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덕지본(孝德之本)
효는 모든 행동의 근본이라는 말이다.
孝 : 효도 효(子/4)
德 : 큰 덕(彳/12)
之 : 갈 지(丿/3)
本 : 근본 본(木/1)
가정의 달 5월, 진실한 행복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 분이 아니셨다면 이 몸이 살 수 있었을까/ 하늘 같은 은덕을 어찌 다 갚을 수 있겠는가 …"
조선시대 정철의 시조 훈민가(訓民歌) 중 한 대목이다. 이처럼 부모의 은혜를 알고 효도함은 인간의 기본 도리다. 부모 공경을 잘 해야 형제 우애, 국가 충성, 벗 사이 신의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효제충신(孝悌忠信)이다.
성웅 이순신 장군을 보자. 충효의 화신임을 알게 한다. 장군은 임진왜란 중인 정유년 27일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백의종군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순신은 출옥 직후인 4월 5일 충청도 아산 음봉의 선산에 도착해 참배했다. 사당에 들러 남쪽 원행을 앞두고 고유하는 예를 행했다.
4월 11일 전라도 여수에서 올라오던 어머니는 안흥량에서 선상 객사를 하고 만다. 죄인 신분으로 백의종군하는 중에 모친상까지 당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천지간에 어찌 나와 같은 일이 또 있겠는가. 어서 일찍 죽는 것만 못하다(天地安有如吾之事乎. 不如早死也).”
이순신은 효를 다하지 못한 아픈 심정을 조선을 구하는 충절로 승화시킨다. 일찍이 수많은 성현들이 효를 강조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공자는 ‘효는 모든 행동의 근본’이라 갈파했고, 퇴계는 ‘모든 행동의 근원’, 율곡은 ‘모든 행동의 바탕’이라 했다. 효경에도 ‘효는 덕의 근본이며 교육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난다(孝德之本也 敎之所有生也)’고 명쾌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럼 구체적인 효도 방법은 무엇일까. 공자의 효 실천 매뉴얼은 오늘에도 빛난다. “효자가 어버이를 섬김에 평상시에는 공경을 다하고, 음식을 공양해 드릴 때엔 즐겁게 드시도록 하고, 병이 나시면 진정으로 우려하고, 초상에는 그 슬픔을 다하며, 제사는 지극히 엄숙하게 모셔야 한다”고 강조했다.
孝子之事親也; 居則致其敬, 養則致其樂, 病則致其憂, 喪則致其哀, 祭則致其嚴.
명심할 일은 부모 생존 시에 효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시외전’에 자식이 철들어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잖은가.
효는 모든 인간행동의 근본이다
孝는 모든 인간 행동의 근본이다. 孝는 자녀가 禮로써 부모를 섬기고, 공경하고, 순종하여 부모에게 걱정을 드리지 않고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孝를 온전히 실천하여 부모 마음을 즐겁게 하는 사람은 아주 적거나 보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오죽하면 너도 부모가 되어 보면 내 마음 알게 될 것이라고 부모는 말 듣지 않는 자식에게 자주 말하지 않는가?
백이면 백이 '孝의 덕목을 잘 실천하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모두들 고개를 좌로 흔드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자신을 있게 한 분이 부모이고 그 뿌리가 부모인데 왜 이토록 실천하기가 쉽지 않을까? 순종하고 실천하기는 커녕 배은망덕한 자식도 이 사회에 많이 있어서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라 칭하지 않는가.
孝의 덕목을 이루지 못하면 개인과 사회와 국가는 병들고 결국에는 망(亡)하게 되는 불행을 가져온다. 이를 알기라도 한 듯 모든 경전은 孝의 가르침을 말해 주지 않는 경전이 없다.
불교의 경전인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부모의 은혜를 10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그 은혜에 자식들이 어떻게 보답해야 할 지를 가르쳐준다.
나를 잉태하시고 지켜 주신 恩惠,
출산의 고통을 감내한 恩惠,
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는 恩惠,
쓴 것을 삼키고 단 것을 뱉는 恩惠,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이는 恩惠,
젖 먹여 길러주시는 恩惠,
손발이 다 닳도록 씻어주시는 恩惠,
먼 길 떠날 때 걱정하시는 恩惠,
자식을 위해 나쁜 일까지 서슴지 않는 恩惠,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恩惠.
기독교 경전인 성경에서는 십계명 가장 가운데 다섯째 계명에 엄히 당부하고 축복까지 기록하고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슬람교의 코란 경전에는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계율을 주고 있다.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아무리 가난해도 자식을 죽여서는 안된다. 어머니는 고통을 받아가면서 아이를 낳는다. 아이를 배고 젖을 뗄 때까지 30개월이나 걸리는 것이다. 그 은혜를 결코 잊지 말라'
조선시대의 정철선생은 시조 창(唱)을 통해 서민에게 교훈의 길 '어버이 살아신제'를 널리 알렸다. '어버이 살아신제 섬길 일이란 다하여라. 지난 후이면 애닯다 어찌하랴. 평생 고쳐 못할 일이 이 뿐인가 하노라'
60 나이에 고아된 저에게 힘들고 어렵고 앞이 깜깜할 때면 어김없이 지금도 하늘의 별을 보면서 그 수많은 별들이 인간에게 언제나 그 자리에서 총총히 인간 세상을 비추이는 것처럼 그 중 하나가 어머니 별이라 생각되어 아이처럼 나의 마음을 토로하고 위로를 받는다.
박목월의 '어머니의 눈물'은 어버이 날이 있는 5월에 나의 눈물이 된다.
(바른 길)
곧게 걸어 가리라
울며 뉘우치며 다짐했지만
또다시 당신을 울리게 하는
어머니 눈에
채찍보다 두려운 눈물
두 줄기 볼에 아롱지는
흔들리는 불빛
효를 왜, 가르쳐야 하는가?
효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효를 바르게 알아야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디 교육을 받지 않으면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야생 소년’과 ‘늑대 소녀 자매’ 사례에서 밝혀진 바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도리를 알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선각자들이 밝힌 효 교육의 이유를 보면, 공자(孔子)는 인도(仁道)를 닦아야 하기 때문으로, 맹자는 인의지도(仁義之道)를 가르쳐야하기 때문으로, 소크라테스는 덕(德)을 닦아야 하기 때문으로 설명하고 있다.
홍일식은 “오늘날 효가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난 날 농경사회의 효행을 효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해선 안된다. 산업사회, 정보화 사회가 되었으면 이에 걸맞는 효행의 본보기, 교육할 전범(典範)이 나와야 한다. 자식의 극단적인 희생만이 효가 아니며, 이런 현실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효를 외면하게 하는 이유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 시대에 맞는 효를 바로 알고 행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효를 가르쳐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며, 학교에서도 스승을 공경하고 제자를 사랑하며, 학생끼리 우애하고 이웃과 자연을 사랑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효는 교육하지 않아도 천성적으로, 또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율곡 이이(李珥)는 '격몽요결'에서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그런데도 효도하는 사람이 많지 않는 것은 부모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효를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교육법 제2조(교육이념)에는 대한민국의 교육은 홍익인간 정신을 구현하는 것으로, 효행장려지원법 제1조(목적)에는 효는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첫 번째, '문헌에 제시된 효 교육의 당위'를 살펴보고, 두 번째, '교육의 일반이론에서 본 효 교육의 필요성', 세 번째, '시대적으로 효를 교육해야 할 당위성'에 대하여 알아보자.
첫 번째, 문헌에 제시된 효 교육의 당위(當爲)
왜, 효를 가르쳐 하는가?에 대한 답은 효경을 비롯한 불경, 성경 등의 경전과 논어, 맹자, 예기 등의 유교 문헌에 잘 나타나 있다.
효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식자(識者)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헌에 제시된 효 관련 내용들을 기초로 현대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효의 원리는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지만 효를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상황요인이 반영되어야하기 때문에 달라야 한다.
따라서 경전에 현자(賢者)들이 제시한 효 교육의 이유를 알아보고, 이를 통해 이 시대에 효를 교육함에 있어서 어디에 주안을 두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본다.
성인(聖仁)과 현인(賢人)들이 말하는 효 교육의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 하고, 여기에서 효 교육의 주안점을 찾아야 한다.
효경에 제시된 효 교육 이유 및 주안점을 살펴보자.
효경에서 제시하는 효 교육의 이유는 첫째, 효를 가르치면 교화가 이루어지게 되므로, 사람으로서 근본과 기본이 서게 되기 때문이라고 이르고 있다. 가정교육이 잘된 사람이 학교에서 학우를 사랑하고 직장에서도 유능한 사람으로 평가 받기 마련인데, 이 또한 효를 행함에서 오는, 기본이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둘째, 효를 가르치면 질서가 저절로 잡힌다는 점이다. 효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나 조직은 자기를 통제할 자제력을 발휘하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효 하는 사람은 이타적 성품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잘 어울리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효심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이런 의미에서 친애(親愛)하게 하는 데는 효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이르고 있다.
