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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도시 건축의 미학
김 홍 식 / 명지대학교 건축과 교수
■ 도시건축 정책의 미학
* 계획의 지침 : 당시 도시 계획의 철학은 무엇이었으며 도시 건축 정책의 미학은 어떤 방향으로 의도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점에 대해서는 정조가 확실한 언급을 하고 있다. 정조 17년 12월에 왕이 채제공에 일러 가로되 “무릇 일은 먼저 규모를 정하여야 하지만 이보다는 먼저 역과 기가(제도)되어야하고 이는 사람을 얻어야 한다."고 하여 무엇보다도 "조직의 중요함"을 말한다. 그러나 관수만록은 "오늘날의 논자들은 매양 사람 얻을 것을 말하나 이는 입법 다음에 있음을 모르는 소치이다." 하고 하여 이제는 사람에 의해 일이 조정되어서는 안되고 제도에 의해 일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어 실록 정조 17년에 성곽 건축은 "미관에만 치중하여 치밀함을 등한히 하지 말것이며, 보기에 아름다우면 적을 방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장려함이 없으면 중후한 위엄도 없을 것이니 성루가 웅장 미려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넋을 읽게 하는 것도 수성에 있어 도움이 될것이다."라고 하여 구조적으로는 안정적으로 만들되 장려하고 중후한 위엄이 있으며 미려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한마디로 날아 갈 듯한 아름다움은 없을지라도 무게가 있는 아름다움을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국가 정책적 측면에서 추구한 미학이다.
역시 공사 착수 3개월 전, 정조 17년(1795년) 12월6일 왕은 체재공, 조심태를 창덕궁 성정각에 불러 놓고 화성의 기본 형태 및 시공 방안에 대해 세가지 점을 명시한다. “첫째 성의 전체 형태는 원형이나 네모꼴로 해서는 안되고 또 외관만 살린 꼴이 되어서도 안되며 모름지기 지세의 이점을 살릴껏, 둘째 공사시에 기중, 인중지법을 연구하여 자재를 운반하는 수고를 덜도록 할 것, 셋째 성벽은 솟아오르는 처마 모양으로 할것이며 화원을 대동하고 가서 성지 뿐 아니라 읍내 마을 주변 산세 그리고 인가의 트고 작은 형세를 상세히 그리고 집에 살고 있는 신원까지 확인해 오라”고 한다. 또한 성안을 흐르는 개천 때문에 수문이 필요한데 왕은 홍예, 즉 무지개다리 보다 석교가 나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었으나 조심태는 홍예가 물길을 버티는데 유리하다는 주장을 편다. 다시 말해서 정조는 성의 외관에 치우쳐서 기하학적인 형태를 취하면 안되고 지세에 맞춰서 설계해야 할것이며 형태는 미관보다는 구조적인 모습일 것 과 인건비를 줄일수 있는 기계, 기구의 사용을 적극화 할 것을 명령한다. 한편 이런 모든 사항은 설계에 의해야 하며 여기에 는 생활하는 모습까지를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이전 시대에 비해 대단히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실록 정조 21년 2월 임금이 완성된 성벽을 둘러보면서"성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제를 제대로 갖춘것이라고 칭찬하고 다만 초루와 돈대를 가까이 둔 것은 기교를 부린 나머지 실용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하여. 곧 멋을 부리지만 실용적인 아름다움(중후한 위엄과 미려함)을 갖춰야 하며 지세에 맞추되 멋을 부려 기하학적인 미관에만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도시건축의 공간 미학
정조 14년 2월11일 좌의정 채제공은 신읍의 번영 방안을 헌책한다 "첫째 가로가 번성하기 위해서는 전포를 세우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으니 서울의 부호수 30호를 모집하여 무이자로 1,000천냥씩을 대부해주고 이글로 하여금 신읍에서 서로 마주보고 집을 짓게 한다. 둘째 이들의 집은 모두 기와집으로 민들며 기와를 굽는 방책은 별도로 정부에서 마련한다. 셋째 읍치 옆에 6일장의 장시를 개설하여 한푼의 수세도 걷지 않고 자유롭게 장사하도록 한다." 채제공은 후일 또한 통공정책을 시행한 재상이다. 서인과 연계가 있는 서남 해안의 상업자본을 배제하고 경상 수 30명을 수원에 이주시키자는 것이고 이들에게는 금융특혜와 자유로운 상행위를 인정해 주며 생활은 서울과 마찬가지로 호화롭게 사치를 누릴수 있도록 허용하자는 정책에 대하여 조야에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제시되어서 정조 15년(1791년) 정월 신기경은 수원 신읍을 발전시킬 시무12조를 올린다. 역시 같은 맥락이다.
정조 14년 수원부사 조심태는 경사의 부자30인을 모집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본토의 사람들에게 재원을 지원함으로써 수원의 상업 자본을 육성할 것을 상주한다. 정조 21년 정월29일 화성에서 온 왕은 구체적이고 보다 효과적인 화성의 번영책을 강구하도록 명령한다. 채체공을 비롯한 비변상서는 한성뿐만아니라 개성,평양, 의주, 동래의 거상들을 대상으로 화성 이주 신청을 받는다 (역시 서도의 상인들은 제외됨을 볼 수 있다.) 응모자 가운데 20인을 골라 계를 조성케 하고 관모와 가가삼의 대외 매매 독점권을 주며 대신 즉시 화성으로 이주하여 대대손손화성에서 상고에 종사기키는 안을 올리며 동 2월 22일 왕은
시행 명령을 내린다.
■ 도시 공간의 미학적 분석
* 문헌적 분석 : 성곽의 크기는 부.목.군.현.진에 따라 규모를 달리한다. 따라서 정약용은 규정에 따라 성을 직경 1200보, 둘레3600보로 계획한다. 그렇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남북 대문 거리를 1000보로 하는 곧 1000보의 원에 외접하고 1200보의 원에 내접하는 성곽을 계획한다. 물론 이것은 기본 계획이고 전체적으로는 지세에 따른다. 이에 대해 우영하는 외성의 필요성을 역설한다..외성은 내성보다 50보 정도 크게 하자고 하는 것이므로 직경 100보의 원에 외접하는 성곽을 생각한것이겠지만 실제 둘레는 5000보 보다 크지 않게 하게 좋다고 말한다. 직경 1500보에 내접하는 귀죽의 네모꼴 정도를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통상 쓰는 기본 계획의 방법인 까닭이다. 외성은 회를 섞고 증기로 찐 토성을 만들며 시공은 구반별 도급제로 맡기자고 주장한다. 필경 수원화성은 외겹의 평산성으로 되었으며 성벽은 주로 외탁만 했지만 문루 주위에 는 내탁이 있는 협축을 했다. 조선 중기만 해도 성벽을 높게하는데 치중했지만 후기에는 전쟁에 포화력이 적용되는 새로운 전법에 맞게 그 두께는 두껍게 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정조 18년(1796)정월 15일 왕은 팔달산 정상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조심태는 성벽이 세워질 위치에 깃발을 세워 놓아 왕이 성곽의 위치를 한눈에 알아볼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문제점은 깃발을 꽂아 놓은 위치 바깥쪽(특히 북리)에 적지 않은 민가가 자리잡고 있는 점이었다. 이전에 이곳이 세류 주막거리였으므로 기존의 발전된 마을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왕은 민가가 모두 성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점을 지적 했고 아울러 남문과 북문사이가 너무 가깝다고 말했다. "임금이 읍기를 관람할새 이에 팔달산에 올라 축성 기틀을
보시고는...북리 인가의 훼철을 논하건데 끝내 얻지 못하더라..수원은 원래 버드내이니 그런 즉 버드내의 성이 남북으로 조금 길어서 마치 버들잎 같은 즉, 실로 뜻이 있다. 이성은 좁고 길어서 버들잎 같고 북쪽 귀퉁이에 인가가 서로 어긋나서 세 번 굽은 것이 마치 내천자를 형상했으니 어찌 더욱 버드내에 닮지 않았겠는가!“ 라고 단안을 내림으로써 민가를 철거하지 않고 오히려 성을 바깥으로 내어 쌓기로 결정했다. 성벽의 위치 결정에는 서쪽의 팔달산 마루와 함께 동쪽에서 용연의 위치가 성벽의 중요한 거점 구실을 했다. 용연은 그 오른쪽 구봉과 하께 용과 거북이 어우러진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곳이었고 광교산에서 흐르는 물이 용연의 우뚝한 절벽에 와서 마주치는 형상이 되었으므로 성곽의 하나의 중요한 결점으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해서 성곽의 규모가 결정되었다.
성곽 내부의 도로는 우리나라 여느 읍성과 마찬가지로 우선 남문과 북문을 S자로 구부러지면서 일직선이 되게 도로의 선을 긋고 관아 중심으로 이미 조성되어 있는 십자로와 교차 시켰다. 역시 철거해야 할 집이 생겼으니 이것을 헐어야 했고 문루와 성벽 공사를 하기 위해 우마차를 통행시켜 보니 보다 넓고 편리하게 몇 개의 간선도로를 새로 내야 했으며 성벽의 배수 특히 광천교의 배수로를 따라 도로망이 형성되어야 했다. 정조18년3월4일 , 남북의 성터와 배수로에 걸린 민가 및 전답의 보상과 함께 십자로를 넓히는데 걸린 와가 3호, 초가4호, 토실1호, 계37호간의 보상비로 총298량을 지출했다. 별도로 종루 십자가로서 동으로 동장대까지, 북으로 장안문까지, 장안문에서 성밖 만석구에 있는 영화정까지 신작로를 내는데 보상비와 노임을 합하여 1,216량 이상이 지출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간선망은 우선 남문에서 십자가를 거쳐 북문으로 빠지는 주대로를 중심으로 십자가에서 직교하여 수로(광천교)를 건너고 동문으로 뻗어 광주로 가는 길이 생겼다.(이것이 일상적인 읍성의 도로망 구성 방식이다.) 종루전 십자가의 북쪽에 또하나의 네거리를 내어 (이것을 장안 네거리라 함) 여기에서 화홍문, 방화수류정과 연결되는 수로에 끝점을 두고 남북 주간선도로와 직교하여 서문으로 빠지도록 계획하였다. 동문으로 나가는 길은 광주산성과 연결 도로인데 보다 직접적으로는 광주에 설치된 왕륜 와벽소에서 성역공사에 필요한 기와와 벽돌을 운반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이며, 서문을 통해 서쪽으로 연결된 길은, 숙지산, 여기산의 채석장에서 돌을 옮겨오기 위한 실제적인 필요성 때문이다.
정리하면 행궁과 관아를 주산인 팔달산 아래에 배치하고 객사 앞의 홍살문 옆 좌우로 큰길을 내어 주요 통행을 삼고 전방에 직교하는 도로를 하나 가자형으로 두는 방식으로 다른 읍성의 일반적 배치 방식과 같다. 그러나 타지방의 읍성에는 북문을 두지 않지만 여기서는 객사 측면을 지나는 또하나의 도로를 내서 성문이 동서남북 네 방향에 모두 갖추어지도록 만들었다. 이로써 남북 대문이 서울과 더불어 유일하게 우진각 지붕으로 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수원이 도성으로 불리는 이유가 되었다. 이것은 수원 신읍 ,통행이 편리하여 상업이 진작될 수 있는 도시로 만들기 위한 조처였다. 따라서 관설 장시가 팔달문과 남수문 사이에 있는 남암문 밖에 설치되어 매4,9일에 개장되었고, 농산물과 축산물 거래의 큰장터로 번창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영동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 성역의궤 투상도, 1915년 지적도 및 1920년의 지도의 분석 : 성곽은 정다산의 의견대로 직경 1200보에 내접하는 귀죽인 네모꼴로 계획된다. 따라서 남북의 가장 짧은 거리는 1000보(1178m)로 계산된다. 원칙적인 문제는 남북문의 거리와 위치이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북문은 확장되었다고 한다. 남북문 중심점에 일직선을 긋고 남문에서 500보 거리에 중심점을 놓고 지름 1000보의 원을 그리면 대체로 성곽 전체가 들어온다. 다만 북문만이 훨씬 벗어나고 있는데 이는 기존의 주막거리인 민가가 성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전체는 1200보의 원안에 완전히 들어온다. 그리고는 자연의 지세에 맞춰 성곽이 그어진다. 서쪽 팔달산의 성곽은 산등성을 암문까지 산마루를 달리는 것이므로 거의 확정적인 것이 된다. 다만 북쪽 성곽의 경우 화홍문에서 창룡문까지 남쪽처럼 똑바로 긋지 못하고
내천자처럼 혹은 버들잎처럼 내밀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하나의 고민은 서쪽 팔달산 위의 성곽이다. 성곽이 산마루를 완전히 가로 긋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쩔수 없이 약 200m의용도(성곽)를 만들었는데 여기서부터 남암문까지 일직선을 긋던가 아니면 그림의 점선을 따라 (현 남성곽과 평행히) 그어 현 동남성곽 바깥 산줄기를 따라 성곽을 쌓을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는 성곡의 길이만 커질뿐 현재 동문으로 나가는 골짜기가 시가지 형성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듯 동남의 골짜기도 필요없는 공간을 둘러쌀 따름이라고 생각했음직하다. 또한 전자는 정동향으로 놓여지는 계획의 기본축과 너무 어긋나기 때문에 기피한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꺼렸던 것은 성곽이 기본 계획보다 규모가 커지는 사실이다. 이는 공사비와의 문제가 있고 도시의 격식에도 벗어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아마도 외성을 쌓아야 한다는 의견이 발의되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 건축공간의 미학적 분석
*문헌상의 분석 : 축성의 기본 방향은 내소에서 근무했던 정약용이 작성하고 그것을 왕이 대체로 수용하여 추진하며 현재에서 현지 지형조건이나 기타 사정을 고려하여 역소위 감동당상과 도청이 조사하여 올리면 채제공이 왕 혹은 내소와의 사이에서 조종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본계획을 구상하면서도 다산은 여러번 현지에 나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내소에서는 측량을 하고 도면을 왕과 긴밀히 상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완성된 수원화성에는 다산의 성제에 들어있지 않았던 여러 시설들이 추가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공심돈이며 많은 시설들에서 벽돌이 광범위하게 활용된 점도 특이하다.
조심태가 감동당상으로 임명되는날, 정조는 현안 제도가 벽돌로 만들어져야만 실효를 거둘수 있다는 말을 전하면서 벽돌이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익숙치 못하고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에 석성만 못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었다. 유유경이 대답하기를 수원부의 흙이 벽돌 굽는데 적합지 않고 더욱이 가까이에 좋은 석산이 있으니 벽돌로 쌓을 필요가 없겠다고 답하지만 결과적으로 도자기가 양산되고 있는 광주군의 흙을 써서 벽돌과 기와를 구워낸다. 팔달문, 장안문, 방화수류정, 동장대, 서장대 등의 주요 건물은 공사의 진행이 빨라 거의 기공후 일년 이내에 완성되었으며, 우진각 지붕은 신중한 형태로 여겨졌으므로 주로 왕실과 관련이 깊은 한양 4대문과 여기 수원의 남북성문에만 허용되었다. 지방의 도시 성문은 모두 합각 지붕으로 되어 있는 사실과 비교하면 정조의 장중한 아름다움의 미의식을 느낄수 있다. 또한 남북대문에는 도성에서만 쓰일수 있는 잡상을 시설함으로써 당시의 백성들로 하여금 혹 도성을 만들려고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전승설화를 만들어 내게 하였다.
반계는 도시의 포자가 반드시 가로의 양편에 그 수도 계획적으로 미리 정하여 설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반계수록 권4 후록하에 "무릇 포자는 개와로써 이어야 하고 대청이나 부엌의 기물과 그릇은 청정하게 닦게 하도록하며 집앞에는 푸른 깃발을 세워 표시를 하고 상자와 탁자는 한결같이 그 제도에 의하여야한다." 이같은 반계의 합리적 미학을 그대로 계승하여 채제공 역시 부호 수 30호의 전방을 계획적으로 서로 마주보고 배치하고 관부에서 집을 지어주되 반드시 기와집으로 지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에게 특권을 주고 계원이 되게하되 이들은 반드시 성내에 집을 짓고 살아야 하며, 초가집이나 지어서 다시 개축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상신한다. 이어 이들 20호의 계원은 대로의 암북에 기와집을 크게 짓t되 열을 지어 붙어있게 하고 거리의 모습을 닦고 단장하여 서울과 같이 번화하게 한다. 도시적인 형태의 도시미관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 건축의 도학적 분석 : 목조건축은 기본적으로 분수(비율)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수리적인 법식이든 아니면 자유식 일수도 있지만 도끼로 집을 지은 민가를 제외하고는 보다 체계적인 분수로 만들어진다. 특히 수원화성곽인 경우에는 화성성역의궤 분수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곽의 크기는 물론 자재까지도 규격화,모듈화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에는 건축에 대한 분수이야기가 거론되고 있지는 않지만 여타의 조건으로 미루어 건축의 분수도 존재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한 수원화성에 지어진 여러 시설물들은 기록된 건물의 치수를 보거나 실측된 도면을 관찰하면, 이것이 대단히 대칭적이고 규격적으로 계획되었음을 알 수있다. 이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증명해 보이고자 한다(참고서적 참고). 분석의 틀은 당시의 건축은 대단히 발달된 도학에 뒷받침 되면서 평면 구성과 입면설계가 하나의 기하학적 분수에 의해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공간을 면이 아닌 3차원의 세계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으며 이것이 해체적이 아닌 구성적 공산조직으로 계획되었음을 입증한다 하겠다. 그리고 이것이 별도의 우연한 분수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관된 연관을 지닌다는 것이다.
화성의 건축미
김봉룡/ 한국 종합예술학교 건축과 교수
조선조 22대 정조 (1752-1800, 재위 1777-1800)만큼 아슬아슬하게 왕위에 오른 이도 드물다. 정조는 비록 왕세손으로 당연한 세습지위에 있었지만, 험난한 당쟁과 외척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희생을 목격했으며, 늘 정적들의 방해와 살해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면서도 즉위 초기의 정조는 한마디로 준비된 제왕이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정적들을 제거하는 정도의 속 좁은 군주가 아니었다. 조선 정계의 모든 비극은 왕권이 약화되고 신하들의 당쟁에 원인이 있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강력한 군주국가의 재건을 일대의 목표로 삼게 되었고, 전반적인 정치와 사회개혁을 추구하게 됐다.
