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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단(五賢壇)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현길 61 번지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 발전에 공헌한 다섯 사람을 배향한 옛 터.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21-3번지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제주시 이도1동에 제주성지의 흔적이 있는데 그 북쪽에 바로 인접하여 오현단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 발전에 공헌한 다섯 사람을 배향한 옛 터이다. 오현(五賢)은 1520년(중종 15)에 유배된 충암 김정, 1534년에 목사(牧使)로 부임한 규암 송인수, 1601년(선조 34)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金尙憲), 1614년(광해군 6)에 유배된 동계 정온과 1689년(숙종 15)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등이다.
단은 원래 1578년(선조 11) 임진(林晋)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조인후(趙仁後)가 가락천 동쪽에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된 김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충암묘를 지은 것이 시초였다. 1665년(현종 6) 이중신(李重信)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최진남(崔鎭南)이 충암묘를 지금의 자리(제주시 이도동)로 옮겨 사(祠)로 하고, 장수당을 재로 하였다. 1682년(숙종 8) 신경윤(愼景尹)이 절제사로 있을 때 예조정랑 안건지(安建之)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으로 사액을 하고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의 4현을 봉향하다가 1695년에 이익태(李益泰) 절제사 때 송시열이 추향됨으로써 5현을 배향하게 되었다. 그 뒤 1850년(철종 1) 장인식 목사는 귤림서원 묘정비를 세웠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전국에 내려진 서원철폐령에 따라 1665년 최진남 판관이 세운 귤림서원이 철폐된 후, 1892년 제주지방 유림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석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단내에는 5현의 유적으로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높이 43∼45cm, 너비 21∼23cm, 두께 14∼16cm의 조두석이 있는데 각자 33∼35cm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다. 또한 오현단 서쪽 병풍바위에 1856년(철종 7) 판관 홍경섭(洪敬燮)이 새긴 송시열의 필적 마애명(磨崖銘)인 ‘증주벽립(曾朱壁立)’과 김정과 송시열의 적려유허비가 있다.
오현단
소재지 : 제주시 이도일동 1421-34
제주도 기념물 제 1호로 지정된 이곳은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 교학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을 배향했던 옛 터이다. 오현은 중종 15년(1520)에 유배된 충암 김정선생, 중종29년 (1534)에 목사로 부임했던 규암 송인수선생, 선조 34년(1601)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선생, 광해군 6년(1614)에 유배된 동계 정온선생과 숙종 15년(1689)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선생 등 다섯 분이다.
단은 원래 선조 11년(1578) 임진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조인준이 가락천 동쪽에 충암 김정을 모시는 충암묘를 지은 것이 시초였는데 현종 6년(1665) 이중신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최진남이 충암묘를 장수당 남쪽인 현재의 오현단 안에 옮겨지었다. 그리고 숙종8년(1682) 신경윤이 절제사로 있을 때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으로 사액을 하고 김정선생, 송인수선생, 김상헌선생, 정온선생의 4현을 봉향하다가 숙종 21년(1695) 이익태 절제사 때 송시열선생이 추향됨으로써 5현을 배향케 되었다. 그러나 고종 8년(1871) 전국에 내려진 서원 철폐령에 따라 귤림서원도 헐렸으나 고종29년(1892) 제주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비를 세우고 제단을 축조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단내에는 5현의 유적으로 철종7년(1856) 판관 홍경섭이 새긴 송시열선생의「증주벽립」마애명과 충암 김정선생과 우암 송시열선생의 적려유허비가 있다. 바로 옆에는 제주 옛 성터가 있다.
귤림서원과 제주 5현
조선 후기 내내 제주향교와 더불어 제주의 대표적인 고등교육기관의 역할을 했던 귤림서원에 배향된 오현은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이다. 김정, 정온, 송시열은 제주 유배인이었으며, 송인수는 제주목사, 김상헌은 선무어사로 제주와 인연을 맺었다. 김정은 1520년(중종 15) 기묘사화로 제주목에, 정온은 1614년(광해군 6)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대정현에, 송시열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제주목에 각각 유배되었다.
김정은 유배된 지 1년 만에 제주에서 사사되었으며, 정온은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이 쫓겨날 때까지 10년간 대정현에서 지냈으며, 송시열은 유배된 지 100여 일 만에 다시 서울로 붙들려 가다가 전라북도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송인수는 1534년(중종 29) 당시 권신이던 김안로(金安老)를 비판하다가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는데, 불과 3개월 만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김상헌은 1601년(선조 34) 제주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 소덕유(蘇德裕) 모반사건 진상조사 및 민심 안무를 위해 제주를 방문하여 4개월간 제주 전역을 돌아보고 올라갔다.
