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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못 쏘는 군인들 :
베트남전쟁 동안
자기 총으로 적을 실제로 쏜 사람은 얼마나 되나
분대 10명에서 전투 중 자기 총을 쏘지 않은 사람이 평균 3인 이하다. 이 수치에는 병사가 얼마나 오래 군인이었지(전투 당시 계급), 전장에서 몇 달을 보냈는지 고려되지 않았고, 적이 아군 진지까지 돌파해 들어올 때도 그랬는가는 확인할 수는 없다. 문제는 베트남전쟁에서 적이 미군 진지를 공격하는 일이 흔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사무엘 리맨 준장은 이런 문제에 관심이 컸고 [Men Against Fire]란 책을 썼다. 이 책은 2차대전 중 유럽과 태평양 미군병사를 대상으로 통계를 낸 것, 마샬 준장은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민간인 상태에서 aggression(이유 없는 공격, 공격성)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전투라는 특수 환경에서 목숨이 걸려 있기에 강제된다. 민간인 심정으로 보면 사람을 쏘는 것은 금지된 것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살인 공격성에 대한 거부감과 공포는 – 누가 아기에게 모유를 권하지 않아도 받아들이듯이 – 정말 이래도 되나? 사람을 빨아들이며 깊고 넓게 퍼진다. 병사에게 필요한 공격성은 보통 사람으로 살아온 각자 감정적 기질에 따라 다르다. 이런 주저는 전투에 들어갈 병사의 거대한 핸디캡이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넣고 있지만 하면 안 된다는 의식을 본능적으로 불러일으킨다.]
마샬 준장의 조사에 시비 거는 사람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그런 내용을 전쟁에 나가야 할 미국이란 국가 무장군에게 적용할 수도 (이해하고 봐 줄 수도) 폭 넓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병사들을 지휘할 간부들에게 참조로 쓰였다.
마샬 준장은 은퇴 후에도 분석을 계속하며 군사 역사가로 연구한다. 마샬의 이 연구는 한국전쟁 이전에 시작해 종전 후에도 계속했다. 계속 책을 쓰고 포트 리븐워스 등 전국 군사 기지를 돌며 강연했다. 마샬은 언변에 과장이 없는 사람으로 1960년대 중반에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획기적 군사 이론가가 된다. 마샬 이론은 베트남으로 가는 장교/준사관에게 넓게 퍼져 영향을 줬다. 지휘관들에겐 적을 향해 쉽사리 총을 쏘지 못하는 병사들이 걱정되었고, 동남아시아 파병을 위해 미국이 대대적으로 군대를 재건하는 시기다.
그전에는 대의를 위해 자연스레 사람을 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시대라도 싸워야 할 미국인들에게 금방 죽을 수도 있다는 원초적 걱정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네가 죽을 수 있으니 그냥 쏴라, 는 아무리 군사교육이라도 교의적 뿌리가 필요하단 생각이 든 이론이었다.
마샬은 병사가 소총 권총 샷건 기관총 유탄발사기 등 휴대 병기 사용에 좀 주저하는 경향을 제시했다. 마샬은 베트남을 직접 방문해 2차대전/한국전쟁과 비슷하게 연구한다. 마샬 준장은 앞에 벌어진 전쟁보다 베트남이 유별나지 않다고 생각했다. 베트남에서 미군 보병들은 100%에 가깝게 전투에 참가하는 것처럼 똑같아 보였다. 보기에 잘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샬이 보기에 쏘길 주저하는 미국인의 현상이 완전히 가신 것도 아니었다.
미국이 잔인하고 격렬했던 독립전쟁 남북전쟁과 거친 개척시대도 겪었기에 총과 친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2차대전 발발 시점으로 보면 미국 남성 모두가 총칼 들고 싸운 경험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생각보다 소수다. 다수는 도시가 아닌 먼 시골에서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이었다. 미국은 도심과 시골의 젊은이가 전혀 다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넓다. 시골은 신앙심도 강하다. 그런 젊은이를 강제로 일괄 징집해 훈련만 시키면 사람에게 총을 쏘게 된다? 쏠 것이다?
