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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의 기도(1)
느 1:1-11
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2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5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9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10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느 1:1-11 /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회상기이다. [예루살렘의 슬픈 사연] ㄱ) 아닥사스다왕 20년 ㄴ) 기슬르월이었다. 그때에 나는 수사에 있는 바사 왕의 겨울궁에 있었는데, (ㄱ. BC 444년. ㄴ. 유대달력으로는 신년이 시작되는 9월로서 오늘날의 양력으로는 11월 중순에서 12월 중순에 해당된다) 2) 나의 아우 하나니가 유다에서 방문단을 이끌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들에게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들의 사정과 예루살렘의 형편을 물었다. 3) 그러자 그들이 나에게 말하였다. `남아 있는 유다 사람들은 지금 고국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는데다가 수모까지 당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져서 쓰레기더미가 되어 있고 성문들도 모조리 불에 타서 없어졌습니다.' 4) 나는 그 소식을 듣고서 주저앉아 울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슬퍼하며 금식하고,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5) [느헤미야의 기도] 그때에 내가 이런 기도를 드렸다. `오 여호와여,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위대하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여! 주께서는 한번 맺으신 계약을 한결같이 지켜 주시고,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6) 주님, 이제 이 종을 굽어보시고, 이 종이 호소하는 기도를 들어주소서! 내가 주의 종된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렇게 밤낮으로 호소하지 않습니까? 우리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주님을 배반하고 반역하였습니다. 그 죄를 고백합니다. 나와 나의 동족도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 7) 저희는 온갖 퇴폐적인 짓만을 일삼아 왔습니다. 주님의 종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주님의 계명과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8) 그렇더라도 주께서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소서. `너희가 나를 배반하고 반역하면, 내가 너희를 세계 만방으로 흩어 버리겠다. 9) 그러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존중하고 실천하면, 너희가 하늘 끝으로 쫓겨났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데려오겠다. 내가 그들을 다시 고향 땅으로 데려와서, 내가 거처로 선택해 놓은 곳에서 살도록 하겠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10) 비록 그들이 죄를 지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주님의 종입니다. 그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해방시키신 주님의 백성입니다. 11) 오 주님, 나의 호소를 들어주소서! 주님만 섬기려고 작정하며 떨리는 자세로 복종하는 모든 이들의 호소를 들어주소서! 주께서 이 종을 도우셔서 이 나라의 왕앞에서 큰 은총을 입게 하소서!' 나는 그 당시에 왕의 술관원이었다.
예루살렘 성이 몰락한지 150년이 지났지만 성벽은 여전히 잔해에 쌓여있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한 사람의 믿는 자 느헤미야를 통해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예루살렘의 상황을 들음(1-3) 페르시아 왕의 술 맡은 관원인(10) 느헤미야의 거처는 수산 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수산 궁에서 약 1,300km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관심은 예루살렘 성의 상황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그의 관심이었고(시 137:5-6), 세상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하였습니다. 유다에서 온 하나니를 통해 들은 예루살렘 소식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성은 허물어졌고 성문들은 불탔습니다. 외부의 침입을 막을 수 없었고, 주민들은 목숨과 재산을 지킬 수 없었으며, 불안에 떨며 살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4-7)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절망합니다. “듣고 앉아서”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는 뜻이며, 절망은 수일 동안 슬픔과 애통으로 이어집니다. 믿는 자에게 절망은 또 다른 시작입니다. 그는 절망 중에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은 믿는 한 사람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하늘의 하나님, 그분의 약속, 긍휼하신 성품을 바라보고 기도합니다(5). 4-6절에서 기도, 간구, 기도라는 단어가 반복되는데, 이 기도가 느헤미야의 리더십의 원천입니다. 그의 기도에는 회개가 있습니다(6-7). 느헤미야는 언약의 공동체 이스라엘의 죄를 ‘우리’라는 표현 속에 함께 자복합니다. 또한 “나와 아버지의 집”이란 말로 자신도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진실한 회개는 반전의 계기가 됩니다.
느헤미야의 요청(8-11) 느헤미야의 기도는 회개에서 요청으로 이어집니다. 요청의 근거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회복에 대한 언약인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30장을 기초로 합니다(9). 이를 근거로 그는 회복의 언약을 기억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빠의 약속이 자녀의 요구의 근거이듯,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계명을 지킬 경우 회복시킬 것이라는 언약을 근거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구합니다. 이처럼 믿는 자는 언약의 말씀 속에서 비전을 얻습니다. 아울러 느헤미야는 기도 중에 무언가 행동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행동할 수 있도록 왕실 사람들, 특히 페르시아 왕에게 은혜를 입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11). 행동하지 않는 기도는 유명무실합니다.
적용: 느헤미야의 기도와 당신의 기도를 비교해 보세요.
느헤미야의 기도는 기도의 능력과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으로 기도를 가장 소중한 행동으로 여겼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짓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지도자로 쓰임 받은 것 이면에는 끊임없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형통할 때나 장벽을 만나 어려울 때나 기도로 돌파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지은 죄를 자복하고 금식하며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자신과 나라를 위하여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무엇이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까? 관계입니까? 물질입니까? 아니면 건강, 지식, 명예인가요? 느헤미야에게는 기도였습니다. 기도가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행동이 될 때 우리 삶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 설 교 >
무릎으로 하는 애국
느 1:1-10, 마 23:37-39 / 이정익목사
6월은 호국의 달입니다. 나라를 생각하는 달입니다. 그래서 6월만 되면 생각나는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6월 6일 현충일입니다. 이 날은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6월 25일 6․25전쟁의 날입니다. 이 날은 우리민족이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그런데 벌써 6․25의 역사도 금년으로 61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6․25는 우리나라가 겪은 역사가운데 가장 처절한 역사입니다. 그래서 6월만 되면 지난날의 잔인한 이 역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한마디로 고난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압제의 역사, 전쟁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눈물과 한이 많은 눈물의 민족이요 한의 민족입니다. 춤도 한풀이 춤이 전통 춤이 되고 눈물이 많은 작품들의 주제가 될 정도입니다. 특히 주제가 눈물인 노래도 많습니다. 미아리 눈물고개, 울고 넘던 박달재, 울어라 열풍아,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 노래를 들으면서도 모든 이들이 또 눈물을 흘립니다. 그만큼 지난날의 역사가 고난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회의 문화는 그 사회의 역사 환경 살아온 과정이 어우러져서 이루어지는데, 우리의 역사가 고난과 압제의 역사이기에 바로 이 눈물은 우리 민족에게 하나의 역사이자 문화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또 다른 눈물이 나옵니다. 이 눈물은 바로 느헤미야가 흘린 눈물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노예로 잡혀갔던 그가 출세하여 왕궁에서 왕의 술시중을 드는 관원이 되었습니다. 포로로서는 대단한 성공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성공하면 평안한 삶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고 다른 것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오늘의 평안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국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넘어 너를 생각했고 우리를 넘어 나라와 민족을 생각했으며 더 나아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 뜻을 먼저 생각하며 고민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남의 나라에서 성공했지만 언제나 고국 그리움으로 삶의 갈증을 안고 살아갔습니다.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찾아온 사촌형제 하나니로부터 고국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은 나라가 침공당해서 예루살렘이 불타고 성벽이 무너져서 백성들이 탄식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옛날에 붙잡혀 오기를 너무 잘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생각에 머뭅니다. 1960년대 미국에 이민을 간 어느 장로님이 주일날 예배 때 강단에 올라가 대표기도를 하였습니다. “전쟁위험이 상존하고 지옥 같은 한국 땅을 떠나 천국 같은 이 땅에 와 살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이런 사람은 한국 땅에 전쟁이 터졌다 하면 “우리가 그때 잘 빠져나왔지” 하고 전쟁을 구경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 날부터 금식하였습니다. 또한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난 받는 동포들과 이 고난을 함께 하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몸은 축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아닥사스다 왕이 그런 느헤미야를 보고 “네 얼굴이 왜 그러냐, 네 몸에 병이 없는 것을 내가 아는데 네 얼굴이 왜 그리 상하였느냐”하고 묻게 되었습니다. 그 때 느헤미야는 “내 나라가 불타고 성벽이 무너지고 내 백성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며 살고 있는데 내 어찌 잘 먹고 평안히 쉬리이까 내가 금식하며 기도 중에 있나이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닥사스다왕이 무슨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내게는 왜 저런 신하가 한사람도 없단 말인가, 저는 비록 포로로 이 땅에 잡혀 왔지만 저는 진정한 백성이고 지도자이고 신앙인이구나” 하고 마음에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내가 무엇을 도와주랴”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느헤미야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휴가를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고국에 돌아가 탄식하는 내 백성을 위로하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돌아오리이다”. 여러분, 진정성이 있는 곳에 감동이 있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방법이 나옵니다. 하늘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는 허가를 받아 고국으로 돌아가서 백성을 격려하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뜨거운 눈물의 기도를 보게 됩니다. 그 때 느헤미야가 고국의 소식을 듣고 그냥 앉아서 기도했겠습니까! 분명 무릎을 꿇고 눈물로 금식하며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 가지 눈물로 기도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내 나라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 나라가 건강한 것이 참으로 복입니다. 또 다시 이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 고난 받는 그런 불행은 없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이 민족이 구원받고 복음화 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애국은 반드시 총과 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애국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무릎으로 하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무릎을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서 내어놓아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릎을 꿇고 눈물로 기도했습니까! 또한 6․25때 3년 동안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릎을 꿇고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눈물의 기도가 총칼을 들고 전장에 나아가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라를 위해 무릎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사도바울의 애국과 복음화를 이루려는 방법은 무기도 총칼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무릎이었습니다.
분명 나라는 공짜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61년전 이 땅에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 6․25전쟁은 이 땅에서 발발했지만 그 전쟁은 우리나라만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은 전 세계가 참여한 전 세계의 전쟁터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나라가 되찾아진 것입니다. 그 때 이 나라가 무너졌더라면 오늘 우리는 모두 저 북한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 나라, 평화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 기념공원에 가보면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나라가 건강하게 세워지는데 어찌 그것이 공짜로 주어지겠습니까.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물과 희생으로 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6․25전쟁 때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 이 나라가 세워지고 이 땅에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미군은 54,246명이 이 땅에 와서 싸웠고 유엔군은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모두 628,823명이 싸웠습니다. 또한 이 6․25전쟁 때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아들을 참전시켰고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이 전쟁 때 아들을 잃기까지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워커 중장은 아들과 함께 참전했다가 아들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이처럼 자유나 안정이나 발전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눈물이 있고 수고가 있고 희생이 있어야 얻어지는 것입니다.
광복도 마찬가지입니다. 1945년 2월 16일 젊은 시인 윤동주가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2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본 경찰은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발표하였지만 최근 밝혀진 바로는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의문의 주사를 맞고 죽었다고 합니다. 당시 규슈국제대학에서 실험하던 생체실험은 “혈장대용 생리식염수”라는 실험이었습니다. 이 실험은 전쟁에서 부상당한 일본 병사들에게 수혈을 해야 하는데 혈액이 부족하니까 혈액을 대신할 약품을 개발하기 위해서 했던 실험이었는데, 산 사람의 몸에서 피를 뽑아내고 바닷물에서 추출한 생리 식염수를 주입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생체실험으로 인해 윤동주가 쇼크사로 사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후 1948년 해방이 되고 윤동주가 죽은 지 3년외 되었을 때, 그의 첫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판되었습니다. 그 시들 속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중 감옥에서 썼던 “십자가”라는 시 중에는 “방금 떠오르던 해가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기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방금 떠오르는 해는 독립기운을 말합니다. 지금 나라의 광복기운이 달아오르고 있다는 것을 시로 상징한 것입니다. 이처럼 광복 해방 자유 독재타도와 같은 일들이 반드시 총과 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윤동주와 같은 사람들의 고민과 몸부림들이 모이고 모여 이 나라가 해방되고 되찾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3장 37-39절에 보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눈물은 이 나라와 민족에게 장차 주어질 대환란과 아이들이 수난당하고 부녀자들이 능멸당하는 미래의 모습을 보시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흘리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뒤따르며 눈물짓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타이르신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똑같은 심정을 가지고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습니다. “나에게는 원하고 기도하는 것이 한가지 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롬 9장에서는 “나에게는 큰 근심과 마음에 고통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내 골육지친이 예수를 믿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가르쳐 주셨고 사도바울이 그것을 가르쳐 주었고 느헤미야가 그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가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자유와 안정
나라는 반드시 자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자손이 평안할 수 있습니다. 내 나라가 평안해야 세상으로부터 조롱당하지 않습니다. 요즘 북한의 김정일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중국을 오가며 양식을 구하고 다니고 3대 세습을 굳히겠다고 애를 쓰고 다니는데 그 모습이 참 처량해 보입니다. 옷이라도 좀 세련되게 입지 그렇게 누런 복장을 입고 그것도 헐고 찌들은 복장을 해서 세련된 중국 지도자들 앞에 서 있는 그 모습이 너무 궁해보이기까지 합니다. 거기다 긴 기차를 끌고 다니는 모습이 아주 전근대적으로 보이니 세계를 주름잡으며 앞서가는 중국 지도자들이 속으로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우리나라도 그런 모습이 되지 않으려면 이 나라에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안정이 있어야 합니다. 나라가 자유는 있는데 안정이 없어도 안됩니다. 또한 안정은 있는데 자유가 없어도 안됩니다. 예수님의 눈물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 24;1-2에 보면 눈물을 흘리시다가 한숨짓고 한마디를 하십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지리라” 이 말은 “자유는 있는데 안정이 없다”는 예언(마 24:2)입니다. 실제로 그 후 40년 후에 로마에 의해서 그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로마군 8만 명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와서 110만 명을 학살하였고 수만명을 노예로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백성들은 각각 세상으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실들을 미리 아시고 감람산에서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이런 비극적 현장은 이스라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61년 전 이 땅에서도 있었습니다. 그 때 남북한 군인들 중 사상자가 300만 명이나 되었고 민간이 사상자가 300만, 전쟁고아가 10만, 이산가족이 수천만이나 되었습니다. 또한 그 밖에 마음 파괴, 정신 파괴의 피해를 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렇기에 오늘 이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자유함과 안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딤전 2:1-3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유대인, 이방인, 여자, 남자, 신자, 비신자, 통치자, 백성들 모두를 말합니다. 또한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잘해야 나라가 평안하고 자유해지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자유하고 평안해야 믿음생활도 지장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최고의 애국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임을 믿고 기도해야합니다.
