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불란서 출신으로서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를 역임한 르네 지라르 Ren Girard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구체적 문학텍스트에 적용하여 보려는 시도이다. 여기서 필자는 그의 이론과 개념을 단지 문학학의 차원에서 엄격한 텍스트 분석을 위해서 적용하려기보다는 문학비평의 의도에서 그 가능성과 한계를 묻고 탐구하고자 한다. 문학학이 엄밀한 개념과 이론에 의지하여 문학작품을 분석하고 그것의 문학·문화사적 내지 정신사적 의의를 객관적으로 밝히려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문학비평은 과거나 현재의 구체적 문학 텍스트를 이해하여 평자가 속한 현재의 개인 및 공동체 삶의 정신적 문제에 대해 주관·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개선을 꾀하려는 참여의 태도로부터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문학학자가 도덕적 가치 판단에 대해서 - 막스 베버의 전통을 따라 - 중립적 입장을 취하려는 경향을 띠는 반면, 문학비평가는 자신의 지적 능력에 의지하여 행한 문학분석을 매개로 자신의 세계관과 신념을 표현하며, 바람직한 인간과 사회의 진행방향에 대한 소망을 발설한다. 물론 이런 구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상호침투적이다. 더구나 이론이 백지상태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발생에 항상 합목적적 인식관심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문학학은 넓은 의미에서 항상 문학비평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지라르는 그의 이론에 의지하여 단지 냉엄하고 객관적 문학분석을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더 나은 인간의 삶, 즉 이를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인간(사회)의 파괴적 폭력성이 극복되는 삶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이론은 문학비평의 가능성을 정초하기 위한 하나의 이상적 단초를 제공한다.
지라르의 학문적 성장과정은, 현재 어문학적 연구대상의 한계를 넘어서서 문화학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자하는 현 한국독문학계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사료된다. 하지만 그의 한국에서의 수용은 불문학자들, 특히 작고한 김현과 약간의 국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을 뿐, 한국독문학계에서는 그리 활발한 수용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필자는 우선 본고의 서두에 지라르의 학문적 이력을 짧게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1923년 12월 25일 불란서의 아비뇽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이후에 파리의 고문서학교 Ecole des Chartes de Paris에서 중세역사를 전공하였으며 1947년 {19세기 후반 아비뇽의 사생활 La vie priv e Avignon dans la seconde moiti du XIXe si cle}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후 미국여행을 통해 미국대학의 지적 자유분위기를 경험한 그는 아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역사학 연구를 계속한다. 1950년 인디아나 대학에서 {1947-43년간의 미국의 프랑스에 대한 여론 American opinion of France 1940-43}이라는 논문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는다. 지라르는 역사학자로서 대학에서 자리를 얻지 못하여 우선 인디아나 대학에서 불란서어 강사 instructor로서 대학경력을 시작한다. 그는 불어를 교수하면서 동시에 문학연구에도 몰두하여 여러 대학을 거친 후 볼티모어의 죤 합킨스 대학 John Hopkins University에서 문학교수가 된다 (1957년 조교수, 1961년 정교수). 그리고 그는 1982년에 스탠포드 대학에서 "불란서 언어와 문학 및 문화학 교수 Professor of French Language, Literature, and Civilization"가 된다.
위의 약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라르는 정식 문학수업과정을 거쳐서 문학교수가 된 것이 아니라 역사학도로서 학문을 시작하였었다. 그러나 이것은 지라르의 학문적 편력에 장애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문학텍스트에만 얽매이지 않고, 그의 이론을 인류학, 인종학 및 성경학 등으로 확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도 바로 그의 이론이 문학작품의 분석을 기초로 하여 넓은 영역으로 확장되었으며, 이로 인해 문학 텍스트를 비평함에 있어서도 전통적 문학이론이 줄 수 없는 시각과 인식을 가능케 하여준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지라르의 문학비평이론은 간학문적 interdisziplin r 성격으로 발전되었다.
지라르의 간학문적 인류학 이론은 구조주의적 문화인류학이라는 상위 학문개념에 종속시킬 수 있다. 그것은 지라르의 관심이 역사의 변환을 관통하여 인간의 변하지 않는 본성, 즉 인성구조의 탐구이며, 이것이 인간의 원시사회에서부터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구체적으로 변형되어 나타나는가를 묻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문학텍스트는 이런 인간의 본성이 잘 표출되는 문서이다.
지라르가 분석한 인간의 본성과 구조의 기초에는 욕망 d sir과 모방 mim sis, 혹은 모방적 욕망 d sir mim tique이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지라르는 이 개념을 기초로 하여 속죄양 이론을 발전시키며, 이로부터 인류문화의 발생과 성립과정, 그리고 위기와 그 극복기제에 관한 이론을 전개한다. 본고는 우선 이런 시각 하에 지라르의 문화인류학을 요약하고, 그의 이론이 구체적 텍스트에 어떻게 적용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지라르 자신도 자신의 독특한 미메시스 개념이 "문학적 질문과 인류학적 질문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매개고리가 됨을 지적하였다. 본고에서는 지라르가 다룬 많은 문학텍스트 비평 중에서도 주로 신화비평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신화비평이 지라르가 발전시킨 인류학적 이론과 그 이념적 지향점을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하고 예시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구약성서의 {욥기} 그리고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아} 및 클라이스트의 {칠레의 지진} 등을 주된 예시문으로 선택하고자 한다.
2. 지라르의 비평이론
2.1. 모방적 욕망 Mimetisches Begehren
지라르의 이론은 욕망의 발생 기제를 설명함으로써 출발한다. 욕망은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근원적 힘이다. 그러므로 욕망의 근원을 아는 것은 인간이해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가치있는 대상의 소유충동을 욕망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이 욕망의 근원은 자아의 내면에 뿌리박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망이 주체의 즉흥적이며 근원적 충동이라고 생각한다. 지라르는 이런 상식적 이해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가치있는 대상을 보고 욕망하게 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존재이다. 인간이 욕망하게 되는 것은 비로소 자기에게 욕망을 가르쳐주는 모범, 혹은 모델이 되는 사람 mod le을 모방함으로써 욕망한다. 즉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모망한다. 이런 타자를 "욕망의 매개자 m diateur du d sir"라고 부른다. "자신에 따른 욕망 un d sir selon Soi"은 사실 "타자를 따른 욕망 un d sir selon l'Autre"이다. 단지, 타자로부터 빌려오는 욕망이 "너무도 근본적이고, 너무도 독창적이어서 사람들은 그 동작 자체를 자아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 volont d'etre Soi와 완전히 혼동하게 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 욕망의 매개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직접성의 환상에 빠진다.
지라르를 세계적으로 문학비평가로서 주목하도록 만든 그의 첫 저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Mensonge romantique et v rit romanesque}에서 펼치는 이런 주장은 계몽주의의 전통하에 개인의 고유성과 자율성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저항을 자극한다. 그의 주장은 인간 주체의 자유의지를 부인하는 것 같이 보인다. 지라르 자신도 이런 반대의견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는 저항의 이유가 "우리의 욕망이 진실로 우리의 것이며 욕망이 진실로 원초적이며 즉발적이라는 확고한 확신"에 있다고 보며, 이것이 "우리에게 그토록 소중한 환상"임을 폭로한다. 여기서 "낭만적 거짓"이란 - 문학운동으로서의 19세기 초의 낭만주의를 지칭하여 거부한다기보다는 - 욕망의 개인적 원천을 믿는 유럽인의 일반적 신념을 지적하여 비판하는 말이며, "소설적 진실"은 지라르가 자신의 매개된 욕망의 테제가 바로 소설세계를 분석함으로써 감지되고 성립되었음을 밝히는 표현이다. "진정한 소설은 그 낭만적 거짓을 드러내, 모든 욕망은 매개된 욕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런 점에서 문학은 지라르에게 있어 가려진 현실의 진실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보고(寶庫)이다. (그러므로 사회학이나 다른 학문들은 이론의 막다른 골목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단지 경험주의적 연구대상을 넘어서 문학, 그것도 세계문호들의 작품을 다루어야 한다.)