상공업을 장려하여 민간경제를 활성화하고, 당파를 초월해 과감히 인재를 등용했다. 또 군제 를 정리하고 국가재정을 확대하여 부국 강병의 토대를 마련했다. 적극적인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위하여 대대적인 명예회복을 선언했고, 그 구체적인 사업으로 화성 신도시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정조는 1789년 사도세자의 묘소를 지금의 수원시 융릉으로 옮길 것을 명했다. 사도세자 명 예회복 사업의 마지막 단계였다. 원래 이 자리는 화성읍 치소가 있었던 궁벽한 시골마을이 었다. 그러나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는 명분으로 세자릉원의 이장지로 선택됐고, 근처에 는 용주사를 새로 지어 릉원의 원찰로 삼았다. 아울러 수원읍의 치소와 주민들을 새 장소로 이전시켜야 했다. 신도시의 입지로 결정된 곳이 바로 지금의 수원시역, 팔달산 아래였다.
천하의 효자 정조임금이라 하더라도, 단지 생부의 묘소를 옮기기 위해 신도시 건설이라는 대규모 역사를 벌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현륭원을 이전하면서 소요되는 비용은 노론 벽파 가 장악하고 있던 금위영과 어영청의 경비에서 충당시키기도 했다. 효와 정통성을 빌미로 철저하게 정적들을 무력화하는 고도의 정치술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정조가 화성 건설에 기울인 노력은 각별했다. 계획에서 시공까지 모두 새로운 발상 과 실현을 요구했으며, 자신이 후원한 새로운 정치 사회세력이었던 실학파들을 대거 기용해 이 역사를 맡겼다. 1796년 화성이 완성된 후에도 각종 금융 특혜를 베풀어 수원을 풍요롭고 자족적인 도시로 급성장하도록 배려를 쏟았다.
■ 정약용과 실학 건축의 완성
화성 건설의 계획자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이었고, 공사 총책임자는 당시 좌의정이었던 채제공이었다.
정약용은 당대의 대실학자였으며 채제공은 소장 실학자들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다. 정약용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방면에 출중한 저술을 남긴 실학의 완성자였을 뿐 아니라, 예 술과 건축에도 뛰어난 식견과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정약용의 탁월한 능력을 알아본 정조 는 약관 30대 초반의 중급 관리에 불과했던 그에게 개혁을 마무리짓는 국가적 사업인 화성 설계를 맡기게 된다. 최고의 천재답게 그는 1년여의 연구 끝에 화성의 계획개념과 구체적 방법론을 수록한 문서 『성설』을 정조에게 바쳤고, 매우 흡족해 한 왕은 이를 화성 건설의 근거로 삼았다.
정약용은 이외에도 모두 6편의 성곽건축에 대한 저술을 작성했다. 여기에는 성곽방어에 불가결한 시설들의 필요성과 공사방법을, 거중기 등 새롭게 고안한 공사기구들의 제작법을 수록하고 있다. 후일 『화성성역의궤』라는 공사기록서에 수록된 그의 계획서는 실제 공사에 거의 대부분 반영되어 성곽 시설의 형태까지도 똑같이 건축됐으니, 현대적 의미에서 화성의 진정한 건축가는 바로 다산 정약용이었다.
화성은 성곽의 건축적 가치도 뛰어나지만, 원래의 도시계획적 개념도 탁월했다. 주민들이 사 는 도시 자체를 방어기지로 생각했고, 농업을 진흥하여 자급자족적인 도시를 만들려했고, 능력있는 상권을 유치하여 남부 경기지역의 중심적 상업도시로서 발전시키려는 국토계획적 거 점도시이기도 했다. 서호와 같은 대규모 저수지를 만들어 국유농장을 운영했고, 축산업을 장려하여 전국적인 소시장이 서기도 했다. 수원에 서울대 농과대학이 들어서고 수원갈비 가 유명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정조대왕과 실학파들이 심혈을 기울인 도시계획의 흔적이다. 한마디로 화성은 실학사상의 민본적이고 실용적인 도시관이 집대성된 18세기의 이상도시였다.
성곽건축에도 새로운 제도와 재료, 공법과 기구들이 고안되어 사용됐다. 화성성곽은 근본적 으로 외침에 대한 도시방어가 목적인 군사시설이었다. 따라서 우선 강조한 것은 옹성과 치성이었다. 옹성이란 성문 밖에 둥그렇게 쌓은 또 하나의 성곽으로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배후에서 칠 수 있는 이중성곽이었다. 도성인 한양성에도 동대문에만 설치될 정도로 기존 성제에서는 무시된 것이다. 치성이란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킨 형태를 말한다. 치(雉)라 고도 부르는 이 시설은 성벽에 달라붙은 적군을 측면에서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었다. 돌출 된 치성 안이나 위에 특수 목적의 시설을 설치해 다양한 기능을 갖기도 한다.
화성성곽의 주재료는 돌과 벽돌이다. 벽돌은 북학파를 비롯한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주장한 새로운 건축재료였다, 벽돌은 주로 암문 등 작은 홍예문과 공심돈 등 원형이나 곡선형의 시설물을 만드는데 사용됐다. 돌보다 크기가 작아 손쉽게 자유로운 형태를 만들 수 있으며, 일 정한 규격의 벽돌을 가지런히 쌓음으로써 정돈되고 단정한 형태를 얻을 수 있었다. 벽돌은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조형의 길을 한국건축에 터준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돌로만 쌓은 석성은 한 번의 포격으로 무너지기 쉽지만, 벽돌성은 일부가 파손되어도 나머지 부분은 견고히 버틸 수 있는 구조적 장점도 있었다.
화성의 공사는 방대한 규모에 비해 2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된다. 이는 물론 공사에 대한 조정의 확고한 의지와 주도면밀한 공사계획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기술수준 의 향상과 자재의 원활한 조달, 그리고 새로운 기술과 공사방법이 도입된 결과다.
무거운 돌들을 높이 끌어올려 쌓아야하는 화성 공사를 위해 특별한 기구까지 고안했다. 수동식 크레인이라 할 수 있는 거중기, 크고 작은 운반기구였던 녹로와 유형거 등 여러 종류 의 공사장비들이 고안됐고, 인근 산에서 채취된 돌을 수레로 운반하기 위해 새로이 도로들 을 정비했다.
공사에 동원된 수많은 인력들에게는 각자 수행한 업적에 따라 적정한 임금을 지급하는 이른 바 성과급 차등지급 방식을 적용했다. 근로의욕을 고취시키고, 높은 질의 시공을 보장하는 합리적이고 근대적인 관리방식이었다.
이 역시 화성 공사에서 최초로 시도된 것이었다. 계획의 개념과 방법부터 재료와 공법, 노무 관리 등 건축의 모든 단계에 걸쳐 합리성과 창의성으로 충만한 과정이었다.
■ 산성에서 읍성으로
한국의 성곽은 산성과 읍성으로 나눌 수 있다. 읍성과 산성은 종종 한쌍을 이루는 보완적 관계였다. 산을 등지고 산자락에 위치한 마을에는 읍성을 쌓아 도시의 경계로 삼았고, 뒤 산 정상에는 산성을 쌓았다. 산성이 방어용 성곽이라면, 읍성은 행정용 성곽이었다. 고창의 모 양성과 같이 읍성 자체가 방어목적을 겸하도록 견고하게 쌓여진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매 우 허술한 구조물이었다.
평소에는 읍성에서 생활하다가, 외침이 있는 유사시에는 산성에 올라가 성문을 굳게 잠그고 항전을 하게된다.
산성을 에워싼 적군들이 지쳐 물러나 농성에 성공하면 그것이 곧 승리였다. 백제의 부여와 부소산성, 신라의 경주와 명활산성, 조선조의 한양성과 북한산성 등이 대표적인 읍성과 산성 의 이원적 관계다.
그러나 패전 때는 물론, 승리 때도 문제는 심각했다. 비록 승리했다고 해도 읍성은 이미 갖 은 약탈과 파괴로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삶터는 물론 관청 하나 변변히 남아있 지 않은 잿더미에서 승리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일찍이 유형원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이 모 순을 신랄히 비판하며 읍성강화론을 주장했다. 읍성을 산성과 같이 견고히 쌓고 방어에 유 리한 도시구조로 바꾸어 전쟁 때도 읍성에서 항전하면서 생활의 터전을 지키자는 논리였다. 그 주장이 본격적으로 수용된 곳이 바로 화성이었다.
실용적인 경제성도 부각됐다. 산성과 읍성을 둘 다 축조하는 것은 이중의 비용이 든다. 그리 고 생활과 유리된 산성을 보존관리하는 데는 막대한 인력과 비용이 필요하다. 따라서 읍성 을 튼튼히 쌓고 관리하는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큰 이득이다. 화성은 읍성과 산성을 통합 한 근대적 의미의 도시와 성곽이었고, 근본적 개념들인 민본사상과 경제적 실용주의는 실학 사상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생각들이었다.
방어용 성곽 가운데서도 화성은 가장 튼튼하고 실용적이었다. 도성인 한양성곽의 높이가 6m 정도인 데 비해, 화성성곽의 높이는 8m가 넘었다. 또 기존 산성들에서는 소홀히 다루었 던 옹성과 치성 등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고, 공심돈 포루 등 새로운 시설물들이 추가됐다, 모두 효율적인 방어를 위한 군사용 시설물들이다.
기존의 산성들을 흙을 다져 쌓은 토성 아니면, 큰돌들로 구축한 석성이었다. 토성은 완만한 성벽의 경사 때문에 방어에 불리했고, 석성은 일부만 무너져도 전체가 허물어지는 구조적 취약점이 있었다. 화성은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돌의 크기를 줄였고 일부에는 벽돌인 전 돌을 사용했다. 작은 돌은 운반과 축성을 쉽게 하여 공사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고, 벽돌 성은 부분적 파손에도 전체를 유지할 수 있는 견고함을 보장했다.
■ 부유한 자족도시
성곽의 계획자는 정약용이었지만, 도시구조의 계획자는 밝혀진 바가 없다. 그가 누구였던 간 에 애초부터 보통 지방도시와는 달리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계획했음을 읽을 수 있다. 가로 망과 시설배치 계획만 본다면 수원읍은 다른 지방읍성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서쪽 팔달 산을 주산으로 삼아 도시를 놓고, 남북을 가로지르는 중심도로와 이에 직각방향으로 부도로 를 설치했다. 동서 부도로의 서쪽 끝에는 화성행궁과 관아시설을 두었다.
그러나 가로의 성격은 확연히 달랐다. 남북로와 동서로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십자가十字街가 형성됐다. 수원읍은 십자가로 구획된 4개의 지역 - 서성자내, 북성자내, 남성자내, 동성자내로 이루어진다. 십자가 주변이 도시 중심으로 쌀가게 포목가게 그릇가게 등 상업시 설이 밀집하게 된다. 이 상업지역은 남북로를 타고 뻗어나가 도시 전체가 상업지구화되는 효과를 거둔다. 수원읍내의 구매력도 만만치 않았지만, 서울과 곡창지대인 호남을 잇는 지리 적 이점 때문에 중부 경기지역의 거점도시로 시장권을 넓혔다.
농경사회에서 도시를 키우고 인구를 집중시킬 수 있는 수단이란 상업뿐이었다. 따라서 수 원읍의 도시화의 성패는 곧 상업의 진흥여부에 달려 있었다. 수원읍은 입안 당시부터 상업 도시로서의 목표를 가지고 도시계획이 시행됐다. 화성 완공 직후 인구유입이 기대만큼 신통 치 않자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유인책을 강구한다. 수원을 한양과 마찬가지 등급의 도시로 격상하는 특별법을 포고하기도 하고, 각종 금융특혜를 시행하기도 했다. 예를들어 서울과 개성의 부자들이 수원에 전방(廛房)을 설치하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 10만냥을 무이자로 융자 해 주었다. 토박이 화성상인들에게는 7만냥을 융자해 주었다. 이런 특혜조치 1년만에 수원읍 의 인구는 1,000호가 넘게됐고, 인근에서는 가장 큰 거점도시로 급성장할 수 있었다.
수원은 철저하게 자생력을 가진 자족도시를 지향했다. 도시민 모두가 상업에 종사할 수 만 은 없었고, 여전히 인구 대다수는 농민들이었다. 정조는 수원에서 농업경영체를 실험했다. 만석거라는 7만평의 저수지를 축조해 농지를 조성하고, 국영농장인 대유둔을 경영했다. 또 서호 옆에는 서둔을 경영해 농부들을 고용해 임금을 줄 수 있었다. 고용된 농가 2집마다 소 한 마리를 대여해 농사에 활용케 했다. 대여한 소들은 농사에만 활용될 뿐 아니라, 번식과 매매가 성행하게 됐다. 수원의 소시장은 전국 3대 시장으로 성장했고, 유명한 수원갈비 집 들도 번성한 소시장의 여파로 생기게 된 것이다. 수원에 아직도 서울농대가 자리잡고 있는 유래도 뿌리가 깊다. 수원갈비와 함께 2세기 전 정조의 야망이 변형된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 성곽의 요소와 시설물들
성곽의 계획은 지형을 철저히 분석해서 활용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지형적 이점을 잘 활용하면 최소의 노력과 공사로 방어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화성의 입지는 서쪽에 높은 팔달산이 있고 남북으로는 평지며, 동쪽에는 낮은 구릉이 감싼다. 지형에 철저히 맞추 어 축조한 결과로 구불거리고 불규칙한 전체 윤곽선을 얻었다. 이렇게 축조된 성곽의 총 길 이는 5,418m에 이른다. 여기에 설치된 여러 가지 기능의 건물과 시설들을 간략히 소개한다. (표1)
장안문과 팔달문은 2층 루각의 문루를 올렸고 바깥에 반원형의 옹성을 둘렀다. 성문의 좌우에는 높고 육중하게 돌출된 적대를 두어 성문 좌우에서 적군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화서문 옆에는 서북공심돈을 두어 감시와 공격의 기능을 배가 시켰다.
암문(暗門)은 외부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위치시킨 비밀 출입구로 문루를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외관은 보통 반원형 벽을 올려 독특한 모습을 취한다. 암문은 규모도 작고 곡선들을 사용하므로 전돌로만 이루어진다.
북수문인 화홍문은 화성의 대표적인 건축이다. 7개의 아취를 틀어 수로를 확보하고 아취 위 는 다리가 된다.
시설물 갯 수 기 능
문루 4 동서남북 네 곳에 둔 성문(장안문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
암문 5 누각을 두지 않는 비밀 출입문(동서남북의 4암문과 서남암문)
수문 2 하천에 만든 수로문(화홍문 남수문)
적대 4 성문 좌우에 높게 돌출된 감시소(북문과 남문의 동서 적대)
노대 2 성밖의 동태를 살피는 지휘소(서노대 동북노대)
공심돈 3 다층구조의 높은 전망대 및 공격소(서북 남 동북공심돈)
봉화돈 1 봉화를 피워 신호를 전하는 통신소
포루 5 군사가 주둔할 수 있는 소대본부(동구 북 서 동1 동2포루
장대 2 지휘소가 있는 사령부 2층 누각(서장대 동장대)
각루 4 성곽 모퉁이에 설치한 전망소 겸 초소본부(동북 서북 서남 동남각루)
치성 8 치만 돌출시킨 감시대(북동 서1 서2 서3 남 동1 동2 동3치)
화홍문에는 긴 루각 건물을 세웠지만, 남수문은 루각없이 다리만 만들어졌었다.
노대는 지휘소인 장대와 인접하여 성 내외의 전체적인 동태를 살피는 시설이다. 서노대는 팔각 피라밋 모양으로 전돌을 쌓아 구성했다. 서장대는 뾰족한 2층 루각의 독특한 건물이다. 장대 앞에는 깃발을 세울 수 있는 게양대를 마련하여 성내 지휘본부로서 위용을 갖췄다. 팔 달산 위에 설치된 서노대와 서장대는 화성 방어사령부가 위치한 핵심부였다.
공심돈은 화성의 구조물 가운데 가장 독특하며 아름다운 형태를 가진다. 돈이란 원래 망을 본다는 뜻의 독립 망루였다. 돈에는 항시 소수의 군대가 머물면서 초소 역할을 한다. 공심돈은 돈대의 내부를 비워 여러 층으로 구성하고, 각 층마다 주변을 살피고 공격을 가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서북 공심돈은 모서리를 굴린 사각형의 높은 망루를 세우고 목조 포대를 세웠다. 수평적으로 펼쳐진 성곽 가운데 우뚝 솟은 수직적 형상과 돌과 벽돌을 나누어 여러 층으로 쌓은 디테일이 아름다운 건물이다. 동북공심돈은 벽돌로 원통을 쌓고 그 안에 나선형의 계단을 설치한 독창적인 모습이다. 나선형 계단 때문에 소라각이라고 부른다.
포루(砲樓)는 일명 적루라고도 하며, 돌출된 치성 위에 높은 여장을 쌓고 내부에 포대를 주 둔시킨 강력한 화력기지다. 외부의 공격에 대해서도 견고하도록 축대와 여장 모두 벽돌로 구축했다. 높은 여장 때문에 루각의 벽체가 가려지고, 지붕만 얹혀져 있는 견고한 외형이다. 또 다른 포루(鋪樓)는 치성 위에 다락집을 올려 병사들이 주둔할 수 있게 만든 시설이다. 성 안에서는 2층건물이지만, 바깥에서는 1층건물로 보인다.
■ 아름다운 것은 강하다
축성 동기와 과정에 얽힌 역사적 배경을 무시한다면, 화성은 더없이 아름다운 여러 폭의 그림이다. 지형을 따라 구불거리는 성곽의 곡선들, 적절한 간격으로 돌출되고 우뚝 솟은 공심 돈과 치성들, 날아갈 듯 언덕 위에 자리잡은 방화수류정과 용연의 어울어짐, 7개 아취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화홍문, 환경조각을 연상케하는 봉수대의 굴뚝들,… 무엇보다도 이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는 집합적 아름다움.