복음 강국
이스라엘 민족은 무서운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예수를 거부하고, 오늘도 유대인들은 아직도 오시리라고 예언된 예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을 바라보던 사도바울은 그것을 가장 가슴 아픈 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10장1절에 “내 마음에 원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바는 내 백성이 구원을 받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또 로마서9장1-3절에서는 “내 민족이 예수를 믿는다면 나는 저주 받을지라도 ....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의 마음에는 민족의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렇게 뜨거운 복음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오늘 이 세상이 복음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6․25 전란 후에 복음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이 복음화는 압제 속에서 꽃이 피었고 전란 속에서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전국이 복음화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국화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공로자는 이승만이었습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승만은 이 나라의 복음화를 위해서 하나님이 예비해 두셨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승만을 재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승만은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를 나온 사람입니다. 공부를 다 마치고 귀국했을 때 그는 선교사의 뜻을 가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정치인으로 입문한 후 이 나라를 건국하게 되었는데, 첫 국회를 개원하는 날 이승만은 모든 국회의원들을 머리 숙이게 하고 기도로 모든 것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 후에 군에 군목제도를 창설하였고 학교에는 교목제도를 창설하였습니다. 그 때 놓은 주춧돌이 오늘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이 제도를 창설한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반대가 요란하겠습니까. 그렇기에 이처럼 우리는 모두 그 시대에 선교사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는 이 나라가 계속해서 복음 강국이 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북한과 일본의 복음화
일본과 북한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입니다. 이 두 나라가 빨리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이 두 나라는 똑같이 우상의 나라입니다. 그 중 일본은 온 땅에 우상 천지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나가사끼는 수십만명의 그리스도인들이 희생당한 순교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땅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유독 일본에 십자가가 보이는 곳은 나가사끼 뿐입니다. 그 외에는 전국 어디나 신사가 즐비합니다. 일본이 복을 받아야 이웃 나라인 우리도 이 세계 나라들도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일본이 빨리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또 한 나라는 북한입니다. 원래 북한은 한국의 기독교 발상지입니다. 1907년에 일어났던 영적각성운동의 진원지가 바로 평양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그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났던 바로 그 자리에 있던 장대현 교회를 헐어내고 세계에서 가장 큰 김일성 동상을 세웠습니다. 분명 일부러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워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나라를 하나님이 사랑하시겠습니까? 이 두 나라가 빨리 복음화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도 몫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애국도 종류가 있습니다. 총칼을 들고 나아가 싸우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애국은 총과 칼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무릎에 있습니다. 무릎으로 하는 애국을 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분문은 느헤미야가 무릎으로 하는 애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절절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구령의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급식하고 기도하였다”(1:4), “내 조상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2:3). 이 뜨거운 눈물의 기도, 이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1절과 신앙인의 자세
느 1:1-11 / 김필곤목사(열린교회)
지난 금요일 '제94주년 3.1절 기념행사'가 개최되었습니다. 3.1절은 국권을 잃어버린 우리 민족이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일어난 날입니다. 세계 역사상 각 나라마다 혁명운동이나 민족운동은 일어났으나 3.1운동처럼 전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궐기한 투쟁사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3월에서 5월까지 1천 5백여 회에 걸쳐 2백만 명 이상이 전국 2백 18개 군 중 2백 11개 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 때 신앙인이 앞장섰습니다. 3.1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약 4백만 명에 이르렀답니다. 이중 숨진 이는 7천 5백여 명,실종자 1만 5천여 명,부상자 1만 6천여 명,검거된 이는 4만 7천여 명입니다. 그 때 희생자 대부분이 크리스천이었다고 합니다. 독립선언서 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인사였습니다. 그 당시 천도교 200만, 유교 불교는 300만을 넘어서는 교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독교의 교세는 당시 인구 2,000만에 35만 명 신자 곧 1.2%에 불과했습니다.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자가 기독교인이 2,039명, 천도교인 1,063명, 유교인 55명, 불교인 41명으로서 기독교인이 60% 이상을 차지했던 것이 역사에 남은 기록입니다. 당시 조선 총독부가 남긴 비밀 문건 속에는 "이 민족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있다면 그것은 조선의 교회다"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기독교는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 교회는 민족에게 희망을 던져 주었습니다. 국민의식을 바꾸었습니다. 미신을 타파하고, 신분제도를 철폐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하고 모든 백성을 평등하다는 사실을 전파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민족의 고난을 대신 지고 국민을 계몽시키는 교육을 일선에서 감당하였습니다. 50년 이상 된 근대화된 학교시설은 대부분 기독교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이화여대, 연세대, 고려대 등 유명 사학들이 신앙인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신식병원은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세브란스 병원, 동산병원, 예수병원 등 병원을 세워 백성을 살렸습니다. 민영익을 살려낸 것도 궁중에 들어간 알렌 선교사였습니다. 독립투사 중 절반 정도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도 안중근도 기독교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장로였고 김구 선생님도 기독교인이었고 건국 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여운영 선생님도 신학을 공부한 전도사였고, 건국 준비위원회 지방 위원들은 대부분 목사나 장로가 할 정도였습니다.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 개회될 때 임시의장 이승만은 단상에 올라가 사회봉을 잡고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라는 말로 개회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일동 기립한 가운데 이윤영 의원(목사)가 기도하고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94년이 지났는데 지금 우리 신앙인은 나라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까? 3.1절을 맞이하여 우리 신앙인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대한민국에 건전한 영향력을 미치는 국민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시대적 과업을 내 일로 받아들이는 사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1-3)
오늘 성경에 보면 느헤미야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 별명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2장 10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민족을 흥왕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인들이 가는 곳에 회사가 흥왕하고, 사업이 흥왕하고, 가정이 흥왕하고, 교회가 흥왕하여야 합니다. 가는 곳마다 파괴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는 곳마다 문제를 만들고, 비난을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제 저녁에 우리 교회 한 집사님으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작년에 대통령상을 받았는데 월요일 독일에 출장을 간다고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주일에 예배 맞추어 오려고 했는데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행기 고장으로 하루 늦게 되었다면서 120억 정도 수주를 해 기도해주어 감사하다는 문자였습니다. 회사 사장으로, 신앙인이 믿음을 가지고 세계 시장을 누비며 국위를 선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이겠습니까? 우리 신앙인 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회사가 흥할 수도 있고 쇠할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이렇게 민족을 흥왕케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느헤미야가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수산궁입니다. 페르시아 궁전입니다. 지금 말하면 미국 백악관에 있는 것입니다. 궁전에서 그의 직책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술 맡은 관원입니다. [아닥사스다]라는 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당시 술 맡은 관원은 총리급에 해당되는 고위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서실장 쯤 되는 고위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식사 때마다 술 맡은 관원은 독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왕의 술을 검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가장 깊은 신뢰를 받는 사람이 오르는 자리였습니다. 자기 나라 사람도 아닌데 그가 이런 지위에 오른 것은 특별히 왕의 신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총망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미래가 보장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합니까? 2절에 보십시오. 형제 하나니로부터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듣습니다. 나라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환난과 능욕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졌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큰 환란을 당하고 생존의 위협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옛날 장엄한 모습은 살아지고 예루살렘 성은 파괴되어 폐허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보고를 듣고 어떻게 하였습니까? 나라가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였습니까?(4)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였습니다. 나라의 일에 사명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민족의 주권을 잃었을 때 3.1운동에 동참한 사람은 자신의 일로 사명의식을 가진 것입니다. 그는 가정이 평안합니다. 권력이 있습니다. 물질이 풍부합니다. 명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국을 위해 슬퍼했습니다. 그는 금식할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조국을 위하여 금식하였습니다. 조국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조국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왕이 왜 이렇게 근심이 많으냐고 물어 볼 때 그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장 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느 2: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일은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민족의 과업을, 회사의 과업을, 가정의 과업은 내 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사는 우리 신앙인은 바로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요즈음은 너무나 극도의 이기주의자가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청문회를 보십시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아들은 군대에 보내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투기를 하고 횡령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라를 위하는 직책을 맡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에 살았다면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신앙인의 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편협한 민족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입니다. 3.1운동을 하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나라를 위해 내어 놓았습니다. 상황윤리를 쓴 죠셉 플레쳐는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했습니다. 미움은 존재를 인정하지만 무관심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가정 일을 내일로 생각해야 합니다. 직장의 일을 내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나라의 일을 내 일로 생각해야합니다. 교회의 일을 내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극도의 개인 이기주의, 지역 패권주의, 가족 이기주의, 기업 이기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소아의식의 노예가 될 것이 아니라 대아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가정생활을 하고 교회 생활을 하고 직장, 사회 생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흥왕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2.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중보자의 위치에서 ‘내 책임이다’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4하-10)
느헤미야는 나라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금식하고 기도합니다. 느헤미야는 조국이 황폐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금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합니까? 금식하며 기도합니다.(4) 주야로 기도합니다.(6) 죄를 자복합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내가 범죄했습니다. 내 집이 범죄했습니다. 이것은 나의 범죄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민족의 불행에 대하여 내 탓이라는 책임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남 탓으로 돌리는 원망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우리 백성이 잘못했습니다.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중보자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구경꾼이 아닙니다. 무엇을 잘 못했다는 것입니까? 인류의 죄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은 것입니다. 경제를 왕으로 섬긴 것입니다. 경제의 신 바알신과 아세라 신을 섬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경제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부의 정당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르게 부를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불황이라고 말을 하며 위축되어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 문제가 아닙니다. 극도의 물질주의가 문제입니다. 소돔 고모라가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해서 망한 것이 아닙니다. 롯이 탐내는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도덕적 문제였습니다. 종교적인 문제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종교개혁을 단행한 사람입니다. 민족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지극히 타락하여 멸망시킬 때 누구를 찾습니까? 의인입니다. 노아 홍수 때 먹고 살지 못해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홍수로 인류를 멸망시킬 때 누구를 찾습니까? 노아입니다. 로마가 멸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경제 문제가 아닙니다. 에드워드 기본(e. gibbon)은 [로마제국의 쇠퇴와 패망의 역사]라는 저서에서 로마의 패망은 야만족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내적 도덕적인 퇴폐 대문이라고 말하면서 구체적으로 (1)이혼율의 급격한 증가 (2)고율의 세금과 투기장과 향연을 위해 낭비한 공금의 유용 (3)퇴락추구의 광적 상태 (4)거대한 군비 확장 (5)종교의 타락 등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정 러시아가 멸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중세시대가 멸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본주의 발달로 경제 집중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습니다. 실업자가 대량 발생하였습니다. 양곡 도매가격이 영국는 500%, 프랑스는 700% 올랐습니다. 전매업자, 고리대금업자가 성행합니다.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런 때 무엇을 하였습니까? 철저히 배금사상에 젖어있었습니다. 유럽 토지의 1/3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모자라 돈놀이를 하고 성직을 매매하고 사제들은 교회를 돌아다니며 돈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큰 교회를 맡으려고 이전투구를 하였습니다. 돈이면 지옥에 간 사람도 천국에 갈수 있다고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16세기 순시 보고서에 의하면 네덜란드 사제 25%가 독일 남부의 신부 33%가 첩과 동거하며 살았고 심지어는 신부를 위한 창녀촌이 생겼습니다. 이 어찌 하나님이 가만히 놓아두겠습니까? 루터를 통하여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으로 경제 구조가 변하고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쾌락주의가 만연되었습니다. 감옥은 범죄의 학습장이 되어버렸고 음주와 방탕으로 사회가 썩어갈 때 교회는 그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 사회적 혼란과 빈부의 갈등, 경제적 도덕적 위기로부터 벗어나게 한 사람들이 웨슬리 형제들과 휫필드 일행이었습니다.
19세기 중엽 미국이 노예문제로 내전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살육이 정당화되고 도덕적으로 지극히 타락할 때 그들을 변화시킨 사람이 무디입니다.
