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창유씨(居昌劉氏)발원과정 및 韓國시조
====劉氏성의 발원과정 및 中國시조====
5천여년전 고대 中國 요(堯)나라시대 어느 지방의 지명이 유(劉)라 하는 곳이 있어 이곳에 부임한 행정책임자가 성을 유라 정한것에 기원하며 수 천년간 내려오면서 劉라는 성씨가 시대에 따라 다른 말로 변경되기도 하였다. 주(周)나라 때는 당두(唐杜)씨로 개칭되어 이어오다가 中國을 통일한 진(秦)나라 진 시황제때 다시 劉씨로 환원되어 계속 이어져 내려오게되었다. 중국족보에 유씨의 최고시조가 한(漢)고조(高祖)의 아버지로 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중국에서의 漢고조 劉 邦(유방)은 현재의 산동성과 강소성의 접경지대인 패현에서 농민으로 출생했으며 그때는 진시황의 만리장성 건설과 심한 독재정치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나라가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진시황이 죽자 그 묘를 만들 때 유방은 패현지방의 인부감독관이되어 묘 축조공사장으로 향하다가 중도에서 포기하고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아 패현의 현령(지금의 군수)이 되고 이후 그는 패공으로 불려졌다.
유방은 지략이 뛰어나거나 무술이 능하지도 않았고 귀족출신도 아니었지만 인품이 온화하고 강직한 분으로 역사에 기록되어있다. 천하장사로 이름난 귀족출신의 항우와 지혜로서 싸워 우둔했던 항우의 군대를 격파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漢나라를 건국, 한 고조가 되고 문자(漢字)를 만들어 찬란한 중국문화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역사상 왕과 황제는 거의 무관이거나 귀족출신인데 한 고조가 세계사에서도 특이하게 나타나는 프롤레타리아, 즉 순수농민출신이었다는 것을 볼 때 이는 그가 지혜와 덕망으로 여러 사람의 추대에 의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BC202년)
한 고조를 적제(赤帝:붉은황제)라 함은 유방이 인솔한 패현의 인부들이 어느 곳을 지날 때 큰 뱀이 길을 막고 있어 유방이 단칼로 이 구렁이를 베어 그 피가 온몸을 적시었고 이런 용감함이 군사를 통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또 그의 어머니가 항상 붉은 속옷을 입혔다고 해서 칭하여진 말이다.
한국은 흰색이 평화와 정의의 색깔이지만 중국은 붉은 색이 정의와 평화의 색이고 지금도 중국과 대만의 국기가 붉은 바탕이며 중국인들은 붉은 색상을 좋아한다. 장기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강자가 붉은 색의 漢을 쥐는 것도 한 고조의 적제에서 유래된 것이다. 한국에서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라는 말과 신년의 하례식도 한 고조의 작품이다. 그러나 한 고조는 귀가 여리고 부인에게는 좀 약했던 점이 있었다고 역사는 전한다.
====대한민국 劉氏시조====
**시조탄생 및 송(宋)나라 병부상서(지금의 국방장관)사임과 망명이유**
유전(劉筌)시조께서는 한 고조로부터 1200년후 1051년 4월 8일 중국 강소성 팽성(彭城)에서 출생하셨으며 이는 한 고조로부터 40세계에 해당된다. (송 인종, 고려 문종 5년) 송나라 6대 신종때 병부상서에 재직 중이었던 시조께서는 당시 재상이었던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중국에서 살 수 없어 한국으로 망명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시조의 망명은 중국역사와 관계가 깊다. 당나라가 양귀비로 인해 국력이 쇠퇴하여 9세기에 멸망하고, 5대10국이라는 여러 나라가 생기고, 50년 후 서기 960년에 송나라가 건국된다. 송나라는 국내의 무력분쟁을 예방하기위해 문민우대 정책을 사용했지만 그 결과 무관천시로 군사력이 약해져서 만주에 있던 여진 및 거란족에 수시로 침략을 당한다.
견디다 못한 송 6대 신종은 왕안석을 정승으로 하여 정치개혁을 하였으나 과도한 세금과 심한 권력투쟁으로 실패하고 만다. 이 신법 중에는 청묘취식법이 있는데 이는 곡식을 추수 후에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 푸른싹을 보고 세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온당치 못하다고 당시 병부상서였던 시조가 반대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자 동지였던 7학사와 함께 한국으로 망명을 실행하였으며 결론적으로 송나라가 평안했다면 망명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조께서는 강소성 팽성출신인데 이 팽성은 중국시조 한고조(漢 高祖)의 출생지인 패현에서 가깝고 한 고조가 항우와 결전을 하여 승리한 곳이다. 시조 '유전' 할아버지께서는 한국 망명시 32세로 송대의 6대 신종, 고려대의 문종36년 1082년 8월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경북 영일군 기계면 용포리 해안에 상륙하였고 상륙지근처 8학산 밑에서 거주했다. 산 이름도 8학사가 왔다하여 8학산이라 했다한다.
