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코린 4,6ㄴ-15; 루카 6,1-5 /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2026.9.5.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길에 맞닥뜨리는 십자가는 메시아에게 있어서나 그를 따르는 사도직에 있어서나 공통적으로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 자체에서 오는 실존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선포받는 이들이거나 또는 이 복음선포 활동을 반대하는 이들로부터 오는 관계적인 것입니다. 독서와 복음 공히 오늘 말씀에서 실존적인 십자가는 굶주림이며, 관계적인 십자가는 위화감입니다. 그리고 이 두 십자가 모두를 짊어지게 만드는 부활의 힘은 정체성에서 옵니다.
실존적인 십자가인 굶주림은 복음선포자가 지닌 정체성의 근원인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풀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 일행은 일정한 생업도 없고 또 든든한 후원자가 제공하는 그 어떠한 보장도 없이 하느님 나라를 위한 삶을 시작했으므로 수시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찾아와서 치유를 받거나 구마를 받고 나면 베풀어주던 잔치에서야 마음껏 먹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날은 쫄딱 굶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혈기왕성한 나이의 제자들이 배고픈 나머지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 이삭 몇 개를 손으로 비벼 먹는 일이야 인정상 눈감아 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얄궂게도 이 일행을 뒤따라오면서 감시하던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았습니다. 하필 그날이 안식일이었고,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정해 놓은 안식일 규정에 의하면 남의 밀밭에서 추수를 도와주는 품앗이도 생업에 해당되는 일이어서 금지사항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제자들이 만성적으로 겪고 있던 굶주림이 보이지 않았던 게지요. 오늘 복음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굶주림을 참지 못해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지 예수님은 아니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배고프지 않으셨던 걸까요? 이런 궁금증이 생깁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구도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식은 호흡에 의한 양생입니다. 들숨과 날숨을 가능한 한 천천히 그리고 길게 하는 수련을 하면 자연의 기를 섭취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자연의 동식물이 제공하는 음식에서 기를 취하지 않아도 생존이 가능합니다. 물론 최소한도의 생존입니다. 배부름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는 밀 이삭에 손도 대지 않으셨고, 배고팠던 제자들이 눈치 없이 남의 밀밭에서 밀 이삭을 뜯어서 비벼 먹다가 일이 생겨버렸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들이 제기한 논리로 맞받아 치셨습니다. 바로 안식일 논쟁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든가,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안식일 법을 제정하신 주인”이라는 계시가 이렇게 해서 나왔습니다. 진실에 눈 먼 종교인들로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진리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찾아와서 잔치가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실존적인 십자가는 정체성의 근원인 하느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이치가 그래서 나옵니다.
그 다음, 관계적인 십자가는 하느님께로부터 충전받은 기운으로 자기 정체성에 기대어 풀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두 번째 선교여행에서 그리스 선교를 개척하면서 코린토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선교여행에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 사이 몇 년 동안에 이 공동체는 교우들도 늘어났고 그들의 신앙도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바오로가 개척하고 난 다음에 아폴로가 와서 성경을 가르쳤는데, 교우들이 바오로 편과 아폴로 편으로 나뉘어 분열상을 보인 것입니다. 그들 코린토 교우들의 눈에는 이 두 사도가 전한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두 사도의 인간적인 모습만 보였던 게지요. 사도마다 인간적인 관계의 친소(親疏)가 생기기 마련인지라 요즘 말로 하면 각 사도의 열성 지지자들이 끼리끼리 따로 모이는 현상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소식을 에게해 건너 편 에페소의 차가운 돌감옥에서 전해 들은 바오로가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기록된 것에서 벗어나지 마라. 한 쪽을 편들고 다른 쪽을 얕보지 마라. 우쭐대지 마라.”(1코린 4,6) 그러면서 사도 바오로가 꺼내들 수 있는 비장의 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복음을 선포하느라 겪었던 고생담이요 무용담입니다.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1코린 4,11-13) 이렇게, 관계적인 십자가는 자기 정체성의 체험으로 수습할 수 있습니다. 코린토 공동체의 어느 교우도, 사도 바오로가 겪어야 했던 고생의 1/100도 겪어 보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대접을 받을 정도로 교양 있던 그리스 시민도 아니었고, 권세를 누리던 로마 시민권자들도 아니었습니다. 저마다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들이었고 무식하고 가진 것 없는 처지에서 사도 바오로를 만나 공동체를 꾸렸던 이들이기 때문에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공동체를 건설하느라 들인 고생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꼼짝 못하고 승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오로가 지닌 사도적 정체성의 힘이었습니다.
짐작하건대, 복음선포의 십자가가 굶주림과 같은 실존적인 것이거나 또는 위화감과 같은 관계적인 것이거나 간에, 박해시대 우리 신앙선조들도 똑같이 겪었을 것입니다. 실존적인 십자가를 견디어 내려는 내공에서 영성이 진화되었을 것이고, 관계적인 십자가를 견디어 내려는 내공에서 공동체의 친화력과 일체감이 더욱 굳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가 닥치면 신앙은 더 순수해지고 단단해집니다. 배교자나 낙오자도 나오겠지만 말입니다. 적어도 남은 교우들은 절절히 깨달은 진실입니다, 박해와 시련은 신앙의 정체성을 성숙시키고 성장시킨다는 것.
교우 여러분!
복음을 선포하거나 증거하는 길에는 굶주림과 같은 경제적 궁핍을 각오하고서도 복음이 주는 정신적 풍요로움을 누리거나, 아니면 경제적 안정 대신에 정신적 속박을 받아들이는 선택이 놓여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선포의 길을 가시면서 열두 제자를 사도로 양성하셨고 사도들은 초대교회를 이룩하여 공동 생활과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통해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복음선포의 길을 통해 소아시아와 그리스 일대에 공동체들을 세워 초대교회를 로마제국 영토 전체에 퍼뜨려 끝내 서방 세계 복음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복음선포를 통해 굶주리고 고통받는 이들을 정신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복음을 누리는 삶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현대 가톨릭 교회는 사회교리를 통해 복음선포의 목표가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 문명을 복음화 제3천년기와 21세기에 세워야 한다고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권고했습니다.(교서 '아시아 교회').
이는 복음선포의 십자가로 누릴 수 있는 부활의 은총을 현실적인 지평으로 확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한국 교회는 민족 복음화를 향해 온전한 광복을 실현하고자 하는 희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시아 복음화를 향해서는 이 사랑의 문명을 아시아 대륙에 세울 수 있는 소명을 부여받고 있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복음선포의 십자가로 부활하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자 지평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오로가 복음선포의 길에 누렸던 복음적 자유를 여러분께서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