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표 문화연필
정희승
어떤 사람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왜 그것들이 존재하느냐고 물어본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사물들을 꿈꾸면서 그것들이 왜 존재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Prost)
<필자주: 본문 문단 번호는 비평의 필요상 임의적으로 넘버링했습니다>
연필이 백지를 앞에 두고 살을 벗는다. 신성한 백지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목욕재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죄악과 탐욕으로 물든 몸뚱이 그 자체를 벗어야 한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그리움을 쓰기 위하여 비장한 마음으로 결국 몸을 벗는다.<1>
아, 관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시체처럼 꼼짝없이 누워 지냈던가? 외롭구나. 정말 보고 싶구나.짓누르는 어둠 밑에서 사향각시처럼 얼마나 자주 무겁게 탄식했던가?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몸 안에서 맴돌다 결국 살이 되어 버린 부질없는 독백의 회한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싱싱한 날것으로 살아나는 생살들, 그래 이제는 가거라. 죽어도 썩지 않는 향기로운 살점들아<2>
살을 저밀 때마다 신경들이 심하게 경련한다. 비릿한 근육들이 고통스럽게 꿈틀거린다. 떨어져나간 살점들은 발바닥에서 파닥거리기도 하고 숭어처럼 허공으로 튀어 오르기도 한다. 얇게 뜬 생살일수록 푸른 서슬을 경쾌하게 차고 오른다. 간혹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물살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도 있다. 연필은 그렇게 자신의 몸에 갇힌 말들을 고통스럽게 썰어서 세상에 내보낸다<3>
살을 벗은 자리에는 검고 견고한 중심, 광물질 침묵이 드러난다. 그 광맥에는 문법은 물론 모든 수사가 잠들어 있다. 말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것도, 말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파롤의 원천이 되는 무정형 랑그(langue)가 모든 빛깔을 갈무리한 채 묻혀 있다.<4>
연필은 자신의 피를 준樽(술통)에 담고 살점을 조에 올려놓고 물소 뿔잔을 높이 쳐들어 외친다. 사방에 엄정하게 도련을 쳐서 성역을 부동의 의지로 고수하고 있는 백지여, 신선한 공허지여! 이제, 칼날 같은 경계를 넘겠나이다. 그곳에 들게 하소서. 유목의 길을 허용하소서 <5>
그러나 그곳을 지키는 사제는 조급하게 성지를 넘보는 순례자를 결코 환영하지 않는다. 불온한 방랑자가 신선한 땅에 첫발을 내디디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대는 아직도 요건을 갗추지 않았다. 이곳은 그대의 가쁜 숨결, 거칠고 부르튼 맨발로는 결코 들어올 수 없다. 하얀 잉어나 잡티 하나 없는 흰 소를 희생으로 요구하지 않겠다. 등에 성좌도를 짊어진 천년 묵은 거북을 요구하지도 않겠다. 그대, 진실로 이곳에 들기를 원한다면, 진실로 이곳에서 소멸되기를 꿈꾼다면, 중심의 중심으로 걸어오라. 그곳에 그대 몸을 싣고 오라.<6>
바람이 분다. 사품에 벽지 몇 장이 바람에 휩쓸려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그 종이들이 팔랑거리다가 방 여기저기에 두서없이 떨어져 드넓은 사막으로 변한다. 갑자기 책상위에는 아라비아와 고비사막이 방바닥에는 사하라 사막이 펼쳐진다. 연필은 오릭스나 림 영양도, 심지어 까마귀도 이미 오래전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아라비아 사막의 어느 한 경계에 선다.<7>
아직은 동이 트지 않았다. 모래 냄새를 맡은 낙타가 연필 속에서 길게 목을 빼고 코를 벌름거린다. 너무도 친밀하고 익숙한 냄새, 낙타는 발굽 밑에서 소금 덩어리가 잘게 부서지던 먼 기억을 회상하며 푸른 울음을 운다.<8>
연필은 진실로 갈증의 의미를 안다. 책상 위에는 촛불이 소리 없이 타오르는데, 광활한 사막을 앞에 두고 겸허한 마음으로 뼈를 깍는다. 사각사각...... 한 점으로 수렴되도록 언어의 원석을 조심스럽게 깍아낸다. 중심을 날카롭게 벼린다. 연필은 결국 그렇게 심마저 벗는다. <9>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살로 써서도 안 되고 살로 사랑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뼈로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오로지 중심의 중심, 몸과 언어의 소실점으로 글을 쓰고 사랑해야 한다.<10>
-정희승, 「낙타표 문화연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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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면서
수필의 교과서로 불리는 피천득은 「수필」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들에게 하이데거 후손의 ‘존재자’란 인식표를 달아 놓고 있다. 여기서도 '낙타표 문화연필'은 자신의 ‘원형적 관념’을 폐기당하고 대신 어떤 새로운 ‘원형적 존재성’을 작가로부터 부여받아 이 세상에 새롭게 태어난 하이데거 후손으로서의 ‘존재자’다. 보통 수필쓰기에 앞서 부제 테마로 인용문을 제시하는 예는 드물지만, 이 수필에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존재에 대한 사고’를 소환한 것은 바로 사물에게 ‘원형적 존재성’을 부여하고 인격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존재자’로 탄생시켜 글맥을 풀어가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수필에 찰학적 사유를 소환하는 지성적인 창작수필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2 하이데거의 존재이론 소환
그러므로 본 작품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글맥의 중심으로 소환 된 하이데거의 ‘존재이론’에 대한 기본인식을 필요로 한다. 하이데거 이전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고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집약되었다. 과연 ‘생각하는 것만으로 인간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취약점을 보완 한 것이 하이데거다. 그는 인간은 ‘죽음의 필연성’을 인식함으로써 더욱 철저하게 사고하고 남을 배려한다는 종교적 해석을 도입하여 사물 인간과의 유기적 상관관계를 주시하여 인간은 ‘현존재’ 사물은 ‘존재자’라는 ‘실존 프레임’을 구축하였다.
