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년∼1895년)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년 12월 27일~1895년 9월 28일)는 프랑스의 생화학자이며 로베르트 코흐와 함께 세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질병과 미생물의 연관관계를 밝혀냈고, 분자의 광학 이성질체를 발견했으며, 저온 살균법, 광견병, 닭 콜레라의 백신을 발명했다.
생물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를 뽑을 때 항상 언급되는 인물. 프랑스 국민들이 존경하는 과학자다. '자연발생설'을 부정하고 '생물속생설'을 확립함으로서 생물학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구축했으며, 파스퇴르를 통해서 비로소 생물학이 엄밀한 의미의 현대적인 과학으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 동시기를 살며 경쟁심을 가졌던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와 함께 세균학의 아버지, 또 백신의 아버지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아버지는 무두장이였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다. 작은 시골에서 태어난 평범한 가정이었지만 부모님의 교육열이 대단했다. 학교 선생의 추천을 받아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으나 향수병을 버티지 못하고 돌아온다. 22살에 다시 입학하고, 교원 시험에 합격해 중학교 물리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교수들의 만류로 대학에 남아 학위 공부를 계속하게 된다. 이때 만약 대학에 남지 않고 물리교사로 살았다면,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27살에 화학과 조교수로 임명되었으며, 부인과는 만난 지 4개월만에 결혼했다. 이후 계속해 화학을 연구하여 결정의 모양, 분자구조, 편광 효과가 서로 관련됨을 증명하여 명성을 얻었고 생물만이 광학적 비대칭 화합물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정립해 분자비대칭연구가 생명의 기원에 관한 열쇠가 된다.
그가 릴 대학교 자연과학대학장이었을때 비고라는 근처의 양조업자가 파스퇴르를 찾아오며 생물학자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당시는 효모가 당을 알코올로 바꾸는 촉매라는걸 알았지만 이를 화학반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학자인 파스퇴르에게 시큼하게 변해버리는 원인을 찾아달라고 부탁한것이다. 파스퇴르는 술통에서 채취한 표본을 현미경으로 보고 그 모양이 다르다는걸 알았다. 변질된 술통에서 발견된 다른모양의 것, 바로 세균이었다. 그리고 그걸 편광기로 분석하여 그것이 생물이라는걸 알아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발생설(미생물이나 구더기 같은 생물들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이론) 이래 그런 미생물마저 자연발생한다고 생각했으나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을 통해 생물속생설을 입증하였다. 단, 엄밀히 말해 완벽한 입증은 아니었으며, 이후 제자인 틴달과 사위인 샹 베를랑이 각각 간헐살균법과 오토클레이브를 개발함으로써 보완되었다. 그는 <이 연구로서 자연발생이라는 교리는 결코 회복되지 못할것> 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이로서 이런 다양한 미생물을 가르키는 균germ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파스퇴르는 연구 끝에 저온살균법을 개발했으며, 오늘날 술, 우유 등에 사용되고 있다. 파스퇴르의 이름을 따 '파스퇴르 공법'(pasteurization)이라고 하며, 저온 살균 공법이 아니라 그냥 살균된 것도 '파스퇴르화'(pasteurized)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멸균을 의미하는 sterilization이 아닌, 병을 일으키거나, 식품의 변질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미생물을 적당히 제거하는 것을 pasteurization이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온 살균된 식품들의 경우 ultra-pasteurized라고 표기된 경우가 많다.
맥주의 발효 과정에서 효모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입증했고, 양조의 화학적 과정을 밝혀낸 논문을 발표하며 프랑스 맥주 양조 기술이 잠시나마 독일을 앞서게 되는 성과를 낳았다. 다만 파스퇴르 자신은 맥주를 별로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 발견 이후 뇌출혈로 쓰러져, 죽을 때까지 몸의 왼쪽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불구가 된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독일의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가 탄저균 배양에 성공한 소식들 듣고, 원인균을 배양했다면 그 병을 이길 수 있다는 약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엔 세균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들이 천지였다.
1880년 닭 콜레라에 대해 연구하던중 조수가 실험체인 닭에게 콜레라균을 주입하는걸 잊어버리고 휴가를 다녀온후에야 콜레라균을 접종했다. 그런데 닭들은 곧 건강해졌고 이를 알게 된 파스퇴르는 여러 단계의 실험을 통해 휴가동안 방치된 콜레라균이 약해진 채로 접종되어 닭들이 내성을 가지게 되었다는걸 알아냈다.
1881년 5월 5일 공개적으로 양들에게 탄저균 백신의 접종이 실시되었고 크게 성공하였다. 다만 급히 만들어진 백신들중 오염되거나 순도가 떨어지는 백신이 많아 문제가 되었다.