지라르가 볼 때, 욕망의 매개사실을 웅변적으로 변호해주는 작품은 세르반테스 (1547-1616)의 {동 키호테}이다. 주인공 동 키호테가 겪는 모든 모험은 그가 읽은 기사소설의 전설적 주인공 아마디스 Amadis의 행적을 이상으로 설정하고 그를 모방하여 이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뿐만 아니라 동 키호테의 동반자 산쵸 Sancho의 언행 역시 그의 주인 동 키호테를 모방하고자 하는 동기로부터 잘 이해된다. 이것은 마치 "기독교도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방"인 것과도 같이 동 키호테의 "기사도적 삶은 아마디스의 모방"이며, 하인 산쵸의 삶은 주인 동 키호테의 모방이다.
여기서 회의자는 16세기에는 모든 예술활동이 고전의 완전한 모사를 최고의 이상으로 삼았다는 문화사적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동 키호테에 나타난 고전문학 전범에 의한 주인공의 욕망의 매개사실을 한정된 시대사적 현상이라고 이의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라르는 이런 매개현상을 플로베르 (1821-1880, {마담 보바리}), 스탕달 (1783-1842, {적과 흑}), 프루스트 (1871-192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및 토스토예프스키 (1821-1881,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 시공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대가의 작품들로부터 발견해낸다. 몇 개의 예만 들자. 엠마 보바리는 그녀가 15세에 읽었던 통속소설의 주인공들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발견한다. 그녀가 불행하고 지루한 결혼생활로부터 일탈하여 알게된 애인의 품에서 사랑을 경험할 때, 그녀의 감정은 그녀가 이전에 읽으며 부러워했었던 통속소설의 주인공들을 모방한다. 또한 {적과 흑}의 주인공 쥴리앙 소렐 Julien Sorel은 나폴레옹을 모방하여, 군에서 영예를 얻고자하며, 그와 같이 주위의 여자들도 유혹하기를 원한다.
지라르는 이런 관찰들로부터 욕망은 주체 고유의 발생기원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촉발되었음을 확증한다. 이 사실은 욕망이 "대상-주체"의 이원적 구조가 아니라 "대상-모델-주체"의 삼원적 구조를 갖고 있음을 드러낸다 (즉 "삼각형의 욕망 d sir triangulaire"). 주체는 대상에 대한 모델의 욕망을 모방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동일한 대상으로 향하게 한다. 지라르는 여기서 모델과 주체의 관계의 성질에 따라 미메시스의 종류를 나눈다. 모델과 주체의 사회적, 신분적 거리가 멀면, 그 둘은 동일한 대상을 두고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 욕망의 미메시스는 "외적 매개 la m diation externe"에 의해 일어난다고 말한다. 아마디스와 동 키호테, 동 키호테와 산쵸 혹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의 관계가 이런 경우이다. 여기서 매개자는 훌륭한 전범(典範)이며, 주체는 그를 존경하며 모방한다. 이에 반해 모델과 주체의 사회적 거리가 극소화하면 할수록, 주체는 모델을 전범으로 삼아 모방할 뿐 아니라, 대상을 두고 그와 경쟁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모델은 더 이상 전범이 아니라 경쟁자이며, 대상획득의 방해자가 된다. 이런 매개를 "내적 매개 la m diation interne"라고 한다.
지라르는 불란서 혁명 이전의 시기는 외적 매개에 의한 미메시스가 주를 이루었다면, 기회균등을 보장하는 민주주의적 현대사회에서는 내적 매개가 증가하므로, 현대사회는 전통사회에 비해 잠재적 갈등이 증가한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지라르는 미메시스 개념이 서양의 전통에서 "개념의 불구화 Verst mmlung des Mimesisbegriffs"를 겪었다고 비난할 수 있다. 그 불구화란 다름아닌 "갈등차원의 억압 die Unterdr ckung seiner Konfliktdimension"이다. 그에 의하면 미메시스 개념는 욕망과 관련되어있으며, 따라서 갈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서양의 전통에서는 미메시스가 가진 교육적이고 긍정적 면만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지라르의 독특한 입장은, 인간의 모방 대상이 타인의 말이나 행동뿐만 아니라, 타인의 욕망 자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지적한다. 우리는 타인이 욕망하고 소유하기 원하는 것을 똑같이 욕망하고 갖고 싶어한다.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욕망을 통해서 그가 욕망하는 대상의 가치를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여 그가 소유하고자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갖고 싶어한다. 이런 지라르의 미메시스 개념은 "소유모방 mim sis d'appropriation·Aneignungsmimesis"이라는 개념으로 특수화된다. 소유모방은 같은 대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대인관계의 갈등을 초래한다. 물론 만약 인간들의 욕망이 예컨대 언어의 습득, 음악 감상 등과 같이 공동소유를 가능케 하는 대상을 향한다면, 욕망이 반드시 갈등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욕망의 대상이 섹스 파트너나 사회적 위치 등 공동소유가 불가능할 경우, 타인의 소유 욕망을 흉내 내는 소유모방은 반드시 갈등을 초래한다.
갈등을 초래하는 미메시스는 내적 매개를 통해 일어나며, 이 경우 주체와 모델은 욕망대상을 두고 경쟁관계에 들어간다. 이런 경쟁은 종종 대상의 가치를 실제가치 이상으로 평가 절상하게 된다. 경쟁자가 욕망하는 대상은 주체 역시 반드시 소유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제가치를 넘어 과대 평가된 대상을 "형이상적 대상 metaphysisches Objekt"이라고 칭한다. 형이상적 대상을 두고 일어나는 경쟁은 주체에게 모델의 가치 역시 상승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그는 점차로 대상 대신 모델 자신을 욕망하게 된다. 형이상학적 대상을 소유한 모델은 주체에게 우상적 존재가 된다. 그러나 모델이 바로 평가 절상된 대상의 소유를 방해하는 자가 되므로, 그는 경배의 대상이자 동시에 미움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런 경쟁적 내적 미메시스는 역으로 모델로 하여금 또한 주체를 모방하도록 한다. 이렇듯 경쟁관계에 들어서서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게 되는 주체와 모델은 대상의 실제 소유 가능성 여부에 관계없이 서로 경탄과 미움을 교환하게 된다. 주체와 모델은 상호 호전적인, 그러나 서로 닮아가는 "짝패·double·Doppelg nger"가 된다. 이리하여 "소유모방"은 대상의 형이상화와 더불어 "대적(對敵)모방 Gegenspieler- mimesis"으로 변전된다. 이렇게 구체적 대상의 소유 의의(意義)가 경감된 채, 오직 주체와 모델간의 상호모방이 욕망이 되는 욕망을 지라르는 "형이상적 욕망 metaphysisches Begehren"이라고 일컫는다.