넷째, 효는 하늘의 이치이므로 인간으로서 해야 할 기본이고, 불효는 가장 큰 죄악이므로 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이르고 있다.
효경에 제시된 효 교육의 주안점을 살펴보자.
효경에서 제시하는 효 교육의 주안점은 먼저 생명을 주신 부모님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고, 부모의 뜻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효는 사랑의 근본이며 모든 가르침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므로 학교 등에서 부모님의 뜻에 따르는 자세로 학교생활에 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효는 상호성을 바탕으로 의를 추구 하는 것이므로 부모가 불의함에 빠질 경우 간해서 바르게 처신하도록 해야 한다고 이르고 있다.
국문학에 나타난 효(孝)
1. 부자 관계의 어제와 오늘
여기서 일화는 부자(父子) 관계란 말할 것도 없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를 이름이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부자 관계에서 지난날과 오늘날의 모습은 완전히 반대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즉 옛날에는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부모는 자식에게 엄하게 군림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자식은 부모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것으로 미덕을 삼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부모에게 사랑을 요구할 수는 있지만 자식에게 효도를 바랄 수는 없게 되어 버렸다고 보인다.
이처럼 부자관계에서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습이 규범이 이렇게 달라졌다고 하는 것은 곧 부자관계에서의 가치관의 전도를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바꾸어 말하여, 만일에 부모가 자식에게 제 할 일을 다 못했으면서도 자식의 효행을 강요한다면 그 부모는 적어도 현대사회에서는 부도덕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반면 자식은 비록 어려서 부모의 극진한 사랑은 받았어도 노년의 부모를 양로원으로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를 불효 막심한 사람이라고 지탄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사회가 되어 버렸다는 말이 되겠다. 이렇게 부자 관계에서 가치관이 정반대 방향으로 바뀌어진 데에는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오늘날의 교육이념이 서구적인 시민사회의 바탕이 되는 이른바 시민 정신을 기초로 이루어졌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그 서구적인 시민 정신을 기조로 이루어졌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그 서구적인 시민 정신의 윤리적인 근간은 사람, 믿음, 소망이라는 기독교적인 덕목이 바탕이 되고 있고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그린 덕목으로써 출발점을 삼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관습에서 '효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는 가끔 이을 배반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와 같이 새로운 윤리관과 낡은 윤리관의 갈등 속에서 오늘날의 우리의 청소년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민하게 마련인 것이다.
과연 전통적인 효행을 이어받아 후손에게 그 미덕을 물려주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서구적인 사랑을 자식들에게 베푸는 것으로 부자 관계에 있어서의 일방 통행의 길만을 터놓는 것으로 그칠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새세대의 자유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들 낡은 세대로서는 선택의 기로에 선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과연 전통적인 효행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알려 줄 의무는 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필자가 전공하고 있는 우리의 고전 작품 속에 나타난 '효'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런데 원래 이 '효'란 우리를 동양 사람들이 숭상하던 덕목의 근본이요, 출발점으로 알려진 덕목이었다.
효경(孝經) 첫머리에 '무릇 효는 덕의 근본이니라'고 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바, 공자의 이 말씀은 우리들 동양 사람들에게는 관념적인 설교로서가 아니라 모든 생활의 규범으로 지켜진 지 오래된 생활 철학이었다. 정치의 원리, 사회의 질서, 경제적인 생활이 모든 것들은 곧 효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살다가 간 우리의 선민들이 창조한 고전 작품 속에 과언 효는 어떤 모습으로 다루어졌는가를 살펴봄으로써 효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문학 작품이란 원래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화한 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 글들을 읽어 주기 바란다.
2. 심청의 효행
국문학과 효행하면 누구나 언뜻 '심청전'을 생각하게 된다. 그만큼 심청의 효행은 한국 사람의 가슴 속 깊숙이 사무쳐 있는 터이다. 말하자면 한국에 있어서의 대표적인 효행의 표본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심청은 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가난한 소경의 말이다. 어려서 유복한 가정에 태어나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환경에서 자란 사대부의 자녀가 아니라 심청은 나면서 이른바 복이라는 것과는 아주 인연이 멀었다.
이때 심봉사는 부인을 매장하고 공산야월에 혼자 두고 허둥지둥 돌아오니 부엌은 적막하고 방은 텅 비었는데 향내 그저 피어있다. 행덩그런 빈방 안에 벗 없이 혼자 앉아 온갖 슬픈 생각할 제 이웃집 귀덕어미 사람 없는 동안에 아기를 가져가 보아주었다가 돌아와서 아기를 주고 가는지라.
심봉사 아기를 받아 품에 안고 지리사 갈가마귀 게발 물어 던지 듯이 혼자 오뚝 앉았으니 슬픔이 창천한데 품안의 어린 아기 죄아쳐 울음운다. 심봉사 기가 막혀 아기를 달래는데 …
이처럼 심청은 '지리산 갈가마귀 게발 물어다 던져 놓은' 것과 같이 쓸쓸하게 태어났다. 태어난지 이레 안에 그 어머니 곽씨 부인이 세상을 뜨고, 아버지 심봉사는 마누라를 여윈 슬픔과 젖 없는 아이를 한꺼번에 안고 그렇듯이 탄식하는 것이다. 그러던 끝에 심청은 참담한 과정을 밟으면서 자라났다.
이러구러 그 날 밤 지낼 적에 아기는 기진하니 어둔 눈이 더욱 침침하여 어찌할 줄 모르더니 동방이 밝아지며 우물가에 두레 소리 귀에 얼른 들리거늘 날샌 줄 짐작하고 문 펄떡 열떠버리고 우등등 밖에 나가, '우물에 오신 부인 뉘신 줄은 모르오나 칠일 안에 어미 잃고 젖 못먹어 죽게 된 아기 젖 좀먹여주오.' '나는 과연 젖이 없소마는 젖 있는 여인네가 이 동네 많사오니 아기 안고 찾아가서 젖 좀 먹여 달라하면 뉘가 괄시하오리까.'
심봉사 그 말 듣고 품속에 아기 안고 한 손에 지팡이 짚고 더듬더듬 동네 가서 아해 있는 집을 물어 시비 안에 들어서며 애걸 복걸 비는 말이, '댁이 뉘시온지 사뢸 말씀 있나이다.' 그 집 부인 밥을 하다 천방지방 나오면서 비감히 대답한다. '그 지낸 말은 다 아니 하나 대체 어찌 고생하시오며, 어찌 오시니까'.
심봉사 눈물지며 목이 매어 하는 말이, '현철한 우리 아내 인심으로 생각하나 눈 어둔 나를 본들 어미 없는 어린 것이 이 아니 불상하오. 댁 집 귀한 아기 먹고 남은 젖 있거든 이에 젖 좀 멕여주요'. 동서남북 다니며 이렇듯 애걸하니 젖 있는 여인네가 목석인들 아니 먹이며 도척인들 괄시하랴. 칠월이라 유화절에 지심 매고 쉬는 여자, '이 애 젖 좀 먹여주오.'
근방의 부인네가 심봉사 근본 아는 고로 한없이 긍축하여 아기 받아 젖을 먹여 봉사 주며 하는 말이, '여보시오 봉사님, 어려이 알지 말고 내일도 안고오도 모레도 안고 오면 이 애 얼마나 굶기리까.' '어질고 후덕하셔 좋은 일을 하시오니 우리 동내 부인 댁들 세상에는 드무오니 비옵건데 여러 부인 수복강녕 하옵소서.'
이렇듯이 동냥젖을 얻어 먹으면서 그의 젖먹이 시절을 자라났었다. 그리고 젖매는 시기를 지나 밥을 먹게 되었을 때에는 다음과 같이 해서 자랐던 것이다.
요를 덮어 뉘어 놓고 아기 노는 사이 사이 동냥할 제 마포 견재 두 동지어 의어깨에 엇매고지팡이 들어짚고 구붓하고 더듬더듬 이집 저집 다니면서 사철 없이 동냥하여 한편에 쌀을 넣고 한편에 벼를 얻어 주는 대로 저축하고 한 달 육장 전거두어 어린 아해 압죽 거리 설탕사서 들고 더듬더듬 오는 양이 뉘 아니 불상하랴.
이렇게 자라난 심청은 예닐곱 살 때부터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길을 인도하면서 동냥질을 함께 하였고, 십여 세가 되면서는 아버지의 수고를 덜기 위하여 저 혼자 동냥질을 다니기로 결심하여 그 뜻을 아버지에게 여쭈었다.
아버지 어두신 눈 험로한 길 다니시다 넘어져 상키 쉽고 불피풍우 다니시면 병환 날까 염려오니 아버지는 오늘부터 집안에 겨오시면 소녀 혼자 밥을 빌어 조석 근심 덮으리라.
그러나 딸을 아끼시는 심봉사가 허락할 리가 없다. 네 딸이 효녀로다. 인정은 그러하나 어린 너를 내 보내고 앉아 받아먹는 마음 내가 어찌 편하겠느냐. 그런말은 다시 마라.