시조께서 통일 중국의 송나라때인 30세에 국방장관이었다면 그 시대에서는 상당히 능력 있는 인물로 평가되었으리라고 본다. 한국 상륙지점은 현재 구룡포이며 시조의 발자취가 구룡포에서 발견되었다. 시조의 사적 1집에서는 옛 부터 중국에서 한국을 작은 중국이라 하고 공자도 배를 타고 동국으로 오지못하였음을 한탄한바 있었는데 시조의 충언을 들어주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으로 동쪽으로 해상을 바라보니 넓은 뽕나무 들판에 한 지역이 아침빛이 선명하여 고려로 왔다 기록되었다.
**시조가 구룡포에 상륙한 이유에 대한 생각**
시조는 강소성 출신이다. 예로부터 劉씨들은 산동성과 강소성에 많이 살았고 강소성은 한국의 전라도와 마주보는 곳으로 그 당시 시조의 직책이 국방장관이므로 중국의 주변사정을 잘 알고있었으며 북으로는 몽고와 만주의 여진 글안족 때문에 육로로의 탈출도 어렵고 남쪽은 월남땅 오지이고 서쪽도 길이 멀고 하여 송나라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고려로 망명지를 택했고 강소성이 해안을 끼고 있어 무역을 하던 고려의 사정을 잘 알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가까운 전라도로 상륙하지 않고 경북 포항 앞 바다까지 온 것은 조금이라도 송나라와 멀리하고자했던 시조의 바램이 있었을 것이며 음력8월이면 초 가을철이라 이때는 북서풍이 조금씩 불어 그 영향으로 그 시대의 배이던 범선으로 제주도 근해까지 편하게 왔을 것이다. 제주를 지나 조류와 해류를 타고 안전한 포항 앞 바다로 들어온 것 같다.
선박의 크기는 선원들을 포함하여 승선인원 30-40명 정도이고 톤수는 약 50톤 정도가 아닌가 생각되며 출발지는 산동성의 청도(중국 칭따오)부근이고 영일군까지는 약10-15일간 항해했으며 리수로 2500-2700리의 거리라 생각된다. 이는 본인의 30년간의 선박생활 경험에 의한 수치이다.
**한국(고려)에서의 생활**
배편으로 중국을 떠나올 때와 망망대해에서의 서글픈 심정을 시로 남겼고 한국에 와서도 고향과 송황제를 그리워하는 많은 글을 남겼다. 처음은 8학산 밑에 거주하였으나 나중에 영천군(거타군, 동거군, 영양군)으로 이주하였고 문종시에는 고려정부에서의 관직을 사양하였으나 고려 숙종시(1096-1105)에 입조하여 이후 후손은 고려정부에서 높은 벼슬을 살았다.
시조의 처음관직은 고려 선대 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국자감 이었고 후손들은 현감에서부터 대제학, 대사헌, 추밀부사 이었고 시조께서는 고려예종 17년 1122년 2월 7일 향년 72세로 별세했다.
고려정부에서는 시조의 높은 학문과 공을 인정하여 장남을 거타군으로 봉하
고 차남은 아림군 삼남은 백천군 으로 봉했다. 시조에서부터 8대까지 주 거주지가 당시 서울이었던 개성과 영천이었고 8대에서 장남은 거타군으로 차남은 옥천으로 분파된다.(옥천은 강릉의 옛 이름이고 강릉 劉氏의 중시조가 된다)
고려실록(고려대 실기)에 의하면 고려충순왕때 거타군 북 명천면 덕곡산하 계양동에(지금의 영천군이며 일명 명산명 화기동(鳴山面 花枝洞)죽간선생의 묘가있고 사패지(賜牌地:왕으로부터 받는 패와 토지)는 사방으로 5리(2km)이고 그중에 위토전(位土田) 즉 밭이 10만평 밤나무 300주 대추나무 200주가 있으며 개펄밭이 좌우로 둘러있다. 제실이름은 수송대(水松臺) 정침 5간이라 기록되어있다. 구족보에는 愁送臺(수송대:그리워 하는 심정을 보내고 싶은 마음)라고 적혀있다. (세보1권111쪽)할머니는 감숙성 농서현 출생 농서이씨 정경부인이시다.
**劉氏 종손 거창 거주 (居昌 劉氏와 江陵 劉氏의 갈림길)**
관직에 있었던 거타군의 후손들이 이성계의 반란에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타군 9대(환)의 관직은 고위직인 밀직사사겸대사헌으로 도저히 이성계의 혁명에 동조할 수 없어 朝鮮에 불복하고 居昌에 낙향하여 영사정(永思亭)으로 칩거하였다. 거창에 온 이유로는 당시 안의군에 있던 장인의 죽음으로 안의(거창)에 내려와 살게되었으며 瀯溪(영계)선생의 신도비는 이조말기에 세워졌다.