약 20년 흘러, 마샬의 분석 타당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2차대전 참전자들 면담을 통한 분석이 1980년대 중반의 현실로 흐르면서 곰곰이 생각하게 된 것. 미국은 여전히 전쟁에 나가고 있었다. 통계로 산출된 2차대전 참전자의 사격 비율을 폭 넓게 받아들이긴 여전히 시간이 필요했다. 마샬의 이론으로 미군이 충격을 받은 건, 적을 향해 총을 안 쏘는 병사가 아무리 %가 작아도 상당한 숫자가 된다는 대형 군대란 점이다. 시간이 흘러 이런 과거의 이론들을 검증하기 시작했다. 바로 통계 표본의 적정성 말이다.
질문은 부득이해 보였다 : 2차대전 미국인들은 적과 첫 교전부터 문제가 없었는가? 세대가 달라졌는데 베트남전쟁의 표본은 마샬 이론에 교정 개정이 필요하지 않나? 2차대전과 베트남전쟁은 달랐다. 오히려 마샬의 이론이 심화하는 기분이 든다. 약 4반세기 이후 세대는 병사로서 사람을 쏘는 데 어떤 결함이 생겼는가?
국가적 군사 준비의 기초에 관한 것이라 걱정이 있었다. 전장에 미국 젊은이를 보내면 불필요하게 사망할 것이고, 그럼에도 총을 쏘지 않는 건 확장하던 미군의 근본적 실패 요인이 될 수 있다. 강제로 쏘라고 감시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존재한다.
(이 글쓴이) 나는 비슷한 리서치로 1987년에 베트남 참전 1기병사단 참전자 258명을 분석하는 조사를 했다. 나는 2차대전 때 미국인들이 기꺼이 적에게 총을 쐈다는 저변 의식에서 시작했으나, 나의 동기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떤 분석도 베트남전을 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의 통계를 적용하지 못했다. 미군에 어떤 문제가 새로 생겼는지 의문이 들었다. 마샬 준장의 주장은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떨어졌어도 여전히 그 이론에 수긍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주제는 가혹할 정도로 정밀하게 조사하는 것이 중요했다. 베트남전쟁 이후로 최근까지 미국이 참가한 전쟁에서 참전자들은 날카로운 질문에 전투 중 쏘는 데 꺼리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러한 궁극적 응답에 대한 분석은 치밀한 시대적 배경 연구도 필요했다.
베트남전부터 시작된 현대 미군의 패턴 : 훈련은 전투에 들어갈 정도로 충분히 준비되었는가, 베트남부터 시작한 1년 참전 주기의 영향, 6개월짜리 지휘관 참전(six-month command tour)이 미군병사의 전장 활동에 주는 영향을 알아야 한다.
(잇빨 주 : 소설 미트볼 스파게티에서 본인이 썼지만, 월남은 지휘관의 부임 – 즉, 실제로 전투를 지휘하는 말단 소대장 중대장의 부임 기간에 미군 한국군 똑같이 문제가 있었다. 미군 한국군 모두 대대장 이상은 참전 기간 1년 동안 거의 안 변했으나 그 아래가 문제였다. 가장 위험한 소대장은 한국전쟁이나 월남전이나 전상률이 높은 무척 위험한 보직이었다.
안정적 지휘력을 위해 장교만 길게 참전시킬 수도 없고, 전장이라 다치고 전사하는 지휘관 때문에 지휘관 고체 주기도 짧다. 게다가 장교는 전장 [녹색 견장] 실 지휘관이란 경력이 차후 군 생활에 무척 중요하다. 장교에게 소대장 중대장을 1년간 시키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에서 성과를 얻는 장교는 극히 소수다.
야심 있는 장교는 지원부대/참모보다 전장 소대장 중대장을 노렸다. 월남전 한국군도 중대장 보직은 대기 순번이 차고 넘쳤다. 임관 출신 차별도 있었다고 본다. 가장 빠른 교체는 경상이라도 보직을 수행하지 못할 수준으로 다치는 것. 이 글을 읽는 군 생활 경험자는 지휘관이란 = 2년이란 고정관념이 있을 것이다.
여러 사정으로 전쟁터 소대장 중대장 교체 주기는 짧아진다. 하여, 미군이 전장 지휘관을 뭔 6개월짜리로 하냐 의문이 들겠지만, 6개월이라도 꽉 채우면 베트남전 미군에선 굉장히 열심히 한 것이 되었다. 오히려 6개월 이상 반드시 하란 정책처럼 보인다. 군 생활 해본 사람은 BOB 후반 회에서 육사 갓 나온 장교가 소대장 잠깐 하고 참모로 가는 일은 아이러니 하면서 이해도 된다.)
