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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루소 Henri Rousseau, (1844-1910)】 "The Sleeping Gypsy 잠자는 집시"
앙리 루소는 프랑스 북서부 도시 라발(Laval)이라는 곳에서 출생해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노동자였던 그의 부친이 일찍 타계하면서 집안의 가장이 됐다.
24살쯤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해 1870년대 초부터 파리 세관에서 근무했다. 말단 공무원 일을 하며 그림을 독학으로 공부해 그의 나이 50세가 돼 20여년 이상을 근무해왔던 직장을 은퇴하고 전업 화가 길을 걷는다. 오로지 ‘자연’밖에 다른 스승이 없었기에 언론에 주로 소박하며 원시적인 면을 가진 직관주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결국, 그가 남긴 그림은 약 200여점 이었으나 완성 후에도 수차례 수정해 명기된 시기가 정확하지 않은 작품이 제법 많은 편이다. 당시 주위 사람은 그를 우스꽝스러운 기인으로 여겼지만, 루소는 자신을 위대한 화가라고 진지하게 믿고 있었다.
그가 가진 개성적 기법은 원근법이다. 비례의 원칙에 따르지 않고 부분을 덧붙여 탄생한 인물의 가면 같은 모습은 독자적인 미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입체파 이후 콜라주 기법에 영향을 미친다. 그는 잡지 삽화나 엽서 사진집 등 대중적인 매체에서 이미지나 구성을 빌리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매혹과 함께 그가 20세기 후반 팝 아티스트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부분이다.
1897년 낙선 전에 출품한 ‘잠자는 집시’에는 루소 특유 현상이 등장한다. 작가가 ‘아무리 사나운 육식동물이라도 지쳐 잠든 먹이를 덮치는 것을 망설인다’라는 부제를 붙인 이 작품에는 사막 같은 배경에 잠든 흑인 여인과 사자가 등장한다. 지팡이를 쥐고 누운 그이 곁에는 만돌린과 물병이 놓여있다.
전통적 범주 안에 드는 풍경, 초상, 정물 알레고리 등의 주제를 선택해 왔던 루소가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린 것은 당시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이유가 있다. 늘 그랬듯이 세부를 극사실적으로 묘사했음에도 각각의 모티브 조합은 모순돼 보이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정체를 알 수 없이 신비롭게 보인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사막 한가운데서 지쳐 잠든 집시 얼굴은 오히려 평온해 보인다.
참 기이한 그림이다. 사막에서 사자가 잠들어 있는 집시를 만났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생이 그런듯. 밤 같고 낮 같은 생, 낯이면서 밤인 생,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일찍 타계하고 가정을 이끄는 가장으로서의 막막하고 아득한 생을 표현한 것인가?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 일에 평생을 바칠 수 있는가?
프랑스 북서 지방의 라발에서 배관공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는 어렸을 때부터 가난에 시달렸다. 5살 때 아버지가 파산한 이후로 늘 떠돌아다니며 돈을 벌어야 했죠. 고등학교도 중퇴해야만 했다.
그러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던 중, 유혹을 참지못하고 돈을 훔치다 걸렸다. 이후 그는 형을 줄이기 위해, 군대에가서 7년간 복무하기로 자원했다. 루소는 당시 정말 잘되는 일하나 없는 잔인한 운명의 덫에 걸려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인생에서 극심한 고통과
새로운 희망은 동시에 찾아오는 걸까?
그는 이곳에서 미술과 마주하게 된다.
군에서 심심풀이로 그리기 시작한 그림에 빠져들게 된다. 덕분에 화가의 꿈도 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던 탓에 전업 화가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취업에도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병에 걸린 아내와 7명의 아이들을 부양해야 해서 매주 60시간 이상 일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루소는 '일요일의 화가'라고도 불렸다. 평일엔 아예 붓을 들지도 못하다가, 일요일에만 시간을 쪼개 그림을 그리는 그를 주변 화가들이 조롱한 것이다. 돈도, 시간도 없었던 탓에 루소는 모든 화가에게 있었던 미술 스승도 아예 두지 못했다.
엄혹한 화단과 야생에서 그저 혼자 그리고 또 그렸다.
계속되는 조롱에 그는 슬픈 거짓말도 해야 했다. 사람들이 작품속 원시 정글을 어디서 봤냐고 물어보면, 그는 주로 멕시코를 언급했다. 군대에서 멕시코 파병을 간 적이 있었고,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실제 한 번도 프랑스를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생계를 어렵게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에 갈 수 없었다. 그가 정글을 자주 그렸던 이유는 식물원에 가서 이국적인 식물들을 보고 영감을 받은 덕분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상상을 더해 정글을 완성했다.
어떠한가?
사막에서의 어느 밤,
먼 길올 걸어 오느라 피곤했던 집시는 지팡이를 쥔 채 만돌린과 함께 달빛올 이불 삼아 고운 모래 위에 누워 잠이 들었다. 이 때 어둠을 헤치고 어디선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사자 한 마리. 낯선 집시의 존재가 신기한 듯 바라보는 사자Lion,
루소는 이 작품에 ‘아무리 사나운 육식동물이라도 지쳐 잠든 먹이를 덮치는 것을 망설인다’라는 부제를 붙였다.
어떠한가?
삶의 말년에 이르러서야 활짝 웃으며 자신과 작품을 자신 있게 소개하고 뽐낼 수 있었던 앙리 루소,
그의 삶 전체가 애잔하면서도 대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루소는 어떤 굴욕과 비난에도 자신만의 신념과 확신을 지켰기에, 후대인 우리들에게 사랑받는 화가로 남은 것은 아닐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 일에 평생을 바칠 수 있는가?