그래도 심청은 뜻을 굽히지 않고 재차 삼차 간청하여 겨우 아버지의 승낙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손목을 놓고 혼자서 동냥 길을 떠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심청이 그날부터 밥을 빌러 나설 저녁에 먼 산에 해비최고 앞 마을 연기 나니 가련하다. 심청이 뵈 중 의옷 다님 매고 깃만 남은 헌 저고리 자락 없는 청목 휘양 불상없이 숙여쓰고 뒤축 없는 헌신짝에 보선 없어 발을 벗고 헌 바가지 손에 들고 건너마을 바라보니 천산조비 끊어지고 만경인종 바이 없다.
북풍에 모진 바람 살쏘듯이 불어온다. 황혼에 가는 거둥 눈 뿌리는 수풀속에 외로이 날아가는 어미 잃은 가마귀라. 옆걸음 쳐 손을 불며 옹구러져 건너간다. 건너 마을 다다라서 이집 저집을 부엌 문안 들어서며 가련히 비는 말이, '모친 상사하신 후에 안맹하신 우리 부친 공양할 길 없사오니 댁에 잡수시는 대로 밥 한술 주옵소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마음이 감동하여 그릇 밥 김치 장을 아끼지 않고 덜어주며, '아가 어서 어한하고 많이 먹고 가거라.'
하는 말은 가련한 정에 감동되어 고마운 마음으로 하는 말이라. 그러나 심청이는, '치운 방에 늙은 부친이 나 오기만 기다리니 나 혼자 먹사리까'
하는 말은 또한 부친을 생각하는 지경에서 나옴이러라. 이리하여 한국의 대표적인 효녀 심청의 효행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지루한 느낌을 주기까지 하면서 심청의 성장 과정을 소개하여 보았다. 지금까지 그 심청의 성장과정을 읽으면서 우리는 심청의 효행에 대한 본질적인 성격을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심청전의 작자는 심청의 효행을 결코 후천적인 교육의 소치를 보지 않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심청이 강보에 싸였을 때부터 예닐곱 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독자들에게 알려준 그 의도는 심청이 교육의 힘으로 효행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예닐곱 살이 되면서 아버지의 손목을 이끌고 여남은 살이 되어서는 아버지를 편히 쉬게 하며 저 혼자 동냥 길을 나서는 것을 아주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로 제시하는데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심청전의 작자나 독자들은 심청의 효행을 여기까지는 매우 당연한 일로 보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혼자 동냥 길을 나서겠다고 결심한 심청의 효행은 누구에게서 배웠거나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발적으로 택한 길이다.
이처럼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행동 규범을 배우지도 않고 하는 이일을 흔히 '천성'이라고 한다. 그런 뜻에서 심청전의 작자는 '효'를 천성으로 보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러한 심청전을 아무런 심리적인 지향없이 받아들인 대다수의 심청전의 독자들도 역시 효를 천성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효는 천성이다'는 명제는 우리의 전통사회에서는 하나의 진리로써 보편 타당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에 우리의 전통 사회에서 효는 천성이라는 진리가 통용되었다면 현대 사회에서 그 진리가 부정되어야 할 이유나 근거가 밝혀져야 한다는 과제가 우리의 앞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거나 아니면 천성을 받아들이는 인간 그 자체가 달라지거나 어느 쪽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효를 천성이라고 믿어 온 전통 사회의 규범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도 가치관의 전도에 앞서 과거를 비판하고 현재를 반성하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싶다.
그러기 위하여 지금까지 소개해 온 심청의 성장 과정과 심청의 첫 효행 길을 읽으면서 심리적으로 어떤 갈등을 느꼈는지, 아니면 자연스레 아무런 저항도 없이 읽을 수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을 뿐이다. 다만 심봉사의 참담한 적빈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어떤 저항은 물론 이 마당에서는 거론되어서는 안될 장이다.
다음으로 심청의 효행이 나타낸 이효상효(以孝傷孝; 효행을 한다 하고 오히려 불효를 저지른 일) 의역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또 있다. 즉 물색없는 심봉사가 눈뜰 욕심으로 몽은사 화주승에게 공양미 삼백 석을 권선문에 써넣고 고민을 하게 되니, 심청이 아버지의 고민을 보다 못해 남경 상인들에게 삼백 석에 몸을 팔아 인당수에 빠져 죽는 이야기의 줄거리는 분명히 이효상효의 역설이다.
더구나 '우리의 신체와 털과 피부는 모두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니 이것을 손상하지 않을 것이 효의 시작이라고 한 공자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삼았던 전통 사회에서, 효녀 심청으로 하여금 인제수로 그 몸을 물 속으로 던지게 한 작자의 의도를 우리는 헤아려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특히 현대의 독자들은 심청의 그러한 행동을 어리석은 것으로 규정하고 매우 비판적인 자세로 임할 수도 있겠고, 또한 대단한 저항을 느낄 수도 있겠기에 말이다.
대체로 우리의 고전 소설을 구조적인 각도에서 보았을 때 선(善;주인공)과 악(惡) 반 주인공과의 대립이란 도식이 지배적으로 적용되어 왔었다. 그러나 심청전의 경우 심청의 효를 방해하는 반대 세력이 없다. 심청의 적은 오직 참담한 가난이었다. 이 어찌할 수 없는 가난에 심청은 죽음으로 도전했을 뿐이다.
이러한 심청의 상황을 심청전의 작가는 효라는 행동 규법으로 화장을 했을 뿐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효상효라는 역설을 성립시킴으로써 심청의 내부에서의 효와 불효의 갈등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봉사가 떠나는 심청의 목을 부여안고 뛰놀면서 하는 말이, '나도 가자 나도 가, 혼자 가지 못하리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나 버리고 못 가리라. 고기밥이 되라도 너와 나와 같이 되자.'
이렇게 울부짖으며 심청이, '우리 부녀 천륜을 끊고 싶어 끊사오며 죽고 싶어 죽사리까. 액화가 수에 있고 생사가 한이 있어 인자지정 생각하면 떠날 날이 없사오니 천명이니 할 일 없소, 불효 여식 심청이는 생각지 마옵시고 아버지 눈을 떠서 광명천지 다시 보고 착한 사람 구혼하여 아들 낳고 딸 낳고 후사 전케 하옵소서.'라고 대답하는 데서 심청의 내면적인 갈등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참담한 빈궁에서 헤어나게 하기 위하여 심청을 죽어 놓은 작자는 효도라는 굴레를 씌워놓고 다시 나아가서는 효도의 마지막이라는 이현부모(以顯父母)로써 종결을 짓고 있다.
심청이 인당수 물에 몸을 던짐으로써 종결을 짓고 있다. 심청이 인당수 물에 몸을 던짐으로써 이미 양명어후세, 즉 세상에 그 이름을 떨치기는 했다. 그러나 심청전의 작자는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심청을 황후로 만듦으로 하여 심봉사 즉 그 부모를 드러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심청전의 후반부 즉 심청이 물에 빠진 이후의 이야기는 '이현부모'라는 효의 중국을 교화하고 계몽하기 위한 목적으로 짜여진 줄거리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효성이 지극하면 그 부모까지 영화를 누릴수 있다는 효경의 사상을 이야기로써 입증하기 싶었다는 말이 되겠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 사회에 있어서의 효에 대한 또 하나의 태도를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즉 효는 단순한 윤리적인 규범일 뿐만이 아니라 중국에 가서는 그에 따르는 응보가 보장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심청의 죽음은 부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효성의 대가로 황후가 될 수 있고, 나아가서는 아버지의 눈까지 뜨게 할수 있다는 보상을 받게 함으로써 효의 미덕을 상징화했다고 해서 할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효는 천성이요, 그 천성을 옹글게 수행한다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곧 우리의 전통적인 효에 대한 해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의 청소년들이 이러한 전통적인 효의 해석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하여는 내 나름대로 견해를 피력하는 것은 삼가기로 하고, 우선 이러한 사실 앞에서 비판과 반성의 기회를 가져보기로 권해 두는 방이다.
3. 효녀 지은의 경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효녀 지은의 이야기가 각각 전해오고 있다. 이야기의 줄거리가 비슷하고 특히 지은의 어머니가 눈이 멀었기 때문에 국문학사에서는 심청정의 근원설화로 간주되어 오고 있기도 한 이야기다.
이제 삼국사기 제48권 '효녀 지은' 조에 전하는 이야기를 우선 소개하기로 한다.
효녀 지은 신라 한기부에 사는 연권이라는 사람의 딸이다. 그는 나면서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웠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몸이 된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나이 서른 두 살이 넘었는데도 오히려 시집을 가지도 않고 밤낮으로 어머니 곁을 떠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집안의 형세는 자꾸만 가난해갔기 때문에 어머니를 마음껏 봉양을 할 수가 없었다. 지은은 끝끝내 그 참담한 빈궁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는 어느 부잣집을 찾아가 몸을 팔아 그 집 종노릇을 하고 그 값으로 쌀 십여 석을 얻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효녀 지은은 그 부잣집에서 종일토록 일을 해주고 날이 저물어서야 집으로 돌아와 밥을 짓고 어머니를 봉양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기를 사나흘이 지난 어느날 어머니는 딸에게 느닷없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애야, 지난날에는 빌어온 밥이라도 그 맛이 달더니 요사이는 웬일인지 밥은 좋으나 전처럼 밥이 달지가 않구나. 오히려 밥을 먹으면 칼로 간장을 찌르는 것 같으니 웬일인지 그 영문을 알 수가 없구나.'
