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4 20040607 중세철학
http://222.231.1.74/~woorich/study/busan/busan040607.mp3
http://222.231.1.74/~woorich/study/busan/busan040607.hwp
20040607 부산강의-중세철학
(강사:이근호 목사)
조사를 해보면 두 가지로 확정됩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제사중심으로 하다가 그 다음에 제사에다가 뒤에 말씀을 가르치는 교육이 첨가됩니다. 그래서 그 유대교 전통이 어디로 이어지느냐 하면, 신약 성경의, 예수님은 그런 적 없는데, 그 당시의 유대교들이 해왔던 그대로 이어지지요. 예수님이야 그냥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했고 예배드리는 것 없잖아요. 회당에 들어가서 설교하고 그랬다고. 누가복음에 보면.
그러니까 제사 자체를 인정 안 하니까. 제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제사 자체에 대해서 그만두라가 아니라 너희들이 지금 율법에 의해서 제사 드리는데 그 제사는 나로 인하여 완성되어야 될 그것이지 너희들 제사, 그걸 하나님께서 원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자비를 원하지 제사를 원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래서 요한복음 4장 같은데 보면 예배에 대해서 사마리아 여인이 이야기하잖아요. 우리는 그리심 산에서 제사하고 예배드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인데 어느 쪽이 맞습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어느 쪽이 맞긴, 어느 쪽이 맞아요. 둘 다 안 맞지요. 나를 장차 영으로, 성령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 성령으로 예배할 때라는 이 말은 뭐냐 하면, 현재 관례적으로 내려오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예배로 간주하질 않습니다. 이게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야 돼요. 예배드리는 행위, 예배드리는 액션, 그걸 예배라고 하나님은 간주 안 하고 예수님도 간주 안하고 그래요. 그건 하나의 관습이고 습관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하나님은 신발 신고 있는데 신을 신는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이건 말도 안 되지요. 그럼 신발 벗을까? 신발 벗는 것도 영광 안돼요. 옛날 구약에 예배드리는데 예배드릴까요? 영광 안돼? 안된다. 그럼 예배드리지 말까요? 예배드리지 않는 것도 영광이 안 된다. 영광이 예배 받고 안 받고는 그들이 모일 때 누구 이름으로 모였으며 뭣 때문에 모였으며 왜 모였으며 무슨 목적으로 모였으며 뭘 하려고 모였으며 어떤 고백을 가지고 모였느냐? 그 모임 자체에 주님이 함께 있으면 되는 거예요. 예배드려서 그 이벤트를 바친다고 예배가 아니라 주님이 그들과 함께 있으면 그것이 예배고 그게 천국이고 그것이 하나의 주님의 승리 안에서의 삶이 되는 겁니다.
질문 :
-그럼 목사님, 결론적으로 지금 우리가 여기서 제가 졸려서 잘 모르겠지만 예배라 하는 것이?
-관례지요. 예배란 이름의 관례지요.
-모임이라는 것은, 주일모임은?
-모임 안에 예배가 들어있지요. 모인다 하는 것은 아까 관례적인 예배도 있고 그 다음에 얘들 주일학교 가르치는 것도 있고 같이 식사하는 것 있고.
초대교회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배라 하는 것이 주로 유대인들이 왔거든요. 이방인들도 있지만 주로 유대인들이 많았단 말이죠. 헬라지역 온 사람들이 주로 유대인들이었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구약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그러한 구약의 예언이 예수님이 와서 성취되었다는데 그리고 달리 메시아가 아니라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 때 그들이 갖고 있던 관례를 뭐로 다 바꾸었냐 하면, 예수님 중심으로 다 바꾸었어요.
그래서 학자들은 유월절 중심의 제사가 나중에 초대교회는 뭐냐? 성만찬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유월절 제사가 성만찬으로 바뀐 게 아니고 유월절 자체를 예수님이 완성했으니까 그 예수님을 기념하는 그 관례, 관습에 대해서 그들은 버릴 필요가 없었단 말이지요. 성만찬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게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성만찬보다도 그 예수님에 관한 십자가의 복음이 나중에 사도 바울 더 후대에 들어가면 사도 요한에 들어가면 사랑과 말씀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게 돼요. 그러니까 성만찬이라든지 세례의식이라는 것이 정기적으로 됨으로써 그것이 복음전파가 아니라 그것이 그전까지 일시적으로 한편에 정해졌지만 그걸 하든 안 하든 관계없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 쪽으로 나가요. 사도 바울도 그랬고. 사도 바울도 내가 세례 주러 온 것도 아니고 성만찬 하러 온 게 아니고 바로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했거든요.
나중에 사도 요한이 되면 교회 내에 뭐가 문제냐 하면, 형식은 유사하고 똑같은데 복음이 달라서 문제가 생겨요. 그래서 사도 요한 같은 경우에는 더 중점적으로 교회 어떤 제사 형식을 취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교회 내에서 다른 복음이 전파되느냐 그 문제, 또 나아가서 교인들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살 것이냐 그 문제에 더 치중하면서 요한계시록 같은데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질문 :
-그런데 일부에서는 예배라 하는 게 맞지 않다. 라는 이야기하거든요.
-그게 관습은 맞다, 맞지 않다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 교회에서 우리가 모임이라 해야 되지 예배라 하는 자체가 웃기지 않은가?
-모임이라는 그걸 바꾸자 하는 게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색깔을 노란색 입어도 천당 가고 분홍색 입어도 가는데 노란색 입으면 전통이니까 때려버리고 갈아입자 하는 것과 똑같은 소리에요. 무슨 옷을 입어도 구원 못 받을 놈은 구원 못 받고, 무슨 옷을 걸쳐도 구원 될 사람은 구원 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모이면 돼요. 관습적으로 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서 복음이 한국 땅에 왔으면 한국 땅의 풍습에 따라서 같이 섞이게 돼있고, 미국 가면 미국과 섞이게 돼있어요. 그 관습을 고쳤다고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문제 삼으면 안돼요. 관습은 바뀔 수 있어도 복음의 내용이 옳다고 하면 그것은 괜찮은 겁니다.
-그럼 이벤트와 상관없는 거네요.
-상관없지요. 아이들 모임이 있다고 해서 아이들 모임에다가 삼위일체 이런 어려운 논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나뿐 건 아니지만 애들이 갖고 있는 문화를 이해를 못한 거지요. 또 어른들 모이는데 율동을 하고 한다면 그건 요령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 것을 바꾸자, 고치자 하는 것은 세월 따라 환경 따라 보면 그게 유동성이 있어야 됩니다. 탄력성이 있어야 되어서 그것은 상관없어요. 어떤 방식이든 관계없이 그리스도 ...
-예배나 모임이나 상관없는 거란 말이죠?
-예, 상관없는 거예요. 그런데 예배모임 고치자 하는 그 쪽이 난 더 수상해요. 고치면 뭐 되는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한 게 아니고 다 들어야 될
-예배란 자체가 잘못된 것인가 하는 거죠. 수가성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면서 그리심 산에서도 예배드리고 이미 자체가 늘 그게 삶 속에서 있는데 ...
-잘못 된 건 이것이 잘못됐지? 뭐냐 하면, 제사 드리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잘못됐지. 예배란 용어는 잘못 된 게 아니죠. 그래서 로마서 12장에 보면 영적 예배라 해서 영적 예배라 하는 게 뭐냐 하면, 엉뚱한 예배가 아니고, 신비로운 예배가 아니고 몸으로 서로 섬기고 하는 것을 가지고 영적 예배라 했습니다. 영적 예배 드려라, 산 제사 드려라, 해놓고 뒤에 보면, 형제 끼리 서로 돌보고, 관심 가지고 쭉 나오거든요. 서로 봉사하고. 그래서 영적 예배라 하는 것은 영이라 해서 어떤 신비로운 예배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적인 삶을 사는 게 영적 예배에요.