그러나 화성은 관광용 눈요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싸우기 위한 군사용 건축이 다. 직접적으로 화성성곽을 사용하고 관리한 집단은 왕실 친위부대였다. 외침과 전쟁에 대한 우려가 없었다면 화성성곽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군사용 건축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니, 아름다움이 사기를 저하시키는 주범이라 믿는 전략가들에겐 용납될 수 없는 현상이 다.
아름다운 성은 화성 뿐만이 아니다. 해미읍성도 온달산성도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동화의 무대가 될 정도로 아련한 중세 유럽의 카슬과 부르크들, 르와르 강변의 낭만적인 샤또들, 산 마리노의 처절하게 감동적인 산성들.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 일본 히메지 성의 비장감이나 중국 만리장성의 웅장함까지도.
왜 세상의 모든 성들은 감동적인가? 거기에는 주민의 재산과 영주의 목숨을 담보로 한 생존 의 미학이 있기 때문이다. 생존에 장애가 될 일절의 가식이나 과다함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견고하게 구축됐기 때문이다.
웬만한 공격에는 무너지지 않는 강인함, 세월의 침식에도 굳건하게 자세를 유지해 온 끈질김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기능적이면서 가장 강한 건축이 바로 성곽이고, 동시에 가장 아름 다운 건축이기도 하다.
감동을 주지 못하는 성곽도 있다. 그런 성들은 대부분 쉽게 함락된 곳이며, 마지못해 상징적으로 축조된 부실한 성들이다. 강하지 않은 성, 절박한 생존의 희구가 없는 성들은 아름답지 않다. 적어도 성곽건축에 있어서 강함과 아름다움은 결국 하나다. 화성 축성에 심혈을 기울 이던 정조에게 입바른 신하들이 비판했음직한 명분이 있었다.
왜 군사용 건축을 이처럼 예쁘게 짓습니까? 용맹하고 험악해야 적을 물리칠 것 아닙 니까? 일설에 의하면 정조는 한마디로 이렇게 나무랬다고 한다.
아니다, 이 몽매한 신하들아. 아름다움이 곧 적을 이기느니라.
■ 모방과 창조의 사이
박제가의 『북학의』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기 전까지 화성은 하나의 불가사의였다. 문화적 다양함이 약화된 조선후기 건축계에서 화성은 어느 순간 불쑥 솟아난 돌연변이였다. 아무리 실학사상이 집대성됐다고 하지만, 예비적인 실험도 없이, 큰 시행착오도 없이 어떻게 이런 건축이 가능했을까?
그러나 10년 전 북학파의 두 책을 읽고는 화성에 대한 경이로움은 이내 실망으로 바뀌었다. 다산의 천재적인 창작으로 여겼던 치성 옹성 등의 성제는 중국 변방의 성곽들에 모두 있었 고, 현실적 필요에서 대두됐다고 믿었던 벽돌 사용론은 북학파들의 외제 수입론에 불과했다.
화성에 대한 예비지식이 부족한 데서 온 부정적 놀라움이었다. 어찌됐건 한국건축 전통의 우수함과 다양함을 입증할 최고의 명작이 갑자기 수입 모방품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면 그렇지, 어디 조선후기에 이렇게 좋은 건축을 창작할 수 있었겠나.‘
그러나 다시 몇 년전, 화성은 내게 한층 더 소중한 건축적 자산으로 자리잡게 됐다. 몇차례 중국 베이징(北京)과 야오닝(遼寧) 지방을 답사한 다음이다. 중국 여러지역의 만리장성은 웅장하기는 하되 화성의 디자인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이 떨어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 었다. 획일적이고 단순 반복적이었다. 변화와 통일성을 동시에 갖춘 화성의 집합적 아름다움 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야 깨달았다. 성제의 원리와 사용된 재료는 비록 수입된 것이지만, 18세기의 건축가와 기술자들은 중국 오리지날 보다 훨씬 세련되고 합리적이고 아름다운 건축을 만든 것이다.
원리와 이론을 수입한 것은 문화의 도입이지만, 디자인을 수입한 것은 모방이다. 화성은 원 리마저 비판적으로 선별 수입하고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디자인은 아예 중국 것 과 거리가 먼 독자적인 창작이었다. 사실 한국건축의 모든 이론적 원형은 중국에, 그것도 고 대 중국에 있었다. 궁궐과 사찰, 서원과 향교, 도시와 성곽까지 어느 하나 중국의 제도를 따르지 않은 것이 있으랴. 그러나 창덕궁과 통도사와 병산서원과 화성은 중국 어디에도 없는 궁궐이며 사찰이고, 서원이며 성곽이다.
화성의 위대한 성취는 선진 문화를 원리와 핵심만을 수용했던 비판적 자세와 사회 전반에 성숙된 디자인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극히 제한된 외국의 정보를 듣고도 핵심을 파악했고, 그를 현실에 맞게 변용시켰으며, 전혀 새로운 창작이 가능했던 시대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 비판적 지적수준, 문화적 자신감, 그리고 디자인의 총체적 역량. 이 모든 것이 심각하게 부족한 지금의 디자인계는 화성을, 그 시대를, 그리고 그때 출현한 천재들을 그리워해야 한다.
■ 『화성성역의궤』와 화성 복원
화성은 일제기에 심각하게 훼손된다. 전통 도시의 중심시설이었던 행궁이 철거되고, 성곽 곳곳은 무관심과 의도적 훼손으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6.25 전쟁의 시가전으로 결정적인 타격 을 입는다. 장안문은 문루가 없어졌으며, 포루 공심돈도 대부분 파괴됐다. 특히 영세상인들 이 밀집한 남문 부근의 훼손이 극심했다. 남공심돈이나 남수문은 흔적도 찾기 어려웠다.
현재 화성의 복원공사는 1975년 시작됐다. 엉터리 날치기 문화재 복원공사에 길들여진 현대 한국인에게 화성 복원은 또 하나의 돌연변이였다. 전문가가 아니면 복원 사실을 모를 정도로 원형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형태적으로도 수준급이었다. 이처럼 충실한 복원이 가능했던 것은 일제기에 작성된 실측도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실측도면은 주로 문루와 방화수류정 등 목조건축을 대상으로 했으며 성곽 자체에 대한 도면 은 아니었다. 암문 등 실측도면이 없는 시설물이 거의 원형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화성성역의궤』라는 획기적인 공사기록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와 신하들은 화성이라는 찬란한 건축을 후대의 수원시민들에게 남겨줬을 뿐 아니라,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라는 한국건축사상 가장 정확하고 풍부한 건축서를 선물했 다. 전체 분량 640여장에 달하는 방대한 이 책자는 화성 완공 직후부터 쓰기 시작하여 1800 년 금속활자본으로 출간됐다. 이 책은 머리책(首卷) 1권, 몸책(本卷) 6권, 부록(附編 ) 3권 등 총 10권으로 구성됐다.
머리책에는 공사일정과 공사감독관 명단, 그리고 성곽시설물 각부분을 그림으로 설명한 도 설(圖說)이 수록되었다. 몸책 1권에서 4권까지는 공사 관련 공문서와 정조의 명령, 어전회의 기록, 상량문, 장인들의 명단과 지급된 노임규정 등이 수록됐다. 5권과 6권에는 시설물별로 소요된 각종 자재명칭과 수량이 상세하게 기록됐고, 그밖에 공사에 소요된 비용의 출납내역 이 자세하다. 부록은 화성 안에 왕의 임시처소로 세워진 행궁 건설과 관련된 기록들을 수록했다. 얼마나 자세하던지 보고서를 읽으면 공사 당시의 상황과 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을 정 도다.
『화성성역의궤』는 또 하나의 화성이다. 건축물로서의 화성은 파손되고 변형될 수 있지만, 기록으로서의 화성은 영원히 원형을 유지할 것이다. 특히 머리책의 여러 도설들은 각종 구 조요소들까지 상세한 이름을 밝히고 있어서 한국건축 연구에 가장 중요한 문헌이 됐다. 정 조와 그의 시대는 정말 대단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 성 안팎에 남겨진 건축들
화성 축성 당시에 함께 지어진 중요 건물들로는 수원부 치소이며 국왕의 행차시 거처인 화 성행궁과 객사인 우화관, 사직단과 문묘인 화성향교가 있었다. 그리고 정조 사후에 정조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지내던 화령전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성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세 도세자 릉인 현륭원 옆에 원찰로 지어진 용주사도 정조 당시의 건축이다.
화성행궁(華城行宮)은 13동의 주요건물과 행각으로 이루어진 총 600여칸의 대규모 건물군이 었다. 매우 중요한 행궁이었던 남한산성 광주행궁이 227칸임에 비해 두배 이상 큰 행궁이었다. 화성행궁은 19세기까지 보존됐으나 1910년 수원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자혜의원이 들어서면서 파괴되고 말았다. 나중에는 그 앞에 수원경찰서가 주둔하면서 영역까지 자취를 감추었다. 남아있는 건물은 현 신풍초등학교 구내에 있는 낙남헌이 유일하다. 그러나, 현재 행궁 터를 정비하고 중심건물인 봉수당(奉壽堂) 등을 복원하고 있어서, 완공되면 과거 화성행궁의 영화를 일부나마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낙남헌(洛南軒)은 행궁의 별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건물 뒤쪽에 행각이 붙어서 전체적으로 ᄀ자형을 이룬다.
예의 벽체석연으로 꾸민 기단 위에 정갈하게 다듬은 사각 주춧돌과 계단들이 궁실건축 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수원부 객사인 우화관(于華館)은 현재 신풍초등학교 건물 자리에 있었다. 중앙에 3칸 정당이, 좌우에 역시 3칸 익랑이 붙은 전형적인 조선조 객사건물이었다고 추정된다.
사직단은 원래 화서문 밖에 있었지만 통행에 방해가 되어 광교산 아래로 멀리 옮겨졌고, 현 재는 위치마저 불분명하게 유실되었다. 화성문묘(華城文廟, 현 수원향교)는 팔달문 밖 남쪽 경사지에 세워졌다. 5칸 명륜당과 역시 5칸 대성전, 좌우의 동서재와 동서무 모두 겸비한 본격적인 규모였다. 교육공간인 명륜당 영역이 앞에, 제사공간인 대성전과 동서무가 뒤에 있는 형식이며, 잘 다듬어진 석조와 정교한 목조건물이 조화를 이룬다. 일반적인 지방향교와는 다르게 고급의 기법들이 사용됐다.
화령전(華寧殿)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신 사당이다. 군왕이 죽으면 위패를 종묘에 모시고, 초상화를 궁내 선원전에 모셔 제사지낸다. 위패는 혼백을 의미하지만, 초상화는 육신을 의미한 다. 화령전은 죽은 정조를 인간 그자체로 사모하는 곳이다. 1801년 순조 2년에 완공되어 아 들인 순조가 몇차례 행차해 제사를 지냈다. 정당인 화령전과 부속건물인 이안청이 직각으로 떨어져 놓이고 그 사이를 행각으로 연결했다. 왕실의 사당답게 근엄하면서도 장식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정조, 8일간의 화성행차
한 영 우 / 서울대 교수
■ 정조는 어떤 임금인가
십팔세기 후반기는 세계사의 흐름이 숨가쁘게 근대를 향해 치닫고 있던 시기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대혁명(1789)이 준비되고, 러시아에서는 피오트로대제가 페테르스부르크를 건설하면 서 러시아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미국이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1789), 신도시 워싱턴을 수도로 정했다.(1800). 세계사의 숨가쁜 변동에 중국도 동참했다. 1736년에 시작된 건륭황제의 통치가 60년을 지속하면서 청문화를 절정기로 끌어 올렸다. 18세기 후반기의 청은 이제 더 이상 오랑캐가 아니었다. 세계 각국에서 시민사회를 여는 계몽군주가 등장하던 18세기 후반에 조선왕조에도 백성을 향해 바짝 다가선 영명한 군주가 등장했다. 25세의 청년으로 왕위에 오른 22대 임금 정조 (재위 1776-1800)가 바로 그다. 통치기간은 비록 24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가 남기고 간 발자취는 굵고 화려했다. 과연 정조의 치세는 왕조문화의 절정기인 동시에 유교적 근대화를 추진하던 시기였다.
정조의 치적이 화려하게 보이는 것은, 통치 자체가 화려하기도 하지만, 그 통치를 적나라하게 기록으로 남긴 뛰어난 연출력에도 원인이 있다. 조선왕조 전체가 기록문화의 전성기이지 만, 정조시대의 기록문화는 가히 모범적이다. 특히 화성(華城) 건설과 화성행차에 관한 자료 는 기록문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만큼 장엄하다. 바로 그 점이 정조와 다른 임금을 차별 화하는 요소 중의 하나다. 기록한다는 것은 자신감의 표현이다. 자신감은 도덕성에서 오는 것이고, 그 도덕성은 백성과 나라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정조는 당쟁에서 승리하여 오랫동안 정치적․문화 적 특권을 누려온 오만한 서울 양반을 누르고, 때묻지 않고 개혁적인 지방선비로 정치권을 수혈함으로써 정치탕평을 가져오려 했다. 경제는 농업 일변도에서 탈피하여 상공업의 진흥 을 통해 새로운 국부(國富)를 창출하고자 했다. 문화는 건실한 향촌문화를 대변하는 실학(實學)과 기술혁신을 강조하는 북학(北學)을 모두 포용하여 사상탕평을 추구했다.
정조가 추구하는 정치개혁․사회개혁은 강력한 지도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환경에서 왕권 강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조는 장용영(壯勇營)이라는 친위부대를 육성하여 왕권의 군사적 기반을 구축했다. 뒤주에 갇혀 불명예스럽게 죽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라는 것도 정조에게는 크나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정조의 통치철학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孝誠)과 추모사업은 매우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정치공간의 창출도 왕권강화에 유리하다. 그 정치공간이 군사요지이면서 아버지 추 모사업과 연결된 곳이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화성(華城)이 바로 그러한 다 목적 공간, 즉 정치공간, 군사공간, 아버지 추모사업의 중심공간으로 선택된 것이다. 충성스런 두뇌집단의 결집은 왕권강화를 고차원적으로 뒷받침한다. 그래서 규장각(奎章閣)이 라는 국왕 직속의 정치기구, 학술기관이 탄생한 것이다. 정조는 학문이 뛰어난 군주였던 까닭에 무단적인 방법으로 왕권을 키우지 않고, 세련된 문 치로 근왕세력과 백성의 신임을 끌어들이면서 정치적 라이벌을 압박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갔다.
■ 1795년 화성행차의 목적
천칠백구십오년은 정조에게는 매우 뜻깊은 해였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지 20년이 된 해요, 새로운 정치공간, 군사공간, 경제와 문화공간으로서 전 해에 착공한 화성(華城) 신도시 건설 이 준공을 앞두고 있는 해였다. 그보다도 더 뜻깊은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1월 21일로 주 갑(周甲)을 맞이하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가 6월 18일로 역시 회갑(回甲)을 맞이하는 해라는 것이다. 보통사람이라도 회갑은 중요한 행사이지만, 정치적 통한을 품고 저승으로 간 아버지와, 남편 의 통한을 씹어 삼키면서 살아온 어머니의 회갑이 겹친 이 해를 그 아들 정조가 어찌 무심하게 넘길 수 있는가. 이제 남은 문제는 회갑을 어디서 어떻게 치르느냐이다. 죽은 아버지에게는 참배(參拜)를, 살 아 있는 어머니에게는 진찬(進饌)을 해야 한다면, 그 장소는 당연히 화성일 수밖에 없다. 참 배를 위해서도 화성엘 가야하고, 잔치를 위해서도 화성의 신궁(新宮)은 안성맞춤이다. 더욱 이 화성은 정조의 온갖 꿈이 담긴 곳이 아닌가.
화성은 왜 건설했는가. 표면상으로는 아버지의 능침(永祐園)을 양주(楊州)에서 화성 남쪽의 화산(花山 顯隆園)으로 옮기면서 능침을 수호하는 도시로서 화성 건설이 필요하다는 것이 표방되었지만, 사실은 아버지 무덤을 이곳으로 옮긴 것 자체가 원대하고 다양한 목표를 담 은 포석이라고 볼 수 있다. 화성은 크게 보면, 왜란 이후 노출된 서울 남방지역의 방어상 취약점을 보완하는 군사도시로서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화성을 현대 총포전에 대응할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지로 만 들기 위해 실학자들이 주장한 중국 성곽제도의 장점과 새로운 건설공법을 과감하게 도입했 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성곽도시 중에서 당시로서는 가장 현대적인 성곽도시를 만들었다. 그 리고 화성 인근의 군사들을 협수체제(協守體制)로 묶고, 5천명의 대군을 주둔시켰다. 정조는 이렇게 요새화된 화성을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켜 서울 다음의 위상을 부여하였다. 이는 화성이 단순한 군사도시가 아니라, 수도(首都)에 준하는 정치도시임을 의미한다. 정조가 화성으로의 천도까지 염두에 두었는지, 말년의 은퇴지로 생각했는지, 아니면 단순한 서울의 배후도시로 간주했는지 그 숨은 의도는 불분명하다. 다만, 화성건설에 쏟은 정조의 관심과 정열은 태조가 한양건설에 쏟은 것에 비견될 만하였다.