베트남이 과거 전쟁과 달랐던 뚜렷한 변화는 : 베트남에 도착한 병사가 특수 주특기가 아니면 자기가 갈 부대를 대부분 몰랐고, 베트남에서 자대를 가도 소대 중대 안의 1년 지난 고참들은 어김없이 떠난다. 이 문제는 제대 결집력을 방해하는 심각한 요소였으나, 베트남전은 한국전쟁 후 축소했던 미군을 세 번째로 확장하던 시기라 방법이 없었다. (2차대전, 한국전, 이어 베트남) 현대 미군은 부대를 통으로 참전시켜 1년간 전투하도록 한다. 중간에 제대하지 않는 한, 같이 생활하던 전우들과 같이 파병 갔다가 돌아온다. 군종/특수 보직이나 주-방위군 등에 6개월 참전도 만들어 이라크/아프간 전쟁을 치렀다.
이러한 현대 미군 참전 제도의 초석은 베트남에서 시작했다.
총을 쏘고 안 쏘는 문제로 다시 돌아가면,
상당한 표본을 가진 내 조사에서,
인터뷰에 응한 베트남 1기병사단 참전자 258명의 결과 : 258명 중 적을 향해 한 번도 총을 쏘지 않은 사람은 딱 9명이었고, 마샬 준장의 유럽/태평양 전장의 통계와 거리가 멀었다. 외에도, 일부는 적 사격을 받으면서도 몇 가지 결점으로 사격을 주저한 의심이 들었다.
전투 당시 옆 동료들의 행동도 물었다. ‘전투가 시작되어 즉각 사격을 시작한 동료는 얼마나 된다고 보는가?’ 참전자들 답변은 소총 권총 유탄발사기와 샷건으로 84%가 쐈다고 통계가 잡혔으며, 공용화기인 기관총 반원은 (대체로 M60 기관총) 90%에 가깝게 사격했다고 대답했다.
이 통계는 베트남전 미군이 적에게 쏘는 걸 주저한 건 작은 확률이었다고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통계에 의문을 갖고 평균치를 내면 모든 분대 10명 중 2명에 가깝게 전투 중 총을 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나타난 문제는 마샬 준장의 2차대전 연구를 적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격을 안 한 소수로 인해 화력이 저하되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부대 범위를 넓히면 문제가 달라진다. 부대가 500명 소총수라면 80명이 총을 안 쏘고 교전에 참가하지 않은 거다. 베트남전이 마샬의 통계와 다른 것이 베트남전 미군이 싸운 곳이 도시, 논, 정글, 화력지원진지 등 다양했다. 어쨌거나 왜 그렇게 상당한 사람이 총을 안 쐈을까?
하나의 변수로 설명할 수 없다. 군대는 병사 한 명의 의무 방기가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질 요소다. 조사 대상이 된 1기병사단 참전자는 일반적인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다.
먼저, 병사의 기초적인 일인 적에게 소총을 쏘며 교전하는 부류, 이 부류는 소총수/기관총반/헬리콥터 기총수/차량 운전병 등으로 자신의 휴대 병기로 적을 쏴 죽여야 했다.
두 번째 부류도 기본적으로는 첫 번째 부류와 동반하지만, 적에게 총을 쏘는 건 어쩌다 일어나는 부류이면서 그보다 앞선 책임이 있다. 육군 해병의 분대장, 선임하사들, 소대장과 중대장은 기동을 지시하고 화력과 탄약을 분배하며, 전투 승리를 위해 포병 항공폭격을 유도했다. 기관총반 사수 이하는 사격보다 M-60 실탄을 떨어지지 않게 수급하고 사수가 못 보는 표적도 알려줘야 한다. 포병 전방관측장교도 사격에 참여할 수 없고, 의무병은 부상자를 돌보고 공병은 벙커를 파괴하고 지뢰 제거하고 지하 터널(시설)도 수색해야 했다. 군목도 있고, 무전병은 사격보다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조종사/헬기 승무원도 있다.
이 두 번째 부류는 교전이 벌어지자마자 권총을 들고 소총 개머리판을 어깨에 대고 조준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 근본적으로 지휘관급도 자기 병기를 쏠 순 있으나, 그보다 중요한 일 때문에 사격은 선택 사항이다. 부대 전체를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 어쩌면 병사보다 위험할 수도 있다.