-목사님, 온전한 예배라 하니까 신령으로 진정으로 ...
-온전한 예배라는 것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온전함이 아니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주인이고 온전해지고 온전한 예배, 온전한 십일조를 예수님이 다 받았으니까
-다 받으신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하고 있지요.
-다 하시니까 우리가 하는 것은,
-참여지요.
-다 틀렸다는 거지요. 다 틀렸으니까 주일날 예배라는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난 아이큐가 대단히 낮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머리가 보통 나쁜 머리가 아니에요. 나쁜 머리를 자랑하는지.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말을 무지무지하게 곡해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 보세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이 말은 이루신 일에 주님께서 우리를 참여시킵니다. 참여시켜 보면, 우리가 뭘 볼 수 있느냐 하면, 아, 예수님이 이래서 저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거든요. 그걸 우리가 증거하는 건데.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아, 그럼 우리는 엉터리네. 이것은 예수님과 따로 놀자는 것밖에 안 되거든요.
예를 들어서 어머니가 잡채를 다 만들어서 딸 보고 얘야, 손님한테 잡채 갖다 줘라. 엄마, 잡채 누가 만들었는데. 내가 다 만들었다. 아, 나는 소용도 없네. 난 죄인이네. 갖다 줘라. 난 죄인인데 뭐, 와 갖다 주는데. 다 이루었으니까 갖다 줘라. 그래도 내가 못 만들었으니까, 난 죄인 되니까 안 할래. 이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참여해서 그것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온전함을 증거하는데 주님 증거하기 바쁜 사람이 내가 온전하지도 않은데 뭔데 하노? 이런 자기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는 그 논리를 하다가 그만 머리가 안 따라줘서 논리가 자기 논리에 그만 발등을 치었어요. 그런 식이에요. 보통 이런 주장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은 안 보이고 예수님은 하늘에 걸쳐 놔 버리고, 우리끼리 될까, 안 될까? 뭐가 온전한 예배일까, 자기 행위를 측정하는 거기에다 집중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 것은 앞으로 잘 생각해서 정확하게 따져주세요. 바로 그런 것도 예배를 잘 드리자 하는 것도 또 마찬가지로 관심사가 자기한테 있지 주님한테 관심 없는 증거다 이 말입니다.
자, 중세철학 봅시다. 중세철학에서 몇 가지 우리가 우선적으로 정리해야 될 개념들이 있어요. 그게 존재에 대한 개념인데 그것부터 설명해 드릴게요.
중세철학이라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상세히 이야기하면 아리스토텔레스를 신학화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학화한 것이 바로 중세철학이다, 중세신학이다.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서 그 당시 신학을 한 사람들 같으면 대단히 기분 나쁘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를 신학한 게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고, 그런데 복음을 모르지만 복음을 빼놓고 나머지는 다 옳은 소리를 한 사람이니까 자신의 우리들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를 가지고 신학을 정리했다. 이렇게 말해다오. 아마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이야기해 버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틀렸다는 말입니까, 안 틀렸다는 겁니까? 안 틀렸고 모자란다는 이야기죠. 뭐가 모자라느냐? 복음적인 요소, 성경적인 요소가 모자랐을 뿐이지 그 틀 자체는 하자는 문제가 없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그럼 복음이라는 신학이라는 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없으면 신학자체가 안 되겠네. 복음을 신학화하는데 있어서의 자체 내에서는 신학화 될 수 없고, 외부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가져와야 비로소 신학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이 말입니까? 라고 물은 거죠. 아침부터 정신이, 정신 바짝 차리세요. 그런 뜻이냐? 라고 물을 수가 있지요.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보게 되면 우리가 수긍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뭐부터 출발하느냐 하면, 존재부터 출발합니다.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라는 것은 있다, 있음. 있음이라고 하면 여기서 뭘 묻겠습니까? 왜 있느냐? 이걸 목적인. 어떻게 있느냐? 이걸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인. '인'이라 하는 것은 원인. 그 다음에 존재가 무엇을 보여주느냐? 이걸 형상인.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느냐? 이걸 질료인. 이 질료인 하니까 질료라는 말을 현재 잘 안 쓰지요. 여러분 이해하실 때 이것은 그냥 기본 물질이라고 보면 돼요.
왜 있느냐, 어떻게 있느냐, 뭘 보여주느냐, 구성되어 있느냐?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에 대해서 신학을 그 당시는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기 전의 상황이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존재에 대해서 존재라는 것을 구성하기 위해서 이 4가지 요소에서만 구성하지 그 다음은 100% 없다. 이게 전부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학이라는 게 뭡니까? 자, 신학자가 뭐하는 거고, 그 당시 목회자들이 뭐하는 거예요. 이거잖아요. 자기가 이제 복음을 알았다, 또는 예수님을 알았다, 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았다. 참고적으로 중세철학은 삼위일체 이후입니다. 중세사회에 대해서 어두운 사람은 도대체 이게 어느 정도인지 왜 그런지 진짜 암흑시대라고 하니까 공부도 안하고 암흑시대라고 해가지고.
암흑의 시대라고 해서 몰라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요. 사람이나 지식은 축적하게 돼있어요. 그래서 축적하기 때문에 그전 것을 알아야 이런 이야기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데 대해서 나오는데 왜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사람들이 신학자들이 관심이 있느냐 하면, 존재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만큼 완벽하게 이야기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 이외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어요.
아니 복음을 이해하는데 존재를 왜 알아야 하느냐? 목회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겁니다. 납득을 시키고 그래서 자기 교인 만드는 건데 사람이라 하든지 있잖아요. 사람 자체가 존재 있잖아요. 있음이잖아요. 있음. 있을 때 존재의 있음이란, 이걸 다른 말로 사람의 있음이란, 왜 있느냐, 어떻게 있느냐, 무엇을 보여 주느냐, 무엇으로 되어 잇느냐? 이걸 4가지를 이야기하면, 사람이 자기존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목회자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을 위해서 있구나. 라고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잖아요. 그죠?
그러면 그 사람 하나는 또 설득 당해서 하나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다 이 말이죠. 십자가, 그 다음에 또 한 5초 뒤에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끝. 예배 마침. 이게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라 하면 저쪽에서 속으로 뭐라고 해요?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우리를 위해서다. 그렇다면 속으로 교인들이 받을 때 나라는 존재는 십자가 때문에 어떤 혜택을 봅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혜택을 봅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떻게 살고 이게 쭉 나오게 돼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있느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은 강조가 안 돼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은 나중에 근세철학에 와서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이게 나중에 목적인은 누가 증명하는가? 증명하는 신학으로 들어가 버려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왜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있는가? 천지창조, 무에서 창조했기 때문에. 무엇을 보여 주느냐? 하나님의 형상을 진흙에서 거기다가 하나님이 훅 불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겼다.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하나님이 주신 흙으로 만든 인간의 육체로 되어있다. 4가지 다 설명이 되어있다고.
그러니까 성경의 내용을 어디의 존재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과 결합을 시키니까 완벽한 신학이 되어 버렸어요. 완벽한 신학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고요. 그런데 결국은 이것은 뭐냐 하면, 성경에 있는 내용을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나와 있는 것처럼 지금 하나님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뭘로 접근한다? 존재로 접근하고 나, 혹은 다른 인간에 대해서도 뭘로 생각하고 존재로 생각하니까 그 사이에 뭘 집어넣습니까? 성경을 집어넣어서 이런 신학 신을 만들어 버린단 말이죠. 그리고 이것을 가르치고 돈 받아먹는 목사의 생계가 보장 된다.