어머니의 이 말을 들은 지은은 흐느끼면서 사실대로 말씀을 사뢰었다. 딸의 이야기를 듣고 난 어머니는, '나 때문에 네가 남의 종이 되다니 차라리 내가 빨리 죽지 못한 것이 원망스럽고나'하며 소리를 내어 크게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지은도 목을 부여 안고 함께 울음을 터뜨려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 집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울음소리를 듣고 슬픈 사연을 알게 되었다. 그 때 마침 효종랑이라는 화랑이 나와 놀다가 그 사연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지은의 딱한 사정을 말하여 조 백섬과 의복을 보내주고 한편 지은을 종으로 산 주인에게 쌀 열 섬을 갚아주어 양민이 되게 해 주었다. 이를 본 낭도 몇천 명도 제가끔 조 한 섬씩을 거두어 지은이 집으로 보내주었다.
이 소문이 궁중으로 전해지니 왕도 벼 오백 섬과 집 한 채를 내리고 정역하는 의무를 면제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갑작스레 곡물이 많아졌기로 나쁜 도적이 침범할 것을 염려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군대를 보내어 교대로 그 집을 지켜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효녀 지은의 효행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마을 이름을 효양방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를 미루어 보건데, 신라시대로 부터 우리는 효성 있는 사람을 표창하고 또 부모에게 극진한 효도를 하면 복이 스스로 온다는 생각이 상당히 짙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효녀 지은은 그러한 응보가 올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지은을 표창했다는 사실은 곧 효행을 하면 응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신라시대에 이 효녀 지은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도 그들의 효행을 표창하여 벼 삼백 석을 각각 상사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비록 제도로 시행하지는 않았으나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서 상당한 포상을 시행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효행은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도 지적했듯이, 꼭 성현의 가르침을 받아서가 아니라 성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기 때문에 더욱 값진 수행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하늘이 내린 규범을 그대로 받들어 수행하는 것이 참으로 인간다운 행동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러한 역사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되는바,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4. 시가 속에 나타난 효
우리의 문학사에서 시가(詩歌)하면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작가가 송강(松江) 정철(鄭澈)일 것이다. 그리고 송강하면 가사와 시조를 연상하게 되고, 송강의 시조하면 '훈민가(訓民歌)'를 생각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전하는 송강의 '훈민가'는 모두 16일수로 되어 있는바 그 중 효도에 관한 것으로는 다음의 2수가 있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 같은 가없은 은덕을 어대다혀 갚사오리.
이는 부모의 은덕을 깨닫고 효행을 제창한 작품이다. 비록 도학적이고 훈계적이기는 하나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작품이다.
어버이 살았일제 섬길 일만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달프다 어떠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부모님의 생전에 효행을 힘쓰라고 주장한 작품이다. 역시 교훈적이기는 하지만 읽어서 과히 싫지는 않은 작품이기 때문에 역대로 애창되어 왔던 것이다.
송강의 '훈민가'하면 곧 이어 떠오르는 작가와 작품으로 노계 박인로의 '오륜가' 30수가 있다. 그 중 '부자유친'이 5수로 되어 있다. 송강의 '훈민가'에 비하면 중국의 고사나 성어가 많아서 표현이 생경할 뿐 아니라 설득력도 훨씬 덜하다. 그러나 교육적인 목적으로 쓰인 만큼 효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도록 쓴 작품이기에 여기 그 전문을 소개하기로 한다.
아비는 낳으시고 어미는 날 치옵시니
호천망극이라 갚을 길이 어려우니
대순의 종신성효도 못다한가 하노라
인생 백 세 중에 질병이 다 있으니
부모를 섬기다가 몇 해를 섬길런고
아마도 못다한 성효를 일쭉 베퍼 보렸도다.
부모님 섬기기를 지성으로 섬기리라
계명에 관수하고 훤한을 묻자 오며
날마다 시측봉양을 몰신불쇠 하오리라
세상사람들아 부모은덕 아나산다
부모 곧 아니면 이 몸이 있을소냐
생사장제에 예로써 종시같게 섬겨서라
삼천 죄악 중에 불효에 더니 없다
부자의 이 말씀 만고에 대법 삼아
아무리 하우불이도 미쳐 알게 하렸도다.
이중 첫째 수와 둘째 수는 송강의 '훈민가'와 맞먹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셋째 수는 이른바 혼정신성(昏定晨省; 저녁에 자리에 들면서, 새벽에 잠이 깨었을 때 부모에게 문안드리는 것)이고, 넷째 수는 살아서 정성으로 부모를 모실 뿐 아니라 사후에도 장례와 제사를 지성으로 모시라는 것이다.
끝으로 다섯째 수는 불효는 이 세상 죄과 중에 가장 큰 죄라는 공자와 말씀을 인용하여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효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앞에서 본 '훈민가'나 노계의 '오륜가'는 교육을 목적으로 쓴 글이기 때문에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그 효과가 퍽 덜한 글들이다. 다만 입으로 가르치고 행동으로 일깨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외기 쉽고 알기 쉬운 이른바 노래의 형식을 빌어 효가 무엇인가를 알려주려는 대시인들의 노력과 정성을 이해함으로써 효가 우리의 전통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마치 현대의 우리 사회에서의 기독교 찬송가에 비유될 수 있는 것들이다. 비록 교회당에서의 의식은 없었으나 찬송가를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을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생각하듯이, 이 노래들은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효성의 도를 생각하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이 송강과 노계에 비하면 고산 윤선도의 작품에서는 훨씬 예술성이 강한 것이 있다. 그의 '전희요' 제4수에 다음과 같은 작품이 있다.
뫼흔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어버이 그런 뜻은 많고 많고 하고 하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나니
이 작품은 그가 멀리 함경도 경원 땅에 귀양살이를 할 때에 지은 것이다. 멀고 먼 적소에서 부모를 그리워하는 정이 전편에 넘쳐 흐르고 있다. 효도란 무엇이며 어찌하는 것이 효도라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 그러나 이 노래를 읽어보면 눈물이 저절로 쏟아질 정도로 부모에게 효성스러워야 한다는 설득력이 있다.
멀리 고향에서 귀양살이하는 아들의 신상을 걱정하고 계실 그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자식의 정성이 은연중에 번져 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어버이를 그리는 노래하면 유명한 사모곡을 뺄 수 없다. 이 노래도 작자와 저작 연대를 알 수 없는 고려 가요의 하나이다.
호매로 날히언라난
낫갈이 들리도 없으니이다
아버님도 어이어신 마라난
위 덩더둥서 어마님같이 괴시리 없애라
아소 님하, 어마님같이 괴시리 없애라
같은 아버이지마는 아버지의 사랑을 호미의 날에다가 비유하고 어머님의 사랑을 낫의 날에다가 비유하여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노래이다. 섬세하고도 날카로운 어머님의 사랑이 반복법으로 강조되어 있다. 한편 아버님의 사랑은 무디면서 후중한 것을 호미의 날로써 표현한 것은 아주 독창적인 표현이라 할 것이다.
호미이건 낫이건 아버지와 어머니를 극진히 생각하는 자식의 마음은 효성 없이는 형성될 수 없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여기 소개해 두는 바이다. 고려가요에서 또 효성에 관한 노래하면 '상처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들끼동 방해나 찧어 히애
게우즌 밥이나 지어 히애
아바님 어머님께 받잡고 히야해
남겨서든 내 먹으리라 히야해 히야해
정성으로 방공이를 내리치면서 부른 노래이다. 이 방아를 찧어서 우선 어머님 아버님께 밥을 급히 지어서 바칠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배불리 지신 후에 남기시면 나는 그 밥을 먹으리라는 것이다. 얼마나 순박하고 청정한 정성인가, 작중화자는 결코 유복한 사람 같지는 않다. 겨우 끼니를 잇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별로 교육도 받지 못한 것 같다. 말하자면 서민의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어느 고관 대작의 자식이 이처럼 극진하게 부모님을 위할 줄 알겠는가.
서민의 노래, 민중의 순박한 노래라면 우리는 민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전해지는 구전 민요에는 부모를 생각하고 효성을 노래한 작품들이 상당히 많다.
이농사를 어서지어/ 나라살림 보태주고/ 선영제사 받들어보세/ 우리부모 봉양하고/ 이웃사촌 돌봐주세/ 어히어히 어어히/ 어이어도 상사둬야.