우리가 민족의 문제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에스더는 죽음의 위험 앞에 있는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금식하며 왕앞에 나아갔습니다.(스4:16)
모세는 자기 백성이 범죄할 때 차라리 자신을 죽여주고 백성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했습니다.(출 32:32)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질 지언정 내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역사 이래 이렇게 잘 사는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역사 속에서 이렇게 평화롭게 살았던 때가 언제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 이래 1천 번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6.25 이후 전쟁 없이 이렇게 잘 사는 때는 처음 있는 일입니다. 1945년 해방 당시 우리 나라 신앙인은 30만 명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천만 명 넘었습니다. 1949년 인구가 2018만이었는데 2012년에는 5천만이 넘었습니다. 4820만이 되었으니 인구 성장은 약 2.4배쯤 성장했는데 기독교의 성장은 33배의 성장입니다. 굶주림으로 시달렸던 나라가 이제는 경제 규모가 세계 12위권에 진입하였습니다. 선교를 받던 나라가 1955년 4월 태국에 처음으로 최찬영, 김광명 선교사 부부를 파송함을 시작으로 2012년 169개국에 2만 5665명을 파송하고 있습니다. 평균 수명이 42년에는 45세였는데 지금은 여성은 84세 남성은 77세가 되었습니다. 대학교도 47년에는 학생수 2만, 학교 24개였는데 2012년에는 학교 251개로 대부분 대학에 다닐 수준이 되었습니다. 전화 가입자도 46년에는 3만 6천명이던 것이 지금은 개인이 모두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동차도 48년에는 1만 5천대이었던 것이 지금은 가정마다 차가 있습니다. 세계 조선 산업 1위입니다. 세계 철광 제조산업 1위입니다. 반도체 생산률 1위입니다. 컴퓨터 보급률 1위입니다. 초고속 통신망 보급률, OECD국가중 초고속무선인터넷 보급률100%는 대한민국뿐입니다. 학교 정보화 시설, 대학진학률 세계1위입니다. OECD평균 대학진학률 56%, 대한민국 82%, 미국60%, 일본48%, 독일 36%, 영국 57%, 스위스38%입니다. 땅은 230개국 중 100위도 체 안되는 데 대단한 발전입니다. 산업혁명으로 근대 지구촌 고도성장의 전형으로 꼽히는 영국은 170년간 9배의 GDP 파이를 키웠고 일본은 57년간 14배의 GDP 성장세를 보였지만, 한국은 1960년 이후 48년간 32배로 국부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는 8년째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근로시간, 흡연율, 음주율, 낙태율, 성형율, 이혼율, 교통사고 사망률, 사교육비, 청소년불행지수 세계 1위입니다. 맘몬(물신) 숭배는 도덕성 타락과 음란으로 이어집니다. 가정이 중독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국민 8명 중 1명이 알코올이나 인터넷, 도박, 마약에 중독돼 사회경제적 비용만 연간 109조 5,000억 원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중독 전문가 단체인 ‘중독포럼’에 따르면 2011년 현재 알코올 중독자는 155만 명, 인터넷 중독자는 233만 명, 도박 중독자는 220만 명, 마약 중독자는 10만 명으로, 우리나라 인구 약 5,000만 명 중 618만 명이 4대 중독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인명을 경시합니다. 범죄 시계에 의하면 우리나라도 8시간 10분마다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점점 사람 생명의 존귀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을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생각이 사회 구석구석 퍼져 있습니다. 기업에서는 사람을 돈벌이 수단으로 취급합니다. 기업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돈이면 지옥에 가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쾌락을 즐기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명경시 풍조는 자연스럽게 황금만능주의, 쾌락 지상주의로 연결이 됩니다. 일 년 술값으로 14조, 성매매로 24조가 소비된다고 합니다. 성매매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수는 33만 명으로 이는 20, 30대 여성 취업 인구의 8%나 된다고 합니다. 쾌락이면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을 찾아가는 불나비처럼 쾌락의 불더미로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자세는 느헤미야가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금식하며 통회 자복하는 것처럼 우리 신앙인이 민족을 위해 통회 자복하는 책임의식이 필요합니다. 우리 민족의 가치, 태도, 신념들이 너무 하나님이 싫어하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계속 그렇게 가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하면 북방의 화로가 쏟아질 수 있습니다. 믿는 우리부터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진정 행복하게 사는 길은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경제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살길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여호와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살길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회개의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야 합니다. ‘돈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는 것은 다 잃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를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요, 도덕을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요, 하나님을 잃은 것은 즉 신앙을 잃은 것은 다 잃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어려운 일을 자원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해야 합니다.(11,2:5)
느헤미야는 회개의 기도를 드린 후에 무엇을 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2장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을 재건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합니다. 먼저 왕에게 가서 요구합니다. 왕의 허락을 받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성 재건에 몸을 바칩니다. 그는 술맡은 관원으로서 궁전에서의 모든 편안함과 안전함을 포기했습니다. 호화로움 대신 파멸이, 명성대신 비난과 조롱과 중상모략이 올 것이지만 그는 기꺼이 나라를 위한 일에 자신의 안정을 바쳤습니다. 그는 궁정의 편안함을 뒤로하고 그곳을 떠나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거의 불가능한 임무를 완성하는 고생을 자처하였습니다. 느헤미야에게 번민이 없었겠습니까?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시키면 됩니다. 그에게는 그만한 권력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편안히 쉴 수 있었고 부담 가질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신이 희생하였습니다. 자신이 헌신하였습니다. 자신을 드렸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건축하기 위하여 무너진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하여 무너진 신앙을 세우기 위하여 무너진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자신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는 99%가 아닙니다. 100%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자원하여 졌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쁨으로 졌습니다. 그는 절망하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의 성벽 재건은 많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흥왕을 시기하는 외적들이 있습니다.(2:10, 19; 4:1,7) 반대는 점점 더 심해집니다. 비웃습니다. 분개하며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방해합니다. 6장에 가면 중상모략을 합니다.
내적이 방해가 있었습니다.(3:5) 돈 많은 귀족들은 참석하지 않습니다. 손해 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로 심한 갈등이 백성들 가운데 있습니다.(5:1,2) 이자놀이로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경제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5:10)
개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끝없는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 100명 가운데 72명이 불행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61명은 어려움 속에서 삶을 겨우 지탱하고 있으며, 11명은 삶의 기로에 놓일 정도로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난 때문입니까?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미국 주간 포브스지는 최근 갤럽에 의뢰해 전 세계 155개국 주민들의 행복도를 조사해 발표했습니다. 이 조사에서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도는 56위였습니다. 경제규모가 선진국 수준인데 비해 국민들의 행복도는 중진국 가운데서도 중위권 정도인 셈입니다. 견고하게 구축된 사회복지 시스템이 없는 것입니다. 경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적 박탈감이 사람을 더욱 불행하게 만듭니다. 한국 사회에서 대표적인 화려한 직업으로 꼽히는 연예인 중 1년에 500만 원도 못 버는 '극빈곤층 연예인'이 최대 1만 80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국민 중 560만 명이 빈곤층이라고 합니다. 자영업자 720만 명 중 414만 명은 월 100만원도 못 번다고 합니다. 창업한 뒤 3년을 버틴 자영업자는 46.4%에 그치고 있다고 합니다. 국세청·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소득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16.6%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미국(17.7%) 다음 입니다. 그만큼 '부의 쏠림' 현상이 심하단 뜻입니다. 한국조세연구원은 우리나라 소득 상위 1%가 한 해 버는 돈이 38조 4,790억 원으로, 전체(231조 9,560억 원)의 6분의 1을 차지한다고 밝혔습니다. OECD 19개국 중 우리나라보다 부의 쏠림이 심한 건 미국뿐입니다. 한국 경영진은 '직원의 18배' 가져가고 있습니다. 명문대 생 30~40%는 소득상위 10% 자녀이고, 로스쿨 생 5명 중 1명은 강남 사람이라고 합니다. 60년 국민소득이 65$이었는데 지금은 2만 불이 넘었는데도 만족은 300배는 고사하고 2배도 늘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해결합니까?
자신이 월급을 받지 않습니다.(5:14) 오직 하나님의 도움으로 일을 합니다.(2:8,18) 결국 52일 만에 기적적으로 완공을 하였습니다.(6:15) 우리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 민족을 흥왕케 하는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을 우리의 직장을 우리의 교회를 흥왕케 하는 사람으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실행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취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말만하고 생각만 하면 안 됩니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개혁하고 변화를 일으키고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다가와도 그것을 극복하고 성취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힘으로 능으로 못할지라도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9:23)” 어제 우리 집사님 중 한 분이 140억 사업에 2등으로 낙착되었다고 기도해달라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희망의 끈을 놓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지난 주 어떤 집사님이 이야기하는데 작년 300억 매출 목표를 놓고 몇억 부도가 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에서 멀리 사시기 때문에 수요일 예배에 나와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한 번 실패하고 두 번 실패한다고 그만 두면 안 됩니다. 이루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이루어가야 합니다. 내 힘으로 안되면 느헤미야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눅 11:9)” 구하면 히스기야처럼 죽음의 질병에서도 고침받을 수 있습니다. 구하면 한나처럼 불임에서 아이를 잉태하는 기적을 체험받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면 모세처럼 외적을 물리치는 기적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내 힘으로 안된다고 하나님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방법이 없다고 하나님도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성취하고자하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데는 외부적 적도 있고 내부적 적도 있고 자신의 안에 있는 적도 있습니다. 특히 우는 사자처럼 우리의 일을 방해하는 영적 세력이 있습니다. 광명의 천사처럼 유혹하는 사탄의 세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세력 앞에서도 무릎 꿇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환난이나 위협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입니다(잠24:16) 사도 바울은 우리가 비록 질그릇 같지만 보배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8)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9)”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어두울 지라도 밤하늘의 별은 어두면 어두울수록 더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같은 사람이 이 땅에 있다면 우리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헤미야 같은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힘이 없어 다른 나라에게 노예처럼 살고 있는 백성, 예배의 처소마저 파괴되어 삶에 희망을 상실한 민족에게 느헤미야는 희망을 주어 새로운 삶을 살게 한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에 무너진 곳이 너무 많습니다. 정치, 경제, 도덕, 질서, 자존심, 가정, 교회, 학교가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모든 일을 내일로 생각하십시오. 민족에 대한 사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지난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매어 달리십시오. 민족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헌신하십시오. 성취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사상가요, 문필가인 헨리 소로우는 사람이 국가에 봉사하는 방법은 세 가지라고 말합니다. 첫째는 육체로서 봉사하는 일인데 농장이나 공장에서 생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요, 둘째는 두뇌로서 종사하는 자들인데 교육, 기술, 지식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종사하는 지성인들이요, 셋째는 양심으로 봉사하는 자들인데 순교자나 각 층에서 역사의식을 가지고 조국을 위하여 헌신하는 소수의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각 분야에서 느헤미야처럼 쓰임받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의 기도
느 1:1-11 / 스테반황목사
원래 히브리어 성경은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한 권의 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1절 말씀에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라는 표현에 근거하여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 이후로부터는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각각 독립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13장까지 있는데 먼저 1~7장까지는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에 대하여 기록합니다. 성전 재건은 이미 스룹바벨 및 스가랴 시대에 완성되었습니다. 느헤미야와 관련된 사역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8~13장까지는 예루살렘 ‘신앙’의 재건에 대하여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 1장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해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시작합니다. 즉,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저 머나먼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의 겨울 궁전인 수산궁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1절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궁에 있는데”(느1:1)
느헤미야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위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제사장 가문도 아니었고 왕족 가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참으로 귀히 쓰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보지 아니하시고 그 중심에 주를 향한 사랑과 충성을 보시고 그러한 사람을 사용하고 계심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1장 1절과 11절을 보면 그는 벌써 20년째 왕 위에 있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왕의 술 관원이라고 하면 왕의 가장 가까운 고위 관직으로서 왕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가 맡은 일은 왕의 식사 때마다 왕의 술과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왕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술 관원장은 왕의 가장 큰 신임을 얻은 자만이 차지할 수 있는 중요한 지위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왕과 가까이 지내야 하기 때문에 단정하고, 교양이 있고, 궁궐의 법도를 잘 아는 자라야 했습니다. 따라서 느헤미야가 이런 관직을 맡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성품이 뛰어나고 진실한 사람이며 바사, 즉 페르시아 제국의 왕의 가장 큰 신임을 얻었던 사람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의 수산궁에 있습니다. 페르시아는 개역이나 개정 개역 성경에서는 ‘바사’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미 제 1차 및 2차 포로귀환의 칙령과 함께 바벨론 포로로 잡혀 왔던 모든 유대인들은 거의 다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제 1차 포로 귀환은 스룹바벨 총독의 인도하에 기원전 536년 경에 이루어졌고, 제 2차 포로 귀환은 제사장이며 서기관이던 에스라의 인도하에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느헤미야는 바사 왕의 총애를 받는 고위 관직이었기 때문에 쉽게 떠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페르시아에 남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마치 에스더가 수산 궁에, 요셉이 애굽에, 다니엘이 바벨론에 있었던 것과 같이 느헤미야가 수산 궁에 남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이 시대에 살면서 지금 사는 곳에서 어떤 일을 하는 것 등,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함께 만나 예배 드리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신비이며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친히 쓰실 사람을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장소에 있게 하십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해 다른 곳에서는 할 수 없고 오직 수산궁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기에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느헤미야를 수산궁에 남겨두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에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 가운데 주의 나라를 위하여 여러분을 사용하실 어떤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있는 이유와 똑같은 것입니다.
이제 2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느 1:2)"
느헤미야는 비록 고국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그의 관심은 언제나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구체적으로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의 형편'에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이 달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가 마음에 가장 큰 관심으로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몸은 비록 페르시아에 있었어도 그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인 예루살렘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에 진정으로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나의 기쁨과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지금 나의 관심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이때 '하나니'라는 형제가 두어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페르시아까지 왔습니다. 그는 2차 포로귀환 때에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인물로서 느헤미야의 동생이기도 합니다(느 7:2). 그런데 그가 무엇하러 예루살렘으로부터 페르시아까지 왔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느헤미야에게 사명을 부탁하기 위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형편이 너무 어려웠기에 하나니는 그의 형 느헤미야에게 그곳 사정을 알리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하나니의 관심 역시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예루살렘 성에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하나님의 나라와 주의 몸된 교회에 모든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이 수치와 어려움 가운데서 나오지 못하니 고민과 기도 끝에 느헤미야를 기억하고 마침내 그 머나먼 페르시아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예루살렘 성벽이 건축되기 시작하고 예루살렘 성이 완성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완성되자 아우 하나니를 지도자로 세웁니다. 느헤미야 7장입니다.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느 7:1-2).
즉, 주의 나라와 주의 영광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지녔던 하나니는 나중에 예루살렘 성의 지도자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가장 신실하시사 주의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고 열정을 내는 자들을 반드시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이 땅에서는 주님의 거룩한 공동체에서 영광을 주시지만 그것은 영원한 나라에서 얻을 영광의 억만분지 일일 뿐입니다. 어느날 새예루살렘 성이 임하게 될 때 주의 나라를 사모하며 충성하던 모든 성도들은 무한하고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3절을 보니, 하나니를 통하여 들려온 소식은 기쁨의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라는 말은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그들이 어떻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소식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성벽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사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자들이 너무나 소수였기 때문에 주변국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너진 예루살렘 성과 불탄 성문들을 재건할 처지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자들이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과 불탄 성문을 재건하고 안정적인 나라를 건설하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귀환한 자들의 능력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벽과 성문을 재건할 힘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성벽과 성문이 없으므로 그들은 주변국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모습은 영적인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벽과 성문은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어벽입니다.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열리면 적은 쉽게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마귀는 우리의 무너진 성벽과 성문이 어디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건드리면 완전히 무너지는지도 분명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곳을 막아야 합니다. 무너진 영적 성벽을 재건하여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성벽과도 같습니다. 성벽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원수를 이길 수 없습니다. 참 교회의 보호를 받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주의 성령께서 깨닫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는 각각 자신의 삶 가운데서 무너진 성벽과 성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죄성이 무엇인지 각자가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신속하게 성벽을 다시 쌓지 않는다면 사탄의 역사는 여러분의 삶을 철저하게 무너뜨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참과 능욕과 멸시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더 늦기 전에 영적인 성벽과 성문을 쌓아야 합니다. 뚤린 곳을 막아야 합니다. 재건해야 합니다. 어떻게 재건합니까? 그 교훈을 느헤미야서에서 배워야 합니다. 기도와 성령의 역사로 사탄의 역사를 막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을 삼아 성전 재건을 위한 영적 전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는 제2단계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두 살이 지나고 세 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거하시는 이곳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로 느헤미야와 같은 여러분 모두에게 주어진 위대한 사명인 것입니다.
