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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스 10:1-17
1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2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3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4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
5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
6 이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일어나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니라 그가 들어가서 사로잡혔던 자들의 죄를 근심하여 음식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7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에게 공포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8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따라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의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리라 하매
9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들이 삼 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때는 아홉째 달 이십일이라 무리가 하나님의 성전 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큰 비 때문에 떨고 있더니
10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11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12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13 그러나 백성이 많고 또 큰 비가 내리는 때니 능히 밖에 서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이 일로 크게 범죄하였은즉 하루 이틀에 할 일이 아니오니
14 이제 온 회중을 위하여 우리의 방백들을 세우고 우리 모든 성읍에 이방 여자에게 장가든 자는 다 기한에 각 고을의 장로들과 재판장과 함께 오게 하여 이 일로 인한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나
15 오직 아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일어나 그 일을 반대하고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그들을 돕더라
16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그대로 한지라 제사장 에스라가 그 종족을 따라 각각 지명된 족장들 몇 사람을 선임하고 열째 달 초하루에 앉아 그 일을 조사하여
17 첫째 달 초하루에 이르러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의 일 조사하기를 마치니라
스 10:1-17 / [잡혼 청산] 에스라가 성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고백하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 다 함께 통곡하며 회개하였는데, 여인들과 어린아이들까지 모여 와서 아주 큰 무리가 되었다. 2) 이때에 엘람 가문의 스가냐가 온 무리의 대표자로 나서서 에스라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남자들이 이 지방의 이방여인들과 결혼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희망이 있습니다. 3) 이제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모든 이방여인과 그들이 낳은 자녀들을 내어 쫓기로 맹세를 합시다. 서기관께서도 우리에게 그와 같이 가르쳐 주셨고 우리 하나님의 계명을 존중하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하도록 권면하였습니다. 이런 경우에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4) 이 일은 서기관께서 하실 임무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일어나 율법에 따라 조치를 취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서기관님을 따르겠습니다!' 5) 이리하여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비롯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맹세를 시키자 그들이 모두 스가냐의 제안대로 하겠다고 맹세하였다. 6) 그러고 나서 에스라는 성전 앞에서 떠나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이 쓰는 성전 곁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밤에도 그곳에서 묵었으나 무엇을 먹거나 마시지는 않았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지었다가 포로생활까지 하고 돌아온 자들이 또 죄를 지은 것을 생각하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7)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다에 공포하여 포로생활에서 귀향한 이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모이라고 하였다. 8)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장로들과 협의하여 벌칙까지 결정해서 공포하였다. `누구든지 3일 안으로 모이지 않으면 귀향민의 공동체에서 그를 쫓아내고 그의 모든 재산을 빼앗을 것이다.' 9) 그러자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이 모두 기일을 엄수하여 예루살렘에 집합하였다. 때는 ㄱ) 9월 20일이었다. 성전 앞 광장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백성은 사태도 심각한 데다가 억수로 쏟아지는 비때문에 모두 떨고 있었다. (ㄱ. 오늘날의 달력으로는 12월에 해당되는데, 이때에 유다에는 많은 비가 내린다) 10) 그때 에스라가 일어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이방여인들을 아내로 삼음으로써 여호와를 배신하고 이스라엘의 죄악을 더 높이 쌓았습니다. 11) 여러분은 이제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죄악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실천하십시오! 이 지방의 원주민들과 모든 관계를 끊고 이방여인들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어 돌려보내십시오!' 12) 그곳에 모인 무리가 모두 큰소리로 응답하였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13) 그러나 그들은 이런 제안을 하였다.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은 너무 많고 비도 와서 춥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한데서는 우리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런데다가 이 문제는 하루 이틀에 해결될 일도 아닙니다. 우리들 중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14) 그러므로 이제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만 이곳에 남아서 온 공동체의 위임을 맡아 이 문제를 처리하게 해주십시오. 이방여인을 아내로 데리고 사는 자는 누구나 지정된 시일에 자기 마을의 장로와 재판관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와서 민족 공동체의 위원회에 출두하여 이방인 아내 문제를 해결하게 하십시오. 우리 민족이 이 문제를 해결하여 정화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무서운 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갈 것입니다.' 15) 온 무리가 이런 제안에 찬성하였으나 반대자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일어나 반대 의견을 말하자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그들 편에 서서 지지하였다. 16) 그러나 대세는 이미 정해져서 귀환자들이 모두 대의원 제도를 찬성하였다. 이리하여 에스라가 모든 가문의 최고 어른들을 호명하여 이 문제를 위임하였다. 이 대의원들은 10월 1일에 첫 모임을 열고 그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17 그날부터 이방여인을 아내로 취한 남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와서 대의원 회의에 출두하였는데, 만 두 달이 지난 다음해 1월 1일에는 그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가 성전 앞에 엎드려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통곡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에스라에게 율법대로 행하겠다고 결단하였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1-4) / 에스라가 성전 앞에 엎드려 자기 백성들의 죄에 대하여 애통하며 회개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이때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통혼한 이방인 아내와 그 자식들을 다 내보내고 하나님과의 언약대로 이행하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에스라를 모든 일을 주도할 지도자로 추대하였습니다. 그들이 에스라의 영적 권위를 인정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에스라의 진심이 그들에게 그대로 전달된 결과였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5-16a) 이스라엘 백성들의 합의에 따라 지도자로 추대된 에스라는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습니다. 먼저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모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소집에 응하지 않을 경우는 재산을 몰수하고, 공동체에서 추방할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에 성전 앞에 모든 사람이 모였습니다. 에스라는 그 모인 자들에게 이방인과 통혼한 죄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통혼한 이방 여자들을 돌려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부분의 사람이 찬성하였으나 철저한 진상 규명을 위하여 우기 때이므로 시간을 두고 문제를 해결하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즉시 시행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으며, 이에 에스라는 즉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조사하기를 마치니라(16b-17) 에스라의 지시에 따라 이방인과 통혼한 자들에 대한 조사는 시월 초하루에 시작하여 그다음 해 정월 초하루에 마쳤으니 통혼자들에 대한 조사는 3개월이 걸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9월 20일에 모였으므로(9) 조사위원회가 구성된 것은 10일 후였으며, 조사는 그 기간 중 안식일을 뺀다면 75~76일 정도 걸렸을 것입니다.
적용: 에스라가 성전에 엎드려 회개할 때 그 영향이 온 백성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당신은 누구에게 영향을 받고, 누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서로 나누어 봅시다.
결혼을 앞둔 사람들이 겪는 심리적인 우울증인 매리지 블루(Marriage Blue). 결혼 준비 과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예측할 수 없는 앞날로 인해 혼란스럽고 불안함을 느끼게 되는데 남성보다는 여성들에게 더 많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사실 이러한 두려움은 결혼뿐만 아니라 새 학년이 올라갈 때, 새로운 직장에 적응할 때 등 다양한 상황에서 겪게 됩니다. 그러나 당장 이러한 변화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주선이 대기권을 벗어나 우주로 진입할 때 우주선의 외부 온도는 엄청난 공기 마찰로 섭씨 1,900도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영향으로 어떤 것보다도 강한 우주선의 외부는 검게 그을릴 정도입니다. 이처럼 환경의 변화를 겪을 때 우주선만큼 혼란스러움이 있을 수 있지만 이 과정이 지난 후에는 마침내 적응해 유유히 비행할 수 있습니다.