나중에 중장까지 진급한 할 무어는 고전이 된 그의 책 We Were Soldiers Once and Young에서 7기병연대 1대대장이었다. LZ X-Ray에서 일어난 전투를 기술한 무어 중령은 말한다.
[소총수들과 같이 총을 쏘고 싶은 유혹이 불쑥불쑥 치솟는다. 나는 그 유혹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한 개 중대의 전투만이 내 임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황이 악화 일로로 처하자, 어쩌면 난 복잡할 거 없는 하나의 소총수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My duty was to lead riflemen. 나도 M-16을 상당히 쐈지만, 지휘관은 원래 그러면 안 된다.]
아주 다른 이유로, 군목이 적과 교전한 경우는 거의 없다. 종교적 이유로 병기를 휴대하는 게 금기라서 전쟁터 군목과 의무병은 병기 휴대를 강제하지 않았고, 서양 전쟁의 근본적 규칙은 군목과 의무병을 적법한 표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군목과 의무병은 총에 맞고 전사했었다.
적에게 쏘는 것이 시급한 임무가 아닌 사람들이라도 앞서 말한 ‘적이란 인간을’ 그냥 쏴야 한다! 그런데 강제적 실행과 공포로 총을 못 쏠 수도 있었다. 이런 지휘통제 부류는 전투 시 위치도 총을 쏠 수 없는 두 번째 요소가 있다. 지휘 계급은 병사들이 총을 쏘도록 독려하는 지위다. 지휘 계급은 정말 필요할 때만 총을 쐈다.
베트남은 쏘고 싶어도 못 쏠 때가 생겼다. 빽빽한 정글에서 병사가 구불구불한 대열의 맨 마지막에 있으면, 교전이 벌어져도 저 앞 선두의 소리만 듣고 소대원들이 어디 있는지도 심지어 안 보인다. 그런 상태에서 총을 쐈다간 자칫 동료 부대원을 맞출 위험도 있었다. 같은 보병이라도 주둔지나 화력지원진지 방어선에서 적 공격을 받는다면 참호에서 아무리 쏴도 어둠을 향한 사격이라 내 총이 뭘 맞추는지 알 수가 없다. 사람은 쏜다는 기분이 크지 않다.
병사가 총을 쏘는 동안 공포가 지속한다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선천적인 소심함과 비겁함은 드물었고, 동료 병사가 총을 못 쐈더라도 80%는 무서워서 얼어붙은 거야, 정도로 설명/이해했다.
사격하지 않은 전우를 봤다고 응답한 참전자들은 공통적으로 ‘전장 공포란 상황에 따라 일반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해하고 있었다. 어떤 경우는 너무 놀라고 겁나서 총을 생각조차 못 하고 있다가 교전 후반에 총을 쏜 경우도 있고, 그다음 전투부터 총을 쏘는 병사도 있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공포가 부대 전체에 공공연히 퍼지기도 하는데, 현 상황에 대한 냉정한 평가 때문이기도 했다. 정확하고 강력한 포격이 날아오면 병사는 엎드려 꼼짝 못 한다. 부대 모두가 주의 집중이 안 되고 저 앞에 적이 직접 나에게 쏘기 전까지는 판단 자체를 못 하고 기다린다.
한 참전자는 어느 상황을 기억한다. “적이 나무와 통나무 뒤에 엄폐하고 강력한 위력사격을 갈기는데 아군 거의 다 응사를 못 해. 우리가 거기다 먼저 포격을 때렸거든? 포격을 보고 저기는 무력화 되었다고 산만해져서 방심하다 적에게 허를 찔린 거야. 이 먹통이었던 병사들이 곧 응사하게 돼.”
다른 참전자는 소대장 때문에 벌어진 쓰라린 경험을 말한다. “대규모 북베트남군이 우리 매복 구역 안으로 통과하는데 겁먹은 인간이 교전 없이 지나가도록 놔뒀어.” 필시 공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행동이 경험 많은 중위였다면 훌륭한 판단일 수도 있다. 그 매복 상황에서 적 규모가 너무 커서 매복 공격을 해봤자 아군의 재난으로 이어질까 놔뒀다면 그렇게 이상하진 않은 거다. 그러나 다른 참전자들은 아무리 그래도 그런 상황에서 그런 이유로 공격하지 않았다는 건 이해하지 못했다.
