지 않자 교회 측에서는 고발하겠다고 나섰다. 궁지에 몰린 기자는 자기에게 정보를 제공한 장로에게 법정에서 증언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 장로는 법정에 나가서 증언까지는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결국 그 기자는 허위 기사를 쓴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장로들이 목사와 함께 비리를 저지르고 눈감아 주는 곳에서 비리는 더욱 양산되게 마련이다. 교회가 대형화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교인들이 많으면 돈이 쌓이게 되고 돈이 쌓인 곳에는 부패의 균이 들끓게 된다. 교회가 대형화한다는 것은 교회가 그들이 가진 재물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며 자신을 내세우려는 담임목사의 명예욕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돈이 많은 부자 청년에게 가진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돈이 많으면 부패하게 되기 때문이다. 교회에 돈이 많다는 것은 재물을 천국에 쌓아두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새로운 교회를 세운다든지, 미자립 교회들을 넉넉하게 돕는다든지, 선교사들을 파견한다든지, 자선단체들을 설립한다든지,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다든지, 교회가 돈을 쓸 곳은 아주 많다. 그렇게 돈을 쓰다 보면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모자라게 마련이다. 그렇게 돈을 쓸 때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된다. 교회를 오천 명 혹은 만 명 교회로 키우면 재물이 쌓이게 되고 그 재물은 결국 죄를 불러온다. 그리고 그 돈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비리를 아무도 드러내지 못하게 입막음을 한다면 그 돈이 얼마나 더 큰 비리를 낳겠는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되어 있다. 사회에서는 비리를 드러내고 그런 비리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개선해 나가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비리를 눈감아 주고 덮는다면 그 교회는 사회보다 못하다. 그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 되기는 고사하고 세상을 오염시키게 된다. 성경에서 세상과 짝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악에 물들지 말라는 말이다. 성경에서는 세상에서 내세우는 법적인 죄보다 한 차원 높은 도덕적인 죄까지 범하지 말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는 것 자체가 음행하는 것이라고, 형제를 욕하고 미워하는 것이 바로 죄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교회에서 비리를 눈감아 준다면 그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회에서 척결하려는 비리를 교회에서 방관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색해지지 않는가? 이렇게 답답한 한국교회에 김재환 감독의 <쿼바디스>는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김 감독은 사랑의 교회,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비롯한 한국 대형교회들의 문제점들과 비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그 영화에서 그는 대형교회가 기업체를 운영하면서 일으키는 사회문제, 화려한 초대형 교회 건물 신축, 대형교회 목사의 재정적 비리, 한국을 대표하는 목사들이 앞장서고 있는 교회 세습, 목사들의 성적 타락, 그리고 대형교회가 소규모의 지역교회에 미치는 악영향 등을 폭로하고 있다. 언론이 이번 대한항공사의 비리를 드러내면서 그러한 문제점을 시정하려고 한 것처럼, 김 감독이 교회의 반대를 예상하면서 돈이 되지 않는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 것은 한국 대형교회의 비리를 폭로함으로써 한국교회가 개선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교회언론회’라는 단체에서 이 영화를 “반 교회적이고 반 기독교적인” 영화로 규정했다. 그리고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CGV에 이 영화를 상영하지 말라고 공문을 보내면서 이 영화를 상영한다면 영화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뿐 아니라, 중요 교단들과 연합단체도 동참해 달라고 말했다. ‘언론회’라는 이름을 가진 이 단체는 언론이 해야 하는 비리를 비판하는 일과는 반대되는 일, 비리를 감싸는 일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38개 교단연합체이며 보수교단 쪽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교회를 옹호해 온 단체다. 그들은 무조건 교회를 감싸기만 하면 교회를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무엇이 교회를 위한 것인지를 모르는 우매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대형 영화관들에서는 <쿼바디스>가 상영되지 않았고 소형 예술 영화관에서만 상영되고 있다. 지금까지 이 영화를 관람한 관객은 1만 명이 조금 넘는다고 하는데, 이 숫자는 한국 개신교인의 0.2%를 넘지 못한다. 