< 설 교 >
거룩한 공동체의 회개 운동
스 10:1-44 / 그레이스핵심강해
이스라엘이 오랜 세월 타국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갖은 수모와 멸시 속에 이제 겨우 사회적인 안정을 되찾았다고 나 할까 할 때에! 바로 이 같은 때에 바사왕 고레스를 하나님께서 움직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향으로 돌아 갈 것을 허락해 줍니다.(스 1:2-4)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는 귀향 바람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희비가 엇갈린 소식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너무나 반가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여기도 괜찮은데 하면서 바벨론에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은 사람도 상당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돌아 갈 가나안 땅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땅이요, 우리의 고향임에는 틀림없지만 주인을 잃어버린 땅에는 이미 이방인들이 들어 와서 살기 시작한지가 벌써 70년이 넘었습니다.<이 70년은 유다 왕 여호야김 3년째에 있었던 유다 백성의 바벨론 1차 포로 때(B. C 605년경)부터 고레스 조서가 있은 후 스룹바벨의 인솔하에 거행된 1차 포로 귀환의 때(B. C 537년)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미 그들의 땅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곳에 들어가서 그들을 내어쫓고 제 2의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두려움이 상당히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던지 바벨론에서 식민지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었는데 제1차 귀환은 B. C 537년에 스룹바벨을 통해서 49,897명(여자와 어린 아이 포함)이 돌아왔고, 그들이 돌아와 한일 중에 제일큰일은 예루살렘 성전 터 위 번제단을 찾아 여호와 하나님께 70년만에 제사 드린 일과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 한 일입니다. 이때가 B. C 516년이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파괴 된지(B. C 586년) 정확하게 70년만에 재건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으로 스룹바벨의 지도를 받으며 대제사장 예수아의 중보로 백성들은 여호와 신앙으로 회복되어 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스룹바벨도 죽고, 대제사장 예수아도 죽게 되자 그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지도할 지도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말씀의 뿌리가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다시 신앙이 해이해 지기 시작하였고, 옛생활로 돌아가 타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1차 포로 귀환이 이루어 진 이후 80년만에! 그리고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 된지 60여 년만(B. C 516년)인 B. C 458년에 바사왕 아닥사스다1세 때에 제2차 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때의 인솔자는 에스라였고, 약 1,754명(여자와 어린 아이 제외)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에서 올라 올 당시에 그곳에는 유대인이 약 2-300만 명 가량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사람들은 1차 귀환 때에 49,897명(여자와 어린 아이 포함), 그리고 제2차 때에는 1,754명(여자와 어린 아이 제외) 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예루살렘 귀환 운동에는 많은 시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안정된 바사 나라의 삶이라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운 성전 예루살렘 성전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올라갔을 것이고, 반대로 세상 바라보고 믿음 없이 사는 백성들은 그 땅에 안주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사 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격을 동일하게 주었습니다.(스1:3, 7:13) 그러나 2~300만 중에 5만 여명뿐입니다. 마22:14절에 "청함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돌아온 자들은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죄악의 도시! 우상의 도시를 떠나 고생이 되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고(히11:24-27), 주님을 섬길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시84:1-12) 이들을 보면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고! 그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놓고 뒤돌아보지 말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귀향 길은 멀고 험하였습니다. 그 귀향 무리들 가운데는 노약자도 있을 것이고, 아녀자, 어린이들도 있었습니다. 순전히 걸어서 가야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광야 길을 말입니다. 바사에서 예루살렘까지는 거리가 직선 거리로 800여km 정도이지만 실제 여행거리는 약 1,400km나 되었습니다. 그 노중에는 강도와 짐승의 습격도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출발하기 전에 아하와 강가(바벨론 시 북서쪽(도보로 8일 거리)에 위치한 아하와 강을 가로질러 유브라데로 흘러드는 "이스"강)에 모여서 출발 전에 금식 기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스8:15-23절)
왜냐하면 너무나 어려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에스라는 왕에게 청하기만 하면 도와 줄 보병과 마병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가 전에 아닥사스다 왕에게 말한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하나님을 자랑하며 영광 돌려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라 우리를 어떤 대적에게서도 건져 주실 것입니다"라고 하는 믿음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험난하여 위험한일이 도사리고 있다고 권력자 아닥사스다에게 병력과 마병으로 우리를 도와 달라고 하면 말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도와는 주겠지만 속으로라도 "너의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더니 거짓말이구나!"라고 말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에스라는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대신 우리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금식하면서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에스라로서는 마땅히 세상 권력자의 도움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었고 구하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끄러운 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한 손이 우리를 도와주시기만 의지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신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과연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와 주셔서 그 머나먼 여정 1,400km를 무사히 걸어 5개월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간증하기를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 지라"라고 스8:31에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스7:28, 스8:18, 스8:22, 스8:31) 우리도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와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제 2차 귀환 행렬은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참으로 80년만 입니다.(B. C 458년) 에스라가 돌아 와서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스8:33-35)
그러나 에스라 앞에는 충격적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에스라가 들어오기 전! 1차로 귀환한 사람들의 타락된 생활이었습니다. 분명한 지도자도 없이 살았던 그들은 율법에서 금하는 이방인과의 통혼을 서슴지 않고! 죄의식도 없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방인의 자녀들과 서로 혼인하지 말라고 율법에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들끼리 결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거역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생긴 것입니다. 더욱이 이렇게 죄를 짓는 일에 지도자들이 앞장을 섰다는 것입니다(스 9:1-4).
이 일에 연루가 된 자들의 이름을 모두 공개하였습니다. 이방 여인과 혼인한 유대인을 조사 한 결과 모두 113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전체 인구에 비하면 많은 숫자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개월 동안 철저한 조사를 거쳐 그 명단을 작성하고 공개했습니다.(스10:16-44) 그 명단 속에는 제사장 집안 출신이 4명(18절) 제사장이 13명(20-22절), 레위인이 10명(23-24절), 그리고 평민이 86명(25-44절), 도합이 113명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층이 24%나 차지하였습니다. 이방 여인과 혼인한 자의 1/4이 가장 성결하고 거룩해야 할 대제사장, 제사장, 레위인이었습니다.
이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철저히 조사해서 처리 한 것은 우리 공동체에 있어서 작은 죄가 얼마나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인지를 단적으로 교훈해 줍니다. 적은 누룩이 온 땅덩어리를 부풀게 하듯이 작은 죄가 온 공동체를 병들고 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고전5:6-8) 그래서 바울은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고 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기가 막혀 하나님께 울면서 옷을 찢으면서 회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회개 기도 중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불순종하다 이렇게 오랜 세월 수치와 조롱을 받고 멸시를 받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겨우 이제 회복이 되었는데 회복 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또다시 범죄 하느냐"는 것입니다.(스9:6-15) 스9:13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 보다 형벌을 경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이 백성은 더 맞아야 할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스스로 자책하면서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은 타락한 인생이요, 죄중에 살고 죄중에 죽을 소망 없는 인생임을 뼈저리게 느끼는 장면입니다. 때문에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붙잡아야 우리가 살고, 그의 보혈을 의지해서 천국에 들어 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10장에서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소집하였습니다. 강압적인 소집이었습니다. 스10:8절에 "만일에 오지 않으면 재산을 적몰하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쫓아내겠다"고 엄히 말했습니다. 그리고 회개 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회개하되 스10:11절 말씀과 같이 "이 땅 족속들과 이방의 여인을 끊어 버리라"고 에스라가 말할 때에 관련된 백성들이 "당신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그렇게 행할 것이라"고 하면서 회개했습니다. 현재 데리고 사는 이방 여인들을! 아내이든지, 며느리이든지 "다 돌려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공동체의 회개 운동입니다.
이 회개 운동에 동참 할 때에 많은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가정이 파괴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부부가 생이별을 하였을 것입니다. 부자가 그 혈족의 정을 끊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결하고 성결한 신앙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고, 제쳐두고 행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앞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이렇게 하나님의 일과 인간적인 정분이 서로 상충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일을 넘어선 인정은 오히려 해가 됨을 배우게 됩니다.
여러분 회개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행한 일에 대하여 슬퍼하고 뉘우치되 돌이키고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해서는 안될 일을 했으면 이제는 그 일을 버리는 것입니다. 얻어서는 안될 이방여인을 얻었으면 이제라도 돌려보내고 청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요즘 세상은 교인은 많은데 신자가 없고, 신자는 더러 있는데 제자가 많지 않고, 회개하는 사람은 많은데 죄에서 떠나고 삶을 바꾸는 참된 회개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인자가 세상에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눅18:8)라고 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이 같은 참된 신앙을 소유하셔서 늘 승리하시다 주님을 뵈옵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직도 소망이 있습니다
스 10:1-5 / 송기성목사(정동교회)
토마스 칼라일은 희망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인간은 희망에 기초를 두고 있는 존재다. 인간은 자기 소유를 다 빼앗길지라도 오직 희망만큼은 잃지 않기를 바란다.”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은 도리어 절망을 딛고 일어납니다. 오늘의 본문 에스라 10:1-5의 말씀이 그 실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사장 에스라는 율법에 능통한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왕의 신임을 받고 세상적 권세로 위임받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권세를 가지고 팔레스틴에 왔지만 당시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이다’(스 10:2)라며 희망을 북돋아 주는 말을 하였습니다.
‘아직도 소망이 있나이다’, 이 말씀이 제 마음에 큰 감동으로 와 닿았습니다. 수많은 학생들과 교사들과 시민들을 삼켜 버린 절망의 바다에서 소망을 건지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래서 더욱 ‘아직도 소망이 있습니다’ 라는 말씀을 절망하며 절규하는 사람들에게 외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스가냐가 아직도 소망이 있다고 한 데에는 그 만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그 근거를 생각하며 아직도 소망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1. 개과천선해야 합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죄를 자복하는 통회의 기도였습니다. 그러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였습니다. 남녀는 물론 어린 아이들까지 큰 무리가 에스더 앞에 모였습니다. 그들이 에스더 앞에 모인 것은 에스더와 더불어 통곡하며 죄를 자복하고 회개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백성들의 대표자인 스가냐는 에스라에게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아직도 이스라엘에게 소망이 있나니” (스10:2) 라고 하였습니다. 스가냐는 분명히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이스라엘에게 소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에스라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연대의식을 가지고 개과천선 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개과천선’, 그 사전적 의미로는 ‘뉘우침’(repentance), ‘허물을 고쳐 착하게 됨’, ‘인간개조’ (self reformation)라고 했습니다. 개과천선, 인간개조,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국가개조는 혁명보다 어렵다!!”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이는 국가개조는 인간개조 곧 개과천선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개과천선, 인간개조가 되어야 국가개조도 가능합니다. 에스라와 스가냐 등이 개과천선을 함으로써 그 민족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었던 것처럼 연대의식 연대책임을 갖고 눈물로 회개하며 기도하는 우리 각자와 민족에게도 아직도 소망이 있는 줄 믿습니다.