전장에서 각자 얼마나 무서웠는지는 공통 수준을 규정할 수도 없다. 신병은 돌연한 교전 발발의 굉음에 너무 자주 압도된다. 잡물과 먼지가 날아다니고 잎사귀가 떨어지고 총알이 나무를 때린다. 경험 많은 고참들도 그런 상황에선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채기 어렵다. 모든 신병은 첫 전투에서 얼어붙을 잠재적 존재다. 전입 신병이 즉각 반응에 실패하는 결과는 신병 본인의 사망 이유도 된다.
어느 1기병사단 참전자는 전입 직후 신병의 전사를 떠올린다. 과거 전장에선 참호가 삶의 강력한 방패막이라고 생각해서 concrete foxhole이라 부르기도 했다. 보병의 기본 : 참호로 들어가면 안 죽는다! 베트남전까지 야전에서 경계/방어로 전환하면 참호를 팠다. “교전이 발발하자 그 친구는 참호를 찾는 거 같았어. 죽어가면서도 계속 입이 그러는 거야. ‘어딨지? 내 참호 어디지?’ 첫 총성이 울리고 10~15초 지났는데 그 친구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어. 일단 바닥에 엎드리란 고함도 안 들렸나 봐. 부대원들이 온통 ‘엎드려! 엎드리라고!’ 소리를 질러도 반응을 안 해. 그렇게 전사했어.”
다른 참전자는 총을 만지작거리다 못 쏘는 걸 봤다. “첫 총격전에선 보통 그래. 그런 모습 처음 보는 게 아냐. 공포가 압도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까 판단이 안 서는 거야. 생각이 정지하는 거지.”
다른 참전자는 첫 전투에서 적에 대한 공포 때문에 총을 쏘지 못했다고 했다.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난 그걸 받아들이기 부끄러웠어.”
(주 : 위 내용은 글의 흐름 상, 아무것도 못 한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이 부끄러웠단 문맥이다.)
가끔은 그 공포가 역작용으로 발동하기도 한다. 갑자기 일어나서 악에 받쳐 쏘는 병사도 존재한다. 그러나 기본적인 공포는 참전자 입이 말한다. “다른 무서운 건 총 맞아 죽을 거란 공포에 비교가 안 돼. 나머지는 씨발 그냥 그런 거야. 나 정말 총알에 안 맞길 빌었어. 우린 전우가 총에 맞아서 어떻게 되는지 직접 보거든. 미국에서 갱단 총격전 사람 죽는 얘기를 듣는 거랑 비교도 안 돼.”
가끔은 총 쏘기를 바라도 총 기능-고장이 막기도 했다. 훈련소 끝나고 베트남 첫 전투까지 익숙한 총이 아닌 경우가 있었다. 논쟁의 여지가 있으면서 당시로썬 특이했던 M-16은 베트남 같은 곳에서 쓰려고 특별히 개발한 총이다. 즉각 응사와 자동 연사 화력에 중점을 둔 총이다.
베트남 참전자 상당수는 총도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훈련소부터 M-14 소총을 쓰다가 신형 M-16으로 전환이라 종종 조작에 실패했다고 한다. 무시하지 못할 규모 병사들이 구식 M-14로 기초군사훈련과 후반기 고등군사훈련을 받고는 베트남 도착하자마자 M-16을 개인 병기로 받았다. 생소한 소총을 들고 실제 작전에 투입되니 익숙하지가 않았다. 다소 복잡한 병기 전환 과정을 겪은 고참들이 M-16을 플라스틱 장난감으로 부른 건 유명하다. 미국인에게 Rifle은 M1으로 시작한 나무 개머리판과 강력한 7.62mm 구경이 전형이었다. M-16은 베트남 현지를 우선으로 보급되고 있었다.
어떤 병사들은 M-16이 M-14에 버금가는 기능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기계적 신뢰성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M-16을 불안하게 생각해 추가 무기를 휴대하기도 했고, 즉각 반응으로 M-16 조작이 가능한 건 운 좋은 병사였다. 그렇지 않으면 신병의 총은 갑자기 사라지거나 교전 끝나고 발견되기도 했다. (주 : 만지다 던졌단 소리) 그러나 어떤 경우건 베트남에선 공격하는 적과 교전하는 게 아니었다. 만약 한국전쟁에서 그랬다면 그 병사는 무조건 전사였다.