그런데 왜 신부들이, 또 성직자들이 이걸 가르치느냐? 아니, 교인들의 관심사가 뭡니까? 교인들의 관심사가 뭐냐고 묻는 것은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사가 뭐예요? 플라톤의 관심사가 뭐에 있단 말이에요. 많은 철학자들의 관심사가 뭐에 있단 말이에요. 강원도의 무식한 할머니의 관심사는 뭡니까? 전라도의 농사군의 관심사가 뭐예요? 전부다 자기 존재에요.
여러분 철학이라 하는 게 뭔 줄 알아요? 철학이라 하는 게 좀 붙어 봐야 하는 걸 전개하는 그 차이지만 여기 운전사도 나은 철학이 있어요. 그런데 그 철학의 밑둥치에 밑바닥에 뭐가 있습니까? 자기 존재의 영원성, 자기 존재의 연속성, 나의 존재에 대한 관심사, 그것이라고.
그러니까 자기 존재에 관심이 있는 그 사람들에게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가지고 설명하고 그들의 존재를 긍정하면 아아, 나는 살아야 돼. 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살아야 돼. 나는 살아야 돼. 왜? 하나님이 나를 창세전에 살아있어야 돼. 나는 살아야 돼. 왜?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밝히기 위해서 살아있어야 돼. 나는 살아 있어야 돼. 왜? 나는 육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영원한 육체, 그래서 장례식에 갈 때 왜 자꾸 사라져. 이게 고민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마지막에 질료이기 때문에. 왜냐하면 이게 깨져 버리면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경우에 질료가 없으면 사람이 안 되기 때문에.
사람이라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질료로 들어와서 형상으로 되어 있다. 이 질료를 가지고 육이라 하고 근육이라 하고 형상을 가지고 영혼이라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을 영혼과 육으로 된 이분설이라고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걸 그대로 받은 사람이 루터와 칼빈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그전에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어거스틴이고. 어거스틴은 어디서 나오느냐? 플라톤의 형상론에서 나오죠.
이러한 형상론의 플라톤의 형상론하고 플라톤의 존재론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하고 약간 차이나요. 차이나는 게 뭐냐 하면, 플라톤은 인간의 존재, 이걸 허상으로 봤어요. 가짜. 왜 가짜로 봅니까? 진짜 맞는데.
플라톤은 아주 생각이 깊은 사람이에요. 뭐냐 하면, 인간이 있나, 없나? 인간이 있지. 아니지. 그것은 철수가 있나, 없나? 철수가 있지. 아니지. 김철수는 김철수지 인간이 아니지. 인간은 어디 있느냐 하면, 김철수, 이영희, 최병덕, 이런 사람들, 유사 인간들을 모아서 인간이라는 개념을 형성한 거예요.
뽀삐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뽀삐는 있지요. 그 다음에 세파트는? 세파트 있지요. 개는 어디 있어요? 개는 없어요. 개는 어디 있습니까? 우리 머리 속에 개라는 관념, 개념만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개는 죽어도 개는 안 사라져요. 뽀삐가 죽어도 개는 남아 있어요. 사람은 죽어도 개는 남아 있어요. 죽는다는 말은 이것은 없음이죠. 있음이 아니고, 영원한 있음이 아니고, 김철수는 영원한 있음이 아닙니다. 김철수 죽고 난 일주일 지나면 다 잊어버려요. 친구들은 다 잊어버리고. 김철수는 사라지고 인간은 남잖아요. 영원한 것은 어디에 속합니까? 영원한 것은 신의 속성에 속합니다. 김철수는 신의 속성이 아니에요. 왜? 허상이죠. 영원한 실상은 신의 속성인데 이데아, 플라톤은 그걸 이데아라고 보고 모든 것의 원형이라.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재성이 여기에 있어요. 선생님, 그게 아닙니다. 뽀삐 없고, 세파트 없어요. 개밖에 없어요. 플라톤은 뭐냐 하면, 뽀삐 없고, 세파트 없어도 개가 따로 존재한다고 봤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적으로 봤어요. 뽀삐 있고, 세파트 있어서 봤으니까 개라는 것을 우리가 그걸 보는 거죠. 나중에 칸트 같은 사람이 바로 그렇습니다. 칸트 같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인식이라는 것은 그때부터 칸트에 들어가면 존재론이 존재하냐, 존재론이냐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요. 그래서 존재론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인식되는 것은 존재하고, 인간이 인식되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게 돼요.
그러니까 뿔이 하나 밖에 없는 괴물, 이건 비존재에요. 신은 비존재에요. 왜냐하면 신은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인식론에 의해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만 인간은 존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는 것도 나타날 수는 있어요. 그게 우발적으로 나타날 수 있어요. 바이러스 같은 경우에서 후크가 현미경 만들었는데 보라고.
그래서 칸트에는 뭐가 있느냐? 인간의 있음은, 인간의 존재는 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인식한다는 그 인식론 안에 존재가 있습니다. 인식론 안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주체 안에 존재. 존재라 하는 것은 주체 안에 존재가 있어요. 나중에 이게 또 주체 안에 존재가 개인이 아니고 나중에 뭐로 바뀌느냐 하면, 역사 안에 존재. 역사 속에서 존재해요.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여리고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홍해가 갈라진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이러한 현대철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불트만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적으로 되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칸트 이후에 존재라 하는 것은 계속해서 인식되어야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인식된다는 말은 미래에도 과거에 일어난 일이 같은 법칙 하에서 일어나야 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은 그때뿐이에요.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과거에 있었더라도 지금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지금은 유용성이 없고 의미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과학은 거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지금에 존재하지 않는, 지금에 존재하냐, 존재하지 않느냐를 관계성을 만들어라. 그걸 과학과 연관시켜 버렸습니다. 과학과 연관시켜 버리면 과거에 있었던 것은 모두 전설이 되고 신화가 돼요. 동정녀 탄생은 있을 수 없어요. 왜? 지금 동정녀가 없기 때문에. 지금 없기 때문에 과거에 없어야 돼요. 만약에 과거에 있었는데 지금 없다 하면, 여기서 뭔가 존재성이 끊어지죠. 그죠? 과거에 처녀가 아기를 낳았는데 지금 처녀가 아기 못 낳는다면, 도중에 뭔가 끊어져 있잖아요. 끊어져 있다면 진리에 해당되지 않는 겁니다. 진리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은 의미 없는 거죠.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데 생각해 보세요.
내가 말을 어렵게 했는데 우리가 믿을 때 진리이기 때문에 믿잖아요. 제 말 맞지요. 변동 같으면 맨 날 헤헤헤 변동 같으면 안 믿잖아요. 빈틈없이 진리기 때문에 믿잖아요. 지금의 진리라면, 진리라 하는 것은 시간 따라 달라져야 되느냐, 안 달라지느냐? 안 달라지잖아요. 그러니까 안 달라지기 때문에 과거도 지금 내가 믿을 만한 진리만 과거에 존재해야 과거하고 현재하고 동일한 것이 이어질 수 있겠죠. 따라서 동정녀라 하는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과학이 발달되기 전에 처녀가 아이를 못 낳는데 낳는다고 해줘야 그 당시 진리는 통하죠. 그 당시 인식론에서는 그것이 진리가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결국 신앙이라는 게 뭐예요? 설득이고 납득이죠.
고린도전서 2장 4절 한번 봅시다. 내가 답답한 게 안 믿어지면 못 믿겠다. 하고 돌아서면 되는데 천당 가려고 미련 있어서 안 믿는 것도 억지로 말 꾸미려고 하는지 몰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함이라"
여기에 보면 사도 바울의 설교는 연속성입니다.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에 되풀이 할 수 있는데 문제는 무엇을 할 수 없다? 성령의 나타남에 대해서는 자기가 관여할 수 없어요. 그래서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렇게 설교하고 전셋집 얻어서 그렇게 했는데도 유대인이 와서 흥흥 하고 듣고 가버리고 듣고 안 믿고 가버리고.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어요? 이사야 6장을 예언해서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이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설교한다고 그들이 다 회개하고 자빠지고 울고불고 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이 나타남은, 사도 바울조차도 성령이 나타남을 조종하고 관리할 수 있는 그런 책임자가 아니에요.