샤로트 엘리어트(1789-1871)의 이야기입니다. 32세 때 중병으로 기동조차 어려운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오빠도 목사였지만 그녀는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라며 매사에 불평불만 투성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친구인 말란(cesar Malan) 목사님이 그녀를 찾아 와 참된 생활을 권면했습니다. 그녀는 광기를 부리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오만한 행동을 후회하며 목사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나요?”하고 물었습니다. 말란 목사님은 “당신의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오면 됩니다. 주님께로 지금 나아오십시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샤로트는 ‘당신의 모습 그대로’ (Just like as you are.) 라는 말씀에 감동을 받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통회하였습니다. 그 이후 놀랍게 변화된 그녀는 ‘내 모습 그대로’ (Just As I Am) 라는 제목으로 찬송가 282장 찬송시를 썼고, 그것을 인생의 신앙 지표로 삼았습니다.
“큰 죄에 빠진 날 위해 주 보혈 흘려주시고 또 나를 오라 하시니 주께로 거저 갑니다“ (찬송가282장)
개과천선, 인간개조,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개조, 개과천선,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중심으로 통회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주님의 보혈로 모든 죄를 씻어 주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개과천선 할 때 인간개조는 물론 국가개조를 이루기까지 아직도 소망이 있는 교회와 국가로 세워지게 될 줄 믿습니다.
2.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는 에스라를 ‘내 주’라고 호칭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영적인 권위와 정치적인 권세를 아울러 지녔던 (스7:25) 에스라를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로 인정하며 존중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지도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스10:3)고 고백하였습니다.
율법에 충실한 제사장 에스라가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주요 목적 중의 하나는 백성들에 대한 율법 교육이었습니다 (스7:10). 당시 약 60년 전에 페르시아에서 1차 귀환한 자들은 귀환 직후에는 신앙생활에 열정과 헌신으로 임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의 열정과 헌신은 사라졌습니다. 대신 그들은 율법이 금지하고 있는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가증한 일을 많이 행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초기의 경건한 신앙을 회복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스가냐가 앞장서서 에스라의 교훈과 율법대로 행할 것을 하나님께 엄숙하게 약속하고 모든 이방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겠노라며 솔선수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 솔선수범이 있었기에 그는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에스라와 스가냐 등과 같이 솔선수범 하는 사람이 있는 한 그 가정과 교회, 나라와 민족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는 줄 믿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로 숨진 고 정차웅(17)군과 유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정군은 사고 당시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벗어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조끼도 없이 다른 학생들을 구하려고 물속에 뛰어들었습니다. 생일을 하루 앞두고 자신을 희생한 정군은 다섯 의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좌절과 절망, 비통과 원통에 빠져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정군의 아버지와 가족은 고려대 안산병원 장례식장 직원에게 장례용품 값을 대강 물은 뒤 “국민 세금으로 아들 장례를 하는데 어떻게 비싼 것을 쓸 수 있겠느냐”면서 수의와 관 등 모두 최하 등급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른 가족도 가장 값싼 것으로 하여 장례비를 줄였다고 합니다. 언론에서는 ‘그 아들에 그 아버지’라고 제목을 삼았습니다. 물론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기도 합니다.
솔선수범, 지혜자는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22:6)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라’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가르치라’ (Teach children how they should live.)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어떻게 사는 지를 보고 그대로 배웁니다. 최선의 자녀 교육은 바로 부모의 솔선수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솔선수범 할 때 자녀 교육의 성공은 물론 아직도 소망이 있는 가정과 사회로 나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3. 상부상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 의해 1차포로 귀환이 실시된 이후 약 60년 후에 에스라의 지도하에 2차 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고국에 돌아온 에스라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았습니다.그들은 에스라에게 배타적이었습니다. 에스라는 고군분투를 해야 할 처지였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물론 그의 권력으로 개혁을 추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엎드려 울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라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라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상부상조 하며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에스라를 도와 그와 함께 영적 부흥 운동을 일으킬 하나님의 사람들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스가냐였습니다. 스가냐는 그 이름이 ‘여호와께서 거하심’ 이란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거하시는 사람 스가냐는 에스라에게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스10:4)라고 하였습니다. 스가냐와 그의 말은 에스라에게 천군만마와 같았습니다. 에스라는 스가냐의 말대로 그의 책임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힘써 행하였습니다. 그는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스가냐가 제안한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다 에스라를 돕기로 맹세하며 상부상조를 하였습니다. 그런 상부상조가 있었기에 그는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상부상조 하는 사람이 있는 한 사람들은 자기가 행해야 할 책임을 따라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직무를 힘써 행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개인과 공동체에는 아직도 소망이 있는 줄 믿습니다.
2005년에 개봉한 조승우 주연의 ‘말아톤’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스무 살 자폐증을 가진 청년이 마라톤을 완주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자폐증을 가진 아들과 어머니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어머니 경숙은 자신의 아들인 초원이가 정상적인 아이들보다 달리기를 월등하게 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달릴 때만큼은 남들과 다르지 않은 아들 초원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다는 희망을 갖고 그가 잘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며 칭찬해 주고 훈련시킵니다.
영화 속에서 엄마가 “초원이 다리는?” 하고 물으면, 초원이는 “백만불 짜~리.”라고 대답합니다. 엄마가 또 “초원이 몸매는?”하고 물으면, 초원이는 “끝내줘요!”라고 대답합니다.
상부상조,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울 때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은 모세와 아론과 홀은 산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아론과 홀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로 하여금 그 위에 앉게 하고 모세의 손을 양쪽에서 붙들어 올려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물리치게 되었습니다 (출17:10-13). 패배를 면치 못했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고 승리가 있게 된 것은 그들에게 상부상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상부상조 할 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롬8:28) 하나님을 체험하며 어떤 역경 중에서라도 아직도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게 될 줄 믿습니다.
잠언 14:32에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의롭다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죽음에도 소망이 있으며, 질병과 실패, 좌절과 절망에도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은 웨슬리 회심기념주일입니다. 그는 당시 절망적인 영국에 아직도 소망이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을 힘 입어 개과천선, 솔선수범, 상부상조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영국에 아직도 소망이 있었던 것처럼 개과천선하고, 솔선수범하며, 상부상조하는 개인과 가정, 교회와 국가에는 아직도 소망이 있는 줄 믿습니다. 아멘!
선민의 거룩함을 회복하라
스 10:1-12 / 이수영목사
구약성경의 에스라서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했던 남왕국 유다의 백성을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키신 역사를 기록한 책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옛 남왕국 유다의 백성이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에서 놓여나와 고국 땅에 돌아가 그들의 민족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노력이나 투쟁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들 자신의 힘과 지혜로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에스라서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7:9),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7:28),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8:18),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8:31) 같은 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에스라서가 씌어질 당시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나타내는 말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다시 옛 유다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며 먼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새로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 백성 대신 들어와 살고 있던 이방 족속의 방해공작 때문에 성전 건축은 중단되기도 했었지만 하나님께서 새 패권국인 페르시아의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성전이 마침내 완공되고 봉헌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성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지만 성전건축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세우는 일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 예배의 회복이었습니다. 바른 예배의 회복이야말로 성전재건의 목적이고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재건의 본질인 것입니다. 이 일에 쓰임받기 위하여 준비되고 부름 받은 사람이 에스라였습니다. 바벨론을 정복하고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의 칙령에 따라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서 고국 땅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때로부터 약 팔십년이 지난 후, 예루살렘에 새 성전이 봉헌되고 약 육십년이 지나서 페르시아의 왕이 아닥사스다일 때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스7:1, 6). 에스라는 모세의 형 아론의 십육대 손(스7:5)으로 대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습니다(스7:6). 그는 율법을 연구하기만 할 뿐 아니라 그 율법을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한 학자 겸 제사장이었습니다(스7:10-12).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는 에스라에게 조서를 내리며 쓰기를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스7:14) 보냄을 받았다고 하여 그의 사명을 명시해주었습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은 재건되었지만 유다 백성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를 점검하도록 에스라가 보냄을 받았던 것입니다.
페르시아 왕은 에스라를 보내며 그 자신이 “이스라엘 하나님께 성심으로” 은금을 드렸을 뿐 아니라(스7:15) 에스라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바벨론 온 도”(스7:16)에서 얻을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의 “궁중창고에서 내다가”(스7:20) 쓰게 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유브라데 강 건너편 모든 창고지기에게 조서를 내리며 한 말을 들어봅니다: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가 무릇 너희에게 구하는 것을 신속히 시행하되 은은 백 달란트까지, 밀은 백 고르까지, 포도주는 백 밧까지, 기름도 백 밧까지 하고 소금은 정량 없이 하라. 무릇 하늘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삼가 행하라.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제사장들이나 레위 사람들이나 노래하는 자들이나 문지기들이나 느디님 사람들이나 혹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받는 것이 옳지 않으니라.` 하였노라.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스7:21-26) 이 조서를 통해 에스라는 단지 율법을 가르치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법관과 재판관을 임명하고 그들로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는 정치적 권위까지도 부여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에스라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려질 예배와 제사가 온전히 이루어지게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기 위한 조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조치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가 취한 것이지만 그를 움직여 그런 조치를 취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당신의 성전을 재건하실 뿐 아니라 그 성전에서 유다 백성이 당신에게 드릴 예배를 온전히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자신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 사실을 직시했고 그래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노래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또 나로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스7:27-28)
에스라는 여러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그들과 함께하는 백성을 데리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지만(스8:1-14) 막상 성전에서의 제사를 돕기 위해 필요한 레위 자손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스8:15). 그래서 모든 족장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들을 불러 지방으로 보내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했습니다(스8:16-17). 이때도 도우시는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수십 명의 레위 자손을 찾을 수 있었으며(스8:18-19) 만반의 준비 끝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감격스러운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스8:21-36).