베트남전 시기 작전은 적을 직접 죽이는 것보다 상위 의미가 있었다. 부대들이 정보를 모아서 작전에 들어가면 종종 철 지난 것처럼 적이 사라지고 없었다. 정찰대가 적 징후를 보고 포격을 불러도 적이 지나간 다음이곤 했다.
다른 이유로 - 미군은 자기가 본 것만 단순히 보고했다. 야전에 꼭 필요한 정찰대가 총을 쏘면 위험을 초래한다는 미심쩍음이 있었고, 지휘관은 상당한 교전 예상에 이끌려 작전에 들어가는 욕망을 자제해야 했다. 가보면 지나간 뒤거나 아무것도 없었다. 많은 사례에서 정찰대를 투입하는 것부터 어려웠고, 작전 보안을 지킨다고 했지만 침투하는 즉각 기다렸다는 듯이 적에게 사격받곤 했다.
이와 비슷하게, 그 시절의 좋은 전술은 교전이 벌어져도 병사가 소총을 쏘는 게 최선도 아니었다. 수목에 막혀 잘 맞지도 않는다. 숙련된 베트콩/북베트남 부대는 날이 밝은 상태에서 공격하면 자기들 피해가 크다는 걸 알았다. 응사하지 않고 조용히 주시하며 야간방어로 정지할 때를 기다린다.
적 침투병들(sappers)은 미군의 야간방어선 구축 위치를 확인하고 해가 진 뒤에 공격했고, 일부러 건드려 미군들 총구 화염으로 방어선을 확인했다. 미군의 정확한 중화기-기관총들 위치를 중점적으로 봤다. 미군 기관총은 공격하는 자신들을 대량으로 죽일 잠재성 1순위 표적이었다. 잘 훈련된 적은 미군 방어선에 다가갈 때 크레모어 지뢰가 터진다는 것도 알았고, 어렵다 싶으면 박격포나 포병 지원을 부르는 것도 알았으며, 소총 기관총 유탄발사기를 쏘기 전에 수류탄부터 던진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건드렸다고 반응하는 건 미군의 위험한 위치 노출이었다.
마샬 준장이 주장하여 넓게 퍼진 2차대전 상식은 베트남과 달랐다. 2차대전에서 거의 통계가 없었던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도 징집되어 보병부대로 와서 의무병 같은 보직을 했다. 기관총반 탄약 운반병나 비전투 보직들을 했다. 그런 비전투 보직들은 종종 엄청난 위험 속에 무장도 없이 임무를 수행했다.
면담한 1기병사단 참전자들 다수가 참전 고참의 시각이었지만, 양심적 거부자들도 주어진 일을 평균적으로 잘 수행했고, 그 신념을 존중하기도 했다. 한 참전자. “소대 의무병이 양심적 병역 거부자였어. 참전 동안 그 친구는 총을 휴대하지 않았어. 우리가 물었지. 우리 소대가 적에게 완전히 휩쓸려 점령당할 위기라도 총을 안 들 거냐. 너의 전우들이 죽어가는데도 총을 안 쏠 거냐. 그 친구는 그래도 총을 안 쏠 거래. 그 친구는 나이 먹은 지금까지도 총기 무기에 반대하는 신념이 아주 깊어.”
부대가 no-fire zone에 있을 때가 있고, 거기선 병기 사용이 금지된다. 부실한 훈련으로 전투에 들어갈 병사에게 부적당한 상태로 방치한 결과는 여러 건 보인다. 어떤 실례에서 병사는 적을 본 상태에서 곧바로 쏴야 했음에도 손가락으로 “어. 어.” 지시하는 행동을 했다. “내가 우세한 상황이었지. 그런데 내가 그냥 서 있었어. 이어서 난 사격이 아니라 깡통을 던졌어. 그마저도 못 맞추고 중간에 떨어졌어. 미국에서 권총 강도를 처음 당해 봐. 딱 그거야. 할렘에서 상습적으로 당한 애들은 덜 당황하겠지.”
