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 (2014. 4.27) 말씀 / 누가복음 7:11-17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어느 날 예수님이 나인이란 성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또 다른 무리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행렬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행렬은 예수님을 선두로 따르는 생명의 행렬이었고, 또 하나는 죽은 자를 따르는 죽음의 행렬이었습니다. 하나의 행렬은 밝고 힘이 있었고, 다른 행렬은 어둡고 무력하고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인생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이 두 가지 행렬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의 행렬이고 또 하나는 생명의 행렬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죽음의 행렬에 끼어 어둡고 슬프고, 절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 행렬에는 대통령도 장관도 과학자도 노동자, 거리의 행려자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 행렬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가 죽음의 앞에서 “애고, 애고” 곡하며 슬피 울게 됩니다. 인생이 아무리 세상에서 부와 권세를 누린다 할지라도 죽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으로 끝납니다. 본문을 보면 한 과부도 이런 죽음의 행렬 속에서 울며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 죽은 자는 그 어미의 독자였습니다. 꽃도 피지 못한 청년이었습니다. 10대인지 20대인지 알 수 없지만 보는 이들도 안타깝게 하였습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청년들은 큰 포부를 갖지 않으면 안 되고, 미래를 지향하고, 어떤 위대한 인간도 될 수 있는 그 가능성을 내포하고, 청년의 가슴엔 끝없는 희망이 부풀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 이 청년도 처음에는 그런 포부를 갖고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어미에게는 소망이요, 기쁨이요, 힘이요, 존재의미였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소망도 저버리고 싸늘한 시신으로 굳어져버렸습니다. 이 과부 어미의 슬픔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성경은 사망을 하나의 권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권세는 폭군의 권세입니다. 생후 몇 달 안되는 아이도 죽이고, 높은 권좌에 앉아 세상 사람들을 좌지우지 하는 사람도 끌어내리고, 이제 결혼한지 얼마 안 되어 행복하게 살려는 신혼 부부도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꿈과 비전 속에 자라나는 아까운 청년들도 사정 없이 물 속에 수장시키는 아주 잔인한 폭군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죽음 앞에 아무도 저항하지도 못합니다. 그 죽음이 지나간 자리는 탄식과 오열과 절망 뿐입니다. 이번 세월호 침몰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어떤 부모가 있었는데 인터뷰하면서 죽은 아들이 외동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신은 모든 것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아들이 제주도 가서 운동화 사준다고 했는데 "이제 운동화 달아났네 달아났네"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었습니다. 그리고 당사자들 뿐 아니라 그 죽음의 여파도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이 사고 후에 어떤 부부는 주말 외출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어린이 날을 맞춰 다섯 살 아이 선물을 위해 백화점에 가려던 계획을 취소했습니다. 주말이면 하던 외식도 건너 뛰었습니다. 지인이 만나자는 연락도 뚝 끊겼습니다. 전 국민이 집단 트라우마 상태에 빠져 지갑을 닫았습니다. 기업들도 가정의 달인 5월 일본의 골든 위크 휴가, 중국의 노동절 을 앞두고 공격적 마케팅을 펼치려던 계획을 연기하거나 취소했습니다. 전국 대형 마트 매출도 줄었습니다. 신문에는 썰렁한 마트, 멈춰선 관광 버스라는 기사에 사진이 실렸습니다. 목포 흑산도를 잇는 여객선은 사고 후 700명이 예약을 취소했습니다. 여수에서 거문도를 연결하는 여객선은 취소율이 80%입니다. 5.1일부터 열리는 관광 주간도 비상이 걸렸습니다. 지역 축제 150여개 중 함평 나비축제 등 50여개가 취소되고 연기 되었습니다. 특히 즐겁게 노래하고 춤을 추어야 할 가요계는 지금 잔인한 4월이라고 합니다. 무대도 없고 음원 소비도 줄고 콘서트 등 줄줄이 취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의 여파입니다. 죽음의 권세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역사 속에 영웅호걸들도 이 죽음 앞에 다 무너졌습니다. 위대한 예술가들도 이 죽음 앞에서 붓을 놓았습니다. 이런 죽음만 없다면 얼마나 좋을 까요? 세상에 권세자들 돈 많은 부자들이 죽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건강에 좋고 정력에 좋고 오래 산다고 하면 한국 사람들 무엇이던지 먹으려고 합니다. 오스왈드 스미스의 비유 가운데 죽은 자 한 사람을 놓고 여러 사람들이 살리려고 애쓰는 내용이 나옵니다. 묘방을 가졌다는 유명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첫 번 째 사람은 사자를 앞에 두고 심오한 인생철학을 하루 종일 강론했습니다. 그러나 사자는 무반응이었습니다. 그 다음 대종교가가 와서 죽음보다 강한 의지와 신념을 불어넣으며 일어나라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사자는 말이 없었습니다. 다음에는 생명 과학자들과 의사들이 와서 수술과 주사와 온갖 묘약을 다 썼습니다. 역시 죽음은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과학자도, 철학자도, 종교가도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어떤 누구도 죽음이 쏘는 고통과 슬픔에서, 절망과 좌절, 허무에서 다른 사람을 해방시킬 자는 없습니다. 나인성 과부 여인도 이런 죽음이 주는 무력 감 앞에서 애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을 이기실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가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능히 죽은 자를 능히 일으킬 수 있고, 사망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아멘! 성경은 말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 예수님이 과부 여인의 장례 행렬로 다가오셨습니다. 과부를 불상히 여기사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의 관게 손을 대셨습니다. 멘 자들이 멈추어섰습니다. 예수님은 관을 향해 말씀 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4)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명하시자 죽은 청년은 즉시 잠에서 깨듯 살아났습니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가우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게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15) 할렐루야! 