이것은 전남 진도 지방에서 부르는 모심기 노래다. 비록 관념적이고 나열적이기는 하나 농사를 지어 부모 봉양을 하는 것이 농사의 목적으로 뚜렷이 나타나 있다. 대체로 구전 민요에서는 앞에서 든 예문과 비슷한 관념적인 내용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여기 다시 예문을 드는 번거로움을 덜기도 하겠다.
5. 마무리
서론에서도 말했듯이 오늘날의 효에 대한 가치관은 분명히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뚜렷한 가치 체계가 확립되지는 않고 있다고 보인다. 과연 앞으로 새로운 세대가 이 효의 문제를 어떻게 이어받아 발전시킬 것인가, 아니면 헌신짝처럼 버려 버릴 것인가는 그 들의 선택의 자유에 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가 국문학의 여러 장르들에 나타난 전통적인 효의 관념은 매우 집요하게 여러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러 왔음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효는 천성이라는 기본 태도가 우리의 문학 작품들에 능후하게 깔려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시사적인 암시를 던져주고 있는 것을 해석할 수 있다.
끝으로 우리가 하나 더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우리들 동양의 윤리 규범을 매우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의 가정 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효에 대한 그들의 희박한 태도를 비판하고 꾸짖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어 얼굴이 붉어지게 마련이다.
효를 단순한 미풍 양속이라든지 당위적인 규제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으로서의 규범이라는 각도에서 재검토할 것 같으며, 오늘날과 같은 혼미한 사회 풍조에 어떠한 청량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 우리들 기성세대의 솔직한 심경일 것이다.
우리들 기성세대는 결코 심청과 같은 무모한 효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맹종과 같은 기적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하늘에서 정해진 떳떳한 인간의 길을 우리의 청소년이 건실하게 걷기를 바랄 뿐이다. 증자의 효경을 한 번쯤은 통독해 보고 효를 생각해 보자. 심청의 인간으로서의 고민을 자기의 고민으로 체험해 보고 효를 생각해 보자. 이렇게 권하고 싶다.
효 교육의 출발점은 가정에서부터 시작
가정은 우리가 처음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곳이다. 어려서부터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며 세상의 온갖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한다. 의식주를 함께 하고 사회생활의 기초가 되는 생활양식을 배우며, 바람직한 인격을 형성해 나간다고 생각된다.
가정생활을 통하여 부모 자식, 형제 자매, 부부 간에 깊은 애정을 나누며 서로를 위해 준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각자의 행복을 추구해 간다.
가정은 사회를 이루는 최소단위로서 자신의 성격형성이나 태도, 가치관 등을 형성하고 지적 발달의 장이 된다. 가정은 우리 인간이 성장하는데 있어 가장 먼저 경험하는 공동생활의 장이요, 사회화의 첫 출발점이다.
가정이나 그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정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으며 오히려 그 중요성이 증대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건강한 가정과 행복을 추구한다. 집안 식구들이 밖에 나가 집으로 돌아올 때 “역시 우리 집이 최고다!”라며 탄성을 자아낸다.
이것은 빈겁데기에 불과한 건축물만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가정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무의식중에 내뱉는 경험상의 발로다. 그러나 가정의 소중함과 행복은 가족 구성원들의 사랑과 공경을 전제로 한다.
가정 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가족들의 사랑과 공경은 화합과 공생의 기초가 되며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한 활력소가 된다. 이런 점에서 가족들 간의 사랑과 공경을 강조하는 가정에서의 효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가정의 행복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명예를 가졌다고 해서 일어지는 것도 아니다. 가족 간에 서로 아기고 감싸주는 사랑과 공경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부모는 부모대로 제 역할을 하고, 자식은 자식대로 제 역할을 다해야 하며, 부부는 부부대로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또한 가족 구성원 서로 간에 예절을 지켜야 한다.
가끔 주변을 보면 부모와 자식 사이나 부부 사이에 가깝다고 예절을 소홀히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서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예절을 지킬 때, 가정의 화목을 유지할 수 있으며, 최소한 사람된 도리를 다하게 된다.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선과 악이 무엇읹를 배우며, 삶의 방법과 도리를 익히게 되는데 효 교육은 바로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가정의 모습은 사랑과 공경이라는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시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어 왔다.
전통사회의 가정은 가족 구성원들의 끈끈한 사랑을 바탕으로 의식주 문제에서 부터 교육문제나 여가활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를 가정에서 해결해 왔다. 가정생활은 가부장 중심으로 운영 되었으며 가장의 권한이 절대적이었다.
가족 구성원들은 부자, 장유, 남녀 구별에 따라 각자의 지위와 역할이 정해졌고, 집안마다 어른들로부터 예절교육을 비롯한 인간됨 교육을 받았다.
특히, 조상들은 가정 윤리의 핵심을 효(孝)라고 생각하며 모든 행동의 근본으로 삼았고, 사람이라면 반드시 실천해야 할 도리라 생각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가정의 모습도 크게 달라졌다. 현대사회의 가정은 도시화가 가속화 되면서 대부분의 가정이 핵가족화 되었다.
맞벌이 부부의 증가와 자녀의 입시문제가 가정교육의 핵심을 이루면서 전통적으로 누려왔던 가장의 절대권은 붕괴되었고 부부중심 또는 자녀중심의 가정으로 변모하고 있다.
가족 구성원 간의 역할과 관계에서도 민주적인 평등관계를 강조하게 되었고 가정의 교육기능도 축소되었다. 하지만 핵가족화의 심호로 노인문제가 발생하고 가족 이기주의가 팽배하는 등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은 사회를 이루는 기본 단위로서 인간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하는 공동생활의 장일 뿐 아니라 일생을 통해서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성격 형성의 모태이다.
가정은 몇 명의 가족 구성원이 만나는 인간관계를 넘어서서, 그 가정이 속한 사회의 문화와 규범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라나는 동안에 아동은 자신의 역할과 능력을 깨닫게 되고 다른 사람의 정서적 반응 속에서 자기 자신의 심리 발달을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의 성격, 도덕성, 효심, 효행은 태어날 때부터 일정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태어난 가정의 문화적 환경과 교육에 영향을 받는다. 그럼으로 가정에서의 효 교육은 학교 교육이나 사회교육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효덕지본(孝德之本)
효는 덕의 근본이다.
1. 무너진 효의 나라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 일컬었다. 이는 중국인들의 중화 중심의 세계관에서 주변 민족들을 모두 오랑캐로 취급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예의와 염치를 아는 나라로 조선을 꼽았다는 점이다. 중화 중심 사상에서 보면 그리 달갑지 않은 말일 수 있지만 어쨌든 예의를 숭상하는 나라라는 것만큼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면 왜 동방예의지국이라 했을까? 그렇게 이름을 붙인 이유의 근본 바탕에는 효를 숭상하고 실천하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이어져 온 중화사상의 기본적인 틀은 동양 삼국 특히 한국과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오늘날까지 그 영향이 크다. 사상은 그 기원이 어디에 있든지 그것을 받아들이고 문화화한 이후부터는 그 시원을 가리기 전에 우리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로마의 신화와 사상이 유럽의 신화와 사상으로 자리 잡고 오늘날 서양문명의 정신적 토대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한자 문화, 중국 고대 문화의 수용을 통한 한국화는 지극히 문화의 자주화라 할 수 있다.
중국이나 한국의 고대 정신문화의 토대는 천명사상(天命思想)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천명사상은 덕이 있는 군자에게 하늘이 명을 내려 나라를 다스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그를 천자(天子)라 일컬었다. 이 천명사상에서 말하는 군자의 덕(德)이란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덕치(德治)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천명사상에는 만약 군주가 덕치를 하지 않고 백성을 핍박하면 하늘이 분노(忿怒)하여 군주를 내쫓고 새로운 군주를 세우는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정당화된다. 그런데 이러한 천명사상은 우리 고유의 정치사상이기도 하다. 우리의 단군신화 역시 그 천명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단군신화는 하늘의 명을 받아 신시를 베풀었다. 그 하늘의 명은 홍익인간의 실천이며 모든 정치의 중심은 홍익인간의 실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군주는 덕을 베풀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천명을 어기는 것으로 군주의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우리의 전통 사상에도 역성혁명은 정당화되었다. 그래서 천명사상이나 홍익인간의 중심에는 덕치 사상(德治思想)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덕치사상(德治思想)의 실천을 위해서는 관계가 잘 정립되고 관계 속에서 본분을 다하여야 한다. 그 관계의 중심 윤리를 정리한 것이 바로 삼강오륜이었다. 그리고 그 기초에는 부자 관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부자지간은 사랑과 공경이 기본이다. 그중에서도 자기의 근원에 대한 공경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 근원에 대한 공경이 곧 효(孝)이다. 그래서 덕치사상의 기저에는 효치사상(孝治思想)이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효는 모든 행실의 근본이라는 사상으로 자라 잡았다. 공자가 대학(大學)에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강조한 것에서의 수신(修身)도 효로부터 출발하였다. 효가 없는 수신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효는 그처럼 우리 민족 전통의 삶과 수양, 통치의 중심에 있는 사상이었다.