정조는 화성경제 건설에도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주민 모두가 화락하고 부유하게 사는 도 시를 만들기 위해 화성 주변에 시범적인 국영 농장(대유둔, 서둔 등)을 건설하고, 사방에 만 년제(萬年堤, 남), 만안제(萬安堤, 북), 축만제(祝萬堤, 서), 만석거(萬石渠, 북) 등의 수리시설 을 축조했다. 이곳에서 농사짓는 농민도 윤택하고, 여기에서 받아들이는 세금은 화성경영에 투입함으로써 자급자족의 도시가 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화성은 단순한 농업도시가 아니었다. 이미 1791년에 통공(通共)정책으로 사상(私商) 의 상업활동을 허락한 정조는 상업의 중요성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으며, 화성을 농상(農商) 이 병진하는 이용후생의 도시로 키웠다. 더욱이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될 회갑행차에 화성의 지역주민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대 대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자신의 군대장악력을 과시하고, 서울에서 화성에 이르는 100리 길 연도의 주민과 온 국민들에게 왕권의 위엄과 은혜를 과시하는 행사를 곁들인다면, 회갑 잔치의 효과는 백배나 커질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꿈이 담긴 신도시에서 성인군주상(聖人君主像)과 효자상(孝子像)을 한꺼번에 온천하에 과시한다면, 그 이상 효과적인 정치적 시위 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의 왕권마저 넘나보는 구세력(노론 벽파)을 제압하는 정치드라마, 바로 여기에 1795년 화성행차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1795 년의 화성행차는 정조의 명예와 자존심을 건 획기적 행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 행차의 준비
천칠백구십오년의 화성행차는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정조의 화성행차는 1789년에 사도세자 능침이 양주에서 화산으로 이전한 이후부터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연례행사로 이어져 왔 다. 능침인 현륭원(顯隆園)에 참배하기 위함이었다. 코스는 한강을 건너 노량진의 만안고개- 지금의 숭실대학 앞-남태령고개-과천-찬우물-지금의 인덕원 사거리를 거쳐 수원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런데, 1795년의 행차는 종전과 다른 코스를 택하고, 한강을 건너는 방법도 개선하였다. 즉 과천코스를 버리고, 지금의 대방동에서 시흥과 안양을 거쳐 군포, 의왕, 지지대고개, 노송길 로 통하는 시흥로를 택하였다. 아니 길을 택했다기보다는 이 길을 새로운 길 즉 신작로(新作路)로 개척했다. 과천로를 포기한 이유는 남태령을 넘기가 힘들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 였지만, 찬우물 곁의 김약로(金若魯) 무덤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야사는 전한다. 김약로는 사도세자 죽음에 깊이 관여한 김상로(金尙魯)의 형이다. 시흥로는 1794년에 완성되었는데, 서울에서 현륭원에 이르는 이 도로에는 24개처의 다리가 새로이 건설되었다. 그 중에서 지금 안양시 석수동에 남아 있는 만안교(萬安橋)는 1795년 9 월에 경기감사 서유방에 의해서 완공된 것으로서, 길이가 31미터, 너비가 8미터에 이르는 아름다운 아치형의 돌다리다. 시흥로는 뒤에 더욱 확장되어 전국 10대 대로에 들어가는 간선 도로가 되었다.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1,700여명의 수행원들과 더불어 한강을 안전하게 건너는 문제도 행차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원래 행차가 한강을 건널 때는 배를 타고 건너는 것 이 오랜 관례였다. 그러나 이때 수백척의 민간 경강선(京江船)을 징발하는데서 오는 민폐가 매우 컸다. 정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강에 배다리, 즉 주교(舟橋)를 놓는 법을 강구하여 현륭원을 참배할 때 배다리를 이용했다. 그러나, 기술적인 미숙으로 인하여 공사기간 이 길어지고,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다. 정조는 이를 시정하기 위해 여러 차례 새로운 설계를 신하들에게 명하고, 자신도 직접 신하들이 올린 설계를 수정하여 마침내 가장 비용이 적 게 들고 안전한 배다리를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배다리 공사는 1795년 2월 13일에 시작되어 2월 24일에 완공되었는데, 36척의 배를 나란히 배치하여 이를 삼판(杉板)으로 연결하고, 그 위에 횡판(橫板)을 까는 방법을 썼다.
도로건설에 못지 않게 행차에 중요한 것은 주관기구의 설치와 행차비용의 마련이다. 정조는 주관기구로서 정리소(整理所)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고, 신임하는 신하들을 정리사(整理使) 로 임명했다. 정리소의 최고책임자는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이 맡고, 정리사에는 심이지(沈 之, 수어사), 서유방(徐有防, 경기관찰사), 이시수(李時秀, 호조판서), 서유대(徐有大, 장용내 사), 서용보(徐龍輔, 총융사), 윤행임(尹行恁, 규장각신)이 각각 임명되었다. 행차비용은 10만냥을 목표로 하여 포곡(逋穀), 모미(耗米), 이자 등의 수입으로 충당하고, 국 가의 공식적인 경비는 쓰지 않았다. 그리고 10만냥을 모두 행차에 쓴 것이 아니라, 그 중 2 만냥을 정리곡(整理穀)이라는 펀드를 만들어 농민들의 농사자금으로 대여하고, 1만냥은 제주 도 빈민을 위해서 썼으며, 1만냥은 화성의 둔전을 건설하는데 썼다. 그러니까 행차비용의 약 절반은 공익을 위해서 쓴 것이다. 정조는 어디까지나 행차비용을 민국(民國)을 위해서 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정조는 1795년 윤 2월 9일을 행차날자로 잡았다. 사도세자의 주갑(周甲)은 1월 21일이었는 데, 이날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 지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구내 소재)에 가서 참배하는 것으로서 주갑행사를 마쳤다. 혜경궁의 회갑은 6월 18일이었지만, 회갑행차는 앞당겨 윤 2월로 정한 것이다. 농사철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 대신 6월 18일 서울의 연희당(延禧堂)에서 진짜 회갑잔치를 다시 거행했다. 왕은 행차를 떠나기 앞서 시흥행궁, 노량행궁, 사근행궁 등 현지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신하들이 행차를 빙자하여 백성들로부터 물품을 뜯어내는 등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감시하였다. 정조는 암행어사만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아 여러 차례 전교(傳敎)를 내려 신하들의 과잉충성을 경계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먼 지방의 진기한 음식을 구해다 바치지 말고, 음식맛도 사치하고 화려하게 하지 말 것.
2) 각 참(站)에서는 절대로 개인적으로 물품을 진상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3) 기생과 정재(呈才)를 각 도에서 뽑아 올리지 말고, 궁중에서 일하는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에서 뽑아서 쓸 것이며, 악공(樂工)과 기생들의 복장은 깨끗하 되 화려한 것을 구하지 말 것.
4) 왕에게 올리는 진찬(進饌)은 10여 그릇을 넘지 않도록 하고, 전반적으로 음식을 높 게 쌓지말 것.
5) 연희음악은 간편하게 하고, 악기(樂器)도 서울에 있는 것과 화성에 있는 것을 보수해서 쓸 것.
6) 농사철이 가까우므로, 회갑잔치와 군대들의 호궤( 饋)에 10마리 이상의 소를 잡 지 말고, 진연(進宴)에서는 쇠고기를 쓰지 말 것.
7) 수행원들은 종자(從者)를 함부로 데리고 다니지 말 것.
8) 왕은 각 참의 수라간에 직접 들어가서 음식이 너무 과도한가 혹은 사치스러운가 를 조사할 이며, 만약 법도를 어긴 자가 발각되면 처벌한다.
이 밖에도 앞으로 8일간 치르게 될 각종 행사의 준비가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예를 들면, 행차로의 인근에 있는 종실의 무덤과 서원(書院), 사우(祠宇)에 대하여 관리를 보내 제사를 올리고, 행차로의 24개처 요지에 수천명의 척후복병(속오군)을 배치하여 왕의 신변보호를 도모하고, 각 참에는 온돌, 점화, 음식, 깔개 등을 준비할 책임자를 따로 따로 임명해 놓았다. 행차에 쓰일 779필의 말은 서울 주변의 역마(驛馬)와 태복시의 말과 군용마(軍用馬)에서 차출되었다. 왕의 행차를 직접 따라가는 인원은 1,779명이었지만, 실제로 현지에 먼저 내려가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과 군인들을 모두 합치면, 약 6천명이 동원되었으니, 이들이 먹을 음식과 숙박 처를 준비하는 일도 대단한 일이었다
■ 화성을 향해서 떠나다
윤 2월 9일 새벽에 드디어 행렬은 창덕궁을 떠났다. 경기감사 서유방과 총리대신 채제공이 앞에서 선도하고, 말을 탄 115명의 악대가 몇 개조로 나뉘어 북과 징, 나팔, 바라, 적 등의 악기를 연주하면서 흥을 돋구었다. 230여명의 군인들이 각종 오색 깃발을 휘날리면서 행차 의 위엄을 높여주었다. 기나긴 행렬의 중앙에 혜경궁 가마가 삼수병(三手兵)의 호위를 받으면서 갔다. 왕이 타기로 되어 있는 어가는 혜경궁 가마 앞에서 갔지만, 실제로 왕은 가마를 타지 않고 혜경궁 가마 뒤에서 말을 타고 가면서 쉴 때마다 혜경궁에게 미음을 올리면서 문안을 드렸다. 그 뒤에 한참 떨어져 정조의 두 누이가 탄 가마가 따랐다. 많은 사람들은 이번 행차에 왕비(효의왕후 김씨)가 따라가지 않은 것에 대해 의아해 한다. 그 이유는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할머니 정순후(貞純后, 영조의 계비)만을 궁에 남기고 왕비를 데리고 나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본 것 같다. 할머니 정순후는 당시 51 세였다. 혜경궁보다도 오히려 10세나 아래다. 그런데, 정순후는 바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처지였기 때문에 정조와의 사이가 좋을 까닭이 없었다.
돈화문 앞을 출발한 행렬은 지금의 단성사 앞을 지나 보신각 앞을 돌아 남대문로로 접어들었다. 여기서 다시 신세계백화점 앞을 지나 남대문을 나와서 청파역을 거쳐 용산에 이르렀다. 청파역은 지금의 서울역에 해당하며, 청파역에서 용산에 이르는 길은 뒤에 철도가 놓여졌다. 행렬이 지나는 곳마다 구경나온 민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행렬은 지금 한강대교가 있는 곳에 가설된 배다리를 건너 노량진의 임시행궁인 용양봉저정 (龍양鳳저亭, 상도터널 입구)에서 점심을 들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용양봉저정은 한말일제 시대에 대부분 헐리고 지금은 한 채만이 외롭게 남아 있다. 노량진에서 휴식을 취한 행렬은 다시 영등포쪽을 향해 가다가 지금의 수산시장 입구 부근에 서 왼쪽으로 돌아 만안고개(萬安峴)로 올라갔다. 이 고개는 소사고개 혹은 만냥고개라고도 불린다. 이 고개를 넘으면, 왼쪽으로 봉천동으로 통하고, 오른쪽으로는 상도동 장승백이를 만난다. 행렬은 장승백이를 거쳐 상도동길을 따라 직진하다가 대방동에서 좌회전하여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행렬이 시흥(始興) 행궁에 도착한 것은 저녁무렵으로서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곳은 지금 서울시 금천구 시흥 5동에 해당한다. 지금 행궁은 간 곳 없고, 행 궁 부근에 있던 수백년된 은행나무 몇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그 다음날 아침 지금의 시흥대로를 따라 안양, 군포를 거쳐 의왕시의 사근참(사그내) 행궁에 서 점심을 들고 휴식을 취했다. 이곳은 지금 1번국도(경수산업도로)와 과천-의왕간 고속화 도로가 만나는 지점으로 의왕시 왕곡동(골사그내)에 해당한다. 사근참에서 휴식을 취한 어가는 다시 지지대고개를 향해서 발길을 재촉했다. 이 고개는 원래 사근고개로 불렸으나, 원행이 시작되면서 미륵고개로 바꾸었는데, 정조가 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를 넘으면서 현륭원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안타까와하여 천천히 떠나라고 한 데서 이름을 지지대고개로 부르게 되었다. 지지대고개를 넘은 행렬은 지금 효행기념관 뒷편의 길을 따라 내려가 괴목정교(槐木亭橋)를 거쳐 노송(老松)지대로 접어들었다. 여기서 다시 만석거(萬石渠)-영화정(迎華亭)을 거쳐 장 안문으로 들어가 팔달산(八達山) 아래 행궁(行宮)에 도착한 것은 저녁이었다. 장안문에서는 화성유수 조심태(趙心泰)가 장관(將官) 이하 군병들을 거느리고 길옆에 엎드려 어가를 맞이했다. 서울에서 화성은 보통 하루거리지만, 혜경궁의 피곤을 염려하여 천천히 갔기 때문에 이틀이 걸린 것이다.
혜경궁은 화성행궁의 장락당(長樂堂)을 침소로 사용했고, 왕은 중양문 왼쪽의 유여택(維與宅)을 처소로 썼다.
■ 화성에서의 4일과 귀경길
*화성에서 첫날
화성에 도착한 다음날인 윤2월 11일 아침부터 현지행사가 시작되었다. 첫 방문지는 향교(鄕校)였다. 아침 일찍 왕은 향교의 대성전(大成殿)에 참배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聖賢)들 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유교입국의 의지를 밝히기 위함이다. 향교를 참배한 왕은 행궁으로 돌아와 낙남헌(洛南軒)에서 문과와 무과 별시(別試)를 실시하여 화성일대 인재들을 등용하였다. 화성과 그 인근지역 선비들과 무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함이었다. 문과는 5명으로서 화성사람 2명, 광주, 시흥, 과천에서 각각 1명씩 선발했다. 무과는 56명을 선발했는데, 주로 장용영 군병들이 합격했다. 오후에는 회갑잔치 예행연습을 했다. 파티에서 춤추는 것은 원래 기생이 전문가이지만, 왕은 사치스러움을 보이지 않기 위 해 일부러 이들을 동원하지 않고, 궁에서 바느질하는 침선비(針線婢)와 병간호를 맏고 있는 여의(女醫)들을 간단히 연습시켜 데려왔기 때문에 춤솜씨가 걱정스러워 예행연습을 한 것이 다.
*화성에서 둘째날
12일 아침에는 헤경궁을 모시고 사도세자의 능침인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했다. 울지 않기로 약속한 혜경궁이 통곡하자, 왕도 눈시울을 붉혔다. 28세에 남편의 비참한 죽음을 목도한 혜경궁의 슬픔이 오죽 했겠는가. 사도세자에 대한 회갑은 이렇게 오열로 끝났다.
이날 오후에는 팔달산에 올라가 3천 7백여명의 장용영부대가 화성을 방어하는 군사훈련을 대포와 총을 쏘면서 실전(實戰)처럼 실시하였다. 낭기(狼機), 조총, 신포(信砲), 삼안총(三眼銃) 등 화약무기가 총동원되었다. 야간에도 성 주변과 마을에 횃불을 밝히고 또 한 차례 군사훈련이 실시되었다. 왕은 갑옷을 입고 팔달산 꼭대기 서장대(西將臺)에 올라 군사를 직접 지휘했다. 화성이 서울을 방어하는 남쪽의 요새지로서 얼마나 든든하게 구축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자신이 장용영의 막강한 군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과시한 행사라고 할 수 있다.
* 화성에서 셋째날
13일은 이번 행차의 하이라이트인 회갑잔치가 행궁의 주건물인 봉수당(奉壽堂)에서 거행되었다. 혜경궁의 내외 친척들도 초대되었다. 내빈(여자친척)이 13명이요, 외빈(남자친척)이 69 명이었다. 왕과 신하들은 차례로 술잔을 혜경궁에게 올리고 천세(千歲)를 불러 축하했다. 그 때마다 음악과 정재(呈才)가 연출되었다. 왕과 신하들은 또 시를 써서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축원했다.
회갑잔치에서 연출된 정재는 헌선도(獻仙桃), 몽금척(夢金尺), 하황은(荷皇恩), 포구락(抛毬樂), 무고(舞鼓), 아박(牙拍), 향발(響 ), 학무(鶴舞), 유황곡(惟皇曲), 연화대(蓮花臺), 항항곡 (恒恒曲), 수연장(壽延長), 처용무(處容舞), 첨수무(尖袖舞), 검무(劍舞), 선유락(船遊樂) 등이었다.
이날 혜경궁에게는 70가지 음식과 42개의 상화(床花)가 올려졌으며, 주변에 모인 구경꾼들에게도 잔치상이 돌려졌다.
* 화성에서 넷째날
14일은 전적으로 화성일대 주민들을 위로하는 행사가 치러졌다. 새벽에는 화성부에 사는 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獨子) 등 결손가정 사람들 539명과 가난한 주민 4,813명에게 쌀과 소금 등을 나누어 주고, 죽을 쑤어 먹이었다. 쌀과 소금은 네 지역으로 나누어 배급되었는데, 나이와 남녀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이때 나누어 준 쌀이 모두 368석에 달했다.
왕은 직접 행궁 정문 누각인 신풍루(新豊樓)에 올라가 쌀을 주는 행사를 지켜보고, 죽을 직접 맛보았다. 냉죽이 아닌가 의심해서였다. 이 행사가 끝난 다음 왕은 낙남헌(洛南軒)에서 70세 이상 양반과, 80세 이상 서민노인 384명 과 171명의 회갑노인들을 불러 푸짐한 양로잔치를 베풀었다. 425개의 잔치상이 마련되었다.
양로연(養老宴)을 끝으로 공식적인 행사는 마쳤다. 왕은 몇몇 신하들과 화성에서 가장 경치 가 빼어난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을 방문하여 화성의 성곽을 시찰하고, 밤에는 득중정(得中亭)에서 신하들과 활쏘기로 몸을 풀었다. 왕의 활솜씨가 뛰어나 최고득점을 올렸다.
윤 2월 15일 드디어 화성에서의 모든 행사를 마치고 귀경길에 올랐다. 혜경궁의 회갑만을 자축하고 왔다면, 아마 왕은 존경받는 임금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회갑잔치는 화성에서 치른 여섯 가지 행사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화성과 그 인근 주민의 선비와 무사, 노인, 결손가정,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행사가 더 많았다. 각계각층을 골고루 위로해 준 셈이다.
귀경길은 내려갈 때의 길과 같았다. 올라올 때는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시흥에서 잠시 쉬는 동안 왕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 고충을 물었다. 원래 정조는 원행(園幸) 중 백성들의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을 통해 백성들의 고충을 직접 듣는 것을 관례로 행해오고 있었다. 그러한 관행이 이번 행차에서도 예외가 되지 않았다.
시흥 백성들은 말하기를 주저주저하다가, 왕이 나는 구중(九重)의 깊은 곳에 있어서 백성 의 질고(疾苦)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지척의 가마 앞으로 그대들을 불러 여러 폐단 을 직접 들어서 그대들이 행차를 바라보는 뜻에 보답하고자 한다라고 말하자, 백성들은 부역(賦役)이 많다는 뜻을 전했다. 왕은 즉시 환곡의 탕감을 명령하고, 호역(戶役)의 폐단을 줄이는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약속했다.
