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 역사유적탐방] 남한산성 행궁
세계일보 기사 입력 : 2019-12-20 22:55:22
수정 : 2019-12-20 22:55:23
1636년 12월 남한산성의 겨울은 어느 때보다 추웠다. 청나라 군대의 공격에 산성은 포위됐고, 비축된 식량은 겨우 50일 정도를 버틸 수 있었다. 남한산성 내에서 인조와 신하들이 머물렀던 곳은 행궁(行宮)이었다. 행궁은 1625년 이서(李曙)의 제안으로 완성한 건물로, 왕이 유사시에 머물기 위해 설치한 임시 궁궐이었다. 행궁에서 보낸 날들은 힘겨웠다.
12월 24일 인조는 행궁 뜰에 나와 하늘에 기원했다. “고립된 성에 들어와 믿는 것은 하늘인데, 이처럼 눈이 내려 장차 얼어 죽을 형세이니, 내 한 몸은 아까울 것도 못 되나, 백관 만민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겠느냐며 땅에 엎드려 눈물까지 흘렸다”는 기록에서는 전쟁과 추위에 시달렸던 왕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적이 대포를 망월봉 아래에서 발사했는데, 포탄이 행궁으로 날아와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피하였다”는 기록에서는 청군이 포탄을 발사한 위급상황이 나타난다.
행궁 정문 누각은 한남루(漢南樓)이며, 왕의 생활공간인 상궐(上闕) 73칸과 집무공간인 하궐(下闕) 154칸 등 총 227칸으로 이루어졌다. 상궐에는 왕의 거처인 내행전과, 나인과 호위 무사의 거처인 남행각과 북행각이 있었으며, 하궐에는 왕이 신하와 함께 업무를 보는 외행전이 있었다.
남한산성은 행궁 중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단을 둔 곳이다. 행궁 좌측에 종묘에 해당하는 좌전(左殿)을, 우측에 사직단에 해당하는 우실(右室)이 있었다. 행궁은 10여년의 복원사업 끝에 2012년 그 완공을 보았다. 2014년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는 데는 행궁의 복원이 큰 몫을 했다.
인조 이후 숙종, 영조, 정조 등이 남한산성을 찾았음은 ‘남한지(南漢志)’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조는 산성의 지휘본부인 수어장대(守禦將臺)의 안쪽에 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을 걸기도 했다. 병자호란이라는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남한산성은 겨울에 찾아보면 그 의미가 더 클 것 같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우리동네 문화재] 남한산성행궁
중부일보 기사 입력 2023.05.31. 13:22
행궁이란 정궁(正宮)에 대비되는 용어로 국왕이 궁궐을 벗어나 능행(陵幸)이나 피난(避難) 휴양(休養) 등의 목적으로 거동(擧動)할 때 머무는 곳을 말한다. 남한산성행궁은 비상시를 대비한 조정의 정무 시설은 물론 다른 행궁에 없는 종묘와 사직을 보존할 수 있도록 위패를 옮겨 봉안할 건물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행궁제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광주행궁(廣州行宮), 남한행궁(南漢行宮), 산성대궐(山城大闕)이라고도 불리는 남한산성행궁은 1625년(인조 3) 6월 산성 축성 중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총융사 이서(李曙)의 계책에 따라 조성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때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지휘한 인조가 기거했다. 남한지의 "숙종과 영조, 정조가 영릉 참배 시 이곳에 머물렀고 유수의 아문이 있는 곳이 아니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역대 왕들이 실제로 머물렀으나 후에 광주 유수의 치소(治所)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행궁은 상궐(上闕), 하궐(下闕) 그리고 한남루(漢南樓)라는 누문을 기본 구조로 하고, 이들을 둘러싸고 연결된 행각을 갖추고 있다. ‘문헌비고’에 따르면 당시 행궁에는 내행전인 상궐(上闕)과 좌우 부속 건물, 익랑 등 72칸 반, 상궐의 삼문 바깥에 외행전인 하궐(下闕)과 응청문(凝淸問), 내삼문 등 154칸이 있었다고 한다.
행전의 동편에는 객사인 인화관(人和館)이 있었으며 전체규모는 325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상시 광주부 읍치로 기능하였기 때문에 좌승당(座勝幢) 일장각(日長閣) 등의 관영 건물이 있었고, 기타 재덕당·유차산루·이위정(以威亭)·이명정(以明亭)·완대정(緩帶亭)·우희정(又喜亭)·옥천정(玉泉亭) 등이 있었다.
행궁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 ‘남한지’,‘여지도서’, ‘광주부읍지’ 등 문헌마다 각 건물의 명칭이 다른 경우가 많고 규모 또한 일정치 않다. 이것은 인조 대부터 순조 대에 이르기까지 각 건물의 명칭이 다른 경우가 많고 규모 또한 일정치 않다. 이것은 인조 대부터 순조 대에 이르기까지 각 건축물들이 필요에 따라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행궁은 일제 강점기 때 대부분 훼손되어 빈터가 되었으나 조선시대 행궁제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는 이유로 1997년 5월 27일 경기도 기념물 제164호로 지정됐다. 그 후 행궁의 복원이 추진되면서 1999년부터 행궁지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해 건물지를 확인했고, 상궐과 하궐, 좌전이 복원되었으며, 일부 건물지에서 초대형 기와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어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승격되었다.
자료=광주시
남한산성 행궁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