그 일에 집념과 끈기로 이루어낼 수 있다면, 이미 당신은 사랑받기에 충분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삶이 예술로 변모하는
그 때의 시간표는 모두가 다르겠지만,
사랑하고 사랑받는 그 때일 것이다.
낮은 뜨겁게 파랗고, 밤은 차갑게 까맣다. 눈길이 닿는 곳은 거침없이 텅 비어있고, 발길 닿는 곳은 길 없이 끝없다. 사막은 침묵하는 공간에 멈춰진 시간이다. 그 한가운데 서있으면 모래든 산이든 달이든 물이든 심지어 사자조차 모두 고요가 되고 사막이 된다.
그녀는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 멈췄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 더는 갈 수 없어 다다른 그곳에 주저앉는다. 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주저앉아 잠드는 대신 그녀의 악기를 연주한다. 아름다운 선율이다. 그녀의 음악은 거칠 것 없는 시공간을 가르며 곧장 날아와 바람을 가른다. 메마름을 적시고 지친 어깨를 다독이고 존재를 일깨운다. 가슴이 먹먹하다.
사막에는 고요한 잡음들이 침묵 속에 배회한다.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시공이면서도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는 시공이다. 그녀의 음악은 공간을 채우고 시간을 흐르게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세상 모든 것이 되게 한다. 어제까지는 모든 것은 사막이었다. 오늘 그녀가 사막을 일깨워, 산이고 물이고 달이고 사자이게 한다. 그녀로 인해 그는 사자가 된다.
그녀는 사막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소리를 내는 존재였고, 자신의 빛깔을 가진 존재였다. 그녀의 음악은 메마른 모래에 스며든 촉촉한 물 기운을 한곳에 불러 모아 물방울이 맺게 한다. 음악이 만든 파장은 바람을 가르고 바람은 모래에 굴곡을 만든다. 그 높낮이의 차이가 산이 되고 샘이 된다. 물방울은 샘에 고이고, 어느새 그녀가 있는 그곳은 오아시스가 된다. 하얀 달은 까만 밤에 그녀를 볼 수 있는 약하지만, 충분한 빛을 준다. 그녀가 만든 세상은 그녀까지 포함해서 사자의 세상이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자는 그를 깨운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어머니이자 연인이다. 가까이 갈 수는 없다. 멀리서 지켜볼 뿐이다. 그녀는 유일했다. 메마르고 텅 빈 사막은 공포이자 위안이다. 마지막일 수 있다는 공포와 아무도 해칠 수 없다는 안도감이 함께 온다. 사자의 존재는 그녀에게 위협이다. 다가갈 수 없다. 그녀는 그녀가 변화시킨 사막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녀는 그저 무아지경에서 연주를 계속한다. 음악은 멈출 수 없다. 그녀는 음악이 멈추면 그게 끝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이 흐르는 한은 그녀는 살아 있다. 아직 삶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사자는 그녀의 눈앞에 설 수 없다. 사막의 사자는 그녀의 삶이 이미 끝났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막의 사자는 사막의 그녀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사자는 다가가지 못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막에서 집시는 사자를 만났다. 그럴 수도 있겠다.
엄밀히 보자면 그녀는 제삼자일 뿐이다. 꿈을 꾸는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듯, 꿈속에서 마지막 연주를 하는 자신과 자신을 바라보는 사자를 바라볼 뿐이다. 사자는 스스로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지만, 그녀는 애초에 그들과 소통이 차단되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녀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 사이 어딘가를 어정쩡하게 서성인다.
꿈 밖에서 그녀는 슬프게도 사자를 사랑한다. 꿈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이상하고 기괴하고 결코 현실일 수 없는 것조차도 꿈속에서는 그럴 수 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본다. 그녀 생애 마지막 연주가 일으킨 사막의 변화와 모래 속에서 깨어난 사막 사자의 한발 물러선 사랑, 그리고 그녀 자신의 다가가고 싶은 사랑.
사자는 절대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잠들지 않는다면.
그녀는 결코 사자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그녀가 그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녀가 이미 잠들었다는 것이다. 꿈속에서 계속 연주하고 있는 그녀는 이미 잠든 것이다. 현실을 깨닫자마자 꿈속의 그녀도 한계에 이른다. 그녀도 잠이 든다. 긴 여정을 끝내고 이제 기나긴 휴식의 시간이다. 음악은 멈췄지만, 그녀는 계속 거기 있다. 사자는 드디어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간다. 사자는 그녀의 잠든 모습을 바라본다. 그녀의 얼굴은 음악이 사라진 사막만큼이나 고요하다.
사막에서 사자와 집시는 서로 사랑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이것은 꿈이다. 꿈에서 깨지만 않으면, 영원히 계속될 수도 있겠다. 영원히 잠든다면 그것은 꿈일까, 죽음일까? 눈을 떴을 때 마주할 세상은 텅 빈 사막일까, 불가사의한 사자일까? 지금 깨어나고 싶은가, 계속 꿈을 꾸고 싶은가?
그녀는 선택했다. 사자와 그녀는 짧은 순간 서로 마주하고 사랑을 확인했다. 사랑의 시작이자 끝이다. 집시와 사자는 한 줌 모래가 되어 다시 사막으로 돌아갔다.
바람이 불면 그녀의 만돌린만이 그들의 사랑을 아련히 연주하고 샘에는 눈물이 고이고 달빛은 그들을 기억한다.
그 이후를 보고 있는 나는 누구일까? 그럴 수 있을까?
사자도 집시도 홀로 선 생이다. 운명을 끌어안고 살아야할 생의 한 복판에서 체념한 듯 그는 생을 잠시 내려 놓는다. 사자도 역시 야성을 잃은 채 커다란 눈망울을 하고 마치 골든 리투리버 개나 돌봐야 하는 가족처럼 집시를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