이렇게 새 예루살렘 성전에서 감격스러운 제사를 드린 에스라는 그러나 곧 그에게 나아온 방백들의 보고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어두운 현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온갖 이방 사람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들의 가증한 일을 같이 행하는 것이었습니다(스9:1). 이방 여자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 일에 방백들과 고관들이 더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스9:2).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이러한 통혼을 금하셨습니다. 출34:16에서는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했고, 신7:3-4에서는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합니다. 이 현실 앞에서 에스라는 기가 막혀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주저앉았습니다(스9:3).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제사와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함을 상실한 채로 드리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가증할 뿐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근심 중에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스9:5-6). 에스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역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조상들의 때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돌이켜보며 울부짖었습니다(스9:7-15). 그 기도의 마지막 부분만 들어봅니다. 스9:14-15입니다: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며 죄를 자복할 때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백성이 모여 함께 큰 소리로 통곡했습니다(본문 10:1). 그 중의 한 사람이 에스라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본문 10:2-4) 그러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그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였고 무리가 맹세했습니다(본문 10:5). 이에 에스라는 백성의 죄를 근심하며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한 후에(본문 10:6) 백성에게 삼일 안에 예루살렘으로 모이기를 공포했습니다(본문 10:7-8). 모든 사람들이 삼 일 안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두려워하며 또 마침 쏟아지는 큰 비 때문에 떨고 있었습니다(본문 10:9).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본문 10:11) 이에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그러나 백성이 많고 또 큰 비가 내리는 때니 능히 밖에 서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이 일로 크게 범죄하였은즉 하루 이틀에 할 일이 아니오니 이제 온 회중을 위하여 우리의 방백들을 세우고 우리 모든 성읍에 이방 여자에게 장가든 자는 다 기한에 각 고을의 장로들과 재판장과 함께 오게 하여 이 일로 인한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본문 10:12-14) 다시 말하면 지금은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 있고 비도 많이 오니까 조사위원회를 구성해서 나중에 정확한 수를 파악하기로 하고 일단 흩어지게 해달라는 제안이었습니다. 조사위원회 구성을 반대한 자들이 네 명 빼고는 모두가 그대로 하기로 했습니다(본문 10:15-16). 따라서 에스라는 각 종족을 따라 지명된 족장들 몇 사람을 선임하여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꼭 석 달 만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의 일 조사하기를 마쳤습니다(본문 10:17). 제사장의 무리 중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들은 다 손을 잡아 맹세하며 그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했습니다(본문 10:18-19). 그 결과 백십 쌍이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들려주는 에스라의 종교개혁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바가 큽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너진 당신의 백성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바른 예배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의 회복을 위해 당신의 택하신 백성의 거룩함을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교회개혁과 하나님나라의 회복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기 위하여 준비된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에스라는 대제사장 가문에 태어나 이방 나라에서 살면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익히고 행하며 이방인들로부터 자기를 지켜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족 중에도 하나님의 계명과 성직자의 본분을 버리고 이방인과 혼인하여 자녀까지 낳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에스라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믿음의 삶이 요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들어 쓰셔서 무너지는 이 땅의 교회를 다시 세우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사회 속에서 교회 본연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며 지켜 행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새 성전의 건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된 예배이며, 참된 예배는 우리의 거룩한 삶이 함께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욕심 따라가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닮아 거룩함을 상실하면 예배가 약화됩니다. 우상숭배가 승하게 됩니다. 예배가 약해지면 성전은 무용지물이 되며 무슨 건물로 바뀔지 모릅니다. 유럽의 많은 교회건물이 술집이 되고 무도장이 되며 상점이 되었습니다. 성전의 파괴 아닌 파괴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성전이 성전 아닌 다른 용도의 건물로 바뀌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죽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버림받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선민의 실종인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새 성전과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도록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거룩함을 열심히 지켜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스 10:1-4 / 피영민목사
서론
성도들에게는 동일한 죄에 반복해서 빠진다는 고민이 있습니다. 한번 죄를 용서받고 다시 빠지지 않으면 고민이 되지 않겠습니다만 죄를 자백해도 또 빠지게 되므로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사기를 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동일한 죄에 빠졌다가 또 용서받았다가 또 빠졌다가 용서받는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가운데도 이방여인을 아내로 취하여 우상을 이스라엘에 들여온 죄는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황했습니다. 마지막 때쯤 싯딤에 이르렀을 때에도 모압 여인을 취하여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2만 4천명이 죽은 사건이 민수기 2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과 같이 훌륭한 왕도 말년이 되자 이방의 많은 여인들을 사랑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처첩을 천 명이나 두고 살았습니다. 이러다보니 이방 여인들이 이방신을 이스라엘에 들여오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게 되었고 결국은 솔로몬 왕이 죽고 난 후에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런 스토리가 열왕기상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죄가 매우 끈질겼습니다. 에스라 9장과 10장에 보면 유다백성들은 하나님이 죄에 대한 징계를 해서 바벨론에서 70년 노예생활을 하고 돌아와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여전히 이방여인을 취하고 우상을 들여왔습니다. 심지어는 구약성서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도 동일한 죄악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2장 11절로 12절에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도 동일한 죄에 반복해서 빠지다 보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는 마귀의 조롱을 받습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동일한 죄를 그렇게 자꾸 반복하면서도 네가 무슨 성도냐?”며 우리를 조롱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마귀의 조롱과 마음속에 일어나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라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엘람자손 중에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라고 하는 사람이 에스라에게 한 말 가운데에는 우리의 주목을 끄는 말이 있습니다. 에스라 10장 2절에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스가냐는 이렇게 죄악이 반복되는 상황 중에도 오히려 소망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낙관주의자라고 해도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가운데서도 오히려 소망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망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무근거한 낙관론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하면 그냥 괜찮을 거라고 말하는데 그런 말은 아무 근거가 없는 무근거한 낙관론입니다. 그런데 지금 스가냐가 하는 말은 확고한 근거를 가진 견고한 소망인 것입니다. 어떻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소망을 가질 수가 있느냐? 그리고 이 소망의 근거는 무엇이냐? 이것이 에스라 10장의 주제인 것입니다.
1. 죄가 용서받는 곳에 소망이 살아난다.
소망을 파괴하는 것이 죄입니다. 다시 말해 죄를 용서받으면 소망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선악과만 먹지 않으면 죽지 않고 영생하게 되리라는 조건부 영생입니다. 그런데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먹고 그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과 반역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인류에게 죄가 시작되었고 사망이 온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불순종과 죄의 결과로 인류는 소망이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에 가면 모든 사람들이 울고 애통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결과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반역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악에 거하게 되면 소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에 사도바울은 이런 죄악의 상태에 있는 인간을 향해서 소망이 없다고 선포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죄가 들어오면 소망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죄가 소망과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와 소망은 원수관계입니다. 그런데 스가냐는 “오히려 소망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죄가 반복되는 상황에도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거가 무엇이냐? 시편 130편 3절로 4절에 소망의 근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찐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국회 청문회를 보면 너무나 날카로운 질문들이 나옵니다. 이처럼 사람도 한 사람을 놓고 질문공세를 하다 보면 죄악이 다 드러나 사람 앞에 서기가 어렵습니다. 누구라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 죄악을 하나하나 감찰하시고 세워놓고 청문회를 하시면 우리는 감히 설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사유하심(forgiveness)이 있으십니다. 죄에 대해서 벌을 줄 사람도 사유하시고 용서하셔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30편 7절로 8절에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처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죄를 사유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라는 이중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의 하나님을 의지하여 죄악이 반복되는 상황에도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될 죄 값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쏟아 부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흘려 대신 벌을 받게 하시고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고 참된 소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절에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소망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인간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6절에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소망을 주시는데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죄 가운데 그냥 거하고 하나님을 계속해서 반역하는 가운데 있으면 우리 인생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면 죄사함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지게 되고 마귀의 조롱도 떠나가게 되고 우리에게는 살아있는 산 소망이 생겨나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때로는 한 단어를 가지고 오래 연구할 때도 있습니다. 여기서 스가냐가 말한 소망은 히브리어로 “미크베(Mikveh)”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보면 먼저 “침례탕” 혹은 “침례의식”이라는 의미이고 나중에 “소망”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미크베”가 왜 침례의식인데 침례의식이 소망과 연결되어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죄를 가지고는 소망이 있을 수 없고 죄를 회개하고 회심하여 죄사함을 의미하는 침례의식을 거침으로써 죄사함을 받고 소망이 생긴다고 하는 의미가 이 단어 하나에도 들어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살다가 현세에도 소망이 없고 내세에도 소망이 없고 나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분이 계시면 예수 믿고 죄 사유하심을 받고 침례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현세와 내세에 소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2. 소망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려면 세 가지를 기억하라
