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전주형무소에서의 집단학살 사건이
관련 증언, 학살지 및 유해 발굴로 지난달 17일 확인된 데 이어 경북 김천형무소에서도 학살이 자행된 사실이 당시 매장에 동원된 민간인의 증언과
현장발굴을 통해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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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김천시 구성면 송곡리 ‘돌고개’ 주변에서 발굴한 유골. 탄피 3점 옆에 작은 단추 하나가
보이고, 그 옆과 아래에 각각 다리뼈와 갈빗대, 두개골 일부로 보이는 뼛조각들이 있다.
|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민단체인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통합특별법
쟁취 투쟁본부'(이하 진상규명본부)는 9일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 김천형무소에 있었던 1천여 명의 재소자 중 일부가 현 구성중학교 근처
돌고개에 매장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현장 확인 결과, 탄피, 단추, 신발, 유골 등 일부 유해가 확인되어 한국전쟁 직후 김천형무소
수형자들의 학살의 실체가 드러났다고 밝혔다.
진상규명본부 관계자 이춘열(45세) 씨는 "집단학살 시기는 1천여명의 수형자는
1950년 7월 10일 ~ 28일 사이에, 보도연맹원 등 3백여명의 구금자는 1950년 7월 28일라고 판단된다"며 집단학살지로는 "직지사
근처", "김천시 구성면 송죽동 근처", "상주가도" 등 3곳을 당시 증언과 관련자 목격담을 토대로 제기했다. 이번 유골이 발굴된 지점은 당시
수형자의 일부가 매장된 곳으로 앞으로 더 많은 학살지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진상규명 본부는 지난 3월 말 경북 구미에 살고 있는
장사석 유족(79세, 당시 26세)으로부터 남편의 죽음을 밝혀 달라는 진정을 접수하고, 지난 4월과 5월 3차례에 걸쳐서 김천형무소 학살지를
찾기 위해서 김천소년형무소, 구성면 상좌원, 돌고개 등을 탐문 및 현장 조사를 벌였다. 이어 5월 8일 유골 매장지의 정확한 지점을 확인하기
위해 매장지로 추정되는 5곳 가운데 1곳을 시험발굴해 매장지를 발견했다.
아래는 진상규명본부가 작성한 사건에 대한 전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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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후 김천형무소 수형자 집단학살 사건의 실체
1. 한국전쟁 발발 당시 김천형무소 개요
- 한국전쟁 발발시 김천형무소는 제주4.3사건 및
여순사건 관련자 등 1,000여명의 수형자가 존재했으며
- 당시 형무소는 경북 김천시 평화동(현재 김천역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 당시 김천형무소는 1950년 10월 25일 기준 직원 정원은 149명이었으며, 그 구성은 형무소장 이하 148명으로
1949년 5월 1일 기준 160명, 1949년 12월 20일 기준의 176명에 비해 감소했다.(김천소년교도소 발행, "김천소년교도소사", p
50, 2002년 6월 24일 발행) 또한 안동지소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대형감옥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실제 직원 수는 김수현
소장을 포함하여 103명에 1,000여명의 재소자를 수용하고 있었다.(김천소년교도소 발행, "김천소년교도소사", p 51, 2002년 6월
24일 발행) 하지만 이 숫자가 전쟁 직전의 숫자인지 1950년 9월 12일 이후의 상황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 전쟁
직전의 직원 정원이 176명에 비추어 보면 1천명이 훨씬 넘어 섰을 것으로 보인다.
- 김천형무소는 북한 인민군이 남하를 계속하자
7월 10일 재소자를 대구형무소에 이송한 후 직원들도 대구, 부산 등지로 대피하였다(김천소년교도소 발행, "김천소년교도소사", p 51,
2002년 6월 24일 발행)고 적고 있으나 이에 대한 기록이 아직 확인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번 수형자 일부의 유골이 발굴됨으로써 전원
집단학살이 확인되었으며, 7월 10일이라는 날짜도 인민군의 남하 일시와 비교하면 정확하다고 보기 어렵다.
2.