2.2. 모방과 차이 그리고 폭력
미메시스는 갈등을 내포하고 있지만, 갈등이 늘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문화가 욕망주체와 전범간의 차이를 규정하고 유지하기 때문이다. 외적 매개의 미메시스가 주를 이루었던 전통사회에서는 경쟁과 갈등이 문화적으로 규제받는다. 산쵸가 동일한 욕망 대상, 예컨대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주인 동 키호테와 경쟁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에 반해 불란서 혁명을 거치며 평등과 기회균등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에서는 미메시스가 내적 매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주체와 모델사이에 경쟁, 미움, 질투와 같은 갈등요인이 증가한다. 혁명을 통해 평등을 이룬 민주사회는 이전의 패러다임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문제, 즉 경쟁과 폭력의 상호증폭의 딜렘마에 봉착하여 있다. 지라르가 보는 현대사회는 주체와 모델 사이의 사회적 간극이 갈수록 극소화 되어가므로 이런 순환적 폭력증가의 메커니즘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그의 문학비평의 이념적 지향점은 이런 폭력의 악순환 고리로부터의 탈출가능성을 탐구하는데 있다. 그는 이런 가능성을 일차적으로 "소설적 진실"의 통찰력을 가진 대가에게서 발견한다. 그에 의하면 그들이 다룬 소설들은 주인공이 결말에서 예외없이 모델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하고 "회심 conversion"한다. "모든 주인공들은 결론에서, 그들의 이전 생각과는 다른 말을 한다. (...) 동 키호테은 기사들을 포기하고, 쥘리앙 소렐은 저항을,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초인을 포기한다. 주인공은 매번, 오만함 때문에 생긴 환영을 부인한다". 대가들은 이런 주인공을 그림으로써 항상 성공리에는 아니라 하더라도, 자기중심주의를 벗어나서 타아중심적으로 되며, 이로써 타아가 내게 주는 매력과 내가 그에 대해 갖는 미움을 서로 화해시킨다.
이런 점에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 드러나는 초기 지라르 문학비평의 특징은 김현이 지적한 바와 같이 "진리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목적론적"이며, 소설의 결말이 회심이라고 내세우는 점에서 "기독적인 진리를 중요시하는 서구의 전통 안에 있는 (...) 휴머니즘적 비평이다. 그 한계를 인정한다면, 그의 비평은 큰 장점을 갖고 새롭게 떠오른다. 그것은 양식과 휴머니즘을 되살리고 (...) 허무주의로의 길이나 초인주의로의 길을 막는 도덕 비평이 될 수 있으며, 그 도덕 비평은 새로운 윤리, 사랑과 용서 위에 기초한 새로운 윤리의 장을 여는 열쇠의 역할을 맡아 할 수 있다."
하지만 대가적 소설의 결말이 항상 주인공의 회심이라는 테제는 모든 비평가를 설득시키기에 어려움이 있다. 19세기에는 인간과 역사의 합목적성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작가의 작품이 오히려 현대인을 감동시켜며, 현실에 대한 통찰력이 깊다는 느낌을 준다. 예컨대 게오르크 뷔히너의 작품들은 모두 바로 이런 합목적성 상실에 대한 작품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초기 지라르 문학비평이 가지고 있는 설득력의 한계는 그 이후에 나온 주저 {폭력과 신성}을 통해서 극복이 되며 그 휴머니즘적 지향점을 설득시키기에 충분하다.
2.3. 미메시스 위기: 창건폭력과 속죄양
지라르의 이론은 그의 저서 {폭력과 신성}에서 문학비평을 넘어 신화와 종교의 기원을 다루는 문화인류학으로 확장된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의 이론의 지향점 telos은 폭력 증가의 악순환의 탈출과 극복에 있으므로 그가 전제하는 폭력의 본질적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에 의하면 폭력은 전이성 (또는 대체성), 감염성, 그리고 무차별화 경향 등의 주요한 세 가지 특성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첫째, 폭력은 그 희생 대상이 바뀐다 하더라도 일단 어느 대상에게라도 분출이 되기만 하면 가라앉을 수 있다. 그러므로 폭력은 속일 수 berlisten가 있고 다른 "먹이"를 주어 진정시킬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원시종교의 희생제사는 폭력의 대체수단이 될 수 있다. 둘째, 폭력은 마치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과도 같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을 빠른 속도로 감염시킨다. 폭력성은 쉽게 모방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폭력은 모든 - 문화적, 사회적, 인간적, 종교적 - 차이를 무위화 시킨다. 폭력이 행사되고 사용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단지 차이가 없는 두 주체와의 갈등적 조우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폭력의 특성을 파악한다면, 이로부터 폭력을 순치시킬 수 있는 방법도 발견할 수 있다. 지라르의 이론은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지라르는 파라독스하게도 어떠한 인류문명이든 반드시 폭력이 그 발생원인이 된다고 전제한다 - 이것을 "창건폭력 violonce fondatrice"이라고 한다 -. 인간 공동체는 소유미메시스와 대적미메시스의 작용으로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내부 구성원간 폭력의 증가를 경험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미메시스와 폭력은 마치 전염병과도 같아서 모든 구성원을 감염시키게 된다. 그 결과 인간들 사이의 모든 차이는 지양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적 적이 되는 상태가 도래한다. 즉 폭력적 상호성이 증대한다. 미메시스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 이런 상황을 미메시스적 위기 mimetische Krise라고 칭한다. 미메시스적 위기에 처한 공동체는 자체멸망의 위기에 봉착한다. 문명이란 이런 위기의 공동체가 모종의 수단을 통하여 폭력문제를 해결했을 때에만, 성립하며 존속할 수 있다. 이런 모종의 수단을 창안해 내지 못한 공동체는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문명체로서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모종의 수단은 무엇이었을까? 미메시스 위기에 의해 발생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Gewalt aller gegen alle"은 바로 동일한 미메시스에 내재한 또 다른 독특한 특성의 작용에 의해 "만인의 소수, 혹은 일인에 대한 투쟁 Gewalt aller gegen einen"으로 변전될 수 있다. 소유모방에서 대적모방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극소화 되면서, 경쟁자인 모델의 미움과 증오마저도 모방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한 명 혹은 소수의 구성원만을 제외하고 이들에 대한 폭력성을 축으로 하나로 뭉칠 수 있다. 폭력의 모방은 소유모방과 같이 전염성이 강하며, 여기에 연루된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소수에게 가하는 폭력적 행위의 부당성을 의식하지 못한다. 이로써 내부의 폭력을 외부로 분출된다. 이것이 곧 모든 문명에 편만한 공통적 "속죄양 기제 S ndenbockmechanismus"이다. 속죄양으로 선택되는 조건은 희생요구자 입장에서 보면 온갖 범죄 - 특히 부친살해와 근친상간 - 의 화신으로서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잠재적 범죄를 전가시킬 만한 자질을 갖춘 대상, 즉 악의 화신이다. 주로 처녀나 이방인 등 나중에 그들에게 집단적으로 행해진 폭력을 복수해 줄 후원자가 없는 사람들이 속죄양으로 적합하다. 혹은 왕이나 갑부와 같이 공동체에서 특히 뛰어난 위치를 가진 사람들도 속죄양으로 선택된다. 즉 평균적 구성원에 비해서 사회적이나 신체적 측면에서 상하로 현격한 격차를 보이는 대상이 속죄양으로 선택될 가능성이 높다.
지라르는 모든 문명과 종교의 기원을 속죄양 기제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속죄양은 공동체 위기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절대적으로 악하지만, 동시에 위기를 극복하는 계기와 능력 제공자로서 절대적으로 선하고 신성하다. 그에 의하면 원시적 신은 항상 이런 양가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렇게 한 번 속죄양에 가해진 폭력은 의식화(儀式化)된다.
모든 희생제의식은 하나 내지는 소수의 희생제물을 상징적으로 살해하여 신에게 바침으로써, 내부의 폭력을 외부로 분출시키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런 제의식은 실제로 한 문명의 초기에 조상들에 의해 하나 혹은 소수의 희생제물이 살해되었음을 반증한다. 희생제의식은 이런 살인행위를 상징적 체계속에서 계속 반복함으로써, 공동체 내부에 시시때때로 발생하는 폭력성을 외부로 분출시키는 작용을 하며 사회의 안정화를 꾀한다. 그리하여 사회는 일시적이나마 내부적 평화를 얻으며, 내적 결속을 다지게 된다. 그런데 이런 작용이 늘 문제없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며, 어느 순간에는 이런 의식이 효용성을 잃게 되며, 사회는 다시금 위기에 빠진다. 이런 위기는 또 다시 실제적 희생제물의 살해를 요구한다. 인류의 문명이 폭력의 순환구조에서 벗어나고자 창안한 속죄양 기제는 이와 같이 단지 폭력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하여줄 뿐이다.
