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루터의 탑경험(turmerlebebnis), 믿음의 의롭게 됨 -
로마서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ㄱ)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6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종교개혁에 대해서 탐구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영생에 관한 진리의 영접에 관한 것이며, 또 진리가 어떻게 유지되고 계승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죽는 이유를 알지 못하며, 죽음 뒤의 공간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은 사는 이유에 대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원리적인 사유는 포기하고 사회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어 살면서 시간이 되면 죽어 나갈 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고뇌하며,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참 진리를 파악하며 진리로 살다가 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면 자유롭게 될 것”(요 8:3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생의 구조 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 고뇌가 심해져서 약한 정신병 혹은 심한 정신병이 있게 됩니다. 첨단기술문명과 첨단의료사회에서 정신병이 증가되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본질적인 문제를 찾지 않으면 일반궤도에서 이탈할 위험이 너무나 큽니다. 인간의 자연, 본질에 대한 자연스러움과 또 인간을 있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사명에 대해서 인지한다면, 진리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게 하시는 이를 성령, 보혜사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영, 보혜사께서 임하시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믿으며 의지하며 주님의 멍에를 함께 메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여정을 보여준 대표적인 믿음의 선진은 마틴 루터입니다.
1512년 어느 날 루터는 수도원의 탑 혹은 비텐베르크 교수실에서 '탑의 경험' (turmerlebebnis)으로 칭하는 회심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루터의 오랜 신앙의 방황이 종지부를 찍는 경험입니다.
루터는 1505년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벼락에 죽었다, 옆에서 죽었다 등등)에 충격을 받고, 아버지가 제언한 법학을 공부하려다가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수도원에서 사제가 되었고 끊임없는 영적갈등을 겪었습니다. 루터는 중세 교회가 권위를 중시한 가르침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최선을 다하는 인간에게는 은혜를 주실 것이라는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조건적인 공로를 얻게 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예비적 은혜(prevenient grace)에 힘입어 거룩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가르침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선한 행위, 즉 온전한 공로에 기초하여 인간은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존재가 된다는 이론이었습니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수 많은 고행을 통해서도 양심적으로 자유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재량공로(meritum de congruo)이건 적정공로(meritum de condigno) 수 많은 고뇌 속에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강의했습니다. 루터는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을 강의하면서, 로마서 1:16-17에서 결정적인 답을 찾았습니다.
첫째,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16절).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됩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확신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구원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루터는 1521년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루터는 주저하지 않았으며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복음, 하나님의 능력,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일에도 부끄러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복음을 감추거나 그 복음에 소극적인 것이 부끄러운 것이며 반역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둘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16절). ‘하나님의 의’는 루터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혹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의 의’로 치환해서 제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의 의로 치환하면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는 구도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구도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은 그리스도의 의의 성분에 대해서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연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첫째 요소는 죄사함이며, 죄사함으로 주어지는 거룩한 삶과 영생의 선물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의 은혜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댜(17절, ἐκ πίστεως εἰς πίστιν). 우리시대에는 ‘믿음(πίστις)’에 대한 규정을 하려고 많은 논의를 합니다. faith가 아니라 faithfulness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선언도 faith가 아니라 faithfulness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faithfulness는 ‘충성’으로 번역되다가 ‘신실함’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faith는 ‘믿음’ 혹은 ‘신앙’입니다. 믿음은 대상으로 인도하고 붙들도록 하는 도구이고, 신실함은 그 성품이 1차 목적이고 최종 목적을 바라보게 합니다. 믿음에서 믿음은 두 종류의 믿음이 아니고, 성숙한 믿음의 정진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들도록 합니다.
넷째, 그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17절). 루터는 믿음의 체계에 모든 근심과 염려와 불안을 떨쳐 버렸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근심과 염려와 불안이 업습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믿음을 주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구하기 때문에 근심과 염려와 불안이 사라지기도 하고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신자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도록 십자가 신학을 외쳤습니다. 이 믿음의 교리는 로마서 1:17 말씀이지만, 사도행전에서 고넬료에게 세례를 준 베드로의 행동이었고,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공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입니다. 할례자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주의 종은 세례를 베풀어야 합니다. 무할례자의 교회와 할례자의 교회가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믿음은 모든 장벽을 헐고 연결하는 하나님의 선물, 도구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3-18)
루터는 탑경험을 통해서 진리에 대한 확증을 했고, 확증된 진리는 그가 이단으로 정죄되어도 두렵지 않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이단을 너머 살해의 위협 속에서도 주어진 진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루터가 가진 진리의 확증은 인간적 아집이 아니라 성령의 돌봄으로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인간의 아집과 성령의 역사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전파의 차이에 있습니다. 루터로 말미암아 잠재되었던 그리스도의 복음이 회복되었고, 그 복음은 세계 만방에 개혁교회를 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루터가 확증한 그 진리에 동의하면서 종교개혁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루터를 믿음의 합당한 선진으로 생각하고 종교개혁을 탐구합니다. 한 믿음에 여러 종파가 있는 것은 믿음의 사람의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믿음이 같다면 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고, 믿음이 다르게 보일지라도 주 예수의 믿음과 증진이 같다면 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주 예수를 왜곡하는 다른복음은 주의하며 배격해야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가장 아름다운 보암직한 먹음직한 탐스러운 다른복음으로 유혹합니다. 다른 복음을 배격할 유일한 근거는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 예수 그리고 하늘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어린양 우리 주 예수, 만유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명확하게 믿어야 합니다. 교회가 예수의 복음을 감출 수 있다는 것은 중세 교회가 증명했습니다. 칼빈은 유사한 형태를 유대교가 했다고 제언합니다. 그러한 폐단은 현재 교회도 피할 수 없습니다. 빛의 자녀들의 빛을 말 속에 넣어둘 수 없습니다. 빛을 발하싶시오. 복음을 전하십시오. 복음을 변증하십시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종들이여!! 구원,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복음을 전합시다. (*)
*2024년 1월 14일 주일예배 설교 고경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