왕은 다음날 저녁 창덕궁에 돌아와서 행사참가자 전원에게 후한 상(賞)을 내리고 뒷풀이를 했다. 이리하여 8일간의 장엄한 행차는 끝이 났다.
■ 행차의 기록
왕은 이번 행차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받기 위해 기록을 남기도록 명했다. 그래서 편찬된 것이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라는 책이다. 또 최득현(崔得賢), 김득신(金得臣), 이명규(李命奎), 장한종(張漢宗), 윤석근(尹碩根), 허식(許寔), 이인문(李寅文) 등 일류 화 원들을 시켜 행차의 주요장면을 병풍으로 그리게 하였다. 대병(大屛)은 16좌를 만들어, 3좌 는 궁에 보관케 하고, 나머지는 총리대신과 7명의 정리소 당상, 5명의 정리소 낭청에 주었 다. 중병(中屛)은 5좌를 만들어 3좌는 궁중에, 2좌는 2명의 감관(監官)에게 주었다. 이 병풍 을 『진찬도병』(進饌圖屛) 혹은 『능행도병풍』(陵幸圖屛風)이라고 한다.
지금 국립박물관을 비롯하여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 호암미술관 등에 여러 종류의 『진찬 도병』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후세에 다시 모사한 것들이 있다. 이 병풍그림은 예술 적으로도 우수하지만, 행차 주변의 주민들이 엿과 떡 그리고 술을 즐기면서 축제분위기에서 행차를 구경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엎드려 부복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이 시대의 임금과 백성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를 보여준다.
1,500여쪽에 달하는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보면, 64쪽에 달하는 장엄한 행렬도(行列圖)를 비롯하여 행사의 주요장면과 회갑잔치의 춤장면, 파티에 쓴 꽃장식 등이 그려져 있고, 행차 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8일간 왕과 혜경궁, 그리고 신하들이 먹은 음식의 메뉴, 음식을 만드는데 들어간 재료의 종류와 양, 그리고 음식을 만드는데 들어간 비용 등이 그릇별로 적 혀 있다. 그 기록의 자세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서울대 규장각에서 원본을 영인 출간했으며, 수원시에서는 국역본 을 출간했다. 또 필자는 이를 쉽게 풀어서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다. 정조는 화성(지금의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면서도 꼼꼼한 공사보고서인 『화성성역의 궤(華城城役儀軌)』라는 책자를 만들어 공사에 참여한 수천명의 장인(匠人)의 명단과 근무 한 날짜수, 그리고 하루의 품값까지 적어 놓아 기록문화의 모범을 보여주었는데, 화성행차에 대한 보고서도 마찬가지였다. 화성이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성곽 건물과 더불어 이 공사보고서도 큰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18세기 당시 어느 나라에도 이 런 수준의 도시건설 공사보고서를 남긴 나라가 없다.
원래 조선왕조는 혼례식이나, 장례식 등 국가의 주요행사가 끝나면 반드시 의궤를 만들 어 그 전말을 소상하게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관례로서, 지금 서울대 규장각에만도 약 600 여종 2천5백권의 의궤가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정조임금 때 만든 의궤는 어느 의궤보다도 기록이 자세하고 화려하여 과연 이 시대가 왕조문화의 절정기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정조의 화성행차는 몇 년 전부터 수원시에서 매년 10월초에 재현하고 있으며, 내년부터는 서울시에서도 행사의 재현을 계획하고 있다. 아마 이 행사는 국내인은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인상적인 볼거리가 될 것이다.
화성 건설의 정치적 의미와 정치 세력의 동향
박 광 용 / 가톨릭 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들어가는 말
화성 건설의 주도자는 잘 알려진 대로 군주인 정조였다. 정조 임금이 화성을 건설한 것은 이곳에 비명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겼기 때문에 일품의 작위를 가진 관원이 거주하면서 묘소도 함께 돌보도록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킴으로써 그 체모를 높이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니 화성 건설은 정조의 개인적 효성이 지극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 올 수 있다. 하지만 화성은 예술적 측면에서 보면, 우리 나라 18세기 문화를 대표할 정도로 대단히 아름다운 성이기도 하다. 1794년(정조 18) 화성 축성을 지시한 정조 임금의 말을 빌리면 다음 과 같다. 현륭원이 있는 곳이 화산(花山)이고, 이 부(府)는 유천(柳川)이다. …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하였는데 화(華)자는 꽃이라는 뜻의 화(花)자와 통용된다. 화산의 뜻 은 대체로 8백 개의 봉우리가 이 한 산을 둥그렇게 둘러싸 마치 꽃송이처럼 보호하는 형세 라 하여 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유천성(柳川城)은 남북을 조금 길게 하여 마치 버들잎 모양으로 만들면 정말 의미가 있을 것이다. … 모퉁이의 인가들이 서로 어울려 있는 곳에 세 굽이로 꺾이어 천(川) 자를 상징한 것이 더욱 버들 내(柳川)에 꼭 들어맞지 않겠는가. 곧 화성은 지형의 아름다움에다 방어하기 편한 새로운 성곽 제도를 잘 맞추어 내어 유려하게 건설한 계획도시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당시 문화 능력을 총동원하여 군주권을 높여보려 했던 이벤트 사업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해석들만으로 화성 건설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 화성 건설까지는 이에 관여한 수많은 인물과 정파들이 또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다면, 군주라도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첫째로, 화성 건설 이전인 정조 13년(1789)에, 서울 근교에 있었던 사도세자의 묘소인 영우원(永祐園)에 뱀들이 많이 사는 등 불길한 징후가 있으므로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주장한 계열이 있었다. 사도세자를 가장 아꼈던 친누나 화평옹주의 남편인 금성위 박명원(錦城尉 朴明源)이 그 대표자였다. 그는 사도세자의 깊은 신임을 받아, 사도세자의 반대파인 김상 로․홍계희․정치달 등이 두려워했던 존재였다. 또한 사도세자가 비명에 죽은 후에도 영조 앞에서 거리낌없이 애통해 했다는 사실로도 유명하다.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宣禧宮)이 병으로 죽었을 때, 영조는 궁호를 의열궁(義烈宮)으로 개명하도록 명령했는데, 사도세자 의 생모이면서도 사도세자의 허물을 들어 영조에게 자식을 죽일 것을 진언했다는 사실 때문에 붙인 칭호라고 판단된다. 이에 박명원은 정조 12년에 이를 본래대로 선희궁으로 개명하도록 건의하여 실현시키기도 했다. 곧 박명원은 영조말년 외척당 계열의 전권에 대항한 노론 청명당(淸明黨) 계열이다. 우리에 게 잘 알려져 있는 연암 박지원의 삼종형이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박지원을 함께 데려감으로써, 『열하일기』를 쓸 수 있도록 한 장본인이다. 박지원은 규장각을 중심으로 성장 한 북학파의 스승이자 지도자였다. 박명원의 상소를 본 정조 임금 자신이, 직접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자고 제안하면서, 남인 윤선도의 문집과 도선의 풍수설을 근거로 거론함으로써 그대로 결정되었다. 하지 만 실은 그 상소문 자체가 수원으로 이장하겠다는 정조의 의중까지를 이미 염두에 두고 작성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박명원의 이러한 주장과 사실들은 사도세자가 죄인으로 죽었다는 잘못된 사실을 바로 잡음으로써 군주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이른 바 시파(時派)의 논리다. 연암의 삼종질로서 정조 16년에 우의정에 오른 박종악(朴宗岳) 역시 시파의 맹장으로서 벽파 영수 김종수를 공격했던 선봉장이었다. 화성 건설 때는, 북학파의 대표적 주장 중의 하나인 벽돌 사용하기가 그대로 적용되기도 했다.
다음으로는, 정조 17년(1793) 말 화성 건설이 결정되자. 건설의 총 책임을 위임받은 계열이 있었다. 그 대표자가 총리대신을 맡은 채제공(蔡濟恭)이었다. 백여년만에 처음으로 나온 남 인 정승으로서, 청남(南人 淸論) 계열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화성 건설 때, 그를 가장 가까이 보좌하면서 화성 건설의 기본 설계 등 제반 주요 업무를 담당한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었다. 잘 알다시피 명말청초 전통사회 개혁론을 체계화하여 높게 평가받는 중국학자 고염무 (顧炎武) 등의 경세학 및 과학기술에서 동양보다 앞선 서양학 등을 수용하여, 유형원에서 이익으로 이어지는 남인 실학풍을 집대성한 대학자이다. 반계 유형원은 저서 『반계수록』 보유편(磻溪隨錄 補遺編)에서 화성 건설의 타당성을 이미 100여 년 전에 예견했던 인물이었다. 정약용은 정조의 어제로 되어있는 『화성주략(華城籌略)』의 실제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 1792년(정조 16) 겨울 부친상으로 복상 중에 새로 이 건설될 화성 축조에 대한 기술적 설계를 지시 받았다 한다. 그리하여 벽돌을 이용하며 성벽의 중간 부분이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등 좀더 발달된 성제를 창안하였다. 또한 새 로운 운반기구 유형(游衡)을 설계하였고, 정조가 규장각에서 직접 찾아내어 하사한 『도서 집성(圖書集成)』과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연구하여 조선 현실에 적합한 기중기를 설계하였다. 이로써 엽전 4만량 이상이 절약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화성 건설의 실무 책임자 계열이 또 따로 있었다. 감동당상(監董堂上)을 맡은 조심태(趙心泰)와 도청(都廳)을 맡은 이유경(李儒敬)이 그 대표자이다. 모두 전통적인 무반 가문 출신이었다. 당시 정예군의 지휘자들이었고, 화성을 건설하면서 동시에 5군영을 하나 로 통합하려는 정조의 의중이 담긴 장용영 체제를 제대로 돌아가도록 설계한 정조의 측근 인물들이었다. 조심태는 정조 13년 이후 수원부사를 맡아서 정조의 뜻대로 이 지역을 큰 도회지로 만드는데 노력하였고, 화성성역이 시작되자 다시 수원유수로 임명되어 정조 20년 (1796) 9월 완공 이후까지도 계속 실무 책임을 맡았던 정조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노론 계열로서 정조의 측근인 서유방(徐有防) 역시 정조 13년 사도세자 능원을 이장하고 수원부를 키우는 사업을 담당시키기 위하여 경기관찰사로 임명되었다. 화성 건설의 책응도청(策應都廳)으로는 당시 수원부 판관을 지낸 정동협(鄭東協)과 홍원섭(洪元燮) 등이 있다. 이밖에 화성 문루의 편액과 상량문들을 제진한 노론 계열 윤숙(尹塾), 서유린(徐有隣), 윤행임(尹行恁), 이명식(李命植), 김재찬(金載瓚), 이서구(李書九), 소론 계열 서유신(徐有臣), 이만수(李晩秀), 북인 계열 홍양호(洪良浩)들도 정조의 측근 신하들이다. 서유린과 절친했던 이서구는 정조 19년 이후 벽파 계열로 돌아섰다. 벽파의 영수 김종수(金鍾秀)는 화성기적비(華城紀蹟碑)를 썼다. 우리는 보통 김종수와 이서구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이 속했던 정파를 흔히 시파라 부른다. 그렇다면 정조의 효성과 시파의 충성이 어우러져서 화성을 건설했다는 해석이 나 올 것도 같다. 하지만 당시에는 위의 세 계열은 서로 같은 정파 소속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들이 정파적 이해관계보다도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개 인적 효성에 감복해서 화성 건설에 열과 성을 다 쏟았다고 해야 할까? 이런 해석은 군주 개인의 역량이나 스타일을 지나치게 크게 평가하는 단순 논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 화성 건설의 정치적 의미
우리는 먼저 화성 건설이라는 사업은 정조 시대를 대표하는 사업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염두 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당시는 이전 시대를 이끌어 온 붕당을 타파하겠다는 정치논 리인 탕평을 표방한 시대였다. 곧 맑고 준엄한 의논을 지키는 인물들의 정파인 각 당파 안의 청류(淸流)를 함께 쓰는 정조의 탕평정치를 충실하게 보좌하려 노력한 위의 신하들은, 자신들을 이른바 시류에 아부한다는 의미가 담긴 시파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붕 당에 구애받지 않는 탕평파라고 생각하였다. 오늘날 우리 세대가 진정 화성 건설을 기념한다면, 구태여 이를 일부러 무시하는 용어인 시파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에 붕당간의 싸움(黨爭)을 말리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방법이 이른바 탕평 정치였다. 탕평 정치에서는 1차적으로는 너무 맑고 깨끗한 싸움의 규칙을 완화함으로써 불필요한 시비 논쟁을 중지시켰다. 특히 죽이고 살리는데 시비 문제를 적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2차적으로 는 모든 관직을 모든 당파에게 골고루 추천하고, 문벌가문의 사적 이익을 제한하였다. 마지막으로는 다음 시대에 잘 맞는 새로운 싸움 규칙, 곧 새로운 정치 규칙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붕당간의 싸움은 결국 16세기에 성리학파 성립의 결과로 나타난 새로운 도덕군자들의 싸움이기도 했다. 도덕군자들의 싸움은 힘만 있다면 아무나 말릴 수 있는 그런 싸움이 아니었다. 진정한 부모이거나 진정한 스승으로서의 위상을 가진 사람만이 말릴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싸움이나 제자 싸움을 말리는데 부모나 스승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 적으로는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서 올바른 도리를 제시할 수 있는 스승인 동시에 어버이와 같은 군주만이 같은 자식들의 싸움일 수밖에 없는 신료들의 당파 싸움에 한쪽 편을 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아서, 결국 싸움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정치를 추진하 자는 주장이 바로 탕평론이다. 여기에서 사도세자에 대한 지극한 효성에 겸하여 뛰어 난 학자라는 군주의 통치자로서의 이미지메이킹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를 기념한 사업이 바 로 화성 건설이기도 했다.
다음으로 우리는 정조의 통치 스타일을 알아야 한다. 정조는 어떤 일을 추진하든지 원칙을 먼저 밝혀 놓았다. 그리고 나서 이에 맞추어 차근차근 사업을 선택하여 추진하는 방식을 선호하였다. 정조가 일찍부터 표방한 개혁 원칙은 4가지였다. 지금 나라가 큰 병을 치러서 원기가 다 소진되어 버린 환자의 처지에 있음을 한탄하면서 표방하였는데, 첫째는 백성의 생산물을 만든다, 둘째는 인재를 키운다, 셋째는 군사 제도를 다스린다, 넷째는 국가 재정을 풍족히 한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은 정조 2년 6월에 발표한 교서(大誥)에 잘 나타나 있다. 정조 15 년에도 이 교서에 비추어서 개혁을 추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조의 사업 추진 방식으로 볼 때, 화성 건설은 일차적으로는 군사적 요충지에 인구가 만호 (萬戶) 정도에 이르는 대번진(大藩鎭)을 건설하는 사업이었다. 곧 군주의 친위 군대인 장용 영, 장용외영의 군영을 건설하고, 그 거점이 되는 성곽을 쌓는 사업이었다. 이른바 군사제 도를 다스린다는 세 번째의 개혁 방향을 기초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화성이 완성되자, 당연히 당시 5군영을 점차 축소하고, 그 대신 장용영을 확대해 나가는 작업들이 뒤따랐다. 이러한 친위 군영의 강화 노력 때문에 정조 말년에 이른바 정조의 시책을 반대하는 벽파 계열의 의구심이 계속 증대되면서, 정치적 파란이 중첩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화성 건설에는 당연히 생산물을 만들고, 인재를 키운다는 개혁 방향 역시 함께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모범적인 농장인 둔전을 만들고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저수지 만석거(萬石渠) 를 만들었다. 동시에 부역 노동이 아닌 유이민들로 구성된 노동자 계층인 모군(募軍)에게 품 삯을 주어가며 화성을 건설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이들을 화성 근처에 정착시킨다는 정책 들이 채택되었다. 수원부를 키워서 화성을 대도회로 건설한다는 사업에, 정조 측근의 모든 인재들의 역량이 제대로 동원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종합 처방들이다. 이에는 규장각에서 키 운 새로운 인재들의 역량이 컸다. 당시 가장 발군의 능력을 보여준 학자가 바로 정약용이었 다.
마지막으로,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부 화산에 쓴 정치적 이유를 파악해야 한다. 이는 정조가 친히 지은 사도세자의 일대기인 『현륭원 지문』을 위시한 실록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사도세자 대리청정기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면, 큰 일을 할 뜻을 가진 군주(有爲之主)인 효종을 본받는다는 측면이 특히 부각되어 있다. 세자는 북벌 준비를 위하여 효종이 친히 사용했던 무거운 청룡도와 쇠몽둥이를 즐겨 사용했다. 또한 효종이 체력단련을 위하여 한밤중에 벽돌 100장 나르기를 좋아하였는데, 세자 역시 여가가 날 때는 그대로 본받았다. 이 렇게 보면, 궁궐 안에서도 토굴을 파고 생활했다는 사도세자의 별난 버릇도, 북벌 준비를 위해서 와신상담의 고통을 감내하려는 생활 방식으로 재해석될 소지가 있다. 그래서인지 세 자 대리청정기에 보병의 창검술과 권법을 중심으로 이전 병서의 6가지 기예를 18가지로 보완한 『기예신보(技藝新譜)』가 훈련도감에서 만들어졌다. 정조는 이를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라는 한국적 병서로 완성하였다. 또한 사도세자는 온양 온천으로 정양을 다녀왔을 때, 도중에 효종의 능침인 영릉(寧陵)을 옮기려 했던 장소인 수원의 화산(花山)을 방문하여 그 지세를 감상했던 일이 있었다. 이를 기념하여, 화산을 사도세자의 능침으로 정하였던 것이다. 당시 사도세자는 군복을 입었고, 지나가던 지역의 백성들을 많이 만나서 그들의 고충을 물어보고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한다. 또한 자신을 호위하던 주변 신하들을 지성으로 돌보아서, 서울로 돌아온 후 여독으로 앓아 누웠던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한다. 그래서인지 정조는 20년(1796) 1월 능행 때에도 (사도세자께서) 경진년(1760) 온천(溫泉)에 행행하실 때 군복(軍服)을 입으셨다는 것이 의주(儀註)에 실려 있어… 마음에 간절하였다. (현륭원으 로 옮긴) 기유년(1789) 이후로는 원행(園行) 때에 반드시 군복을 입은 것은 대개 그대로 이어받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곧 정조는 아버지의 이런 행적들을 그대로 이어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능행가는 길에서 백성들이 문제 해결을 호소하도록 하는 상언․격쟁(上言․擊錚)제도를 활성화하여 백성들의 고충을 처리하였던 것이다. 곧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 화산에 쓴 정치적 이유는, 개혁 군주의 모델을 이어 받아서 개혁 정치를 추진하겠다는 뜻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화성 건설의 총리대신이었던 채제공이 수원 부를 왕도(王都)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는 수도인 한성부에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도읍지라는 의미보다는 개혁 정치의 상징이라는 의미로 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큰 뜻을 실현하려 한 효종을 본받으려 했다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정치적 이벤트를 비명에 죽은 사도세자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바탕으로 했다.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 화산에 정한 것은, 세자가 효종을 본받겠다고 화산에 올라가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아버님을 본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능행 때마다 백성을 많이 만남으로써 자애로운 아버지인 군주라는 이미지 만들기 작업을 추진했던 것이다.
