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3월 16일, 이 날은 내가 특박휴가를 마치고 복무부대(일명 ‘자대’)로 복귀하던 날이다. ‘전쟁과 반전쟁’이라는 앨빈 토틀러의 책 맨 앞장 빈 페이지에는 ‘검토필 95년 3월 2일 승인번호 95-B-188'이라는 스탬프가 찍혀져 있다.
나는 작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군대에서 읽었다. 대학 1학년때 학회 사무실에 가면 항상 꽂혀있던 책 중에 태백산맥이 있었는데 인기가 많아서인지 없어서인지 늘 1권, 2권, 3권만이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내가 게을러서인지 늘 1권을 읽다가 자의반 타의반 중도에 그만두게 되었고 결국 군복무 중에 책 10권을 모두 읽게 되었다.
하급자(보통 ‘쫄따구’라고 하는데 가급적 쓰지 않으려 한다. 그렇긴 해도 일상에서는 그대로 쫄따구라고 쓰고 있다) 때에는 시간도 없긴 했지만 있다 해도 소설책을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나 역시 당시 일반적인 군대 분위기대로 상병쯤이 돼서야 여가시간에 책을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 아마도 ‘전쟁과 반전쟁’에 찍힌 날짜를 보니 병장 3호봉쯤이고 이른바 말년 병장인 셈이다. 내 기억에는 위 책을 귀대하는 길에 갖고 들어온 같은 무렵쯤 ‘태백산맥’을 사면서 부지런히 읽을 때였고 위병소 검문시 책을 무조건 맡겼다가 중대에서 다시 받아 읽었던 것 같다.
문제는 어느 날인가 단본부(필자는 연대급 수준의 야전공병단에서 근무하였다) 중대에서 연락이 왔다며 정작과장(작전참모)이 호출한다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 올라가보니 정작과장(계급은 대위)이 태백산맥이 금지도서라고 하며 책을 돌려줄 수 없다고 하였고 나에게는 전혀 뜻밖이었다.
당시 정작과장이 말이 지금도 뚜렷하다. “태백산맥은 이념서적으로 군에서 금지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은 대학에서도 읽은 적이 있고 밖에서는 베스트셀러입니다. 누구나 다 읽습니다”
“네 말은 다 안다. 내가 보기에 이 책 7,8,9권은 빨치산 투쟁기다......(더 자세한 이야기는 기억이 안 난다)”, 내가 뚜렷한 반박을 못하자,
“글을 쓰는 작가가 어떤 상태에서 글을 썼는지도 생각해 봐라. 이것을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작가가 배고플 때 썼는지, 혹 옥중에서 썼는지, 유명작가가 되었을 때 썼는지, 어떤 위치나 입장에서 썼는지를 생각해라.”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는 대화는 이것이 전부다. 정작과장의 이 말은 그때까지의 내 독서의 태도와 관점을 크게 넓혔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깊었고 그래서 내가 지금껏 기억하고 있는 것일 게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 개인적인 독서 방향의 변모가 있게 된 경위가 아니라(물론 기회가 되면 작가 조정래의 저작 전반에 대한 서평에서 자세히 이야기할 예정이다), 태백산맥이 시중의 베스트셀러이자 지금은 스테디셀러 의 자리까지 잡은 2008년 이 시점에서, 우리가 다시 군대에서 몇몇 서적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한데 따른 몇몇 광경을 목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휴전이 아닌 종전체제가 왔다고 하지만 엄연히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총칼을 겨누고 있는 남북한 분단 현실에서, 우리 군의 항시적인 전쟁억지력과 평화체제수호의 역할과 사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분단체제의 극복은 강력한 국방을 바탕으로 한 군사적 우위가 기본적인 전제임은 크게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첨단무기와 튼튼한 경제력만이 전부일까?
그렇다고 바로 답하기 전에 또는 긍정의 대답을 한 직후에 또 다른 중요한 필수요건이 무엇인지 살핀다면 당신은 한층 수준높은 군사전문가라고 해 주고 싶다.
전쟁은 그리고 전쟁억지력은 물리력으로만 승부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군만마라도 군사의 사기가 땅에 있다면 오합지졸이 될 수 있고 단 몇 백의 숫자라도 몇 만의 군사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은 군대를 이루는 군사의 정신전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전쟁에서 최강전력을 자랑하는 미군이 수많은 사상자를 낸 사실은 비교적 알려져 있긴 하지만 이런 원인에는 종국적 파멸을 초래하는 최악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전쟁의 명분이 뚜렷하지 못하여 많은 탈영과 전쟁후유증을 겪은 병사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만큼 군인 개개인의 정신전력이 탄탄히 뒷받침되어야 최악의 폭력인 전쟁이 제대로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 분단체제를 새롭게 이해하고 한반도 주변정세를 둘러싼 각국의 이해가 맞물린 국제적, 지정학적 판세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거의 전부가 고등교육을 이수하고 나아가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군의 통솔력과 지휘체계를 이끌 차세대 장교들의 수준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군대의 수준은 매우 상당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군사독재 시절 검열의 시대가 지나가고 자유로운 언론․출판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온 민주화 이후 세대의 군대는 정말 많이 달라졌다. 병영 문화가 획기적으로 달라지고 시설도 많이 개선되었지만 이와 더불어 각 사병들 개인의 깨어있는 사고와 이념에 대해 매우 탄력적인 태도에 바탕한 합리적이고 유연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온 탓도 크다고 하겠다.
군인도 군대 내의 한 구성원이기 이전에 국민이다. 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이 특별한 사정이 없이 군복무의 특수성과 명령체계의 확립의 이유만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일반인과 다르다는 이른바 ‘특별권력관계’이론도 상당히 수정된지 오래다.
현역 군법무관 7명이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에 대하여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위 군법무관들의 헌법소원 제기를 지지하며, 불온서적으로 지정된 서적을 잠깐 살펴보자.
위 책들은 모두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고 꽤 많이 읽혀지고 있는 책들이 상당수 있는데도 북한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반자본주의라는 이유로 선정한 대목에서는 잘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여러분 중 위 책들을 읽고 있다면 당신이 군인이 아닌 점을 다행으로 생각하라. 하지만 당신은 우리 군이 염려하는 나약한 국방의식에 한몫 거들고 있다는 것도 생각하라.
13년전 태백산맥이 금지도서라서 읽을 수 없다는 군의 입장이 한치 앞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 다소 산만하고 부족한 글을 올려본다.
첫댓글 아니면 그분들의 독서에 대한 질이 많이 부족했다던지.. 그렇게도 생각이 되네요.씁쓸...
저거 다 읽어봐야하는데 ,,머리 지진나네요 요즘