3. 지라르 비평의 실제
3.1 신화: 가해자의 이야기
지라르는 위에 상술한 이론에 기초하여 신화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새로운 테제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신화란 제식의 일부로서 공동체의 입장에서 소수자 속죄양에 대해 가해진 폭력을 정당화하고 은폐시키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신화 속에서 피해자는 말하지 않으며, 오직 가해자만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라르는 이런 테제를 토대로 그리스 신화를 비롯하여 초기문명의 신화 및 성서를 전통적 해석과는 다르게 해석한다. 그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구약의 {욥기}를 예로 든다.
지라르에 의하면,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 나오는 테벤시의 페스트는 자연적 재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재앙으로서 인간의 사회적 차이를 없애도록 작용한 미메시스 위기의 상징이다. 이 위기는 범죄자, 즉 속죄양 찾기를 작동시킨다. 오이디푸스, 크레온, 테레지아스는 서로에게서 죄를 찾아 전가시키고자 한다. 그들은 모방적 경쟁자라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오이디푸스가 부친 라이오스의 살해자이며 모친과의 근친상간자로 지목되는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다. 이 죄는 다른 사람에게도 전가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테벤시가 선정한 속죄양이었다. 주목할 점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이런 죄 씌우기에 대해 항거하지 않고 스스로 속죄양으로서 찬동하여 테벤시의 평화가 찾아진다는 것이다. 지라르는 여기서 소포클레스가 그리스 문명권의 요구에 복속하여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자기에게 행하여진 불의를 고발하지 않도록 했다고 본다. 즉 소포클레스는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시각에서 비극을 썼다. 그러므로 그의 비극은 박해자의 문서 Verfolgungstext로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지라르의 시각에서 볼 때, 구약의 욥도 민중의 속죄양으로 선택된 자이다. 그가 당한 고통을 당연시 여기는 세 친구의 발언을 통해 속죄양을 필요로 하는 공동체의 이익이 대변된다.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이란 공동체의 폭력성이 투사된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욥기가 신화와 다른 점은, 희생양 욥이 말을 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욥기에는 신화와는 달리 가해자의 시점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시점이 강력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지라르의 비평적 관심이 속죄양으로서 집단적 폭력에 의해 희생 당하는 희생자의 관점을 옹호하고자 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약자와 패자의 관점을 변호한다는 점에서 그의 비평의 사회참여 관심이 드러난다. 따라서 지라르에게는 그리스 신화보다 성서적 이야기가 폭력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된다. 그런데 만약 현대에서 지라르의 비평적 관점이 건설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가장 좋은 독일작품의 예를 찾으려 한다면, 이는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아}일 것이다. 볼프는, 신화란 미메시스 위기로 인해 속죄양을 필요로 한 공동체의 위기와 이의 해결책을 기이하게 곡해한 거짓된 해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로부터 사건의 진실된 전말을 추론해낼 수 있다라는 지라르의 테제에 따라, 그리스 신화에서 자녀 살해모의 악명을 지닌 메데아를 오명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한다. 볼프에게 있어 신화는 가해자의 시각에서 해석된 사건의 이야기이며 무죄했던 피해자의 진실이 밝혀짐으로써 해체되어야 할 거짓에 불과하다.
볼프의 메데아는 고향 콜히스에서 왕위를 놓고 벌이는 욕망이 초래한 위기와 이의 해결책으로서 사용된 폭력의 흔적을 발견한 후 고향에 환멸을 느끼고 외국 코린트로 간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도 같은 기제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은폐된 창건폭력의 흔적을 발견한다. 진실을 밝히려는 그녀의 노력에 대해 공동체는 제재를 가하며, 오히려 내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상으로 사용한다. 그녀는 두 아들을 죽인 악녀로서 추방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녀가 죽였다는 두 아들은 사실은 코린토 도시의 내부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군중적 폭력에 의해 살해된 희생양일 뿐이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비롯한 그리스의 메데아 신화는 이런 사실을 은폐하고 오히려 어머니 메데아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었다. 볼프는 문명화 과정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쓴 메데아의 진실을 밝히려 한다. 여기서 볼프는 신화해체 기법을 사용하여 서구문명 뒤에 숨겨진 "소설적 진실"을 그린다. 그러므로 자녀살해자가 아닌 메데아가 과연 메데아인가 라는 비평적 의문은 볼프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소치에 불과하다.
여기까지는 볼프가 지라르의 입장을 그대로 따른다. 하지만 작품결말에 그가 요구하는 주인공의 회심에 해당되는 폭력의 초극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메데아는 비폭력적 출발점으로부터 결말에 이르러 언어적 폭력성으로 하강한다. 즉 그녀는 볼프에 의해 누명으로부터 벗어나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적들에게 저주함으로써 앙갚음을 한다. 이것은 작가 볼프가 폭력을 평화로 변전시킬 내적 능력과 경험을 이루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이것은 아마도 그녀가 통독이후 서독의 보수우파 비평가들에 의해 휘말린 필화를 고려해 볼 때 인간적으로 동정할 수 있는 점일 것이다.
3.2.{칠레의 지진}: 신화적 이성에 대한 비판
지라르가 그의 이론을 많은 세계문학작품을 통해 개진하고 또한 이를 이론적 준거로 삼는 바, 그가 다룬 독일작품이 그리 많지는 않다. 필자가 알기에 {칠레의 지진}은 지라르가 상세한 해석을 제시한 유일한 독일작품이다. 그는 참여관점의 연속선상에서 클라이스트가 소위 칸트 위기로 인한 세계관의 혼란에 빠진 작가라기 보다는, 오히려 폭력적 사회를 적극적으로 비판한 작가라고 파악한다. 필자는 이점을 다른 비평의 관점과 비교하며, 또한 필자의 관점을 제시하면서 지라르 비평의 진실 여부를 면밀하고도 비판적으로 검증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본 논문의 이 장에서는 상세한 작품 해석과 논쟁적 논의가 불가피하다.
1807년 9월 {예로니모와 요세페. 1647년 칠레의 지진의 한 장면}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된 {칠레의 지진}은 전대미문의 사건을 중심에 두는 장르인 노벨레로서 클라이스트의 대표적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작품 내의 격렬한 사건과 목가적 분위기의 신속한 변전은 독자들에게 더할 나위없이 강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강한 인상은 작품의 명료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집중적 독서는 작품의 모호성을 증가시키는 것 같다. 따라서 이 노벨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학비평가들의 지적 도전을 자극하고 있다. 우선 독자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작품의 내용을 요약한다.
예로니모와 요세페는 금지된 사랑을 한 죄의 벌로 사회로부터 가혹한 제재를 받는다. 요세페는 참수될 장소로 끌려가고 있고 예로니모는 감옥에서 끈을 목에 달아 자살하려고 한다. 이때 지진이 발생한다. 대혼란이 일어나고 주인공은 각각 죽음에서 벗어나 탈출한다. 지진으로부터 생명을 부지한 사람들이 위험한 도시를 탈출하여 골짜기에서 낙원을 이룬 듯 평화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주인공들도 감격의 재회를 한다. 그들은 동 페르디난도의 가족과 좋은 관계를 이루며 일원이 된다. 그 다음날 사람들은 살아난 것에 감사하기 위해 성당에서 거행되는 미사에 참가한다. 여기서 지진의 발생원인이 주인공들의 금지된 사랑에 대한 신의 벌이라고 질타하는 설교자에 자극받은 군중이 주인공들과 그들의 아이 필립을 찾아내어 살해하고자 성당 광장에서 히스테리적 집단폭력을 행한다.