첫째, 지은 죄를 애통하면서 울면 소망이 생겨납니다. 여러분 자신이 죄악이 있고 그 죄악을 스스로 이길 수 없을 때는 울면 됩니다. 에스라 10장 1절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에스라가 울자 백성이 다 울고 애들도 다 울었다는 것입니다. 억울하거나 아파서 우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통곡의 눈물인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는 어찌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건만 이렇게 동일한 죄에 자주 빠질 수밖에 없나이까?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으니 웁니다.”하고 우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고 우리 힘으로 안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하나님 앞에 우시기를 바랍니다. 울면 흑암 중에도 빛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 상원의원이신 신호범 박사님께서 몇 주 전에 저희 교회 5부 예배에서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 분이 어린 시절 6.25전에 너무나 어려운 세월을 살다가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18세까지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6.25가 끝나고 미군이 철수하게 되자 소망이 없어 울었다는 것입니다. 울면 사람이 왜 우느냐고 물어보게 되어 있습니다. 신호범씨가 울자 미군이 왜 우느냐고 물어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도 못나와 공부도 못해서 미군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먹고 사는데 당신들이 다 떠나가니 앞길이 막막해서 운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미군이 신호범씨를 불쌍히 여겨 양자로 삼아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6.25 때는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신호범씨가 미국에 가서 18세의 나이에 초등학교를 들어가려고 하니 교장선생님이 당신처럼 나이 많은 사람은 입학허가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학교를 가도 안 받는다고 하고 저 학교를 가도 안 받는다고 하자 결국 나중에는 교장선생님 앞에서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이 또 왜 우느냐고 물어보더랍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싶은데 학교에서 안 받아줘서 운다고 하니 울지 말라하고 특례입학을 시켜줬습니다. 그래서 18세 때부터 알파벳을 배우고 또 한국선생님을 붙여줘 한글을 배워서 명문대학에 들어가고 졸업을 해서 결국 미국의 상원의원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어려울 때는 우십시오. 하나님 앞에 울면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시편 30편 5절에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저녁에는 울면 아침에는 기쁨이 온다는 것입니다. 기쁨을 가진 소식을 가진 사람이 운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절에도 예수님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울면 위로가 오는 것입니다. 이방사람을 아내로 취한 유다백성들의 명단이 에스라 10장 후반부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몇 명이나 취했는지 세워보니 113명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유다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스룹바벨의 인도로 1차 귀환할 때 5만 명 중에서 103명이 모자라다고 했습니다. 5만 명이 주전 538년에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80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보통 20살에 결혼을 한다고 할 때 80년이면 4대가 흘러가서 인구가 2배는 되어 10만 명이 됩니다. 10만 명 중에 113명이 이방여인을 아내로 취한 비율은 약 0.1%로 극소수입니다. 이처럼 사실은 유다백성들 가운데 극소수가 이방여인을 아내로 취하고 우상을 들여온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백성들은 이 극소수의 죄라 할지라도 전체가 통곡하며 어린 아이까지 통곡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가운데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죄를 너무나 너그럽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유다백성들은 극소수의 죄라 할지라도 이것을 심각하게 다루고 하나님 앞에 울며 회개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죄가 있다든가 이제는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곤경이 왔다든가하면 하나님 앞에 울어보십시오. 그러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둘째, 죄를 처리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는 단호한 결단에서 소망이 생겨납니다. 죄를 적당히 타협하는 우유부단함에서는 소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에스라 10장 3절에 보면 스가냐의 말에는 의지를 꺾을 수 없는 단호함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약속한다는 것과 의미가 다릅니다. “약속을 한다” 할 때는 “make promise”를 쓰지만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cut the covenant”를 씁니다. 히브리어 동사 “카라트”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을 어길 때에는 둘로 잘림을 당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맺는다는 것입니다. 약속과 다른 점이 그것입니다. 스가냐는 하나님과 이방여인을 추방하고 우상숭배를 몰아내는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것을 어길 때는 나를 죽여도 좋다는 단호한 결단으로 죄를 몰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 가운데 죄가 있으면 단호한 결단으로 죄를 몰아내야 죄를 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스가냐가 이렇게 단호하게 하자 에스라가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에스라 10장 11절에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제발 이방여인을 내어 쫓아달라고 사정한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이방여인을 끊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12절에서 “회 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에스라와 스가냐는 백성들에게 모든 백성들은 3일 내에 예루살렘 성전에 총 집합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래서 10만 명이 예루살렘에 총집합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가산을 다 빼앗고 유다백성에게서 쫓아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형벌이 무서워 10만 명이 3일 만에 모두 집합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가 이방여인을 쫓아내라고 하자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하늘에서 엄청난 소낙비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방백들이 와서 “학사여 제사장이여 우리가 이 일은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3개월 동안 조사를 합시다.”라고 하자 그러라고 합니다. 그래서 3개월 조사를 해 이방여인을 취한 113명의 명단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다백성은 113명이 모두 이방여인을 내쫓고 난 자식도 내쫓고 이렇게 단호하게 죄를 처리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비록 이방여인이지만 오랫동안 같이 살던 아내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쫓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단호한 결단을 보임으로 소망을 경험하게 된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멸망할 때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쪽으로 갑니다. 그런데 소망을 이룰 때에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쪽으로 갑니다. 반역을 계속하면 망하는 것이지만 순종을 계속하면 잘되는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의 정신이 바벨론에 포로되기 전에는 반역의 정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22장 12절에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의 죄로 인해 내가 심판을 해야 되니 통곡하라 그러면 심판을 면할지도 모르겠다고 하시는데 13절에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 죽이시려면 죽이십시오. 내일 죽이시겠습니까? 그러면 오늘은 실컷 먹어야 되겠습니다.”하면서 먹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불순종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멸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소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순종을 버리고 순종으로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의지함으로 소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스가냐는 에스라 앞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스가냐에 대해 “엘람 자손중 여히엘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레위인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고 평민이요 그의 아버지 여히엘도 이방여인을 첩으로 취한 죄인이었습니다. 스가냐는 죄인의 아들이요 평범한 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 말씀 앞에 떨고 회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 앞에 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울고 결심해도 우리를 돕는 중보자가 없으면 아무소용 없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 중보자로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여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 9장 5절로 15절은 에스라의 중보기도입니다. 죄없는 에스라가 죄있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기도합니다. 에스라 9장 5절을 보면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중보기도가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어린 양의 흘린 피를 근거로 해서 중보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중보자가 계십니다. 우리가 운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죄를 안 짓겠다고 결심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돕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보좌 옆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벗어나 승리하고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서 7장 24절로 25절에도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결론
유다백성들은 3개월간 조사를 거쳐서 이방여인과 그 자녀들을 모두 축출했습니다. 유다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울며 죄를 단호하게 처리하므로 결국 나라가 잘되고 자녀가 잘되는 소망의 실현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자식이 잘되고 나라가 잘되고 교회가 잘되는 소망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망을 방해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뒤에서 조정하는 자가 마귀입니다. 마귀와 죄가 우리의 소망을 이루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고 있으니 우리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앞에 우리의 통곡하는 심령을 아뢸 때에 우리는 소망을 체험하게 되고 소망의 실현을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소망이 현실로 나타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스 10:1-4 / 이삼규목사
우리 나라가 일제의 쓰라린 압박과 고통에서 해방 된지 58주년이 지났습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얼마나 몸부림치며 피 흘렸습니까? 또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또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얼마나 많이 순교를 당하였습니까? 그토록 고통 당하던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셔서 일본의 천황으로 하여금 항복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물론 일본 사람들은 8.15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희미하게 종전 기념일정도로 기억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과는 다릅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국권을 상실한 채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징용에 끌려가며 위안부가 되었고 재산을 수탈 당하며 자유를 잃고 고통을 당하였습니까! 그런 아픔을 생각한다면 우리도 꿈에라도 조국광복의 기쁨을 맛보았던 8월 15일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광복 58 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민족에게 소망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현재 우리의 상황을 절망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장애물과 걸림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 70년을 마치고 고국으로 귀환하여 살 때의 정황이 나타납니다. 그토록 고통의 세월을 보내었다면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았어야 마땅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와 보니 백성들, 제사장들, 레위인들이 이방여인을 아내로 취하여 함께 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특히 이 일에 방백들과 두목들이 으뜸이 되었습니다. 에스라 9장을 보면 에스라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대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스 9:6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스 9:7 우리의 열조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열방 왕들의 손에 붙이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 같으니이다
에스라가 이와 같이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죄를 자복 할 때에 많은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여기에는 남자와 여자들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 큰 무리가 모인 것입니다. 이들도 함께 심히 통곡하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엘람 자손 중에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스가냐는 자신들이 지은 죄악을 인정하면서 그래도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라는 말은 '지금, 이제'라는 뜻입니다. 스가냐가 이스라엘에게 지금부터 소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질 소망의 근거가 아니겠습니까?