이제 4절을 봅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예루살렘의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도 여러 날 동안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슬픈 소식이 들려왔을 때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슬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신앙 인격을 갖춘 자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슬픔 가운데 기도하며 금식하며 주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들의 일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영적인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증거입니다.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다 경건한 사람은 아니지만, 참으로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경건한 사람이라면 주의 백성들의 방황과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눈물을 함께 흘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 때문에 울고 무엇 때문에 미소 짓고 있습니까? 만일 슬퍼한다면 무엇 때문에 슬퍼합니까? 금식하며 기도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합니까?
오늘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나라와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 때문에 아파하고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은 중보기도로 이어집니다.
이 자리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눈물을 함께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와 또한 구원 받지 못한 영혼들과 시험에 들어 방황하는 영혼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위하여 눈물 흘리며 중보 기도할 수 있는 마음 갖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느헤미야는 어떠한 중보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5절을 보니, 그는 먼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바사 왕 고레스가 제 1 차 포로 귀환을 공포했을 때 사용한 호칭이었습니다(대하36:22-23). 이 표현은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참된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고백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그 이유는 죄의 삯은 무조건 영원한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그렇게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도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주’로 바뀐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고백하며, 주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주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신다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 전체가 증거하는 언약은 그리스도를 통한 언약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면 죄사함 및 영생을 주시기로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언약은 누구든지 주님께로 돌아와 회개하고 다시 주를 사랑하여 주의 계명을 지키면 주님께로부터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이 가능한 이유는 물론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은 범죄한 자에게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지만, 회개하고 주를 사랑하며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언약의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느헤미야는 고백한 것입니다.
이 시간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따르는 마음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여러 가지 상처와 죄악으로 인해 굳어 있고 둔감하여졌을지라도 참 맘으로 우리 주 예수님께 돌아와 십자가를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맹세로 하신 언약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옥토처럼, 그리고 부드러운 눈처럼 녹여 주실 것입니다.
6절을 보니,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자기 죄처럼 자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백성들과 예루살렘 성이 그토록 비참한 지경에 처한 것은 하나님의 무능함 때문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잊으셨기 때문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참과 능욕과 낭패를 당하게 된 것은 바로 범죄와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들을 위해 주야로 기도하며,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느헤미야는 '나와 내 아버지 집이 범죄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공동체가 된 것이기에 한 사람의 죄가 공동체의 죄가 되고, 공동체의 죄가 곧 나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을 점령할 때 그때 아간이라는 사람의 범죄는 한 개인의 죄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로 간주되었습니다. 따라서 아간의 죄 때문에 공동체가 아이 성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합니다. 이때 여호수아는 그 원인이 공동체 내의 어떤 자의 죄악 때문인 사실을 주께로부터 들은 후 아간을 찾아내어 제거합니다. 그러자 공동체의 죄악이 제거되면서 이스라엘은 다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곧 교회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죄악이 드러나면 곧바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같은 공동체 안에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내에서 비방과 거짓과 미움과 당 짓는 등의 불미스러운 범죄가 발생하면 깨어있는 지체들은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며(유1:23)' 그 형제 자매의 죄를 나의 죄라는 인식을 갖고 동일한 강도의 아픔과 슬픔을 가지고 회개해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의 죄악을 제거하여 주시고 또한 용서하여 주심으로 사랑과 거룩의 공동체로 회복되어 계속 힘차게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회개한 내용은 주의 백성들이 모세의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할 내용은 여전히 십계명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의 죄악을 범할 때마다 심한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점점 이 세상은 죄와 선을 가르는 기준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각자 소견대로 악을 행하고도 죄인줄 모르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십계명과 그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 있습니다. 십계명을 암송해 봅시다.
1. 제 일은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마라. 2. 우상을 만들지 마라. 3.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마라. 4. 안식일을 기억하라. 5. 내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마라. 7. 간음하지 마라. 8. 도적질하지 마라. 9. 네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말, 거짓 증거 하지 마라. 10. 내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마라.
느헤미야는 주의 백성들이 모세의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못함으로 인하여 오늘의 비참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진단합니다. 그 비참한 일은 주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약속에 땅에서 뽑혀 전 세계적으로 흩어지는 심판이었습니다. 즉, 예루살렘 성에서 예배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나라로 흩어져서 그들의 종살이를 하는 비참함이었습니다.
따라서 8절을 보면, 느헤미야는 모세의 율법과 그 언약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특히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볼 때 그들의 가장 큰 범죄는 우상 숭배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향하여 신의를 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순결과 정절을 잃은 상태를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를 망각하고 그의 계명을 어기며 나아가 다른 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우상 숭배를 하는 영적 간음이 그들의 가장 큰 범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언약을 주실 때 그들이 우상 숭배를 하면 그들을 열국 가운데 흩어버리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모세의 율법을 통한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끝없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지자 마침내 언약에 따라 북이스라엘은 온 세상 나라로 흩어져 땅 위에서 사라져 버렸고 다윗 왕국이었던 남유다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년 동안 종살이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율법의 심판을 받아 세상에서 포로로 흩어졌다고 하더라도 다시 회개하고 주 하나님께 돌아와 계명을 지키면 그들이 어디에 있을지라도 다시 모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과 하신 모세의 언약입니다.
느헤미야는 주의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합니다. 그는 주의 약속에 담긴 하나님의 자비를 붙들고 기도합니다.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느 1:9).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이라는 표현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회개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려면 구약에 있어서도 양을 잡아서 번제 또는 희생제를 드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장래에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 사함 및 관계 회복을 의미합니다. 또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관계를 회복한 자들이 다시 신실하게 주의 계명을 지켜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회개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나아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삶이 개선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입술로만 회개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심지어 회개의 고백과 눈물은 있어도 회개의 ‘삶’이 없다면 우리의 회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인한 복음의 능력에 의해 삶이 바뀔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회개를 인정하십니다. 물론 회개하고 다시 쓰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참된 회개는 마침내 그 사람을 일으켜 세울 것이며 나아가 선한 열매를 맺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회개는 삶의 열매와 연결되며, 이는 일회적 회개를 통하여 되기도 하지만 종종 끊임없는 회개를 통하여 계속 주 안에 거하는 가운데 삶의 열매를 맺어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무너져있고, 아무리 가능성 없는 곳에 있다 하더라도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죄를 범했든지 상관없이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며 확실하게 회개하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무한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의지하면 주의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면서 변화된 삶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열매입니다. 느헤미야는 계속 하나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10절입니다.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느 1:10).
느헤미야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선택하셔서 구원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기’ 때문에 용서하고 회복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은 ‘이미’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받은 백성들이기 때문에 자비를 베푸실 것을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저들은 주의 어린양의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백성이요, 주의 영광과 이름이 그들의 모임 가운데 있지 아니합니까? 그들의 행실이 악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보혈 때문에 저들을 용서하소서.”
이처럼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의 진정한 재건은 그 무엇보다 우리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에 근거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만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수 있는 원동력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용서와 회복의 근거는 주의 언약입니다. 이는 지금으로 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의 근거이기 때문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성의 재건의 뿌리인 셈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오늘 이 백성을 구원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삶과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를 힘 있게 세우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서기 바랍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무한한 참된 용서가 있고 또한 성령을 통한 강력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과 교회가 강력하게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1절,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느 1:11).
지금까지 용서와 회복을 위해 간구하던 느헤미야가 기도의 결론을 맺고 있는 장면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기도가 혼자만의 기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도의 동역자들이 느헤미야에게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의 동역자는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에서나 대단히 중요한 자원입니다. 공동체가 회복되어 강력하게 서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도의 동역자들이 많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여러분들을 위해 누가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같은 마음을 품고 서로 기도할 수 있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여러분은 크게 놀랄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기도들이 얼마나 큰 영광을 이루었는지 보며 깜짝 놀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는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개역 개정은 “이 사람들”이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오역입니다. 원어 및 다른 번역본들은 단수로 올바르게 번역하였습니다. ‘이 사람’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아닥사스다 왕을 말합니다. 즉,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황제인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이 움직여져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왕의 마음이 움직임으로서 자신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쓰임 받기를 구체적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당시 자신은 왕의 술 관원이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에스더가 황후가 된 것이 민족의 구원을 위함이었던 것처럼, 지금 느헤미야의 마음에는 자신이 왕의 술관원인 사실을 통해 새로운 비전을 본 것입니다. 즉, 페르시아 왕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에 헌신해야 할 사람이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 것이요, 이를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루살렘 성벽을 굳게 세우기 위함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비로서 하나님께서 왜 자기를 이방인의 땅에서 왕의 술 관원으로까지 세워주셨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그의 인생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페르시아에 남겨 놓으셔서 왕의 술관원이 되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경륜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의 도구로 드렸습니다. 그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원대하고 위대한 계획을 깨달았으며 이제 자신의 지위와 삶 전체를 하나님의 도구로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지닌 모든 지위와 재물과 상황은 여러분의 배를 채우며 화장실을 늘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몸된 성전인 여러분의 삶과 주의 백성의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를 힘차게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닌 재능과 은사와 여러 기회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영원한 나라와 의미와 연결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결국 허무와 멸망으로 마치게 될 것입니다. 도리어 저주가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시작합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자의 눈물에서 시작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계획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임하게 되고 그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며, 이에 하나님께서는 헌신된 그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과 기회와 지위와 재능을 맘껏 하나님 나라 재건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영광입니다.
여러분이 지닌 모든 것으로 여러분의 심령을 재건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닌 모든 것으로 주의 백성의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를 힘차게 세우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교회는 여러분의 가정과 인생을 보호해 주는 든든한 성벽과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오늘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부터 시작하는 신실한 남은 자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라 사랑
느 1:1-11 / 인명진목사
6월은 유독 나라와 민족과 관련 된 사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6월을 호국보훈의 달이라 말합니다. 6일은 나라를 지키고 독립을 위해 순국하신 분들의 뜻을 기리는 현충일로 지키고, 10일은 군부독재의 종식을 알리는 6.10 항쟁을 기념하는 날이고, 25일은 동족이 원수가 되어 처참한 전쟁이 일어났던 날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일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개인을 넘어서서 나라와 민족이 함께 건강해야 한다는 것을 피부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지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1등과 3등을 차지한 대한민국의 두 젊은이가 슬픈 표정으로 시상대에 올랐습니다. 왜 이들은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 경주에서 1등과 3등의 시상대에 올랐지만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은 바로 자신의 조국을 빼앗기고 식민통치로 억압하고 있는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광의 시상대에 올라가 고개를 숙이고, 일장기가 부끄러워 꽃다발로 가슴을 가리고,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이 두 선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가장 기뻐해야 할 시상대에 올랐지만 기쁨보다 회한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양이 울타리 안에 있을 때에 목자의 보호를 받듯이 국민은 나라의 울타리가 있어야 보호를 받고 평안한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잃어버렸을 때 처참하게 짓밟히고 유린당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침략 전쟁을 일으켰을 때에 우리의 할머니들이 꽃다운 나이에 정신대로 끌려갔습니다. 전 세계 역사상 집단적으로 여성을 끌고 가서 전쟁터 군인들의 성 노리개로 삼은 나라는 일본 밖에 없습니다. 피해를 입은 정신대 할머니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제대로 된 사과와 뉘우침은커녕 남의 나라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생떼를 쓰고 있습니다. 또한 영토 침략 전쟁에 미쳐 날뛰다가 우리의 할아버지들을 전쟁터 총알받이로 끌고 가 비참한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나라가 패망하자 징용으로 끌고 간 우리의 할아버지들을 남양군도와 태평양 이름 모를 섬에 버려두고서 자기들만 탈출했습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넣고, 방화를 한다는 헛소문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말을 어눌하게 하는 사람과 뒤통수가 납작한 사람은 조선 사람이라 여겨 몽둥이와 죽창으로 처참하게 살해했습니다. 이때 죽은 조선인이 6천명이 넘는다고 말합니다.
또한 교회도 일본의 종교정책으로 신사참배를 강요당하고, 저항하면 예배당을 패쇠했습니다. 제가 문경에서 섬겼던 교회의 예배당이 일본에 의해 강제 매각 당하기도 했습니다. 전쟁 막바지에는 군수물자가 모자라 교회의 종을 떼어서 무기로 만들려하다가 본국으로 싣고 가지도 못하고 일본은 전쟁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몇 백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 어머니,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몸소 겪었던 참상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세계 2차 대전이 일본과 독일의 항복으로 끝이 났습니다. 연합군은 얄타회담에서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나누어 소련과 미국이 분할통치를 하고, 한반도는 38선을 그어서 미국과 소련이 분할 통치한다고 협의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얼마나 억울한 조약입니까? 패전국인 독일을 동독 서독으로 나누어 분할 통치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러나 왜 우리나라의 허리를 잘라야 합니까? 일본을 두 동가리 내어서 분할 통치해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아무 죄도 없는 우리나라의 허리가 잘려져 아직까지 분단의 신음을 토해내야 합니까? 우리나라는 패전국 일본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주권이 없기 때문에 남의 나라 땅을 자기 마음대로 나누는데도 털깍이는 양처럼 눈만 껌뻑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전쟁에서 패한 일본보다 더 큰 아픔을 겪었습니다.