지라르의 눈으로 보면, 이 작품은 한마디로 신화와 제의의 기원적 발생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종교적 차원은 중요한 의미지평을 형성한다. 그의 해석은 지진이 무엇인가를 물음으로서 시작한다. 우리가 이미 지라르의 {오이디푸스 왕}의 페스트 해석에서 보았듯이, 그는 지진이 실제적 자연 재앙이지만 이보다는 더욱 중요한 것은, 지진이 인간의 사회적 모든 차이를 지양시키는 미메시스 위기의 상징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클라이스트는 신화적 전통을 따라서 지진을 모방욕망이 초래한 사회적 위기로 설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공동체 내부의 폭력적 위기는 오직 희생제물을 찾아 폭력을 대리적으로 분출할 때에만 가라앉을 수 있다. 따라서 클라이스트의 작품은 이런 희생제물을 찾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지라르가 볼 때, 작품에는 희생제물이 두 번 바쳐진다. 첫 번째는 지진 발생 직후 "무죄한 사람"이 건물 소유주에게 잡혀 곧바로 "교살 aufgekn pft"(152)되었다. 지라르는 이 무죄한 사람을 모방적 위기를 해결하는 희생제물로 해석한다. 따라서 지진 후에 골짜기에서 이루어진 낙원은 모방적 위기 때문에 멸망 직전에 있던 공동체가 속죄양을 바치고 나서 다시 안정을 찾았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문화의 재탄생 Wiedergeburt der Kultur"이다.
지라르가 볼 때 클라이스트 작품이 독자를 매료하는 이유는, 낙원적 평화로운 "해결이 영속적이지 않다는 점, 그것의 생명이 극히 짧다는 것과 따라서 희생제물이 거의 즉시 반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있다. 감사미사를 중단하고 성당 광장에 모여 들끊는 군중의 흥분은 오직 희생제물을 통해서만 무마될 수 있다. 그들의 폭력에 희생되는 예로니모, 요세페와 동 페르디난도의 아들 쥬앙 그리고 콘스탄체는 작품에 나타나는 두 번 째 희생제물이다. 이에 군중의 폭력은 가라앉고 공동체는 다시 평온을 되찾는다. 이 과정은 희생제 의식(儀式)의 묘사에 다름아니다. 클라이스트의 명철성은 그가 군중에 의한 희생제물 선택에 있어 작용하는 "대체의 임의적 성격 willk rlich[er] Charakter der Substitution"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작품화하였다는 점이다. 즉 군중이 죽이고자 했던 주인공들의 아들 필립 대신 동 페르디난도의 아들 쥬앙이, 요세페 대신 콘스탄체가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은 클라이스트가 그 대상을 임의적으로 선택하는 집단적 폭력의 기제를 통찰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상과 같이 필자는 지라르의 논지의 중요한 점을 구조적으로 요약하였다. 그의 관점은 이외에도 몇가지 흥미로운 상세해석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런 사항은 생략하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클라이스트의 노벨레가 칸트의 이성비판의 관점에서 "신화적 이성에 대한 비판 Kritik der mythologischen Vernunft"을 심화시킨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 노벨레는 신화의 논리를 좇으며 동시에 이 논리를 폭로한다. 이것은 모방적 폭로의 작품이다. Die Novelle folgt der Logik des Mythos und stellt diese gleichzeitig blo ; sie ist ein Werk mimetischer Enth llung."
지라르의 해석은 새롭고 명철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실제 이 해석이 얼마나 당위성을 갖는가? 과연 클라이스트가 이토록 계몽주의적으로 확고한 입장에 서서 비인간적인 신화적 이성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라르와는 확연히 다른 입장의 해석을 대비시킴으로써 질문에 답해보기로 한다.
필자가 선택한 다른 관점은 체계이론의 시각에서 클라이스트를 해석한 조경식의 견해이다. 그는 우선 시각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칠레의 지진}에서 독자가 확고한 입장을 취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소설의 화자가 끊임없이 자기의 입장을 상대화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작품 내에서 제공되는 어떤 시각과도 자신을 일치 시킬 수가 없으며, 작가의 시점이라고 정체를 밝힐 수 없다. 클라이스트 작품은 "임의적인 세계 질서의 표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독자가 어떤 한 시각을 선호한다면, 이는 독자 자신의 가치관 때문일 뿐, 작품의 전체 시각이라고 할 수 없다. 즉 이것은 서술자의 언어 조작에 걸려드는 것이 된다. "온갖 아이러니로 가득 찬 텍스트에서 [독자는]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되기 쉽다."
조경식은 이런 전제 하에 {칠레의 지진}의 주도변별 Leitdifferenz이 신의 "은총/벌"에 있다는 가설을 내세운다. 죽음에서 벗어난 예로니모와 요세페는 지진을 신의 은총으로, 이에 반해 카톨릭 사제와 군중은 같은 사건을 두 주인공의 금지된 사랑의 행각에 대한 벌로 보고 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자신이 진리의 편에 서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양쪽이 신의 의지를 각각 자신의 시각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초월적 신의 의지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이루어지든 간에 그 해석의 정당성은 입증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두 입장은 상대화되며, 이로써 클라이스트는 "교묘한 방식으로 종교담론 그 자체를 해체시킨다." 조경식이 볼 때 바로 이것이 클라이스트가 노벨레를 통해서 보이고 싶었던 점이다.
설화자의 유동적 다시점(多視點)을 전제로 하는 체계이론적 비평과 신화적 이성에 대한 작가의 확고한 비판적 입장을 전제로 하는 지라르의 비평은 철두철미하게 상호배타적이다. 우리는 이 상반되는 두 비평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여기서 객관적 입장을 담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문학학의 기본적 질문과 관련되며 많은 이론적 논의를 필요로 한다. 본고에서는 단지 필자의 입장을 개진하도록 한다.
체계이론에 근거한 조경식의 해석은 시각주의적 입장에서 아이러니의 의의를 환기시킴으로써{칠레의 지진}을 신의 의지를 설정한 합목적론적이나 사회비판적 시각에서 이루어지는 전통적 해석의 함정을 많이 극복한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그가 설정한 주도변별 "은총/벌"의 각각의 요소가 동등한 중요도를 갖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과연 대립쌍의 두 요소인 '은총'과 '벌'이 동일한 무게로 팽팽한 평행선을 달려서, 독자로 하여금 어느 한쪽의 편도 들 수 없도록 미결정성을 유지하는가? 진실로 두 요소 중 어느 한 요소에 대한 선호와 경중이 없단 말인가?
설화자가 지진을 신의 은총이라고 믿는 예로니모와 요세페의 해석에 여러 가지 문학적 장치를 동원하여 아이러니화 시키며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는 점은 작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조경식도 인용한 대로 "그녀에게는 (...) 처럼 보였다"라는 그 유명한 "als ob"의 사용에서도 볼 수 있으며, 주인공들이 재회하여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설화자의 진정성의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점은 "목자소설 Sch ferroman"의 배경을 인용하여 이를 일종의 연극적 소도구 Versatzst ck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확실히 클라이스트는 이런 장치를 통해서 주인공의 주관주의적 현실해석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으며 비꼬고 있다. 하지만 설화자는 지진을 두 연인의 사랑에 대한 벌이라고 믿는 카톨릭 성직자와 군중에 대해서는 더욱 더 거리를 두고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설화자는 광신적 설교자와 폭력적 군중에 대해서는 명료하고도 단정적으로 부정적 가치판단을 하고 있다. 군중의 폭력을 자극하고 선도하는 구두수선공 페드릴로는 "광신적 살인노예 fanatisch[er] Mordknecht"(158)이며 "사탄적 무리의 제후 F rst der satanischen Rotte"(158)이다. 이에 반해 주인공과 자신의 식구를 집단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동 페르디난도는 "성스러운 영웅 g ttlich[er] Held"(158)이다. 설화자는 이런 표현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아이러니도 용납하지 않으며, 오히려 진지한 진정성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동 페르디난도의 영웅성에 대한 설화자의 동의는 작품의 결말에서 다시 한번 강조되고 확인된다. 그의 아내 돈나 엘비레는 자신들의 아들을 잃은 결과를 빚은 구원 행위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는 남편 동 페르디난도에게 찬동을 표한다. 그녀는 "어느 날 아침 빛나는 눈물을 머금은 채 남편의 목에 매달려 입을 맞추었다. (...) fiel ihm mit dem Rest einer ergl nzenden Tr ne eines Morgens um den Hals und k te ihn"(159).