1. 죄를 자복하는 결단 때문입니다.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통회하는 기도를 드린 것이 백성에게 끼친 영향은 대단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통회 자복은 많은 사람들을 회개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그런데 엘람 자손 중의 하나인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 앞으로 나와서 참으로 주목을 끄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스 10:2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자기의 죄를 자복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죽기를 결의해도 그런 용기를 내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자기 죄를 숨기려 드는 것입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회가 길선주 목사의 인도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장대현교회에 모인 1500여명은 길목사의 설교에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기도도 터지지 못했고 성령의 은사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길목사는 은혜의 단절은 자신의 탓이라 깨닫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간과 같은 놈이외다. 저 때문에 여러분이 은혜 받지 못했습네다. 언젠가 제 친구 한 사람이 임종하면서 제게 부탁하기를 '나는 이제 죽지만 내 재산을 잘 처리해주게. 내 아내는 무식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꼭 부탁하네' 라며 세상을 떠났습네다. 저는 그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1백원을 잘라 먹었습네다. 저는 하나님을 속였습네다. 저는 내일 아침 일찍 그 돈을 그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네다”
길목사의 우렁찬 공개 자복이 터지자 회중 석에선 통회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저 유명한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성장을 가로막고 민족공동체를 분열, 파괴시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책임을 떠넘기기 때문이다. “네 탓이다. 네가 책임져라”라는 파행이 계속되는 한 회생의 처방은 없습니다. 요즘 보십시오. 연일 서로 책임공방에 열을 올리고 있지 않습니까? 여당이 정치를 제대로 못하면 야당이라도 바로 서야 하는데 야당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러기에 요즘 야당의 지지도가 여당보다 더 낮다는 여론조사가 그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으려면 서로가 자기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민주당의 김근태 의원은 경선 때 경선 자금을 받아쓴 적이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벌금 500만원을 물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이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정치인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나 때문입니다. 내 탓입니다”라는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죄없다고 하면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땅에서 범죄처럼 추악한 것도 없지만 그러나 이 땅에서 참회하는 눈물처럼 아름다운 것도 없습니다. 다윗과 같은 성군도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대하게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책임을 서로 떠넘기기 전에 죄를 자복합시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2. 죄를 버리는 결단 때문입니다.
스가냐는 죄를 자복한 후에 이어서 주목할 만한 말을 하였습니다.
스 10:3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진정한 회개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잘못된 행동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죄를 자복한 후에 여전히 그 죄를 끊어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벧후 2: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삼아 자식까지 낳았던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 아내와 자식까지 내보내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결단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 것인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이라는 애굽 여인을 첩으로 얻었습니다. 그것도 아내 사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맞이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갈이 잉태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주인은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여종이 아들을 낳았으니 얼마나 기고 만장했을 까요? 그러다가 사라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입니다. 어느 날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사라가 목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아무리 여종이고 여종의 몸에서 난 자식이지만 자신의 핏줄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자식을 내어쫓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일 때문에 깊이 근심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이나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의 말대로 행하라는 말씀을 하셔서 두 사람을 내어 보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전 앞 광장에 모이도록 했습니다.
스 10:10-11 /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로 아내를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11)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에스라가 온 회중들에게 죄악에서 떠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회중이 어떻게 대답하였을까요?
스 10:12 / 회 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이방여인과의 관계를 청산하는 것은 철저한 조사를 거쳐서 실행되었고 그 명단까지 발표하였습니다. 이들 중에는 자녀를 낳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에 따라 그들은 순종하여 죄를 청산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라의 개혁 운동이 성공을 거두었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도 죄를 철저하게 버리려는 결단이 있다면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3. 거룩하게 살겠다는 결단 때문입니다.
스가냐는 죄를 버리겠다는 말을 하고 나서 이어서 또 주목할 만한 말을 하였습니다.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것이 소극적인 결단이라면 오히려 하나님의 교훈을 좇으며 율법대로 행하는 것은 죄와 싸워 이기는 적극적인 결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를 죄를 회개하고 죄를 버리는 것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실천하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눈물 콧물 흘리며 회개하는데 나중에 보면 옛날과 똑같은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는 길이 무엇입니까?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은 다른데서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훈대로 살면 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율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히 12:14 /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거룩함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조급병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조급함은 마귀적인 것이 아니라 마귀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서서히 성장하는 것보다 급성장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결코 한 순간에 이룰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거룩한 영성입니다.
하나님은 귀히 쓰시길 원하는 사람마다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 철저하게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정금 같이 쓰시기 위해 13년 동안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하게 했습니다. 모세를 훈련시키기 위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했습니다. 여호수아를 쓰시기 위해 모세의 시종으로 40년을 기다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존귀하게 쓰시기로 작정하실 수록 거룩한 삶을 위해 많은 준비를 시키십니다. 어떤 버섯은 6시간이면 자랍니다. 호박은 여러 날이 걸려야 자랍니다. 그러나 참나무는 6년이 걸리고 건실한 참나무로 자태를 드러내려면 100년이 걸립니다. 참나무와 같은 인물이 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거룩한 신분이 됩니다. 그러나 그 거룩을 완성하는 데는 평생이 걸립니다.
거룩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매일 매일 기도와 말씀 묵상이라는 거룩한 습관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구원은 은혜와 믿음으로 받지만 거룩은 은혜의 수단인 영성 훈련으로 완성됩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룩에 대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빌 2:13).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 거룩하게 살겠다는 결단을 하십시오. 그러나 그 거룩한 삶은 단 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훈련, 기도하는 훈련, 말씀을 실천하는 훈련이 끊임없이 반복될 때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모난 부분이 깎여지고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까? 죄를 자복하십시오. 죄를 버리십시오. 거룩하게 살기로 결단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도우리니
스 10:1-4 / 이규왕목사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생존만이 아니라 나름대로 여분의 시간이나 물질이나 건강이나 기회들은 하나님이 각자에 대한 기대를 가지시고 그것을 이루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회는 놓치지 않고 그것을 잡는 자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주변에 여러 교회들이 있는 가운데 하필이면 이 교회로 인도하신 까닭은 은혜만 받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에 동역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특별히 우리 교회에 거시는 기대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선교하며 성장하는 교회”라는 영구 표어에 나타난 대로 주님의 지상 명령인 선교를 구체화 시키고 확산시켜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우리 모두 동역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식구들은 이 비전을 공동비전만이 아니라 개인비전으로 삼고 구체화시키기기 위해 기도하는 일과 협력하는 일과 동참하는 일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참여할 때 더욱 큰 은혜를 받게 되고 소속감과 일체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바로 그와 같은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 말씀으로 이미 지나간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선한 역사에 대해 우리 각자가 어떤 모양으로 동참하여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켜 드리는 성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와 회복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성경 여러 곳에 토기장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사 64: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여기서 토기장이라는 말은 흙을 빚어 도자기를 만드는 도예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값싼 흙으로 빚은 것이지만 고려청자처럼 유명한 골동품은 부르게 값이며 한 점에 수억 원, 수십억을 호가할지라도 애호가들은 고가를 지불하여 그것을 소장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유명한 작품은 누구나 손쉽게 대량 생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예촌에 가보면 우리 눈에는 멀쩡하여 그 사람의 유명세만으로도 얼마든지 상품가치가 있을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불가마에서 나온 작품을 이리 저리 훑어 본 다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에 들고 있던 망치로 사정없이 박살을 내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도예가에게는 돈이 아니라 자기의 명예와 직결된 작품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인은 도자기만 보아도 누구의 작품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낼 정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도자기는 곧 그 도예가 자신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예가는 자기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올 때까지 또 물레를 돌리면서 또 만들고 불가마에 굽고, 깨뜨리고 다시 빚어 굽는 고독한 싸움을 계속하는 과정 속에서 몇 점 안 되는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토기장이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티끌이라는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그 인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하였을 때는 쇠망치로 도자기를 박살을 내듯이 심판하시고 징계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렘 18: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그 도자기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며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바로 이스라엘 성전의 파괴와 이방나라의 침략과 포로 생활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을 때 마침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북쪽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것을 목도하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남쪽 유다는 마침내 바벨론 제국의 침략을 받아 하나님의 성전이 박살이 나버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천리만리 타국으로 끌려가 노예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역만리 타국에 잠시 여행을 하거나 파견을 받아 얼마동안 사는 것도 불편한 것이 많은데 노예가 되어 언제 고국으로 돌아갈지 기약이 없는 패망국민의 서러움이 얼마나 컸을까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이스라엘을 작품으로 만드시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을 오늘 성경에 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진노중에 긍휼을 약속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포로 된지 칠십년이 지나면 떠났던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렘 25:11)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렘 29: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아무리 좋은 약속도 기간이 너무 오래게 되면 기대감이 반감되어 무관심하기 쉽기 때문에 약속한 사람이나, 약속을 받은 사람 모두가 약속을 망각하기 쉬운 법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면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도 잊지 않으셨고,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은 약속하신 칠십년의 기한이 차게 되었을 때 바벨론을 멸망시킨 신흥제국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 사면령을 내려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게 하라고 그가 통치하는 온 나라에게 공포를 하였습니다.
(스 1: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스 1: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고레스로 하여금 유다 민족을 해방시켜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고레스는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나라의 왕인데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통치하사는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이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고레스 왕은 이를 위해 조서만 내린 것이 아니라 성전 재건에 필요한 모든 물자들을 공급하여 주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독려하였습니다.
(스 1: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2)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들
칠십년이라는 기간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라 한 세대가 가고 다시 새로운 세대가 와야만 하는 기나긴 기간입니다.
비록 그 약속을 들은 어른들은 이방 나라에게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없는 기나긴 기간이며, 이방 나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는 그 약속을 부모로부터 듣지 않으면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불가능하게 생각되어지는 약속이며 오직 하나님은 전능하실 뿐 아니라 신실하신 분으로 한번 약속하신 것은 어떤 모양으로도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신다는 믿음의 사람만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바벨론 포로가 된 이스라엘의 후예들입니다.