그래서 성경공부하고 가르친다고 사람들 안 모인다고 실망하고 낙담하고 개척교회하고 사람들 안 모인다고 너무 이렇게 실망하지 마세요. 그건 내가 보기에 욕심이라고 보는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 거예요. 뭐든지 욕심으로 하지 마세요. 그게 다 원망, 죄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몇 명을 건졌는데. 지가 몇 명 건졌다고 할지라도 지가 거기서 혜택을 몇 명으로부터 혜택을 얼마나 받았는데? 받기는 뭘 받아요. 고생 실컷 하다 천당 갔지. 천 명 목회한다고 천 명 신자 만든다고 대접을 받았습니까? 또 다시 딴 데 가서 설움 받고, 또 다시 딴 데 가서 설움 받고 그랬지 뭐. 남한테는 이단이라고 욕도 얻어먹고.
여러분 머리로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설득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 사람 되고 동시에 그 사람은 그 사람에 대해서는 고정성. 고정성인데 이 고정성을 구약에서는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게 이사야에 보면, 나무나 철로 만드는 이유가 신이 고정 돼버려요. 뭐든지 고정적으로 돼버리면 우상이 돼버려요. 이래서 간증을 조심해야 돼요. 나는 과거에 이런 간증을 했다. 그 간증 자체로 우상이 됩니다.
그러면 우상 아닌 게 뭡니까? 우상 아니면 변화지요. 다 변화하는데 그러면 그 변화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잡을 수 있습니까? 잡으려고 생각하지 마. 잡히도록 해야 돼. 변화 자체에 대해서 잡히도록. 그런데 변화가 마음대로 변화가 아니라 어디서 나온 변화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대로 그러니까 성령의 우발성대로 성령의 우발적인 행동대로 나오는. 이 변화무쌍함이 결국에 보니까 택한 자만 건진다는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 하의 변화에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영화롭게 하신데 있어서 인간의 손을 의탁하지 않으시고. 주님께서 사람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시고. 주님께서 자기 원하는 사람을 우발적으로 대하는 거예요.
이걸 절절히 느꼈던 사람이 사도 바울이에요. 사도행전에 나와요.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이 어디로 갈지 몰라요. 어디로 튈지 모르고. 로마 가! 이러면 묶여서 가요. 죄수에게 가. 네가 이 성에 내 백성이 많으니라. 택한 자는 다 믿을 것이라.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는 믿을 것이라. 항상 사도 바울은 우상, 저 사람은 무조건 내 사람이고, 이것은 무조건 나를 환영하는 교회고, 이게 우상적인 고정성을 두지 않았어요. 자기가 고정적으로 주님한테 매였지. 자기 나름대로 소유, 이거는 무조건 내꺼야. 자기가 스스로 안정성, 우상성을 가지려고 애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떠도는 객이라고나 할까요. 떠돌이 생활을. 그렇게 성령을 믿는다함을 따라서 그렇게 간 겁니다.
그래서 하나의 고정성이라 하는 것은 고정되게 되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가치를 마구 부여하고 그것이 내 바깥에 있는 제2의 나의 분신이 되고. 예를 들어서 자기 사랑하는 애인에게 너무너무 사랑해 버리면, 그 애인이 자기에게 모든 정성과 자기 애착과 정성을 다 퍼부었기 때문에 만약에 그 애인이 자기 정성에 못 미쳤다면, 자기 자신에게 실망해서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대신에 칼 들고 그 애인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자기 실망감을 극도로 표현하게 되지요. 그래 놓고 왜 죽였느냐 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죽였다고. 사실은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고 그녀에게 퍼부은 자기 정성을 사랑하지요.
교회마다, 어떤 교회에서 이렇게 했어요. 장로님 싸우지 말고 나오세요. 아니야. 내가 이 교회에서 몇 십 년, 어떤 교회는 60년 하데요. 내가 60년간 봉사했는데 내가 왜 나와. 저 목사가 나가야지. 그건 교회 사랑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퍼부은 자기 정성을 사랑한 거예요.
늘 그런 것은 허물어 버리고 오직 십자가의 고정성에 매여야 되는데 이걸 자기 존재의 고정성을 위해서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존재론을 펼쳤겠습니까? 왜 이런 4가지의 원인으로 존재가 재구성된다는 것을 이야기했겠습니까? 이것은 자기의 현재 있는 있음, 있음 자체를 우상화시키는 거예요. 있음을 우상화 작업입니다. 나는 무조건 이유 없이 있어야 돼. 이런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무조건 있어야 돼. 무조건 나는 살아남아야 돼.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이에요.
사람이 신을 생각하고 예수를 생각할 때 진정으로 예수, 신을 생각하는 줄 압니까?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나에게 요구되는 내가 나의 존재를 나의 신으로 신격화시키는데 필요한 분들이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안 놓고 있는 거예요. 나를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나는 이유 없이 무조건 절대자가 돼야 돼요. 이 절대자 되는 데 어떤 표준이라든지 어떤 도움이라든지 조언이라든지 어떤 견본, 모델, 이런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대상으로 라이벌로 삼는 게 신이었고, 예수였고, 성령, 그런 거란 말이에요.
이러한 안정성, 고정성이 돼버리면 이런 중세신학이 돼버리면 중세라는 국가 자체가 힘이라는 게 있어 질서를 유지하겠죠. 농부나 백정이나 상인이나 방백이나 영주나 관계없이 이런 하나의 신은 고정되니까 나라가 잘 돌아가니까 신의 특권이 들어갔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사실은 그게 아니라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존재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경우에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을 뭐로 돼있다? 인간은 형상과 질료로 되어 있고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로서 인간의 형상으로 화된 하나님의 형상의 어떤 일부. 그러니까 먹구름이 하늘에 있다가 지상으로 내려오면 뭐가 됩니까? 비가 되지요. 그러니까 우리 가슴을 적시는 빗물은 하늘에 있는 먹구름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는 빗물이 되어서 녹아들 때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온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귀한 형상을 갖고 있는 나의 존재성은 뭐가 됩니까? 곧 나는 신성이 되겠죠. 이게 성화론입니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것을 건드리지 말자. 그리고 그것을 점점 더 키워나가자.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론은 degree of being이라고 합니다. 이걸 쉽게 이야기하면, 존재는 다 있으니까 어떤 존재냐 하는 거예요. 존재의 가치가 존재할만한 가치가 많이 있느냐, 없느냐? 이걸 70점, 60점, 50점 이렇게 점수를 매겼어요. 누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데 오늘날 성화론이 뭡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입으면 80점, 90점 되고 없으면 10점, 이렇게 되잖아요.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쁘다가 아니라 같은 인간이니까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거예요. 복음을 모르는 인간들은 뭔가 통하는 게 있어요. 존재의 승격화를 위해서 자기의 수준을 높이자! 이 두꺼운 성경책을 백 번을 보고 새벽마다 몇 번을 해도 관계없고 성경을 아무리 봐도 성경책 탁 덮고 결국 정립된 것은 뭐냐 하면, 나의 존재의 질을 높이자. 탁, 그거 하나 아는데. 그게 기독교 들어오기 500년 전에 이미 여기 아리스토텔레스가 벌써 다 정리를 해 논 거예요.
