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너른 집
일간지에서 신간 안내를 훑어보다가 잠시 시선을 멈춘다.
‘The Well Gardened Mind’란 부제를 단 『정원의 쓸모』. 정원이 ‘마음’이란 주어를 수식하고 있고, 영국의 정신과 의사가 쓴 책이라니 아마도 치유를 전문적으로 얘기하는 듯하다.
정원, 뜰, 마당…. 그렇지, ‘마당 깊은 집’도 있었구나.
비슷한 말들을 되뇌다가 엉뚱한 생각에 이른다. 대강 감이 잡히는 내용인지라 서너 쪽을 읽다가 책꽂이에 모셔두느니, 차라리 나의 목소리가 실린 수필 한 편이 쓰고 싶어진 것이다. 그 옛날 너른 마당에서 타작을 하거나 짐승을 키우던 정경을 어슴푸레 떠올리면서.
우리집은 한마디로 마당이 넓다. 50평이라면 평범한 소시민에겐 호사가 아닌가. 30년 전 서울에서 대구로 전근 올 무렵,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운명의 여신을, 그 따스한 미소를 보았다. 수도권의 분당신도시아파트에 9전10기 끝에 당첨되면서 맨손에 거금이 떨어진 것이다.
우린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도로변 50평 집이 살기 편하고 재산가치가 유지된다, 당첨의 공이 큰 마누라의 주장이다. 무슨! 사람 사는 집이 무조건 넓어야지, 골목 안이지만 마당만 50평이라지 않나, 나의 고집이 맞서게 되었고…. 결국 월급을 버는 내가 이기게 되면서, 맹지에 소쿠리 터지만 수성못 자락에서 50평 마당을 거느린 100평짜리 드넓은 궁전에 살게 된다.
나는 무척 건강한 편이다. 뭇 인연들이 이승을 떠나거나 병고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아직까지 술자리를 즐기며 호기를 부리고 있으니…. 제대로 하는 운동 하나 없고 언감생심 헬스장은 구경도 못해본 처지라 어찌 보면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언뜻 생각하기로는 운전 못하는 천하불출이라서, 강제된 보행습관이 준 망외의 선물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차별성을 설명하는 데는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야가 트이면 가슴도 후련한 법, 잔디만 13평을 심었다. 잔디 가꾸기란 원래 성가신 일이지만 싫을 수 없다. 지난날 13평 아파트를 얼마나 오래도록 떠돌았던가. 그 잔디에 서면 아파트 못지않은 경관이 펼쳐진다. 남쪽 하늘 아래로 용지봉과 고산골의 연봉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는 것이다. 텃밭 3평은 굼뜬 농사꾼에겐 충분한 일터가 되어주면서, 이것저것 소출이 남아돌 정도다. 수확의 클라이맥스인 대봉감과 매실 자두를 거둘 때면, 환희 그 자체라고 할까. 이쯤에서 나는 내 특별한 건강의 원천을 50평 마당에서 찾을까 생각 중이다.
그리고, 그냥 어슬렁거린다. 어슬렁거리면서 느낀다. 마당에 꽃은 철따라 피고지지만 인생길 누구에겐들 꽃길만 있으랴. 돌아보니 크고 작은 지뢰밭을 용케도 피해왔구나. 그 어떤 어슬렁거림이 신체의 세포만이 아니라 정신의 숨구멍에도 생명력을 불어넣었으리라.
마누라의 예언대로 집은 좀처럼 팔릴 기미가 없지만, 그 가치를 숫자로만 따지는 셈법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딩동 딩동’
아날로그 초인종이 울리자마자 마당에서 깡충거리던 아기가 소리친다.
“땍빼! 땍빼!”
갓 두 돌이지만 택배가 저한테도 좋은 신호라는 걸 벌써 알아차린 모양이다. 이태 전만 해도 할배할매 만의 적막이 감돌던 무대에 주인공이 많이도 늘어났다. 사실 나 못지않게 마당이 생광스러운 한식구들이니, 그 선견지명에 스스로 대견해 한다. 코로나 일 년 반, 부쩍 많아진 택배 아저씨들도 귀한 주인공이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열대여섯 걸음? 잠시만이라도 눈이 즐겁고 시름을 잊었으면 싶다.
봉숭아 꽃봉오리가 처음 터지던 날, 새 생명이 또 태어났다. 어쩌려고, 그 나이에? 필수보조인력에 대한 주위의 한결같은 걱정에 진심이 읽힌다. 세상만사 일체유심조!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면서 속으로 남몰래 새기는 말이 있다.
마당이 있지요. 힘들 때는 너른 마당에 나가서 답을 찾으면 될 것이외다. 아니 답은 필요 없고 그냥 어슬렁거리기만 하면 되겠지요. 황혼육아, 시가 될지 짐이 될지도 두고 보면 알겠지요. 그러고 보면 나는 ‘치유’의 영역을 뛰어넘는 정원의 쓸모를 만끽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9월 초입인데도 봉숭아 채송화가 정말 한창이다. 백일홍도 아직 기세가 만만찮다. 널어놓은 빨간 고추 주위로 고추잠자리까지 맴을 돌고…. 오늘따라 붉은 색이 왜 이리 많을까.
붉다. 그 강렬한 빛깔 속에서 문득 내 삶의 여름을 느낀다. 마당에선 한참동안 한여름 매미 소리 못지않게 아기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넘치는 생명력 앞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전력질주를 해야 할 판, 주먹을 불끈 쥐어본다.
뭉게구름 사이로 황급히 뒤돌아서는 신령님의 모습이 자못 신경 쓰인다. 뜬금없는 여름 타령이 가소로운 것일까. 아니면 어이할 길 없는 소유 탐심에 역정이 나신 것일까.
첫댓글 안 팔리신다고요, 팔지 마세요. 마당 너른 집의 특징은 나무와 꽃이 많은 것입니다. 시골의 우리집 마당이 엄청 넓어서 온갖 나무들이 있었고, 꽃이 피었고, 우리집은 쓰러질 듯한 오래된 와가인데 벌써 하믈어져, 지금은 집의 흔적도 없어졌고 새 주인은 마당에 석류나무가 어릴 때 나무의 아들이라든데, 엄청 키가 큽디다. 마당 너른 집은 나무의 집입니다. 노인네들 한테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ㅎ 아파트가 들어서는 불상사(?)만 없으면 팔지도 팔리지도 않을 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