노벨레에는 조경식이 주장하듯이 아이러니가 텍스트의 모든 차원, 곳곳에 극단적으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아이러니는 제한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는 그가 설정한 주도변별 쌍 요소들간의 중요성의 정도를 명쾌하게 결정지을 수 있다. 클라이스트의 설화자는 비록 은총 집단의 순진한 주관주의적 현실해석에 대해 아이러니를 사용하여 거리를 두고 있으나, 그의 연민은 그들에게 놓여 있으며, 그의 도덕적 분개와 정죄는 명확히 벌 집단에 향해 있다. 설화자는 작품의 초기부터 그들의 비인간성을 고발하였었다. 성당의 설교자 및 집단적 폭력의 히스테리에 빠지는 군중과 참수형을 선고한 교회 및 사디즘적 관람욕에 빠진 군중 사이에는 - 지진 후에 폭력성이 과격해진 것 외에는 - 전혀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카톨릭 교회의 대표자들에 의한 광신적 현실해석은 설화자에 의해 벌써 작품의 시작부터 각하되고 실격되었다 (diskreditiert und disqualifiziert). 따라서 필자는 작품의 주도변별을 "은총/벌"로 설정하는데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보아 작품을 오해하도록 오도한다. 작품은 종교담론을 무위화 시키려는 의도를 중심적으로 좇고 있지 않다.
필자는 이런 시각으로부터 클라이스트가 폭력적 군중에 의해 지배받는 현실의 법칙을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했다고 보는 지라르의 비평이 - 클라이스트가 실제로 의도했든 않았든 상관없이 - 작품에 포함된 중요한 의미차원을 지적해냈다고 믿는다. 이점에서 지라르의 비평은 칠레의 지진에서 사회비판적 요소를 읽어내는 해석전통에 서있다. 그의 기여는 그런 요소를 인류학적 해석의 틀을 적용하여 밝혀냈다는데 있다.
그러나 지라르의 해석에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필자는 지엽적 문제보다 지라르 비평의 근본적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것은 우선 작품의 내적연관관계보다 자신의 이론의 잣대로 텍스트를 재단하는 경향이며, 두 번째로는 해당 작가의 역사성과 특수성을 대체적으로 무시하고 자신이 발견한 무시간적 신화적 구조요소들을 도출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이다. 클라이스트의 {칠레의 지진}에서 희생제의식의 과정이 서술된다고 설정한 시각은 클라이스트가 작품에 다른 의도로 도입한 요소들도 자기의 요구에 맞춰 해석하게 된다. 예컨대 "무죄한 사람"의 살해는 군중의 폭력을 잠재우는 속죄양이라기 보다는,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일반적 사회 혼란의 일례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클라이스트 작품에는 지진이 모방적 욕망으로 인한 차별의 무위화로 발생한 위기의 상징이라는 지라르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필자는 {칠레의 지진}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는 지라르 및 체계이론적 시각의 단점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이 둘의 장점을 통합할 수 있는 비평관점을 가지고 있는가? 필자는 "문학구성소분석론 literarische Komponentenanalyse"이 이에 대한 해결책이 된다고 믿는다. 본고에서는 제한된 지면상 이론의 소개는 생략한 채, 실제 해석만을 보이자 한다. 필자의 해석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의 몫이다.
필자는 우선 체계이론의 해석방법절차와 비슷하게 - 차이는 뒤에 드러날 것이다 - 작품전체를 관통하는 주도변별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필자는 노벨레가 일차적으로는 사랑과 개인적 행복을 추구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임에 주목하고, 그들을 임시방편적으로 주도변별의 한 축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이들과는 다르게 개인적 행복보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동 페르디난도를 반대축으로 설정한다.
필자의 이런 가설 설정은 작품 이외에 클라이스트의 편지를 독서하면서 얻은 단서로 인해 가능해졌다. 그는 1801년 7월 18일자와 동년 동월 21일자 편지에서 우연한 당나귀 울음으로 인해 그가 타고 있던 마차가 전복하여 목숨을 잃을 뻔하였던 사건을 두 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 목숨이 한낱 당나귀의 울음 소리에 달렸단 말인가?
Und an einem Eselsgeschrei hing ein Menschenleben? (666)
Also an ein Eselsgeschrei hing ein Menschenleben? (669)
여기서 클라이스트는 이해할 수 없고 우연한 사건을 항상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런 사건은 항상 클라이스트의 주체적이고 자존적인 souver n 인간관의 정당성을 뒤흔들어 놓으며, 그의 인간본질에 대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과 불행이 그런 알 수 없는 사건, 혹은 우연, 혹은 운명에 달려있음을 깨닫는 것은,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아님을 인식시켜주므로, 그의 우주세계관적 지위를 격하하고 비굴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이런 것들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전통적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고 자신의 내면세계의 힘에 대한 신념을 피력한다.
이해할 수 없는 섭리가 나를 빨리 불행하게 만들 듯이 또한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섭리가 나를 똑같이 빨리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그렇지 않다손 치더라도, 하늘이 그 어떤 기적을 내려주지 않더라도, 그런 것은 오늘날 정말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그렇다 해도 해결책은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So wie eine unbegreifliche F gung mich schnell ungl cklich machte, kann nicht eine ebenso unbegreifliche F gung mich ebenso schnell gl cklich machen? Und wenn auch das nicht w re, wenn auch der Himmel kein Wunder t te, worauf man in unsern Tagen nicht eben sehr hoffen darf, habe ich denn nicht auch H lfmittel in mir selbst? (668)
클라이스트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현실의 우연적 사건을 극복하는 또 다른 방법은 바로 더 큰 목표를 위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생명을 경시하여 내던지는 것이다.
아, 죽음에 대해 이렇게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구역질 나는 것은 없다. 생명이란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때에만 가치있는 유일한 재산이다. 우리가 생명을 쉽게 내던져버리지 못한다면 이것은 경멸스러운 것이다. 오직 생명을 쉽게 그리고 기쁘게 내던지는 자만이 생명을 위대한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Ach, es ist nichts ekelhafter, als diese Furcht vor dem Tode. Das Leben ist das einzige Eigentum, das nur dann etwas wert ist, wenn wir es nicht achten. Ver chtlich ist es, wenn wir es nicht leicht fallen lassen k nnen, und nur der kann es zu gro en Zwecken nutzen, der es leicht und freudig wegwerfen k nnte." (670)
그런데 클라이스트가 거부하는 또 다른 현실은 개인적 사랑과 행복과 명예를 추구하는 소시민적 태도이다. "아, 사랑, 행복, 명예 등등... 이런 것 들외에 무엇인가 또 다른 것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Ach, es mu noch etwas anderes geben, als Liebe, Gl ck, Ruhm usw..."(768)
클라이스트의 소시민적 태도의 거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 높은 목표에 투신하는 태도로 귀결된다. 우리는 이와 같이 편지를 통해서 클라이스트가 인간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우연에 대항해서, 그리고 소시민적 행복과 안녕에 대항해서 고안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어떤 고양된 목표를 위해 생명을 던지는 결연한 태도로 수렴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클라이스트가 {칠레의 지진}에서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런 태도를 문학으로 형상화하길 원했다고 본다. 예로니모와 요세페는 그가 극복하고자 하는 태도를, 동 페르디난도는 그가 지향하는 태도를 각각 구체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칠레의 지진}의 설화자는 예로니모와 요세페에게는 거리두기의 아이러니로, 동 페르디난도에게는 일체화 Identifizierung의 태도로 대한다.