아마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쓴대로, 사도세자와 자신을 왕과 왕비로 추존 해 주는 정도를 기대했을 것이다. 정조는 혜경궁에게 내 하지 못할 일을 아들의 효도로 이루고 돌아가 지하에서 뵈오면 한이 풀린다고 말했다. 또한 순조는 사도세자의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발원해서 태어난 아이라고도 말했다 한다. 곧 『한중록』 등에는 정조가 1804년경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화성에 머물면서, 아들 순 조에게 사도세자와 혜경궁을 왕과 왕비로 추존하는 사업을 추진하도록 한다는 소위 상왕 설을 뒷받침하는 사료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역시 화성 건설의 정치적 무게를 개인적 인 효성 쪽에다 두는 해석이다. 하지만 화성 건설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정치적 사실은, 정조는 사도세자가 못다한 개혁 군주로서의 큰 뜻을 잇는다는 표방으로 도덕성을 회복하고 통치권력의 정통성을 장악해 갔다는 것이다.
■ 당시 정치 세력의 동향
* 시파와 벽파의 의미
글머리에서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화성 건설을 주도한 세력은 분명히 시파로 분류될 수 있는 집단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정조년간 탕평 정치를 뒷받침한 세력을 시파, 이에 떨어져서 저항한 세력 을 벽파라 부르는 것이 정설이다. 이들 시파, 벽파의 호칭은 정조 8년 또는 12년 이후 생겼 지만, 정치적 사안을 놓고 격렬한 대립을 보인 것은 정조 12년 이후, 곧 남인 채제공이 정치 일선에 복귀하고 이어서 사도세자의 능원이 수원화산으로 옮겨진 뒤부터였다. 하지만 오늘날 시파로 분류하는 당사자들은, 서로를 같은 정파
소속으로 생각한 일이 없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곧 같은 정파를 형성했다고 할 수 없다. 그보다는 독립된 정 파 또는 정파에 참여하지 않은 실무관료로서, 정조의 의중을 충실하게 반영한 인물 그룹이 라는 성격을 가졌던 것이다. 정조의 의중이란, 한 시대를 크게변화시키겠다는(有爲之志, 挽回世道) 것이었다. 당시 관료들은 개인적․학문적 실력으로써적극 지지함으로써 당시 개혁적 분위기를 뒷받침하려 했 다. 예컨대 북인 계열의 홍양호같은 경우, 『경권론(經權論)』이라는 논설을 써서, 정조가 주창한 원칙론적인 경전에 입각한 경도(經道) 뿐 아니라 천변만화하는 현실에 입각한 권도 (權道) 역시 정치운영에 적용해야 한다는 정치론을 체계화해 내려 했다. 시(時)의 의미에는 의리없이 우세한 시류만을 따라 다니며 아부한다는 뜻이 있지만, 시절의 변화를 바라는 국가 쪽 사람(國邊人)이라 불렸던 뜻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남인과 소론 계열 관료들은 당시 강대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 계열에 대항하려면 정조의 입장을 적극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곧 남인과 소론을 시․벽으로 나누는 것은 홍낙안(洪樂安)이나 서형수(徐瀅修) 정도를 제외하면 무의미하다. 사실 시파와 벽파를 구분하
는 기준 을 정조의 뜻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 하는 데 둔 것은 남인과 소론이었다. 이들 정파는 노론 주류 전체를 벽파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론계 인물이 쓴 책에는 의리의 지도자인 산림 집단을 포함하는 노론 주류를 시파에도 벽파에도 가담하지 않은 중도파라고 파악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시파와 벽파의 정치원칙(의리) 논쟁도 생각과는 달리 그 논리가 분명하게 통일되어 있지 않 았다. 일반적으로는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을 지지하는 파(扶洪派)와 공격하는 파(攻洪派) 가 그 출발점이라 보고 있다. 그러나 당시로 돌아가서 사료를 살펴보면, 홍봉한을 지지하 는 파의 경우도 그가 저지른 죄상은 공격해야 한다고 한 사람이 많았고, 홍봉한을 공 격하는 파라고 해서 올바른 견해를 지키는 인물이 없다고 단언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노론․소론․남인을 불문하고 대부분의 시파는 자신을 홍봉한의 당여도 아니고, 그들을 공격한 김구주의 당여도 아닌 중도적 입장이라고 보고 있었다. 또한 김종수 처럼 정조의 뜻 을 파악하고 나서는 자신의 견해를 일부 바꾼 인물들도 있었다. 정조나 채제공 모두 벽파의 영수로 지목된 김종수가 역적의 의리를 가졌다고 평가하지는 않았다. 의리론으로 본다면, 노론 계열 안에서는, 영조의 처분으로 확정된 경종년간 신임옥사 문제와 영조년간 사도세자 문제를 정조의 처분으로 둘을 다른 문제라고 봄으로써 바꿀 수 있다고 보는 쪽이 시파, 둘을 다른 문제라고 볼 수 없으므로 바꿀 수도 없다고 보는 쪽이 벽파라고 판단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예컨대 김종수는 정조가 추진한 화성 건설에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 부역이 없어서 농민 에 방해되지 않고, 저축한 재물을 사용함으로써 결국 백성에게 분배가 돌아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화성 축성이 끝나갈 무렵 그가 (폭정을 한) 진나라처럼 축성을 한다 는 등 다섯 조항의 비판을 가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으므로, 조정에 편지를 올려 이를 강력하게 부인했던 것이다.
벽파로 지칭되는 정파의 약점은, 그 뭉쳐지는 집단이 학통 같은 동질성을 뚜렷하게 공유했 다기 보다, 왕실외척과 연결을 도모함으로써 강화되는 성격을 가졌다는 데 있었다. 이는 표방된 의리보다 왕실외척을 권력집단에서 배제한 정조대 탕평정국 운영에 대한 반 발이 중심 성격이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당시 전후의 시파와 벽파 정치가를 정파 별로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정조년간의 정치사는 붕당을 없애기 위한 탕평정책이 실시되었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영조년간 노론이 승리한 후 사도세자 죽음을 놓고 새로 생긴 당파인 시파와 벽파의 당쟁으로 정치적 사건의 추이를 설명해 오고 있는데, 이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탕평 정치도 정치원칙과 관계없는 소모적이고 사적인 차원의 권력쟁탈전이라 고 보도록 하는 경향을 부추기고 있다.
하지만 권력쟁탈전은 국가나 정부가 존재하는 곳에는 언제 어디에나 다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목적과 방법이 생산적이고 공적인 차원이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점이다. 필자는, 크게 본다면, 영조 말년 정국을 주도한 척신당의 전횡을 견제했던 청류당이라 부를 수 있는 정파가 정조년간 정국을 주도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정치원칙(義理)과 도덕적 처신(名節)을 엄격하게 지켜야 붕당의 타파도 이룩할 수 있다는 입장을 지킨 강경 탕평파 계열이었다. 곧 노론 청명당, 남인 청론, 소론 준론 정파가 정조년간의 집권 주류를 형성했 다. 다만 화성 건설이 추진되었던 정조 말년의 경우는 시파와 벽파의 정쟁이라는 도식으로 파악하는 것도 유효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당시인들이 서로를 공식적으로 시파니 벽파니 하고 호칭했던 것은 아니다. 시파니 벽파니, 국가 편이니 아니니 하는 사람들을 당시 오히려 녹림도당과 같은 깡패의리를 지닌 무리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점에서 남인, 북 인, 노론, 소론처럼 일반 사회에서까지 공식적으로 호칭되었던 색목(붕당)과는 많이 다르다 .
* 화성 건설 전후 시기의 정국 추이
정조년간의 정국의 추이를 살펴보면, 노론 정파가 시파와 벽파라는 명칭을 가지고 나누어진 출발점은 정조 8년 이후임이 분명하다. 거의 모든 기록이 시파․벽파의 명칭은 정조 8년부 터 생겼다고 확인하고 있었다. 이를 처음으로 공식화해서 제기한 것은 김하재(金夏材)가 정 조 8년 4월에 같은 노론 윤득부를 공격한 상소문에서부터였다고 판단된다.
정조 12년 이후에는 시파와 벽파의 대립이 분명하게 표면적으로 돌출하여 나타났다. 그러나 이 대립이 흔히 알려져 있는 사도세자에 대한 의리 문제와 관련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는 김종수로 대표되는 노론 청명당계 정파와 채제공으로 대표되는 청남계 정파의 탕평 을 시도함으로써, 이른바 준론(峻論)을 함께 써서 조화시킨다는 정조 득의의 탕평정치 형태 가 잘 드러난 시기였다. 당시 소론 강경 정파를 잇는 이복원(李福源) 계열과 양명학을 수용 한 강화학파의 이재협(李在協) 계열은 대체로 채제공 계열과 연합하면서 정조 탕평의 일각 을 받치려 노력하였다. 시파와 벽파의 정쟁이 본격적인 대치 국면으로 전개된 것은 영남만인소로 야기된 파란이 있었던 정조 16년 여름부터였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바로 그 해 겨울부터 화성 건설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그 해 윤4월과 5월에 사도세자 30주기를 맞아 올린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와, 다음 해 5월 화성 건설의 책임을 맡아서 수원에 가 있던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자 채제공이 올 린 상소가 대치 국면의 발단이었다. 모두 사도세자의 원수들을 처단함으로써 세자에게 씌워진 누명을 깨끗하게 해야[睿誣 雪] 정조의 군주권이 제대로 설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당시 소론 박하원(朴夏源) 등 칠백육 십여인도 이에 동조하는 상소를 올렸다.
노론 계열에서도 박종악․서유린․이병모․정민시 등 정조 측근 신하들이 이를 지지하였다. 이에 노론 청명당 계열이 시․벽파로 완전히 갈라서서 상호 공격하는 정국상황이 야기되었다. 이 파란은 정조 17년 8월 정조가 이제까지 숨겨져 왔던 사도세자에 대한 처분을 후회하는 영조 친필의 비밀문서로서 아직까지 숨겨져 있었던 『금등(金 )』을 반포하자는 의도였다 는 해석을 내리고 금등 문서를 보여줌으로써 일단 해결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제까지 벽파를 지도해왔던 김종수는 이제까지 견지했던 영조 처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이 지나치게 집요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금등 사건은 노론 계열에서 정치 의리를 강경하게 지켜야 한다는 인물들이 벽 파로 새롭게 단합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결코 나누어질 수 없는 의리를 나누어 해석함으로써, 이를 부정하는 노론 주류를 나쁜 당파로 몰아 제거하려는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정조는 대립 국면이 계속 격화되자, 이를 무마하기 위 한 배려로, 벽파 지도자 김종수의 내형(內兄)이자 중도적 성향을 지닌 홍낙성(洪樂性)을 영 의정에 기용하면서, 정조년간에 유일한 노론 3상정권을 출범시키기도 했다.한편으로는 장용 영 체제와 수원성의 완공을 서두름으로써 군사권을 군주에게 집중시켜 갔다. 그리하여 대체로 완성 단계에 도달한 정조 19년 전후부터는 윤시동(尹蓍東)으로 대표되는 노론 산림의 폭 넓은 지지를 받는 중도 정파 인물을 등용하여 시․벽파 갈등을 해소하려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閑中錄)』을 저술한 것도, 실은 노론의 분열 상태를 해소할 수 있는 근거자료를 제공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 이때 채제공도 함께 정승에 임명되었다. 청남계 정파와 노론계 정파를 다시 화합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를 기점으로 중도적 입장을 취해온 인물들까지 벽파에 동조하는 추세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서구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그렇다고 해도 당시 정조 임금의 기본 입장은 시파건 벽파건 사사 로이 이익을 추구하는 깡패 집단인 녹림도당이라는 것이었다.
정조 24년 5월 자신의 탕평정치 규모를 자세히 밝힌 이른바 오회연교(五晦筵敎) 직후 정조 가 사망하고, 이후 정순왕대비와 연결된 벽파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정조가 추진해 온 정 치적 노력은 철저하게 파괴당하는 운명을 맞았다. 하지만 순조 6년 5월에 김이영(金履永)이 큰 의리를 위해서는 친척이라도 없애야 한다는 벽파의 선조 김한록(金漢祿)의 주장을 폭로함으로써 사태는 다시 반전되었다. 벽파는 정조에 대한 역적으로 규정되었다. 이로써 벽파는 더 이상 정파로서 존재할 수 없었고, 순조 12년경 왕실외척의 세도가 확립된 이후 는 그 의미를 상실하였다.
하지만 화성은 아직도 굳건하고 우아하게 남아서, 정조 당시에 대단히 생산적이고 사사로 운 차원을 넘어선 정치 문화가 존재했음을 우리에게 실물로써 보여주고 있다.
* 맺음말
정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충신이냐 역적이냐 하는 시비 분별 문제를 위기 상황을 돌파하는 정치적 이벤트로 사용하지 않았다. 대대적인 숙청을 했다든가, 정국을 급변시키는 데 써먹은 사실이 없다. 이 사실은 정조 시대의 정치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정조는 탕평 정치를 원칙 뿐 아니라 현실이라는 측면에서도 파악하였다. 그래서 일상 생 활의 모든 일에는 각각 절로 그 가운데 중(中)이 들어 있는 것이어서 별반 매우 고원(高遠) 한 일이 아닌 것이다. 만약 이를 다른 곳에 걸어두고서 곧장 인의(仁義)가 정통하고 익숙하 게 되기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꼭 잡아 지키려고 한다면 이는 끝내 꼭 잡아 지키는 날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화성 건설 같은 실제적 사업을, 모든 사람을 화합시키려는 정치적 이벤트로 사용했던 것이다. 비록 외척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정치원칙을 지켰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왕실 외척 계열에 기대는 노론 강경파를 제대로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런 정치 스타일은 18세기 문화를 대표하는 화성이라는 매우 생산적인 결과물을 남겨 놓았다.
화성 건설의 결산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에는 아주 작은 힘을 보탠 듯 보이는 백성들의 이름까지 일일이 기록에 담아 놓았다. 작게 보이는 백성들의 소리를 상언이니 격쟁이니 하 는 방법을 써서 정치(통치)의 변수로 끌어들일 수 있음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수준의 정치가와 정파는 자신들의 사적 지혜만을 믿지는 않을 것이므로, 비록 권위주의적 통치가 기본인 전통시대였지만, 좋은 통치자, 좋은 정치 세력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정조의 사회개혁과 화성
김 성 윤/부경대학교 교수
■ 잊을 수 없는 정조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 왕왕 순순히 (국왕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탄식이 있으니 매번 한밤중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벌떡 일어나 앉은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 옵건대 성상께서는 …분발하여 일세의 이목을 새롭게 하신다면 세도(世道)의 광명과 생민 (生民)의 복이 될 것입니다. 이 어찌 신 한 사람의 말이겠습니까. 천백년 후세에 반드시 이 때를 생각하고는 이를 위하여 감격해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정조 말년에 측근의 신하가 반대세력의 저항 속에서 분투하고 있는 정조를 위로하며 더욱 분발하기를 촉구한 말이다. 사적인 감정 투영이 배제되기 쉬운 국왕과 신하 사이의 일반적인 대화와는 달리 위 신하의 말에서 느낄 수 있는 긴장감과 강한 동지적 정서는 우리로 하여금 뭔가 한가롭지 않은 시각으로 당시를 들여다 볼 것을 요구한다.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 우리는 정조와 그 시대의 정치를 말할 때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 세자나 탕평책, 아니면 규장각을 설치하여 영조와 함께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의 문치(文治) 를 일으킨 국왕 정도를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잘못되었다고는 하기 어려우나 피상 적이고 안일한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 정조와 그 시대의 정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치열한 정치적 대결 상황에 놓여 있었고,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조와 그의 정치적 분투가 우리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까닭은, 먼저 이 시기가 조선의 중세적 질서와 체계로부터 벗어나려는 진통이 두드러진 시기였고, 정조를 중심으로 전개된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는 바로 조선의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 여부를 확인시켜 주는 요소들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조대의 정치상황이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위치에 있었고, 화성이 개혁의 성공 여 부를 가늠할 한 축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제는 더 이상 화성을 효행의 정신이 살아있는 도시, 실학의 기술로 축조된 성곽이 있는 도시로만 이해하는 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정조대 개혁의 마지막 보루로서 그 역사적 의미를 정당 하게 인식하고, 정조와 그와 함께 시대적 과제에 충실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개혁적 비젼과 희망,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그들의 땀과 분투가 스민 현장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더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총체적 개혁을 말하고 있다. 지금부터 약 200년 전에 조선사회에 서 벌어진 일련의 정치적 움직임은 분명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화성이야 말로 우리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개혁정신의 가장 살아있는 현장이다. 정조와 화성, 그 잊을 수 없는 의미를 이젠 우리 모두가 적극적으로 나누어야 할 때이다.