제주 5현
제주 오현은 청음 김상헌, 규암 송인수, 우암 송시열, 충암 김정, 동계 정온이다.
충암 김정
충암 김정은 조선 전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이다.
역사서에 의하면 충암 김정(1486~1520)은 중종 때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헌과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조광조와 함께 잘나갔다.
하지만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이 사사되며 사림들이 대거 숙청된 기묘사화(1519) 때 제주에 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당시 김정의 적거지는 제주읍성 동문 밖 금강사지(金剛寺址)였는데, 그는 제주 유배 기간에 제주향교 교수 김양필, 우생 문세걸 등 제주 유생들과 교류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제주에 있으면서 「한라산기우제문」·「수정사중수권문」을 지어 제주도민의 교화에 도움을 주었고(?), 적거지 주변에 우물을 파서 그 물을 직접 이용하였다고 전한다.
충암이 지은 『제주풍토록』은 그의 조카에게 제주의 풍물을 적어 보낸 기록이다.『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에 의하면 제주에 대해 ‘겨울에도 덥다. 바람이 세어 병들기 쉽다. 비오는 날이 많아 물기가 많다. 가옥들은 초가가 많고 새끼로 얽어 매었다. 집이 깊고 침침하다.’고 적고 있다. 또한 제주의 풍속에 대해서는 ‘이들이 귀신을 숭상하고 무당이 많다. 뱀을 신으로 받들고 있어, 작자가 뱀을 죽여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그들은 뱀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하였다 한다.
또한, 말소리가 본토와 다르다는 것을 밝혔다. 제주의 산물로는 노루·사슴·꿩·참새·전복·오징어가 많으며, 사기그릇과 유기는 없다고 하였다.
가장 이상한 것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에서 소금이 부족하여 진도나 해남 등지에서 무역해다가 쓰고 있는 점이라 하였다.
김정의 눈에 비친 당시 제주의 사회상은 문명의 암흑지대로 보였나 보다. 하지만 위리안치된 김정은 유배지 주변의 절망적 상황에서도 생의 의욕을 포기하지 않고 과실수를 심기도 하고 남 몰래 한라산을 오르기도 했다고 하는데 제주민의 삶의 열정은 보지 못한 모양이다.
지방의 풍토와 문화 등을 기록한 풍토기는 대개 각종의 관찬읍지에 많이 나타나는데 관의 편찬의 의도는 지극히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래도「제주풍토록」은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16세기 제주지역의 풍토와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낸 제주풍토지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제주민을 타자적 관점에서만 기록한 점은 안타깝다.
규암 송인수
규암 송인수는 제주민의 입장에서 오현으로 배향된 이유를 납득할 수 없는 인물 중 1인이다. 1534년(중종 29년) 제주목사로 제수되어 부임해 온 이후 끝내 직책을 버리고 제주를 떠났기 때문이다.
규암 송인수(宋麟壽)의 제주목사 재임기간은 1534년 3월부터 6월까지 고작 3개월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그때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병에 걸렸다고 사임하다니, 그가 병에 걸렸는지 알 수 없다. 이토록 제주를 싫어한다면 난리 때 죽음으로써 지켜 죽을 수 있겠는가.” (중종실록)
암튼 이를 빌미로 김안로 일파에게 탄핵을 받아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유배보다 더 힘든 관직이 제주목사였다는 역설적 해설이다.
당시 정치적 해석을 하자면 정치적 실세였던 김안로에게 시위를 벌였던 것으로 여겨 꿋꿋한 성리학자의 이미지가 각인되었단다.
불의에 항거할 줄 알았던 이로 여겨져 오현에 배향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제주민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하지만 그 짧은 수 십일만에 제주목사 재임 중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 잡고 교육을 진흥시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는 평가에는 신뢰를 가질 수 없다.
청음 김상헌
청음 김상헌은 1601년(선조 34년) 제주에서 있었던 길운절 ㆍ소덕유 등의 역모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안무어사로 들렸던 인물이다.
김상헌은 1636년(인조 14)에는 예조판서 재임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을 펴다가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안동에서 은거하였다.
남한산성 영화에서 김윤석이 김상헌 역할을 연기했다.
이후 1639년(인조 17)에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에나 귀국하기도 했다.
김상헌이 제주에 온 것은 이런 호란이 있기 훨씬 이전이다.
