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 |||
| |||
[프레시안 김봉규 기자]
삼성의 '무노조 경영철학'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故 이병철 선대 회장 시절부터 시작된 무노조 방침은 복수노조 허용이 코앞으로 다가온 현 시점까지도 삼성의 금과옥조 중 하나다. 삼성은 대신 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에 따라 노사협의회인 '한가족협의회'를 꾸려 노조를 대체하고 있다. 지난 4월 삼성 반도체 노동자의 '백혈병 산재 의혹'을 둘러싸고 삼성이 반도체공장을 공개했을 때도 발표회장에 협의회 위원들이 참석해 백혈병과 삼성전자 공장 작업환경은 무관하다는 뜻을 삼성 임원들과 함께 전달했다.
삼성은 노동조합 없이도 협의회를 통해 근로조건 등을 개선해오고 있다고 말한다. 외부로 목소리를 내는 일이 거의 없는 한가족협의회가 실제로 노동자의 근로조건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 협의회 위원을 지냈던 한 삼성전자 노동자가 지난 9일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성 장애로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출장 거부에 따른 직무정지에서 온 스트레스지만, 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치 않다.
근로자 위원이 협의회 비판하면 '징계'?
1987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영상디스플레이 사업부에서 근무하던 박 모 씨(40세)는 지난 2007년 11월 한가족협의회 사원측 위원에 입후보해 당선됐다. 임기가 2년인 근로자위원으로 일하며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 동료의 신망도 두터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임기를 10달 앞둔 2009년 2월 협의회 징계에 의해 위원직을 상실했다.
징계의 직접적인 이유는 협의회에서 '삼성의 글로벌 경영 정책과 신흥시장 환경 이해'라는 취지로 시행하는 '한가족 스쿨(school)' 행사에 불참했다는 것이었다. 박 씨는 단순한 여행에 가까운 '한가족 스쿨'이 당시 조직 개편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불필요한 비용 지출이며 근로자 위원이 자리를 비워야 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근로자 위원의 의무사항도 아니었지만 박 씨는 이 일로 협의회로부터 위원 자격을 2달간 정지당했다.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불필요한 갈등을 키우고 싶지 않아 징계위원회의 결정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박 씨는 복귀한 이후에도 회사 경영진에게 이메일을 보내 상관의 언행과 리더십, 인적 쇄신, 협의회 운영방안 개선 등 삼성의 내부적인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이 과정에 경영진의 요청에 따라 일부 당사자의 실명이 거론됐다. 그러자 협의회는 다시 징계위원회를 열어 박 씨가 '사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근로자 위원 자격을 면직한다고 통보했다. 규정에 따라 면직당한 박 씨는 다시 근로자 위원에 입후보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한가족협의회의 '독특한' 내규에 있다. 징계위원회 관련 규정을 보면 △사원의 대표로 한가족협의회의 명예를 실추한 자 △도덕적 예의를 초월하여 무리를 범한 자 △한가족협의회 활동에 비협조적이며 한가족협의회 자체를 붕괴하려는 행위를 한 자 △기타 회사와 사원의 명예를 실추한 자 등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사실상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이유로든 징계가 가능하도록 한 모호한 정의다.
협의회는 박 씨의 이메일이 다른 협의위원과 한가족협의회의 명예를 실추했다고 판단했다. 공식활동을 왜곡·폄하하고 행사에 참가한 다른 협의위원까지 비난해 조직 질서를 흩트렸다는 것이다. 근로자 위원에서 '박 대리'로 돌아온 그의 고통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출장 지시 거부로 중징계…결국엔 정신과 치료까지
박 씨는 지난해 8월 갑작스러운 출장 지시를 받았다. 브라질에 있는 공장에 45일 동안 다녀오라는 지시였다. 당시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고 건강상태도 좋지 않았던 그는 출장을 연기하거나 다른 사람으로 대체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삼성은 재차 그에게 출장을 권했다. 박 씨는 몇 달 전 받았던 건강검진에서 부정맥과 폐결핵, 신장결석 등으로 번질 수 있다는 의사 소견 등을 들며 재차 거부의 뜻을 밝혔지만 회사는 "그 정도 증상은 40대면 누구나 있는 것"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 씨가 끝까지 이를 거부하자 회사는 지난 2월 상벌위원회를 열어 상사의 정당한 업무지시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감봉 6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이 처분은 인사 고과에도 영향을 미처 올해 연봉등급 역시 하위 등급인 '라'로 평가받았다. 당시 개인 사정을 이유로 출장 일정을 조정하는 경우가 많았고, 대체 인력이 없지 않았던 상황에서 유독 박 씨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것에 대해 항의했지만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박 씨는 지난 5월 삼성과 한가족협의회를 상대로 감봉 처분과 근로자 위원 면직결정에 대한 무효확인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이 진행되던 7월 회사는 그에게 다시 러시아 장기출장을 지시했고 박 씨가 이를 거부하자 7월 28일 직무를 정지시켰다. 박 씨의 책상은 그룹장 옆으로 옮겨졌고 업무에 필요한 사내 메일은 차단됐다. 종일 빈 책상을 지키던 박 씨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의사의 권유로 정신병원을 찾았다. 병원은 그에게 1달 이상의 입원 치료와 지속적인 통원 치료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현재 그는 심신의 안정이 필요해 가족 이외의 접촉이 불가능한 상태다.
"복수노조 허용되면 노조 세울 건가?" 유도심문 받아
박 씨가 유독 회사로부터 이런 처우를 받게 된 것이 단순히 '찍혀서'일까?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비판하며 세워진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은 "근로자 위원활동을 하면서 회사의 의도와는 달리 현장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노력한 박 씨를 회사가 탄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삼성일반노조에 따르면 박 씨는 그룹장과의 면담 중에 "현장사원의 신뢰를 받고 일 잘하는 사원으로 인식된 정직한 사원"이라고 칭찬받으면서 "복수노조가 허용되면 노조를 만들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내년 6월부터 복수노조가 시행되면서 이를 경계하는 삼성 측이 박 씨를 떠본 것이고, 회사 차원의 직원 교육을 넘어 노조를 설립할 생각을 품는 이들에 대한 개별적인 압박에 들어갔다는 것이 김 위원장의 설명이다.
'무노조 신화'를 유지하려는 삼성의 의지가 끝까지 관철될 수 있을까? 삼성은 지난 7월에도 삼성SDS의 한 과장이 노조 설립을 촉구하는 이메일을 사내에 배포하자 이를 삭제하고 그의 근무지를 대전에서 서울로 황급히 전환한 바 있다. 상사 밑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기업문화에 대한 회의가 커져가고, 노동자 스스로도 자신의 권리 찾기에 눈을 떠가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대 회장의 유지를 지키려 더 많은 비용을 감수하는 삼성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