■ 원대한 구상
정조가 재위에 있은 1776년~1800년간의 24년은 사회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동이 일어나 이 전까지 조선을 지탱해 왔던 제반 구조가 크게 동요했던 시기이다. 17세기 후반에 들면서 농업과 상업의 발달로 기층 농민들의 생활이 향상되고, 중인(中人)이나 역관(譯官) 혹은 서얼 들 중에는 경제적 지위가 크게 상승한 경우들이 많았다. 반면 관직을 둘러싼 격심한 경쟁에 서 점차 밀려났던 양반층 가운데에는 종래의 신분적 지위에 경제적 형편이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신분제의 동요, 서민문화와 실학의 대두와 같은 새로운 양상은 기존 의 양반지배질서가 아래로부터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반면 정치권은 격렬한 정쟁(政爭)이 수십년간 이어지면서 점차 정치 본연의 임무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난맥상은 이 시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이 새로운 부(富) 축적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를 둘러싼 정치세력간의 대립이 중소지주적 기반을 갖는 사림(士林)들의 공조기반을 와해시켜 나갔던 데에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점차 더 격렬해지는 당쟁(黨爭)은 변화해가 는 사회에 대해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영조 3년에 노론 타도를 목표로 소론․남인의 과격파가 일으킨 무력전쟁, 이른바 무신란(戊申亂)으로까지 비화하여 이제 정치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정조는 이러한 정치․사회적 난맥상을 직시하고 일찍부터 사회개혁을 위한 구상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중국 송대(宋代)의 유명한 개혁자 왕안석(王安石)의 개혁 실패원인을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는 동양 역사상 나타나는 개혁의 사례들을 면밀히 검토했을 것 으로 보인다. 즉위 초기에 자신의 시정방향을 집약한 『대고』(大誥)라는 것을 반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구상의 결과였다. 이후 그가 실천해나간 정책은 물론 이 『대고』의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구상한 국가사회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방향에 입각하고 있었다. 신분제 모순의 완화, 토지소유의 균등, 병농일치(兵農一致), 농공상(農工商)의 균형적 발달, 붕당(朋黨)의 소멸, 부와 권력의 지역적․가문적 편중 지양, 인재등용에서의 실력 우선과 실무능력의 존중,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 권력구조가 그것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정조가 가장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토지소유의 모순과 노비제의 문제였다. 사실 이 두가지 사안은 조선 중세사회 질서 그 자체에 관한 것이므로 우리가 정조대 개혁의 성공 여부에 대해 다른 시기와는 달리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지대한 역사적 과제는 정조의 치세에서 해결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해결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위한 노력을 또한 도외시할 수는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정조대의 개혁은 정조 스스로가 말한 「더 큰 개혁」을 위한 준비과정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정조 자신이 예기치 않게 죽음으로서 그의 개혁은 완성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조가 급격한 개혁을 구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정조대의 정국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급격한 개혁의 가능성을 빼고 서는 제대로 이해되기 어렵다.
당시의 토지문제에 대하여 정조가 뚜렷한 정책적 대안을 마련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농정 방향이 농민층의 생활향상이라는 방향에서 토지소유의 모순을 제거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은 분명하며, 아마도 대토지소유를 일정하게 제한하며 그 반사이익을 땅이 부족한 농민층에게 돌리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에 비하여 노비해방 문제는 정조 말년에 거의 현실화될 수준에 육박하고 있었다. 정조의 노비해방에 대한 복안은 공노비․사노비를 막론하고 노비라는 이름을 없애고 고용법(雇傭法)을 창설하여 이를 대체하는 것이다. 즉 소유주(공노비의 경우에는 관)와 노비의 관계를 모두 계약관계로 하되 당대에만 한정하여 세습을 인정하지 않고, 노비가 노비주나 관에 바 쳐야 할 신공(身貢)에 대해서는 따로 대책을 마련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서거하는 그 해에 지은 『익정공주고』(翼靖公奏藁)라는 책의 서문에서 이러한 계획과 의지를 결연하게 밝힌 바 있다.
정조가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정치권의 안정이었다. 실제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최고의 걸림돌로 작용한 것은 정치권 내에서의 개혁반대파의 반발이었다. 이러한 반발을 충분히 예상하던 정조는 즉위 직후부터 개혁을 위 한 정치권의 정지(整地)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는 크게 두 갈래의 방향에서 진행되었는데, 첫 째 국왕권의 강화하는 것이고, 둘째 개혁논리를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정조는 정치적 안정을 저해하는 붕당간의 갈등을 현실적으로는 붕당간의 세력균형, 상호견제를 통해 극복해 나갔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관료들이 정치의 공적(公的) 책임성을 자각하여 붕당의 사적(私的) 동기를 스스로 극복하고 개혁의 당위성을 자각하는 속에서 서로 진정한 화합을 이룸으로써 달성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상태를 탕평(蕩平)으로 이해하였다. 이렇게 되면 붕당 이나 지벌․문벌을 떠나 각자가 가진 재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되며, 국왕은 태극(太極)의 도(道)를 체득하여 각 개인이 가진 다양한 재능을 통합할 수 있게 된다. 정조가 생각 한 정치운영의 최고 목표는 바로 이러한 상태였던 것이다.
이를 위하여 정조는 즉위 직후 당시의 집권층인 노론 부홍파(扶洪派) 세력의 핵심을 영조 말기부터 이에 대항해 오던 노론 공홍파(攻洪派)의 힘을 활용하여 제거하였다. 다음 단계(4 년~12년 정월)에서는 소론을 부각시켜 공홍파 세력을 견제하였고, 그 다음 단계(12년 2월~ 17년)에서는 남인을 부각시켜 노론과 소론 모두를 견제케 하였다. 이처럼 기존 집권 붕당을 완전 제거하지 않고 그들의 정치적 주도권만 제거함으로써 점차 각 붕당의 공존을 가능케 하면서 한편으로 노론→소론→남인으로 주도권을 순환시켜 어느 붕당의 전제(專制)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붕당의 집단성을 서서히 희석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것이 탕평 정국운영의 일차 목표인 붕당타파(破朋黨)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마지막 단계에서 정조 자신 의 개혁지향적 노선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붕당을 떠나 폭넓게 포섭함으로써 왕권의 절대화 와 개혁의 완벽한 추진을 이루려고 하였다. 이것이 정조가 즉위 초년부터 실행해 나간 그의 심대한 구상이었다.
그의 구상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세번째 단계 즉 노론-소론-남인의 세 붕당 정립구도(鼎立構圖)까지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두번째 단계에서 소론이 부각하고 노론이 점차 실각 하는 정국구도에 반발하여 국왕에 대한 반대파로 결집되기 시작한 노론 벽파세력이 마지막 단계(18년~24년 6월)에서 국왕의 급진 개혁에 더욱 위기를 느껴 보수파로 확고히 자리를 굳히게 됨에 따라 국왕의 개혁 드라이브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정조 말년의 치 열한 반국왕(反國王)의 기류는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나왔다. 이제 정국의 개혁추진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그 경위를 살펴보기로 하자.
■ 개혁을 시작하다
* 왕실의 모범
정조의 개혁과정은 치밀한 사전 준비에 의거하였기 때문에 시기별로 뚜렷이 그 특징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정조가 맨 처음 시행한 개혁조처는 일단 왕실과 관련된 궁방전(宮房田) 의 폐해를 바로잡은 것이다. 궁방전이란 대궐의 경비를 담당하는 내수사(內需司)나 왕자․공주의 궁가(宮家)의 경비를 위해 설정된 토지를 말하는데, 당시에는 각 궁방이 탈법적인 면세 지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정조의 이러한 궁방전 폐단 개혁은 개혁의 방향을 왕실 자체에 먼저 돌린 것으로, 백성들의 민원을 왕실이 먼저 수용하며 개혁의 모범을 보인다는 상징적 인 의미가 컸다. 정조가 궁방전 폐단 개혁이 이루어진 직후인 2년 6월에 앞서 말한 『대 고』를 반포하며 개혁의 방향을 대외에 천명한 것도 매우 복합적인 정치적인 의도가 깔린 것이었다.
* 규장각과 초계문신
다음 단계에서 정조가 주력한 것은 친왕(親王)세력의 부식이었다. 규장각(奎章閣)과 초계문 신제(抄啓文臣制)의 운영이 그것이다. 규장각은 정조가 즉위한 다음날 설치가 명해졌지만 본격적으로 조직과 기능이 정비된 것은 동왕 5년(1871) 2월부터이다.
규장각의 신하에게는 많은 특권이 주어졌는데, 그들은 백관을 탄핵할 수 있는 탄핵권이 있으면서 거꾸로 원래부터 탄핵권을 갖고 있던 사헌부는 규장각 신하를 탄핵할 수 없었다. 또 규장각 신하를 지내면 바로 전랑(銓郞)에 추천되었다. 곧 설명하겠지만 전랑은 실무 책임자 급인 5~6품의 참상직(參上職) 가운데에서 최고의 요직으로 고위직으로의 승진이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규장각 신하로서의 경력은 급속한 승진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규장각 신하는 수시로 국왕을 알현하여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서 비서에 해당하는 승지보다도 더 자주 국왕을 접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최고의 학문적 소양을 인정받아 국왕의 어제(御製)․어서(御書)의 봉안이라는 그들의 고유업무 외에 서적의 수집․편찬, 사서(史書)편찬, 경 연관(經筵官) 겸직, 시험관 직임과 원자(元子)교육 등도 담당하였다. 요컨대 규장각 신하는 명실상부한 국왕의 최고의 측근이자 최고 권위의 문한기구(文翰機構)이며, 또 최고의 요직이 기도 했다. 규장각의 신하로 뽑힌 사람들은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蔡濟恭-그는 규장각이 만 들어지기 이전에 이미 고위직에 있었다)을 제외하고는 모두 노론과 소론출신이었다. 이것은 정조가 자신의 친위세력을 양성하면서 기존의 집권층 내부에서 인재를 골라 흡수하는 전략 을 썼음을 말한다. 기존의 권력구도를 개편하면서도 그 반발을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매우 신중하고 적절한 방법이었다.
정조 5년 2월부터 시행된 초계문신제는 친왕세력 육성과 개혁논리의 확산이란 측면에서 규장각 못지 않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37세 이하의 과거합격자를 뽑아 올리면 규장각에서 주관하여 재교육을 한 이 제도는 여기에 선발되는 것이 대단히 영 예로 여겨졌기 때문에 규장각의 몇 개 자리에 뽑아 주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친왕세력 을 육성할 수 있었다. 또한 규장각과는 달리 이 초계문신에는 종래 소외되던 남인이나 북인 들도 많이 선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다산 정약용(丁若鏞)같은 혁혁한 실학자들도 이 초계 문신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었고, 정조 말년에는 이 초계문신 출신자들이 조정 고위직의 거 의 태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초계문신제의 운영과 관련하여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부분이 있다. 국왕이 초계문신을 대상으로 친히 한달에 한번씩 강의를 하고 시험을 치렀다는 점이다. 즉 초계문신은 국왕의 직접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조가 의도한 바는 여기에 있었다. 아직 사고의 유연성이 결여되지 않은 연소한 인재를 뽑아서 국왕이 직접 이들을 교육함으로써 국왕과 초계문신은 사적으로도 사제(師弟)관계를 맺게 되어 군신간의 결합을 이중으로 견고히 할 수 있었고, 나아가 국왕의 학문과 정치적 입지를 공식화․표준화하여 국왕이 주도하는 개혁의 논리를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우리가 초계문신제가 개혁적 친왕세력을 육성하는 중요한 통로였다고 평가하는 것도 여기에 그 이유가 있다.
* 관료제의 개혁
다음 단계에서 정조가 주력한 것은 관료제 내부의 권력체계의 개편이었다. 당시의 관료조직 은 일반적인 임기를 채우지 않더라도 빠르게 승진할 수 있도록 제도화된 몇개의 청요직(淸要職)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었다. 이들 관직은 모두 학문적 소양을 중시하는 청직(淸職)이었는데, 이것이 곧 요직(要職)인 점이 조선 중기 이후의 관료제 상의 큰 특징이다.
이들 청요직 가운데 가장 요직으로 인식되던 것이 이조의 실무직(5~6품)인 전랑(銓郞)이었 다. 전랑이란 전조(銓曹) 즉 이조의 낭관이란 뜻이다. 이 자리를 두고 일어난 김효원과 심의 겸 사이의 다툼으로 동인당과 서인당이 나뉘게 될 정도로 이 자리는 참상(參上)급의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이들이 가지는 권한은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정3품 당하관 이하의 청 요직에 대한 인사권, 자신의 후임자를 스스로 천거하는 자천권(自薦權), 당상관의 청요직 인 사를 주도하는 이조 참의(參議) 선출권, 퇴임 후 청요직 진출권이다. 하위직에 불과한 낭관 에게 이러한 권한을 부여한 것은 관료제 내에서 하위직의 의견을 반영함으로써 고위직의 독주를 방지하고자 하는 취지였다. 전랑들에게 스스로 후임자를 선임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언론을 담당하던 홍문관을 비롯한 삼사의 하위관료들이나 성균관의 학생들조차도 전랑의 의중을 존중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랑은 하위관료들의 공론을 주도하는 실제 적인 주도자였다. 정조는 이러한 전랑들이 갖고 있던 여러 권한들을 폐지하였다. 정조 13년 12월의 일이다. 이는 전랑직이 실제의 덕망과 능력과는 별 관계없이 권력을 장악한 붕당이 공론임을 내세워 전랑직을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재생산하는 데에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또 아예 당상관직을 학술직과 정사직 두갈래로 분리하여 한쪽 직임에 있던 사람은 다른 갈래의 직임에 추천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학문적 소양과 실무 능력을 구분하여 각자의 재능에 따라 나누어 임명함으로써 관직의 전문성을 제고하고, 실무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쉽게 재상직으로 승급되는 것을 제도적으로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공론과 명망을 크게 요구하는 청직 출신자들이 쉽게 이조참의와 같은 권력적 요직에 진출하는 것을 막아서 결국 특정 붕당의 관직독점을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상과 같은 정조의 관료사회의 권력관계에 대한 개혁의 결과로 종래 선망의 대상으로 되던 전랑이나 삼사 등의 청직의 비중이 약화되고 오히려 현실적인 치부(致富)와 관련하여 수령 직이 더 각광을 받는 사태가 야기되었다. 청직의 쇠퇴에 대신하여 새로운 권력체계는 규장 각과 초계문신이 새로운 청요직으로 부상하고 대신(大臣)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체제가 강화됨으로써 초계문신-규장각-대신 중심의 체제로 자리잡아 갔다. 크게 보면 주도권을 잡 은 특정 붕당의 청요직 독점현상을 제도적으로 차단하고 국왕의 은혜와 훈도를 받은 인재들 을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체계를 형성시킨 것이다. 이러한 관료제 개혁은 이후 본격적인 사 회개혁을 위한 권력적 기반을 조성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곧 탕평정치의 관료제적 기반이 구축된 것이다.
* 신해통공과 서얼허통
정조의 치세 중반기에는 관료제를 개혁하여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면에서 개혁을 위한 정치 기반을 조성하였다. 아울러 정국운영에서는 노론의 전제를 억제하고 소론, 남인을 적극 진출시킴으로써 대략 정조 12년부터는 노론-소론-남인이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 임명되는 세 력 균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14년 9월부터는 15개월에 걸쳐 영의정․좌의정은 공석이 되고 남인 채제공(蔡濟恭)만이 우의정으로 재직하는 이른바 채제공 독상체제 (獨相體制)가 지속되었다. 이 시기가 가장 시파세력이 강성했던 때였으므로 이제 본격적으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호기를 맞게 된 것이다. 신해통공(辛亥通共)과 서얼허통(庶蘖許通)이 추진된 것도 이 시기이다.
신해통공은 신해년(辛亥年)인 정조 15년(1791)에 시행된 조선후기의 중요한 상업정책으로, 서울의 육의전(六矣廛)을 제외한 시전(市廛)의 전매권을 폐지하여 사상(私商)이나 난전(亂廛)의 자유로운 상행위를 인정한 것이다. 원래 국초부터 시전들은 국역(國役)이라 하여 정부 의 요청에 따라 일정한 경비를 부담하는 대신에 각 물품의 전매권을 부여받고 있었다. 17세 기 이후 점차 상업이 발달하게 되자 시전상권에 대한 사상의 도전이 거세지게 되었고, 결국 정부가 사상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정부의 대사상정책이 통제와 허용을 거듭하다가 이 시기에 와서 사상활동의 허용이라는 방향으로 귀착되게 된 데에는 화성 상권육성이라는 정치적 고려가 크게 작용하였다. 서울 시전이 갖고 있는 전매권은 구체적으로 특정 물품에 대한 독 점판매권과 미등록 상인 즉 난전(亂廛)에 대한 고발권이다.
이를 합하여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 불렀다. 그런데 화성은 서울과의 거리가 100리가 채되 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금난전권 행사에 많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화 성 상권의 육성에는 금난전권 혁파라는 조처가 매우 필요했던 것이다. 정조 14년부터 시작 된 화성 모민(募民)방안 논의에서 정책적 차원에서 논란이 된 것은 화성에 시전을 설치하는 문제였다. 이것이 정부의 금난전 정책과 상충한 것이다. 논의 결과 14년 5월에 화성민들을 먼저 육성하고 시전설치는 보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로부터 몇개월이 지난 15년 정 월에 금난전권이 혁파되는 신해통공이 발의되었던 데에서도 이러한 사정을 엿볼 수 있다. 결국 신해통공은 한편으로는 소상인․소시민 보호라는 명분과 금난전권 완화의 정책 기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화성상권 육성과 상인유치를 위해 서울 시전상권이 가지 는 기득권을 희석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합쳐지면서 정책화된 것이다.
신해통공이 있은지 3개월이 지난 15년 4월에는 성균관에서 서얼 출신들을 차별하여 따로 앉 히던 것을 폐지하여 일률적으로 나이 순서대로 앉게 하는 태학서치(太學序齒)를 단행하였다. 이것은 신분제 개혁이란 대과제에 비추어보면 작은 조치라 할 수 있겠지만, 명분과 예절을 가장 중시하는 성균관에서 이렇게 먼저 서얼차별을 혁파한 것은 서얼차별을 철폐한다는 국가적 의지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었다는 의미에서 그 의의가 결코 적지 않다. 이후 각 고 을의 향교(鄕校)에서 이를 본받아 시행할 것이고, 결국 서얼차별 철폐가 사회에 뿌리내리게 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같은 달에 五部의 令 자리에 서얼을 임명하는가 하 면 6월에는 서얼과 중인들을 기사장(騎士將)에 추천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 치들은 자신이 왕실의 서얼출신으로 서얼허통에 강한 의지를 보였던 영조대에 비해서도 더욱 진전된 것이었다.