12대의 강릉쪽의 "창" 이분은 고려말 충신이었던 정몽주의 문하생이었지만 이성계의 반란에 가담하여 혁명주체가 되어 이조개국 공신이 되고 옥천부원군이 된다. 8세계에서 분리된 강릉(옥천)의 후손들은 옥천부원군을 중심으로 고위관직을 유지하고 번창하였으며 현재 서울에서의 劉씨 유명인들의 대부분이 강릉 劉씨이다.
이후 거창쪽은 숨어 살았고 영원히 사모한다는 ""영사정""을 세워 멸망한 고려를 생각 하면서 깊은 산속의 거창에서 은둔 생활을 한 관계로 충신으로서의 절개를 지킴은 높이 평가 될 수 있으나 후손은 강릉에 비해 나약하고 편협되며 자기발전을 등한시 하여 가문전체가 정체된 상태에서 생활하게된다.
지금 생각하면 9세계의 선조가 과연 그 문란하고 도덕성도 결여된 퇴폐한 고려조에 충성함이 타당했던지 생각 해볼 문제고 강릉의 옥천부원군과 같이 이성계 정부에 참여 했다면 후손들은 많이 달라 졌을 것이다. 더구나 거창이라는 남쪽의 지역 관계로 수시로 침략 해왔던 일본인들에 많은 인명과 재산을 뺏기고 이로인한 강릉과의 인구 대비도 엄청난 약세이다. (강릉16만, 거창3만) 9세계에서 15세계까지 거창의 마리면, 위천면에서 주거 하였고 이조때의 벼슬은 교위같은 하급직이고 장군도 한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창 유씨 안에 거타군파와 아림군파가 같이 존재한다. 시조의 3 아들중 첫째 거타군 이후 거타와 강릉으로 분리되고 둘째는 아들때(시조의 손자) 아림군으로 셋째에서는 8 세계에서 백천으로 분리 된다. 거타군은 현재의 시조 산소가 있는 영천군의 옛 이름이다(거타군,동거군,영양군,영천군, 세보P109 110 111, 대동보 30 31) 거타군은 시조의 신도비문에 적혀 있다.
고려 실기에도 거타군 (현 영천군) 이라 나온다. 족보상의 거타군과 거창은 관계가 없다. 혹시 거창의 옛 이름이 거타라고 할수 있는데 그래도 우리 족보상의 거타군과는 아무 관계 없다. 거창의 옛 지명에 거타라는 기록도 전혀 없다. 고려 정부에서 받은 논, 밭, 과수의 땅은 지금의 영천이다. 조상의 산소도 영천과 근처에 있다. 처음 족보의 기축보 제작시(1769년 영조 45년) 당시 劉씨 본거지의 거창을 기준으로 거창 유씨라 하였고 타 성씨들의 비문이나 족보 서문들은 거창을 거타군과 유관하다 하였으나 이는 이조 말엽이나 1900년 이후 글 이고 근거없는 오기이다. 9 세계(환) 때 거창으로 온 이유는 처가가 거창이라 왔고 비문은 약200년 이후 기술 된 것이다.
**義士公파 (의사공파, 거창 유씨 종가 집 ) **
거창의 15세계 명진(名盖) 께서는 정유재란에 내외분 같이 황석산성에서 순절하고 의사공파는 이분의 후손이다.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유린되고 정유년에 일본이 다시 조선을 재침했을 때 경남지방에 곽제우장군을 정점으로 광범한 각계층의 집합체인 민병대가 조직되고 전투도 치열해져 우세한 화력의 일본군에 밀리던 조선군은 황석산성으로 모여 최후의 결전을 하지만 세부족하여 전멸상태에 이른다.
이때 우리 선조 내외분은 도피하라는 주위의 만류를 제치고 후계를 위해 아들을 사전에 심부름을 보내놓고 성문을 닫고 결전에 임하였다. 성 안으로 들어가 부모와 같이 죽겠다는 아들을 후손을 위해 빨리 도망하라는 말을 남기고 내외분은 일본군과 싸우다 당시 거창 곽 군수와 같이 장렬히 순절하였으며 조정에서는 그에게 義士(숙종을미1715년 義士로 황암서원에 배향, 황암충열사)칭호를 내렸으며 그로부터 의사공파로 내려온다.
후손인 본인의 입장으로 만약 그분이 서울근방의 지역에서 전투를 하다 순절하였다면 사후의 대우도 달라졌고 또한 후손의 대접도 많이 달라졌으리라 생각된다. 곽재우 장군의 사후 대우가 서산대사나 사명당과 차이가 나는 실정이다.