왜 이 나라와 민족이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군인들의 성 노리개로, 전쟁터 총알받이 무참하게 짓밟혔습니다. 의도적인 소문으로 개처럼 맞아죽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했습니다. 나라의 허리가 잘렸습니다. 누가 국민을 보호해 줍니까? 나라 없는 국민의 주권을 누가 지켜줍니까? 그래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보호 받을 수 있고, 번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경계 지어주신 땅에서 평화와 안녕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정을 사랑하는 것같이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같이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국토와 자연을 아끼고 자기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민족의 일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지금 지구촌에는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한때 바벨론을 무너뜨렸던 대제국이었던 메대는 나라의 흔적도 없이 망했습니다. 나라는 망했지만 국민은 남아 있습니다. 저들은 지금 쿠르드족이라는 이름으로 터키와 이란 이라크 국경을 떠돌고 있습니다. 이들은 마음 놓고 자기 뜻을 펼칠 수가 없습니다. 비전을 잃어버린 채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울타리를 잃어버린 양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개인의 성공과 번영도 나라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가정과 기업의 번창도 나라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나라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든든한 후견인입니다. 후견인이 든든해야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나라가 든든해야 국민이 보호받을 수 있고, 번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위대한 신앙인은 모두 위대한 애국자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주인 예수님도 식민지 백성 유대인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나라와 상관없이 산 것이 아니라 무너져 내리는 예루살렘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를 비롯하여 기드온, 사무엘, 다윗, 에스더, 느헤미야, 예레미야, 사도 바울 일일이 다 열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도 위대한 신앙인은 애국자였습니다. 독일의 정신적인 기초를 놓은 마르틴 루터,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 네덜란드의 그룬트비, 이들은 신앙으로 나라의 초석을 놓았던 인물들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김구 선생, 조만식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이런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지극히 사랑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참된 기독교가 있는 곳에 애국자가 있었으며 애국자가 있는 곳에는 항상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성경에 만나는 느헤미야는 자신의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끌려간 포로 2세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또 다시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느헤미야는 다시 페르시아로 끌려온 전쟁 포로의 후예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페르시아 제국 아닥사스다 왕 아래에서 술 맡은 관원으로 봉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술 맡은 관원은 왕의 음식과 직결되어서 궁궐에서 왕을 직접 알현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청와대 참모 정도 되는 자리였습니다. 왕으로부터 지대한 신임을 얻지 않고서는 맡을 수 없는 직책이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우리가 잘 아는 에스더가 왕비로 있던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 중에 고레스 왕 다음 가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고레스 왕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포로로 잡혀 온 유다 백성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냅니다. 바벨론 포로가 된지 칠십 년만인 주전 536년 스룹바벨의 인도로 1차 귀환을 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약 80년 후 주전 457년에 에스라에 의하여 2차 귀환을 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3년 후인 주전 444년에 느헤미야의 인도로 3차 귀환하여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됩니다.
1차 귀환한 자들이 주전 535년에 성전재건을 착수했으나 이런저런 난관을 만나 성전 공사가 한때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중단되었던 성전은 학개와 스가랴에 의해 주전 516년에 완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만 지어졌지 성벽은 무너져 있었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한 땅이었습니다. 성벽재건과 국가재건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나라사랑을 어떻게 실천했을까요?
나라 사랑의 첫 번째 발걸음은 조국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페르시아 수산궁은 서울에서 부산을 세 번 가는 거리인 천 사백 키로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통신수단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 느헤미야는 조국의 재건 소식에 목말라 했습니다. 그는 1차 2차 귀국한 형제들에 의해서 성전과 성벽은 어느 정도 재건되고 국가는 얼마나 안정을 찾았는지 궁금했고 고국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망해버린 조국이지만 조국을 향한 열린 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식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이고, 어떤 사회인가? 그리고 이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의식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느헤미야는 국적을 감추고 싶은 나라를 잃은 백성입니다. 나라를 위해 마음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자신의 정치적 입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제국의 권력 핵심부에 들어있는 사람입니다. 정치란 모든 초점이 어떻게 권력을 잡을 것인가? 잡은 권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느헤미야 역시 왕의 신임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는 패망한 조국에 대한 소식을 듣지 않아야 마음이 편했을 것입니다. 또한 패망한 조국과 자신의 삶을 연결시킬수록 정치적인 아킬레스건을 많이 가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불과 20년 전 아말렉 사람 하만이 모드더개와 에스더의 출신을 문제 삼아 유대인을 집단으로 학살하려고 했던 시도도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엄청난 손해와 불이익이 있을 줄 알았지만 조국과 민족의 아픔의 소식을 듣고 함께 아파하는 열린 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가 나라를 사랑한 첫 번째 발걸음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친 페르시아주의자였을까? 하는 물음입니다. 왜 이 질문에 대해 우리가 신앙고백적으로 답변해야 합니까? 우리는 지금 편행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친미의 우편향과 친북의 좌편향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이에 따라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 편향된 시각을 정당화 하고 있습니다.
성서적인 시각으로 볼 때 자신의 정치적인 성향으로 판단하는 편향적인 잣대는 옳지 않습니다. 친북주의자들은 우리나라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면서 북한의 3대 세습에는 침묵하고, 인권을 강조하면서 북한 인권을 묵인하고 있습니다. 북한정권은 분명히 잘못되었습니다. 독점한 권력을 지키기 우해 얼마나 많은 인민을 학살하고 폭력으로 다스리고 있습니까? 주권을 지킨다는 미명 하에 핵으로 지구촌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우리의 경계대상인 동시에 사랑하고 품어야 할 형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 가지 더 기억할 사실은, 친북도 문제이지만 친미도 문제입니다. 우리 국민 중에는 북한의 주체사상 못지않게 미국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은 무조건 착하고 힘들면 언제든지 도와줄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군의 주둔이 우리 안보에 도움은 되지만, 원칙적으로 저들은 우리나라 때문에 주둔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이익 때문에 주둔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국에 이익에 배치되면 언제든지 철수할 수 있는 것이 미군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입장을 바꾸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은 미국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돕고 동맹하는 것이지 결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또한 성경도 너희는 방백을 의지하지 말고, 나라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미국이 아닙니다.
몇 년 전 미국산 광우병 수입 소 때문에 온 나라에 반미시위가 들끓었습니다. 미국 국기를 찢고 불태우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서울시청 앞에서 미국 국기를 흔들며 시위하는 친미단체가 나타났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민족의 자긍심을 넘어 타도미국을 외치면서 상대국의 국기를 찢고 불태우는 시위도 잘못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의 비위를 건드릴까봐 노심초사하며 서울 한복판에서 미국 국기를 흔드는 것 또한 잘못 되었습니다.
그러면 느헤미야는 친 페르시아주의자였을까? 반 페르시아주의자였을까요? 이 문제에 대한 정학한 답변을 성서로부터 들어야 바른 역사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에서 포로의 아들로 태어났고, 페르시아에서 교육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페르시아에서 고위 관직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렇다고 그를 친 페르시아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친 페르시아주의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반 페르시아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라 사랑을 위해서는 페르시아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걸었던 나라 사랑의 첫 번째 걸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역사의식입니다.
나라 사랑의 두 번째 걸음은 조국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느헤미야는 사람을 보내어 조국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라가 무너진 지 백년이 지났지만 예루살렘성은 여전히 무너져 있고, 성문은 불타서 없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은 사람이 살지 않아 버려진 도시로 황폐화 되어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듣는 순간 느헤미야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조국 소식을 듣고 수일 동안 울었습니다. 그리고 금식 기도를 하면서 조국을 향한 열정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망국의 한을 가슴에 담고 오랫동안 기도하고 아닥사스다 왕 앞에 나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간청합니다.
당시의 최대강대국이었던 페르시아 왕궁에서 일신상의 안락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그가 무너진 나라 때문에 울었습니다. 느헤미야의 눈물은 조국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데서 오는 눈물이었습니다. 자기나라와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자기와 일체화하고 아픔을 함께 나눈 느헤미야의 눈물이야말로 애국의 눈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은 느헤미야의 나라사랑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권력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에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저는 바로 그 사람이 우리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먼저 눈물로 나라를 사랑할 때 이 나라의 역사가 새로워집니다.
서신서에서 바울은 내게는 동족을 인한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 끊임없는 고통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동족과 형제를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한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교회만 이기적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역시 나라 사랑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에서 관직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느헤미야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성벽재건 공사를 시작한 지 52일만에 예루살렘 성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총독의 월급이 식민지 백성의 세금으로 충당된다는 것을 알고 월급까지 포기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지도자가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 빠진 세월호 사건을 시작으로 해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과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서 이 나라가 어떻게 될까? 근심하고 있습니다. 비단 이 사건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쌓여있던 적폐가 끝도 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성벽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기강이 무너지고, 도덕이 무너지고, 질서가 무너져 나라가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무너져 내리는 이 나라를 어떻게 다시 세울 수 있겠습니까?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에 어떻게 하면 부강한 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까? 하면서 입국의 원리를 물었습니다. 이때 공자는 식(食)과 병(兵)과 신(信)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식은 경제를 의미하고, 병은 국방력을 의미하고, 신은 도덕을 의미합니다. 다시 자공은 경제와 국방과 도덕 중에 어느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가장 먼저는 신이고, 그 다음은 식이고, 그 다음은 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가치관이 다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것이 무너졌는데 이 나라의 미래를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들은 천민자본주의를 신앙화 하면서 맘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세상이 아니라 혼자 잘 먹고 잘 살려는 승자독식의 냉엄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신앙도 하나님 힘 빌려 자기 뜻 이루려는 기복신앙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에서 성공을 척도로 삼고 있습니다. 가치관 붕괴는 비단 정치인뿐만 아니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잘못 나의 잘못입니다. 지금 우리는 무너져 내리고 있는 대한민국을 바라보면서 느헤미야처럼 눈물 흘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고통당하는 민족과 나라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고 눈물 흘려야 할 때입니다.
나라 사랑의 세 번째 걸음은 나라와 민족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나라 사랑은 자기 민족만 사랑하는 단계를 뛰어넘는데서 완성됩니다. 지금 브라질에서는 월드컵 축구경기가 열리고 있습니다. 온 지구촌이 열광하는 이유는 축구라는 스포츠에 나라가 개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스포츠와 애국심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축구공 앞에서는 큰 나라나 작은 나라가 평등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도 모든 나라가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은 박애정신에 근거한 것입니다. 세계는 우리나라를 위해 존재하고 우리나라는 세계를 위해 존재한다는 폭넓은 역사관에 근거한 나라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고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애국자는 다른 나라의 권리를 존중하고 그 나라의 발전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이 전 세계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 번도 제국주의를 긍정해 준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제국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나라를 가키고 있습니다. 세계 위에 군림하는 제국주의도 아니고, 경찰국가도 아니고,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세계 모든 민족과 나누어서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우리가 꿈꾸는 바로 그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 빠진 것이 대한민국이 바다에 빠졌습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울어야 이 나라와 이 민족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갈릴리 성도들이 제일 먼저 느헤미야처럼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나라를 위해 울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와 민족의 희망이 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애국애족
느 1:1-11 / 이기복목사(하늘문교회)
오늘은 광복절 69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내년이면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고 해방둥이 교회인 우리 하늘문교회도 창립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광복 69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을 맞으면서 광복절 당시를 생각하면 감사할 일밖에 없지만 사람들은 왜 그렇게 불평과 불만이 많은지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저는 예수 믿은 것이 감사하고 이처럼 건강 주신 것이 감사하고, 좋은 교회와 성도님들을 보면 감사하고, 좋은 가정 주신 것이 감사하고, 교회만 바라보아도 감사하고, 이 무더운 여름에 예배당만 들어오면 시원한 것이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또한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합니다. 특히 하루 세 끼 밥 먹기도 힘들어 하던 그 옛날을 생각하면 오늘날 너무나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것 같아 죄송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광복절 기념 주일을 맞아 우리 모두가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애국 애족하는 길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은혜 받고 나라를 사랑하는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광복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출애굽을 했던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과 같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광복절 기념 주일에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요 애국자였던 느헤미야의 애국심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삼천리 금수강산(錦繡江山)을 잘 지키고 정말 살기 좋은 나라, 복음천국을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느헤미야에게서 본받아야 할 교훈이 무엇일까요?
1. 나 자신보다 조국에 대하여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후에 바벨론이 파사 즉 페르시아에게 정복되었기 때문에 그는 파사 나라의 수도 수산궁에 살았습니다. 그는 포로의 신분으로 살면서 아닥사스다 왕의 측근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 일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왕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에게 주는 직책으로 왕의 음식이나 술이 안전한지 여부를 조사하는 술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당시에 이 직분은 왕의 생명과 직결 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신임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고위직이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언제나 조국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상황에 대하여 궁금해하면서 마음에 걱정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조국 이스라엘에서 온 몇 사람을 만나서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내 형제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3절에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라고 말했습니다. 즉 예루살렘의 형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성에 살던 백성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있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졌고 성문까지 다 불에 탔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남의 일처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남이야 고난을 당하든 말든 나만 편안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애국자 느헤미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보다 조국을 더 생각하는 애국자였습니다.
본문 4절에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나라도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위협과 강제적인 방법으로 한일합방을 당하고 갖은 고난과 핍박과 수탈을 당하였습니다. 성씨를 다 개명해야 했고 언어를 일본어로 사용해야 했고 20대의 젊은이들을 징벌하여 전쟁터로 내 몰았습니다. 30-50대의 장년들은 탄광의 노무자로 잡혀갔습니다. 여자들은 일본군 위안부(慰安婦)로 끌려갔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고 살았다 하여 초근목피(草根木皮)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에도 느헤미야와 같은 애국자들이 있어서 이 나라를 지켰고 드디어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은 것입니다. 그런데 불과 5년 후인 1950년 6.25전쟁이 나서 정전협정을 한 1953년 7월 27일까지 자그마치 3년 1개월 동안 동족 간에 전쟁을 하였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전시체제와 같은 긴장감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도 느헤미야와 같이 조국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애국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조국을 위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일반적인 애국자가 아니라 기도하는 애국자였습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훼파되고 백성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는다는 비참한 소식을 듣고 수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 하였습니다.