■ 마지막 희망, 화성
* 반발에 부닥치다
앞에 열거한 여러 개혁조처들은 반대가 없지는 않았으나 국왕의 중재로 큰 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개혁이 토지제도와 노비제도에까지 미치게 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개혁에 대 한 반발이 집단적 반발의 양상을 띠면서 그 강도도 훨씬 거세지게 된 것이다.
시파 우위의 정세를 바탕으로 전진적인 조치가 잇달으면서 어느 때 보다도 개혁에 대한 전 망이 높던 15년 정월에는 한 평민이 신문고를 쳐서 토지와 노비 소유의 제한을 주장하는 사 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 시기에는 일반 평민들조차 토지소유와 노비제의 모순에 대한 자각이 높았다고 할 수 있다.
토지제도 문제에 대한 개혁 주장은 정조 연간에도 여러차례 제기되었다. 그러나 토지소유 문제에 대한 개혁은 정책 차원에서 논의도 되지 못하였다. 농지를 측량하여 토지대장을 정 비하는 양전(量田)조차도 양전을 추진하는 수령이 탄핵을 받아 양전이 중지되는 등 반발이 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발은 특히 노론측에서 심하였다. 정조 18년에 이르러 토지개혁 문제는 치열한 정치적 공방을 야기하였다. 이 때의 공방은 남인으로 다산 정약용(丁若鏞)과 도 절친했던 이석하(李錫夏)라는 인물이 토지를 호적에 등재하자는 주장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서 시작되었다. 이를 통하여 집권층의 토지 겸병을 방지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노론측은 신귀조(申龜朝)를 통하여 이석하의 벼슬을 삭탈하자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두 사람이 전면에 나서 공방을 하였지만 실제로는 남인 시파계열과 노론 벽파계열간의 공방이었다. 전 면적인 토지개혁도 아닌, 토지를 호적에 등재하자는 주장에 이처럼 정치세력간의 갈등이 정 쟁의 모습을 띠면서 강력히 제기된 것이다. 이 공방은 정조가 무마함으로써 일단락되었으나 토지개혁의 최종 장애가 결국 흔히 벽파로 알려진 노론 내부의 강경집단이었음이 분명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노비 혁파를 구상했던 정조는 신해통공 직후인 15년 3월에 먼저 관노비(官奴婢) 개혁문제를 채제공에게 일임하여 성사토록 지시하였다. 사실 관노비 개혁문제는 정조 치세 24년 동안 8 년․15년․22년 3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논의가 있었다. 관노비 혁파에 대해서 각 붕당 내부에서 찬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으나 흔히 시파로 분류되던 인물들은 대부분 혁파에 찬성한 반면 노론 벽파는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결국 정조대 후반의 시파 대 벽파의 치열했던 정쟁은 이러한 정책적 입장 차이에도 크게 기인한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토지제 개혁 과 노비해방 등 중요한 정책 현안에 대해 노론 벽파는 줄기차게 반대하였으므로 노론 벽파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제압하느냐 하는 데에 이러한 정책의 성공 여부가 달리게 된 것이다. 이제 개혁을 위해 마지막으로 남은 일은 정치력으로 개혁반대론을 제압하는 일이었다. 이러 한 상황에서 정조에 의해 개혁의 마지막 보루로 이루어진 것이 화성의 축조와 화성 상권(商圈)의 육성이었다. 화성의 육성과 성곽의 축조는 단순한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기 위한 조 치를 넘어서 조선후기 정치 사회개혁을 가능케 할 마지막 희망이었던 것이다.
* 화성 육성에 담긴 의미
정조가 양주(楊州) 배봉산(拜峰山)에 있던 생부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으로 이장하기로 결정한 것은 13년 7월이었다. 이 결정은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상소에 여러 신하들이 찬성함으로써 이루어졌는데 영우원 자리가 비좁고 초라한 반면 수원이 봉표(封標)를 해둔 길지(吉地)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정조가 수원을 선택한 것은 단순히 아버지 묘소를 모시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후 점차 그 의도가 드러났는데, 그것은 이 지역을 친위지역화하여 본격적인 개혁을 진행하기 위한 배후로 삼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의도는 수원 읍치(邑治) 이전과 상권부양책의 추진, 화성축조와 장용영 (壯勇營) 외영(外營)의 주둔으로 구체화되어 갔다. 사도세자를 모해했던 세력과 깊이 연결되 어 있는 노론 벽파세력조차도 처음엔 단순한 효심의 발로로 이해하여 이장엔 찬성했지만 이 후 드러나는 정조의 의도에 강한 의구심과 적개심을 품고 끝까지 저항했던 것이다.
화성 축성공사는 18년 2월에 착공하여 20년 9월에 완공되었다. 화성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 는 먼저 군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화성 축성과 함께 진행된 장용영(壯勇營)으로의 5 군영 통합, 장용외영(壯勇外營)의 화성주둔과 향군(鄕軍) 편성, 어영청․금위영 재정의 축성 비용으로의 전용(轉用)은 친위군영 강화를 위한 의도가 직접 표출된 것이다. 또 수원유수를 정1품 대신으로 임명한 점, 독성산성(禿城山城) 수축과 화성과의 견제방어체제, 시흥․과천 을 수원 관할로 한 점, 광주 남성(南城) 수축과 정1품 파견, 경기 좌병영을 독성(禿城) 관할 로 한 점 등은 화성이 외적보다는 서울에서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화성은 정조 왕권의 무력적 기반으로서 기획․건설된 것이다. 화성이 하삼도(下三道) 지방으 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했으므로 하삼도의 곡창지역을 확보하며 장기전에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을 것이다. 21년 2월에는 화성의 상권을 부양할 대책(『華城府內 新接富實戶 蔘帽區劃節目』)이 입안되었는데, 화성 상권을 주도할 서울의 부호 20호를 유치하기 위해 미삼(尾蔘)과 관모(官帽)의 전매권과 여타 자금 제공을 제시한 것이다. 당시 대청무역에서 미삼과 관모는 필수용품이었으므로 이 계획에는 화성을 국내외 무역의 중심지로 위치지우려 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 절목(시행령)에서 한편으로 이주할 서울 상인들이 완전히 화성 내에 정착하기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을 요한다. 사정상 온 집안이 모두 이사하지 못할 경우에 아들을 보내는 것은 무방하나 그 외에 조카․삼촌이나 사촌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부호들이 근거지를 여전히 서울에 두고 이익만 취하는 것을 막아 유사시에 이들이 반국왕세력을 지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 보면 화성은 정조 왕권의 군사적․경제적 거점으로서 서울에서의 침공을 강하게 의식하며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성이 갖는 사회적 의미도 만만치 않다. 앞서 말한 부호유치를 위한 절목에서 이주해 오는 부호들에게 관직에 발탁․등용해 줄 것을 약속한 일이 있다. 화성축조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뇌물을 받고 관직을 제수한다는 소문이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에 부호유치 절목을 극구 반대한 노론 벽파계는 절목에서 관직제수를 약속한 것을 자금제공에 대한 반대급부로 보고 이를 격렬히 비난하였다. 정조는 성장하고 있던 사상들의 경제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는데, 화성 육성이 계획대로 이루어지면 이후 사상들의 입지가 더욱 강화되고 이들이 직접 관직에 진출할 소지가 많았다. 경제적 실력을 갖추어간 사상들의 정치참여가 가능해지는 여건 이 이러한 정치정세 속에서 마련되어 갔던 것이다. 만약 이들의 정치참여와 세력화가 이루어지면 조선정치는 서양의 절대주의와 흡사한 새로운 국가단계로 나아갔을 가능성이 많다. 화성은 이러한 중차대한 역사적 전환의 시험대였던 것이다.
* 사라지는 화성의 꿈
정조와 그 측근에 위치했던 개혁론자들의 「화성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정조의 구상이 막바지에 심한 반발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먼저 화성의 성곽은 완성되었으나 상권을 부양할 목표로 계획되었던 부호유치 절목부터가 노론 벽파의 강한 반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화성 축조가 시작된 18년부터 본격화된 노론 벽파들의 반발로 정국이 극도로 경색되어 정조와 이 른바 시파세력들은 그들의 정치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정국의 막바지에 정조는 이 른바 『오회연교』(五晦筵敎-5월 그믐 연석에서의 하교)라는 것을 발표하게 된다. 사도세자 에 관련된 정치명분은 바로 잡되 그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을 것이며, 노론-소론 사이에서 벌어졌던 신임사화(辛壬士禍)에 대한 국시(國是)를 변경하여 노론을 역적의 당으로 몰아가지는 않을 것이니 자신의 진심을 믿고 정국에 동참해 달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노론 벽파는 즉각 이를 거부했다. 정조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이다. 이들이 대항할 계책을 꾸리자 결국 정조는 심환지 등 벽파를 불러 놓고 투항을 촉구하는 최후통첩을 하였다. 이로부터 12 일 만인 24년 6월에 정조가 급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벽파정권이 서면서 친국왕세력이었 던 남인과 노론의 시파세력이 제거되는 정계개편이 잇다르고 화성을 통한 사회개혁의 꿈은 사라지게 되었다.
* 정조가 남긴 뜻
화성 축조가 완료된 정조 말년에 정조의 통치양상은 사실상 상당한 전제적 양상을 띠었고, 노비해방과 같은 것이 정조 왕정의 능력을 넘어선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더구나 벽파 세력의 제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럼 왜 정조는 이들을 제압하여 자신이 구상한 개혁을 패기있게 추진하지 못했을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비록 자신의 생부 를 죽음으로 몰고 간 데에 책임이 있고, 심지어 그 일부 세력은 자신의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와 그 생모 성빈(成嬪)까지 살해(10년 5월과 9월)하는 데에 가담되었지만 정조는 이 벽파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것은 오랜 기간 조선 국가를 좀먹어온 당쟁 의 피해와 같은 또 다른 살상의 비극, 갈등의 악순환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물리적인 조치가 장기적으로는 정치권 전체의 화합과 통합을 해칠 것이며, 이러한 갈등 위에서의 개혁은 오래 존속하지 못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이들의 자발적인 동참을 유도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고심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개인적 아픔을 국가적 통합으로 승화하려는 정조의 큰 정치의 비젼이 깔려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서 한 시대를 사는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한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국왕으로서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고뇌와 인내, 그리고 화합을 위한 신념을 읽을 수 있다. 화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기는 긴 여운과 향기는 정조의 일생이 보여준 이러한 대의(大義)에의 자기 헌신과 개혁에 대한 솔선수범, 그리고 인간과 화합에 대한 신뢰, 미래에 대한 통찰과 철저한 준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정조는 독살되었는가?
윤 한 택 / 경기문화재단 수석전문위원
우리나라 최후의 왕조인 조선왕조의 명운을 효와 국방의 회복 등을 통한 국가재조로 돌 파하고자 했던 정조가 막 그 꿈을 이루려는 한참 나이인 49세 되던 해(1880년) 6월 28일, 평소의 지병이었던 종기로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을 두고 일찍이 당대를 살았던 다산이 이른바 정조독살설을 암시한 이래 여러 역사가․문필가․예술인에 이르기까지 이 주장의 진위에 대한 논의가 분분해왔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그 종양의 치료방법인 연훈방 때문에 수은중독에 걸렸 을 가능성과 이 치료법을 건의한 의사가 노론벽파 수장의 먼 친척이었다는 것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정조 사후 안동김씨 세도정권이 들어서기까지 노론벽파가 집권한 시기는 4년 에 불과하므로, 이는 정조의 죽음으로 실권한 자들의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다.
이 진위 논쟁의 배후에는 대개 왕권과 신권의 대립 구도가 깔려있고, 왕권파는 사실 쪽에, 신권파는 조작 쪽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왕조국가의 기반은 가문이며 이는 부자관계(孝, 私)를 기초로 한다. 가문이 발전하여 왕국이 되는데, 이 양자 사 이에 성립되는 군신관계(忠, 公)는 가문의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는 경제력과 정치권력을 매 개로 한 쌍무적인 관계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이 관계는 본디 가문을 매개로 귀족적이며, 직무를 매개로 관료적인 이중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후대로 가면서 점차 관료적 성격만 남게 되고, 예론 등 명분론이 정쟁의 거리로 전화한다. 정조의 시기가 이러했으며, 국가 재조론은 이 폐단을 극복하고 원래의 관계로의 회복을 지향했던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므로 왕권과 신권 구도에 매몰되는 것은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이 시점에서 원래 관계로의 회복은 마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와 다름없었 다. 왕조체제에서 끊임없이 유리하여 혹은 저항하고 혹은 새로운 산업을 일으켜온 내부의 저항세력과 천주교 및 서양문물을 가진 외세가 삼각구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조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다. 조선왕조 내부에서의 국가재조 노력과 왕조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움직임과 새로운 문물로 밀려오는 외세 속에서 역사 진전의 수레바퀴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회적 죽음이기도 한 것이다. 그 전진적 지향의 강도에 따라 그 죽음에 대한 아쉬움이 커져 갈 것이고, 또한 독살설도 그 만큼 더 확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화성(華城)건설의 시대적 배경과 의의
수원의 화성이 건설되는 시기는 세계의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어 서양문화와 접촉이 활발하 던 조선후기 근대화의 여명기였다. 자연스럽게 과거 중국의 문화만을 알던 좁은 세계관을 청산하고 새로운 세계관에 대해서 눈 을 뜨는 실학의 학문과 접목되는 변화의 시기였다. 미국의 최초도시 워싱턴이 현대독립도시 로의 면모를 갖추던 시기였고, 소련 또한 레닌그라드의 현대도시적 건설이 완성될 때였다.
조선시대 사상을 주도한 주자학이 추상적, 사변적인 것으로 현실문제를 도외시한 것인데 반하여 정조 때에 학문적 이론이 만개한 실학은 현실적인 경세치용, 이용후생을 내세워 정부 당국자의 정책을 비판하고 국가제도의 개혁을 부르짖게 되었다. 실학은 주로 당시의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재야학자들 중에서 또는 양반 중에서도 차별대우를 받던 서자출신 중에서 활발하게 연구 집적(集積)되었다. 실학자들은 정치․경제․군사 등 각종제도의 역사적 현실을 비교․연구하고 그러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이상사회의 건설을 꿈꾸었다. 정조는 이처럼 조선후기 정치․사회․경제가 변화하는 분수령에서 실학자들을 대거중용, 수원에 화성을 건설함으로서 정치개혁과 경제향상, 학술과 예술의 진흥책으로 새로운 기풍을 조성, 문화부흥을 이룩한 선구자적 통치자이기도 했다. 정조는 왕세손으로 있으면서 부왕 사도세자의 원통한 죽음을 목격하였고, 노․소론 당쟁의 와중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즉위한 군왕이다.
사도세자 사건은 18세기의 극심한 정치권력 대립상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미 17세기초부터 노골화하기 시작한 붕당간의 대립은 17세기말 숙종조를 지나면서 상대방을 철저히 숙청하는 극단적인 대립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영조가 즉위할 무렵에는 노론의 일당 전제가 심화되었다. 영조는 소위 탕평책을 써서 각 정파가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지 않고 서로 타협하는 자세를 갖도록 유도하는 한편 여러 정파를 고루 기용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아울러 왕권 을 강화하여 정파간의 극심한 대립을 어느 정도 완화시켜 나아갔다. 그러나 영조치세 중반 이후로 노론계가 왕실과 혼인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력을 쥐게되었고, 이에 소론은 사도세자 를 등에 업고 정권을 얻으려고 하였으나 이를 저지하려는 노론과의 대립 속에서 결국 사도 세자의 죽음을 빚어낸 것이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초기까지도 적지 않게 왕권유지에 불안을 겪었다. 그러기 때문에 영조 의 탕평정책을 유지하면서 당쟁에 휘말리지 않을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데 노력하였다.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노론에 대항할 세력으로 남인이나 소론 등을 중용한 것 도 그러한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노론세력의 견제는 단순히 반대파 인물의 등용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노론의 힘의 근원이 되는 경제적인 바탕에 대한 대항이 또한 필요하였다. 정치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바탕이 무엇보다 시급한 선결문제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 신진학자들의 경세치용․이용후생의 실학에 의한 현실개혁은 물론 왕권강화와 민생안정을 위한 원대한 구상을 실현키 위하여 수원에 화성을 건설함으로서, 제도의 정비와 새로운 질서개편에 따른 친위 군단인 장용외영을 설치,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펼치게 된다. 수원의 화성 축조는 침체된 조선후기의 민족사에 있어 개혁의 물꼬를 튼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1796년(정조20) 연례 행사로 수원의 부왕 릉을 참배할 때이다. 정조는 이미 277년전 중종 시절 개혁 정치를 주도하다 비명으로 죽은 조광조를 추모하여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할 때 제문(祭文)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군자는 공을 본받고 소인은 공에게 원한을 품었구나. 나의 서글픈 흠모를 생각하니 어떻게 공의 내려옴을 찾으리요. 공이 만약 살아 있다면 나라를 한번 변화하여 도(道)에 이르게 하리라
이것은 정조가 얼마나 개혁 정치에 심혈을 기울였고 붕당 정치로 침체된 국정을 바로잡아 국운 융성의 변화를 시도하였는가를 엿보게 해주는 기록이다. 아무튼 조광조의 개혁시도가 실패한 아쉬움을 안고 상업의 발달에서 오는 경제구조의 변화에 대비하여 화성을 상업도시 의 거점으로 육성, 경제적 향상을 도모 하려한 정치적 형안도 민족사의 진운에 활로를 튼 정치적 결단이라 할 수 있다. 근대화의 여명기 화성은 실로 정조의 정치신념을 구현한 이상향(理想鄕)이기도 했다.
참고 서적 : 18세기 건축사상과 실천 / 김동욱/ 발언
꿈의 문화 유산, 화성 / 유봉학 /신구문화사
18C 신도시 & 20C 신도시 / 민족건축미학연구회/ 발언
수원의 화성 / 신영훈 / 조선일보사
고쳐쓴 한국 근대사2 / 강만길 / 창작과 비평사
영조와 정조의 나라 / 박광영 / 푸른 역사
경기 문화재단 계간지 / 기전 문화예술 99년 겨울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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