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선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성빈은 동학농민봉기에 참가하였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문경에서 3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복무하였다. 군인이 되고픈 평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40년 만주국 군관학교에 입학했으며, 194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1944년 만주국 만주군 장교로 부임하여 러허성 북부 지역에서 중국군과 대치중에 해방을 맞았다.
귀국한 뒤 국군 창설에 참가하여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 (육군사관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하였다. 혼란기에 남로당의 군 조직에 가입했다가, 1949년에 체포되어 위기를 맞았으나, 군 수뇌부의 도움으로 출옥하였다. 6.25 전쟁 중에 현역으로 복귀한 뒤 사단장, 관구 사령관, 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 군사 쿠테타를 주도하여 집권에 성공했으며, 민정 이양 후 1963년 제 5대, 1967년 제 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기간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베트남 파병을 결행했으며, 수출주도공업화정책을 추진하였다. 1969년 대통령 3선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강행한 뒤, 1971년 제 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2년 10월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새 헌법을 제정하는 또한 차례의 정변을 일으켰으며 (10월유신), 새 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 8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후 자주국방을 위한 중화학공업화와 새마을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1978년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그의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거세져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는가운데 1979년 10월 측근과의 만찬도중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으로 사망하였다.
두 차례의 큰 전쟁과정에서 군인으로 교육받고 입신한 그의 정신세계는 타협과 조정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민족의 사대주의, 자주정신의 결여, 게으름, 명예심의 결여를 증오했으며, 그 결과로 빚어진 민중의 고난과 가난에 근원적으로 분노하였다. 그는 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는 데 소수 엘리트의 지도적 역할을 중시하였다.
그는 민주주의에 관해 개인의 이기심에 기초한 서양식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족과 국가에 대한 헌신에 기초한 민주주의로서 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되는 민족적 또는 행정적 민주주의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같은 박정희의 정치사상과 통치방식은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가 추진한 개발정책과 외교정책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자, 비타협적 권위주의로 바뀌어 갔다.
그의 권위주의적 통치는 한국 사회에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온 성장의 잠재력을 최대로 동원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그의 집권기에 한국 경제는 고도성장의 이륙(take off)을 달성했으며, 사회는 혁명에 가까운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그는 측근의 부정부패에 대해 엄격했으며, 스스로 근면하고 검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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