또 5절-11절에 보면 느헤미야의 기도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5절에서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 지난날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허물에 대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7절에 주를 향하여 크게 범죄한 사실과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한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8-9절에서 “만일 범죄하면 너희를 흩을 것이나 만일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하늘 끝에 있을 지라도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고 하신 약속을 상기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11절에서 왕에게 은혜를 입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이상의 기도문에서 보면 느헤미야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간절히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진짜 애국자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가 그래도 그렇게 많은 위기 속에서 구원을 받고 오늘의 위대한 대만민국을 이룬 것은 기도하는 애국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한 결과 응답이 왔습니다. 2장에 보면 아닥사스 왕이 느헤미야가 금식을 하고 나라 걱정에 수척해 진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네게 무슨 중병이라도 생겼느냐”며 걱정을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조국의 형편과 사정을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2:4절에 보면 아닥사스 왕이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절호의 찬스가 온 것이고 기도의 응답이 온 것입니다.
우리도 나라가 어려울 때 걱정만 하지 말고 제단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인간의 생각과 계획을 초월하여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광복절을 맞아 우리가 깨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응답의 열쇠이고 문제 해결의 길입니다.
기도의 사람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이렇게 다짐하였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 하겠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라고 딤전 2:1-2절에서 말씀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나라와 민족 그리고 지도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민족 조상들이 지은 죄까지도 마치 자기가 지은 죄처럼 자복하는 기도를 6-8절에 드렸습니다.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3. 애국애족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말로는 누구든지 애국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민족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고 금식하던 느헤미야는 어느 날 결정적인 날이 왔습니다. 아닥사스 왕에게 포도주를 진상하러 들어가 왕 앞에 섰는데 수심(愁心)이 가득한 느헤미야를 보더니 2:2절에 “어찌하여 네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경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가득하냐?”
그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에게 자기 조국의 실상을 소상히 고하였습니다. 2:3절에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으리이까”라고 대답을 하니 왕이 말하길 4절에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때 느헤미야가 말하길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이 말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는 “Then I prayed to the God of heaven” 즉 “그 때 내가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5절에 “왕에게 이르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결국 그 간청이 이루어져 느헤미야는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아 왕이 내린 조서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모함과 방해가 심한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 재건을 시작하여 결국 훼파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고 나라를 바르게 세웠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를 비롯한 이방 족속들이 성을 재건하는 느헤미야를 방해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작전을 짰습니다. 그러나 모든 모함과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성을 중건하는 일을 계속하여 52일 만에 성곽을 완성하고 드디어 낙성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습니다(6:15). 그리고 느헤미야는 유다 총독으로 임명을 받아 12년 동안 봉급도 받지 아니하고 헌신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위하여 헌신하며 일을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12년 후에 다시 파사로 돌아갔다가 다시 왕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예루살렘에 돌아와 대대적인 개혁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13:6절).
더렵혀진 성전을 정결케 하고, 성을 재건하는 일에 방해를 일삼고 느헤미야를 모함하던 도비야를 추방하였습니다 모든 백성들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였으며 십일조를 철저히 하게 하였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게 하였습니다. 안식일에는 아예 성문을 닫아 장사를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말로만 애국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위험과 죽음까지 무릅쓰고 조국의 재건을 위하여 헌신한 것입니다. 일신의 양명(揚名)을 거절하고 오직 기도하고 행동하는 애국자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애국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말만 하는 애국자가 아니고 행동하는 애국자가 필요합니다.
끝으로 노산 이은상 선생의 “조국강산”이라는 짧은 시가 기억납니다.
겨레여 우리에겐 조국이 있다 / 내 사랑 받칠 곳은 오직 여기뿐 / 심장의 더운 피가 식을 때까지 / 즐거이 이 강산을 노래 부르자.
느헤미야
느1:1-11 / 이동휘목사(평강교회)
1.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같이 하나님 말씀에 익숙한 학자 겸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또 에스겔이나 다니엘처럼 능력 있는 선지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평신도’라 부르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술 관원’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고, 왕의 신임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왕이 먹고 마시기에 음식과 술이 안전한지를 확인하는 것이 느헤미야의 일이었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왕의 음료를 관장하고 그 음료를 들고 왕을 시중드는 자로, 왕의 경호 업무와 더불어 비서업무의 우두머리 격인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되는 중요한 직책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왕궁의 경영에도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충성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어야 했는데, 느헤미야는 그런 자질들을 인정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왕의 비서실장 격이어서 왕과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그는 개인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얼마든지 챙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신의 야욕을 품고 정치적 술수를 피우거나 음모를 품는 등 정치적 활동을 일체 행하지 아니하고, 비록 나라 잃은 포로민 출신이지만, 그리고 우상숭배 문화와 문명에 둘러 쌓였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느12:24,스3:2,딤전6:11)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에 남아있던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소식을 듣고, 주저앉아 통곡하며 슬픔에 잠긴 채로 며칠 동안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 5-11절입니다.
“주 하늘의 하나님, 위대하고 두려운 하나님, 주를 사랑하는 이들과 세운 언약, 주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과 세운 언약을 지키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이제, 이 종이 밤낮 주 앞에서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드리는 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살펴 주십시오.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를 거역하는 죄를 지은 것을 자복합니다. 저와 저의 집안까지도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주께 매우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주의 종 모세를 시키시어, 우리에게 내리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우리가 지키지 않았습니다. 주의 종 모세를 시키시어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주께서 우리를 여러 나라에 흩어 버리겠지만 우리가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면, 쫓겨난 우리가 하늘 끝에 가 있을지라도, 주께서 거기에서 우리를 한데 모아서, 주의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으로 돌아가게 하겠다고 하신 그 말씀을, 이제 기억하여 주십시오. 이들은 주께서 크신 힘과 강한 팔로 건져내신 주의 종이며, 주의 백성입니다. 주님, 종의 간구를 들어주십시오. 주의 이름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주의 종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이제 주의 종이 하는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여 주시고 왕에게 자비를 입게 하여 주십시오.”
너나 할 것 없이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지은 죄로 인하여 이렇게 나라 잃고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은 황폐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통회자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라 잃고 모든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여기저기 흩어지게 되었지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하나님 말씀을 지키게 되면,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모아 하나님께서 택하신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가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종의 간구를 들어주시라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모세가 약속의 땅 정복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내용입니다.
( 신30:1-5)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은혜를 잊고 우상숭배하게 되면 ‘열국 중에 흩으실 것’, 다시 말해 나라 잃고 백성들은 타국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되면, 다시 그 흩어진 곳에서 불러 모아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러한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 앞에 간곡하게 기도드린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느헤미야,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소식을 듣고 통회자복하며 성전 회복을 간구하는 느헤미야를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적국의 궁궐에서 얼마든지 안락하게 생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좋으니, 오직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는 간곡한 마음으로, 그 일이 너무나 힘들고 위험한 일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감당하고자 하여 하나님께 간구한 느헤미야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기 위해 느헤미야를 부르시고, 그를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술 관원’, 즉 비서실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느 1: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느헤미야서는 비록 에스라, 에스겔, 그리고 다니엘 등과 같은 학식이나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지라도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회복이라는 너무나 큰 사역을 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같이 52일만에 그 모든 일들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숱한 장애와 어려움, 그리고 위험이 따랐지만 그 모든 것들을 기도와 믿음으로 극복하고 이루어냈습니다. 예수께서 달란트 비유 말씀에서 두 달란트 맡은 자가 두 달란트를 남겼을 때, 그 두 달란트 맡은 자에게 “(마25:23)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라고 칭찬했던 것처럼, 느헤미야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충성을 다해 큰 일을 이루어냄으로 칭찬받아 마땅한 그러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은 그것이 어떤 일이건, 살림을 하는 일이건,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건, 기계를 작동하는 일이건, 농장을 경영하는 일이건, 비행기를 조종하는 일이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는 일이건, 그 일의 규모가 크든 작든 모두가 다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달란트로 받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충성을 다할 때 기적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2. 느헤미야는 무엇보다 성전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비록 포로민으로 이방 나라에서 괜찮은 직위에 올라 얼마든지 편안하게 생을 누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던 예루살렘 성전이 황폐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에 큰 부담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의 형제 하나니가 유다에 남아 고생하는 사람들을 방문하고 돌아오자, 느헤미야는 그곳 상황이 어떤지를 물었습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15:5-9입니다.
(렘 15:5-9)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위해 울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들의 과부가 내 앞에 바다 모래보다 더 많아졌느니라. 내가 대낮에 파멸시킬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를 쳐서 놀람과 두려움을 그들에게 갑자기 닥치게 하였으며 일곱을 낳은 여인에게는 쇠약하여 기절하게 하며 아직도 대낮에 그의 해가 떨어져서 그에게 수치와 근심을 당하게 하였느니라. 그 남은 자는 그들의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기 직전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아 그 예언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파멸되고 남은 자들은 대적의 칼에 붙여진 현실을 전해 듣게 된 것입니다. 하나니의 보고 내용을 듣고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그대로, ‘성전은 허물어지고 성문은 불탔음’을 알고 충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느1: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참으로 유대에 남아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있었고, 이방인들의 목전에서 모멸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사모하던 성전, 예루살렘은 허물어지고 불에 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시던 거룩한 시온 성이 폐허가 되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슬픈 소식에 느헤미야는 앉아서 울며 수일 동안 슬퍼했습니다. 그는 왕궁에서 안락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거룩한 성전이 허물어진 것과 동족들의 환난을 자신의 일처럼 느끼며 슬피 울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건 조상들, 그 사람들의 잘못이야! 포로민으로 태어난 나하곤 아무런 상관이 없어!’ 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여기서 예루살렘이 얼마나 먼 곳인가? 멀리 떨어져 아무런 주권도 행사할 수 없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또는 성전과 나라의 재건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것일 거야! 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마음에 큰 부담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는 슬퍼하며 언약을 상기하며 하나님께 간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하나니를 만나 예루살렘의 안부를 묻기 전에도, 그는 이미 거룩한 성에 대해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사의 수사 성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었지만 느헤미야는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시84:5) 거룩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전도자 무디의 해석대로 느헤미야의 머리, 뇌에는 ‘성전’, “예루살렘”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의 마음속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그의 가슴에도 ‘성전’, “예루살렘”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비록 땅 위에서 안락하게 살 수 있었지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고 한 신약 성경의 훈계를 구약 성경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본보기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처한 곤경 때문에, “교회에 대한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롬9:1-3) 바울 사도의 동료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마음의 부담을 느끼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마음의 부담이 복으로 바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의 마음에 “시온의 대로 있어” 복 있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느헤미야는 앉아서 통곡하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 큰 가능성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의 기도를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으로 인해 나라 잃고 흩어지게 되었지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되면,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다시 모아들여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 곧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리라.”(느1:9)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되면, 그리고 다시 모든 잃었던 것을 회복하게 해주신다는 믿음으로 기도하면, 그 간구와 믿음을 보시고 그 불행을 복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유다에 남아 있던 동족들의 곤경을 생각하면서 느헤미야는 불행을 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기회를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의 상황은 좋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 상황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30:1-5)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지난 날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약속하시고 그 땅을 주시며 그 땅의 모든 축복을 누리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 돌아오면 다시 그 모든 잃었던 축복을 회복하게 하여 누리게 하실 것을 믿고 간구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래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렸던 축복을 이렇게 회상하며 간구한 것입니다.
(느9:23-25) 주께서 그들의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시고 전에 그들의 열조에게 들어가서 차지하라고 말씀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이르게 하셨으므로 그 자손이 들어가서 땅을 차지하되 주께서 그 땅 가나안 주민들이 그들 앞에 복종하게 하실 때에 가나안 사람들과 그들의 왕들과 본토 여러 족속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 임의로 행하게 하시매 그들이 견고한 성읍들과 기름진 땅을 점령하고 모든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과 판 우물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허다한 과목을 차지하여 배불리 먹어 살찌고 주의 큰 복을 즐겼사오나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간구하는 진정한 믿음과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주어진 상황과 처지를 보면, 이스라엘의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그 가능성을 보고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비록 자신은 약하고 작은 능력일지라도, 그러한 자신을 본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문제 대신 가능성을 보고, 장애물 대신 기회를 볼 때, 우리는 느헤미야와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과 바울과 사도들처럼 하나님을 믿고 세상을 변화시킨 믿음의 영웅들과 같은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능히 돕기도 하시고 패하게 하시는 하나님”(대하25:8) 앞에 무릎을 꿇는 성도가 되시어 문제와 장애를 극복하고 축복으로 변화된 성도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4. 느헤미야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느1:5)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느9:32)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확실히 알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느헤미야는 참으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한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느헤미야서에는 그의 기도가 열 두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기도에는 통회 자복하는 기도와 하나님을 “크신 긍휼을”(느9:19, 27) 베푸시어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큰 복을”(느9:25,35) 베푸시어 그 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는 기도 등이 포함되어있습니다. 기도의 중요성을 말해주듯이 에스라 9장과 느헤미야 9장과 다니엘 9장은 모두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들입니다. 오늘날에도 본받아야 할 기도로써 충분한 가치가 있는 기도들입니다. 느헤미야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기 위해, 먼저 통회 자복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와 자기 집안, 그리고 자기 백성들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을 긍휼하심을 간구했습니다. 모든 기도에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가 없이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회개기도를 드리고 다음으로 하나님께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상기시켜드리며 간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기도하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느1: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느헤미야의 이같은 기도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왕의 비서실장이라는 아주 중요한 관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후 느헤미야가 술 관원이 된 후 넉달째 되던 해에 왕이 잔치를 베풀게 되었는데, 술 관원이었던 느헤미야가 왕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기회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토록 가슴 아파하면서, 왕에게 성전 재건을 요청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찾으면서 계속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주어진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왕이 베푼 잔치 자리에서 술 관원은 마땅히 그 잔치의 흥을 최고조로 돋우어야 할 직책인데도 느헤미야는 그 연회장에서 슬픈 얼굴을 하고 다니며 왕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이를 목격하게 된 왕이 느헤미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느2:2)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이에 느헤미야가 두려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느2:3)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이같은 느헤미야의 대답에 왕이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고 묻습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왕에게 예루살렘 재건을 요청하고자 할 때 두려워했던 것은, 과거 아닥사스다 왕 즉위 초기에 왕이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중단하도록 명령했었기 때문에,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의 일로 예루살렘에 가겠노라고 아닥사스다 왕에게 요구하는 일은, 곧 아닥사스다에게 그가 내렸던 이전의 명령을 번복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또한 이는 왕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라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 부담이 뒤따랐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고 물었을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묵도하고” 성전 재건을 요청했습니다. “하나님께 묵도하고” 라는 말은 하나님께 급히 기도의 전보를 띄웠다는 뜻입니다. 소위 ‘화살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혼자서 넉 달 동안 기도해 왔기 때문에 화살처럼 과녁을 명중시키는 이런 간단한 기도를 날려 보낼 수 있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즉각 기도해야 할 순간에 이르게 되면, 이처럼 ‘화살 기도’를 하나님께 날리시고 그 응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담대히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요청합니다.