우리가 죽지 않고 사는 길은 예수님의 음성을 날마다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없는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고 절망이라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에는 육신은 살았지만 영혼이 죽어 관 속에 있는 청년들도 많습니다. 장래문제, 인생문제, 먹고 살아가는 문제로 고민하는 젊은이들, 저녁 늦도록 게임 중독에 빠진 젊은이들, 술이 없으면 아무런 재미가 없는 젊은이들, 꿈도 비전도 없이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어느 방송사에서 대학 신입생 설문조사를 하였는데 대학에 들어온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거의 60% 이상이 취업을 위해서, 15% 정도가 전공을 살리고 연구하기 위해서, 나머지는 방향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대학을 다니는 요즘의 많은 젊은이들은 겨우 레포트 문제로, 학점 문제로, 취업 문제로 인생의 좌절을 맛보며 방황합니다. 장래를 염려하며 두려워합니다. 모두가 영혼이 죽은 청년들입니다. 젊은 청년들이 비전도 없이 관 속에 누워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믿음이 있는 청년들은 살아 있습니다. 이번 사고에 온유라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여학생은 방에 남아 있는 친구들을 구한다고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나오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살아난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갑판 위에 그대로 있으면 헬기로 구조될 수 있었을 텐데 아래쪽 선실에서 터져 나오는 친구들 울음소리를 듣고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다시 선실로 내려갔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띄어넘은 행동입니다. 그 부모가 23일 교회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나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걔는 그럴 줄 알았어. 친구들이 배 안에 있는데 그냥 나올 애가 아니어서…" 먼저 살려고 나온 어른 들보다 낫습니다. 이게 부활의 믿음입니다. 페이스 북 담벼락에 남긴 이 여학생의 은혜스런 글도 있습니다. "겁내지 마라.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았다./기죽지 마라. 끝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걱정하지 마라. 아무에게도 뒤쳐지지 않는다./슬퍼하지 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다./조급해하지마라. 멈추기엔 이르다./울지 마라. 너는 아직 어리다." "슬퍼하지 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가." 이 온유라고 하는 여학생은 진짜 청년입니다.
여러분, 죽은 자와 산 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살았어도 두렵고 비겁하고 꿈도 없다면 죽은 것입니다. 짦은 생애라도 담대히 부끄럽지 않게 믿음으로 살다 죽었다면 산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날 죽음 앞에 두려워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주의 음성을 듣는 자들에게는 죽음도 부활을 위한 소스입니다. 죽음마저도 절망이 아니라 부활의 희망입니다. 봄에 피는 꽃 중에 '춘화 현상' 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어떤 호주에 사는 교민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 가지를 꺽어다가 자기 집 마당에 옮겨 심었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었습니다. 맑은 공기 좋은 햇볕 덕에 가지와 잎은 한국에서보다 무성하였지만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첫해라 그런가보다 여겼지만 2년 째에도 3년 째에도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한국처럼 혹한의 겨울이 없는 호주에서는 개나리꽃이 아에 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온의 거쳐야만 꽃이 피는 것을 전문용로 춘화 현상이라합니다. 백합, 라일락,철쭉, 진달래 등이 이에 속한다고 합니다. 눈부신 인생의 꽃은 바로 이런 춘화 현상을 거쳐야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그렇습니다. 죽음을 거치지 않고는 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도 없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아멘!
부활의 세계는 지칠 줄 모르는 생명의 세계입니다. 생명과 부활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은 그 삶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풍성해 집니다. 부활의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도전하는 영원한 젊은이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이도 상관 없습니다. 육신은 늙어도 청년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도 어느덧 60대 들어서지만 늙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혼은 날로 새로워지고 더욱 젊어지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었다만 매일같이 먹고 사는 걱정 노후 걱정을 하며 살았을지 모릅니다. 손주들과 놀며 엣 날을 그리워하는 노인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언제나 희망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이 시간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가장 원기왕성한 청년으로 부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꿈꾸는 젊은이, 세계를 가슴에 품는 젊은이들이 됩시다.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
결론적으로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사건으로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 하에 있는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어 살리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지금 세우러호 사건으로 실의에 빠지고 침체되어 있는 대한 민국 모든 사람들이 다 부활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생명의 부활로 일어서기를 기도 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정직과 신의를 회복하고 부활의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김해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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