한국 대형교회의 비리를 드러내는 이 영화의 관객 수가 이렇게 적은 것은 ‘한국교회언론회’의 조직적인 방해 공작 외에도 목사를 비방하거나 비판하면 벌을 받는다는 교인들의 생각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목사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목사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목사에게 해를 끼치면 벌을 받는다고 교인들을 세뇌시켜 왔기 때문에 신실한 교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목사의 비리를 눈감아 왔다. 목사의 잘못을 비판하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은 아주 널리 퍼져 있다. 그래서 교인들은 <쿼바디스>가 목사들의 비행을 폭로하는 영화라는 말을 듣고 목사를 비방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그 영화를 보러가지 않았다. 이렇게 조직적으로 그리고 교인들이 교회의 비리를 눈감아 주는 곳이 개선될 수 있겠는가? 결국 비리의 온상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 곳에는 희망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고 비판하는 것을 금했다고 성경을 인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5절까지의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비판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는 사람의 비판, 즉 남의 흠을 찾아 지적하는 비판이다. 비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흠 잡기 위한 비판이 있는가 하면, 개선을 바라는 비판이 있다. 여당과 야당 사이에서 일어나는 비판에서는 서로의 흠을 잡기 위한 비판을 흔히 본다. 그러나 대한항공 회항 사건이나 정부에 대한 비판은 개선을 바라는 사람들의 비판이다. 김재환 감독이 만든 <쿼바디스>는 한국교회의 개선을 위한 애정 어린 비판인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율법에 억매인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행태를 비판하시면서 진정한 복음을 선포하셨고 개혁자들은 부패한 중세교회를 비판하면서 참다운 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이제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교회가 부패의 늪에 빠져 있는 때에 김 감독은 부패한 한국교회를 비판하면서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복음 위에 서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가 계속 교회의 비리를 눈감아 준다면, 한국교회는 결국 죄 불감증에 걸렸던 중세교회처럼 되고 말 것이다. 중세교회에서는 독신생활을 해야 하는 감독들이 첩을 두고 사생아들을 낳았다. 고아원은 사제들과 수녀들 사이에서 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중세의 수녀원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감독들은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서 성직을 매매하고 온갖 비리에 관여했다. 성당을 대대적으로 건축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판매했고 그 면죄부 사건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교회 역시 죄 불감증에 감염되어 가고 있다. 그것은 대형교회에서부터 시작한다. 교회를 대대적으로 짓기 위해서 엄청난 빚을 지고, 교인들에게 지나친 헌금을 요구함으로써 교인들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게 만든다. 그렇게 무리해 가며 교회건물을 지어놓고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셨다고 선전한다. 대형교회들에는 헌금을 관리하는 은행지점들이 들어와 있다. 혹은 교회가 기업체를 운영하는 등 재산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성적으로 타락한 목사들이 자주 언급된다. 그리고 성직을 대물림하고 있다. 분명히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의 제자를 자처하는 목사들이 그리고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해서는 안 되는 죄다. 그런 것들은 인간적인 욕심이, 물질적인 탐욕이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한국교회가 죄 불감증에 물들어 가고 있는가? 영화 <쿼바디스>에서 기자가 어느 목사에게 그렇게 비리를 저지르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묻자 그 목사는 이미 용서받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김 감독은 한국교회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천국의 복을 강조하면서 지옥의 벌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부흥회에서 자주 지옥의 꺼지지 않는 유황불을 언급했지만, 요즘 부흥회는 만담을 들으면서 웃고 즐기는 개그 콘서트 장소가 되었다. 부흥강사들이 흔히 말하는 것은 목사에게 순종하면 복을 받고 주님의 은혜로 죄인 된 우리가 모두 구원을 받았으니 감사하자는 것이다. 목사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은혜의 시대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가르친다. 