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문세족 출신이라 벼슬생활도 과거가 아닌 음서로 시작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정치 감각이 뛰어나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공민왕 대에는 원의 침공을 막는 데 참모격 역할을 하며 공을 세우기도 했으며, 이후 신돈의 신임을 얻어 개혁정책의 실무 책임을 맡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총사령관의 직위에 있으면서 이성계 같은 무장을 통솔하기도 했고. 그러나 공민왕 사후 권신으로 변모하였다. 공민왕에게서 우왕의 후사를 부탁받았다고 하며, 공민왕 사후 시해사건을 밝혀내고, 명덕태후의 반대를 물리치고 우왕을 옹립하는데 성공하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권력을 쥔 이인임은 최영을 비롯한 군부를 능란하게 조종하고, 왕실 인사들과 경복흥 등의 외척들을 견제, 약화시켜면서 독재적 정치를 펼쳤다. 이인임 집권 기간 동안 이성계는 이인임 일파인 지윤의 딸과 장남(훗날의 진안대군 이방우)의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지위와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인임과 그 일파는 전국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수탈하고 양민을 노비로 삼아, 산과 강을 경계로 하는 봉건영주 수준의 토지와 노비를 보유했고, 이로 인해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이런 수탈 못지않게, 명나라에 불안감을 느끼고 친원정책을 피면서 외교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명에서 온 사신이 불쾌한 듯하자 명 사신에게 자객을 보내 살해하고 북원과 통교한 것, 이로 인해 내부에서 친명사대를 외치는 신진사대부들에게 탄핵을 받았으나, 정도전, 정몽주 등을 유배보내고, 염흥방은 자기 파로 회유하였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국고는 비었으며, 왜구 침탈에도 군대는 제대로 통솔되지 않은 채 원의 제도와 재정부족에서 비롯된 장군들의 사병화가 지속, 심화되고 있었다. 왜구는 최영과 이성계의 활약으로 물리칠 수 있었으나 황폐해진 나라는 이인임 일파의 수탈로 인해 병들어가고 있었다.
우왕이 초기에 이런 난행에 격노하여 권신이던 지윤과 통정하던 유모 장씨를 통해 지윤을 포섭하여 이인임 일파를 숙청하려 했으나 어린 왕과 권신 지윤을 믿지 못한 최영이 이인임의 편을 들면서 실패하고 비뚤어졌고, 이인임 일파에 의해 토지를 빼앗긴 관리가 옥사하면서 최영이 변심, 우왕과 이성계와 연합해 이인임 일파를 숙청하게 된다. 다만 다 살해되는 가운데도 이인임은 목숨을 건져 유배가는 선에서 그쳤으며, 훗날 위화도 회군 후 조민수가 이인임을 복권시켜 이성계와 맞서려 했으나 그때 사망한다.
친척으로 유명한 문장가였던 도은 이숭인이 있었으며, 친척들을 통해 신흥 사대부 집안이나 이성계 집안과도 통혼하는 등 신진 세력과 연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의 남편 흥안군 이제도 성주 이씨로 이인임의 친척이었다. 성주 이씨 자체도 고려말에 떠오른 집안이기도 했으며 후손들이 조선에서 관직에 오르기도 했다.
이성계를 경계하기도 했다. 평소에 최영에게도 "이성계는 왕이 되려는 사람이다"라고 끊임없이 말했을 정도. 물론 이성계를 아꼈던 최영은 이인임이 자신과 이성계를 이간질시키려는 것으로 알고 한 귀로 흘러버렸지만 뒷날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야심을 드러내자 이 때 이르러 "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았구나!"라고 탄식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노회한 정객답게 사람 보는 눈이 꽤 뛰어나긴 했었던 모양이다. 아예 고려사 열전에 '자기 일당을 요직에 심기 위해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니 문객들이 그 밑에 가득 몰려들어 각자 자신이 가장 후대받는다고 여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람을 다루는 재주는 당대 정치가들중 최고 수준이었던듯.
최영을 숙청하자는 자파의 주장을 무시했는데, 이는 사실상 보수파이자 정치적으로 둔하던 최영의 무력이 자신의 권력을 지탱하는 축이었으며, 최영을 자파로 두는데 자신이 있었기에 그랬다고 여겨진다. 실제 최영이 변심하고서야 이인임 정권이 무너질 수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가족까지 주륙하는 가운데에서도 최영은 끝내 이인임을 죽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