그들은 고레스왕의 명령에 기꺼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 건축에 필요한 것이라면 은금 패물 짐승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기꺼이 드렸습니다.
(스 1: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건축코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스 1:6) 그 사면 사람들이 은그릇과 황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즐거이 드렸더라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고레스 왕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선언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와 같은 귀국 명령이 결코 즐겁고 신나는 일만은 아닙니다.
그들이 자원한 일이 아니라 고레스 왕이 내린 명령을 따라 고국에 돌아간다고 했을 때 황폐해진 고국에 가서 무슨 희망이 있으며 또 무슨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르고 현실적인 상황이 좋지 않을지라도 그 약속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평안한 바사보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황폐한 예루살렘을 더욱 사모했으며, 비록 바사의 풍요로운 포로 생활보다는 못하지만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의 자유를 더욱 귀히 여기고 사모했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망과 범죄
칠십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포로들은 각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살게 된지 칠개월이 지난 후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닙니다. 자원해서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시작한 일은 두 가지 였습니다.
1) 제사의 회복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황폐하여졌기 때문에 제사가 끊긴지 칠십년이 지났습니다. 그들이 모여 무엇보다 먼저 시작한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사를 드릴 성전이 아직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스룹바벨과 그 형제들이 일어나 제단을 만들고 모세의 율법대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되 아침 저녁으르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키고, 거룩한 절기를 지키되 억지가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제물을 드리는 예배의 회복이 있었습니다.
(스 3:5)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즐거이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2) 성전의 기초
고레스 왕의 특명과 더불어 포로가 되었던 유다 백성들의 헌신을 통해서 칠십년 만에 먼저 제단이 수축되고 제사가 드려지게 되었고 마침내 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기초공사가 찬송가운데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스 3:11)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지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입니까? 이 모습을 보고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노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무너지기 전의 성전을 생각하며 감격하여 울었으며,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신세대들은 성전이 재건되기만 하면 축복이 시작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감격과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처럼 성전 공사가 시작되자마자 사단의 훼방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포로가 되지 않고 그 땅에 남아있던 잔류민과 혼혈화가 되어 칠십년이 지나는 동안 신앙이 변질되어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득권을 내세우며 집요하게 성전 재건을 방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뇌물 공세와 투서를 마다하지 않고 아닥사스다 왕에게 동족을 배신하고 아부하면서까지 고소를 하여 결국 성전 건축을 중단시키고 말았습니다.
(스 4:21) 이제 너희는 명을 전하여 그 사람들로 역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
예나 지금이나 적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더 많이 있으며, 배신은 얼굴모르는 남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방왕 고레스가 돕는 일을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처럼 훼방을 하여 결국 성전 재건이 중단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럴 때 또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감동하셔서 시작한 일이 이처럼 허무하게 중단되어 버린단 말인가 하는 생각입니다.
사악한 대적자들은 종종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역을 방해하는 데 성공을 거둡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도 하였고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에 수많은 장애물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대적자들의 방해 공작과 시험으로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거나 지연되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사업이 그러한 시련과 역경을 통과하여 이루어질 때에 그 일에 착수했던 성도들의 영광은 더욱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성도는 역경을 만날 때에 더욱 기도하게 되고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에게 실패는 없습니다. 돌다리를 두드려 건너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략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성전 재건의 무려 1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중단되고 보니 기대감과 열심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1) 선지자들의 출현
성전 재건의 중단으로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통해 다시 일깨워 더 확실한 방법으로 성전 재건을 완성케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입니다.
(학 1:4)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학 1:5)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학 1: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2) 다리오 왕의 칙령
역대 정권이 바뀌면서 다리오 왕이 고레스 왕의 대사면령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리오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역대 왕들이 조서를 보관하고 있던 보물고를 조사하여 고레스 왕이 내렸던 명을 다시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고레스 왕은 성전의 크기까지도 명시하였고 그에 필요한 물자를 지원한 사실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고 감동을 받은 다리오 왕도 15 년 동안 중단되었던 성전 재건을 신속히 이행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스 6:12) 만일 열왕이나 백성이 이 조서를 변개하고 손을 들어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헐진대 그 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저희를 멸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지어다 하였더라
이제는 누구도 성전 재건을 막을 자가 없게 되었으며 성전 재건 공사는 다시 순탄하게 시작되어 마침내 다리오 왕 육년에 완공되어 마침내 하나님께 봉헌을 하게 되었습니다.
칠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고 아무리 성전 재건이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여 헌신한다면 못할 것이 없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문제는 불신앙이요, 무관심이요, 방관이요, 비협조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아무리 인간이 수고를 하였을지라도 그 모든 좋은 결과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점입니다.
(스 6:22) 즐거우므로 칠 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로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저희에게로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전 역사하는 손을 힘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느니라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그것으로 다가 아니며 항상 영적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을 오늘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전 재건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룬 줄 알고 그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태만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혼돈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재건한 성전과 비교할 수 없는 화려한 솔로몬 성전을 하나님이 왜 무너뜨리셨는지를 그들은 까맣게 잊은 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반복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비난하고 받아주지 않았던 잔류민 이스라엘 사람들이 범하는 죄 이방여인들을 받아드림으로 이스라엘의 혈통을 더럽히는 일이었습니다.
(스 9:2)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3.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결단과 헌신
하나님께서는 제일 미워하시는 죄는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 경로 중에 가장 위험한 요소가 바로 이방인들과 잡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금해야 할 일이 바로 이방인과 통혼하는 일이었습니다.
(신 7:3)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신 7: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으로 다 된줄 알고 그 때부터 영적으로 나태하면서 지도층에서부터 세속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스 9:2)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지난날에 멸망을 당하였으며, 재건된 성전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화려한 성전이 산산이 무너져 내리게 되었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그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상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죄송하여 옷을 찢고 수염을 뜯고 무릎을 꿇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회개하였습니다.
비록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노예가 되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셔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게 하여 주셨는데도 그 은혜를 배반한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스 9:10)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에스라는 자신이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동족이 범한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고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엎드려 울며 기도하며 죄를 자복하며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에스라의 그 같은 모습을 지켜보던 엘람 자손 중에 스가냐라는 사람이 에스라에게 간곡하여 말하기를 비록 이방 여자를 아내로 취했지만 오히려 소망이 있다고 희망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스 10:3)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스가냐는 범죄한 자들이 자기 집에서 아내와 그 소생을 내어보내면 하나님의 저주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망의 권면을 그에게 해줍니다. 그 일에 우리가 도울테니 힘써 행하라고 위로와 격려를 주었습니다.
(스 10:4)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에스라의 신앙 개혁, 그것은 그가 바사 왕국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온 목적이요,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스가냐의 권면대로 그들을 회개시키고자 삼일 안에 예루살렘에 모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고 단호하게 명령하였습니다.
(스 10:11)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이와 같은 에스라의 명령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의 개혁 의지에 순복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스 10:12) 회 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칠십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신 궁극적인 기대가 성전 제건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재건이 고레스 왕 한 사람의 힘만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합심협력을 통해 모든 장애물을 극복함으로 성취된 것처럼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도 에스라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 이스라엘의 민족적 대 각성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한 “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라는 말과 온 회중이 에스라가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듣고 “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라는 결단의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결 론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계획하고 주관하고 성공적인 결과를 통해 자기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하시기보다는 더불어 협력하여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임을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작품인 천지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일이며, 인간의 출생도 부모의 협력으로 통해서 새생명이 태어나게 하셨으며, 인간의 구원도 신인 협력을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씨 뿌리는 농부의 수고위에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결실을 얻게 하시는 것처럼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도 연약한 인간을 전도자로 세우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전도자들을 가리켜 놀랍게도 사람끼리의 동역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동역자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고전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그러므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이 그 행한 일에 대해 영원한 상급이 있습니다.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파도타기 명수는 큰 파도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교회에게 주어지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일에 스가냐와 같은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회중과 같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듣고 우리도 다같이
1)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2) 우리가 힘서 행하겠나이다
라고 결단할 수 있는 마음에 감동을 하나님이 이시간 우리 모두에게 내려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스 10:4)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스 10:12)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참 좋은 결단
스 10:1-5 / 김 조목사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스스로 결정하여야 하는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 선택 결심이 당장에는 힘들고 어려워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앞날이 밝아지고 아름답게 되는 좋은 결단이 있는가 하면, 현실과 유혹으로 잘못된 결단 한 번이 자신도 망치고 자식들까지도 욕을 먹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 듣고 좋은 결심으로 큰 축복 받기를 소망합니다. 탈무드나 맛소라 본문에는 에스라서가 느헤미야서와 한 권의 책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동시대의 사람이요, 같은 일을 했으며 본서 2장과 느헤미야서 7장이 중복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각기 특징이 있습니다. 제2의 출애굽기라 불리는 포로 귀환의 역사를 보여주는 본서는 바벨론에 포로 되어간 이스라엘 백성이 70년 후 하나님은 “남은 자”를 유대 땅으로 보내어 예루살렘성과 성전을 재건하게 하셨습니다. 집요한 반대에 방해공작도 이겨낸 용기와 지혜가 담겨있는 본서는 1장-6장까지 성전 재건 과정, 7장-10장 신앙 개혁 운동으로 오늘 본문은 철저히 회개하고 새롭게 결심하고 개혁한 것으로 모세 율법에 익숙한 학사요, 제사장인 에스라가 이방 여인들과 혼인함을 알고 통회할 때 백성들이 이방 여인과 아이까지 내어 보내겠다는 결단을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으로 힘들고 어려우나 참 좋은 결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좋은 결단이 날마다 있기를 바라며 참 좋은 결단의 내용을 살펴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죄를 자복하고 고백하는 결단입니다. (1-2절)
백성들의 죄를 위해 기도할 때 백성을 대표하는 스가냐가 자기들이 하나님께 범죄 하여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하였음을 고백하게 되었다. 이는 쉽지 아니한 결심입니다. 자기들의 삶에 근본인 가정을 뒤 흔드는 일이기에 합리화 시키면서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었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자복하고 고백하는 용단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게 자기들의 죄를 숨기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곧 드러날 일도 거짓말을 합니다. 여리고 성 함락 시에 아무도 모르게 물건을 감추었다가 아이성 패망에 제비 뽑아 범죄 사실이 밝혀진 아간의 범죄도 돌더미의 아골 골짜기(수7: )를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감출 수가 있겠습니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어 보겠다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창피한 모든 것 때로는 두렵고 떨리는 것까지 낱낱하게 인정하여 자복하고 고백하는 결단이야 말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첫번째의 일입니다. 이렇게 참 좋은 결단은 하나님께로부터 유쾌하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행3:19) 이 땅에 범죄처럼 추한 일도 없지만 참회의 눈물처럼 아름다운 것도 없습니다. 잘못을 범한 아이가 몽둥이 들고 때리려는 아버지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아버지께 매달려 우는 것 밖에 없습니다. 죄를 자복하는 결단은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참 좋은 결단입니다.