질문 :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불멸설에 대해서
-그건 다음에 이야기할 건데. 토마스 아퀴나스 이야기할 때 하려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상론했잖아요. 이게 토마스 아퀴나스의 문제점이라고. 그 당시에도 문제점이 지적됐어요. 뭐냐 하면, 유스티누스가 그걸 반박했는데. 유스티누스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서, 아까 뽀삐 있잖아요. 뽀삐라는 개, 조그만한 살살이, 살살이가 죽어도 뭐는 남습니까? 개는 남다가 플라톤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뭐냐 하면, 살살이는 영원불멸하지 않다. 왜냐하면 존재는 뭐로 되어 있습니까?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개별적 존재가 죽어 버리면 그 존재가 사라져 버리는데 그러니까 영혼도 사라지게 하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점을 대해서는 플라톤을 그대로 가져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토마스 아퀴나스가 받으면서도 영혼불멸에 대해서는 플라톤 쪽으로 가버려요. 개별적 영혼은 죽어도 진짜 영혼의 원형, 이데아는 남아있다. 그렇게 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토마스 아퀴나스나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은 전부다 모순점을 드러내는데 어떤 모순점을 드러내느냐 하면, 이게 좀 어려운데요. 영혼의 불멸을 이야기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뭣 때문에 스승의 그 점에 대해서 반대했겠습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은 불멸한다고 주장하는 플라톤을 반대할 때는 그만한 반대할 이유가 있는 거예요.
영혼을 만약에 불멸로 만들어 놓으면 실체는 어디 있나? 개인만 덜렁 떠 버린다고. 그렇게 되면 신이 뭘 만들어났어요? 신이 만들지 않았단 말이에요. 신이 안 만들었으면, 잘 들어보세요. 신은 존재자를 만듦으로서 신이 존재함을 즉 자기를 뚜렷한 나타냈더란 말이에요. 이게 오늘날 천문학의 마지막 결론이 이거에요.
호킹 박사의 천문학이 뭐냐 하면, 우주는 왜 있느냐? 인간들이 우주를 탐구하기 위해서 우주가 있다고 현대의 모든 천문학자들이 다 공통적으로 이야기합니다. 현대 물리학자 다 이야기하거든요. 아마 김영기 박사도 그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실제 신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 놨다는 거죠. 인간이란 존재를 통해서 인간은 뭐를 알 수 있다? 신을 알 수 있는 거예요. 이게 플라톤 사상입니다.
이 플라톤 사상의 허점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했단 말이죠. 그렇다면 둘 다 참, 머리 참 좋아요. 신은 인간을 만듦으로서 신이 있음을 알잖아요. 인간이 있으니까 뭐가 있다? 신이 있다 말이죠. 신이 있고 난 뒤에 인간 없어도 된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갔다가 왔다가 도로 가도 됩니까, 안 됩니까? 이제는 인간 없어도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게 플라톤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처음에 신이 있는 게 인간이 있기 때문에 있다 하다가, 왜 이제 와서 인간 없애고 신 있다 하느냐, 왜 거짓말하느냐 따지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야.
그래서 신학자들은 두 종류에요. 하나는 영혼은 불멸하다.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 여호와증인들처럼. 영혼은 없어진다 하는 것은 유스티누스 쪽이고. 아니다. 영혼이 죽어버리면 영혼이 불멸해 버리면, 어떻게 신이 자기가 만든 것을 스스로 없애 버릴 수가 있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신은 존재하는데 존재에서 어떻게 무존재가, 없음이 나올 수 있느냐? 존재는 있음 아닙니까? 있음에서는 없음이 안 나온다는 거죠. 없음에서는 있음이 되는데 있음에서는 없음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이러한 이야기가 오늘날 교인들이 그냥 잡담삼아 묻고 대답하는 가운데 이런 논리들이 다 섞여 있어요. 전부다. 다 섞여 있다고. 그러니까 복음을 안다, 십자가를 안다 하면서도 문득문득 뭐냐 하면, 하나님, 저 없으면 하나님 일 안 될 걸요? 자기 있음을 가지고, 방금 이야기한 나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일 못할 걸요? 심지어 너무 이렇게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럼 제가 완화적으로 이야기해 보면, 하나님, 저한테 힘을 주셔야 제가 있음으로 행동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런 것은 온통 한국교회 전체다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왜 있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까 ( ) 목적인. 내가 왜 있는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있으니까 하나님, 제 일 안 도와주면 영광은 안 될걸? 이 말은 뭐냐 하면, 그걸 너무 완화시키면 뭐냐? 하나님, 저는 영광을 위해서 있습니다. 이 말은 내면적으로 하나님, 팍팍 도와주세요. 사업 잘 되게 해주시고, 목회 부흥하게 해주시고, 저 좋고 하나님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안 좋습니까? 하는 그 이야기에요. 그런데 내가 죽어버리면 하나님 손해입니다. 라는 식으로 간구하고 기도하고 소나무 뿌리 뽑고 기도하며 외치고, 그런 것을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유스티누스 이런 사람은, 그런 신학자는 마, 짜식아, 너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없는데서 있는 것을 만들어내잖아. 자꾸 있는데서 없음을 가지 말고 나 사라지면 하나님도 없는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진정 있다면 나는 은퇴해도 조기은퇴해도 괜찮잖아. 왜 꼭 내가 있어야 돼. 라는 쪽으로 밀어붙이는 그 당시의 토마스 아퀴나스, 그 사람은 그전의 사람이지요. 논쟁거리가 됐었어요.
그러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영혼불멸을 주장하는 이유가 있어요. 잘 들어 보세요. 그것은 딴 게 아니고 구원에 관한 문제도 아닙니다. 현재 있는 이 나라를 거룩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여기 보세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뭐냐? 왜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을, 철학을 좋아하느냐 하면, 목적인 하는 것, 인간의 목적에 대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입을 다물었어요. 이 목적인은 뭐냐 하면, 전 생물, 전 우주에 있는 생물을 겨냥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뭐냐 하면 내내 같은 존재인데 그러니까 돌이라는 존재, 그 다음에 나물이라는 존재, 코끼리라는 존재, 그 다음에 흐르는 물이라는 존재, 그 존재, 존재, 돌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존재성. 언약에도 존재성을 기반으로 해서 이런 것들이 다 나오는데. 그래서 물은 물로 되어 있으니까 형상은 흐르는 형상으로 되어 있고, 코끼리는 뭐로 되어 있는가? 걸림돌 되어 있는 형상은 뭡니까? 코끼리 형상이고.
플라톤에 의하면 코끼리 형상은 따로 있고, 나무 형상 따로 있고, 인간 형상 따로 있고, 이데아가 한두 개가 아니고 여러 개가 돼요. 한 개, 한 개라 하는 것은 파르메니데스나 플로티누스가 그렇게 이야기했고, 형상, 이데아는 여러 가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플라톤이 이야기했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다른 점은 전체가 이데아 이런 게 아니고, 어떻게 해서 돌이 나무가 되고 어떻게 나물이 나무가 되고 어떻게 나무가 바뀌게 되고 왜 어떤 수위, 천계, 계급, 이 자연 생물에 대한 어떤 위상이 진보라는 개념을 발생한 거죠.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진화론이 나오는 거죠.
집사가 권사가 되는 그거랑 비슷하죠. 발전시키는 아까 이야기한 degree of being, 존재의 정도성이다. 이 점에 대해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박수를 치면서, 이거다 바로. 뭐냐? 성경에 보니까 온 우주는 뭐로 충만 돼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 들리지 않는 소리, sound of silence에 의해서 온 우주는 신성으로 가득 차 있지요. 그 신성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해서 이 우주를 만물의 영장이, 소위 만물의 청지기라 하지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어떻게 하라? 다스리라. 네가 다스리고 정복하라.