황석산성은 현재 함양군과 거창군사이에 있고 함양군의 농을정에서 전라도 장수로 가는 길 옆에 있으며 산성은 거의 없어진 상태로 남아있고 문화 유적지로 복원되고 있는 상태이며 의사공 할아버지 묘소는 황석산성에서 거창쪽으로 위치하고 황석산성 밑 계곡 물은 유원지인 농월정으로 흘러 세인을 시원하게 해주고 있다. 16대, 17대는 거창,안의에서 거주했다.
우리나라족보는 1546년부터 시작되었고 劉씨들은 타성들의 시기로 족보없이 지내다가 중국사신에 돈을 주고 부탁하여 당시의 중국정부에 劉씨한분이 장관(상서)으로있어 이분으로부터 중국판각본을 얻어 족보에 수록, 발간하게 되었다. 居昌1769년(영조45)기축보. 江陵1761년(영조37)신사보 대동보 1975년
**金海(김해)로**
18대의 장남(潤禧)은 안의, 차남(潤祺)은 산청에 거주하였고 아드님이 당시에 산청,밀양등 경상도의 유명한 한의사이신 유이태(劉以泰)이시고 TV에서 동의보감 허준의 스승으로 나온다. (1715년 별세) 삼남은 실기, 사남(潤雲)은 김해녹산, 오남(潤達)은 김해,진영 죽곡으로 이주했고, 진영에서 19,20대까지 거주했다. 20대 할아버지(한웅)는 1709년 숙종35년생이며(유연진 9대조)산소는 월영산묘사 1번째 묘소고 21대(유연진8대조)할아버지는 (인갑)1734년 영조 10년생(신기윗묘)으로 이 할아버지를 정점으로 이후 진례 창원 퇴례 명동 장유 마사로 분류 오늘에 이른다.
조상의 발걸음을 추적한 이유는 정확한 뿌리를 알고자함이고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건강한 삶과 노력하는 내일을 기약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건국후 유씨들의 첫 번째 높은 관직이 國防長官, 國務總理이고 김해 서북지역의 종손이 육군 대령 출신임이 우리들 劉氏들의 시조와 무관하지 않음을 믿는다.
1985년 경제기획원 통계
거창 32,790
강릉 161,634
백천 8,910
경주(강릉) 8,561
충주 1,120
금성(강원도 금화) 50
대한민국의 劉氏는 약22만명이다.
신미년(1991년) 정월
글 : 28세계 劉 次 鐘
파종별 내역 (派宗別 內譯)
1. 의사공파(義士公派) 15세손
휘(諱)는 명개(名蓋)자(字)는 현보(顯普) 가정무신(嘉靖戊申)서기 1548생이요
만력정유(萬曆丁酉)서기 1579년 세상을 떠난 분 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안의황석산성(安義黃石山城)에서 순절(殉節)하신분으로
의사공이시다.
안의황암사(安義黃岩祠) 및 영남충의단(嶺南忠義壇)에 위패(位牌)를 봉안(奉安)
하여 매춘추(每春秋)향사(享祀)한다.
자손(子孫)은 전라북도, 함양, 김해, 거창등지에 살고 있다.
묘역(墓域)은 황산(黃山) 선영하(先塋下)
2. 정자공파(正字公派) 15세손 자손 산청, 순창, 함양, 거창
3. 교수공파(敎授公派) 16세손 자손 합천, 의령, 거창
4. 판사공파(判事公派) 20세손 자손 황해도 연안, 인천, 강화
5. 감정공파(監正公派) 17세손 자손 함양, 진주
6. 참봉공파(參奉公派) 13세손 자손 충청도, 영동, 금산, 거창
7.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13세손 자손 하동, 악양, 산청차황
8. 통정공파(通政公派) 12세손 자손 자손 전라도, 거창
9. 진사공파(進士公派) 12세손 자손 고성, 사천, 진주, 산청, 경주, 삼천포, 진양, 금릉
==========================================================================
묘사는 음력 10 월 10 일 지난 첫 일요일
순서
월영산 윗묘 20 세계 한웅 1709년 숙종 35년 생 내외분.
아래 22 세계 계종 1752년 영조 28년 생 할아버지 한분.
신기 윗묘 21 세계 인갑 1734년 영조 10년 생 내외분
아래 22 세계 월영산 아래 산소의 할머니 의성 김씨.
==========================================================================
출처 : 인터넷 다음 카페 거창유씨 집안 사람들 발췌
출처 : | 강릉유씨 | 글쓴이 : 劉永文 원글보기 |
유씨 본원 계보도 |
출처 : | 강릉유씨 | 글쓴이 : 劉永文 원글보기 [출처] 거창유씨(居昌劉氏)발원과정 및 韓國시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