계명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죄의식이 있을 리 없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은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구원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구원파의 가르침에 접근하는 길을 열어 놓는다. 은혜에만 치중하고 삶을 외면하는 목사들은 죄 불감증에 빠지기 쉽다. 죄 불감증에 빠진 목사들을 존경하며 따르는 교인들의 죄의식이 무디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래서 교인들은 자기네 교회의 목사가 어떤 죄를 짓든지, 어떤 비리를 저지르든지 그런 것들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 목사를 통해서 은혜를 받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법정에서 실형을 받은 목사의 설교도, 간통을 일삼는 목사의 설교도 은혜를 받기 위해서 경청하면서 아멘을 외친다. 실제로 비리를 저지른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 먹칠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감도 없다. 비리 목사들은 한동안 쉬었다가 복귀하거나 다른 곳에 가서 다시 교회를 열기도 한다. 실형을 선고 받은 원로 목사는 설교를 쉴 만도 한데, 성스러운 강단에 올라가서 강단을 더럽히고, 여러 행사에 불려 다니면서 설교를 한다. 그를 초청하는 사람들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런 자리에 나가는 뻔뻔한 행태를 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할 목사들이 세상을 오염시키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세상을 더 어둡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는 때가 되었다. 사회인들은 목사들보다 죄의식이 강하다. 우리는 가끔 모범적인 공직자가 그의 비리가 드러나자 한강에서 투신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얼마 전에 지검장으로 근무하던 검사가 성적 문제로 말썽이 나자 사표를 내면서 사죄했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그리고 청와대 문건 유출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경위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유서를 써놓고 자살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목사들의 비리가 드러났을 때 자살을 했다든지 목사직을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자살하는 것은 큰 죄라고 믿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다른 때 느끼지 않던 죄 의식이 자살 문제에서만은 강하게 작동하는 모양이다. ‘한국교회언론회’에서는 <쿼바디스>로 인해서 “한국교회 전체가 입을 이미지 손상”을 걱정하고 이 영화가 “젊은이들을 교회에서 떠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는 달리 교회의 비리를 눈감아 주어서 그 비리들이 시정되지 않는 한 한국교회 전체가 입을 이미지 손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며 특히 젊은이들은 사회보다 못한 교회를 등지게 될 것이 뻔하다. 비리를 저지르고도 공개적으로 사과할 줄 모르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문을 가로막고 서 있는 사람들이다. 어느 목사는 그의 비리를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뒷문이 열려 있으니 나갈 사람은 나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에 먹칠을 하는 이러한 지도자들을 저주하실 것이 분명하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 33). 서양의 교회는 교회 밖에서 불어오는 합리주의적 사고와 과학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해서 점차 문을 닫아가고 있다. 그 외풍이 이미 한국에도 불어오고 있고 갈수록 심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현재 한국교회에는 그러한 외풍보다도 내부에서 일고 있는 비리의 바람이 더욱 거세다. 외부의 바람을 막아내는 일도 어려울 판인데, 내부의 바람까지 거세게 불고 있으니 내외의 바람에 노출된 한국교회가 어떻게 이 어려움을 감당할지 참으로 걱정이다. 한국에서 가톨릭교회의 교인은 늘고 있는데 반해서 개신교회의 교인이 해마다 줄어드는 것은 현대인들의 합리주의적 사고 탓이라기보다는 교회의 부패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교회가 사회보다 낫지 않으면,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면, 누가 교회에 남아 있겠는가? 교회가 비리의 온상이 되어 가기 때문에 실망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난다. 비리를 눈감아 주는 곳에는 희망이 없다. |
첫댓글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5:13)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이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28, 31).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고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자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믿는다하면서 그의 계명을 무시하는 사람은 위선자이며 거짓말장이입니다.