김천형무소 학살 사건 개요
- 김창룡 당시 육군 정보국 제4과장(특무대장)이 김천에 머물면서 예비검속으로 수감되었던
'국민보도연맹원'과 기결수. 미결수들의 학살을 직접 지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근구 편저, "김천시지", pp 282~283, 1989년
10월 15일 김천문화원 발행)
* 국민보도연맹 : 1949년 10월 30일 일시 좌익활동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국민을 보호 선도할
목적으로 정부가 창설한 단체로 이승만 정부는 공산주의자는 물론 이에 가담했다가 형을 받았거나 기소유예 처분자, 자수자 등을 이 연맹에
가입시켰다. 뿐만 아니라 좌익활동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 김천시보도연맹 : 당시 김천시보도연맹이 언제
결성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김천검찰지청장이 위원장, 부위원장에 정열모, 지도위원으로 경찰 간부와 지역 유력인사가 임명됐으며 당시 선산의
박상희, 상주의 황성태와 더불어 경북 서부지방 3대 공산주의자로 이름난 임종업이 간사로 활동했다. 임종업 은 김천보도연맹 간사로 있으면서
가맹 자격을 확대하여 여러 장의 신청서를 나누어 주면서 아무나 가맹 신청서에 도장을 받아 오게 해 연맹원이 천명이 넘었다. (이근구 편저,
"김천시지", pp 282~283, 1989년 10월 15일 김천문화원 발행)
-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과 좌익활동혐의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6월 25일 당일 오후 2시 25분 치안국장의 명의로 각 경찰국에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이라는 전화통지문이 긴급 하달되었으며 이 통지문에는 '전국 요시찰인 전원을 즉시 구속할 것'과 '전국 형무소
경비를 강화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p 354, 2003년
4월)
-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시 전국의 20여 형무소와 지소는 법무부 관할하에 있었는데, 1950년 7월 8일
전남과 전북지역을 제외한 남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때(대한민국 정부 공보처, "관보" 제383호, 1950년 7월 8일)부터 1950년
11월 7일 남한 전지역의 비상계엄을 해제하면서 같은 날 제주도와 경상도의 남부지역을 제외한 남한의 대부분지역에 경비계엄을 선포한 시기(대한민국
정부 공보처, "관보" 제406호, 1950년 11월 7일)까지 경찰, 검찰, 법원 조직 등은 모두 군의 관할로 귀속되었고, 이에 따라
계엄사령관이 예비검속을 주관하게 되었다.
- 김천지역에서의 예비검속은 인근 지방인 성주, 구미를 포함하여 이루어 졌으며 이들은 각
경찰지서에 있다가 김천경찰서로 넘겨진 뒤 김천형무소에 구금되었다고 유족은 증언하고 있다.(정사석 유족의 증언, 여, 79세, 당시 26세,
남편이 끌려 감) 당시 이 지역에서 예비검속으로 불법 체포, 구금된 인원이 몇 명이었는지는 자세하지 않지만 보도연맹원이 1천여명이 넘은 것으로
보아 상당한 인원이 예비검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로 나중에 보도연맹원 가운데 적어도 300백 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근구
편저, "김천시지", pp 282~283, 1989년 10월 15일 김천문화원 발행) 김천지역 보도연맹원이 학 살·매장된 곳은 김천시
구성면 과곡리 대방이재(지역명 : 댓뱅이고개) 근처 골짜기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음은 김천군지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김천은
이들을 경찰서에 집단 수용했다가 협소해 교도소로 이송한 후 공산군의 남하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대전에 이르렀을 때 군당국에서 이들 연맹원 전원을
즉결처분하기로 전국에 작전명령을 내렸다.