조선의 성군(聖君)이었던 세종대왕이나 정조대왕은 대단한 효자였다. 그들의 모든 통치행위의 근저에는 효가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종의 용비어천가는 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정조대왕의 수원화성 역시 효에 기반을 두고 있다. 효에 기반을 둔 천명사상의 실천은 곧 백성을 향한 인의(仁義)의 정치로 이어졌다. 이처럼 효는 매우 중요한 우리 민족의 전통 정신이었으며, 우리 민족은 비록 가난할지언정 효를 숭상하고 실천해 왔다.
그러나 근대화가 되면서 우린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물리치고 문명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소중한 민족의 전통 정신문화의 유산을 내팽개쳤다. 지금 우리나라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노인들은 갈 곳을 잃고 젊은이들은 혼인하지 않으며, 출산율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 어쩌면 문명화는 인간의 가장 소중한 기저에 있는 인륜을 지키는 일과 반비례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 같다.
6월 15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노인학대 예방의 날이다. 유엔까지 나서 이런 날을 제정하였다는 것은 노인학대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음을 말해 준다. 노인 학대는 신체적, 정서적, 성적 학대를 넘어 경제적 학대, 유기, 방임까지 포함한다. 이런 일들이 매년 엄청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지인에게 재산을 빼앗기거나 경제적 거래, 계약 시 명의를 도용당한 경험이 있는 노인이 미국에서는 60대 이상 노인 10명 중 1명, 캐나다에서는 25만 명에 달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들의 상당수는 자식에게 주택 명의를 넘겨준 뒤 집에서 쫓겨나 쉼터나 친척 집을 전전한다는 것이었다. 노인학대의 대표적인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였다.
한국은 다를까? 한국에서도 노인 학대는 매년 증가 추세다. 2020년 한 해에 6,259건의 학대 사례가 발생했다. 경제적 학대 피해는 연평균 400건을 넘는다. 노인 연금과 복지 지원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와 관련된 사기, 절도 피해도 늘어난다. 2022년 4월 경기 수원에서는 치매를 앓는 80대 노모의 연금보험료 1억 원을 가로채 생활비, 유흥비 등으로 쓴 50대 딸과 20대 손녀들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한국은 더 심각하다. 한국은 2025년이면 ‘초고령사회’로의 진입이 예상된다. 그만큼 노인 학대는 늘어날 전망이다. 노인 학대의 중심에는 돈이 도사린다. 한국의 노인 자살률은 세계 1위이다.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도 세계 1위이다. 그만큼 노인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증거다.
우린 여기서 문명화란 말을 다시 성찰해야 한다. 문명화라는 것이 경제적 풍요를 말하는 것으로 대체된 것 같다. 그래서 문명화할수록 소중한 정신적 가치를 팽개치는 것 같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효인 것 같다. 우린 지금 효를 내세우면 꼰대가 된다. 이제 노인은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 어떻게 이런 세상이 되었나? 전통적으로 자랑하던 효의 나라가 무너지고 있다. 아니 이미 무너졌다.
2. 효덕지본(孝德之本), 효생지본(孝生之本)
효는 덕의 근본이자 삶의 근본이다. 효는 가정을 이루고 삶을 가꾸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가정의 화합과 화목은 효로부터 비롯된다고 하였다. 가정은 모든 공동체의 기본이며 가정이 잘 다스려져야 세상이 편안해진다. 그것이 곧 덕치다. 덕치란 통치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 모든 사람은 가정에서 출발하여 세상에 나아가 일을 하고 세상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효가 덕의 근본인 것은 그러한 연유이며 삶의 근본인 것도 그런 연유이다. 가정이 파괴되면 덕도 삶도 파괴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효치 사상을 중심으로 모든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확장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학문과 통치의 출발을 효로 보았다. 공자의 어록을 정리한 논어(論語)나 공자가 강조한 효의 어록을 정리한 효경(孝經)의 저변에 흐르는 중심 사상인 인의 핵심도 효에 있다.
공자께서 어느 날 모든 일을 벗어나 한가로이 있었다. 이를 본 증자(曾子)가 가까이 다가가 곁에 앉아 공자를 모셨다. 그때 공자께서 말씀하였다. “삼아, 선대의 성왕들께서는 지극한 덕(德)과 사람으로서 반드시 실천하여야 할 도(道)를 갖추고 계셨으며, 그것으로 천하(天下의 만민(萬民)을 가르치고 인도하셨다. 그래서 백성들은 서로 화목하였고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서로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 너는 그 지극한 덕(德)과 중요한 도(道)가 무엇인지를 아느냐?”
증자가 자리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삼은 총명하지 못합니다. 어찌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공자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무릇 효(孝)라는 것은 덕의 근본이며 선왕들이 가르치신 것도 바로 그 효(孝)에서 비롯된 것이니라.”
仲尼閒居 曾子待坐 子曰 參 先王有至德要道 以訓天下 民用和睦 上下亡怨 女知之乎 曾子避席曰 參弗敏 何足以知之乎 子曰 夫孝德之本也 敎之所繇生也
- 효경(孝經) 제1장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 -
위에서 삼(參)은 증자의 이름을 말한다. 증자(曾子)는 본래 성은 증(曾)이고 이름은 삼(參)이었다. 증자(曾子)의 자(子)는 뒷날 그의 학식과 덕망이 출중하여 증자의 제자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시좌(待坐)는 제자나 아랫사람이 스승이나 윗사람을 지극한 자세로 모시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증자는 늘 공자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다. 이는 증자의 겸손한 제세를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증자는 대단한 효자였으며 겸손하였다. 선왕(先王)은 글자 상으로는 선대의 왕들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중국 고대의 성왕(聖王)으로 추앙받는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文) 무(武) 등을 일컫는다. 이들은 모두 덕과 효로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평화롭게 한 성인 군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선왕들은 지덕요도(至德要道)의 상징으로 숭상되어 왔다.
지덕요도(至德要道)에서 지덕(至德)은 선왕인 성왕(聖王)들이 보여준 지극한 덕(德)으로 이를 갖추면 하늘이 감복하여 복과 지혜를 내려준다. 요도(要道)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중요한 도리를 말하는 것으로 효도(孝道)를 지칭한다. 효는 모든 덕의 근원이므로 지덕(至德)과 요도(要道) 모두 효에서 비롯되었으며 효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이훈천하(以訓天下)에서 훈(訓)은 가르쳐 깨우친다는 것으로 효를 가르쳐 세상 사는 이치를 깨우쳐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효에는 세상 사는 이치 모두가 담겨 있음을 강조한 것이며 천하(天下)는 우주의 의미지만 한나라 즉 백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훈천하(以訓天下)는 백성에게 효를 가르쳐 세상 이치를 깨우치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효로써 깨우침을 받은 백성들은 이치를 터득하고 염치를 알게 되므로 백성들은 서로 화목하였고(民用和睦)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서로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上下亡怨)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여지지호(女知之乎) 즉 너는 그것을 알겠느냐?”에서 여(女)는 너(汝)를 가리킨다. 지(之)는 선왕의 지덕요도(至德要道)를 지칭한다. 증자가 자리를 뜨면서 “저는 불민(弗敏) 즉 총명하지 못합니다”라고 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증자가 피석(避席)한 것과 함께 겸손한 증자의 자세를 강조한 것이다.
공자는 위와 같이 설명한 모든 이유를 들어 “부효덕지본야 교지소요생야(夫孝德之本也 敎之所繇生也 무릇 효(孝)라는 것은 덕의 근본이며 선왕들이 가르치신 것도 바로 그 효(孝)에서 비롯된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이는 효를 모든 것의 근본에 두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전한 초기의 학자로 공자의 11세손으로 알려진 공안국(孔安國, ? ~ ?)은 고문효경서(古文孝經序)를 썼다. 이글에서 그는 효(孝)란 고행(高行)이며 경(經)은 상(常)이라 했다. 여기서 고행(高行)은 고매한 행위로 사람으로서 품격있는 행위를 말하며, 상(常)은 변치 않는 일상의 도리(道理)를 말한다. 따라서 효경은 사람을 고매한 품격으로 만드는 일상의 도리를 말한 것이다(孝經者何也 孝者 人 之따高行 經常也) 따라서 효는 덕의 근본(덕지본 德之本)뿐 아니라 삶의 근본(생지본 生之本)이 된다.
3. 효의 나라 재건을 위하여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다. 옛말에 버릇없이 못되게 구는 사람을 ‘호로자식’이라 하였다. 이는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부모를 욕 먹인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하나의 왕조를 이끄는 국왕이 덕치를 행하지 못하여 비난을 받고 왕위에서 쫓겨나면 선대의 모든 업적을 무너뜨린다. 선대의 업적을 기리고 영원히 이어가기 위해서는 국왕이 행실을 바르게 하고 덕을 베풀어야 한다. 한 집안의 자식도 마찬가지이다.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가정을 파멸하고 조상을 욕 먹인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행실을 바르게 하고 사람의 본분을 다하여야 한다.