(느2:5)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왕은 “(느2:6)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며 흔쾌히 느헤미야에 성전 재건을 허락합니다. 느헤미야가 앞서 “(느1: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한 바 있었는데, 그 기도가 응답된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응답되어 마침내 예루살렘 재건 공사를 허락받고 예루살렘으로 사전 답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5. 그러나 느헤미야가 이렇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할 때, 극복해야 할 큰 문제와 장애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느2:18-20)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예루살렘 성전 재건은 왕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나서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꼭 이루어 주실 것이오. 성벽을 다시 쌓는 일은 그분의 종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오. 예루살렘에서는 당신들이 차지할 몫이 없소. 주장할 권리도 기억할 만한 전통도 없소.”(느2:20) 그리고 성전 재건 공사를 계속합니다. 느헤미야가 확고부동한 믿음으로 공사를 계속하자 산발랏 일당이 이제 적대적으로 성전 재건 공사를 격렬하게 비난하며 본격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합니다.(느4:1-14) 이에 느헤미야는 공사를 방해하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한 손에는 무기를 잡아 방어하고 다른 한 손에는 연장을 잡고 일하도록 지시하여 공사를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중단없이 계속하도록 합니다.
(느4:16-23) 그 때로부터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내가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이르기를 이 공사는 크고 넓으므로 우리가 성에서 떨어져 거리가 먼즉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우리가 이같이 공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으며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말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일하리라 하고 나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따라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다 우리의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각각 병기를 잡았느니라.
이렇게 밤낮으로 쉬지 아니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한 손에 무기를, 다른 한 손으로는 일을 하며 성전 재건을 방해하려는 세력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외부의 대적하는 세력을 물리치고 나자, 이번에는 내부에서 성전 재건 공사를 어렵게 하는 일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이렇게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느5:1-5)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52일 동안이나 계속되는 공사에 심혈을 기울이는 동안 경제적인 위기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가난하여 토지가 없는 사람들은 식량난을 겪게 되었고, 토지 소유자들은 식량을 위해 토지를 저당 잡혀야 했습니다. 그리고 토지 소유자들 중 일부는 바사(페르시아)에 바칠 조세를 내기 위해 부유한 유다인들로부터 높은 이율의 빚을 얻어 써야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러한 경제적 위기가 근본적으로 성전 재건 공사 때문에 빚어진 것이 아니라, 부유층과 지도층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과 사랑이 없음을 책망하며,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도록 했습니다.
(느5:6-9)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과 사랑으로 대해야 할 동료들에게서 폭리로 토색한 것과 고리로 저당 받은 것들을 모두 돌려주고, 동료들에게 이자 받는 행위를 중지토록 조치합니다.
(느5:10-13)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 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 내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그 말대로 행하겠다고 맹세하게 하고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이렇게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고, 계속되는 방해 공작에도 성전 재건 공사가 거침없이 진행되자, ‘산발랏’은 느헤미야를 살해할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느헤미야가 성공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했고 이를 통해 백성들을 한 마음으로 규합하여 대적들의 방해공작을 모조리 물리치자, 산발랏은 느헤미야가 유다의 왕이 되려고 한다는 유언비어를 조작, 날조하여 헛소문이 돌게 합니다. 그리고 이를 아닥사스다 왕에게 보고 하겠다고 협박하며 느헤미야와 타협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산발랏은 ‘오노 평지’에서 회담을 갖자는 편지를 느헤미야에게 보냅니다.
(느6:6-7)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너와 유다 사람들이 모반하려 하여 성벽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또 네가 선지자를 세워 예루살렘에서 너를 들어 선전하기를 유다에 왕이 있다 하게 하였으니 지금 이 말이 왕에게 들릴지라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하였기로
그러나 느헤미야는 산발랏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무근인 것을 회보하며, 예루살렘에서 무려 30km나 떨어진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는 것은 자신을 살해할 음모인 것을 간파하여 회담을 거절합니다.
(느6:8-9)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그러자 이번에는 산발랏이 스마야 제사장에게 뇌물을 주고, 느헤미야로 하여금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도록 유도합니다. 뇌물을 받은 스마야는 느헤미야에게 아주 중대한 일인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으로 갑시다.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성소 출입문들을 닫읍시다. 자객들이 그대를 죽이러 올 것이오. 그들이 밤에 와서, 반드시 그대를 죽일 것이오.”(느6:10) 제사장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성소에 들어가게 함으로 율법을 범하게 하여 그를 미끼로 느헤미야를 처형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스마야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는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매수되어서, 자신을 해치려 거짓말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그들이 스마야를 매수하여, 느헤미야에게 겁을 주어 성소를 범하는 죄를 짓게 하여서, 느헤미야를 곤경에 빠뜨려 죽이려는 속셈을 간파한 것입니다.그래서 느헤미야는 “나 같은 사람더러 도망이나 다니란 말이오? 나 같은 사람이 성소에 들어갔다가는 절대로 살아 나올 수 없소. 나는 그렇게는 못하오.” 라며 겸손하게 거절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느6:14)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
이렇게 해서 성전 재건 공사는 오십이 일 만에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주변의 여러 민족이 이 소식을 듣고, 그제서야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온 백성이 하나님께 거대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 재건을 크게 기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성전 재건을 기뻐하며 예배드리며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습니다.
(느12:43)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여러분이 성전이 중심이 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멀리까지 전파되기를 바랍니다. 성전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기도하는 여러분 삶의 되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범사에 함께 하시므로 승리하며 형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사명
느 1:1-4 / 박영일목사(하늘비젼교회)
어느 추운 겨울날, 영국 런던의 한 악기점에 남루한 옷차림의 한 부인이 낡은 바이올린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제가 몹시 배가 고파서 그러니 이것이라도 받고 돈 좀 주세요.” 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주인은 바이올린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 부인에게 5불을 주었습니다. 부인이 나간 후, 악기점 주인은 낡은 바이올린이라도 한번 켜 보고 싶어서 먼지를 털고 바이올린을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소리가 났습니다. “이건 보통 바이올린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하여 먼지를 털고 안에 쓰인 글을 보았습니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 1704’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100년간 행방불명되어 세계의 음악인들이 찾고 있던 바이올린이었습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제작자 스트라디바리 일가(一家)가 제작한 바이올린으로 명기(名器)로 진귀하게 여긴다. 이 명기(名器)는 현재 전 세계에 600여 개(비올라 12개, 첼로 약 50개, 바이올린 약 540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연주에 사용되고 있는 것은 50여 개에 불과하다.)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돈으로 계산하면 120억이 넘는 값어치였습니다. 그 부인은 자신의 악기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거지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소중한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명심보감(어린이들의 유교 학습을 위하여 중국 고전에서 선현들의 금언(金言)·명구(名句)를 뽑아 편집한 책으로 주로 유교적 교양과 심성(心性) 교육, 인생관 등에 관련된 내용들이다.) 성심편에 天不生無祿之人(천불생무록지인)하고 地不長無名之草(지부장무명지초)이니라 말이 있습니다. 하늘은 녹(자기 복)이 없는 사람을 태어나게 하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자라게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풀 한 포기도 존재의 목적이 있고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생도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명 없이 태어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 사명을 모르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우리가 함께 ‘사명’이라는 말씀을 나누면서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한 소중한 나의 사명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명 찾기
1. 관심이 사명입니다(느 1:2)
본문 2절에 보면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느헤미야의 마음속에는 한 번도 가보지는 못했지만 조국 유다에 대한 그리움과 영적인 고향인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다를 다녀 온 동생 하나니에게 고국 소식을 물었습니다. 이것이 관심이고 이 관심이 사명인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의 유명한 정치인중 한 사람인 윌리암 윌버퍼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25살 때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주님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하고 기도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자신의 마음에 관심과 부담을 주던 것이 영국에 잡혀온 노예들이었습니다. 노예들을 보면 자신의 마음이 괴롭고, 슬프고,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노예들을 해방 시키라고 부르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27살 때 노예를 폐지하는 운동을 일으키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내가 노예를 폐지하는 운동을 하는데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하고 생각을 해 보니까 “정치인” 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명을 가지고 하원의원에 도전 했고, 30살에 하원의원이 되었습니다. 그가 하원의원이 되어서 열심히 투쟁한 결과 48살 때 영국 안에서 노예무역을 폐지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62살이 되었을 때 영국 안에서 노예제도 자체가 폐지되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의 나이 72세 때 영국이 지배하는 모든 나라 호주와 뉴질랜드 등에 노예제도가 완전히 철폐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사명을 깨닫고 사명대로 살 때 얻게 되는 엄청난 역사입니다. 여러분의 중심에 있는 관심이 무엇입니까? 사라지지 않고 자리 잡고 있는 그 관심이 여러분의 사명인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고국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 관심이 그로 기도하게 했고 결국 나라를 위해 성벽을 재건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관심이 없으면 기도도, 행동도 없습니다. 섬기는 하나님 교회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까? 있다면 주님이 주신 사명으로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아픔과 눈물이 사명입니다(느 1:3-4)
느헤미야는 고국 소식을 자세히 듣습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한마디로 비보였습니다. 성은 불타고 성문은 부서지고 죽지 못해 살아남은 백성이 겪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비보를 들은 느헤미야는 수일 동안 슬퍼하며 울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4)
관심이 가고, 그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그 아픔을 끌어안고 기도하게 되는 것 그것이 사명인 것입니다.
원주민들조차 가까이 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아우카 부족에게 오랫동안 선교훈련을 받고 준비하였던 청년 짐 엘리엇과 5명의 친구들은 복음을 들고 이 부족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들어 간지 열흘이 되어서도 연락이 없자 구조대를 파견하였는데 부족마을 근처 강가에서 그들은 처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발견 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들의 시신에서 그들이 허리에 차고 있던 총들이 그대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죽음을 받아들일지언정 아우카 부족에게 자신들의 방어를 위해서 총을 뽑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잘 교육받은 청년들이 위험한 오지에 들어가서 살해된 그 사건은 본국의 언론으로부터 “불필요한 낭비”였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이 오랫동안 선교를 위해 기도하며 훈련하면서 준비하였으며, 그만큼 가치 있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생명을 바친 것은 낭비가 아니라고 반박하였습니다.
그리고 간호학을 공부하여 2년 만에 남편을 살해했던 그 부족에게 선교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아우카 부족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아우카 부족들은 이 여자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 부족들은 “여자는 죽이지 않는다.'고 하여 엘리자베스는 기적적으로 그 부족 가운데 살아남았고 3년간 헌신적으로 그 부족을 간호사로서 섬기며 보살폈습니다. 마침내 추장이 그녀에게 ‘너는 왜 이곳에 와서 우리를 이렇게 극진하게 섬기느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당신이 5년 전 강가에서 죽였던 백인 남자의 아내입니다. 우리를 당신들에게 보낸 것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이 일로 그 악명 높았던 부족은 하나님을 영접했고, 짐 엘리엇을 죽였던 청년은 그 부족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아픔 때문에 진주가 만들어지듯이 아픔과 눈물 때문에 보화와 같은 인생이 재창조 되는 것입니다. 어네스트 허밍웨이의 말처럼 "때로 인생은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그 상처를 치료하면 우리는 더욱 더 강해진다." 강하고 아름답게 되기 위해 아픔과 눈물을 사명으로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란 왕국에 가면 현관을 장식한 거울 모자이크가 있다고 합니다. 이 거울 모자이크는 아름다운 세계적인 예술품입니다. 천장 기둥이 작은 거울로 모자이크 되어 있고, 그 모자이크를 조명장치에 비추면 무지갯빛 나는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거울 모자이크에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란 왕국의 현관을 장식할 때 거울로 장식하도록 결정하고 유럽에서 거울을 주문해 왔습니다. 그런데 거울을 운송하는 과정에서 거울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깨어져 버린 거울 때문에 사람들이 염려하고 있을 때 한 예술가가 찾아와 "깨어진 거울을 제게 맡기십시오.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 예술가는 깨어져 버린 거울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식으로 인한 아픔이 있으면 그 때문에 해야 할 사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배우지 못한 아픔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배우게 해 주는 사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난의 아픔이 있는 사람은 나눌려는 사명이 속에서 꿈틀거립니다. 가정의 아픔 때문에 깨어질 가정을 막아주는 사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깨어진 거울로 예술품을 만드는 사명, 아픔을 품고 진주를 만들어 내는 사명이 아픔을 겪은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아픔이 있는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픔 때문에 때론 울지만 마지막에 웃으면 되는 것입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인 것입니다. 주 안에서는 아픔도 눈물도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름답게 승화되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선으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관심과 아픔과 눈물이 내일은 사명임을 잘 기억하시고 끌어안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과업이 사명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 즉 과업이 사명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이 나의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노아의 과업은 방주를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과업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출애굽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과업은 가나안 땅 정복이었고, 솔로몬의 과업은 성전 건축이었습니다. 스룹바벨의 과업은 성전 재건이었고, 느헤미야의 과업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었으며, 에스더의 과업은 민족 구원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과업은 예수님을 위해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으며 바울의 과업은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과업은 십자가를 통한 인류 구원이었습니다. 과업은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과업은 모두 소중한 것입니다. 부모의 과업은 자식을 낳고 양육하고 교육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소중한 사명인 것입니다. 가정 살림은 주부에게 맡겨준 사명입니다. 학생의 과업은 공부입니다. 사명으로 알고 공부해야 합니다.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 때 그 때 맡겨주신 과업이 나의 사명임을 알고 감사와 기쁨 그리고 성실하게 잘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4. 재능과 은사가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과업을 맡기실 때 그가 가진 재능을 따라 맡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하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잘하는 것을 통해 목적을 성취하도록 부르십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신의 재능과 세상의 필요가 교차되는 그곳에 당신의 사명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거듭 재능의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발견하지 못할 뿐입니다.