정희승은 연필을 의인화하여 인격을 부여함은 물론 철학적 사유라는 '내면 인식의 옷'을 입힌다. ‘원형적 관념’을 배제시키고 의인화하여 새로운 ‘존재자’로 탄생시키기 위해서다. 결과는 어땠을까? ‘존재자’로서의 연필에게 부착된 ‘낙타표’와 ‘문화’라는 상표도 더불어 ‘존재가’가 되어 단순한 랑그(language)에서 활유가 가능한 빠롤(parole)로의 전환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낙타표 문화연필」은 존재론적 형이상학의 '실존 프레임'속에서 독자와의 진지한 말 걸기를 시도하게 된것이다. 그러한 빠롤, 즉 말걸기는 물론 수필의 주제인 '진정한 문학의 길로써의 글쓰기방법론'이다. 참신한 글맥의 설정이다.
3. 성스러운 신전, 진정한 문학의 길로 가는 비결
이러한 하이데거의 ‘실존 프레임’을 염두에 두면서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본다. 먼저 그러한 ‘실존 프레임’의 프리즘을 우선 전반부(1-7) 행간 속으로 밀어 넣어 보자. 낙타는 작가의 은유로 새롭게 부활하여 현존재(인간)가 되어 있다. 문화연필은 그러한 작가가 감내해야 할 문학과정 즉 스스로 몸을 깎고 살을 발라내고 희생을 감수하는 존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테이블 위 하얀 종이는 연필에서 나온 현존재로서의 낙타(작가 자신)가 가야할 사하라 사막이 되고 있으며 그 종착지인 문학은 성스러운 신전으로 세워졌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문학세계인 신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 성지를 넘보는 순례자나 불온한 방랑자”가 아니어야 하며 “하얀 잉어나 잡티 없는 흰 소가”가 아니라 바로 낙타(작가 자신)을 제물로 바쳐야 진정한 문학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후반부(8-9)로 더 들어가 보자. 문화연필 속의 낙타는 작가(현존재)로 부활하여 목을 길게 빼고 (문학에 대한) 갈증을 느끼며 성스러운 신전을 향한 사막(하얀종이)으로 들어선다. 낙타가 걸어가는 방향은 오로지 ‘중심’을 향해야 한다. ‘중심’은 작가가 지향하는 문학의 길에 대한 ‘존재’로써의 의식의 본체다. 그러한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선 벼리고, 벗으며. 깍아내고, 갈려나가는 겸허한 희생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사각사각....한 중심점으로 수렴이 되도록 언어의 원석(연필심)을 깍아내야 하듯이...
4. 나오는 말 : 피천득을 위협하다.
《낙타표 문화연필》은 우리에게 전정한 글쓰기에 대한 방법론을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차용하여 은유와 활유로 토로하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낙타가 사막의 성스러운 신전을 향해 중심을 견지하며 겸허만 자세로 종단하는 것“이란다. 살로 써서도 안 되고 뼈로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강조한다. 오로지 ”중심의 중심, 몸과 언어의 소실점으로 글을 쓰고 사랑해야 한다“고 마침표를 찍는다. 문학적 철학적 인식을 글맥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이 수필은 사물로서의 ‘존재자(연필) 와 인간으로서의 현존재(낙타=작가 자신)라는 하이데거의 ”실존의 프레임“을 그러한 글맥의 틀로 삼았다는 점에서 피천득 《수필》에 바짝 다가 선 보기드문 창작수필의 진수를 보여준 문학·철학적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2023.4. 29 구이서재 아침 悳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