1885년 조제프 메스테르(Joseph Meister,1876~1940)라는 9살 소년이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렸는데 파스퇴르는 광견병 백신을 연구하여 동물실험에 성공한 단계였다. 당시 광견병 치사율은 100%였기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소년에게 접종했고 조셉은 병을 이겨내고 면역을 갖게 되었다. 1885년, 광견병에 걸린 아이의 어머니가 파스퇴르를 찾아오며 또 다른 위대한 업적을 세우게 된다. 광견병은 당시로서는 걸리면 그냥 죽는 수밖에 없는 치사율 100%의 병이었다. 지금은 광견병에 감염되어도 빠른 시간 내에 백신을 접종한다면 완치가 가능하다.
1888년 11월 14일 에는 파리에 자신의 이름을 딴 파스퇴르 연구소를 세웠다.
1895년, 만 72세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무덤은 파스퇴르 연구소 지하에 있다고 한다. 석관묘로 조성되어 있으며 석관 안에 파스퇴르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분자의 구조에 빛의 편광현상을 관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거울상의 입체구조(광학 이성질체)가 있음을 주장하고, 실험적으로 입증했다. 이걸 조사하기 위해서 그는 타르타르산의 결정체를 직접 확대하여 눈으로 보면서 하나하나 구분했다. 이 발견도 당연히 노벨상감이라 파스퇴르가 살아있을 때 노벨상이 있었다면 노벨 화학상도 탔을 것이다.
"과학에는 조국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프로이센-프랑스 간의 전쟁 중에 프로이센에서 받았던 훈장을 돌려보내면서 남긴 말이다.
다만 이 일화와 명언은 중국, 한국등 아시아권에서만 검색되며 서양권에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파스퇴르가 한 정확한 말은 "Science knows no country, because knowledge belongs to humanity, and is the torch which illuminates the world." (과학은 조국을 모른다. 왜냐하면 지식은 인류의 것이고, 세상을 비추는 횃불이기 때문이다)이다. 이 말만 따진다면, '학문에는 국경이 없다'는 전자의 의미만 있을 뿐인 셈이다.
누에에게 발생하는 미립자병과 연화병의 퇴치법을 발견하여 프랑스의 양잠업계를 도왔다. 이 과정에서 파브르를 만나기도 했는데, 정작 파브르는 파스퇴르를 별로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누에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파스퇴르가 누에의 병을 고치는데 도전한다는 열의는 높이 샀으나, 파스퇴르의 태도가 워낙 거만했기 때문. 파스퇴르는 유럽 전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당대 최고의 잘 나가는 과학자 중 한 명이어서 '내 발표를 이해 못하는 것은 당신이 멍청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코앞에서 서슴치 않고 했다고 한다. 파브르에게도 와인 저장고를 보여 달라고 했는데, 파브르는 자신은 가난해서 따로 저장고가 없다고 하자 경멸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고 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어느 날 제자가 그렇게 배운 게 많으신데 그리 신앙심이 깊을 수 있냐고 묻자 파스퇴르는 자신은 오히려 많이 배워서 마치 농부처럼 믿음이 깊고, 만약 아는 게 더 많았다면 농부의 아내만큼 믿음이 깊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과학자의 이름을 따온 실험기구로 파스퇴르 피펫(스포이트)이 있다.
훌륭한 과학적 업적과 달리 개인적으로는 만나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 정도로 그 누구 앞에서도 거만함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죽을 때까지 모난 성격을 가지고 살았으면서도, 세균과 위생에 집착하고, 평생 우울증으로 고생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가족사도 불행 그 자체였는데, 파스퇴르의 딸 중 대부분이 12살도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게다가 딸들은 파스퇴르가 제일 활동이 활발할때 병에 걸렸고, 위독했을 때는 이미 멀리 출장을 가 있어서 대부분의 딸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파스퇴르로 인해 인류 최초로 광견병 접종을 맞고 살아난 메스테르는 이후 평생 파스퇴르 연구소 관리인으로 일했다. 메스테르는 1940년 자살했다고 전해지는데 이게 파스퇴르의 석관을 깨내 시신을 훼손하려는 나치 독일에 항거하다가 자살했다고 잘못 알려졌다. 심지어 이게 90년대 초반 어린이 과학서적이라고 나온 것에도 이렇게 서술되었다. 실제로는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인해 가족들과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고 가족을 모두 잃었다고 절망해 자살했는데, 안타깝게도 죽은 줄 알았던 조제프의 가족은 그 뒤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생명은 모든 단계에서 죽음을 지휘한다>라고 말했다. 그의 딸 3명이 모두 장티푸스로 죽었기 때문에 감염병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발효처럼 감염과 염증도 미생물에 의한거라는 직관을 가졌으나 의사가 아니라서 임상적 연구를 할 수 없어 아쉬워했다. 그러다 영국의 의사 조제프 리스터가 파스퇴르의 연구를 참조하여 석탄산을 이용한 외과수술 전후에의 소독법을 확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