암튼 청음 김상헌이 1601년 8월부터 제주도에 6개월 간 체류하며 쓴 여행 일기인 <남사록>에 의하면 '이 섬의 말이 중국말과 아주 흡사하여 소나 말을 몰 때의 소리는 더욱 분간하지 못하겠다.....
사투리로 숲은 곶이라 하며 메뿌리를 오름이라 하며 손톱을 굽이라 하며, 입을 굴레라 하며, 굴레는 녹대라고 하며 또 가달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암 송시열
또 다른 이는 1682년(숙종 15년) 유배된 송인수의 증손자인 우암 송시열이다.
오현단에는 송시열이 유배왔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적려유허비)이 있는데 원래 유배지에서 옮겨왔다고 전해진다.
또 송시열의 '曾朱壁立'(증주벽립)이라는 마애명도 남아 있다.
이 글씨는 성균관에 있는 것을 탁본해 온 것을 가지고 새긴 것이다.(그럴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하지만)
나이 83세에 제주도로 유배된 송시열의 유배지는 산짓골 윤계득(尹繼得)의 집을 적소로 정하여 생활하였다고 전한다.
적거지는 지금의 일도1동 1317번지, 제주시 칠성통에 있다.
추사가 직접 보았다던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
길 가는 사람들도 단비 앞에 말 내리니
(行人下馬短碑前)/
김환심의 집에서 옛 자취를 전해오네
(金煥心家舊○傳)/
귤림에 잔 올려 심사를 밝혔으니
(一酌橘林明志事)/
생강 심던 그 해에는 지금도 눈물짓네.
(至今彈淚種薑年)
추사가 남긴 시를 보니 우암이 정치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계 정온
마지막으로 1614년(광해군 6년) 영창대군을 시해한 자를 찾아 처벌할 것을 주장하다 유배 온 동계 정온은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죄 지은 자가 살기에 적합하구나”라고 탄식하고, 스스로 별호를 고고자(鼓鼓子)라고 지었다라고 전한다.
정온과 비슷한 시기에 제주도에 유배를 왔던 사람이 인목대비의 어머니이자 영창대군의 외할머니로 김제남(金悌男)의 부인인 노씨부인이었다. 당시 제주도에 여자가 유배된 것은 노씨가 처음이었는데, 부인은 이곳에서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술을 만들어 팔았는데 제주도 사람들은 이 술을 일컬어서 모주(母酒)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조반정 이후 정온과 노씨부인은 석방되고 광해군은 강화도를 거쳐 제주로 유배오게 된다.
이후 1871년(고종 8년) 전국에 내려진 서원철폐령에 따라 귤림서원은 훼철되고 제주 유지들이 그 자리에 5현의 뜻을 기리고자 조두비를 세우고 제단을 축조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 제단이 오늘날 오현단이 되었고 이후에 다시 세워진 귤림서원은 그 아래에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조선시대에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교학에 공헌한 다섯 사람을 배향하는 곳이 오현단이다.
오현은 1520년에 유배된 김정,
1534년에 목사로 부임했던 송인수,
1601년 안무사로 왔던 김상헌,
1614년 유배왔던 정온,
1689년 유배왔던 송시열 등 다섯 사람이다.
제주5현 중 김상헌, 송인수를 제외하면 모두 유배인들이다.
이중 우암 송시열은 제주에서 산 기간이 불과 111일뿐이었다. 또 어떻게 누구를 교화했는 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래서 오현단은 정치적인 곳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던지 간에 오현단은 제주의 유배문화와 유배자를 통한 기록에서 제주의 옛모습을 들추어 볼 수는 있다.
암튼 제주도에는 왕족부터 고위관리, 학자 등 상류사회를 이루는 인사들이 유배됨으로 인해 그 추종자 및 가족들이 왕래한 것은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상류사회의 문화 등이 제주에 영향을 주었겠지~
제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유배인들은 문화전달의 중요한 메신저로도 볼 수 있지만, 제3자의 타자적 시선이라는 점은 여전히 우리에게 어떻게 해석할지 숙제를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출처] 제주 오현 누구인가?|작성자 빙삭빙삭 제주삼춘]
제주성지(濟州城址)
제주성지(濟州城址)는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제주성의 잔존 터이다.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의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현길 61
(지번) 제주시 이도일동 1421-34
개요
제주성은 옛 탐라국 수도 부근의 성곽으로, 도시화로 사라지기 전에는 둘레 2,280m에 달하는 평지에서 구릉으로 이어지는 평산성으로 동서를 장축으로 하는 부정형을 띠고 있었다.