설화자가 볼 때 개인적 사랑과 행복을 추구하는 남녀 주인공은 그들을 위협하는 적대적이며 공격적인 카톨릭 세계의 현실을 극복할 내적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들이 우연에 불과한 지진의 도움으로 이런 불합리한 종교로 규정된 현실로부터 생명이 구출됐다고 믿는 것은 세계의 참다운 운행법칙을 깨닫지 못한 것이며 순진하다. 그런 시각은 파기되어야 할 주관주의적 현실해석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지진이란 구원의 단초가 되지 않으며, 불가사이한 우연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또한 인간의 행과 불행 그리고 생명이 이런 우연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명제도 터득하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지진에 의한 (사이비) 구출은 그 파장의 범위가 심대하고 광대할지라도 잠시 착각을 일으켰을 뿐, 사실 아무 효용성이 없고 무기력하다. 일순간 에덴 동산과도 같은 곳에서의 재결합은 그토록 달콤하고 아름다웠을지라도 그것은 무위로 끝나며 그렇게 끝날 수 밖에 없다.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무너진 근대에 있어 "하늘의 기적 Wunder des Himmels"(148)을 바라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따라서 지진으로 인한 구출에 대해 신에 대해 감사하고자 하는 그들의 일견 경견하고 신성해 보이는 종교심 역시 부정되어야 할 주관주의적 현실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우연적 사건에 불과한 지진에 대해 폭력적이며 위선적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일체의 종교적이며, 초월적 합목적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진과 카톨릭적으로 규정된 현실세계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것들은 우선 공히 폭력성으로 특징지어진다. 특히 성당 광장에서 임의적 살육을 감행한 군중은 지진의 폭력성을 모방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다음, 지진이 의미불가해성 Unbegrifflichkeit으로 규정된다면, 카톨릭적 현실세계는 의미부조리성 Absurdit t으로 규정된다. 참수형장으로 향하는 연약한 요세페를 보고 즐기기 위해 창가를 세내는 군중이나 성당 광장에서 집단히스테리에 빠지는 군중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볼 때 의미부조리성에 빠져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전혀 다르지 않다.
이런 모순적 현실상황에 즉면한 인간은 어떻게 의미있으며 "위대한 목적"을 찾고 실현할 수 있을까? 클라이스트는 지진 당시 위험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행한 영웅적 행위의 보도에서 그 가능성의 일단이 있음을 내비치었다.
평소에는 사회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었던 사람들이 로마인과 같은 담대성을 보였다. 용감한 행동을 보인 사람들, 위험을 기쁜 마음으로 무시한 사람들, 자기를 부인하거나 신성한 희생을 바친 사람들, 그리고 생명을 지체없이 던진 사람들의 예는 너무나도 많았다. 마치 생명이 가장 쓸모없는 물건이라도 되는 듯, 그리고 곧 다음 걸음을 떼면 다시 찾아지기나 하는 듯이 말이다.
Menschen, die man sonst in der Gesellschaft wenig geachtet hatte, hatten R mergr e gezeigt; Beispiele zu Haufen von Unerschrockenheit, von freudiger Verachtung der Gefahr, von Selbstverleugnung und der g ttlichen Aufopferung, von unges umter Wegwerfung des Lebens, als ob es, dem nichtsw rdigsten Gute gleich, auf dem n chsten Schritte schon wiedergefunden w rde (152).
이렇게 이기적 생명을 경시하는 인간의 비상한 영웅적 행위가 이룬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진의 피해로 인한 고통을 기쁨으로 상쇄시켜주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고통이 달콤한 기쁨으로 섞여져서, 그들 말로 하자면, 사람들의 행복의 합계를 계산해 본다면, 한쪽 면에서 빠진 만큼 다른 한쪽 면에서는 꼭 그만큼 더해진 것은 아닌지 말할 수 없었다.
(...) so war der Schmerz in jeder Menschenbrust mit so viel s er Lust vermischt, da sich, wie sie meinte, gar nicht angeben lie , ob die Summe des allgemeinen Wohlseins nicht von der einen Seite um ebenso viel gewachsen war, als sie von der anderen abgenommen hatte (152-3).
이 인용문의 해석학적 의미는 아직껏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이 문장은 지진과 관련된 세계의 불가해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욕심을 초극하여 모든 것을 나눠 쓰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비상(非常)한 행위가 지진으로 인한 결손을 상쇄할 만한 업적 Leistung을 이루어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인간의 초극적 비상성이야말로 서로 폭력적으로 투쟁하는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의 가족 zu einer Familie"(152)이 되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개인적 안녕과 생명을 초극하여 남을 돕는 인간의 성품과 능력은 "에덴의 골짜기 Tal von Eden"(149), 즉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요세페가 동 페르디난도의 아내가 상처를 입어 수유할 수 없던 그녀의 아들 쥬앙을 품에 앉고 젖을 먹이는 행위는 새로운 인류 가족의 형성에 참여한 첫 발걸음이다.
하지만 골짜기에 일시적으로 가능해진 듯한 유토피아적 인간공동체는, 지진이란 우연에 의해 자극되어 발현된 인간의 잠재적 자기 초극성으로 가능해졌을 뿐, 아직 그것은 인간들의 의식에 의해 뒷받침을 받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아직 불안정하다. 이에 반해 이런 의식적 자기 초극행위를 실행한 예가 동 페르디난도이다. 그는 "불행한 예감 eine ungl ckliche Ahnung"(154)에 불안해 하는 돈나 엘리자베트의 집요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사적 결정을 내려 의식적으로 미사로 향한다. 나중에 그가 희생양을 찾는 난폭한 군중에 대항하여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억울하고 약한 자를 보호하기 위해 펼치는 영웅적 행위 역시 명료한 자의식에 의해 매개된 것이다. 이런 태도와 행위야말로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그만이 이런 영웅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초인은 아니다. 이미 지진 후의 위기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행위가 가능함을 보여주었었다.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이런 주체적 상승의 능력이 내재되어있다. 단지 그들은 동 페르디난도 같은 초인을 명료한 의식으로 모방하여야 할 뿐이다.
이제 {칠레의 지진}의 의미전체를 구성하는 반대쌍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한 축은 "비인간적 폭력성과 우연이 지배하는 환경에서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주관주의적 한계에서 개인적 행복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라고 설정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항하는 축은 "폭력과 우연을 초극하는 비상한 의지와 행위로써 새로운 인간적 의미를 구현하고자 하는 주체의 능력"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런 반대쌍이 체계이론의 주도변별과 다른 점은, 설정한 반대 요소들간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변모가능성 여부에 있다. 주도변별의 두 요소들은 그 위치와 입장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구성소적 반대쌍은 작품의 내적 진행에 상응하여 변모할 수 있다. 따라서 예로니모와 요세페도 초기의 주관주의적 행복추구의 입장을 초극하여 자신들 내부에 잠재한 주체 상승능력을 실현한다. 개인적 행복에만 관심이 있던 그들은 동 페르디난도와 그가 팔로 안고 있던 두 아이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자신들을 제물로 찾는 성난 군중 앞에 "자발적으로 freiwillig"(158)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며 동 페르디난도와 아이들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한다. 예로니모와 요세페는 말하자면 영웅적 동 페르디난도를 모방하여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간 것이다. 그들은 순진하고 좁은 한계에 갖힌 주관주의자로부터 새로운 인간 공동체를 정초할 수 있는 소망스러운 초자아적 인물로 변모한다.