이는 소개령이 내리기 2일전인 7월 28일 새벽부터 연맹원을 인수한 헌병당국이 연맹원의
진위도 가리지 않고 전원 트럭에 분승시켜 삼엄한 경호하에 직지사 근처, 구성면 송죽동 근처, 상주가도 (과(가)막)로 천막을 씌운채 호송해
산골짜기에서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한 후 도열시켜 총살했다. 송죽동에서만도 트럭 5대로 호송했는데 수는 300명으로 추산되고 이 지방 전체
희생자는 천명 정도로 추측된다. 이들 가운데는 좌익경력이 없으면서 친구나 측근의 권유로 보도연맹 입맹원서에 단순히 서명해 준 탓으로 끌려가서
희생된 사람도 상당수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근구 편저, "김천시지", pp 282~283, 1989년 10월 15일 김천문화원 발행)
- 이렇게 볼 때 김천형무소 학살 사건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0
집단학살 내용
㈀ 김천형무소의 수형자 약 1,000여명 집단 학살 ㈁ 예비검속으로 김천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던
보도연맹원 등 약 300여명 집단학살
0 집단학살 시기
㈀ 수형자 : 1950년 7월 10일 ~ 28일
* 몇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는지는 아직 파악되지 못했다. ㈁ 보도연맹원 등 구금자 : 1950년 7월 28일
0 집단학살 및 매장지
위에서 인용한 김천시지에 따르면 집단학살지로 "직지사 근처",
"김천시 구성면 송죽동 근처", "상주가도" 등 3곳을 당시 증언과 이 책의 편저자인 이근구(김천 향토사학자)님의 목격담을 토대로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근구 님은 김천시지를 작성할 당시에 기결수가 집단학살 당한 사실은 알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 목격한 것도 사복차림의
보도연맹원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번 유골이 발굴된 지점은 당시 수형자의 일부가 매장된 곳으로 앞으로 더 많은 학살지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 수형자 : 김천시 구성면 송죽동 근처 돌고개 계곡(실제 매장자의 증언 있음) * 당시 김천형무소에서 거창
방면으로 약 14Km 떨어진 곳임. ㈁ 보도연맹원 등 : 김천시 대뱅이재 근처 계곡(추정)
* 직지사 근처 계곡에서
집단학살 당한 사람들이 수형자인지 보도연맹원인지는 정확하지 않음. * 기타 구성면 과곡의 난로공장 자리 계곡도 학살지라는 진술이 있지만
현지 주민(이주민)은 처음 듣는다고 함. 다만 인민군이 그곳에 주둔했다고 함. * 당시 수형인원이 1천명이 넘는 것으로 보아 며칠에
걸쳐서 여러 곳에서 학살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형무소에서 거창 방면으로 오는 길가의 계곡들에 작은 학살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됨.
3. 집단학살·매장지 발굴을 통해 본 김천형무소 수형자 집단학살 진상
0 조사경과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통합특별법 쟁취 투쟁본부는 농성기간 중에 3월 말 경북 구미에 살고 있는 장사석 유족(79세, 당시
26세)으로부터 남편의 죽음을 밝혀 달라는 진정을 접수하고, 지난 4월과 5월 3차례에 걸쳐서 김천형무소 학살지를 찾기 위해서 3차례에 걸쳐서
김천소년형무소, 구성면 상좌원, 돌고개 등을 탐문 및 현장 조사를 벌여, 교도관, 지역 주민 등과 접촉하면서
- 현재
김천교도소에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의 수형자 명부가 존재하고 있지 않으며 1950년 9월 12일 이후에 작성된 수형자 명부만 보관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지역에서 실제로 매장 구덩이를 파는데 동원된 구성면 상좌원 주민을 만나 당시의 상황의 증언을 확보하였으나 우천관계로 학살·매장지를
답사하지 못하고(제1차 조사 : 이창수 상황실장, 범국민위 정책기획실장) 제2차 조사시 이 산 주인의 협조로 직접 구성면 소재 돌고개 계곡을
현지조사하여 당시 총살로 집단학살 시킨 장소를 확인하고 학살 이후 수년동안 유골이 병에 좋다는 속설에 의해서 다수 훼손되었으며 실제로 유골이
노출되어 왔다는 증언을 확보했으나 일몰 등의 이유로 매장지를 발굴하지 못했다.(제2차 조사 : 이창수 투본 상황실장, 남인우 상황팀장, 한대수
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
이어 5월 8일 유골 매장지의 정확한 지점을 확인하기 위해 매장지로 추정되는 5곳 가운데 1곳을 시험발굴해
매장지를 발견했다. 약80센티 미터를 파 들어가는 지점부터 유골들의 잔해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는 토양에 따라서 유골 부식의 속도가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탄피 3개, 신발 1족, 단추 1개 및 두개골 등의 유골을 일부 수습하고 유골 매장상태가 양호한 지점에서
확인작업을 중지하고 다음에 공개 발굴하기로 결정하여 취재요청서를 각 언론사에 송부하였다.(제3차 조사 : 이창수 투본 상황실장, 이춘열 범국민위
운영위원, 남인우 상황팀장, 이재정 고양금정굴 대책위 회원)
0 개요
김천형무소 수형자들은
1950년 7월 10일부터 7월 28일 사이에 김창룡 특무부대장의 지휘하에 국군(헌병)에 의해 조직적으로 집단학살 당했다. 이 가운데 이번에
발굴된 학살·매장지인 김천시 구성면 소재 돌고개 계곡의 경우에는 당시 헌병 복장을 한 10명 내외 군인의 주도로 주민과 미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주변 도로를 차단하고 외부와 학살지를 완전히 단절시킨 상태에서 약 60여명의 수형자들을 집단학살했다.