이러한 분석도 한 줌 남김없이 철저하진 않다. 그러나 부대에 총알이 날아오는 상황에서 총을 안 쏘고 교전에 임하지 않는 몇 명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투라면 으레 전체가 쏠 수 있었지만, 가끔은 몇 명만 쏠 기회일 때도 있다. 그러한 공포, 소심함, 부적당한 판단과 혼란으로 당연히 적에게 쏴야 할 사격을 못 했다. 그런 예외적 상황이 베트남에 꽤 있었다.
인터뷰 구술로 보면 위험이 닥쳐 분명히 총을 쏴야 하는 상황에서 나온 방대한 각양각색 상황들이었다. 다양한 영향으로 베트남에서 미군 병사가 적에게 총을 쏠 요소는 오히려 잘 맞아떨어져야 가능했다.
누구나 알듯 현대전 초입으로 간주하는 베트남전쟁 미군은 지원부대 대비 전투부대의 비율에서 사전의 어떤 전쟁보다 지원부대가 많고 다양했다. 일상의 직무가 총이 필요 없는 장병이 미국 시민들 상식보다 많았다. 파병 인원 대비 말단 보병이 너무 적어서 전쟁이 지지부진했다는 분석도 있다. 전투부대 자신도 그 안에 본부와 지원부대 규모가 현대에 커졌다. 어느 총괄적인 조사는 베트남에서 적을 실제로 보고 총을 쏜 미군이 전체 파병자의 10% 아래라는 통계까지 있었다.
선진국 군대는 효율성 때문에 지원부대가 세분화하고, 전투부대를 중점으로 지원부대가 단순한 것이 공산권 군대 특징이다. 비대해진 군대와 베트남이란 부정기적이고 불특정한 전투 상황에서 말단 전투부대 보병과 중화기 주특기 참전자만 골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중에서 어떤 이유로 총을 안 쏜 사람을 본 적이 있냐, 그 이유가 무엇이었냐, 쉽지 않은 리서치였다. 영화 ‘플래툰’에서 주인공이 - 태어나서 처음 듣는 미국 각지 시골 출신이 소대에 모여 있다고 나레이션 한다.
(잇빨 주 : 앞 세대부터 이어진 386 농담이 생각나네요. 돈도 빽도 없으면 일빵빵.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왔어? 그럼 너 일빵빵! 주특기 번호 100 보병. 훈련소 훈련병소대장은 ‘대학 다니다 온 먹물 손들어 봐!’ ‘글씨 깨끗하면 서무병 된다더라.’)
어쨌거나 병사가 작전에 들어가면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이미 안다. 아무리 가변적 요소가 교전 중에 낄 수 있어도 결국 군인의 primary job is to shoot to kill.
인터뷰에 응한 1기병사단 제3의 부류는 베트남에서 최소 15회 베트콩/북베트남군에게 총을 쏜 사람들이다. 그 부류 거의 80%는 교전이 50회에 가까웠다. 가장 특별한 그룹이었는데, 지속적으로 교전을 마주해야 했던 사람들이다. 바로, 항공기 승무원과 그 기총수들. 준사관과 장교들은 항공기로 전장 상공을 몰며 평균적 교전 참가가 훨씬 많았다. 세 번째 부류 어떤 참전자는 총 교전 회수가 100번이 넘는다. 이 부류의 반수가 교전 50회에 가까웠다.
이와 나란히 다른 영향도 병사의 사격 유무를 가늠한다. 작전에 들어가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의지에 엄청난 위협을 느낀다. 그런 의지가 있다면 다른 거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이 좋건 싫건 쏜다. 1기병사단 병사 두 명은 베트남에 있는 내내 단 하루도 빠짐없이 저 석양이 마지막 석양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한다. 잠에서 눈을 뜰 때마다 기분이 새로웠다고. 내 리서치에 임했던 절대다수는 소총수, 헬기 기총수와 가장 선두에서 작전에 나섰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전투 보직들은 죽지 않아도 다칠 확률이 무척 높았던 사람들이다.
적과 교전에 휘말렸을 때 전투행위의 다른 요소는 기후다. 남베트남 북부는 9월부터 1월까지 우기이고, 남부는 5월부터 9월까지 우기다. 그러므로 미군 처지에서 적 침투로 가장 어려운 시기는 1월부터 5월이다. 건기에는 미군 항공기가 매일 뜨기에 적도 똑같이 힘든 시기다. 그전에 있던 프랑스군부터 미군은 놀랍지도 않게 늦겨울부터 봄까지 몇 달의 전상이 어마어마했다.