지금 두레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뿐 아니라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성도들은 비리인지 아닌지도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의 말이 생각납니다. 이단이건 정통인건 재정장부를 감추는 교회는 이상한 집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재정장부를 감추는 것일까요? 헹정관은 왜 건축했고, 계단 공사는 왜 했으며, 두레학교 건물 건축은 무엇때문에 계획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럿듯 두레교회는 언제가 부터 건축의 소용돌이속에 넣여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제 성도들이 양해도 이해도 구하지 않고 일부 몇몇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두레교회의 현실이 개탄스럽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보다 목사를 신격화 하고 믿고 추종하는 자들이 참 많은것을 알게 되었을때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네요.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비리 문제도 큰 문제 이지만
이단 문제는
더 큰 문제 입니다
교회안에 예수님의 복음은 사라지고 담임목사가 예수님의 자리에 앉아 순진한 성도들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람인 담임목사의 말을 따르면 어떤일이 일어날까요?
조용하고 말씀 중심이었던 두레교회가 성도간에 분열되고 재정은 몇몇만 알아 집행하고 부교역자는 인권유린
당하며 부당하게 내침을 당하고 부모같은 선임 목사를 음해 비방하고 내사람들만 봉사직에 앉혀 담임목사만
따르는 공동체를 만들겠다고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라졌고 장로교회에서는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는 사상을 가르쳐 왔고 지도자로서는 부적절한 이단성이라 결론이 났어도 교계의 금권과 정치꾼들이 움직이고 일부 몰지각한
성도들의 행동이 진리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뿌리 내렸던 부패적 행태가 이번 두레교회의 이단적 행위와 교회의 분열을 어떻게 처리 하느냐에 따라 개혁교회로 나아가는 시금석이 될것입니다.
이단을 옹호 하는 자들은 누구나 이단 으로써 인정을 받으며 그래서는 안된다는 헌법 조항이 있습니다.
바로 알고 바로 교회를 세우는데 함께 기도하며 마음을 모아야 할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이단성입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이유 만으로 대한민국 법중, 그 어떤 곳에서도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는 이단을 치리해 주는 법적인 조항이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분별의 영을 가지고 싸워 이기고 지켜 나가야합니다
부모형제, 이웃까지도 몰라보는 무서운 독성을 가진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지켜내야 합니다
총회 헌법에는 이단에 대한 확실한 권징조항이 있지요.
법 보다는 교회를 지키는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안에 비리가 폭로되선 전도의길이 막힌다고들 하지요 하나님과 전혀관계없는 말을 하는군요 그비리들을 덮어줌으로 죄악의 온상이 되어버린 한국교회입니다 악취가 진동하는 교회가 되버린것입니다 목회자들을 탓하기에앞서서 성도들의 행위를 돌아보아야합니다 어떻게든 목사한테 잘보이고싶어서 아부하고 고자질하고 그런행위들속에 하나님은 보이지않고 목사들을 자신들의 마음한구석에 하나님으로 만들어놓았죠 아니라고 부인하고싶겠죠 그러나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들을 알수있습니다 이사모들의 행위를보면 알수있는 일입니다
비리를 눈감아주는곳에는 정말 소망이없습니다 이제까지는 은혜로 덮고 사랑으로 덮고 정말 좋아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리를 눈감아주고 이단과 화해하고... 정말 용납될수없는 언어입니다 용납되어져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이런생각이 듭니다 이단과 화해조정? 그래서 구원파도 통일교도 용납하고 옹호했단 말입니까?
종교계의 큰 문제는 실권자라 생각되는 사람을 추종하는 분별력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이다
이단이든 사이비든 교주에게 열광하며 따르는 무리ᆢ개념없이 맹종하는 무리가 있어서 문제다ᆞ항상 권력?을 따라 몰려든다
비리 저지르고,
이단을 옹호하는 장로,목사들...밝혀내서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합니다! .부산이든,
대구든, 경기도건, 충청도건,
쫓아가서 일인 시위라도 할겁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단의 작은 싹이라도 잘라버려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오염되어 있으면 과감히 도려내야 합니다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