당시 군은
구성지서장의 뺨을 때리는 등 구타하면서 구덩이를 팔 인부로 동네 주민들을 동원하지 않았다고 행패를 부리며 돌고개 아랫마을인 구성면 상좌원 주민
4-5명을 동원 시켜 구덩이를 팠다. 이 때 군 지휘관은 권총으로 이들 주민들 머리를 툭툭치면서 "너희도 사상이 의심스러워 눈도 돌리지 말고
구덩이를 파라"고 협박하여 약 5~6개의 구덩이를 파게 한 뒤 미리 데려온 수인복에 삭발을 한 김천형무소 수형자 60여명을 그 구덩이 주변에
서게 한 뒤, M1, 권총 또는 칼빈 총으로 뒤에서 발포, 모두 구덩이속으로 처넣고, 동원된 마을 주민들에게 매장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피학살 수형인들 가운데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가 하면, "어머니에게 알려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또 매장을
한 뒤에도 아직 죽지 않아서인지 매장한 위가 울렁울렁거렸다고 당시 강제 동원된 마을 주민들은 증언하고 있다. 또한 이 때 군인들은 이들의 학살
사실을 가족은 물론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하도록 했다.
0 이번 발굴에서 새로 알려진 내용
- 김천형무소의 수형자들의 집단학살의 실체가 처음 밝혀졌다. - 김천형무소의 수형자 가운데 1950년 9월 12일
이전의 수형자(보도연맹원으로 일시 구금된자들 포함)에 대해서는 기록이 파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집단학살은 김창룡 특무부대장이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 피학살 수형자의 매장에 마을 주민을 동원했다. - 당시 수형자 1000여명이 모두 학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보도연맹원의 학살과 수형자의 학살은 분리해서 이루어 졌다.
0 더 밝혀야 할 것들
- 당시 보도연맹원 등의 이유로 구금/학살 당한 정확한 숫자 - 다른 수형자 학살지의 추가 발견 및 발굴 - 학살의
정확한 날짜와 학살 횟수 및 총규모
0 이번 발굴의 의의
- 김천형무소 수형자들의 학살이 실제로
행해 졌으며 법무부 등의 공식 입장인 인근 형무소(대구형무소) 이관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 사실상 국가차원에서 조사가
끝났지만 밝히지 못했던 제주4.3사건 관련 기결수 가운데 김천형무소 수형자들의 실종이 집단학살이라는 실체가 드러났다. - 대전형무소,
전주형무소에 이어 김천형무소의 학살/매장지를 발견해 전쟁 발발 초기에 20여개의 형무소 수형자들이 실제로 군에 의해서(최고위층의 관련 여부는
아직 모름) 조직적이고 집단학살되었을 개연성이 더욱 높아 졌다.
- 김천지역의 학살(김천만 하더라도 이 과정에서 보도연맹의 학살이
있었다는 점과 모아면 동암1리의 국군선발대에 의한 집단학살이 있었다는 점 등을 부수적으로 파악했다)이 굉장히 다양하고 광범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을
확인했다. -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 통합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이 시급하다는 점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 참조 01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총서, "전쟁과 집단학살"(범국민위원회 간, 2003년) 130p
공동묘역을 파헤치고 비석을 파괴하는 현장 지휘자, 강 서장(제주도 안덕면 상창리 속칭 모록밭, 일제 때 학병 출신, 4.3사건 당시
홍순봉 제주도 경찰국장 휘하에 있었음, 1998. 11월 육지 부에서 운명)의 심정도 상당히 괴로웠을 것이다. 그의 바로 밑의 동생(제주
농업학교 재학중)은 4.3 사건 전에 자원하여 산에 올라갔다가 토벌대에 투항(피신한 마을 주민들 110여명과 함께), 군법회의 재판에서는 무죄로
판정 석방되어 귀가하여 칩거하고 있었으나, 악질적인 경찰들이 다시 그를 체포, 민간 재판에 회부, 징역 3년을 언도받고 김천 형무소에서 수감되어
있었다. 6.25 동란이 나자 퇴각하는 아군에 의해서 수감자 전원이 "싹쓸이"되어 버렸다 (강용택씨 증언, 강 서장의 둘째 동생, 1999.