다스리고 정복하는 게 뭡니까? 서랍에 속옷 차곡차곡 채우듯이, 수건은 수건대로, 티는 티대로 하듯이 정돈할 수 있는 사명과 임무를 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었다 말이지요. 정돈을 하는데 계급 따라 정돈해야 될 것 아닙니까? 또 그것이 그 당시 국가 질서 유지하는데 좋은 사상이 되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신성으로 가득 찼으면 그것이 차곡차곡 정돈돼야 한다 말입니다. 정돈을 하는데 위층마다 계급이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 다 해 놨다.
그리고 최종적인 정점에 있는 것은 누굽니까? 인간이고. 인간인데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요한 논지가 뭐냐? 제일 윗대가리에 제일 모든 자연 질서,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인간 구원 이렇게 하다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주 전체를 다 살피는 거예요. 그러니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프란체스코나 이런데 영향을 받은 거지요. 뭘 말입니까? 불교에서 개미 하나 죽이지 마라. 거기도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고. 잠언서 보면 나옵니다. 너구리한테 배워라, 메뚜기한테 배워라. 배워라 하는데 뭘 배우라? 그 안에 선생이 들어있다. 따라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죽이면 안 된다. 이런 폭력성을 발휘하면 안 된다. 이걸 토마스 아퀴나스가 집대성을 합니다. 거대한 집대성을 했는데 제일 윗대가리에 제일 최정점에 있어서의 라이벌이 생겼어요. 그게 천사 아닙니까?
천사와 인간의 공통성이 뭐냐 하면, 둘 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에스겔 1장이라든지,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사가 어떤 얼굴입니까? 사람의 얼굴이지요. 그리고 창세기 17장에 아브라함에 나타난 천사는 어떤 천사였습니까? 사람의 형상으로 오잖아요. 창세기 32장에 보면 야곱과 씨름했던 누굽니까? 야곱이 귀신 붙들고 했습니까? 야곱이 근육질도 없는 사람 붙들고 했어요. 야곱이 누구하고 했어요? 아브라함이 세 사람 영접할 때 그들은 뭘 먹었습니까? 음식을 먹었잖아요. 아니 확실한 것은 소돔과 고모라 때 롯에게 올 때 그 사람들 발자국을 안 남겼습니까? 무슨 SF 영화에 나옵니까? 걷기는 걷는데 눈 위에 걷는데 발자국은 없는.
이런 토마스 아퀴나스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에 고기를 잡수었잖아요. 고기를 먹고 난 뒤에 소화관을 나와서 대변을 봤느냐, 안 봤느냐? 하는 그 문제. 그리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이야기할 때 그게 귀신이냐, 사람이냐 말이죠. 같이 식사할 때 눈 떠보니까 예수님이었다 말이죠. 예수님이냐 해 보니까 순간적으로 사라졌잖아요. 사라졌으면 물질적 공간을 영향을 받지 않거든요.
요한복음 20장에 문을 닫아 뒀는데 누가 왔습니까? 노크도 안하고 문 열어주지도 않고 예수님이 가운데 계셨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벽을 뚫느냐, 벽을 뚫을 때 벽이라는 그 질료와 예수님 육체라는 질료와 서로 에너지적인 충돌과 마찰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죠. 인간의 육체는 세포로 되어 있고, 세포 안에는 원자로 되어 있고 원자 안에는 원자핵과 전자로 되어 있고, 원자핵은 강력과 약력이라는 각 에너지장이 형성되어 있거든요. 각 핵력과 에너지장이 이 벽돌 안에는 뭐가 들어 있어요? 벽돌 안에는 물질이 들어 있고, 물질 안에는 원자가 들어 있고, 원자는 원자핵이 있잖아요. 그 강한 에너지원과 충돌되게 되어 있지 어떻게 통과 되게 되어 있느냐? 충돌하면 부셔지든지 해야지.
질문:
-부활의 몸이라고 하는데
-부활의 몸인데 그 부활의 몸을 인간의 이런 토마스 아퀴나스가 설득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설득 안 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가 설득 안 된다고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걸 설명을 하는 거예요. 천사와 인간은 둘 다 형상은 동일한데 뭐가 없다? 인간은 뭐가 있고? 질료가 있고 천사는 질료가 없으니까 질료 있는 형상을 가진 인간은 뭐보다 위다? 천사보다 위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나오는 시편 8편에 나오는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고 그렇게 완성된다는 거죠.
중세철학에 이런 모든 기본적인 목표가 뭐냐 하면, 납득이 되는 교인들에게 일반 대중들에게 설득이 될 수 있는 복음. 이건 인간이냐? 짐승 아니지? 예, 짐승 아닙니다. 인간이냐? 인간입니다. 인간이라면 이 말 듣고 반박해 봐라. 반박 안 됩니다. 그럼 너, 신자다. 도저히 반박 안 될 정도로 완벽한 설득체제를 갖추는 여기에, 그러니까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신학이 필요했던 거지요. 존재를 위해서 교회라는 존재, 인간이라는 존재를 위해서 거기에다가 성경을 집어넣었던 그 전통. 그 전통이 중세철학의 전통이에요.
지금도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는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호기심은 선악과 따먹으면 될까, 안 될까? 호기심, 궁금증. 이게 인간의 지혜가 되었고, 그런데 인간의 지혜로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핍박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지혜를 가지자가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지요. 인간은 복음 보면 몽땅 자기 지혜로 다 전환시키죠. 그런 습성과 그런 본성을 이미 지니고 있지요. 새삼스럽게 호기심 가지자가 아니라 호기심을 버리자 해도 호기심 갖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바로 그러한 것과 다른 노선으로 우리를 구원했다 이 말이지요. 예수님 부활하는데 어떻게 벽을 통과합니까? 라고 하는 그렇게 질문을 내뱉는 그것이 어디서 나왔냐 하면, 나의 지혜는 손대지 마세요. 내 지혜가 내 지혜로서 설득되게 대답해 보란 말이에요. 라는 자기 기대를 못 버렸다는 자기 부인이 안 된 상태, 자기를 부정하지 않은 상태, 내가 궁금하면 궁금한 거지, 왜 말이 많습니까? 자기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이 진짜 좋은 하나님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사고방식 자체와 상관없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란 말이지요.
목사님, 죽으면 우리 영혼은 어디 갑니까? 라는 질문도 마찬가지에요. 그거 왜 묻는데? 우린 영혼과 육으로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육은 죽잖아요. 그런데. 영혼은 살아 있잖아요. 살아있으면 어디 갑니까? 예수님께서 죽었잖아요. 죽었지. 예수님은 영혼과 육으로 되어 있을 것 아닙니까? 당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을 때 영혼도 지옥에 함께 갔습니까, 아니면 영혼은 천당 갔는데 육체만 지옥 갔습니까, 아니면 둘 다 지옥은 안 가고 무덤에 갔습니까? 궁금합니다.
영혼과 육으로 되어 있다고 누가 설명...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당연한 거지요. 맞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인간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걸 가지고 그것을 옳다고 오해를 했어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것은 진리인 것처럼 따라서 이건 일단 진리니까 그 진리 위에 다른 진리를 추가하면 그 진리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될 줄 알고 그런 착각들을 하는 거예요.