이런 식의 주인공들의 변모는 클라이스트의 다른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칠레의 지진}후 2년 뒤에 발간된 드라마 {홈부르크 왕자}(1809)의 주인공 역시 개인적 행복과 명성을 추구하던 순진한 주관주의자에서 내적 변모를 거쳐 자신의 죽음도 불사하는 높은 정신적 영역으로 진입하는 영웅적 인간으로 변화한다.
이렇게 볼 때 {칠레의 지진}은 개인적 행복과 주관적 세계해석의 틀을 초월하여 이웃을 위하여 목숨을 던지는 초연한 자세만이 우연, 폭력 그리고 의미부조리로 점철된 현실 (즉 지진과 광신적이며 폭력적 사회)을 초극하여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를 정초할 수 있음을 그리고 있다. 설화자는 이 점을 다시 한번 노벨레의 결말에서 강조한다. 돈나 엘비레는 친아들을 잃게 한 남편 동 페르디난도의 행위를 전혀 비난하지 않고 사랑으로 감싼다. 그리고 그들은 친아들의 죽음과 함께 이미 개인적 행복은 깨어졌으나, 우연한 방법으로 그들의 손에 들어오게 된 필립을 양아들로 받아들임으로써, 혈연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자 한다. 즉 그들은 인간적 주체가 우연을 초극하여 적극적으로 정초하는 인도적 의미에 기초한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육화(肉化)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설화자가 골짜기 장면에서 그린 유토피아적 비젼을 지상에서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이다.
{칠레의 지진}을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클라이스트는 이 작품에서 광신적 현실에서 발생하는 우연적 자연의 현상과 그것의 위협성에 직면하여 인간은 나르시시스적 훼손 narzi tische Kr nkung을 경험하는 바,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의 주체적 능력이 무엇인가를 묻고 이에 대한 해답을 자기의 행복과 생명을 위대한 목적을 위해 투기(投棄)하는 비상(非常)한 영웅성에서 보았다. 지진은 인간적 합목적성을 파괴하는 부조리의 사건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의 우연성을 넘어서서 인간주체의 능력으로써 새로운 인간적 의미를 창출하도록 촉구하고 도전하는 계기가 된다. 영웅성은 클라이스트적 주체성의 고양 방법이다. 고전주의적 주체성의 고양은 괴테의 시 「신적인 것 G ttliche」에서 보듯 "고상함 edel"과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 hilfreich"이 그 이념적 지향점이라고 본다면, 클라이스트가 예로니모, 요세페 및 동 페르디난도를 통해 그리고자 한 지향점도 이와 거의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이루는 괴테의 방법이 예컨대 "아름다운 영혼" 이피게니에에서 나타나듯 그녀 역시 죽음을 각오하였으나 대화와 설득을 통한 "부드러운 방법"이라고 한다면, 클라이스트의 방법은 "과격"하다. 클라이스트와 괴테는 과격 대 부드러움의 방법의 차이일 뿐, 그들이 지향하는 인도주의적 이상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필자의 {칠레의 지진}해석을 제시한다. 이것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 체계이론에 의거한 해석으로부터 적지 않은 통찰력을 빚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체계이론적 해석과 결국에는 양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필자의 해석은 지라르의 비평과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필자의 의견으로는 이 두 비평은 서로 보족적이며 어느 정도 통합이 가능하다. 필자의 해석이 {칠레의 지진}의 전체구조에 대한 역사적 특수성을 밝히고자 한 학문적 분석이었다면, 지라르의 비평은 이보다는 폭력을 가하는 군중의 메카니즘 분석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것은 현대사회의 폭력문제를 염두에 두고 이를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 목적론적 해석으로서 작품의 전체구조를 다소 오해하는 약점을 안고 있으며, 그 당시의 독특한 작가 클라이스트의 개인적 고뇌와 해결책을 사상(捨象)하는 누를 범한다. 이것은 구조주의적 비평이 안고 있는 비역사적 관점으로 말미암는다. 구조주의는 어느 텍스트에서든지 동일한 구조를 채취해 내려는 경향을 좇는다. 이럴 경우 저자의 시대적 역사성과 개인적 특수성이 명료하게 밝혀지지 못한다. 따라서 지라르가 하듯 작품 속에서 클라이스트의 독특한 시대적 존재특징을 사상한 채, 폭력의 문제가 서술된 것으로만 이해할 때, 클라이스트의 독특성은 살아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지라르의 비평은 필자가 문학구성소를 원용하여 행한 것과 같은 역사주의적 비평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하지만 필자의 해석에 있어 관심의 주변으로 밀린 폭력현상은 지라르의 인류학적 이론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조명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칠레의 지진}에 대한 두 비평을 종합적으로 요약하자면, 클라이스트는 우연과 폭력을 초극할 수 있는 주체적 능력의 정초에 그 관심을 두고 있지만, 동시에 의미부조리에 빠진 광신적 현실로부터 촉발되는 폭력의 기제를 고발하고자 하였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폭력성의 극복을 그 이념적 지향점으로 삼고 있는 지라르의 문화인류학은 문학비평, 특히 신화비평에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었다. 무엇보다 신화에 대한 그의 해석은 그리스 문화와 이에 기반한 일부 유럽의 문화전통을 전복시킬 수 있는 함의를 담고 있다.
그의 이론은 현대의 폭력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큰 의의를 부여받을 수 있다. 예컨대 헤겔의 "주인-종"의 변증법은 부정과 폭력의 역사를 초극할 수 있는 단초가 결여되어있다. 쌍극 구조적인 헤겔의 모델은 주인의 위치를 차지한 종의 또 다른 종에 의한 전복(顚覆)을 막을 수 있는 탈출구를 제공하여 주지 못한다. 헤겔적 모델은 폭력의 순환적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폭력을 자연적 "충동 Trieb"으로 보는 일체의 인류·심리학적 모델도 폭력의 순환성을 파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정초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구조 모델은 주체가 자신의 모방대상을 선정하기에 따라 주인과 종 사이에 벌어지는 폭력의 나선적 자체 회전의 틀을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예컨대 주체가 그리스도, 부처 혹은 간디와 같은 평화의 사도들을 전범으로 삼아 모방한다면, 폭력의 고리는 끊어질 수 있다. 이와 같이 지라르의 이론은 탈주술화된 현대에 있어서도 평화를 지향한 종교적 위인들의 가치를 다시금 새롭게 조명하고 현대인들을 위한 대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단초가 된다. 그런 위인들을 향한 모방적 욕망은 물질적 이익 때문에 이전투구(泥田鬪狗)에 이골이 난 대다수 현대인들로 하여금 더 높은 가치를 욕망하게 하여 줌으로써 폭력의 전염성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뛰어난 이념적 지향성에도 불구하고 지라르의 이론은 일반적으로 구조주의가 안고 있는 비역사성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따라서 {칠레의 지진}의 비평에서 나타났듯이 문학비평으로서의 지라르의 문화인류학은 한계를 내재하고 있다. 하지만 문학비평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다각적 시각을 추구해야 한다면, 지라르의 이론은 문학비평가가 무시해서는 안 될 중요한 시각을 제공해 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본고에서 지라르의 한계를 역사적 시각을 지닌 "문학구성소"를 보조도구로 사용함으로써 극복하고자 시도하였다.
마지막으로 본 논문의 주제가 아니므로 생략하였으나 지라르의 이론과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혹은 프로이트의 심층심리학과의 비교는 학문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관심거리가 됨을 언급하고자 한다. 필자는 적당한 기회에 이런 주제를 다룰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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