5월 증언).
# 참조 02 제주4 3사건진상조사보고서 498p~499p
'1948년 군법회의'로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람들 가운데 무기징역 24명은 1949년 3월 4일에 대구형무소에 이송되었다. 징역 15년형 202명은 목포형무소에 수감된 지 얼마
없어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징역 10년형 5년형 일부는 김천형무소(필자 강조)로 이송되었다가 1950년 4월 28일 부천형무소로 옮겨졌다.
목포형무소에서 진주형무소로 이송된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 대구형무소에 있던 10여 명은 1950년 1월 14일 17일 양일에 걸쳐서 부산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전주형무소 수감자 일부는 형무소가 비좁아져서 1949년 4월 안동형무소로 이감하였다.
# 참조 03
〔도표6〕계엄령 선포 이후 명령체계(1950년 7월 8일 이후)
〔출전〕국방부, 국방부사 제1집, 1954, 15∼29쪽;
육군본부, 육군발달사 상, 1970, 771쪽을 바탕으로 재구성. 〔비고〕은 공식적 명령계통을, 은 비공식적 명령계통을 표시한 것임.
결국 학살에 대한 명령체계은 경찰의 경우 내무부 치안국 도 경찰국 시·군 경찰서 파출소·지서의 순으로 이루어졌으며, 명령은
전언통신문의 형태로 하달되었고, 각 지서에서 파악하고 있던 마을의 보련원에 대한 모든 정보와 명단을 본서에서 수합한 후 이를 바탕으로
학살대상자를 선정하고 소집·학살했음을 알 수 있다. 군의 경우는 6월 28일 군의 명령계통을 통해 보련원에 대한 처리방침이 방첩대에 하달되었고,
그 책임자까지 임명되었으며, 헌병대의 경우도 이미 7월 초까지는 보련원과 반정부혐의자에 대한 처리방침을 하달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계엄령의 선포된 이후부터는 기존에 각각 독자적인 명령체계를 통해 수행되던 경찰과 특무대, 헌병대의 보련원 처형이 계엄사령관을 중심으로한 각 지역
계엄사령관의 지휘·명령체계속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 참조 04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대구경북 공동조사단 발족식 일
시 : 2000년 11월 2일 1. 조사대상 지역 현재 경상북도의회 양민학살진상규명특별위원회에서 조사한 내용과 피해접수 건을
중심으로 1차 조사를 실시하고, 이후 아직까지 규명되지 않은 학살지와 사건에 대한 증언수집 및 발굴사업을 실시한다. 먼저 1차 핵심 조사
대상지는 다음과 같다(도의회 보고서에 기반한 것임).
- 포항시 북구 여남동 송골계곡 - 포항시 북구 흥해읍 북송리
- 포항시 북구 송라면 광천리 하천 - 포항시 북구 청하면 이가리 - 경주시 내남동 노곡리 개무덤 - 김천시 남면
봉천리 봉천천 - 안동시 풍산읍 하리제방 - 안동시 북후면 석탑동 청골 - 구미시 형곡동 사창마을 - 영주시 봉현면
노좌리 - 경산시 평산동 대원골 폐코발트 광산 - 문경시 문경읍 갈평리 - 의성군 금성면 제오 2리 - 청송군
부남면 이현동 - 청송군 현동면 거성리 - 영양군 영양읍 대천1리 - 영덕군 영덕읍 화개2리 뫼골 - 영덕군 지품면
원전리 각별계곡 - 청도군 곰티재 - 고령군 성산면 득성교 - 고령군 우곡면 월오리 - 고령군 대곡면 반성2리
- 칠곡군 왜관읍 왜관교 -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 예천군 용궁면 상택리 원당고개 - 예천군 감천면 진평리
- 봉화군 춘양면 소로리 관석 궁이굴 - 울진군 근남면 산포3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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