그런 진리라고 생각하는 편견을 버려라. 라고 고발하는 게 십자가 아닙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인간의 진리 때문에 죽은 거거든요. 나의 궁금증, 나의 호기심 이게 밀리다 보니까 뭔가 밀쳐서 엎어져서 죽어 있다. 누구인지 보니까 예수님이다. 그러니까 나의 충만한 호기심, 끊임없이 올라오는 나의 궁금증, 이것이 그만 퍽 엎어져서 죽으시는, 누가 죽게 했는데 그 죽으신 분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엎으신 그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건져냈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구원하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밀쳤기 때문도 그런 것도 아니고 안 밀쳤기 때문도 아니고 어쨌든 예수님 죽으시라고 밀치는 것은 우리 속성이고 그 속성됨과 아무 상관없이 정말 아무 상관없이 그냥 우릴 구원해 버렸단 말이에요. 이걸 대해서 우발성이란 말 이외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여기에서 우연이란 말과 우발성이란 말이 달라요. 철학에서. 우연이란 말은 목적은 하나인데 필연, 필연, 필연적으로 가다가 엉뚱한 데 가더란 말이죠. 그것은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보다 다른 어떤 이탈되는 것, 뭔가 하나 목적 자체를 수정할 필요는 없고, 목적은 되는데 다만 필연, 필연하다가 필연과 안 맞는 다른 우연적인 것으로서 다른 곳으로 가는구나 하는 것이 우연이고. 파격적인 것, 또는 다른 방식이 등장하는 것.
우발성이라 하는 것은 어, 그렇게 되면 내가 알고 있는 목적이 깨져 버렸는데 형이상학이라든지 우발성은 무의미한 거예요. 이것은 수정에 관한 문제에요. 무슨 뜻인지 차이를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우연이란 말은 뭐냐 하면, 여기서 시험문제 나옵니다. 어, 문제가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나왔어요. 시험 치는데 1번 우리 배운 거, 2번 배운 거, 3번 배운 거, 어, 4번 문제 보니까 안 배운 게 나온 거예요. 이게 우연이에요. 그런데 우발성은 뭐냐 하면, 시험을 치자 하는데 선생님이 와서 어이, 너, 퇴학이야. 이것만 시험 치고요. 이게 없잖아요. 대번 이 시험 잘못 쳐서 퇴학입니까? 그런 질문 자체가 안 되지요. 그 시험 치고, 안 치고 관계없이 퇴학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 시험 문제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라고 묻는 게 아니고 제가 왜 퇴학당해야 합니까? 이렇게 묻지요. 벌써 형이상학, 근본적 관심이 다르지요.
우발성이라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저 선악과 왜 생겼는데요? 너, 죄인이야. 그러니까 우발성을 우연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하, 내가 선악과 왜 심었는지 모르니까 나보고 죄인이라 하는구나. 내가 죄인 안 되기 위해서 열심히 알아야지. 계속 그렇게 노력하더란 말이죠. 우발성과 우연이 이런 차이가 있어요. 주님께서 우발성을 사용하는데 우리는 자꾸 우연으로 자기 합리화 쪽으로 정리하려고 그런 애를 쓴다 이 말이에요.
이게 여러분들에게 신학하는 이게 있어요. 대체, 대립, 대신, 대력. 전부다 '대'자가 들어가 있어요. 신학에서는. 대체한다는 것은 바깥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기존에 있는 사람을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것. 대립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존재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대립이고, 대신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지요. 대력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도 다른 내용을 갖기 위해서 이익을 뺏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 전부다 각자 '대'자가 조금씩 다르지요. 예수님께서 대신 죽었다는 소리 나오니까 이게 대체인지, 대립인지, 대신인지, 대력인지 자기 신학 따라 다르단 말이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 죽으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다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심을 우리 자신의 가치를 우리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우리에게 부여하지 않는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복음은 우리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철저하게 부정해 버리죠.
잘 해 볼게요. 잘 살다 본다니까요. 하나님 형상으로 마음껏 돌릴게요. 아무리 빌고 해도 아예 우리 존재 자체를 거두어 가는데 일단 살려주시고 제가 잘 해 드리겠습니다. 제발 제 존재만큼은 제 자존심만큼은 뺏어가지 마세요. 나도 한 자존심 합니다. 이렇게 자꾸 우기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일소해 버립니다.
그러면 목사님, 만약에 그렇지 않고 우리 존재를 살리면 어떻게 됩니까? 존재를 살리면 신과 존재, 예수는 하나의 취미활동이 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보세요. 우리가 하는 일의 나라가 있고, 어떤 사람은 사장님이라면 품질 관리해야 되지요, 해외 판로 개척해야 돼요, 또 사장님이 아버지니까 아이들 과외도 봐줘야 되지요. 학부모 참여 하잖아요. 그 중에 하나가 예수 믿기도 포함되지요. 그러니까 모자람을 보충하는 정도지요. 만약에 내가 살아있다면, 내가 죽으면 예수 없는 이상 살아 있을 무슨 소용이 있으며 예수 없는 인생은 활동하는 시체지. 아버지가 된들 그게 무슨 아버지가 있어요.
주님께서는 아예 근원을 빼앗아 갔는데 우리는 잘해 볼게요. 나 지금 회사 때문에 일이 바빠서 주의 일 못하지 일만 안 바쁘면 악착같이 내가 잘 해 볼게요. 지금 여러 가지 일을 벌려 놨어요. 벌려 논 일 중 하나가 교회 다니는 취미생활을 해요. 필요하지요. 왜? 교회 가서 기도해야 복 받으니까. 불필요하다는 게 아니고 필요하긴 한데 나와 전적으로 바꿀 만큼 필요하진 않단 이 말이에요. 예수님이 필요하신 분인데 나하고 완전히 바꿔치기 할 만큼 안 중요하단 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게 무슨 신자입니까? 예수님 등 처먹는 인간들이지 그게 신자이겠어요.
목회하는 목사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 좋긴 좋은데 내 목회를 잘하게 해 주고 부흥해주면 좋은 분인데. 내 전체 목회 망해도 사랑해야 될 그런 대상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게 무슨 신자입니까? 스데반 집사 보세요. 목숨 가져가도 그 사람 주님 반겼습니다.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에. 돌 맞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 영광 돌렸어요. 그게 신자 맞아요. 그게 신자 아닙니까? 초대교회 순교자들 보세요. 어떻게 예수 빌미하고 챙기고 도대체 어디서 그따위 사고방식이 나오는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쟈크 엘룰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중세신학에서 개판된 것은 딴 게 아니고 신학의 문제 있다 하는 것은 나중 문제고, 왜 중세신학이 개판 되었느냐? 그것은 오직 하나 교회 부흥하기 위해서 신학을 도입했기 때문에 그렇다 이거에요. 교회를 크게 만들기 위해서 거기에 맞는 그들 납득하고 설득할 수 있는 신학을 동원되다 보니까 중세신학은 개 엉터리다. 사람들의 존재를 긍정해 주고, 가능성을 마음껏 부여해서 예수보다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더 중요시 여기는 그런 풍토를 완전히 확산시켰어요.
거기에 그만 좋구나, 얼씨구나 호응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권력, 정치가들. 이 권력자=성직자들이 함께 어울려서 거대한 제국을 지탱해 왔던 것입니다. 여기에 아부한 사람이 신학자들입니다. 빌붙어 먹은 놈들이 신부들이고.
결국 십자가라는 의미를 다시 십자가의 강조성을 주장한 사람은 어거스틴도 아니에요. 루터에요. 루터만큼 십자가를 강조한 신학자가 없습니다. 그럼 초대교회는? 이걸 잘 들어보세요. 초대교회 때 분명히 십자가만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유명하지는 않았어요. 초대교부들,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있지요. 그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들이에요. 유명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교회사에서 유명한 사람을 꼽는 이유가 뭐예요. 그 사람들의 작품과 말이 유명해요. 그 사람들이 교회부흥에 기여를 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초대교회 십자가 믿고 그냥 죽은 사람 같으면 아무리 십자가를 외치도 진리를 외쳐도 교회에 도움 안 되면 안 유명하면 사장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지금 와서 루터를 평가할 때 루터도 수상하다고 본 거예요. 왜? 분명히 십자가 전하면 안 유명해야 되는데 유명해져 버렸잖아요. 그러니까 뭔가 중세 상인들과 꿍꿍이속에 협잡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쪽에서 다시 한번 검토하자 말이 나오고 있어요.