2. 철저하게 죄를 버리겠다는 결단입니다. (2,3,5절)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모든 아내와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겠다” 하고 그렇게 언약했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결단입니까. 잠깐의 실수로 인한 죄를 버리는 것도 어려운데 아무리 이방 여인이라 해도 정들어 살던 아내와 자식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기에 버리겠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가정 파괴는 삶의 근본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반대한 자들도 몇 명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백성이 결단했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 잔인한 것 같은 조치요, 에스라가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받은 정치적 사법권이(7:25)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백성들의 자발적 결단이었던 것입니다. 죄를 알고 자복하면서도 끊었다가 또 범죄 하는 일을 반복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것 보고 개가 토한 것은 다시 삼키며 돼지가 씻고 나서 더러운 곳에 다시 눕는 것과 같다고(벧후2:2) 했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는 핑계로 다시 어리석은 자가 되는 실패자 되지 맙시다. 하나님이 언제까지 유예 기간을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도 맞으면 아픕니다. 이제 죄를 버리는 과감하고 냉정한 결단이 참 좋은 결단이기에 이를 실행하며 복 받는 성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2,3절)
“범죄 하였으나 이스라엘에게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며…..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3)고 맹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맹세는 더욱이 하나님께 한 것은 자기들의 생명을 건 것으로 죽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죄를 자복하고 버리겠다는 결단도 참 좋은 결단이나 이것이 소극적인 자세라면 이제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선한 열매 즉, 아름다운 사람을 살겠다는 좋은 결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살전4:3)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니, 이렇게 살기로 결단함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영국의 경험 철학자 프랜시스펠콤이 이 세상 사람을 3가지로 분류했습니다. 거미처럼 남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 개미처럼 나는 나요 너는 너로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사람, 벌처럼 자신도 좋고 꿀 제공으로 남도 유익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 하셨으니 꼭 있어야 할 사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이타주의의 사람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풍성하게 하는 대 희생이 있더라도 하겠다는 참 좋은 결단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성도 되시기 원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떤 전자 제품 광고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순간의 선택 즉, 결단은 영원일 수도 있습니다. 주위 환경과 당장만 보는 편리주의로 잘못된 선택 버리고 죄를 자복하고 고백하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어 놓는 결단과 죄를 과감하게 버리는 결단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참 좋은 결단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 받는 성도 되시기를 원합니다.
모이는 교회
스 10:1-7 / 남 호목사
교회란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를 말합니다.
히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성경은 말세가 되어 올수록 서로 권하여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행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행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초대교회는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 말씀 듣는 일과 실천하는 일을 병행했습니다.
모이지 않는 교회는 능력을 상실한 교회가 되어 결국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에 박차를 가하여 모이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믿는 무리들이 성전에 모여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2: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란 말은 하나님의 성전에 모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전에 모인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야 말씀이 깨달아지고, 깨달아진 말씀이 믿어질 때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요즘 교회들의 집회 상항을 보면 교회 재적인원 60%정도 밖에 모이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일 낮예배가 그렇고, 주일 밤이나 수요예배는 30% 정도이고, 새벽예배는 10-20% 정도라고 합니다. 예배에 참석해서 계속 말씀을 들어야 말씀에 익숙해지고, 깨달아지며, 믿어지게 되는 것이지, 일주일에 한번 출석하는 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롬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2:3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위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성전에서 선포될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성전에 모이기를 부지런히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지혜를 쏟고,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말씀 듣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지식이나 명예나 권세에 대해서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또한,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실까를 기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 따라서 살아가도록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가르쳐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들을 ①보호해 주십니다. ②응답해 주십니다. ③환난에서 건져주십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은혜를 입기 위해 우리들은 성전에 모여 말씀을 통해 깨닫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Ⅱ. 기도해야 합니다.
성전에서만 기도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도하기 가장 좋은 장소를 말한다면 성전입니다. 예수님도 내 집은 즉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마가의 다락방에 12명이 모여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했더니 성령 충만을 입었습니다. 성령 충만 전에는 두려움이 많았고, 복음에 확신이 없어서 예수님이 잡혀 십자가형을 받는다고 했을 때 모두 되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십자가에서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서 갈릴리에서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을 믿은 제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충만하니까 말씀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말씀을 선포할 때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이 생겨지고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기도는 성령 충만케 하는 비결입니다.
행12:1- 베드로가 간악한 헤롯에게 붙잡혀 들어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온 교인들이 마가의 집에 모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도 기도는 하지만 베드로를 살려낼 일에 믿음이 적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사자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웠습니다.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졌습니다.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천사가 겉옷을 입으라고 해서 입었더니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밖으로 나가는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려 길거리로 나오니 천사가 떠나갔더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기도하던 초대교인들도 베드로를 보고 놀랐습니다.
기도는 응답됩니다. 기도는 역사를 바뀌게 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능력과 권능이 있습니다.
대하20:4에 보면 모압사람과 암몬과 몇 마온 사람들이 유다 여호사밧 왕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유다는 이에 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쳐들어오는 군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여호사밧은 유다 모든 성읍에 백성들을 모아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힘입어 연합군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있는 교회는 반드시 부흥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상처가 있는 성도들도 끌어안고 고민하지 마시고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질병으로 고민하고 있다면 염려하지 말고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의 치료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에스라가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면서 자복하고 기도했더니 많은 백성들이 통곡하면서 어른으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몰려와서 회개했던 것처럼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는 신탄진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Ⅲ. 병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20세기를 “병든 시대”라고 말합니다. 육신의 질병의 만연으로 병든 시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사회의 불협화음으로 병든 시대임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서 절망에 빠져있는 병든 사람들, 그리고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유를 받은 사람을 죽이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크게 병든 증거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잘 모시지 못하고 불효하는 것도 병든 증거입니다. 나에게 조금만 해롭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참지 못합니다. 미워합니다. 증오합니다. 이것 또한 병든 증거입니다.
이런 고질적인 질병을 우리는 치료받아야 합니다.
사1: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현대인들은 상처와 질병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출15:26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지친 육과 영을 성전에 모여 끊임없이 기도함으로 치료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Ⅳ. 승리해야 합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제사장들과 싸워 승리했습니다.(왕18:39)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많은 수의 바알 선지자들을 간단히 물리친 사건이었습니다.
롬8:31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느냐”고 했고 롬8:37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고전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여러 모양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모여서 믿음으로 교제하고 서로의 믿음의 삶을 나누고 믿음으로 격려하고 위로할 때 성도들과 함께 하시고 도우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세상이 악하고 마귀가 간교하다고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므로 우리는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골리앗과 다윗을 비교하면 어른과 아이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장수들은 골리앗을 두려워해서 한 사람도 대항할 장수가 없었고, 모두 다 두려워하고만 있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전연 가능성이 없는 싸움이지만 하나님이 도우시면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골리앗을 향하여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여호와께서 너를 네 손에 붙이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게 하리라(삼상17:45-46) 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확실하고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골리앗 앞으로 나갔던 다윗은 물맷돌로 골리앗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원하는 명장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승리해야 합니다. 교회자체는 별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시고 하나님이 계시는 교회는 능히 승리케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믿고 순종하고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말씀 속에 있는 축복을 경험하게 되고, 생명력 있는 믿음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받고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기적과 표적을 체험해야 하고, 전인격적으로 질병을 알고 앓고 있는 현대인들의 외적 치유와 내적 치유의 역사가 있어야 하며, 거대한 세상의 충돌을 이겨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되기 위해 모이기에 힘쓰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