부모는 늘 자식의 건강과 안위를 걱정하며, 가정을 이루고 복되게 살기를 바란다. 사람의 본분을 다하여 살며, 행실이 바르고 열심히 노력하여 세상에 이름을 빛내기를 바란다. 그것이 봉양이며 그런 행함이 있는 가운데 봉양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식이 자기 관리를 못하여 몸이 아프거나 일찍 죽으면 최대의 불효가 되고,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세상으로부터 지탄받거나 처벌되면 부모는 가장 가슴 아프게 여긴다. 입신양명(立身揚名) 즉 세상에 나아가 이름을 빛내는 일은 차후의 문제이다. 따라서 효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효의 정신을 다시 깨우는 것은 단순한 전통 정신을 살리는 길을 넘어서는 인간 보편의 진리와 고매한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효를 실천하는 것은 고행(高行_ 즉 고매한 행동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효의 기본은 수신(修身)에 있다. 수신의 중심은 몸과 마음을 수양하여 건강하게 하는 일이다. 몸과 마음의 건강은 삶을 이끄는 중심이며 생명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근본이다. 따라서 이를 등한시 하는 것은 삶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다음으로 효를 이루고 삶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 건강한 가정을 이루는 일은 인간이 물려받은 순리이다. 건강한 가정을 이루려면 결혼을 하여야 한다. 결혼하여 자녀를 출산하고 바르게 기르는 것은 인간의 순리이며 천명(天命)이다. 문명의 논리, 자유의 논리로 이를 거역하는 것은 인간의 순리를 거역하는 지극히 오만한 것으로 매우 작위적인 논리이다.
그리고 부모를 받들어 모셔야 한다. 그것은 자기의 근원에 대한 존중이며 현존하는 자신에 대한 존중이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문명화란 이름으로 도시화 되고 지나치게 자본주의화 되어 부모를 모시기가 참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고 돈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니 세상은 각박해졌다. 그리고 부모를 버리고 노인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 그것은 삶의 문제를 넘어 가치의 문제이다. 지금 세상의 가치가 모든 것의 우위에 나와 돈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과 돈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소중한 정신적 가치를 우선할 수 있겠는가? 문명국이란 기술과 자본만 발전한 것이 아니라 문화와 사람 사는 가치가 발전된 나라일 것이다. 문명인의 삶도 그럴 것이다. 모든 사람의 삶은 타인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공동체 안에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영향이 선한 영향이라야 세상은 아름다워지고 아름다운 삶이 전개된다.
옛날 사람들은 마을에서나 집안에서 중요한 행사를 할 때 “내 몫”을 먼저 챙겼다. 그 “내 몫”은 자기가 먹을 것이 아니라 부모나 집안 어른, 나아가 동네 어른의 몫을 말한다. 그래서 돼지를 잡거나 좋은 음식을 만들면 부드럽고 맛있는 부분을 먼저 챙겨 놓았다가 갖다 드렸다. 그것이 왜 “내 몫”이었을까? 여기에는 삶과 도리의 순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내가 부모와 어른을 받들고 모셔야 나중에 후손들도 나를 그렇게 받들어 모신다는 것이다. 본보기 문화이다. 효자의 집안에서 효자가 나오고 불효자의 집안에서 불효자가 나온다는 것과 같은 맥락의 순환 논리가 작용한 것이다.
2022년 또 한 해가 저문다. 수많은 사람이 객지에서 살아가고 수많은 노인이 자녀들을 그리워하며 홀로 지낸다. 이 시점에 젊은이들도 노년에 대하여 한 번쯤 성찰해 보는 기회를 가지면 참 좋겠다. 누구에게나 노년은 오기 마련이며 어쩌면 삶은 노년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머지않아 초고령사회로 진입한다. 노년의 삶이 고달프고 노인들이 빈곤하며 노인들이 학대받는 세상은 젊은이들이 취업하기 어려운 세상보다 더 비참한 사회일 수 있다. 범국가적으로도 효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제 효는 자녀라는 한 개인,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이며 국가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효는 실천 방법은 전통적인 것과 다를지라도 정신은 같다.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문명화와 함께 점점 퇴락해가는 효의 정신을 다시 살리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젊은이들이 더 건강하게 더 성실하게 살아가며,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출산할 수 있는 마음으로의 가치 전환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젊은이들도 늙음에 대하여 성찰하는 게기가 있었으면 더 좋겠다. 그 운동이 젊은이들로부터 생겨나면 더욱 건강한 세상이 될 것 같다. 공자가 왜 효는 덕의 근본이며 모든 행실의 근본이라 했을까? 효의 나라, 동방예의지국의 재건을 위하여 노력해 보자.
▶️ 孝(효도 효)는 ❶회의문자로 耂(로; 노인)와 子(자; 아들)의 합자(合字)이다. 아들이 노인을 잘 봉양하는 뜻에서 부모나 조상을 잘 섬김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孝자는 ‘효도’나 ‘부모를 섬기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孝자는 耂(늙을 노)자와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子자가 耂자 아래에 있으니 글자의 구성으로만 본다면 아들이 노인을 등에 업은 것과도 같다. 그런데 금문에 나온 孝자를 보면 백발이 성한 노인과 어린아이가 함께 노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어른을 모시고 함께하는 것이 孝의 근본이라는 것을 말하는 글자임은 틀림없다. 그래서 孝(효)는 (1)부모를 잘 섬기는 일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효도(孝道) ②상복(喪服: 상중에 있는 상제나 복인이 입는 예복) ③제사(祭祀) ④맏, 맏자식 ⑤부모를 섬기다, 효도하다 ⑥본받다 ⑦상복(喪服)을 입다, 거상(居喪)하다 ⑧제사(祭祀) 지내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효성이 지극한 딸을 효녀(孝女), 부모를 잘 섬기는 마음을 효덕(孝德), 효행이 있는 며느리를 효부(孝婦), 효행이 있는 손자를 효손(孝孫), 효성스러운 마음을 효심(孝心),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를 효우(孝友), 효행을 다하는 마음을 효지(孝志), 부모를 잘 섬기고 공경함을 효경(孝敬),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효도를 효은(孝恩), 어버이를 잘 섬기는 행실을 효행(孝行), 부모를 잘 섬기는 도리를 효도(孝道), 마음껏 어버이를 잘 섬기는 정성을 효성(孝誠), 효행이 있고 유순함을 효순(孝順), 어버이를 효행으로 봉양함을 효양(孝養), 어버이에게 효도함을 효친(孝親), 봉양할 줄 아는 새라는 뜻으로 까마귀를 달리 일컫는 말 효조(孝鳥), 부모에게 자식된 도리를 못함을 불효(不孝),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충효(忠孝), 어버이를 잘 섬김을 극효(克孝), 한결같고 변함없는 효도를 달효(達孝), 지극한 효도 또는 지극한 효자를 대효(大孝), 순종하여 효성을 다함을 순효(順孝),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는 효도를 영효(榮孝), 어버이의 애정과 자식의 효도를 자효(慈孝), 지극하고 돈후한 효행을 독효(篤孝), 부모를 섬길 때에는 마땅히 힘을 다하여야 함을 이르는 말을 효당갈력(孝當竭力), 효자는 날을 아낀다는 뜻으로 될 수 있는 한 오래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여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을 효자애일(孝子愛日), 효자가 난 가문을 일컫는 말을 효자지문(孝子之門), 어버이에 대한 효도와 형제끼리의 우애와 임금에 대한 충성과 벗 사이의 믿음을 통틀어 이르는 효제충신(孝悌忠信), 까마귀 새끼가 자란 뒤에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효성이라는 뜻으로 자식이 자라서 부모를 봉양함을 일컫는 말을 반포지효(反哺之孝),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의 세속오계의 하나로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써 함을 이르는 말을 사친이효(事親以孝), 부모는 자녀에게 자애로워야 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성스러워야 함을 이르는 말을 부자자효(父慈子孝), 백유의 효도라는 뜻으로 어버이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일컫는 말을 백유지효(伯兪之孝), 부모에게 불효하는 일에 세 가지가 있다는 뜻으로 첫째 부모에게 영합하여 불의에 빠지게 하는 일 둘째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어도 벼슬하지 않는 일 셋째 장가가지 않고 자식이 없어 선조의 제사를 끊는 일의 세 가지를 일컫는 말을 불효유삼(不孝有三), 효자가 죽은 부모를 너무 슬피 사모하여 병이 나고 혹은 죽음을 일컫는 말을 이효상효(以孝傷孝), 항상 부모의 뜻을 받들어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효행을 일컫는 말을 양지지효(養志之孝), 하늘이 낸 효자라는 뜻으로 지극한 효성을 이르는 말을 출천지효(出天之孝) 등에 쓰인다.
