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장의 여인
이배근
늙은 호박이 덩그러니 한옥 지붕에 매달려있고 길가의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을씨년스런 계절․
가을은 이렇게 나의 곁으로 그녀의 곁으로 산장 마을을 기어오른다.
앞뜰의 후박나무 잎이 지기 전에, 낙엽이 뒹굴기 전에 그녀의 웃음소리를 다시 한
번 듣고 싶어 나는 오늘도 그 여인을 뵈러 간다.
지금도 우리의 귓가에 생생한 “산장의 여인”의 가수 권혜경...
늘 불우한 이웃과 함께했고 장애자와 함께한 가수인생 사십 여년.
가수 생활의 수익금을 늘 어두운 곳에 아낌없이 보태주었던 나의 여인, 산장의 여
인.
화려한 의상과 조명속에 살던 그녀가 10여 년 전부터 이곳 외천리 땅에 자리를
잡고 고희를 넘긴 채 살고 있다.
반갑게 두손을 잡아끄는 그 여인.
현숙, 현미, 한명숙 등 이름만 들어도 인기 가수임을 짐작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
께한 사진이며 옷장속에 아직도 가지런히 걸린 채 주인의 부활을 기다리는 무대
의상을 보라보며 그녀의 화려했던 과거를 가늠해본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노랫말 처럼이나 그녀의 인생이 서글픔
으로 녹아 있는 이곳. “늙은 육신을 함께할 영감이 없고 걷어 줄 자식이 없으니
그것이 종종 슬퍼. 차라리 나도 애인이나 하나 만들걸"이라며 자신감 있던 예전보
다 한 발 물러선 그녀도 역시 한 여자가 아닌가 싶어 더욱 안쓰럽다.
고이 간직한 색 바랜 기타를 꺼내어 튕겨주는 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힘이 있
고 핏줄서린 목소리는 아직도 영롱한데..
뼈만 앙상한 얼굴과 구부정한 그녀의 뒷모습을 대할때면 첫사랑의 슬픔보다 더한
연민이 든다.
내 모습이 동네 어귀에서 사라질 때 까지 눈을 떼지 못한 채 몇 번이고 손을
흔들던 그녀.
문득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난뒤에 그녀의 집을 서성이며 그리워하느니 그전에
뭇사람들이 그녀의 모습을 한 번 더 찾아주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
지금 그녀는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고 있다.
외로운 산장에서 외로움에 지쳐 그것이 인생이 되어버린 여인.
그녀도 이젠 우리의 간지러운 세상 이야기를 들려 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닌지 오늘 같은 가을 아침엔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2006/23집 겨울특강
첫댓글 06년도 쯤 같이 공부하고 이 글을 발표 했던 이배근 선생님과 그 분의 글을 접하니
반가운 마음이 크게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