제주성의 원래 규모와 초축(初築) 연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고려 숙종(肅宗) 10년(1105년) 증축했을 때 규모가 둘레 4,700자, 높이 11자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태종(太宗) 8년(1408년) 제주에 홍수 피해가 발생해 성벽이 붕괴되어 3년 뒤인 동왕 11년(1411년)에 수축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제주성의 규모를 둘레 910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4,394자에 높이 11자라고 기록했으며, 중종(中宗) 5년(1510년)에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고 2년 뒤인 동왕 7년(1512년)에 제주목사 김석철이 제주성을 둘레 5,486척으로 확장해 쌓고, 성 남쪽 문루인 정원루(定遠樓)를 수리했다. 또한 제주성 안에는 물이 없었고 성밖으로 가까운 곳에 가락천(현지명 가락쿳물)과 산지천이 있어, 그곳에 겹성을 쌓아 따로 물을 조달했는데, 동왕 24년(1529년) 목사 곽흘이 동쪽으로 성을 증축해 산지천을 제주성 안으로 들였다고 한다.
명종(明宗) 10년(1555년) 을묘왜변 때는 왜선이 제주성을 포위공격하기도 했으며, 동왕 21년(1566년) 고능까지 동쪽으로 증축해 성의 둘레가 7,340척으로 늘어났고 남쪽으로 수구(水口) 두 곳을 두었다. 임진왜란 직전까지, 목사 성윤문이 성벽을 5자 더 높이고 포루 등을 구축했다. 정조(正祖) 4년(1780년) 목사 김영수가 산 아래 하천 주변에 익성과 보를 쌓았다.
제주성은 제주 지역에 많이 있는 화산암을 이용해 축성되었고, 왜적의 약탈과 하천의 범람 때문에 자주 증축되었다. 제주목사 이원진이 지은 《탐라지》(耽羅志)(1653년)에 따르면 제주성에는 북쪽(남해 방향)을 제외한 동, 서, 남 세 곳의 성문과 두 개의 수문이 있었고, 격대(擊臺) 27곳에 타첩(여장)이 404곳이 있었으며 산지천과 가락천 두 강을 식수원으로 삼았다. 성문의 이름은 연양문(동문), 진서루(서문), 정원루(남문)라고 했고, 수구는 쌍안교, 원교라고 했다. 이밖에도 소민문(蘇民門)과 수복문(受福門, 중인문(重仁門) 등의 작은 간문이 더 있었다.
그러나 국권피탈 후인 1914년과 1915년에 제주성의 세 문루와 간문은 헐렸고,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이루어진 제주항 개발 공사 당시 바다를 매립하는 골재로 사용하기 위해 성벽을 헐어서 지금은 일부만이 남아있다.
구조
현존하는 제주성지는 오현단 부근에 일부, 170m의 잔존유구가 남아있다. 높이 5m에 폭은 2m로, 재질은 현무암이다.
성돌의 크기는 50x20cm, 55x37cm, 70x50cm 이렇게 세 가지가 있고, 뒷부분 길이는 60, 65, 70cm 정도이다. 당초에는 내부에 잡석으로 석축을 2, 3단 쌓아 토사를 덮어 경사지게 처리했었으나, 이후 표면 토사가 유실되어 돌이 모두 노출되었다. 외벽의 협축으로 잔돌끼움을 한 허튼층쌓기[1]로 쌓아, 위로 갈수록 성돌의 크기가 줄어드는데, 기울기는 1.0~1.4.1:1로 거의 기울기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치성은 두 곳이 남아 있는데 오현단 뒤의 것은 높이 6m이고 나머지 하나는 10m이다. 간격은 65~70m. 성벽을 축조한 뒤에 덧대어 쌓은 것으로 시굴조사에서 T자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제주성지
소재지 : 제주시 이도일동 1421-34 (제주시 오현길 61 번지)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에 처음 쌓은 것은 아니고, 탐라국 당시 쌓았던 것을 고려 때 왜구 방어용으로 보수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일부인 남수각부분이 150여미터 정도 복원되어 있다. 제주도의 중심지역을 지켰던 이곳이 보존상태가 좋지못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부터 1928년 사이에 건입동 포구 앞바다를 매립할 때 성곽의 돌을 매립골재로 사용하면서 크게 훼손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헛놓인 돌 하나 없이 듬직한 성곽 주위에는 귤과 유자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가을철 귤이 익을 무렵 성주위는 가을색으로 절정을 이뤘다고 전해진다.
허물어져 가는 옛 성터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지만, 튼튼한 성을 쌓으며 왜침의 '바람'을 잠재우려 했던 선인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오현단&귤림서원&제주성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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