▶️ 德(큰 덕/덕 덕)은 ❶형성문자로 悳(덕)의 본자(本字), 徳(덕), 惪(덕)은 통자(通字), 㥀(덕), 恴(덕)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두인변(彳; 걷다, 자축거리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悳(덕)으로 이루어졌다. 悳(덕)은 바로 보다, 옳게 보는 일이고, 두인변(彳)部는 행동을 나타내고, 心(심)은 정신적인 사항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德(덕)은 행실이 바른 일, 남이 보나 스스로 생각하나 바람직한 상태에 잘 부합하고 있는 일을 뜻한다. 본디 글자는 悳(덕)이었는데 나중에 德(덕)이 대신 쓰여졌다. ❷회의문자로 德자는 '은덕'이나 '선행'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德자는 彳(조금 걸을 척)자와 直(곧을 직)자,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금문에 나온 德자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德자는 사람의 '행실이 바르다'라는 뜻을 위해 만든 글자이다. 그래서 直자는 곧게 바라보는 눈빛을 그린 것이고 心자는 '곧은 마음가짐'이라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길을 뜻하는 彳자가 있으니 德자는 '곧은 마음으로 길을 걷는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길'이란 우리의 '삶'이나 '인생'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니 德자는 곧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德(덕)은 (1)공정하고 포용성 있는 마음이나 품성(品性) (2)도덕적(道德的) 이상(理想) 또는 법칙(法則)에 좇아 확실히 의지(意志)를 결정할 수 있는 인격적(人格的) 능력(能力). 의무적(義務的) 선(善) 행위를 선택(選擇), 실행(實行)하는 습관(習慣). 윤리학(倫理學) 상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임 (3)덕분 (4)어떤 유리한 결과를 낳게 하는 원인(原因) (5)공덕(功德) 등의 뜻으로 ①크다 ②(덕으로)여기다 ③(덕을)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④고맙게 생각하다 ⑤오르다, 타다 ⑥덕(德), 도덕(道德) ⑦은덕(恩德) ⑧복(福), 행복(幸福) ⑨은혜(恩惠) ⑩선행(善行) ⑪행위(行爲), 절조(節操: 절개와 지조를 아울러 이르는 말) ⑫능력(能力), 작용(作用) ⑬가르침 ⑭어진 이, 현자(賢者) ⑮정의(正義) ⑯목성(木星: 별의 이름) ⑰주역(周易) 건괘(乾卦)의 상,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클 태(太)이다. 용례로는 덕이 높고 인망이 있음을 덕망(德望),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을 덕행(德行), 덕행과 선행을 덕선(德善), 좋은 평판을 덕용(德容),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 사귀는 벗을 덕우(德友), 덕행으로써 교화함을 덕화(德化), 덕이 두터움을 덕후(德厚), 덕의를 갖춘 본성을 덕성(德性), 덕으로 다스림을 덕치(德治), 잘 되라고 비는 말을 덕담(德談), 남에게 미치는 은덕의 혜택을 덕택(德澤),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씨를 덕량(德量), 도리에 닿은 착한 말을 덕음(德音),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도덕(道德), 아름다운 덕성을 미덕(美德), 여러 사람을 위하여 착한 일을 많이 한 힘을 공덕(功德), 집안을 망치는 못된 언동을 망덕(忘德), 사람이 갖춘 덕 또는 사귀어 서로 도움을 받는 복을 인덕(人德), 아름다운 덕행을 휴덕(休德), 이랬다저랬다 변하기를 잘하는 성질이나 태도를 변덕(變德), 착하고 바른 덕행을 선덕(善德), 항상 덕을 가지고 세상일을 행하면 자연스럽게 이름도 서게 됨을 이르는 말을 덕건명립(德建名立), 덕행이 높고 인망이 두터움을 일컫는 말을 덕륭망존(德隆望尊), 덕을 닦는 데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는 뜻으로 마주치는 환경이나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수행에 도움이 됨을 이르는 말을 덕무상사(德無常師), 사람이 살아가는 데 덕이 뿌리가 되고 재물은 사소한 부분이라는 말을 덕본재말(德本財末), 덕이 있는 사람은 덕으로 다른 사람을 감화시켜 따르게 하므로 결코 외롭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덕불고(德不孤), 덕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이 있으므로 외롭지 않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 좋은 행실은 서로 권장하라는 말을 덕업상권(德業相勸), 덕망이 높아 세상 사람의 사표가 된다는 말을 덕위인표(德爲人表), 덕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이 있어 외롭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덕필유린(德必有隣)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 本(근본 본)은 ❶지사문자로 木(목; 나무) 아래쪽에 표를 붙여 나무의 뿌리 밑을 나타낸다. 나중에 나무에 한하지 않고 사물의 근본(根本)이란 뜻으로 쓰였다. ❷지사문자로 이미 만들어진 상형문자에 선이나 점을 찍어 추상적인 뜻을 표현하는 것을 지사문자(指事文字)라고 한다. ‘근본’이나 ‘뿌리’를 뜻하는 本(근본 본)자는 전형적인 지사문자에 속한다. 이미 만들어져 있던 木(나무 목)자의 하단에 점을 찍어 나무의 뿌리를 가리키는 本자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本자는 나무의 뿌리 부분을 가리킨 지사문자로 나무를 지탱하는 것이 뿌리이듯이 사물을 구성하는 가장 원초적인 바탕이라는 의미에서 ‘근본’을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本(본)은 (1)자신(自身), 이의 뜻으로 쓰는 말 (2)영화(映畫) 필름 등의 한 편(篇)을 세는 단위(單位) 등의 뜻으로 ①근본(根本) ②초목의 뿌리 ③초목의 줄기 ④원래(元來), 본래(本來), 본디 ⑤근원(根源), 원천(源泉) ⑥본원(本源), 시초(始初) ⑦마음, 본성(本性) ⑧주(主)가 되는 것 ⑨바탕 ⑩자기(自己) 자신(自身) ⑪조상(祖上), 부모(父母), 임금 ⑫조국(祖國), 고향(故鄕) ⑬본, 관향(貫鄕: 시조(始祖)가 난 곳) ⑭그루(초목을 세는 단위) ⑮판본(版本) ⑯본(서화를 세는 단위) ⑰책, 서책(書冊) ⑱원금(元金), 본전(本錢) ⑲본가(本家) ⑳농업(農業), 농사(農事) ㉑근거하다, 근거(根據)로 삼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비로소 시(始), 뿌리 근(根),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끝 말(末)이다. 용례로는 사물이나 현상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성질을 본질(本質), 자기 바로 그 사람을 본인(本人), 어떤 기관이나 단체의 중심이 되는 조직이나 그 조직이 있는 곳을 본부(本部), 신문 기사에서 일컫는 그 신문 자체를 본보(本報), 자기가 관계하고 있는 신문을 본지(本紙), 잡지 따위에서 중심이 되는 난을 본란(本欄), 시조가 난 땅을 본관(本貫), 사물의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는 부분을 본말(本末), 변하여 온 사물의 처음 바탕을 본래(本來), 근본에 맞는 격식이나 규격을 본격(本格), 본디의 마음을 본심(本心), 자기에게 알맞은 신분을 본분(本分), 애당초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뜻을 본의(本意), 사람이 본디부터 가진 성질을 본성(本性), 강이나 내의 원줄기를 본류(本流), 본디 그대로의 것을 본연(本然), 생활의 근본이 되는 주된 사업이나 직업을 본업(本業), 사물의 생겨나는 근원을 근본(根本), 사업의 기본이 되는 돈으로 이윤을 얻기 위하여 쓸 재화를 자본(資本), 사물의 근본을 기본(基本), 무대 모양이나 배우의 대사 따위를 적은 글을 각본(脚本), 금석에 새긴 글씨나 그림을 그대로 종이에 박아 냄을 탁본(拓本), 나라의 근본을 국본(國本), 원본을 그대로 옮기어 베낌 또는 베낀 책이나 서류를 사본(寫本), 원본의 일부를 베끼거나 발췌한 문서를 초본(抄本), 문서의 원본의 내용을 그대로 베낌 또는 그런 서류를 등본(謄本), 조각한 판목으로 인쇄한 책을 각본(刻本), 근원을 뽑아버림을 발본(拔本), 자기 집에 편지할 때에 겉봉 표면에 자기 이름을 쓰고 그 밑에 쓰는 말을 본제입납(本第入納), 사람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심성이란 뜻으로 지극히 착하고 조금도 사리사욕이 없는 천부 자연의 심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본디의 관념을 본유관념(本有觀念), 일이 처음과 나중이 뒤바뀜을 본말전도(本末顚倒), 본디 내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뜻밖으로 얻었던 물건은 잃어 버려도 서운할 것이 없다는 말을 본비아물(本非我物), 사람마다 갖추어 있는 심성을 본래면목(本來面目), 근본과 갈린 것이 오래 번영한다는 뜻으로 한 가문이 오래도록 영화로움을 본지백세(本支百世), 기본이 바로 서면 길 또한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뜻을 나타냄을 본립도생(本立道生), 근본을 빼내고 원천을 막아 버린다는 뜻으로 사물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그 뿌리째 뽑아 버림을 이르는 말을 발본색원(拔本塞源), 사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다는 뜻으로 사물의 질서를 일컫는 말을 물유본말(物有本末), 어떠한 것의 근본을 잊지 아니함을 불망기본(不忘其本)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