영화 <불의 전차(Chariots of Firt)>의 실제 주인공이자 올림픽 육상 선수인 에릭 리들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나를 빠르게 달리는 사람으로 만드셨고, 나는 달릴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낀다.” 그는 나중에 “뛰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달리기는 특별히 그에게 주어진 재능이었습니다. 그는 빠르게 달렸고, 달릴 때 행복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주일에 달리기 경주 날짜가 정해지자 그 경주에 나가는 것을 포기합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시합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대신 주일이 아닌 평일에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400m 경주에 출전하여 우승하여 금메달을 받습니다.
재능과 은사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신 재능과 은사로 일을 하면 잘하고 자연스럽고 가장 효과적입니다. 내 몸에 잘 맞고 어울리는 옷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직업이나 사업을 할 때도, 교회에서 봉사할 때도 받은 자신의 재능과 은사를 사명으로 알고 섬기는 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5. 축복(복)이 사명입니다.
➀ 느헤미야는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고위직책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왕과 독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복으로 받은 고위직책을 이용하여 기도한 후 기회가 주어지자 왕에게 청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수 있게 해 달라했습니다. 왕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움직여 은혜를 입게 해 줍니다. 또한 그는 재산이 풍부했습니다. 예루살렘 총독으로 일하는 동안 총독의 녹을 받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바치면서 맡겨준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복을 사명으로 생각한다면 부자는 물질과 함께 나누는 사명을 준 것입니다. 몸이 건강하시면 몸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➁ 하나님의 은혜로 왕비가 된 에스더는 복이 사명인 줄은 몰랐습니다. 에스더(Ester)는 히브리어로 '하닷사' 라고 합니다. 그 뜻은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에스더는 바벨론식 이름입니다. '페르시아의 별'이라는 단어 '이스타'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녀는 B.C. 597년 느브갓네살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갈시 베냐민 지파의 포로 중 3대 증손인 '아비하일'의 딸로서) 부모가 일찍 죽었음으로 사촌오빠인 모르드개의 양녀로 양육을 받고 살았습니다. 신앙으로 잘 키워져 마침내 왕비가 되는 은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 찾아 온 것은 민족의 위기입니다. 총리 하만의 계략으로 민족이 전멸을 당하게 생겼습니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 에스더에게 모르드개가 일깨워 준 말이 있습니다. “너 혼자만 부귀영화를 누리라고 하나님이 왕비의 자리를 주신 것이 아니다. 이럴 때 나서서 민족을 구하라고 주신 복이다.”(에 4:10-17) 하나님이 주신 복, 누리고 있는 복이 사명임을 깨닫자 왕비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 결심하고 금식기도하고 왕에게 나아가 자기 민족을 구하였습니다.
➂ 요셉(창45:5-8)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을 국무총리로 세운 것은 흉년 속에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베푸신 하나님의 복이며 사명임을 고백합니다. 복을 받은 자들의 사명은 나눔과 섬김입니다. 지구상에 바람처럼 나타나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명을 발견하고 사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그려진 것입니다.
6. 거룩한 부담감이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사명을 우리 가슴에 심어주실 때 그것은 거룩한 부담감으로 나타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형편을 들었을 때 그는 거룩한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왜입니까? 비보를 듣고 눈물로 회개하고 금식하며 기도했지만 성벽 재건이라는 큰일은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었습니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으로서 왕을 모셔야 했고, 성벽 재건을 위한 많은 인력과 물질은 자신의 능력 밖이었습니다. 하고는 싶은데 능력이 안 될 때 거룩한 부담이 생깁니다. 이 거룩한 부담 앞에 피하고 도망가는 선택을 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거룩한 부담을 끌어안고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3개월쯤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왕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성벽을 재건하게 해 주었습니다. 없으면 기도부터 하는 지혜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를 섬기는데 거룩한 부담감이 생길 때, 성도는 짐이 아닌 사명으로 생각해야 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분명 길을 여실 것입니다. 아멘입니다.
신일덕 장로님은 “할렐루야 캡틴” 이라고 불리우는 비행기 기장입니다. 그는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기내방송을 통하여 “할렐루야! 신일덕 기장입니다. 이 비행기에는 하나님이 동승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편안한 여행이 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인사를 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1990년 11월 16일도 싸이판으로 떠나는 신혼부부 61쌍과 일반승객 31명 등 약 150여명이 탑승한 비행기를 타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인사를 하고 이륙했습니다. 착륙 15분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압장치가 고장이 나서 바퀴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바퀴 없이 활주로에 내리면 인명피해는 불을 보듯 뻔 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신일덕 기장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장로가 운전하는 비행기가 사고 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하나님. 여기 신혼부부들이 타고 있는데 어쩌면 좋겠습니까! 하나님! 하나님!” 기도한 후 다시 바퀴를 내리는 핸들을 돌리는데, 안 빠졌던 앞바퀴, 뒷바퀴가 다 빠졌습니다. 불안감과 공포에 떨던 승객들은 안전하게 활주로에 착륙했을 때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 장로님은 비행기에서 내리는 승객들 한 사람 한 사람과 포옹을 하며 할렐루야를 외쳤고 승객들 역시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처럼 기도하면 환경이 변하고, 상황이 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일 중요한 것은 사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신 소중한 사명을 발견하고 사는 날 동안 그 사명으로 살 때 우리의 삶이 복된 것입니다. 발견한 사명 충성스럽게 감당하기 위해 끌어안고 기도부터 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애국
느1:1-11, 눅19:41-44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애국”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그리스도인은 기도로 애국해야 합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를 보면
1)주께 범죄 한 죄를 자복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느1:6에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 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 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 하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했다고 고백하면서 지금 당하고 있는 위기와 고난이 남의 탓이 아닌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 했고, 그래서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죄의 해결은 나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남을 지적하고, 남이 어떻게 한 것보다 내 입장에서 회개하고, 자복하며 기도할 때 긍휼함을 얻습니다.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기도를 통해 이 땅의 죄악을 용서하심을 믿고 자복 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공동체의 위기를 자신의 위기로 아는 것입니다. 공동체와 민족의 죄악을 자신의 죄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아파할 때 나도 아파하고, 공동체가 두려워 떨 때 나도 두려워 떨며 공동체의 문제를 내 문제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사랑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용기가 생기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요즈음 심각하게 문제 되고 있는 학교 폭력 문제, 부정부패의 문제,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 가는 문제,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진 문제의 근원이 바로 내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한 죄 때문이라고 회개해야 합니다.
2)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느1:4에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금식하여 기도하는 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왕의 연회를 맡아 준비하는 술 관원 장으로 세상의 지위, 명예, 재물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으로 세상 연락을 누리며 살기 쉬운 환경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금식하여 기도하였다는 것은 그가 믿음의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 믿음의 사람은 사람 보다 하나님을 보며, 현실 보다 미래를 내다보며, 세상 것 보다 하늘에 속한 것을 보며, 육적인 일 보다 영적인 일을 도모하며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수일동안 슬퍼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수일이 얼마입니까? 기슬르 월에서 니산 월까지, 월력으로 말하면 12월에서 3-4월까지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왕이나 다른 사람 모르게 금식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금식기도는 이처럼 나라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해야만 하는 기도입니다. 궁극적으로 도움을 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한 공동체의 진실한 금식기도는 개인과 교회를 변화시켰고 한 국가와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요나 시대에, 에스더 시대에, 느헤미야 시대에, 여호사밧 시대에, 요엘 시대에 있었던 이 금식기도의 기적들을 성경은 생생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식 기도는 여러 면에 유익합니다. 금식기도의 권위자 리-부에노는 그의 책에서 “금식은 우리들이 거룩해지는 용광로이다. 그 불길에 우리의 믿음은 단련되고, 그 불꽃에 우리의 영적 불순물은 소멸되며, 그 뜨거운 열풍에 우리의 삶은 거룩해진다.”고 하였습니다.
3)자손들을 위해 주야로 기도했습니다. 느1:6에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 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 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 하여.”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우리의 자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모 된 사람들 가운데 자손들을 위해 먹여주고 입혀주고 공부시켜서 시집 장가보내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이 자손들을 위하여 더욱 힘써야 할 일은 기도 하는 일입니더. 그것은 자녀들이 신앙으로 바로 살게 하기 위함이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나 험악하기 때문이요, 어느 부모든 자손들의 미래를 책임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고 골고다로 향하실 때 울며 뒤를 따르던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과 너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어려서부터 믿음으로 양육하고 기도하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했는데 이 말은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의미와 함께 같은 문제를 두고 계속해서 규칙적으로 간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기도를 지속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한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일평생 기도드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는 살면서 늘 다양한 문제를 만나기 때문에 자주 자주 기도 제목이 바뀝니다. 그러나 자녀를 위한 기도는 아침저녁으로, 새벽에, 가정 예배에서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주일이면 교회에 가는 일, 어려서부터 십일조 하는 훈련, 기도하는 훈련,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 등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습관화 되고 이것이 품격이 되어야 자녀의 신앙이 건전한 터전 위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신앙 안에서 바로 서면 모세, 사무엘, 다윗 같은 인물이 많이 나와 이 나라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손들의 미래가 부모의 기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느헤미야처럼 주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그리스도인은 평화의 도구로 쓰임 받음으로 애국해야 합니다.
1)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고, 하나님의 마음을 화평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를 믿는 자들에게 참 평화를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화목 제물이 되시어 화평케 하셨습니다. 사람들 간에, 나라 간에, 인종 간에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신약 본문 19장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과 모인 무리들이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이것이 평강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 평화의 주님은 불안 해 하는 제자들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평안과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가질 수 있는 참 평화와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평화와 기쁨이 오늘 우리 안에 충만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평화의 도구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성도는 국가의 의무를 다 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사람들이 당시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바치지 말아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 내 정부에 대해서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은 신자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더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과 질서를 지키는 일에도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 13:1-2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 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베드로도 벧전 2:13절에서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 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일을 할 때 주 안에서, 그리고 덕을 세우면서 해야 합니다.
3)그리스도인은 민족을 위해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하셨습니다. 주님은 본문 눅19:42에도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 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했습니다.
스코틀란드 어느 시골에 가면 돌다리 하나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 나”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홍수가 났을 때 한 소녀가 교회에 가는 길에 다리가 떠내려가는 바람에 소녀도 물속에 빠져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다급하여 "하나님 나를 살려주시면 여기에 튼튼한 다리를 놓겠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 후 그 소녀는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식모살이를 하면서 돈을 착실하게 모았습니다. 십년 후 그는 돌다리를 놓을만한 돈을 모을 수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그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돌다리를 튼튼하게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리위에 “하나님과 나”라는 글을 써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리를 놓을 수 있는 힘과 돈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하나님과 나”와의 약속을 감격스럽게 지키고야 말았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희생과 도우심을 통해 화목케 된 우리 성도들은 서로의 관계에서, 나라를 위해 소녀가 돌다리를 세우고 “하나님과 나”라고 새겼듯이 화평을 이루는 일을 위해 주님과 내가 화목의 다리를 함께 놓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평화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소망합니다.
3.영적 안목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미래를 보도록 일깨워야 합니다.
1)주님의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에 오셔서 성을 보시되 겉모습만 보신 것이 아니라 명의가 환자의 모습만 보고도 단번에 환자의 상태를 알아보듯 예루살렘의 실상을 아셨습니다. 그들의 불의함과 부도덕함을 아셨습니다. 그들의 탐욕, 위선과 교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치 않을 때 장차 받을 심판을 보시고 우신 것입니다. 이 눈물은 자기 민족을 사랑한 데서 나온 눈물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3:37-38에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라고 예고 하셨습니다. 영적 소경이 된 성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도 몰라보고, 그 심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세속적인 안목만으로 세속의 일들은 매우 잘 보았지만 바로 코앞에 닥칠 멸망을 바라보지 못하는 불쌍한 그들의 실상을 보시고 우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예언은 단 반세기가 지나지 않은 A.D 70년에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해 성취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주님의 안목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시대를 분별하는 안목을 가지고 영적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2)이기적인 마음을 버려야 애국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에 급급했습니다. 본문 19장 후반에 보면 주님은 그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시고 분노하시어 성전에 들어가 장사 하는 자들의 상을 둘러엎으시고 그들을 쫒아 내셨습니다. 그들은 누구 보다 애국자인척 행세 했지만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탐욕을 버리고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자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국가 경쟁력이 강해지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이나 어느 한 분야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 모두가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한다면 국가 경쟁력은 강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 단합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동서로, 부자와 빈자로, 파당으로, 색깔론으로, 이념과 사상 차이로, 당리당략으로 사분오열이 되어 있습니다. 지독한 이기주의가 이 나라를 망치고 있는데 이 이기주의는 서로가 망하는 생활 태도입니다. 남극의 한겨울 기온은 영하 6,70도가 보통입니다. 1968년도 8월에는 영하 88도까지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생물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동물, 생명체들은 날씨가 추워지면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는데 펭귄은 반대로 더 추운 곳으로 이동하여 그 추운 곳에서 촘촘히 서로 몸을 맞대고 서로의 체온으로 가혹한 추위를 하나로 뭉쳐서 겨울을 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체온을 나눔으로 상대방의 체온을 내 것으로 만들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불어 살아가는 일입니다. 성경이 가장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신, 내용이 그것입니다.
3)말씀대로 순종하여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국가의 흥망성쇠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할 때 강성하고 흥왕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선택했을 때는 하나님은 징계의 매를 드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릴 때는 반드시 주변 나라의 공격을 받았고 그로 말미암아 엄청난 고통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정말로 잘 사는 길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세계 열방을 보면 기독교가 흥왕 하는 나라는 잘사는 나라들입니다. 과거에는 어려웠지만 기독교의 부흥이 일어나면 국가 경제도 살아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 애국하는 길임을 알고 복음 전파에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면 전파 된 만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은 낙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곧 애국입니다. 복음 전파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국내전도와 해외선교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요, 은총을 받는 일입니다.
◈ 그리스도인은 기도로 애국해야 합니다.
◈ 그리스도인은 평화의 도구로 쓰임 받음으로 애국해야 합니다.
◈ 영적 안목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미래를 보도록 일깨워야 합니다. 우리 모두 민족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믿음의 주역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