교회라는 것은 언약에 의하면, 언약을 보여 주면 그게 교회입니다. 교회 따라 참고 언약 집어넣어서 교회 부흥되는 식으로 신학을 재조립하고 대중들에게 설득하는 그런 것은 교회라 할 수 없어요. 따라서 십자가를 증거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그것이 사도바울 입장에 보면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고 아직도 지금 총신 교수들 전부다 하나같이 외치는 거예요. 교회를 위한 신학이에요. 그래야 총신 이사들한테 납득이 되니까. 그 사람들은 교회부흥만, 정치꾼들이에요. 정치꾼은 힘의 모음이에요.
자, 지금까지 중세철학의 기초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보시면 이 말이, 여러분들이 이 어려운 글들이 이해가 됐을 거예요.
[첫 번째 과정이 전체를 하나로 묶는 보편론에 관한 것이다.] 중세철학이. [보에시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주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성 또는 인간본성이라는 관념은, 온전히 상이한 인간들의 실체적인 유사점을 서로 비교하여 이 유사점을 따로 떼어내어, 즉 추상적으로 생각함으로써 결정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먼저 있고 인간은 그 다음에 나온다. 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한 거예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에 의하면 결국 나중에 나오는 삼위일체 신학에서 삼위가 강조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의 선생이 강조되겠어요? 하나가 삼위일체인데 일체가 강조되겠습니까, 삼위가 강조되겠습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삼위죠. 플라톤에 의하면, 일체죠. 그 논쟁이 삼위일체 논쟁이에요. 삼위 안에 하나가 있다고 본 거예요. 나중에 결론은 삼위 안에 하나 있다고 본 거에요. 그러니까 세 신 안에 한 신성이 있다고 이렇게 보는 겁니다.
처음에는 안 그랬어요. 유대신학은 신이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유대교는? 유일신이죠. 이걸 어떤 사람은 단일신. 그러니까 단일신이냐, 유일신이냐? 하는 문제에요. 유일신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신이 유일신이고, 단일신은 신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단일신이고. 그러니까 삼위일체는 유일신이지 단일신이 아니라고 하는데 처음의 교회는 유대교와 연속성, 그러니까 구속사를 할 때, 이레니우스가 같은 경우가 구속사인데, 구속사를 할 때 구약의 예언한 것이 신약에서 이루잖아요. 따라서 구약의 예언한 것이 실현되려면 구약과 신약의 그 사이에 어떤 충돌이 생겨야 됩니까, 안 생겨야 합니까? 생기지 말아야 된다 말이죠. 그러면 구약에서는 신이 몇 개에요? 신이 하나 아닙니까? 유일신이기 때문에 신약에도 예수님, 성령님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신은 하나임을 강조해서 교회의 신앙을 구축했었습니다. 하나의 신을 인정해서.
그런데 철학에서 제일 문제가 이렇게 나옵니다만 철학에서 문제가 뭐냐 하면, 하나에서 어떻게 다양성이 되느냐 하는 문제. 어떻게 하나라는 것이 다양성으로 전환되느냐? 전화되는 과정, 절차, 이 문제 때문에 골치 아픈 거예요. 이 문제 때문에 자연철학자라 하는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자연 철학자, 스토아학파, 피타고라스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이런 자연철학자들이 있는데 어떻게 해서 하나에서 다양성이 나오느냐? 그 논리와 절차에 대해서 그때부터 철학이 되는데 이건 삼위일체도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해서 삼위일체가 되는가? 할 때에 여기에 초대교부들은 로고스를
로고스라는 것은 플라톤에 의하면 전 문제에 걸려 있는 신성이에요. 동양철학에 들어가면 기죠. 기, 에너지, 신성이란 말이죠. 그 로고스가, 로고스는 왜 있느냐? 진짜 신은 안 보이는데 뭐는 보인다? 로고스가 뭐가 되면서 육신이 되면서 보이는 신이 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로고스라는 말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말씀이거든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까, 말씀이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 두 논쟁을 가지고 삼위일체에서 굉장히 큰 논쟁이 벌어집니다.
말씀이 사람이 된 것은 이것은 안디옥신학이고,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은 이건 라틴신학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버리면 신은 어디 있어요? 사람 속에 있고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버리면 신은 따로 존재하고 육신은 따로 존재하고. 이러면 이건 두 신이 되어버리고 이건 신이 한 신이 돼버렸죠. 이것은 신은 따로 있고 여기는 사람이고 사람 속에 또 로고스와 신성이 있죠.
그래서 제일 처음에 나오는 아리우스주의가 안디옥신학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마리아의 아들이다. 그는 인간 중에 최고의 인간이지만 하나님하고는 격이 안 맞다. 요새 여호와증인하고 비슷하지요. 그래야만 구약의 단일신과 일치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니까 아타나시우스가 뭐라 반대했습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진짜 신이 아니라면 우리 구원문제에서 중간에 다리가 사다리가 깨져 버린다. 인간에서 나와서 신이 될 때 그게 도란스, 또는 직류를 바꾸는 전류를 바꾸는 인간으로 들어와서 신으로 나와야 되는데 만약에 예수님이 완전한 신성이 아니라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자체가 박탈당하죠.
그런데 거기에서 아리우스나 안디옥신학은 그거 이런 식으로 카바할 수 있다. 어떤 식으로? 예수님은 신은 아니지만 인간 중에는 완전한 인간이다. 따라서 모든 말씀을 이뤘다, 다 이루었다, 하면 그럼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꼭 신성시는 안 해도 인간 중에 완벽한 인간이라는 쪽으로 설명해도 되지 않느냐?
그러면 이 논쟁들이 왜 이 논쟁들을 하는 거예요? 나란 존재를 제발 천당 좀 넣어줘. 종교의 임무, 그들은 말하기를 교회의 임무, 종교의 임무가 뭐냐 하면, 일단 점포를 내라. 프랜차이즈, 점포를 해 놓고 사람 많이 꼬셔서 천당 많이 보내 주면 하나님이 많이 기뻐하는 줄 알고 이게 교회의 임무인 줄 알고 있어요.
교회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세웠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면 끝나는데 그게 아니고 사람들 설득시켜서 천당 비어 있을까봐 천당 너무 비면 원래 영화관람 무대 해놓고 사람 없으면 썰렁하잖아요. 천국을 썰렁 않게 하기 위해서 애타는 심정으로 사람들에게 호소해서, 호소하면 먹어준다는 거예요. 성령이 아니고 애끊는 호소력으로 설교하면 감동감화 받아서 신자 된다는 거예요. 그들이 필요한 게 뭐냐 하면, 신자 되고 싶잖아요. 그러면 아까 존재의 디그리, degree of being, 존재의 정도에 따라서 점점 해주면 설득해서 그들로 하여금 구원할 수 있다. 이게 뭐냐? 하나밖에 없는 천국에 다양성,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라 이렇게 보는 겁니다.
오늘 나머지 이것은 내가 이야기한 것 다 들어 있기 때문에 한 걸로 합시다. 이런 이야기 내가 지루해서 못하겠어. 여러분들이 알아서 읽어보시고. 다음 주에는 교회를 넘어서 하고, 그 다음 주는 뭐 하지요?
한번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냥 사랑해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서 사랑의 증거가 십자가로 나타나서 그 대신 죽으심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뭘 첨가하고 뭘 더 보태겠습니까? 일방적으로 강도를 구원해주고 창기를 구원해주고 세리를 구원하신 그 십자가의 사랑의 능력을 마음껏 증거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