그러므로 병사들도 어떤 시기에 어떻게 적과 거대한 전투가 벌어진다는 걸 깨닫게 된다. 지역 차이도 뚜렷하다. 지역별로 적 활동이 전적으로 다르다. 특정 지역과 마을은 인근 지역에 비해 상습적으로 교전이 벌어진다. 지역별 위험도 큰 차이는 실재했다. 남베트남 3개 도는 (광트리, 광남, 투아 티엔) 전체 미군 전상의 40%를 넘었다. 어느 격렬한 시기, 남베트남의 40개 지역 (주 혹은 도) 중에서 3개 도를 제외한 나머지 3/4의 주에서 전사한 미군은 고작 10명이었다.
시간도 마찬가지로 현실의 일부분. 베트남전쟁 끝난 후 통계로 증거들을 보게 되는데, 부인할 수 없이 1968년 미군 전상은 어마어마했다. 1968년은 미국이 역사적으로 참전한 모든 전쟁 중 한 해에 1만 명 넘게 목숨을 잃은 유일한 해다. 1968년 베트남에 있던 미군 1천 명에 28명꼴로 전사하여 그 어떤 해보다 높았다. (주 : 1968년 구정공세 영향도 크다)
시간은 다른 이유로도 역시 영향을 주었다. 전투 경험이 얼마나 쌓였는가에 따라 본인 생존에 지배적이었다. 신병들은 본인이 훈련한 전투기술을 쓸 틈도 없이 당황한 상태로 죽는 일 빈번했다. 이른바 ‘concrete foxhole!’ 상태로 전장 생존 기술을 배우기도 전에 죽는다.
참전자들은 신병이 전장에 적응하기도 전에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 누차 말한다. 병사가 베트남 도착 첫 3개월 안에 전사 확률이 나머지 9개월 동안 죽을 확률과 사실상 동등했다. 첫 3개월 전사 확률이 참전 1년 중 3배로 높은 것. 병사는 전장에 적응하고 익힌 시간이 길면 길수록 살아서 돌아갈 확률이 극적으로 높아진다. 거꾸로 말해 베트남에서 10개월 정도 버틴 고참 보병은 죽을 확률/조건이 아주 낮다. 그런 조건들을 본인들이 피해 간다.
국가가 젊은이를 병사로 만들어 전장에 보낼 때는 분명하게 준비되어야 하고, 각 개인은 전장 체험을 통해서 생존 확률이 높아진다. 이 리서치에 응답한 기병사단 병사들의 말을 들다 보면 전장 행동을 잘 알고 있고, 전투에서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기했으며, 병기도 통달하고 실전이란 또 다른 전문 훈련을 받은 사람들 같았다. 그런데 1년이 지나면 베트남을 떴다. 게다가 장교는 6개월짜리 지휘관 참전도 있었다.
베트남전쟁은 미군 장병이 배워서 쓸만하면 귀국했다.
[끝]
잇빨 주] 이러한 전장 사격에 대한 병사의 즉각 반응/마음가짐(혹은 교의)에 대해선 우리 국군도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런 문제로 가열된 토론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 나에게 '말처럼 사람에게 총을 바로 쏠 수 있을 것 같아?' 마샬의 이론 같은 의견과 충돌했다. 거기서 사후 PTSD까지 나왔다. 난 그게 이해되지 않았다. 'PTSD는 나중 문제지. 그거 걱정하면서 어떻게 전투해! 나중에 올지 안 올지 몰라도 쏘는 거지! 병사는 일단 쏘고 PTSD는 나중 문제지.' 그러나 나는 이상적인 군인의 공격성을 말하고 있단 반론을 받았다. 글쎄, 내가 남다른 군인의 자질이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난 무조건 바로 쏠 거라고 생각했다. 군인이 그런 생각을 왜 해야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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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군대에서 가르칠때 총을 쏘면 무조건 인간이 죽는다는게 아니니 그냥 그 방향으로 쏘기만 해라 라고라도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어차리 니 실력으로 누구 못 죽이니 그 방향으로 총이나 몇발 쏘면 내가 감사하겠다....
누구도 모를일
그러나 '저 선임과 저 상관과 저 동기와 저 후배와 함께라면' 짦은 군생활에서 분명히 느꼈던 마음가짐
생각할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